마샬 맥루한 미디어의 이해 pdf - masyal maegluhan midieoui ihae pdf

디지털 혁명이 진행되고 인터넷이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파고들면서 '맥루한 이해(Understanding McLuhan)'의 붐이 일고 있다. 특히 마샬 맥루한의 주저 [미디어의 이해(Understanding Media)]는 이 책이 처음 발간된 1964년보다 1997년 오늘의 현실에 훨씬 큰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네트의 시대, 디지털 시대를 해명하기 위한 실마리를 [미디어의 이해]가 던져주기 때문이다.

"책이 활판 인쇄술 이전으로 돌아가 제작자가 소비자를 겸한 시대로 복귀할 것이며 일정한 주제로 순서를 찾아 구성되는 선형적인 책은 차츰 사라질 것"이라는 맥루한의 예언이 네트의 하이퍼텍스트(hypertext)를 통해 현실로 나타나고, '공간의 소멸'과 '지구촌(Global Village)'에 대한 그의 유토피아적 신비주의가 인터넷을 통해 구현되며, '우리는 도구를 만들었지만 앞으로는 도구가 우리를 만들 것이다'라는 경구가 사실로 드러나는 오늘의 현실 자체가 맥루한 르네상스를 가져온 직접적 원인일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듯 맥루한의 부활이 도처에서 이뤄지고 있다. 맥루한은 1980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맥루한의 중추신경은 전자적으로 확장되어 네티즌 잡지 '와이어드(Wired)'의 후원자로 되살아났으며, 곳곳에서 그의 사상을 네트의 시대에 되살리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94년에는 네트 시대에 그의 저작이 지닌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려는 의도로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 출판부에서 [미디어의 이해]를 재발간한 바 있다. 그리고 커뮤니케이션북스에서는 미디어의 이해를 비롯해, 구텐베르크의 은하계, 미디어는 맛사지다 등 맥루한의 책을 계속 출간하고 있다.

그러나 죽은 맥루한을 온전하게 되살리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맥루한의 경구들을 인용하는 학자들은 더러 있지만 맥루한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미디어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만큼이나 드문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미디어의 이해』맥루한의「미디어의 이해」는 최근 다시 조명되고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매스디디어의 계속되는 발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도구를 만들었지만 앞으로는 도구가 우리를 만들 것이다’는 기술결정론의 확산에 따른 것이다. 그 결과 그는 1980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네티즌 잡지「와이어드」(Wired)는 그를 계승하는 흐름은 멈추지 않고 있다.

 

[원문 읽기]

독서 가이드 「미디어의 이해」는 상당히 qd대할 분만 아니라 논리보다는 구체적인 현상들을 열거하면서 ‘이미지 모자이크’처럼 주장이 표현된다. 주장의 예들은 상당히 평이하지만, 그것들을 전체적 맥락 속에서는 논리적으로 정리하기란 상당히 쉽지 않다.

따라서 요약문은 ‘숲’ 전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취지에서 의도적으로 배치되었다. 이 요약문을 안내 삼아 제시된 사례에 적용하면서 읽는 주체적 독해가 바람직할 것이다.

 

[서문]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장은 전자시대라는 관점에서 볼 때 현대에 이르러 완전히 새로운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점을 다룬다. ⒜ 테크놀로지가 발전하면서 일련의 전체적인 새로운 환경을 창조하게 된다. 오늘날 테크놀로지와 그것이 환경을 조성하는 과정은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고 강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새롭게 등장하는) 한 가지 테크놀로지를 파악하게 되면 곧 그 뒤에 생성될(사회 전체적)환경이 무엇일지를 알 수 있게 된다. 테크놀로진,s 테크놀로지의 정신적. 사회적 결과를 우리가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예술적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맥루한의 주장을 압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명제다. 철도가 갖는 온갖 사회 환경에 초래한 변화- 새로운 형태의 도시, 일 , 여가 등의 창출과 같은- 가 있듯이 미디어기술 자체가 불러온 변화가 있다는 뜻이다.

 

새롭게 등장하는 미디어기술 그 자체가 곧 하나의 새로운 메시지다.

 

우리의 문화는 모든 사물을 관리하기 위해 이들을 분할하고 구분하는 데 숙달되어 있으므로 이제 실제로 ‘미디어가 메시지다’라는 것을 납득하게 되면 다소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의 의미는 간단하다. ⒝ 그것은 모든 미디어가 우리 자신의 확장(우리의 감각기관의 확장)이며, 이 미디어가 개인 및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우리 하나하나의 확장, 바꾸어 말하자면 테크놀로지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도입되는 새로운 척도로서(다시) 측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기시대에는 우리의 중추신경이 기술에 의해 우리를 인류전체 속에 포함되도록 확장된 동시에 전 인류가 우리 자신 속에 병합되도록 확장된 동시에 전 인류가 우리 자신 속에 병합되도록 확장된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의 결과에 필연적으로 깊숙이 관여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이제까지 글을 배운 서구인이 취해온 전형적인 태도인 초연한 듯하고 어딘지 유리된 듯이 보이는 태도는 더 이상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조리극2) 은 자신의 행동에 관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행동하지 않을 수 없는 현대 서구인이 모순을 극대화하고 있다. 지난 3천 여 년 간 전문가와 전문화는 폭발적으로 증가해왔다. 동시에 우리 몸의 기술적인 확장은 소외를 낳았다. 그러나 이제 세계는 극적인 반전에 의해 압축되고 있다. 전기적으로 축소됨에 따라 이제 지구는 단지 하나의 촌락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전기의 빠른 속도는 온갖 사회적. 정치적 기능을 단숨에 하나로 통합시켜버림으로써 책임에 대한 의식을 극도로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흑인이나 청소년 같은 소외된 계층의 사회적 지위를 바꾼 것도 바로 이러한 통합적작용이었다. 이들은 더 이상 정치적인 의미에서 특수계층이 아니며 사회로부터 분리되지도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기존의 과정을 증폭시키거나 촉진하는 디자인이나 패턴의 심리적. 사회적 결과이다. 왜냐 하면 ⒞ 모든 매체와 테크놀로지는 우리 삶의 규모, 속도 혹은 유형을 변화시키며 그것이 바로 매체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철도가 사회에서 유입한 것은 이동이나 수송, 혹은 바퀴나 길이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철도는 예전부터 존재해온 인간의 기능을 촉진하여 그 규모를 확장시킴으로써 전혀 새로운 형태의 도시와 일과 여가를 창출했다. 철도가 가져온 변화는 환경과 무관하며- 열대지방이건 한대지방이건 상관

없다- 철도라는 매체가 운반하는 화물이나 내용과도 전혀 관계가 없다.

 

핫미디어와 쿨미디어

 

⒟ 라디오와 같은 핫미디어와 전화와 같은 쿨미디어, 혹은 영화와 같은 핫미디어와 텔레비전과 같은 쿨미디어로 이렇게 구분되는 데는 기본원리가 있다. 핫미디어란 단일감각을 높은 ‘정세도’로까지 확장하는 것이다. 높은 정세도라는 것은 자료가 충족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를테면 사진은 시각적으로 ‘높은 정세도’를 갖는다. 만화는 극히 적은 시각적 정보가 제시되는 데 지나지 않으므로 ‘낮은 정세도’를 갖는다. 전화는 귀에 주어지는 정보량이 적으므로 쿨미디어, 혹은 낮은 정세도의 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는 듣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적고, 듣는 쪽에서 상당량을 메워가야 하므로 낮은 정세도에 있는 쿨미디어다. 그러나 핫미디어 쪽이 참가하는 정도가 낮고, 쿨미디어는 참가 혹은 (스스로) 보완하는 정도가 높다.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거니와, 라디오와 같은 핫미디어는 이용하는 사람에게 전화와 같은 쿨미디어와는 다른 효과를 주게 된다.

핫과 쿨이라는, 미디어 특유의 말로서 표현한다면 후진국은 쿨이고 선진국은 핫이다. 한편 ‘도시인’은 핫이고 시골사람은 쿨이다. 그러나 전기시대가 되어 행동의 양식과 여러 가지 가치가 역전되었다는 관점에서(전체적인 발전경향을 주목하면서) 말한다면, 과거의 기계시대는 핫이고 우리의 텔레비전시대는 쿨이다.(...... 완성시키기 위해 훨씬 깊이 참여하게 된다.

 

*쿨미디어는 수용자의 참여도가 높고, 핫미디어는 낮다.

 

인간의 감각기관의 연장으로서 미디어, 역으로 미디어의 종류 변화가 인간에 미치는 병동과 사회적 영향력

어느 감각 혹은 어느 기능이 기술 작용으로 확장되고 절단되느냐에 따라 인간의 감각의 균형이 어느 정도 회복될 것이냐 예측이 가능하다. 문자 문화적 혹은 시각적 인간에 비하여 라디오는 그들의 부족적(部族的) 기억을 각성시킨다. 어떤 발명이나 테크놀로지라도 모두 우리 육체적 확장, 또는 절단에 다름 아니므로,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 새로운 비율관계와 새로운 균형을 요구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텔레비전 영상이 불러일으킨 새로운 감각비율관계와 감각‘폐쇄’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감각생활을 확장하고 촉진하는 모든 미디어는 어느 것이나 감각의 모든 영역에 대하여 곧 영향을 미친다. 두 가지 미디어의 이종교배, 혹은 만남은, 거기서 새로운 형태가 탄생하는 진실과 계시의 순간이다. 두 가지 미디어 사이의 균형관계는 우리를 두 가지 형태의 경계선에 세우고, 우리를 나르시스의 마취상태에서 깨어나게 한다. 미디어와 만나는 순간은 기존의 미디어에 의하여 무감각하게 되고, 마비된 감각이 자유를 얻어 해방되는 시간이다.

 

*새로운 미디어는 기존의 미디어가 무디게 만든 우리의 감각을 깨운다.

 

‘ 파악‘ 혹은 ’이해‘라는 말 자체는 하나 이상의 감각을 통하여 많은 면을 다루고 느끼는 과정을 의미한다. ’접촉‘은 (단순히) 피부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감각의 상호작용이며, ’접촉을 유지한다‘ 혹은’접촉한다‘는 것은 여러 감각의 마주침이다. 현재 여러 감각 사이의 비율을 조정하여 의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상황에 근접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은 차바퀴가 ’회전하는‘ 발의 연장인 것처럼 당연히 우리 자신의 의식의 확장이 될 것이다. ⒠ 도시가 할 일이 인간을 옛날의 유목시대의 조상보다도 훨씬 적합한 상태로 다시 만들거나 혹은 옮겨놓는 것이라면, 현재 우리가 모든 생활을 정보라는 형태로 바꾸어 옮긴다는 것은 지구 전체와 모든 인류가족 위에 단일의식의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이 되지 않을까?

 

구텐베르크(활자문화) 은하계와 멀티미디어 은하계

 

화폐, 바퀴, 글자, 그 밖의 어떠한 미디어도 교환과 정보의 전문적 분야를 촉진하고 부족적 구조를 세분화한다. 역으로 전기가 그런 것처럼, 기술발달의 속도가 더욱 빨라지면 긴밀한 상호연계라고 하는 이전의 부족적 패턴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유럽에서는 라디오가 보급된 후부터 그렇게 되었으며, 미국에서는 텔레비전에 의해 현재 그렇게 되려 하고 있다. 전문적이고 분화적인 테크놀로지는 부족을 비부족화한다. 반면 비전문적이고 통합적인 전기 테크놀로지는 다시금 부족을 구성한다.

⒡ 심리 및 사회조직의 보편적 형태로서 결합된 선형(線型)연속- 가령 신문의 행을 따라 순차적으로 사고하는 것- 을 완성한 것은 알파벳 문화뿐이다. 모든 종류의 경험을 각각 획일적 단위로 나누어서 보다 빨리 변화할 수 있는 형태(응용지식)를 낳은 것이 인간과 자연 위에 군림할 수 있었던 서구의 힘의 비밀이다. 서구의 공업화에 관한 계획이 무의식적으로 극히 호전적안 것이 되고, 서구의 군사계획이 극히 공업적으로 된 것은 아 때문이다. 이런 과정은 그리스와 로마시대에 이미 볼 수 있었는데, 인쇄기술의 발전이 갖다 준 획일성과 반보성이 이러한 현상을 가속화시켰다. 알파벳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시각을 확대하고 그것에 바탕을 두면서 문화의 획일성을 추진하는 것이므로, 문명은 문자 위에 구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표음문화는 인간이 어떤 행위를 할 경우, 그 감정과 정서를 억압해 버린다. 반응 없이 행위하고, 관여 없이 행동하는 것이 서구인의 특질인 것이다. 이것도 역시 (활자문화를 발명한) 구텐베르크의 선물인 것이다.

이에 비해 아이콘적 예술은 사람과 사물의 많은 순가, 상, 측면으로 이루어지는 전체포괄적인 이미지를 만들려고 눈을 사용한다. 그것은 전체적. 공감적이며 모든 감각을 참가시키는 것이다. 텔레비전 어린이는 문자문화와는 전적으로 대비되는 정신을 가지고 세계를 향하고 있다. 텔레비전 영상은 아이콘 이상으로 촉각의 확장이다.⒢ 텔레비전은 문자문화와 마주치는 곳에서 필연적으로 감각의 혼합을 촉진하고, 단편화되고 전문화되는 방향으로 일어나는(문자시대) 확장을 (완전히 상호융합 되어) 이음매 없는 경험의 그물로 바꿔낸다. 텔레비전의 10년간을 경험한 젊은이들은 강연한 일이지만 관여하고자 하는 깊은 충동을 지나고 있다. 텔레비전 어린이는 장차 무엇엔가 참가하려 하고 있으며 전문적인 ‘일’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역할’이며 사회에의 깊은 참여이다.

 

 

전기시대가 낳은 미래

 

전기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우리의 중추신경조직과 아주 비슷한 전지구적 규모의 네트워크가 확립된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도, 전기테크놀로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산업과 사회의 활동은 극도로 확장되고 다양화되어 하나의 통일된 모습을 형성하게 된다. 그것은 유기적 통일을 만들어내고, 또한 구텐베르크이 등장과 더불어 본격화된 기계시대를 종식시키는 속도 자체인 것이다. 이것은 또한 대중매체의 성격이기도 하다. 대중매체라는 것은 그 청중의 양적 규모가 크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그것에 관여하고 참여하기 때문에 매스미디어인 것이다. 이따금‘ 펜은 칼보다 강한’ 것으로 보였다 하더라도 문자화는 지식의 역할과 행동의 역할을 분리한다는 점에서 극도의 전문화된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전기와 자동화의 등장으로 단편화된 과정은 갑자기 인간적인 대화와 인간의 통일을 전면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느끼게 했다. 인간은 갑자기 지식채집 유목인이 된 것이다. ⒣ 인간은 일찍이 그 전례가 없었을 만큼 유목적이 되어 풍부한 정보를 얻고 단편적인 전문화로부터 해방되었으며 또한 전체적인 사회의 움직임에 관여하게 된 것이다. 왜냐 하면 전기의 등장으로 우리는 중추신경조직을 전지구적 규모로 확장하고, 모든 인간경험을 순간적으로 상호 관련시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문 이해]

⒜ 테크놀로지가 발전되면 일련의 전체적인 새로운 환경을 장조하게 된다. ‘은 입장에서 그는 무든 문화는 각 시대에 등장하는 ’지배적인 미디어 매체‘의 ’기술적 속성‘에 의해 좌우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미디어는 곧 메시지다‘는 명제로 압축적으로 제기한다. 각 시대가 의존하고 있는 주요 미디어의 ’속성’이 곧 그 시대의 문화(메시지)까지 규정한다는 것이다./⒝

 

감각 중심의 세계관

 

가령 그는 구텐베르크가 발견한 활자매체는 그 시대의 문화를 눈이 신문이나 책의 행을 따라가는 ‘시각 중심의 선형적(線形的) 문화’로 편협하게 제한시켰던 반면, 라디오. 텔레비전에서부터 시작된 새로운 전자미디어의 발전은 앞으로의 시대를 오감의 결합을 회복한 균형 잡힌 시대로 변화시킨다고 주장한다. 이런 그의 사상은 일반적으로 인간은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과 접촉하고 이를 통해 세상에 대한 관점을 획득하는데, 이 감각기관 중 하나가 손상을 입거나 또는 다시 회복하게 된다면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는감각 중심의 세계관에 입각해 있다. 가령 시각장애자의 경우, 그는 시각을 사용할 수 없기에 그의 문화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는 정상인과 획연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반대로 그가 개안수술을 받아서 어느 날 시각을 회복한다면, 그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은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백루한은 인간이 매 시대에 주로 사용하는 감각기관이 인간의 관점과 문화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라 주장한다.

 

이렇게 규정하게 되면, 앞에서 예를 든 맹인의 예에서의 시각의 존재 유무처럼, 미디어의 유형에 따라 인간의 문화 또한 확연히 구별되게 된다./⒞

“핫미디어와 쿨미디어”에서 맥루한은 최근 등장하는 미디어의 새로운 형태들이 정보의‘정세도’(精細度-정밀하고 세밀한 정도)와 ‘참여도’를 ‘핫‘에서’쿨‘로 바꾸고 있음을 다루면서 미디어를 두 부류로 분류한다./⒟

정세도란 원래 사진 용어로서 사진에 나타난 영상의 선명도를 뜻하는데, 맥루한은 그것을‘메시지의 충실성(밀도)으로 재해석한다. 밀도가 높으면 미디어(매체) 핫이다. 또한 그가 말하는 참여도는 수용자가 메시지의 의미를 재구성하면서 투입하는 ’상상력 정도‘, 그리고 ’메시지 형성에 참여하는 정도‘를 뜻한다. 이 참여도가 높으면 미디어는 쿨이다. 가령 책자는 정보를 아주 상세하게 체계적으로 전달하므로 메시지 전달의 밀도(충실도)가 높고, 독자에게 정보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므로 ’독자의 참여도‘가 낮은 ‘핫’미디어다. 반면 만화는 정보를 상대적으로 산만하고 비체계적으로 전달하므로 메시지 전달도가 낮고, 독자가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는 여지가 높으므로 ‘독자의 참여도’가 ‘쿨’미디어다. 그런데 쿨과 핫을 구분하는 기본원칙정세도와 참여도의 기준은 그에게는 상대적이다. 맥루한은 미디어의 성격을 비교할 때 항상 비슷한 유형의 미디어를 서로 대비시켜 핫과 쿨로 양분한다. 가령 문자 중에서도 문자의 뜻을 상상할 수 잇기에 쿨하고, 알파벳과 같은 표음문자는 상상없이 그 뜻을 즉각 기계적으로 수용해야 하므로 핫이다고 그는 구별한다. 또한 그에게 문명국은 핫이고 미개국은 쿨하며, 도시사람은 핫하고 농촌 사람은 쿨하며, 서구문명은 핫이고 동양문명은 쿨하다.

 

인간성 회복에 기여할 매스미디어

 

“인간의 감각기관의 연장으로 미디어, 역으로 미디어의 종류 변화가 인간에 미치는 변동과 사회적 영향력” 부분에서 맥루한은 서로 절단된 감각들이 유기적으로 융합함으로써 전기 미디어는 인류를 더 나은 상태로 밀어가는 강력한 수단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어떤 미디어기 순전히 시각적이면서 나머지 감각들은 배제하는 것이라면, 인간은 청각과 촉각, 미각 등의 다른 감각들 없이 오직 시각만으로 일면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접촉하게 되면서 편협해진다고 맥루한은 말한다. “인간은 오감이라는 전체 감각기관의‘유기적 종합’을 통해서만 인간 본연의 성격을 획득하게 되며, 따라서 시각매체 중심의 기존 출판 미디어는 인간사회를 왜곡시키는 반면, 다양한 미디어들을 서로 종합시키고 과거 출판미디어가 배제했던 청각 등을 다시 도입하는 ”현대 매스미디어는 인간 오감을 유기적으로 종합함으로써 다시 인간성의 회복에 기여할 것이다.”3) 는 것이 그의 요지였다. 이처럼 그에게 ‘텔레비전과 같은 전자미디어와 나아가 여러 멀티미디어의 등장은 인간성을 회복시켜주는 일종의 구세주’처럼 간주된다. 결국 맥루한은 인간의 역사와 진보를 ‘미디어의 기술적 성격’에 따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구텐베르크(활자문화) 은하계와 멀티미디어 은하계”에서 그는 활자미디어와 전자미디어를 비교하면서, 이런 서로 다른 종류의 미디어에 기반한 두 사회의 특징을 규정하고자 한다. 그리고 전기미디어가 낳을 특징의 핵심을 정의하고자 한다. 우선 구텐베르크 활자미디어가 낳은 사회적 효과를 다룬다./⒡

여기서 그는 알파벳처럼 핫미디어가 시각적으로 고도로 추상화된 것이 서구의 인쇄문자라고 규정하면서, 인쇄술이 발명되면서부터 지배적인 지위를 획득하게 된 신문이나 책과 같은 활자매체의 시대의 지식은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전문가적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점도 지적한다.

그러나 전기미디어의 출현으로, 특히 텔레비전의 발명. 보급으로 핫 문화는 쿨한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텔레비전처럼 시각만이 아니라 청각이나 몸짓(가령 가수의 춤을 따라 몸을 흔드는 것)을 비롯한 여러 감각이 함께 참여하도록 요구하고 수용자의 상상력을 동원하게 만드는 미디어에 오래 접촉하게 되면 ‘복수감각형’ 인간이 지배적이었던 과거의 전인적 문화를 회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 서구인이 동양적인 요소에 향수를 느끼고 원시적인 음악에 영향을 받고 전위적인 피카소의 그림이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등 서구문명의 변화의 소리가 높아지는 것은 인쇄문명의 퇴조와 더불어 전자문명의 출현이 가져온 현상이라고 그는 주장한다.다른 한편으로, 그는 텔레비전이나 멀티미디어들은 주로 ‘쿨‘한 미디어 매체이므로, 이것은 사람들의 자주적 참여와 창조적이고 상상적인 사고를 극대화시킬 것이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제 정보와 지식을 일방적으로 주입받는 상태에서 벗어나 인간들이 스스로 정보를 해석하고 자주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어떤 메시지를 받아들일 때 받아들이는 사람이 스스로 그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는 여지가 큰 쿨미디어의 확대를 통해 수용자의 주체적 참여서응 커질 것이다./ ⒢

 

부족사회로 돌아가는 인류

 

이상의 낙관적인 견해들을 종합하면서 그가 ‘전기시대가 낳을 미래’에서 제시하는 인류의 미래는‘재부족화’이다./⒣

여기서 ‘부족적’이라는 개념은 ‘시각. 청각. 촉각 등의 인간의 감각기관들이 분리되지 않은 채 하나로 종합되어 있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맥루한은 과거 원시시대의 인간이 그렇게 살았다는 측면에서 ‘부족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는 전기 문화시대는 TV나 영화와 같은 전자미디어. 멀티미디어를 통해 여러 감각기관들을 하나로 재집결시키고, 수용자의 주체적 참여도를 증진시킴으로써 인류문명은 자신이 그 동안 잃어왔던 것을 회복하면서 인간 본연의 자리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쟁점 파악

전자미디어 기술은 인류에게 행복을 약속 하는가

 

30여 년 전 맥루한이 전기기술에 입각한 새로운 현대미디어가 가져다 줄 낙관적인 미래라 예견했던 것들은 과연 현실화되고 있을까? 여러 지점에서 낙관적 예언과는 다른 현실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쇄술은 교양인을 만들었지만, 텔레비전은 교양인을 탈교양인으로 만드는 ‘바보상자‘이며, 읽기문화가 인간을 파편화시켰다고 하지만, 텔레비전은 인간을 더욱 파편화시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이버공간이 인간이 다양한 경험을 공유하면서 전인화되는 수단이라는 주장과는 달리 어쩌면 텔레비전은 이간체험을 더욱 피상적이고 진부하게 만들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우리는 시뮬레이션에 들어가기 위해서 역사를 탈출한 셈이다.”는 보드리야르4) 의 주장이 의미심장한 이유도 그것이다. 이는 맥루한의 미디어론을 비판적으로 해석할 필요도 있음을 보여준다.

 

맥루한의 한계

 

맥루한은 현대의 새로운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특진을 보여주는 데는 성공했을지도 몰라도, 이것이 새로운 문화적 단순조립품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까지는 충분히 다루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히려 ‘기술파시즘’에 대한 우려가지도 증폭되고 있다. 그러한 우려는 CNN, 폭스사 등의 다국적 거대 미디어기업들이 상업의 논리로 미디어의메시지를 채우고, 나아가서 거대 서구국가들의 문화들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현실을지적하고 있다. 켈레비전 등의 현대 미디어는 오히려 ‘상호의사소통’을 가로막고, 대중들은 과잉정보와 의미의 범람 속에서 극단적인 무관심과 침묵으로 빠져든다는 여러 지적들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비판은 주로 두 지점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그의 미디어 결정론적 시각에 대한 비판이다. 그의 미디어 결정론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단순히 발명된 미디어기술의 특성 정도로 간단하 치부해버릴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움베르토 에코5) 는 “미디어가 메시지라면, 우리가 할 일은 그저 도구의 지시에 복종하는 것뿐이다.”라고 비판했다. 맥루한의 주장처럼 미디어의 효과가 그것을 조종하거나 사용하는 사람과 무관하고 또한 어떤 통제 하에 놓여있는가와도 무관하다면, 우리는 더 이상 정치적. 문화적 논쟁을 할 필요가 없으며 단지 테크놀로지가 자체 논리대로 작동하도록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비판이다. 특히 현실에서는, 맥루한이 지적한 전자미디어 자체의 논리가 우리를 그가 말한 ‘재부족화’로 인도하지 못하고 있음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는 점에서 이런 비판은 상당히 고려해야 m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둘째의 비판은 그가 미디어를 지배하는 사람들의 불순한 영향력(가령 상업주의나 문화 파시즘적 위협)에 면죄부를 주고 있다는 비판이다. 가령 루이드 멈포드는 “맥루한은 미디어론을 통해 상업주의와 권력자의 미디어 지배를 정당화한 사람‘이라고 비판한다. 미디어가 낳은 모든 사회적 효과들을 단지 미디어기술 자체의 효과로 다룸으로써 맥루한의 주관적 의지와 무관하게 객관적으로는 미디어 뒤에 숨어서 통제하고 조종하는 자들을 감추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대안들을 상상하지 못하도록 봉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저들은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등의 미디어들과 정권, 거대한 자본이 서로 융합하고, 나아가서 미디어들이 단순히 정부나 거대기업들이 충복의 수준을 넘어서서 사회적으로 막강한 지배력을 형성해 나가는 위험성들을 맥루한이 경시하고 있다고 공격한다, 가령 윌리암스에 따르면, 텔레비전과 같은 미디어기술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비배하는 특정세력이 그들의 특정한 요구(가령 대중의 여론조작)를 달성하기 위해 고안해 발전시킨 장치라는 것이다.

 

기술과 사회를 분리시켜 이해할 수 없다.

 

결국 극단적 비판이든 온건한 비판이든 맥루한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기본관점은 미디어의 기술적 발전 자체가 단순히 기술적 요인만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총체적 사회과정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는 문회파시즘, 정보 불평등, 인간관계의 사이버화 등 전자미디어시대가 낳는 여러 난제들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에 대해 비판자들이든 적극적 지지자들이든 인장하는 측면은 분명히 있다. 그가 ‘미디어’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의하려 하고 역사적 상격을 부여하려한 최초의 학자였고, 전자미디어가 갓 출현하기 시작한 1960년대 중반 당시에 이 미디어 고유의 특징들과 이 새로운 미디어가 사회적으로 미칠 여러 파장에 대해 날카롭게 분석한 예언자라는 점이다. 그의 ‘미디어론’에 대해 주목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할 것이다. 전자미디어의 등장과 함께 지금 등장하고 있는 새로운 사회적 현상들(가령 사이버공간의 중요성 증대, 전지구적 연계의 성장, 유희와 놀이 문화의 증대, 어떤 문제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자신의 태도를 스스로 결정하려는 젊은 층의 성향 등)을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면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