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료는 6세기 전반 양나라의 원제(元帝) 소역(簫繹, 508~554)이 제작한 화첩으로, 당시 양나라에 온 각국 사신의 모습과 해당 국가의 역사와 문물 등에 대해 간략하게 부기해 놓은 것이다. 여기에는 다른 사서에는 보이지 않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백제사 연구에 좋은 참고 자료가 되고 있다. Show
이 사료에서 주목을 끄는 부분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백제의 대외 관계와 관련한 부분인데, 이는 대중국 관계와 주변 소국과의 관계로 다시 나눌 수 있다. 백제의 대중국 관계로 주목되는 기록은 사료의 첫머리에 보이는 ‘요서경략설(遼西經略說)’이다. 백제의 요서 진출에 대한 기록은 중국 남조(南朝)의 사서에서만 보이는데, 『송서(宋書)』⋅『양서(梁書)』⋅『남제서(南齊書)』에서는 고구려가 요동 지역을 경략한 틈을 타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반면 『양직공도』는 요서 지역에 진출한 주체를 백제가 아닌 낙랑으로 기록하고 있어,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설에 대해 중요한 반박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한편 주변 소국과의 관계는 반파(叛波) 등 9개국이 백제에 부용(附庸)하고 있다는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양직공도」가 편찬되었던 당시 백제 사신의 발언 혹은 상표문에 기초하여 만들어졌던 만큼 주변 제국(諸國)에 대한 백제의 인식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백제에 부용한 나라에 사라(斯羅), 즉 신라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양직공도」가 편찬된 연대가 520~530년대로 추정된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양직공도」에 보이는 것과 같이 이 시기에 신라가 백제에 의존하여 사신을 파견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 시기 신라는 점차 고대 국가로 성장해 가면서 가야(加耶) 지역으로 진출함과 동시에, 이 지역을 둘러싸고 백제와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직공도」에 보이는 부용관은 신라와 대립하던 백제의 기대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양직공도」에는 신라 외에도 여러 나라가 백제에 부용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 나라는 『일본서기』 신공황후(神功皇后) 49년조에서 왜군에 의해 평정되거나 항복하였다고 전하는 나라와 유사한 면을 보인다. 왜에 평정되거나 항복한 지역들은 신라⋅지바발(比自㶱)⋅남가라(南加羅)⋅녹국(㖨國)⋅안라(安羅)⋅다라(多羅)⋅탁순(卓淳)⋅가라(加羅)⋅침미다례(忱彌多禮) 등이 보이는데, 이를 『양직공도』에서 나오는 지역과 대응하면 신라-사라, 탁순-탁, 안라-전라, 가라-반파, 침미다례-하침라 등으로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들은 대개 전라도 일원에 분포하는 지역들로 비정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6세기 단계에 이 지역에 대한 백제의 진출 혹은 영역화가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 지역들에 대한 백제의 영역화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담로(檐魯) 또한 주목된다. 담로는 『양서』 「백제전」에도 보이는데, 백제의 지방 통치 체제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앞서 제시된 지역들과 『남제서』 「백제전」에 보이는 지명이 관칭된 왕(王)⋅후(侯)가 분봉(分封)된 지역이 전라도 일원으로 비정된다는 점을 통해 5세기 말~6세기에 이 지역이 백제의 지배권하에 있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6세기 중엽까지 전라도 일원에서는 백제의 중앙 문화와는 다른 고고학적 유물들이 출토된다는 점을 들어 실제 이 지역에 대한 백제의 지배력이 강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ㆍ양나라 대에는 왜국과 직접적인 교류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고대의 일본은 중국과는 국경을 접하지 않고 먼 동쪽 바다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던 지리적인 요인 탓에 예로부터 중국과의 교류가 그리 잦은 편이 아니었다. 후한서 에 따르면ㆍ왜노국(倭奴國)의 왕이 건무중원 2년(서기 57)에 광무제에게 조공하여 인장을 하사받은 이래로 한동안 제대로 된 교류가 없었으며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엔 경초 2년(238)에 야마타이국의 여왕인 히미코가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친위왜왕 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다가 히미코가 죽은 이후로 중국과 왜의 교류는 다시 단절되었고ㆍ약 200년이 흐른 영초 2년(421) 경부터 왜왕인 찬·진·제·흥·무 등이 5대에 걸쳐 중국 남조의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왔으나 승명 2년(478) 이후로는 또다시 교류가 끊어졌다. 다시금 왜와 중국 간의 교류가 활성화된 것은 꽤 시간이 흐른 후인 수·당시대 때 부터였다. 이후에 중국 남조의 남제와 양에서 각기 왜왕에게 관작을 제수하였는데ㆍ사실 이는 형식적인 의례에 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역대 중국의 왕조들은 왜가 사신을 보내올 때 마다 이를 상세히 기록했는데ㆍ이는 중국 황제의 권위와 교화가 바다 멀리에 있어 그 소식을 알 수 없는 왜국에까지 미치는 것으로 여겨 매우 상서롭게 보았기 때문이다. 『日本書紀』は日本の現存最古の「正史」とされるが、その編纂までには日本における文字の使用と歴史的記録の登場の長い歴史があった。日本(倭)における歴史、即ち過去の出来事の記憶についての記録としてまず言及されるのは「帝紀」(大王家/天皇家の系譜を中心とした記録)と「旧辞」(それ以外に伝わる昔の物語)である[12]。これらは津田左右吉が継体・欽明朝(6世紀半ば)の頃に成立したと提唱して以来、様々な議論を経つつも、元々は口承で伝えられていた伝承が6世紀にまとめられたものと一般的には考えられている[13][14][15]。さらに、文字に残された系譜情報を「史書」として見るならば、雄略朝(倭王武、ワカタケル大王、5世紀後半)にはその種のものが存在していたことが稲荷山鉄剣銘の存在によってわかる[16]。
3.3. 칠지도[편집]《일본서기》에서 백제가 일본에 '칠지도'와 '칠자경'을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는데[96] 근대에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의 신고에서 칠지도가 실제로 확인되었다. 이를 두고 일본학자들은 번국(蕃國) 백제가 야마토 조정에 칠지도를 바친 것이라고 해석했었다.
3.4. 중국 역사서의 왜왕 책봉 기사[편집]한편 중국 남조(南朝)의 송(宋), 제(齊), 양(梁) 나라의 역사기록에 나오는 왜왕의 책봉 기사도 일본 학자들이 근거로 든다. 여기에는 왜왕이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왜국왕(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諸軍事倭國王)'이라는 관작(官爵)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송에서는 백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한 왜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듯한 칭호를 하사해주었다고 나온다. 왜왕은 최초에 임나 모한(마한) 진한 신라 백제의 명칭을 요구 했으나 백제가 빠진뒤 가라(가야)로 대체된다. 자세한 내용은 왜5왕 문서를 참조하자
3.4.1. 왜왕 무(武) = 웅략천황?[편집]선술했듯이 송나라에 보낸 왜왕 武의 국서에는 고구려와 대치하고 있으며 국경을 맞대고 있어 자칫보면 '이게 뭔가'싶긴 하지만 일본서기에 비슷한 시기에 이러한 기록이 있긴 하다. 이 비슷한 시기 왜왕 武와 비슷한 행보를 보이는 인물이 일본서기에 있는데, 이것을 두고 웅략천황과 武는 동일인물이라는 추정이 있다. 그도 그럴것이 너무나도 웅략천황의 행보와 비슷하고 왜왕 武가 송나라에 보낸 국서와 비슷한 정황이 수 없이 발견된다.
3.5. 가야 = 임나 ?[편집]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신라 유적에서 발견되는 가야의 용례는 가야 연합을 통칭하고 있으며, 전라남도 일부와 경상남도 일부에 존재하던 "국가"라는 일반명사 격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임나 가야의 용례는 일관되게 금관가야를 지칭하고 있으며 이는 임나 단독 표기에서도 동일하다. 그러나 일본서기와 일본의 당대 인식은 임나는 가야와 동일하며 이에 임나4현과 전라도 일대의 침미다례와 충북 일대를 더해서 통칭하는 명칭으로 수용된다.[119] 즉, 가야 임나를 각기의 다른 나라로 취급해 6국, 7국 제군사를 자칭한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당대의 일본의 인식에 의하면 가야와 임나는 똑같은 뜻이고 중복의 개념이기 때문에 6국은 5국이 되어야 하고, 7국이 6국이 되어야 뜻이 통한다.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왜오왕 왜오왕 문서의 r84 판,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왜오왕 왜오왕 문서의 r84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문서의 r 판, 번 문단 (이전 역사)3.6. 수서 왜국전의 내용[편집]그 외에도 《수서》 왜국전 등에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多珍物、並仰之、恒通使往來。)라는 기록 역시 존재한다.
3.7. 삼국지 위지한전(魏志韓伝)의 기록[편집]
3.8. 양직공도 신라 제기(題記)[편집]2011년에 새로운 버전의 양직공도 신라 제기(題記)가 발견되었다. # 이건 국립고궁박물원에 2본(새로운 버전)이 있는건데 양직공도의 모사본(원본을 배껴서 본뜬 책)이다. 양직공도는 중국 남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래 양직공도에는 백제 사신의 모습만 볼 수 있었지만 대만에 있는 고궁박물관의 모사본에는 신라와 고구려의 사신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그 내용에 혹속한 혹속왜(或屬韓或屬倭: 한때는 한에 속하기도 하고, 한때는 왜에 속하기도 하였다.)란 구절이 있어 언론에서는 이것이 '임나일본부설의 증거가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고 보도했다. 고궁박물관에 있는 2본의 모사본은 2011년이 돼서야 대만에서 나타났다.
3.9. 구당서[편집]중국의 사서인 《구당서》 동이열전 일본 기사에서는 이런 내용이 있다.
3.10.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편집]『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王陵碑)』도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사료로 거론되었다. 비문의 신묘년(391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그 외에도 399년에 왜군이 신라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을 때 왜군의 거점이 임나가라의 종발성인것처럼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3.10.1. 고구려 주체설에 대한 의문점과 그에 대한 반박[편집]
391년 신라를 속민에서 신민으로 예속관계를 강화하고 신라를 백제나 왜국의 침입으로부터 보호 해줬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광개토대왕릉비 기사로 교차검증 되며 그 비슷한 시기에 신라를 고구려에 볼모를 보낸다.[149]
그가 제기하는 문제를 이해하려면 광개토대왕릉비의 정복전쟁 부문에 대한 구조를 알아야한다. 정복전쟁 부분의 첫번째로 등장하는 기사는 395년의 비려(稗麗) 정벌 기사이다. 그 다음에 391년 신묘년으로 돌아와 문제의 기사를 서술하는 구조이다. 즉, 신묘년 391년의 기사는 연대순서에서 열외된 기사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인 고구려사 연구자 왕건군은 정확한 의미에서 신묘년 기사는 없고, 후에 등장하는 남정 기사들의 명분과 프로파간다를 기록한 이른바 '전치문'으로 봤고, 하마다 고사쿠를 위시한 일본학계에서는 더 나아가 이후에 나오는 대부분의 기사들을 수식하는 '대전치문'[168]으로 해석하였다. 고로 '대전치문설'이 아닌 '전치문설'이 합당하고, 이 전치문은 6년 병신년의 백제 원정만 수식하고 있으므로, 신묘년의 도해파 주체는 왜와는 아무 관련 없는 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396년의 기사 직후는 신묘년 전치문의 수식이 종결상태 혹은 완결 상태다. 즉, 백제 정벌 396년 직후의 문장들은 신묘년 전치문이 종결된 상태이므로 396년 기사의 직후의 기사인 398년 숙신 정벌부터 시작해서 광개토대왕릉비의 정벌 마지막 기사까지는 신묘년과 아무 관련 없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되면 또 신묘년의 주체는 왜국이 아니라는 문제의식이 생기고, 그것을 고구려가 실시한 원정 혹은 신라 구원으로 볼수 있는 것이다.[171] 신묘년조에서 파손된 문자가 갱토신라(更討新羅)라고 해석할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왜와 백제가 같이 신라를 침략 했다라고 해석해도, -선술된 398년 숙신 정벌의 기사 문제로 인해 396년 후의 기사들은 신묘년/병신년의 맥락과 닿아있지 않기 때문에- 신묘년은 병신년의 기사만 수식하는 '전치문'이고 병신년에 나오는 정벌의 대상은 '오직' 백제이므로 문제의 신묘년 전치문에서 부각하는 주동 세력은 백제이고 왜는 단지 백제의 지원세력이라고 해석한다. 또한 그가 언급했듯이 릉비에 등장하는 다양한 민(民)을 포함한 단어들이 등장하는데, 그것들은 신민(臣民), 속민(屬民), 구민(舊民), 신민(新民) 등인데, 각각 속민은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치는 국가, 구민은 원래의 고구려 백성들, 신민(新民)은 정복 사업에서 새로 얻은 백성들을 뜻한다. 즉, 전부 고구려를 주체로 해석해야 의미가 통한다. 고로 같은 '민(民)'자가 들어가는 신민(臣民)은 그 용례에서 벗어날수 없다는 것이다. 후에 제2차 한일공동역사구회에 참가하게 되는 조법종 교수 또한 신묘년 호태왕 방울이 발굴된 이후로 신묘년에서 신라를 신민으로 삼은 주체는 고구려가 되어야 하지 않냐는 발언을 한적이 있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63509
3.11. 주구묘와 장고형무덤(전방후원분)[편집]
한가운데 보이는 열쇠 구멍 비슷한 것이 방산리 고분이다.
3.12. 구마모토의 편두 유골[편집]김해 예안리에서 편두를 한 유골들이 발견되었고, 구마모토에서 발견된 유골 6구 중 여성 유골 한 구도 편두였다. 편두를 한 유골들은 고된 노동이 있었는지 척추가 눌린 상태여서 노예였음을 알 수 있다.[193] 대한민국 측은 이 유골을 무당 계열이었다고, 일본 측은 가야에서 데려온 여자 노예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 하지만 이 유골들 만으로는 임나일본부의 실재성을 논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3.13. 경남 서부 내륙지역 및 남해안 일대의 왜계 석실[편집]
3.14. 일본의 당대 항해력[편집]일본은 한반도 남부를 여름에만 약탈했다.[201] 선술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일본의 침략이 여름 특히 음력으로 4월부터 8월까지 집중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해적이라는 집단은 항구적으로 타 지역을 지배 할수 있는 능력도 없고 또 항구적으로 지배하는 주체로 해석할수 없다. 해적은 단지 바다를 건너서 노략질을 일삼다 본거지로 돌아가는 집단들이다.
27년(626)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명광개를 선물하면서 '고구려가 길을 가로막고 당과의 교류를 막고 있다'고 호소하였다. 4. 임나일본부설과 가야[편집]가야는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주장(남조선경영론)의 핵심이 되는 지역이기 때문에, 광복 이전에는 임나일본부의 입증을 위해서만 연구되었고 광복 이후 1980년대까지는 감히 건드리지도 못하는 시기를 거쳐왔다. 그 과정에서 학계를 지배했던 것은 초기의 김해의 금관국 중심의 연맹체가 금관국 멸망 이후 후기의 대가야 중심으로 이동하였다는 학설이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자신감을 다소 회복한 학계에서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한 결과, 이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발굴 결과가 보고되고 있다. 5. 반도 일본어설과의 관계[편집]임나일본부설에서 연상될 법한, 혹은 임나일본부설이 연상될 법한 다른 학설로 반도 일본어설이 있다. 이는 러시아계 미국인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이 본격적으로 제시해 한국어와 일본어의 연구와 관련해 큰 주목을 끈 학설로, 언어학적 지식과 역사적 지식이 얕은 사람들은 임나일본부설과 연관지어 곧잘 잘못 이해하기 쉽다. 6. 종합[편집]종합하자면 대부분의 기록들은 왜의 과장과 허세에서 비롯되었으며, 통치기관으로서의 임나일본부는 없었다는 것이 결론이다. 이 결론에 대해 한국 사학계뿐만 아니라 일본 사학계에서도 점차적으로 인정해나가다가, 2010년 한일역사공동위원회에서 임나일본부설을 근거 없음으로 결론 내렸으며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공동 합의를 맺음에 따라 임나일본부설은 일단 양국 사학계에서 배제된 상황이다. # # # 7. 현재진행형 수정설[편집]7.1. 제1차 (2005), 2차 (2010) 한일역사공동연구 보고서의 고대사 부분(제1분과)의 내용과 토론부문 발췌[편집]설명에 앞서 보고서는 한일 양국의 각자 개개인의 논문을 투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양측이 상호의 의견에 동의 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서로 자신의 주장을 논문으로 투고했기 때문에 상대측의 의견에 동의 하는지, 동의 할지 않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7.2. 일본 학계[편집]예전처럼 한반도 남부에 대한 식민지 경영과 같은 주장은 현재는 일본학계 주류에서도 거의 사라졌다. 대신 일본서기에 기록된 '왜곡된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좀 더 현실적으로 해석해서 기내(畿內)의 야마토 조정과는 무관한 큐슈의 지방 호족에 의해 설치되었다고 보는 견해로부터, 대마도 설치설, 일본의 '출장소' 또는 '출장기관'과 같은 출선기관설(出先機關說) 등을 계속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의 신빙성이 의심받자 이제는 선사시대부터 가야지역과 일본열도의 활발한 교류를 들어, 가야지역에 일부의 왜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고, 이러한 왜인들을 통제하는 행정기관이 임나일본부였다는 '가야의 왜(倭)'설[221]이나 왜의 식민지 지배기관이 아니라 가야에 파견된 왜의 사신들로 이해하는 외교사절설(外交使節說) 등 다양한 견해가 나왔다. 이런 견해들은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임나일본부의 영역과 성립시기는 작아지고, 군사적 침략의 가능성은 옅어진다.[222] 2017년 6월 경 심용환 역사작가가 국내와 일본학계의 동향을 설명하며 학설 중 하나로 외교사절설을 언급하며 인터뷰한 적이 있다. 7.3. 한국 학계[편집]《일본서기》는 과장이 많지만 백제, 가야에 대해 한국 기록에 없거나 자세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정보가 많아 백제사, 가야사 전공 학자들에게 연구가 많이 되고 있는데, 일본서기에 기록된 '통치기구 임나일본부' 그 자체는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대신 가야를 지배했다고 하는 《일본서기》의 '왜'가 실제로는 백제라는 견해와 앞서 말한 한반도 내 일본 군사 세력의 잔영이라는 백제군사령부설이 있다. 최근에는 임나일본부는 왜의 통치기관이나 백제의 군사령부와 같은 것이 아니었으며, 임나(任那)와 안라국(安羅)에 파견된 왜의 사신인 기비노오미와 가와치노아타이였다는 주장도 나왔다. 아무튼 기존의 일본 사학계가 주장하던 식민지설은 점차적으로 폐기되는 추세이다. 안라국[223]에 존재했던 안라제왜신을 가리켜 임나일본부라고 부른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서기》에 나온 기록에 의하면 부(府)를 "미코토모찌"라고 불렀는데 이는 관청이 아닌 "사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8. 한국 유사역사학자들의 주장[편집]한국에서도 이런 사례가 있다. 왜인 한반도 남부 지배설 참고. 9. 기타[편집]2005년에도 서울 강동과 하남에 전방후원분이 발견됐다는 기사[224]가 떠서 웹상의 재야사학자들과 수많은 일빠, 환빠들을 설레게 했으나 강동의 것은 한달도 안돼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전방후원분이라 볼 근거가 없다"고 밝혔고, 하남의 것은 선사시대와 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무더기로 나와 전방후원분과는 연관이 없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애초에 전문적인 고고학 조사기관이 아닌 민간단체에서 제기한 의혹[225]이었다. 그러나 일빠와 환빠 모두에게 매력적인 소재인지라 2010년대까지도 블로그 등지의 역사 전문가들이 '식민사학자들이 백제 최고(最古)의 유적을 은폐한다.' 또는 '국뽕사학자들이 왜가 백제를 지배했다는 근거를 은폐한다.'는 소리도 있었다. 10. 관련 문서[편집]
[1] 임나는 가야 지역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다. 한국에서는 주로 가야로 불러서 임나라는 이름은 생소하고 임나일본부설 때문에 거부감까지 가지는 편이지만, 일본 기록에서도 등장할 뿐 한국 측 사료에서도 임나라는 이름은 종종 쓰였으므로 '임나'라는 단어 자체는 본질적으로 일본부의 존재여부와는 관계가 없다. 이를 구분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야 문서 참조.[2] 물론 위키백과는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다는 점은 유의. 애초에 일본 내에서도 세계사의 창 가야 항목처럼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글들은 보인다.[3] 일제강점기 식민사관학자 쓰에마쓰 야스카즈가 임나 4현을 현재의 전라도 일대로 비정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오늘날 일본 내 일부 교과서는 일본서기상 서술을 그대로 해석하여 '일본이 임나4현을 다스리고 있었으나 후일 백제에게 양도했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4] 광주광역시에서 일본식 무덤인 전방후원분이 발견되면서 재조명된 적이 있으나, 논란이 있다. 하술 '3.11. 주구묘와 장고형 무덤' 단락 참조.[5]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조 내용은 신라 구원과 관련하여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 혹은 해석 오류라는 설. 일제의 비문 조작이라는 설도 과거엔 거론되었으나 요즘은 많이 잠잠해진 편이다. 《삼국사기》의 왜군 관련 기록은 단기간의 침략으로 본다.[6] 물론 신공황후기는 이주갑인상이라는 괴랄한 논리로 4세기로 끌어내려야 한다.[7] 일본이 마치 상국인양 서술하는 윤색은 백제가 일본과 통교하기 전부터 나타난다.[8] 후술할 임나 10개국도 일본에서 주장하는 자신들이 통치했다는 왜국의 강역이다. 그러나 안라, 다라, 탁순, 탁국, 남가라, 비자발, 침미다례의 7개국은 근초고왕의 가야 원정 때 일본이 그들을 섬멸하고 백제에게 주었다고 기록되었다.[9] 下哆唎 전남 여수로 추정 [10] 上哆唎 역시 여수로 추정[11] 裟陀 전남 구례군 혹은 순천으로 추정[12] 牟婁 영광 광양 고창 무안[13] 계체 6년(512) 12월 기사 참조.[14] 원래 백제의 영토인데, 어째서 백제가 왜왕에게 부탁해서 돌려달라고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15] 峴南[16] 支侵[17] 谷那[18] 東韓[19] 일본서기에는 분명하게 당대의 서적 백제기를 인용하며 인질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파견했다고 기록 되어있지만, 정작 삼국사기에서는 인질이라고 나온다.[20] 백제의 영토를 빼앗았다는 해석도 백제 유민들이 일본으로 도망간 뒤, 왜 조정에게 잘 보이려고 고구려에게 빼앗긴 영토를 왜국에게 빼앗겼다는 식으로 윤색했다는 게 중론이다. 하지만 지침은 홍성이나 충남 예산으로 비정, 동한은 충북의 괴산이나 음성 일대로 추정하기 때문에 고구려가 빼앗았다고 추정해도 무리가 없지만, 같이 언급 되는 침미다례는 전남 일대, 곡나는 전라도 곡성 혹은 충주, 현남은 전북 익산으로 추정하기 때문에 고구려가 통치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냐는 해석이 있다. 물론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그의 치세시기인 400년에 고구려군이 부산/김해 일대까지 가야와 왜군을 추격해 내려왔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호남 일대까지 도달 했다는 정황은 없다.[21] 428년(일본서기 상으로는 308년의 기사이나 이주갑인상을 고려)에 파견 되었다는 전지왕의 누이 新齊都媛과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있다.[22] 이 기사를 기점으로 이주갑인상의 왜곡은 사라지고 정상적인 년도로 돌아온다. 이 시기에 묘하게 맞물려서 비유왕의 치세기는 전부 소거 당했다.[23] 부여곤지와 개로왕의 첩을 일본에 보내는 도중에 첩은 개로왕의 아들 무령왕을 출산하게 되고, 무령왕은 곧바로 백제로 송환되지만, 부여곤지는 일본에 머물렀다.[24]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에게 빼앗긴 영토를 왜왕과 왜국의 국력을 과시하고 포장하기 위해 왜국이 뺏었다고 거짓말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25] 장수왕이 백제를 정벌해 없앴다고 기록한다. 일본서기에서는 장수왕 휘하의 장군들이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키자고 제언했지만, 장수왕은 백제는 일본을 섬기는 관가이므로 멸망시킬수 없다고 말하고선 정벌을 멈추었다.[26] 일본서기에선 고마나리는 임나국의 읍이라고 전한다. 충청도 일대도 자신들의 영유지 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27] 웅략 21년 (477년) 3월 기사 참조.[28] 일본서기 사비회의 목록을 참고하자. 흠명 5년(544)[29] 흠명 11년[30] 원문에서는 평양 일대라고 적었는데, 평양 일대가 아니다. 한강 이남의 지역을 남평양으로 추정한다[31] 실제로 목만치등 목씨 일가들이 도왜한 시기는 일본서기에서 이르길 백제가 고구려에게 멸망한 5세기 중반 쯤이다.[32] 그 이전에는 나름대로 가야가 백제에 저항하기도 하고 성왕의 명령을 어기는 등 다소 백제왕의 패권에서 벗어나는 행동들을 해왔지만 사비회의를 직후로 가야는 백제가 하자는 대로 끌려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33] 아마 일본 측에서 임나 = 가야의 통칭으로 당대에 오해한 모양이다. 이게 와전되어 고착되었고 일본서기에서 그렇게 부르니 편의상 임나 = 가야가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지만, 엄연히 말하자면 임나는 가야의 일부이다. 당대에 작성된 광개토왕비를 봐도 어느 쪽이 더 정확한지는 쉽게 알 수 있다.[34] 참고로 중국에서는 구야한국이라고 불렀다.[35] 중국이 금관가야를 부른 명칭 구야한국에서도 구야는 금관에 대응하고 한국은 가야에 대응하는 단어기 때문이다.[36] 임나4현 下哆唎 =전남 여수, 裟陀= 순천, 牟婁 = 영광, 광양, 고창, 무안과 谷那 = 전남 곡성[37] 峴南=익산[38] 支侵 = 충남 홍성 혹은 예산, 또 장수왕에게 백제 개로왕이 죽고 즉위한 문주왕에게 백제를 재건하라며 고마나리 = 웅진을 백제에게 할양했다고 묘사했다[39] 東韓 = 괴산,진천,음성[40] 쉽게 말해 가야연합 10개국 + 침미다례 + 임나4현을 통합한 강역과 비슷하다. 가야 연합은 전남과 경남 일대 침미다례는 전라남도 일대이고 임나4현은 충청북도 근방으로 추정된다[41] 무릇 임나는 안라를 형(兄)으로 여기고 오로지 그 뜻을 따릅니다. 안라인은 일본부를 하늘처럼 여기고 오직 그 뜻을 따릅니다.[42] 夫任那者, 以安羅爲兄. 唯從其意. 安羅人者, 以日本府爲天. 唯從其意[43] 흠명5년 (544년)3월 참고[44] 유구.[45] 해표 : 해외를 뜻한다. 어느곳에서는 한반도를 특정하는 단어로도 사용되고 있다[46] 번국 내지는 속국[47] 官家: 천황의 직할령[48] 下哆唎,上哆唎,裟陀,牟婁[49]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로라고 불리는 임나4현을 제외한 10개국[50] 《삼국유사》가 인용한 《가락국기》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 고령가야(古寧伽耶), 대가야(大伽耶), 성산가야(星山伽耶), 소가야(小伽耶), 금관가야(金官伽耶), 비화가야(非火伽耶) 6국의 가야가 있다고 하였다.[51] 세계의 교과서들도 이러한 임나일본부설을 여과 없이 수용하여 지도에 표기하고 있는 점이 문제가 되고 있다("영어 역사서의 지도 27% 한국 표기 오류"). 이뿐만 아니라 일부 사이트에도 여전히 명기되어 있다.[52] 광개토대왕릉비에도 백제의 사주를 받아 왜군이 신라나 대방(황해도)을 공격한 것이 나왔다.[53] 일본서기의 텍스트를 그대로 읽어봐도, 이 '일본부' 소속 왜인들(이나사, 마도 등) 마치 가야의 안라국에 매수당한 것처럼 안라국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백제가 이에 불만을 가지고 왜국에 따지자 왜국은 우리가 지시한 것이 아니라고 발뺌하는 식으로 나온다. 왜국 중앙정부가 통제하지도 못하고 멋대로 행동하는 기관이라면 당연히 이런 걸 통치기구라고 말할 수는 없다.[54] 한국의 삼국사기는 백제가 멸망하고도 500년 이상 지난 뒤에 편찬되었다. 그동안 남아있었을 백제계 문헌기록은 백제인이 저술한 원형에서 오랜 세월이 지나며 변형되거나 실전되었을 개연성이 높다.[55] 물론 옹관묘는 왜 열도에서 100년 정도 빨리 등장한다. 하지만 옹관묘 자체가 만들기 쉬운 묘제로서 한반도에서 자생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56] 후술하겠지만, 일본은 당대에 기록을 남길수 있는 문자가 없었다.[57] 당연히 구전에 의존한 것으로 역사라고 부를수도 없고 또 신빙성도 기록보다 많이 떨어진다[58] 탁본이나 그와 비슷한 작업으로 복사된 글자를 보고 학자 각자 의견과 해석을 하는것. 필사본과는 엄연히 다르지만 필사본에 자신의 해석을 덧붙인것과 비슷하다고 할수 있다.[59] 雙鉤加墨本[60] 이에 반해 탁본은 의미불명한 문자가 있어도 자연 그대로 놔두고 작업을 진행한다. 즉 자신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확신하여 확증편향으로 글자 윤곽을 만들 가능성이 있는 쌍구가묵본에 비해 더욱 객관적인 방법이라고 할수 있다.[61] 일본서기에서 천황이 한반도 및 주변부 세력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그들이 그 명령을 따르는 위치에 있었다고 설정되어 있다. 즉 백제가 독립적이고 자체적으로 벌인 행위를 "백제가 천황의 명령으로 벌인 행위"라고 써넣는 식으로 일본서기 왜곡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62] 주체교체설 이론 전까지는 일본서기를 연구대상으로 활용하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과장된 임나일본부설 관련 기록을 간파하고, 교차검증이 가능한 상황으로 해석이 가능해지고서야 이런 금기에 가까웠던 분위기가 반전된 것이다.[63] 일본 "임나일본부 없다"…근현대사는 인식 차이↑[64] 사실 왜가 고대 한반도 남부를 기구를 두고 '통치'한 게 아니라 '활동'했던 것 자체만 따지면 삼국사기, 광개토대왕릉비 등 다른 근거도 많아서, 왜가 한반도에 발도 못 디뎠다는 식으로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다. 임나일본부설과는 다른 차원의 논의이다.[65] (여적)임나일본부[66] 연민수, 이영식, 김태식, 백승충, 요시다 아키라, 우케다 마사유키, 스즈키 히데오 등[67] 유의할 점으로, 해당 기록은 중애9년조긴 하지만 중애천황조가 아닌 신공황후조의 기사로 실려있다. 중애천황이 9년 2월 츠쿠시에서 죽고, 신공황후조가 신공1년이 아닌 중애9년으로 선왕의 연호(?)를 이어 받아 시작하기 때문.[68] 지금의 대마도로 추정[69] 고대 일본어에서 하(H)행은 F발음이 났던 것을 주의하면 휘는 Fasa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70] 마찬가지로 하행의 F 발음을 주의.[71] 신공즉위전기 200년의 기사를 참고하자. 일본서기의 기술대로라면 서기 200년이지만, 일본서기의 윤색 때문에 연도가 맞지 않자 근초고왕의 사망기록을 교차검증하여 오차 120년이 있음이 발견되었다. 이를 이주갑인상이라 부른다. 그래서 보통 일본서기의 4~5세기의 기록은 120년을 더해야 한다. 그러므로 320년에 일어난 일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72] 고려라는 고구려의 별칭 또한 당대에 존재하지 않는 국명이었다. 고구려의 별칭 고려는 5세기 중반 장수왕대에 이르러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73] 일본서기를 보면 이때, 이주갑인상을 하여 계산한 320년에 최초로 백제와 외교관계를 성립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삼한정벌 기사에 백제와 고구려왕이 항복하고 나와 이제부터 조공을 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74] 물론 366년에도 통교를 맺지는 못했다. 후술한 내용이지만 그 이유는 어떻게 일본에 당도 해야하는지도 몰라서였다.[75] 신공 섭정 44년을 말한다. 일본서기 묘사대로라면 서기 244년이지만, 이주갑인상을 고려하면 364년이라 하겠다.[76] 이 기사에서 백제인이 탁순국에 도착한 시기는 7월이라고 기록 되어있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에 당도할때 훈풍이 부는 여름에만 항해 했는데, 반대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항해 할때는 겨울이 적합한 시기임을 알수 있다.[77] 일본서기 묘사대로는 246년. 이주갑인상을 고려하면 366년[78] 일본서기의 묘사대로는 서기 200년. 이주갑인상을 고려하면 320년[79] 자세한 항목은 일본서기의 이주갑인상 항목을 참조[80] 정벌은 일본측에서 먼저 하긴 하는데 군사가 부족해서 백제에 원군을 요청하는등 가야를 정복한 주체가 일본 이라고 말하기 어렵다[81] 다만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와 소가만지가 동일인물이라는 설은 김현구 학자의 학설로 근거가 미약하다.[82] 근거로는 소가노 이루카의 이름과 관직으로 제시되는 鞍作大郎, 林大臣, 我 入鹿에서 언급되는 작위 鞍作이 扶桑略記에 의하면 백제불공(百濟佛工)이라고 하고, 일본 고대 황족의 족보인 신찬성씨록에서는 林씨가 백제의 목씨에서 나왔다고 기록했기 때문이다.[83] 박적은 고구려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狛은 글자 외관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맥족이라는 뜻의 貊과 일맥상통한다. 백제어를 통해 왜 貊을 狛과 연결지었는지 유추할 수 있는데, 웅진이라는 지명을 당대 백제인들이 어떻게 불렀는지 알 수 있는데, '고마나리'라고 일본서기에 기록 되어있다. 고마는 웅진의 熊=곰에 대응 되는 단어이며, 일본에서는 Kuma이다. 공교롭게도 일본어에서도 고려=고구려를 Koma라고 부른다. 백제나 고구려는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곰을 숭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와 고구려 모두 맥족이라는 의식이 당대에도 투철했던 것 같다.[84] 이후에 등장하는 기사가 흠명 10년(549년)에 일본이 백제에 370명을 파견해 득이신에 성을 축조하는 내용이 나온다.[85] 此三け国を三韓と云ふ。正は新羅にかぎるべきか。辰韓・馬韓・弁韓をすべて新羅と云也。しかれどふるくより百済・高麗をくはへて三韓と云ならはせり[86] 다만 당대에 통용되던 삼한의 뜻은 마한, 진한, 변한 혹은 세 개의 한국 고구려, 백제, 신라를 지칭하는게 아니라 한반도 남부 일대를 일컫는 지명이라는 의견도 있다. 삼국사기에도 무열왕의 공로로 삼한일통이라고 나오는데, 명백히 고구려까지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이룩한 것은 문무왕이다. 무열왕 당대에는 백제가 멸망한 직후이므로 고구려는 아직 존속되고 있는 나라였으므로, 삼한이 한반도 남부 일대를 일컫는 지명이라는 설이 힘을 얻었다. 자세한 내용은 삼한일통을 참고하자. 이 경우라면 옛 마한 진한 변한의 강역을 통합함 지역을 삼한이라고 부른 듯하다.[87] 601년 3월 5일 기사[88] 후쿠오카로 비정된다.[89] 실제로, 이들 언급된 섬과 구야한국 (김해나 부산)까지 거리를 3으로 상정하고 최단거리 바닷길을 구글맵에서 찍으면 나머지는 1의 비율로 딱 맞아떨어지는데, 이는 40~50 km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육지에선 1里를 400 m쯤, 바닷길에선 1里를 40-50 m쯤으로 삼아 계산한 것 같다. 말로국(지금의 카라츠시)에서 이키섬을 거쳐 대마도까지 거리를 재면 약 80 km인데, 1里를 40 m로 간주하면 2천 里가 나온다.[90] 같은 기사에 나오는 기사인데, 실제 거리로 계산해보면 값이 서로 다르다.[91] 일본 측 공식기록만이 아니라 한중의 기록을 포함하여[92] 貴国[93] 臣國[94] (井上秀雄, 朝鮮史入門92面).[95] 『日本書紀』は日本の現存最古の「正史」とされるが、その編纂までには日本における文字の使用と歴史的記録の登場の長い歴史があった。日本(倭)における歴史、即ち過去の出来事の記憶についての記録としてまず言及されるのは「帝紀」(大王家/天皇家の系譜を中心とした記録)と「旧辞」(それ以外に伝わる昔の物語)である. これらは津田左右吉が継体・欽明朝(6世紀半ば)の頃に成立したと提唱して以来、様々な議論を経つつも、元々は口承で伝えられていた伝承が6世紀にまとめられたものと一般的には考えられている[96] 일본서기에는 헌상했다는 말은 없다. 다만 헌(獻)이라는 글자가 나올 뿐이다.[97] 공교롭게도 왜국의 중국과의 최초 통교 기록은 마찬가지로 진나라며 이후에 아무 관계도 없다가 5세기 초반에 고구려를 통해 동진과 통교하는 정황이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98] 이 기록에 대해서는 413년에 왜국의 사신이 고구려의 특산물인 인삼과 담비 가죽을 바쳤다고 적혀 있으므로, 실제 왜국이 파견한 사신이 아니라 광개토대왕의 남진 정책에서 전리품으로 사로잡은 왜구 포로를 데려와 왜국 사신인척 위장시키고 고구려에게 유리한 증언을 시키게 하여 고구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켰다는 해석도 있다[99] 애당초 수서에는 신라를 고구려 패잔병이 세웠다느니, 신라 왕이 백제 출신이라느니 같은 잘못 알려진 사실들도 다 사실인것 처럼 서술되어 있으니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한 사서라고 할 수 있다.[100] 438년에 안동장군을 하사 받는다. 왜왕 진(珍)은 안동대장군을 자칭했을뿐 안동대장군을 받은 적은 없다. 안동대장군을 하사받은 것은 무(武)의 치세기(478)의 일이다. 무(武)는 후에 정동대장군으로 승급한다.[101] 그리고 고구려는 이보다 두 단계 더 높은 '정동대장군'이라는 직위를 받기도 했다.[102] 鎭東將軍 中軍將軍 鎭軍將軍 撫軍將軍 安東將軍[103] 일본서기에서는 가야 10개국과 전라도 일대 충청도의 일대 지역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임라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가라'와 '임나'를 같이 언급하며 신라 모한 진한 왜 가야=임나를 6개국제군사로 임명한 것은 분명한 오류다. 한국측 서적에서는 임라와 가야가 같이 불리는게 일반적이며 가야를 나라라고 부르는 일반명사로 추정하고 임나는 지역명으로 칭하는 용례가 많다. 광개토대왕릉비에도 삼국사기에도 임나가야가 같이 불리면 금관가야 즉, 가야의 일부분을 칭한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의 기록이나 광개토대왕릉비 + 삼국사기의 기록 어느쪽을 봐도 임나 혹은 가야를 별개의 명칭으로 부르는 것은 말이 되지만 임나 가야를 같이 언급하면서 다른 국가로 취급하는 것은 어느쪽의 정보를 취한다고 해도 이치에 맞지 않다.[104] 다만 임나가 가야의 연맹체 국가의 일부라는 해석은 가능하지만 "국가"라고 칭하며 임나와 가야을 동렬로 병기하고 있다.[105] 六國 = 6국 = 여섯 나라[106] 1992년에 한국어로 발간된 "임나일본부와 왜의 요청", 출판사 -가야문화 참조[107] 한일공동역사연구회 단락에 첨부된 1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 5세기 노중국 교수의 논문 내용이다.[108] 아래 항목에 첨부된 한일공동역사연구회 1기 고대사 - 5세기 노중국 교수의 논문 pg 182쪽 참조[109] 실제로 이 학설은 일본학자들의 지지를 얻는 학설이다. 제2차 한일역사공동연구회 하마다 고사쿠가 투고한 논문에 내용이 있다.[110] 임나=금관가야 혹은 임나가라 = 금관가야의 용례는 삼국유사 광개토대왕릉비 등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그것은 고대 한국인인들의 인식이지 일본인들의 가야,임나의 정의와는 차이를 보인다.[111] 이 경우도 대가야로 추정됨[112] 노중국 교수 또한 김태식 교수와 의견을 같이하여, 일본 학자들이 주장하는 고구려가 왜의 변방(백제의 영토)의 속한 곳을 약탈하려고 한다가 아닌 왜가 황실에 보낸 遣使船으로 해석했다. 노중국 교수의 1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 5세기 논문 207쪽을 참고[113] 두 나라는 고구려와 신라를 말한다.[114] 어쩌면 훨씬 더 이전일수도 있다. 신라가 고구려를 따라 북조에 조공하는 모습이 기록에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115] 다만, 통합이 이뤄졌다하여 중앙집권국가가 출현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4~5세기의 왜를 일본 열도 전체 단위의 수장 연합정권으로 보는 것은 문헌사학과 고고학계 불문하고 현재 일본 학계의 통설적 견해이다.[116][116] 이재석, 『고대 일본의 국가성립을 보는 시점」, 『일본역사연구』 제40집, 2014, p.88. ; 이근우, 『5세기의 일본열도」, 『왜5왕 문제와 한일관계』, 2005, pp.206~207[117] 노중국 교수의 논지는 일본은 5세기 이르러 통일의 초석을 마련했으므로,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고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된 왜군의 존재를 축소하려고 했고, 일본측은 최대한 일본열도가 통일된 시기를 빠르게 잡아, 최대한 왜군의 영향력을 인정받으려는 취지이다.[118] 왜국 자신들에게 당면한 위협은 조공을 하기 위한 보물선 등이 약탈 당하는데 위험이 있다는 것이지, 고구려가 왜국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은 아니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즉, 왜국과 고구려는 국경을 맞대지 않고 있으니, 일본측이 주장하는 고대 한반도 남부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축소하려는 목적의 발언이다.[119] 현재에 와서는 이런 일본서기의 와전을 받아들여 편의상 임나=가야라고 하는 편이다[120] 모용족의 침입으로 동부여가 세워진 연유와 비슷하다.[121] 일출의 천자가 일몰의 천자에게[122] 김후련,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고대일본의 자타인식」, 『역사문화연구』21, 2004[123] 물론 구마모토 철검명이 5-6세기의 물건으로 소급 할수 있기 때문에 그 이전에 문자가 있었다고 반론 하겠지만, 이 뜻은 체계적인 사관제도와 문서행정이 없었다고 해석하는게 옳다. 왜국 소수의 상류층이나 왕족에서 한자를 사용하기는 오래전부터 사용 했을 것이다. 당연히 중국계 왜인도 상당히 이른 시절부터 들어와서 살았을 것이고, 삼한 및 백제 가야 신라인들도 많이 이주 했었을 테니깐.. 중국과 야마타이의 최초 통교는 1세기 경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당시 왜국 내에서 한자를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주장이다. 더 후대로 가면 왜5왕 중 한 사람이 남송에 보낸 국서를 보면 상당히 유려한 한문을 구사하는 것으로 반추 할수 있지만, 학자들 다수는 이 국서는 개로왕이 북위에게 보낸 국서와 유사점을 들어 백제계 혹은 중국계 백제 출신이 작성 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124] 수서에는 배청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일본서기에는 배세청이라고 되어있다. 삼국사기에도 중국 수나라 사절이 백제를 기착지 삼아 일본으로 갔다고 기록 되어있다.[125] 애초에 양서나 송서의 다소 일본에게 유리한 내용을 반복하며, 내용을 살짝 바꿨을 가능성도 있다.[126] 물론 倭皇은 일본서기의 기록이니깐 공식적으로 중국측이 그렇게 불렀는지 안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본서기에서 쓰는 천황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혹자들은 倭皇이라는 표현을 중국 황제가 인정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127] 그러나 이것은 오기일 가능성이 크다. 3세기인 삼국지에서 이미 야마타이국과 주변국가들의 인구 합산은 15만호 이상으로, 7세기 무렵에 이미 다 일대를 통합했다고 치면 이것보다 훨씬 컸을것이다.[128] 삼국유사에 의하면 7세기 무렵에 76만호라고 한다. 아마 당나라측에서 집행한 호구조사에 기반한 기사로 추정[129] 대부분 후한서에서 차용한 것들로 6-7세기의 실상을 반영한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다만 그릇이 없고 손을 사용해서 먹는다는 것과 문자가 없다는 내용은 수서에서 처음 등장하며, 북서에서 차용했다.[130] 岸은 해안할 때의 안이다. 즉 바닷가라는 뜻이다[131] 물론 앞서 말했듯이 이건 왜곡된 것이다.[132] 그러나 이것은 사실에 기반한 발언이긴 하다. 신라의 6세기 초 까지만 봐도 금문석이나 문헌을 보면 신라어의 어순 그대로를 사용해서 한자로 표기하는 등 엉망이었다고 한다. 그에 비해 고구려와 특히 백제는 중국인 이민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높은 문장력과 한자 구사 수준을 보이고 있다.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를 보면 중국의 고전을 수없이 인용하며 자신들의 세련된 문장력을 한껏 뽐내고 있다. 여담이지만 후에 7세기 경에 중국에서 사망한 흑치상치의 무덤만 봐도 어릴 때부터 중국 고전을 독학하고 있었다는 등의 자뻑을 한다. 이를 보아선 당대 백제인들의 교양 수준은 매우 높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133] 신라는 381년에 처음으로 중국 전진(북조)에 위두(衛頭)를 파견하여 북조와 통교를 맺은 바 있다.[134] 이는 놀랍게도, 고구려 안장왕이 받은 영동장군(寧東將軍) 직위보다 오히려 위다.[135] 실제로 중국 북조와 남조는 누가 더 많은 조공국을 모으냐를 두고 경쟁을 하고, 입조하고 조공을 한 번국들에게 더 많은 물품을 하사하며 그 조공관계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왜냐하면 서로 누가 더 강대국이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냐 등을 통해 대외인식으로 정통성을 확인받고 싶었기 때문이다.[136] 참고로 여기 양직공도에 적힌 '사라(斯羅)'라는 국가가 '신라'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도 신라인들이 자신들의 나라 이름을 분명 '사라(斯羅)'라고 기록하는 등 '사라(斯羅)'는 분명 당대 신라인들이 자신들의 나라 이름을 한자로 음차해 표기하던 또 다른 국명이 맞다. 신라는 원래 초기에는 사로국, 사라, 신라 등 여러 이름이 혼용되었는데, 당시 고유어 이름을 (아직 한글이 없었던 시대이므로) 비슷한 음의 한자를 제각기 끼워맞춰 자신들의 국명을 한자로 음차하여 표기한 것이다. 물론 이를 반박하여 사라가 신라를 뜻하는지 확실치 않고, 양직공도에서는 사라라 하지 않고 신라라 하였으며, 양직공도가 만들어질 무렵에도 백제는 사라가 아닌 신라라는 명칭으로 불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대에 신라를 제외하고 '사라(斯羅)'라는 국명을 쓰는 별개의 국가가 신라와 함께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기 때문에, 사라(斯羅)는 신라의 또 다른 음차라고 보는 것이 학계 주류의 의견이다.[137] 이러한 예는 중국의 책봉 사례에서 수도 없이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진덕여왕은 '신라낙랑군왕'으로 책봉되었는데, 낙랑은 정작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에 있었다. 백제의 위덕왕 또한 '동청주지사'라는 책봉명을 받았는데, 동청주는 참고로 '중국 산둥지방'이었다. 이러하듯이 남의 영토 이름을 책봉명으로 하사받는 일은 당시에 매우 흔했다.[138] 알렉산더 보빈이 왜 한국어가 부여어족(고구려어)의 직계후손이라는고 설명하는지 이해가 가는 구절이다. 즉, 진한계 언어를 고구려계인 신라가 밀어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139] 신라의 기원을 고조선에서 찾는 국내의 사서들과 대조적이다.[140] 별개의 내용이라면 연대 순서대로 391년-395년-396년순으로 서술 되어야 하지만, 395년의 거란의 일족인 패려를 토벌한 기록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391년으로 되 돌아와 신묘년의 391년 396년.. 404년 순서대로 서사하기 때문이다.[141] 훼손된 부분을 '伽倻新가야신'으로 보고 이어서 '百殘伽倻新羅백잔가야신라'라고 볼 수도 있다.[142] 가야(伽倻)•가락(駕洛)의 다른 이름[143] 석회가 발라지기전의 탁본 여러개를 집중 연구했다[144] 김진명이 유사사학을 주장하는 괴랄한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설은 이덕일 일당들이 적극적으로 밀고 있다. 사진의 출처는 김진명의 소설이며 정확한 진위는 알수가 없다. 왕건군의 어느 서적에서 가져왔는지도 찾을수 없다 (찜찜)[145] 제2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 제1권 고대사 부문에서 이 학설을 채택하고 있다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0/10/1-allk.pdf[146] 보통 자신이 본 문자를 자의적으로 판독하여 해석하는 것을 석문이라고 하지만, 논문에 언급 되어 있다 싶이, 초천부 초균덕 부자는 고문서에 일가견이 없는 소시민으로, 자신들의 주관이 개입할 여지가 낮다고 판단하여, 필사본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147] https://www.i-repository.net/contents/outemon/ir/301/301811209.pdf#search='%E6%9B%B4%E8%A8%8E%E3%80%8C%E8%BE%9B%E5%8D%AF%E5%B9%B4%E3%80%8D+%E6%9D%B1+%E6%B8%A1+%E6%AC%A0%E5%AD%97[148] 고구려가 391년에 관미성을 공격한 사건의 발단은 백제가 먼저 같은 해 8월에 고구려를 침략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 되있고, 이 침공을 막아내고 같은해 10월에 백제에게 보복하러 토벌에 임한것임을 알수 있다[149] 그러나 이것은 정확히 신묘년의 기사이긴 하나, 고국양왕이 승하하기 전의 일이다. 이를 두고 고구려측에선 신라가 신묘년 이전의 속민의 근거라고 생각 했을수도 있다. 실제론 삼국사기에서 조공의 기록은 전해지진 않지만, 누락 되었을수도 있는 노릇이기 때문. 후에 400년 기사에 신라가 고구려에 조공을 해왔다고 분명히 비석에 명기 되어있지만 이 또한 삼국사기에서 전하지 않으니 누락 되었다고 이상한 일은 아니다.[150] 화통은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에서 사용하는 단어다[151] 아마 태자 전지왕을 397년 (혹은 광개토대왕릉비 기년 기준으로 396년이다.)에 왜국에 파견해서 군대를 원조 받는 것을 두고 화통이라고 고구려측에서는 이해 했는듯 하다.[152] 종래에는 왜가 노객을 백성으로 삼으려한다는 해석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그렇게 해석하는 학설은 소수 의견이다. 뒤에 첨부된 일본학자 하마다 고사쿠도 신라왕이 자신을 대왕의 노객이라고 자청하며 그의 신분은 고구려의 民이니 왕께 귀의 합니다 라고 해석한바 있으며, 가야사 연구자 김태식 교수 또한 왜가 신라왕을 民으로 삼았거나 삼으려고 했다면 광개토왕에게 사신을 보낼수도 없는 처지니, 모순이라고 발언한바 있다. 일본측에서 이때부터 신라가 고구려에 복속하게 되었다고 해석하고, 일부 한국측에서는 신묘년 고구려 주체설을 내세우며, 그 이전부터 (391년부터) 복속 해석했다고 한다.[153] 신민의 뜻[154] 같은 용례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광개토대왕비릉 말고도,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에서도 등장한다[155] 전지왕이 397년에 태자 혹은 왕족 신분으로 왜국에 파견된바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인질이라고 나오지만, 당대의 사서인 백제삼서중 하나인 백제기를 인용해 기사를 작성한 일본서기에서는 친선을 다지기 위해 보냈다라고 나올뿐이다.[156] 백제'와 '왜'라는 양 당사자 간에는 '선왕이 쌓은 우호를 잇기 위해 방문하였다'[157] '내조하였다.'[158] 2005년 전북대의 김병기 교수가 제기한 주장. 하지만 한국사 전공자가 아닌 한문학자라 설득력이 떨어진다. 2018년 1월 3일 JTBC 차이나는 클라스 방송에서도 이 주장을 사실인 양 내보내서 논란이 되었다.[159] 현재로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석의 오류가 아니라 삼국사기의 오류라는게 중론이다. 단순히 고구려본기에서만의 오류가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교전이 서술되어 있는 백제본기와 눌지왕의 기록을 토대로 역산해보면 신라본기에서도 오류가 나타남을 알수 있다.[160] 백제의 소실된 역사책인 백제삼서를 인용한 일본서기에도 백제삼서를 인용한 아신왕 진사왕에 대한 기록에서 1년 오차가 있음을 알수 있다. 즉 삼국사기와 백제삼서는 기년을 같이하고 있다.[161] 392년 1월 기사이다[162] 401년에 귀국하여 이듬해 402년에 왕위를 이어받은 실성 마립간이다. 정치적 입지도 변변치 않았고 직계도 아니었던 그가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고구려가 친고구려파의 수장격인 실성마립간을 후견 했을거라는 의견이 대세다.[163] 삼국사기에 따르면 같은 해 5월에 즉위한다.[164] 410년 기사 : 영락 20년 경술년,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다.[165] 이에 대해서는 한국 학계에서는 내물왕이 직접 알현하며 조공을 바쳤다고 해석하지만, 일본학계에서는 후에 고구려로 인질로 파견되는 복호를 시켜 알현하며 조공을 했다고 주장한다[166] 이에 대해서는 김태식 교수가 후술하였는데 신라 내물왕이 광개토왕에게 사신을 보내 (신라왕 자신을 ) 고구려의 노객이라고 칭하며 "(고구려의)노객은 (그 신분이 대왕의)民(백성이니) 귀의하여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해석하였다. 일각이나 일본 측에서는 "(고구려의) 노객을 (내물왕) 왜가 (그들의) 民으로 삼았다." 혹은 "삼으려고 한다."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 경우에는 내물왕 스스로가 사신을 보내어 구원조차 요청하지 못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고 발언 하였다. 같은 학회에서 4세기를 당담한 하마다 고사쿠 역시 개인이 투고한 논문에서 같은 근거를 들어, 김태식 교수와 의견을 같이 했다.[167] 또한 399년의 기록의 바로 앞 기사인 396년 기사를 보면, 아신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노객을 칭하고 있다. 프로파간다적 성격이 매우 짙은 릉비의 기록의 성격상, 내물왕이 자칭하고 있는 노객이란, 백제 아신왕의 경우와 동일하게 고구려의 노객일 가능성이 객관적으로 봤을때도 높다. 이 경우 신묘년 신민의 고구려 주체설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신민은 스스로 복종하여 신하를 자칭하는 처지이며, 단순히 조공을 수취하는 속민의 관계보다 더욱 종속성이 강하다고 볼수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것이 바로 뒤에 등장하는 400년 기사에서는 신라에 구원병을 보내 왜구를 격퇴 시키고 나서, 여태껏 신라왕이 스스로 입조하여 조공한적은 없었지만, 스스로 대왕을 알현하고 조공 했다고 기록 되어 있지 않은가[168] 396년, 399년, 400년, 404년, 407년 기사들은 모두 백제, 왜,신라, 가야에 관한 기사다.[169] 이해의 정복 기사는 정확히 무슨 세력을 정복했는지는 문자 파손이 너무 심해서 알수 없지만, 지명으로 보아 백제로 추정한다. 즉, 일본학자들은 신묘년조가 407년까지 수식하며,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경우에는 신묘년 기사를 활용하여, 407년까지 왜구의 세력이 어떤 방식으로든 주도적으로 개입했다고 주장한다.[170] 일본학계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신묘년 기사가 396년 399년 400년 404년 407년 기사들을 모두 수식하는 것이라면 395년 비려(稗麗)을 정벌한 기사처럼 따로 앞으로 빼내서 서술해야 하는데 8년조의 숙신에 대한 기사의 앞뒤는 396년 백제 정벌과 399년 신라의 내물왕이 노객을 자청하며, 성지에 가득찬 왜군을 격퇴 시켜달라고 요청하는 기사다. 391년 기사와 396년 백제 정벌 기사만 그 맥락이 닿아있고, 그 후에 등장하는 399년 400년 404년은 맥락상 다른 결이라는 것이다.[171] 실제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중원 고구려비는 당초 알려진것과 다르게 광개토대왕 치세기인 영락 7년 정유(정유년)라는 문자가 써져있음을, 3D 스케닝을 통해 동북아역사재단이 밝혀냈다. 고로, 학계의 기존 정설이던 광개토왕의 치세기 이후에 신라가 속민화 되고 더 나아가서는 신민화 되었다는 주장과 전면 대치되며, 신라의 신민화나 종속화가 된 시점은 영락7년에서 더 이 전일수도 있다. 다만 이는 아직 연구중인 사안이니 더 기다려봐야 한다.[172] 왕의 즉위 원년을 기념하기 위해 그 해에 만들어졌을 공산이 매우 크다. 즉, 1차 사료로써 아주 큰 의미를 지니며, 릉비가 오산으로 오기 되었을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것이다[173] 일본 주장대로 신묘년조를 해석할 경우 가장 큰 약점이 바로 일본서기에도 5만 대군의 고구려군과 싸운 전쟁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174] (日本每日新聞 1971, 8, 9, 日本史の虛像と實像).[175] 407년의 지명에서 백제 원정임을 암시하는 문장들이 있다.[176] HD역사스페셜 - 한일역사전쟁! 영산강 장고형 무덤[177] 출처 : HD 역사스페셜 한일역사전쟁, 영산강 장고형 무덤편.[178] 물론 이는 호남지역에서 확인되는 주구묘와는 다른 개념이며 특히 전방후원분과는 관련이 없다.[179] 국보 295호 나주 신촌리 금관 그러나 이것이 백제 중앙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이 아니냐는 논란도 크다[180] 대체로 한반도와 활발한 교역관계를 보인 서일본계의 세력으로 추정한다.[181] 498년(문주왕 2년)에 탐라국이 조공을 바쳐왔다는 기사가 등장한다.[182] 변한, 마한, 진한.[183] 내조 외조의 내조가 아니라 來朝 즉, 조공왔다 혹은 朝에 참여했다라는 뜻이다[184] 여기서 언급되는 태자는 후에 백제18대 국왕 전지왕이다. 다만 후술할 내용으로 전지왕은 일본서기에서 인질이 아니다. 일본서기 277년 3월 기사 참조[185] 삼국사기에선 태자라고 기록 되어 일본서기와 충돌한다[186] 부여풍의 경우에는 백제 왕자 중 유일하게 일본서기에 질(質)이라고 표기 되어있다.[187] 일본서기에서는 말다왕이라고 지칭한다.[188] 웅략 23년(479) 4월 기사 참조[189] 전형적인 일본서기식 윤색이다[190] 웅략 5년(461) 7월 기사 참조[191] 응신 277년 기사 참조. 다만 삼국사기에는 인질이라고 적혔다.[192] 다소 장황하지만 이 이상의 분석은 고고학적인 분석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무령왕릉의 예를 들자면 무령왕릉이 만약에 지석이 출토되지 않았더라면 완벽한 중국 남조의 무덤과 동일한 양식의 무덤을 어떻게 해석했을 것인가라는 점이다. 신라왕릉처럼 기존에 유지되었던 무덤의 형태도 아니거니와 새롭게 나타난 형식의 무덤을 과연 왕의 무덤이라고 설정하였을 수 있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이처럼 구체적인 피장자의 세세한 성격의 도출은 전방후원분처럼 돌연 나타나는 양식의 무덤에서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따라서 문자기록의 존재를 바라야하는 상황인데다 관련 역사적 분석은 필수이며, 자연과학적 분석도 여건이 마련되어야만 더 상세하게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자자료 등이 고분 자체에서 나올 확률은 거의 0에 수렴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해석의 난립이 존재하는 것이다. 무령왕릉이 행운이 따라준 경우라고 할 수 있다.[193] 중앙아시아에는 노예라는 표시로 편두를 시키는 풍습이 있었다. 가야에도 이런 풍습이 있었을 수 있다.[194] 왜의 무인.[195] 日羅, にちら. 아리사등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196] 마한에 대형 옹관묘가 발굴되는 것.[197] 지금은 일본 고고학적 조사에서 고고학의 발전에 의해 5세기까지 내려가는 추세다.[198] 일찍이 중국 한사군도 가야의 전신인 변한에서 철을 수입했다고 중국 기록에도 나타나고 있다.[199] 당연하지만 결국 인정받지 못했다.[200] 임나일본부를 옹호했던 학자이다.[201] 놀랍게도 이러한 사실은 훨씬 훗날인 14세기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때에도 똑같이 되풀이된다! 왜구들 역시 여름에 집중적으로 나타나 고려를 약탈한 반면, 겨울이 되면 그 횟수가 거의 없어지거나 심지어 1350년부터 1375년까지 약 26년 동안 한겨울인 1월에는 아예 왜구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아래에 서술한 대로 겨울이 되면 대한해협에 역풍이 불어 일본에서 한반도로 오는 배가 항해하기 매우 어려워지고 심지어 역풍에 배가 휩쓸려 침몰할 위험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202] 일본서기에 기록된 부여곤지가 도왜에 소요된 기간은 2~3개월이다. 일본서기에는 부여곤지가 461년 4월에 파견 되었으며, 무령왕이 태어난 시기는 같은 해 6월1일이다. 물론 여름에는 일본쪽에서 한반도 방향으로 부는 계절풍의 영향을 고려해야 하지만, 무령왕 또한 왜국으로 항해하는 중도에 태어났다고 했다. 정확히는 사가현 인근의 섬에서 태어났는데, 완전히 당도하지 못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앞선 601년 기사에 급박하게 임나를 구하라고 백제와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면, 백제의 경우에는 2-3개월, 고구려 같은 경우에는 더 많은 세월이 소요 되었을 것이다. 수나라 사신 배청이 왜국에 방문 할때도 삼국사기에는 608년 3월에 백제를 경유 했다고 기록 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에서는 같은 해 4월에 일본에 도착 했다고 한다.[203] 고구려의 사신과 함께 북조에 입조한 정황도 드러나는데, 이것은 육로를 통한 교류이고 또 광개토대왕이 신라 구원전에서 사로잡은 왜구를 데려와 왜국 사신처럼 꾸미고 고구려에 유리한 발언을 시켰다는게 중론이다. 문서 왜5왕 413년 기록에 대한 서술을 참고.[204] 후한서 동이전 建武中元2년의 기록을 참조[205] 중국 수나라에서 쇼토쿠 태자의 과대망상적인 헛소리가 담긴 국서를 읽고, "황제는 왜황에게 묻는다(皇帝問倭皇)"의 내용의 국서와 함께 사신을 파견했는데, 수서에는 백제를 경유해, 탐라국을 바라보며 쓰시마섬을 거쳐 이키국을 통해 왜국에 당도 했다고 기록 되어 있으며,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 9년 (608년)백제를 경유 했다고 기록 되어 있는 기사가 있다. 선술된 백제인이 수 황제의 국서를 강탈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과 동일한 사건이다.[206] 노중국 교수가 한일역사공동연구회에 투고한 5세기 논문 207쪽을 참고[207] 일본서기 554년의 기록을 보면 백제가 구원병을 요청하는데 왜왕이 1천명의 병력을 40척의 함선에 태워 수송 했다고 전해지며, 백촌강 전투를 봐도 배 한척당 탈수 있는 군인의 수는 25명 정도 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208] 마찬가지로 이 용병들이 도착한 시기는 554년 6월이다.[209] 지역 시민구단인 경남 FC의 엠블럼에도 등장한다.[210] 노중국 (2006), 4세기 가야제국과 백제의 관계.[211] '일본인들의 조상이 한반도 남부에 살았다'라는 게 되어 임나일본부설 및 이덕일의 역사 왜곡이 연상되기에 충분하다.[212] 일본 우파는 현대 일본인의 조상이 되는 도래인의 대부분이 한반도에서 유래했다는 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213] 당연히 임나일본부설 등 일본인의 한반도 남부 지배 및 경영설을 뒷받침할 수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214] 물론, 그렇다고 이 시기의 일본사가 한국사가 되지는 않는다. 한국인들이 민족주의 사관을 바탕으로 하기에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215] 김태식 교수는 사사노궤를 인명에서 백제인이라고 추정하고 보고서 논문에 투고했다.[216]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기사와 착각해서 잘못 말했지만 지적 당하고 가야7국 평정이라고 수정했다.[217] 일견 타당한 이유가 선술된 일본서기에서도 백제가 왜국과 통교하기전에 왜국과 통교하고 샆다며 먼저 찾아간 곳은 가야의 일부인 탁순국이다.[218] 백촌강 전투를 재외하면, 왜군이 가장 큰 규모로 신라를 침공 했을때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462년 기록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신라는 왜군에게 패배하여 1000여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물론 이듬해에 신라가 반격에 나서고, 그들을 격퇴 시킨다[219] 앞서 선술된 중국 집안에서 발견된 청동거울과 신묘년이라고 적힌 기록을 두고, 토론회에 참석한 조법종 교수도 왜국 주체설에 대해 회의감을 드러낸바 있다. https://news.joins.com/article/283056 고로 한국측 주류사학계에서도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 왜국 주체설에 대한 의구심이 있는건 맞다. 다만 확실히 논박할만한 근거가 아직 빈약하기에 아직 조사나 연구가 진행되거나 확실한 근거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다.[220] 그도 그럴것이 개찬설을 주장했다가 이미 일부 보기좋게 논파 당했으니 신중하게 접근하려는 한국학계의 태도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한국 학계가 광개토대왕릉비에 관심을 가지게 된 시기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이전에는 전쟁의 풍파와 급속한 변혁기 등을 거치면서 전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에 일본의 광개토왕릉에 대한 조사는 100년이 넘었으니, 지금까지는 수세에 몰렸던게 당연하다. 한국학계가 광개토왕릉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길어봤자 3-40년 정도이다. [221] 이노우에 히데오가 주장하였다. 다만 고고학적 증거가 미비하다고 한다. 역사비평 편집위원회,'논쟁으로 읽는 한국사1', 역사비평사, 2009, p81-83[222] 역사비평 편집위원회,'논쟁으로 읽는 한국사1', 역사비평사, 2009, p84-85[223] 흔히 말하는 아라가야[224] 링크는 2차 보도이며 KBS 9시 뉴스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각 지역의 동산들이 전방후원분이라는 주장으로 해당 동산이 정말 전방후원분이라면 일본의 것보다 훨씬 크다는 주장인데, 진상이 다 밝혀진 2016년 현재는 원본기사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