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정 시기부터 호민관이 가졌던 권한은 ①원로원 의결에 대한 거부권 ②민회를 통한 입법권(원로원 의결과 동등함) ③신체에 대한 불가침 특권이다. 각 권한이 부여된 취지를 살펴보면, ①은 원로원이 귀족에게만 유리하고 평민에게 불리한 법이나 정책을 시행하는 것을 견제하고 ②는 평민의 입장을 반영한 법이나 정책을 제정하고 시행할 여지를 제공하며 ③은 힘을 가진 원로원 및 귀족 세력이 평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호민관을 함부로 해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부여된 것이었다. Show
3.2.2. 중세[편집]서로마 제국이 붕괴한 뒤에 생긴 유럽의 황제는 필요 요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로마 황제(혹은 그 후계자)라는 타이틀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폴레옹 시대 이전까지 서유럽에서는 신성 로마 황제가 서유럽 세계의 유일한 황제로 인정받았다. 3.2.2.1. 조건: 로마 황제의 후계자[편집]유럽에서 황제를 칭하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로마와 관련 있거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첫째로 로마가 아닌 국가를 계승하는 황제가 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유럽 세계의 실질적 전부를 지배한 사람은 로마 황제 말고는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권위에서 너무 차이가 났다. 둘째로 자신부터 시작하는 황제도 큰 의미가 없었다. 중세 내내 '로마 제국'과 어깨를 겨룰 정도의 국력을 갖춘 나라는 존재할 수조차 없었으므로 누가 인정을 해줄 이유도 없었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권위는 매우 떨어져 있고 주변의 어그로만 끌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3.2.2.2. 서유럽의 우회적 조건: 교회의 인정[편집]신성 로마 제국 초대 황제
3.2.3. 근세 이후[편집]3.2.3.1. 신성 로마 제국의 선출 황제[편집]중세에서 근세로 이행하며 서유럽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변화가 생기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의 자격에도 변화가 생긴다. 15세기 막시밀리안 1세를 기점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더 이상 교황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직 선제후들의 선거로만 황제직에 올랐다. 3.2.3.2. 19세기 유럽 - 나폴레옹과 그 이후[편집]프랑스 제1제국 황제
3.2.3.3. 편법으로 황제가 되는 방법[편집]재미있는 것은 이때까지 보았듯이 유럽인들은 황위에 있어서 로마 황제(또는 그 후계자)로서의 정통성과 권위를 극히 중시했지만, 정작 유럽 밖의 황제들에 대해서는 '아 그런 게 있나보다'하고 쿨하게 인정하고 넘어갔다는 점이다. 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한 제국은 로마 제국이 유일했으므로 '유럽 내의' 황제는 로마 황제 뿐이지만, '그 외의 땅'에 대해선 로마 황제가 아닌 다른 황제가 있을 수도 있다고 순순히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최대 수혜자가 러시아 차르인데, 차르가 동방 정교회 세계의 황제라는 인식 덕분에 의외로 서유럽에서 별다른 이견없이 황제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 부분이 자신들이 세계의 유일한 제국이고 황제라 생각했던 중국과의 큰 차이점이다. 3.2.3.4. 19~20세기 서양의 황제국 목록[편집]
3.3. 남아시아[편집]마우리아 제국 초대 황제
3.4. 서아시아[편집]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초대 왕중왕
3.5. 중앙아시아 유목제국[편집]몽골 제국 초대 대칸
3.6.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편집]동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는 1974년, 하일레 셀라시에가 폐위되기 전까지 황제를 모시는 제국이었다. 솔로몬과 시바 여왕을 전설적 조상으로 한 솔로몬 왕조가 그것인데, 황통(皇統)이 3000년간 이어져 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 황실이 만세일계라고 주장하지만 실은 아닌 것처럼 사실 에티오피아의 황통 자체는 여러 줄기에서 이어져 왔던 것이며 3천 년 황통설은 근대 국가를 확립한 메넬리크 2세 시대에 만들어진 신화라는 설이 유력하다. 3.7. 아메리카[편집]아메리카의 국가들 중에서는 아즈텍 제국의 군주 '틀라토아니', 잉카 제국의 군주 '사파 잉카'도 보통 황제로 번역되어 불린다. 이들은 스페인 콩키스타도르의 기습침공으로 황제가 너무 쉽게 생포되어버려, 무력하게 제국이 무너지는 한 요인이 되었다. 4. 황제로 보기 미묘한 사례[편집]4.1. 한자문화권[편집]자세한 내용은 외왕내제 문서 를 의 번 문단을 의 부분을 참고하십시오.4.1.1. 고려/조선[편집]한국사의 조선은 외적으로 '황제국'을 공표한 적은 없으나, 외왕내제적인 요소를 많이 차용했다. 또한, 고려에 비해서 많이 이런 요소를 걷어 냈으며, 고려의 외제내제적 요소를 비판하기도 했으나,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을 일부 차용하긴 했다. 그 외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등 한국 고대왕조들도 황제라는 명칭은 사용하진 않았지만, '독자 연호'나 '번국 책봉' 등 제국 성격을 드러내는 요소가 등장하기도 했다.
4.2. 유럽[편집]4.2.1. 동로마 제국 부흥운동[편집]제4차 십자군 전쟁으로 인하여 동로마 제국이 붕괴하고 잠시 라틴 제국이 들어섰다. 그로 인해 동로마 제국 재건을 위해 아나톨리아에서 황제의 사위 가문이었던 라스카리스 가문의 니케아 제국과 옛 황제 가문이었던 콤니노스 가문의 트라페준타 제국이 생겨났으며, 니케아 제국은 후에 팔레올로고스 가문이 제위를 찬탈하고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여 동로마 제국을 재건하는데 성공했다. 4.2.2. 중세 스페인[편집]11세기 무렵 스페인 왕국의 전신인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왕 알폰소 6세는 자신을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로 자칭한 적이 있었다. 문제는 위에 나온 것처럼 유럽에서 황제를 칭하려면 명목상 로마 제국을 계승해야 했기 때문에 주변국의 불평을 대차게 샀고, 이 황제 칭호는 딸 우라카, 사위 알폰소 1세, 외손자 알폰소 7세 때까지 3대에 걸쳐 사용되다가 이후 버려졌다. 4.2.3. 근대 불가리아&그리스[편집]1946년까지 불가리아의 공식 국호는 불가리아어로 차르스트보 벌가리야(Царство България)로 불가리아의 군주는 불가리아어로는 '차르'로 불렀다. 그러나 이 국호는 타 언어로는 "불가리아 왕국"이라 번역되고 불가리아의 차르는 "국왕"으로 번역된다.[78] 비슷한 예로는 19세기부터 1970년대까지의 그리스 왕국이 있다. 그리스 왕국의 군주는 동로마 황제가 썼던 '바실레프스' 칭호를 썼지만, 대외적으론 왕으로 번역했다. 오늘날 그리스에서 황제를 가리킬 때는 동로마 황제의 또다른 칭호였던 '아프토크라토르(Afrokrator)'[79]라는 단어를 쓰고, 바실레프스의 현대 그리스어 변형인 '바실리아스'는 왕을 뜻하는 단어로 쓰이는데, 바실레프스를 그대로 쓸 때는 문맥을 보고 왕인지 황제인지 판단해야 한다. 4.2.4. 근대 이탈리아[편집]제2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 왕국은 1936년 에티오피아 제국을 점령하고 인도 제국을 본따 당시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이탈리아 국왕 겸 에티오피아의 황제 칭호를 주었다.[80] 그러나 국제사회는 이를 사칭으로 보고 인정하지 않았으며 1941년 영국에 의해 에티오피아 제국이 해방되면서 명목만 남았다. 게다가 1943년 9월 베니토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피에트로 바돌리오 내각이 들어서면서 이탈리아 왕국이 추축국을 탈퇴하자 허울뿐인 에티오피아 황제 겸임도 공식 폐지되었으며 몇년뒤에는 본토인 이탈리아의 왕정도 국민투표로 폐지되었고 이탈리아는 공화국이 되었다.[81] 4.3. 남아시아[편집]4.3.1. 네팔[편집]남아시아의 네팔을 다스린 군주들은 굽타 황제의 칭호였던 '마하라자디라자(왕중왕)을 칭했으나, 대외적으로는 네팔 왕국이라 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및 작위 요구자/아시아 문서 참고. 5. 추존 황제[편집]수 많은 왕조에서는 살아생전에 황제를 한 적이 없지만 후손을 잘 둬서 죽은 이후 황제로 추서된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삼국지에만 여러명이 등장하는데 그 예가 조등, 조숭, 조조(이상 위나라), 손종, 손견(이상 오나라), 사마의, 사마소(진나라) 등이 있다. 조선 왕조도 대한제국 선포 후 건국자인 태조와 정조에서 철종까지의 군주들을 황제로 추존하였다. 6. 참칭 황제[편집]나라에 혼란이 올 때 실제로는 황제도 아니면서 황제라고 사칭하거나 황위계승권자도 아니면서 황위계승권자라고 사칭해서 황제 자리를 차지한 가짜 황제들도 여럿 있었다. 삼국지만 해도 원술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며 일본의 경우 타이라노 마사카도가 천황을 사칭했었다. 특히 러시아 제국의 가짜 드미트리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6.1. 아시아[편집]6.1.1. 한국[편집]
6.1.2. 일본[편집]출처: 호사카 마사야스 - 《천황이 19명 있었다》#, 나카미 토시오 - 《가짜 천황 사건에 감춰진 일본사의 수수께끼》#
6.1.3. 중국[편집]6.1.3.1. 춘추시대[편집]
6.1.3.2. 전국시대[편집]
6.1.3.3. 전한[편집]
6.1.3.4. 양한교체기[편집]
6.1.3.5. 후한[편집]
6.1.3.6. 서진[편집]
6.1.3.7. 오호십육국시대[편집]
6.1.3.8. 남북조시대[편집]
6.1.3.9. 수당교체기[편집]
6.1.3.10. 당나라[편집]
6.1.3.11. 오호십육국시대[편집]
6.1.3.12. 송나라[편집]
6.1.3.13. 원나라[편집]
6.1.3.14. 원명교체기[편집]
6.1.3.15. 명나라[편집]
6.1.3.16. 명청교체기[편집]
6.1.3.17. 청나라[편집]
6.1.3.18. 중화민국 북양정부[편집]
6.1.3.19. 중화인민공화국[편집]
6.1.4. 베트남[편집]
6.1.5. 몽골[편집]6.1.5.1. 흉노[편집]
6.1.5.2. 몽골 제국[편집]
6.1.6. 시리아[편집]
6.1.7. 이란[편집]
6.2. 유럽[편집]6.2.1. 로마 제국[편집]
6.2.1.1. 서로마 제국[편집]
6.2.1.2. 동로마 제국[편집]
6.2.2. 스페인[편집]
6.2.3. 러시아[편집]6.2.3.1. 루스 차르국[편집]
6.2.3.2. 러시아 제국[편집]
6.2.4. 세르비아[편집]
6.2.5. 몬테네그로[편집]
6.2.6. 루마니아[편집]
6.3. 아프리카[편집]6.3.1. 에티오피아 제국[편집]
6.4. 아메리카[편집]6.4.1. 미국[편집]
6.4.2. 페루[편집]
7. 황제라는 별명을 가진 실존 인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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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황제 지위에 오른 가공 인물[편집]자세한 내용은 황제/캐릭터 문서 를 의 번 문단을 의 부분을 참고하십시오.9. 같이보기[편집]
[1] Em(Im, In)+Pir(Par=준비하다, 명령하다)의 합성어로 제국, 제왕의 통치권, 절대 통치권 등의 의미로 발전하였다.[2] 대표적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프랑스 제1제국.[3] 천자와 황제는 거의 같은 개념이지만, 황제는 정치적 의미, 천자는 종교적 의미에 방점이 찍혀져 있다. 마치 단군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왕검은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라는 뜻인 것과 유사하다.[4] 사실 대한제국은 주변 국가들이 황제국이니 (비록 명목상이라도) 청의 제후국으로 있으면 외교를 할 수가 없으니 여기에 급을 맞추기 위해 간판만 바꾼 사례고, 일본은 현재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관습적으로 과거 쓰던 이름표만 계속 쓰는 것이다. 즉, 이 경우는 황제란 칭호가 그 국가관을 반영하진 않는다. 쉽게 말해 고종이 열강에게 나라가 집어삼켜지기 직전인데 상황파악도 못하고 칭제한 것이 아니라, 실효성 때문에 한 선택이라 적절한 예시는 아니다. 여러 왕국을 지배하지도 않는데 이런 자부심 때문에 황제를 자칭하는 경우 중국 후한 말기 원술의 중나라가 적절한 예시.[5] 사실 천자가 황제보다 더 오래된 어휘이다. 본래 왕(王)으로 칭해지던 천자의 호칭을 한층 격을 높인 것이 황제인 것. 따라서 중국 천자라고 하면 선진시대의 왕과 진(秦) 시황제 이후의 황제들을 포괄한다.[6] 로마제국을 개창한 옥타비아누스는 공화정이라는 틀을 유지하는 선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장 높게 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한 자), 임페라토르(Imperator, 전 군의 임페리움을 지닌 자/군 최고사령관),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 최고 제사장)>, 프린켑스(Princeps, 시민의 제1인자),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Tribunicia potestas, 호민관의 특권을 가진 자)등의 칭호를 사용하였는데, 각각이 모두 로마 공화정체에서는 극존칭들이였지만, 황제라는 의미와 동일한 것은 아니였다. 따라서 역사학에서는 이를 원수정이라고도 하는데, 원수로 번역할 수 있는 명칭은 프린켑스이다. 이후 동방의 전제군주제가 수용되면서 황제의 의미를 가진 명칭은 아우구스투스가 되었고, 부황제(副皇帝)로 카이사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가 사실상 황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카이사르로부터 승계받은 군단 때문이었는데, 이 때문에 임페라토르라는 명칭도 황제의 의미로 쓰였다.[7] 프랑스, 브라질, 멕시코는 19세기에 제정이 폐지됐다.[8] 진시황은 영(嬴)성 조(趙)씨이며 이 시기 중국의 여성들은 성을 썼고 남성들은 씨를 썼다.[9] 서주 시대 청동기에는 황상제(皇上帝)라는 낱말이 쓰여 있는데 위대하신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상서》 <여형(呂刑)편>에서 이 황상제는 한 글자씩 빠져서 "황제"와 "상제"로 나온다.[10] 백스터-사가르(Baxter-Sagart)에 의하면 상고음은 /*ɢʷaŋ/[11] Baxter-Sagart의 상고음 재구 소리값은 /*ɢʷˤaŋ tˤek-s/이다. 중세 소리값인 중고음으로는 /ɦwɑŋtei/, 현대 표준중국어로는 huángdì라고 읽는다. 청나라를 통치한 만주 황실의 만주어 발음으로는 ᡥᡡᠸᠠᠩᡩᡳ(hūwangdi)이다.[12] 실제로 3황(천황, 지황, 태황 혹은 태호 복희, 염제 신농, 황제 헌원)은 사마천의 시대에 이미 전설 속 인물로 여겨졌다. 반면에 5제는 실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졌는데, 전근대 동아시아인들이 역사상 가장 태평한 시대로 미화하는 요순 시대의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은 5제의 마지막 2명에 해당한다.[13] 그리스어로는 바실레프스라고 했다.[14] 기독교 공인 이후 기준.[15] 동아시아의 황제는 그 시작부터 천하 제패를 스스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올려 보고하는 제사장과 같은 위치였다. 황제 등장 이전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한 나라의 왕이 부덕하여 천명이 다른 필부에게 옮겨가는 개념'이 등장했으므로 '황제=신'의 등식은 엄밀히 말해 성립하지 않는다. 다만, 일본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육로로 접하지 않은 섬나라인데다 만세일계라는 독특한 관념[16]이 있어서 자국 황제를 신으로 여기긴 했다.[16] 실제로는 고대 일본에서 몇 차례의 왕조 교체가 있었을 거라고 추정된다.[17] 프린켑스(Princeps)[18] 로마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우상화가 진행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삼두정 시절부터 양아버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철저히 신격화하여 "신의 아들"(Divi Filius)이라는 호칭을 썼다.[19] 카이사르가 행정수반인 집정관 및 비상시 관직인 독재관으로써 정권을 획득하였지만 결국 실패하였기에, 옥타비아누스는 공식적인 공직에서 물러나는 대신에 비토권을 가진 호민관의 특권으로써 로마의 행정과 입법에 대한 권한을 장악하였고, 카이사르 사망 이후 유산으로 받은 군단에 대한 지휘권은 원로원의 인정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였지만, 대외적으로 보여주기식으로 반납하였다가 되돌려 받는 모습을 취하였다. 물론 카이사르에게서 받은 군단을 바탕으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와 싸우면서 원로원으로부터 군단의 확장을 허가받기는 했다. 그러나 카이사르 이전 시기부터 로마의 군대는 장군이나 재력가들에게 클리엔텔라 관계로 귀속된 사병과 같아졌기에 명목상에 불과한 것이다.[20] 현대와 같은 체계적인 국민투표 시스템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당시 상황에서, '민회를 통한 결의' 라는것은 공정한 대중의 의견수렴이 아니라 포룸을 지지자들로 채울 수만 있다면 자신의 주장을 '민회의 결의'로 포장하여 통과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로마 시민들이 한 도시에 모여있던 도시국가 시대와 달리 광대한 제국 전역에 시민권자들이 흩어져 있는 제국 시대에 들어서면서 명색이 황제인 자가 사람을 못 모을 리는 없으니 이런 민회의 의결이란 단순한 요식절차에 지나지 않게 된 것.[21] 물론 그라쿠스 형제도 바보는 아니었으므로 원로원이 여러 수단을 이용하여 자신들에게 반격해 올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로원의 행태가 그라쿠스 형제의 예상보다 좀 더 뻔뻔하고 파렴치했던 것이었다.[22] 이는 현대적 관점에서는 해괴한 해석이지만... 유럽의 경우 고대뿐 아니라 중세, 심지어 근대 무렵까지도 관직 심지어는 국가마저 그 사람의 '재산'으로 여겨 사고 팔거나 상속하는 것을 그리 이상한 일로 여기지 않았다.[23]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들이 굉장히 다양하고 독특한 이유로 줄줄히 사망해 나간 나비효과다. 아우구스투스 참조.[24] 빵과 서커스 문서 참고.[25] 군단 유지비와 빈민층 복지(콜로세움 운영비와 음식비 지출) 등이 있다. 어찌되었든 황제는 평민들의 대표로서 평민들의 지지를 받아야하는 존재였기에 불만이 생기는 것을 방지할 책임이 있었다.[26] 당시 동방지역은 서방지역보다 발전되고, 번화한 지역이었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동방에 군주제를 채용하면서, 오랜기간 쇠락하였지만 공화정의 향수가 남아 있던 로마를 버리고, 새로운 기반을 조성하였다.[27] 동아시아의 경우는 특정 왕조의 종말은 곧 국가의 교체로 보았다. 몇몇 예외는 있었으나, 왕조가 교체되면 국호까지 갈아버리는게 일반적이었다. 왕조의 단절을 국가의 멸망으로 보지 않는 견해는 비유럽권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으며, 중국과의 교류가 적었던 초기 신라만 하더라도 세 가문이 왕을 돌려먹는 게 현대 동아시아인의 관점으로는 꽤 이질적이다. 이마저도 박, 석, 김씨만이 혼인이 가능했고 왕의 후계자로 아들뿐만 아니라 사위 혹은 딸까지 포함되는 정도였다.[28] 이는 동아시아식 왕조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일부일처제가 기본인 유럽식 군주와 달리, 동아시아식 군주는 많은 첩(후궁)을 거느리기에 혈통이 끊기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다. 물론 서양의 군주들 역시 개인적으로 정부를 두었고 정부의 자식도 있었지만, 정부는 첩과 달리 법적인 아내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정부의 소생은 모두 사생아로 취급되어 왕위 계승권이 없었다.[29] 로마 황제의 칭호 중 하나였던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사제)가 기독교 공인으로 인해 로마 황제의 칭호에서 제외된 후 로마 주교가 서로마 유민들에겐 폰티펙스 막시무스와 같은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30] 고대 말기에 로마 제국이 동서 로마로 분리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것이고, 로마 제국은 한 번도 갈라진 적은 없다. 단지 하나의 제국을 2명 이상의 황제가 다스린 것일 뿐.[31] 참고로 그 1세기 후인 919년, 동로마 제국과 경쟁 중이던 불가리아의 시메온 1세도 불가리아의 황제로 인정받으면서 유럽에는 공식적으로 3명의 황제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황제 직위가 평가절하될 듯 하였으나 불가리아 제국은 채 100년이 안 되어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에 복속되었다.[32] 사실 그 이전에 샤를 8세가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에게 헐값으로 사들인 (동)로마 황제의 타이틀도 명목상 보유하고 있긴 했으나, 스페인도 안드레아스의 유언을 통해 동일한 타이틀을 확보한 상태였고, 따지고 보면 공식적인 타이틀 자체는 '임페라토르 콘스탄티노폴리타누스(Imperator Constantinopolitanus)', 즉 '로마 황제'가 아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였다. 더구나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완전히 정복된 터라 신성 로마 제위와는 달리 아무런 권한이 없는 명예직이었으며, 계승한 수단이나 경로도 좀 그렇고(...) 주권 국가의 지도자로서는 이탈리아로 도망친 그리스인들에게라면 모를까, 아무래도 누구 앞에 내놓기 영 민망한 껍데기에 불과했다.[33] 영어로 이교도를 뜻하는 pagan과 농부, 시골뜨기를 뜻하는 peasant가 모두 라틴어 paganus를 어원으로 하는 것이 이 때문.[34] 로마 황제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라는 최고제사장의 직위를 가지고 있지만 제국이 기독교화되면서 이 직위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포기한 직위의 위상이 서로마 유민 사이에선 교황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고 여겨지면서 얼떨결에 교황이 서로마 유민의 대표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15세기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교황이 본격적으로 폰티펙스 막시무스라고 칭하게 되었다.[35] 지리적으로 로마라는 도시가 포함된 영역을 다스리는[36] 로마 황제로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건 로마의 바실레프스와 동등한 군주인 차르로 인정받은 것[37] 그러나 방계 혈동은 유럽의 여러 왕가와 제후 가문으로 이어진다. 부르봉 가문이라든지. 유럽에서 역사가 오래된 왕실들은 조상을 상고해보면 거의 다 카롤루스 방계 혈통과 연결된다. 즉, 카롤루스 대제의 후손들이라는 것이다. 애당초 그런 권위가 있어야 왕위의 정통성을 확보 가능하기도 하였고. 처음부터 카롤루스의 직계 후손이 시작한 왕조가 아니더라도 혼인을 통해 후손들은 카롤루스 왕조의 후손이 된다.[38]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39] 물론 교황과 별개로 서유럽 국가들은 외교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군주를 황제로 인정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칼리프였기 때문이다. 이는 기독교적 세계관과는 무관한 것이므로 '다른 문화권의 황제들' 항목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40] 다만 종교개혁 이후 독일에서도 독일어를 활발하게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독일어인 Römisch-deutscher Kaiser로 불렀다.[41] 마인츠 대주교는 7인의 선제후 가운데서도 가장 서열이 높았다.[42] 다만 막시밀리안 1세의 둘째 손자 페르디난트 1세까지 독일왕 대관식은 아헨에서 거행되었다. 정리하자면 막시밀리안 2세 전까지는 독일왕 대관식은 아헨에서 쾰른 대주교의 주관으로, 황제 대관식은 로마에서 교황의 주관으로 치러졌으나 막시밀리안 2세부터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마인츠 대주교의 주관으로 독일왕-황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43] 프랑스어에서 상원을 뜻하는 단어는 로마 원로원을 뜻하는 라틴어 단어인 '세나투스(Senatus)'에서 유래했다.[44] 물론 공식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실질적으론 나폴레옹 본인의 의사에 따른 것이다.[45] 빅토리아 여왕이 황제 칭호를 받게 된 데에는 왕족끼리의 혼인도 한 몫 했다. 여왕의 첫째딸이 프로이센으로 시집갔는데 프로이센이 독일 제국을 선포함으로써 어머니보다 높은 황후의 직책에 오르게 될 상황이었다. 외교적 수사에서 독일에게 꿀리고 싶지 않았던 정치인의 심리가 작용했다.[46] 1804년 프랑스 제1제국 및 오스트리아 제국 수립 이후에도 존속했으나, 1806년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47] 나폴레옹 2세는 아버지로부터 양위받긴 했으나 정식으로 즉위하진 못했다.[48] 건국 직후에는 신성 로마 제국과 같은 황제를 모시는 동군연합이었고, 두 제국에 동시에 속하는 지역이 많았는데, 그 중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권[49]인 오스트리아도 있었다.[49] 오스트리아 제국은 빈을 수도로 삼았지만, 신성 로마 제국은 법적으로 정해진 수도가 없었다.[50] 로마 황제를 뜻하는 '카이세리 룸'을 칭하는 동시에 '왕들의 주인'을 뜻하는 페르시아어 칭호인 파디샤와 이슬람 세계 전체의 지배자를 뜻하는 칼리파 칭호까지 사용했다. 그 중에서 가장 널리 쓰인 칭호는 파디샤였고, 카이세리 룸은 자국의 기독교도 신민들 및 기독교 제후국들[51]을 상대하거나 기독교 국가들 상대로 어그로를 끌 때(...) 사용했으며, 칼리파는 초기에는 외교 문서에서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18세기 말부터는 상당히 자주 사용되었다.[51] 왈라키아, 몰다비아 등[52] 로마 제국 계승과 무관하게 황제를 칭한 나라들[53]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황제를 자칭했다.[54] 원래 대통령이었지만,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가 되었다.[55] 장 자크 데살린처럼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황제를 자칭했다.[56] 프랑스의 괴뢰국[57]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58] 초대 황제 페드루 1세가 잠깐 포르투갈 국왕을 겸하기도 했지만, 금방 딸에게 포르투갈 왕위를 물려주었고, 브라질 제위는 아들에게 물려줘서 두 나라의 브라간사 왕조는 완전히 분리되었다.[59] 영국 정부가 동인도 회사를 통해 간접 지배하던 인도를 직할령으로 만든 후, 영국 국왕이 황제를 겸하는 제국을 선포했는데,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할 때 해체되었다.[60] 작센코부르크고타와 같은 가문이지만, 1차 대전으로 인해 반독 감정이 강해지자 성을 갈아엎었다.[61] 1936년 에티오피아 제국을 침공하여 점령함으로써, 에티오피아 제위를 찬탈하는데 성공했으나, 1941년 영국군에 패하여 토해냈고, 1943년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공식적으로 포기했다.[62] 이 차크라바르틴이라는 칭호는 한참 후에 동아시아의 청나라에서 청 황제의 권위를 티베트 불교를 믿는 티베트와 몽골에 과시하기 위해 다시 사용되었다.[63] 서양의 King에 비견되는 칭호인데, 마하에 '크다' 또는 '위대하다'라는 의미가 있어서 '대왕'으로 직역되기도 한다.[64] 서양의 Prince에 비견되는 칭호다.[65] 마우리아 왕조를 세운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와는 다른 인물이다.[66] 그 당시의 인도는 지금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까지 포함하는 지명으로 쓰였다.[67] 작위 요구자/아시아 문서 참고.[68] 이집트의 파라오는 하늘에서 내려온 神 호루스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고, 살아 생전에는 神 라의 아들, 神 호루스의 지상대리자이며, 죽어서는 神 오시리스와 동일시되는 존재이다. 따라서 당시의 다른 중동의 체계와 비슷하게 고위 관료들이 담당하는 직무가 군주의 개인적인 업무와 관련되는 경우가 많지만, 다른 곳들보다 더 심하다.(파라오의 면도담당자, 파라오의 신발담당자 등)[69] 그러나 몽케가 사망한 이후 쿠빌라이와 아릭부카가 카안 자리를 두고 다투면서 서방의 汗國들은 자체적으로 운영되었다. 이후 쿠빌라이가 카안자리에 올랐음에도 서방은 그 통치에서 벗어났기에 카안의 통치력이 크게 훼손되었다. 그럼에도 에케 몽골 울루스의 통치자라는 관념만 유지될 수 있었다.[70] 영락제가 북원의 잔당들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때려대면서 실질적인 힘을 모두 잃어버렸고, 이후에는 보르지긴 혈통의 인물을 초원세력가가 옹립하는 것으로 명맥만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다얀 칸이 초원을 다시 재통일하면서 부흥의 기초를 마련하였다.[71] 청의 중국통일 이후 청나라의 황제는 중국의 황제, 몽골의 대칸, 만주의 한(han) 그리고 강희제 이후에는 티베트 불교의 보호자 칭호까지 겸하게 된다.[72] 중원의 천자와는 별개로 고려만의 천자를 자칭한 것[73] 중국 이외의 나라에서 황제[74] 중국에서 왕[75] 이로 인해 정유재란 때 명나라의 정응태한테 트집이 잡히기도[76] 그래서 외국의 King도 대군주로 번역[77] 그래도 1897~1904년전까지는 나름 실권[78] 다만 불가리아 제1제국과 제2제국의 호칭이던 '차르'는 황제로 번역된다.[79] 복수형으론 '아프토크라토라스'라고 한다[80] 1939년에는 알바니아 국왕도 (자칭)겸임한다. 이 역시 1943년에 포기.[81] 그래서 왕위 요구자/아프리카 문서의 에티오피아 황제 문단에는 이탈리아 왕국 사보이아 왕조의 왕위 요구자가 없다.[82] 다른 잔존국인 니케아 제국과는 달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고 제국을 재건하는데 실패해서 정통으로 인정받지 못한다.[83] 동로마 황제의 칭호였던 바실레프스의 여성형[84] 4차 십자군 이후에 수립된 동로마의 잔존국인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군주였으나, 로마의 바실레프스가 아닌 세르비아의 차르 작위를 요구했으므로 세르비아 항목에 기재한다.[85] 이것 역시 직역하면 L'Ottavo Re di Roma, 로마의 여덟번째 왕이라 불리었다.[86] 보통 '가황(歌皇)'으로 많이 줄여 부른다. 여담으로 조용필은 '가왕(歌王)' 즉 '가요의 왕'으로 불린다.[87] 이 사람은 노덕술, 하판락과 더불어 악질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88] 미국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는 왕을 3인칭으로 지칭하는 his highness의 말장난인 his airness. 물론 중계를 보다보면 The King도 나오고, 역대 최고의 선수로 널리 인정받던 워싱턴 위저즈 시절엔 대놓고 중계자가 The Greatest of All Time이라고 했다. 문서화 할 때는 GOAT라고 쓰인다. 한술 더 떠서 basketball god(!!)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사실 god이란 수식어는 한 분야에서 역대 최고 수준의 달인을 지칭할 때 종종 쓰는 단어다. 예를 들어 guitar god인 에릭 클랩튼. 물론 이 수식어가 붙으려면 웬만한 달인이 아니라 조던이나 클랩튼처럼 정말 역대 최고라고 할 정도로 뛰어나야 한다. 예를 들어 조던을 제외하면 god이란 수식어를 달고 있는 농구선수는 없다. 조던의 위치가 그만큼 독보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음악의 경우 여러 명이 있는데, 종목 특성상 객관적인 우열을 가리기 힘들기 때문이다.[89] 그덕에 방송만 키면 시청자들이 백성을 자처해서 황제 폐하 문안드리러 왔다는 드립이 매번 나온다.[90] 영어로는 King of Rock 'n' Roll.[91] 아지르로 유명해 황제라는 별칭이 붙었다.[92] 김범수의 얼굴이 독보적으로 못생긴 건 연예계에서 아주 유명한 얘기라서, 김태호 PD가 대놓고 못친소 페스티벌 특집에서 그를 얼굴 황제라고 칭송해 마지 않으면서 해당 특집의 1부와 2부에서 내내 황제니, VVVIP니 하는 수식어가 다닥다닥 붙었다.[93] 이전 별명은 테란의 황제. 스타크래프트를 비롯하여 e스포츠 프로게이머 업계의 시초격으로 지대한 영향력을 선사한 이후, e스포츠판에서 보통은 그냥 '황제'라고 부른다. 그냥 테란만의 황제라기엔 e스포츠 역사 전체에 끼친 영향력이 너무나 막강하기 때문.[94] 푸틴은 푸차르라고 불리고 시진핑은 시황제라고 불린다. 김정은은 저 둘에 비하면 영향력이 심히 미약하고 정치적 카리스마가 적어 황제라고 안 불린다. 최고조넘이라고 불릴 뿐.[95] 후술할 이주일과는 또 다르다.이주일은 모든 코미디를 통합한 황제라고 본다면, 이경규는 흔히들 말하는 예능이라는 장르의 황제라고 보면 된다.[96] 2000년대 초반.[97] 포어로는 O Rei do futebol,즉 ‘축구의 왕'이라고 불리었다.[98] 과거에는 지금은 은퇴한 강진우와 김대겸을 말하기도 했다.[99] 영어로는 ‘King of Pop'.[100] 1박 2일에서 황태자에서 성인이 돼 황제로 불렸으나, 사실상 장난식으로 황제라 불렀지만, 당시 찬란한 유산과 1박 2일 두개의 프로로 시청률 70%를 자랑하던 한때는 진짜 황제였다. 랑으로 시작하는 말이 뭐야?▶랑가주 : 말하기와 듣기 활동을 통틀어 이르는 말. 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의 용어로, '랑그'와 '파롤'로 나뉜다. ▶랑구티 : 인도의 전통 하의인 도티를 만드는 직물. ▶랑군 면 : 섬유의 길이가 짧고 약하며 흐릿한 갈색을 띠는 인도산 면.
끼로 시작하는 말이 뭐야?끼양/끼무릇/끼니때/끼움쇠/끼움차/끼움토/끼움판 등등..!! 가장흔하게 쓰는말은 끼니!! 상당히 재미있는 말들이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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