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재수 실패 - uidae jaesu silpae

안녕하세요 2015년 겨울부터 간간이 오르비 눈팅하던 유저입니다.
무슨 실패수기를 쓰냐 하실 수도 있는데, 워낙 말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올해 초에 꼭 수능 잘치고 성공수기를 쓰자 했는데 이렇게라도 쓰고 싶어 쓰게 됐습니다.
같은 학교였던 친구, 후배 중에 제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있는 걸로 아는데 넘어가주세요^^~
수기라고 했지만 아마 일대기 양식이 될 것 같아요
공부 관련해서 얻어가야지 하시는 분들은 뒤로가기 하시는게 좋습니다
글도 무미건조하게 쓰는 편이고 별 내용이 없어서 노잼일수도 있슴다

바쁘신분은 —여기서부터— 라고한곳에서 읽으셔도 돼요
편의상 반말로 적게 되는 건 양해해주세요.

자랑까지 할 건 아니지만 고등학교 생활 시작은 굉장히 순탄했다.
수석입학에 3월 모의 전교3등, 1학기 내신 1.0을 찍고 서울대별거없겠다 라는 어린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2학기 영어시험에서 오류가 있던 문제를 시험 도중에 손들고 이상하다고 항의하다가 안 받아져서 답 두 개를 다 마킹하고(실제로 두 선지 모두 정답처리) 장렬히 전사하여 3등급 1등을 하는 기적을 낳으며 ‘사나이는 정시지’라는 생각을 가졌다.
2학년이 되면서 내신엔 관심이 없어서 수업시간엔 선생님이랑 장난치다 수업시작하면 내 공부하기 바빴고 학생회활동, 체육대회, 축제 등 여러 학교행사에 관심이 많았다.
3학년이 되면서 공부를 시작했고 9월모의 12212의 성적과 함께 ‘3문제만 실수 안했으면 올1? 쉽네?’라는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수능에서도 당연히 실수를 엄청나게 했고 다 풀고 시간이 남았던 생명에서 3을 띄우는 기념을 토하며 자존심 때문이라도 재수를 해야겠다라고 생각을 했다.

1월 달에는 참으로 만감이 교차했던 달인 것 같다.
성인이 됐으니 친구들과 술자리도 당연히 많이 가졌는데 고등학교 친구들을 둘러보면 수시로 서울대부터 연고서성한 등등 합격하고 대학생이 되길 기다리는 친구들뿐이었다.
이 친구들을 바라보며 그래도 친구니까 축하해주는데 마음 한 켠은 쓸쓸했다.
중학교친구들을 만나면(참고로 필자의 친구들은 대부분 마이스터고, 공고를 진학하여 4년제 대학과는 거리가 멀다) ‘니 진짜 재수하나? 왜?’라는 물음은 꼭 들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자연스레 술자리 피하게 됐고 재수할 때 인강이랑 책은 내 돈으로 쓰자라는 생각에 다니던 학원 알바를 시작했다.

‘니 혹시 기억나나? 쉬는 시간에 복도 창문보면서 내가 다음 벚꽃은 진짜 누구보다 즐겁게 맞자 했던 거. 근데 미안하다 난 그거 못 지킬거같네ㅎㅎ.. 씨X 얼마나 성실하게 살았는데 왜 나만 20대 시작을 재수학원에서 보내야 하는거냐 진짜’
살짝 오글거릴수도 있다. 2월 달 재종에 들어가기 전에 친한 친구랑 둘이 소주 몇병먹고 내가 했던 말이니까.
그리고 다음 날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음주운전 ㅈ댓다 라는 생각을 하며 운전면허학원 도로주행 시험치러 가는 길이었다.
갑자기 다른 친구한테 전화가 오길래 뭐지? 하고 받았는데 친구가 바로 하는말이 ‘..니 괜찮나?’ 딱 4글자였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구나 말은 안해도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 같다.
그래도 그 와중에도 울면서 전화받기엔 가오가 빠지니까 아무 말도 못하고 끊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스무명 가까이 있는 고등학교 기숙사 단톡이 있는데(이땐 현자타임이 와서 단톡 다 나갔었다) 거기에 위 오글거리는 멘트를 했던 걸 말하면서 걱정한 거였다.
이 후에도 여럿한테 연락이 오고 힘내라, 재수 한번쯤 할 수도 있는거다(이 멘트 지겹도록 들었는데 정작 전부 다 현역으로 간 친구놈들이다) 등 많은 응원과 걱정을 받고 재수해서 누구보다 ‘성공한다’라는 다짐을 했다.
의대를 가고싶다라는 생각을 했던거도 이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다른 의대지망생들처럼 생명을 구하고싶다 또는 돈을많이벌고싶다와는 다른 생각이었다.
누구나 공부잘했구나 하고 인정해주는, 그리고 군대를 현역으로 안간다는(이게 핵심이다 사실은 군대가기 싫다)의치로 가자! 라고 생각했고 그때부터 목표가 됐다.

2월 13일이였나 평소 친하던, 재수를 성공한 선배의 추천을 받고 지방의 모 재수학원 의치대반에 들어갔다.
수업은 블랙라벨, 국어 문법, 영어 수특, 과학은 1단원부터 개념설명에다가 같은 반에 있는 애들은 수업시간엔 자고 자습시간에는 드라마를 보다 걸리는 애들도 있었다.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겠나 당연히 현자타임이다. 그래서 한달만 채우고 곧바로 때려치우고 독서실 독재를 시작했다.

<3~9월>
사실 독재에 대해서는 쓸 말이 그닥 없다.
아침 8시기상 9시~12시, 13시~18시, 19시~23시 공부라는 계획을 세워놓고 하루 순공은 적어도 6시간은 지키자라는 모토와 함께 많이 할 땐 8시간정도 했고 독서실에서 하다보니 잠도 많이 잤다 영화도 몰래 보기도 했다
(불한당이랑 프리즌 재밌더라 아 오늘 1987보고 왔는데 개인적으론 신과함께, 강철비보다 더재밌었음 꼭보셈 김윤석연기 오지게잘함)
이 기간동안 국어는 기출을 돌렸고 수학은 기출3~4회독 한완수 2회독 알텍 크포 문해전등을 했고 영어는 수완 수특, 과탐은 그냥 기출만 뺑뺑이하고 수특개념을 3번정도 노트에 쓴 거 같다.

독서실독재를 하면 외롭다 정신병걸릴 것 같다라는 말을 하는데 사실이다.
3~4월에 친구들이 과팅했다니 뭐니 동아리니 뭐니 하는 얘기들을 보고있으면 난 왜이러고 있나하는 생각도 많이 했고, 오죽했으면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차가 들이받아서 죽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도 했다
비오는 날에는 비가 오니까 우울하고, 부끄럽지만 길 걷다가 갑자기 내가 불쌍해서 운 적도 있다
그래도 6개월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2주에 1번 혹은 매주 저녁 친구들이나 선배들 만나서 밥먹고 이야기도 많이 하고, 또 3~4월을 넘기니까 나름대로 적응이 된 것도 있는것 같다.
독재에 관련해서 질문할 것 있으신 분들은 댓글로 달아주세요.

독재생들의 걱정 중 하나는 실전감각이다. 이건 나도 부모님도 걱정했다.
하지만 고3내내 학생회를 하면서 학교선생님들과 친분이 두터웠고, 사립이다보니 계속 근무하시는 선생님들이셨다.
그래서 넉살좋게 ‘헤헤 선생님 평가원말고 교육청모의도 학교에서 응시하게 해주세요 헿헤’하며 부탁드렸고, 받아들여주셔서 학교에 안 쓰는 교실에서 응시하게 해주셨다.(7월이였나 한창 더울 때 따로 시험지 갖다주기 귀찮다고 후배들 젤 뒷자리에서 시험을 친 적도 있다 쉬는 시간에 소문나서 후배들 몇몇이 인사하러 왔는데 상당히 쪽팔렸다 이건)

6월모의는 아무 생각없이 친 것같다. 그냥 저냥 준비도 안하고 6모네? 하고 쳤다.
원점수로 95 92 95 38?39? 44? 탐구 원점수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생명과학은 1,2페이지에서 다섯 개를 틀리는 기념을 토했고 지구과학은 기억이 안난다. ‘생명과학은 현역정시로 의대간 친구도 가계도 물어보러 왔을 정도니까 개념실수만 안하면 되겠다 역시’ 라는 생각과 함께 자신감, 센츄뱃지를 얻은 날이랄까나

7~8월달에는 사관학교응시가 있었다. 경찰대를 칠까도 생각했는데 앞서말한 의대친구도 작년에 1차광탈한 걸 두 눈으로 봤기 때문에 겸손하게 사관학교 응시했다.
250후반이였나 260 초반이였나 높지도 낮지도 않은 성적으로 무사히 1차통과하고 2차를 보러갔다.
사실 사관 2차를 보러간 이유는 한 개다. 붙으면 학교플랜카드 붙여주고 가오사니까ㅇㅇ
군대 가기 싫어서 의치를 희망하는 나는 2차 보는 동안 2박3일 휴가간다는 생각을 하고 갔다.
체력시험이 총 30점중 15점이 안되면 과락으로 탈락인데 16점으로 턱걸이 통과했다.
준비한다고 운동도 별로 안했는데 초중학교시절 씨름 육상 축구부했던 게 도움이 된 것 같다.
참고로 100m 12.4, 세단뛰기 13.7m뛰었다 더 잘뛰는 사람 있으면 나와라 박수쳐드릴게요
당연히 면접도 준비안해서 임관 후 뭐할거냐는 면접관에 질문에 ‘음 공기업 취업도 괜찮네요’ 라는 머리에 총알 자국이 세발정도 나지 않은 이상 나올 수 없는 망언을 던지고 떨어졌겠다 생각하고 부모님께도 면접을 시원하게 말아서 떨어질 것 같다. 거기 뭔가 공기부터 나랑 안맞더라 수능잘치면 어차피 안갈꺼니까 괜찮다 라는 말씀을 드렸다.

하지만 합격했다.
(이 때까지는 내가 사관을 가게 될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9월에는 변화가 생겼다.
9월모의를 치기 전날에도 당연히 준비는 안했고, 전날에 피파가 너무 하고싶어서 집가기전 피씨방가서 한시간반정도 즐겜하고 집에서 푹자고 쳤다. 원 점수 288점. fait기준 2점차로 에피조건이 안됐다. 국어하나만 더 맞았으면 보라눈알일텐데. 솔직히말해서 이때 느낀 감정은 ‘이제 됐다 어느정도 경지에 오른건가’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오르비 눈팅하면서, 주위에 9평 397맞고 수능 때 12212받은 선배생각하면서 겸손하려 했다.
계속 독재를 하는거 보다 다시 재종에 가서 생활패턴도 맞추고 공부하는 사람들 보면서 으쌰으쌰해야지 하는 생각에 9모치고 다음날 재종상담을 받고 그 다음주에 등원했다.
이 때 학원은 지역 내에서 가장 많은 재수생이 다닌다는 학원이었고 그 학원 중에서도 잘한다는 반에 들어가게 됐다. (사실 그 타이밍에 딱 한명 자리나서 선착순 잘채움)

<9-11월>
재종에 와서 처음에는 수업 굉장히 열심히 들었다. 다들 잘하는 애들이 옆에 있기도 하고, 지역에서 최고봉인 재종이니까.
얼마나 갔겠냐 당연히 자습실 애용하거나 수업중에 혼자 자습했다. 하루 순공도 적어도 8시간은 찍어왔고 수학 실모, 과학 실모도 꽤 많이 풀었다. 그냥 열심히 했다. 할 말이 없네요 킁

-----------아마 이제부터가 글의 핵심일듯------------

수능 전날(11/15) 학교에 수험표를 받으러 갔다. 한 해 동안 신경 써준 3학년 부장선생님한테 ‘슨생님 올해 우리학교 입결은 제가 책임집니다 걱정마세요’라며 너스레 떨면서 수험표를 받았다.
사실 수능 전 주부터 편도가 부어서 몸상태가 말이 아니었지만 입 하나는 학교최고봉이기 때문에 털었다.
친구들 응원에는 ‘걱정하지마라 베테랑이니까’라는 말로 답했고 저녁 7시쯤에 누워서 잤다
근데 잠자리가 싱숭생숭해서 깨니까 부재중이 3통정도 와있었다. 다른애들한테
아ㅋㅋ또 응원할라고 뭐 전화까지하노;; 라는 생각을 하며 카톡을 켰는데
‘수능연기 실화냐ㅋㅋㅋㅋ’라는게 와있었다.
개소리하네 미X놈들 하면서 네이버를 켰는데 맞았다.
부재중 온 애들한테 전화하면서 구라안치고 30초동안 말도안하고 서로 웃었다.
몸이 아파서 집중도 안되는 때인데 땅이 돕는구나 하면서 굉장히 감사히 여겼다.
그리고 일주일 뒤 몸상태도 어느정도 정상이 되었고, 수능장에 들어갔다.

워낙 긴장안하는 타입이라 교문에 응원오신 학교선생님들보며 ‘아이 뭐 별거없잔습니까 승전보 드리겠습니다’하면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서 9월 화작문을 읽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문제의 시작이었다. 글이 안 읽히는 것이었다. 긴장안하는 타입인데 이거 뭐지?라는 당황을 했지만 곧 감독관이 들어와서 책을 덮었다.
잘될거야 라는 생각을 하다가 감독관 얼굴을 봤는데 여자감독관이 좀 예뻤다. 처음 온건지 되게 긴장하고 계시길래 ‘난 뭐 두 번짼데ㅋㅋ 너무 긴장하시네~’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생각하면 진짜 긴장안하는 미친놈인것같다.
국어시험을 치는데 첫장 수라상부터 글이 안읽혔다. 게다가 계속 화작문에서 한문제씩 틀려서 꼼꼼하게 읽었는데 화작문을 다푸니 20분이 지났었다.
이 때부터 멘붕이 시작한 것 같다. 그래도 난 비문학이 빠르지 하면서 읽기시작했는데
‘쿠당탕탕!’
누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서 힐긋봤는데 아까 본 여자 감독관이 기절하면서 문에 부딪힌 것이다. 당황한 주 감독관이 달려갔나? 해서 부감독관을 복도로 보내고 시험이 계속 됐다.
집중력은 이미 깨진 상태에서 어떻게든 멘탈잡고 꾸역꾸역 푸는데
‘이육사’ 코드네임 264 윤동주와 더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등장했다.
근데 현대시는 읽히면 가슴속으로 이해하는데 이건 안됐다. 다시 안봐서 아직도 그런지 모르겠다.
당연히 멘탈이 또 터질 수밖에 없다. 꾸역꾸역 풀다가 마지막 관촌수필이었나 본문 읽지도 못하고 문제만 보면서 답같은거만 체크하고 마킹하니까 종쳤다.

본인이라면 어떻겠는가 당연히 멘탈이 터지지. 하지만 작년부터 올해9월까지 국어는 싹 다 1등급이었으니 정신없었어도 답 맞게 했겠지 아니 했어야해라는 행복회로를 돌리며 수학에 들어갔다.
국어를 조진걸 아니까 수학을 잘쳐야지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4번을 풀고 넘어가는데 느낌이 쎄했다.
다시 푸니까 틀린걸 알고 고쳤다. 다시 멘붕이 시작됐지 원체안하던 수학실수를 수능장 4번부터 했으니
그렇게 멘탈 어떻게든 붙잡고 20번까지 풀었는데 답갯수가 깨졌다.
9모때는 답갯수 안세고 21번 풀었는데 찍은애들일아 점수가 같으니 억울했다.
이상한 보상심리로 믿찍1 찍고 넘어갔고 29번에 한시간 쏟고도 못풀었다 빡대가리다
후.. 92는 나오겠네라며 밥을 먹는데 진짜 콧구멍으로 들어가는 지 모르겠더라
볶음밥 싸갔는데 밥알이 고슬고슬해서 진짜로 코로 먹었을지도 모른다.

영어는 뭐 글 술술 읽다보니 답이 나왔고 한국사는 3급 92점을 토대로 가볍게 풀었다.
생명과학은 다풀고 10분이 남길래 쉽네ㅋ 하면서 펜을 놓았는데 작년에 이러고 3등급 쳐맞았기 때문에 어욱 시X 데자뷰 하면서 검토를 했다.
지학은 5번 7번 멘붕 퍽. 5번은 모르겠고 그냥 7번은 이게 수특에 어떤 모양으로 기술돼있는지 아는데 내용이 기억안나는 거여서 고민하다가 찍었는데 둘다 틀렸다. 1컷 46은 아직도 이해가 안간다.

그렇게 2번째 수능을 마치고 대기시간에 답을 찾아서 매겼다.
이육사문제는 스트레이트로 다 틀리는 거보고 눈을 잘못떳나 싶어서 작은 눈 다시 비비며 크게 떴는데 틀렸더라.
그리고 그 외에도 틀리면서 86점.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을 이때 받았다.
수학은 21,29,30에다가 쌍곡선 실수해서 84점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믿지 않았다.
눈물도 날려고 했는데 안 믿겨서인지 그냥 꾹 참았다.
친구가 전화가 왔다. 끊었다. 또 왔다. 끊었다. 근데 또 오더라
받아서 ‘전화 안 받으면 걸지마라 씨X롬아’하고 끊었다.
사실 저 말은 세상이 무너진 기분이 들고 암만 우울해도 내가 진짜 쓰레기는 맞다. 저 친구는 내가 당연히 올1찍고 나올 줄 알고 연기하는 줄 알았다더라

퇴실해도 된다는 방송을 듣고 교문을 나서는데 아빠가 데리러 와 계셨다.
그 때 갑자기 감정이 너무 복받쳤다. 겪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1년 중 가장 최악의 성적을 받았는데 바로 앞에 믿고 응원하고 지지해준 부모님을 뵙는 기분을
아빠를 보자마자 그냥 펑펑 울었다. 집에 오는 차 안에서도. 집에 와서 방에 들어가서도. 그 다음날까지도
내가 뭘 위해 1년을 바쳤던 것 인가,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돌아가지, 노력을 했으면 정당한 대가가 있어야 하는게 아닐까 내 삶은 왜 이렇게 다른 친구들에 비해 난이도가 높고 불행한 삶이 되는 것인가 원망도 많이 했다.
논술치러 서울 올라가는 기차에서도 생전 준비 안했던 논술 풀다가 잠깐 쉴 때 공허한 기분이 들어서 눈물이 울컥 올라오기도 했다.

응시하는 대학 주위에서 자취하는 친구 집에 갔다. 친구가 문을 열어주는데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지더라.
부둥켜 안고 3분정도는 그냥 펑펑 운 거같다 아무 말없이..
다독여주더라 수고했다고 힘든 거 다 안다고 누구보다 고생한 거도 안다고 니한테 손가락질 하는 새끼들 하나도 없다고
이 말 들으니 더 울컥하고 눈물이 쏟아지더라
응시한 대학은 답안은 솔직히 잘썼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저를 못맞춰서 아직도 합불 확인을 안했다
아모른직다

그렇게 논술치고 서울에 학교다니는 친구들 자취방을 연연하면서 일주일정도 돌아다녔다
새벽까지 술먹고 자취방에서 자고 다음날 옮겨가서 술먹고 걔 방에서 자고 이렇게
사실 술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단지 집에 가서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끌고 끈게 일주일 정도 됐고 그러니까 집이 그리워지더라
기차타고 내려오면서는 시간이 지나니 그래도 담담해지는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해서 문을 열었는데 앞에 엄마가 계셨다
어떻겠는가. 참으려고했는데 또 눈물이 나더라
너무 죄송하다고 이거밖에 안되는 아들인게 너무나도 미안하고 창피하다고 실망시켜드려서 미안하다고.
그렇게 또 하루이틀정도 방에서 안나오고 점심저녁도 안먹었다.
먹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도 들고 식욕이 진짜 없었으니까

한날은 아빠랑 둘이서 술을 먹었다. 경상도분이셔서 사실 속내를 잘 말씀하시지 않는다.
근데 술을 드시니 감성적으로 변하지 않겠나.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니가 수능장에서 울면서 나올 때 자기 가슴이 얼마나 아팠는 지 아냐고
그래도 나한테만큼은 자랑스러운 아들인데 그렇게 기죽는거 보니 나도 울고싶었다고
수능 못치면 어떻냐고 난 니가 한번 더 한다해도 믿고 응원한다고
그러니까 제발 기죽은 모습 보이지 말고 밖에서 친구도 만나고 좋아하는 운동도 하라고

듣고 나니 더 죄송한 마음뿐이더라
이제까진 내 생각만 하고 부모님 마음은 못 헤아렸다는게 괜히 또 죄송하더라
항상 웃고 다니고 활기 넘치던 막내아들이 시험 한번에 어깨도 처지고 힘빠진 모습을 부모님께서 보시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생각도 하게되더라

그러고 나니까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사실이더라 감정이 무더져가더라
어쩌면 작년 수능보다도 못한 성적에다가 자존심 때문에 안간 대학을 가야할지도 모른다
죽어도 안가야지 생각했던 사관학교를 가게 될지도 모른다
당연히 행복하지 않다. 근데 아쉬움도 없더라
내가 진짜 되돌아봐도 후회안할 만큼 열심히 살았는데 결과가 안 따라오니 처음에는 원망했다.
근데 이제는 받아들여지더라. 운이 없었던 건지 내 그릇이 이거밖에 안된건지는 따지고 싶진않지만 받아들여지더라
세상은 노력한 만큼의 대가가 무조건 따라오는 건 아니라는 것도 어느 정도 알게 되더라
세상의 유명한 명언들 중 ‘최고가 아니라도 최선을 다하라’ 라는 말이 있다.
중학교때 들은것같았는데 당연히 개소리네 싶었다. 내가 최선을 다하면 최고가 될꺼니까
근데 그게 아니더라. 그래도 최선을 다하라는 이유는 그래야만 후회가 없다더라.

이 상황에서 말하면 합리화같지만 만약 의치대를 갔다해도 내가 행복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더라
의대를 포기하고 서울대를 간 친구의 말 중에 자기는 아픈 사람을 매일보며 살 수 없겠다더라
또 말로만 어렵다던 의대공부 중 몇가지 용어만 봤는데도 이건 내 길이 아니였겠다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렇다고 공대나 사관학교 입교가 내 길이라는 말은 아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난 행복한 삶을 사는게 꿈인데 그걸 위해 어떻게 가야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찌 보면 나쁜 결과지만 시간이 좀 더 흘러서 돌아보면 나쁘지만은 않은 과정이었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평생 따라다닐 학력이 다른 누구보다 조금은 아니 많이 밀릴지라도
내가 한때 생각했던 직업을 못 갖게 되더라도
2017년 한 해는 내가 조금이나마 성숙해지고 커가는 해가 된 것 같다.
하늘이 무너진 느낌이어도 어떻게든 방법은 나오게 돼있고 노력한만큼 결과가 안따라오더라도 노력은 죽어라 해야 후회가 안 남는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로 말이다.

막상 써 보니 글을 어떻게 마쳐야 할 지 모르겠다.
2018년의 나는 어떻게 될 지 모른다.
아마 사관학교 입교는 예정 돼있는데 하다 못 버티고 뛰쳐 나올지.
 표본분석, 분석기, fait 어떤거도 안한 진짜 노줌스나를 쏠지
집 근처 대학을 갔다가 반수를 할 지(사주보는 분이 작년 올해가 운이 안좋고 내년부터 운이 좋아진다고 했다 찡긋)

근데 어느 길을 택하든 최선을 다할거다
그래야 어떤 결과라도 후회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