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 76회 다시보기 - isan 76hoe dasibogi

(전략) 왕은 성인(聖人)이었다. 사도(斯道)의 정체를 밝혀내고 사도(斯道)가 지향할 바를 주장하였다[7]. 왕이 한 일은 복희·신농·문왕·무왕이 했던 일이며, 왕이 한 말은 공자·맹자·정자·주자가 한 말이었다. 앞으로 천세 후에 옛것을 논하는 자가 있다면 아마 이를 《시경》의 청묘(淸廟) 악장에다 실어 연주하여 역시 한 사람이 창(唱)을 하면 세 사람이 감탄을 하리라. 여기에는 특히 남들의 귀와 눈에 배어 있는 천덕(天德)·왕도(王道)만을 추려 뽑아 굉장한 유자(儒子)이고 현철(賢哲)한 임금이었던 그의 법도를 이 정도로 소개했을 뿐이다.


정조 묘지문

2.1. 임오화변과 초기[편집]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의 손에 죽는 임오화변의 무서운 광경을 보고 11세의 어린 정조는 큰 충격을 받는다. 이때 영조의 서슬퍼런 어명이 내려지자 세손 정조만이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살려달라며,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두손을 빌며 애원하는 눈물겨운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영조는 매정하게도 "누가 얘를 데리고 들어오라고 했느냐. 세손까지 뒤주 안으로 들어가길 바라느냐. 어서 데리고 나가라"며 정조를 쫓아냈다.

사도세자 사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폐서인이 되어 신분이 박탈되었으므로 궁궐에 있을 수 없었기에 외조부 홍봉한이 있는 사가로 내려가지만 곧, 어머니와도 생이별해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경희궁으로 돌아간다. 당시 정조는 상중(喪中)이었지만 영조가 교서를 내려 그(세손)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키면서 더이상 상복을 입을 수 없었고 《한중록》은 그 때 정조의 모습을 두고 "슬퍼 우는 소리가 하늘까지 닿았다"고 썼다.

이 때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고 하는데 영빈 이씨로서는 자식을 대처분이라는 말로 죽음으로 내몰았으니 그에 대한 죄책감도 겹쳐 손자(정조)에게 정말 극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8]

이 생이별은 오히려 혜경궁 홍씨의 피눈물을 머금은 가슴 아픈 결단에 가까웠다. 어린 정조가 어머니와 떨어지기 싫어하자 영조가 "그래도 어미를 이토록 그리워하는데 같이 사는게 낫지 않겠나"라고 말하자, 혜경궁 홍씨는 혹시 정조가 할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좋아한다며 영조가 질투할 것을 우려해서 단호하게 떼어놓았다고 한다. 영조의 정신나간 수준의 편집증(의심병)과 그 결과로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면 혜경궁 홍씨의 이러한 걱정은 절대로 기우가 아니었다.[9]

왕세손 시절에는 영조에게서 극진한 총애를 받았는데 《영조실록》에서는 한번도 세손(정조)을 꾸짖지 않고 칭찬만 할 정도다. 영조가 말년에 치매가 매우 의심될 정도로 판단력이 많이 흐려졌음에도, 죽기 직전까지 세손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굳건했다. 아들 사도세자에게는 정신병에 걸리게 할 정도로 혹독하게 대한 것과는 대조적인데 이런 세손에 대한 편애가 임오화변의 원인 중 하나라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영조는 사도세자는 쳐다도 보지 않은 반면 원손인 정조는 심심하면 불러 글을 쓰게 하고 책을 읽어주거나 읽어보게 하는 등 엄청나게 예뻐했다. 결과적으로 임오화변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닐지언정 최소한 정조가 아버지에게 부채 의식을 갖게 하는 요소로 작용했을 가능성은 있다.

실제로 정조가 죽은 아버지에게 보였던 효심은 트라우마에 가까울 정도로 격렬했는데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다는 것 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어떠한 방향으로든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에게 부채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보이는 측면이 있다.

임오화변 이후 정조는 일부러 꼬투리를 잡으려 해도 불가능할 정도로 모범적이고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는 것도 있었으나 영조의 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한 정조의 생존 전략이기도 했다. 살아남아서 왕위에 오르려면 영조에게 후계자로 인정을 받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다만 이는 임오화변 이후 출궁되었다가 다시 궁으로 들어온 직후에 해당되는 것으로 출궁 당시의 정조는 11세였다.

2.2. 백부의 양자로 입적하다[편집]

정신병이라는 핑계를 대기는 했어도 죄인인 사도세자의 아들로서는 왕위를 이을 수 없을 거라고 판단한 영조에 의해 죽은 백부인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는 방식으로 왕위 계승권을 유지하게 된다. 그래서 정조는 즉위 이후 정통성 확보를 위해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했다. 친부는 끝내 추종하지 못했는데 양부는 거의 즉위하자마자 자기 정통성을 위해서 추존할 수 밖에 없었다. 사도세자는 고종 대에 '장조(莊祖)'로 추존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 생모를 잃은 연산군과 비교되고는 한다. 다른 점은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이 사실을 숨겼다가 뒤늦게 알게 되었고 그 충격으로 정사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는 것. 그런데 사실 연산군도 생모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는게 현대의 중론이다. 연산군과 갑자사화 문서 참고.

세손 시절 궁료로서 주위에 둔 측근으로는 홍국영[10], 김종수[11], 정민시[12], 홍대용[13], 서명선[14] 등이 있다.

2.3. 즉위[편집]

즉위하면서 한 말이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다고 알려져 있다.[15] 그 후 자신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던 척신(홍인한, 정후겸)들에 대한 척결을 완료했다. 홍술해의 아들인 홍상범과 그의 어머니 효임등이 강용휘와 전흥문[16]을 포섭하여 정조가 밤새 글을 읽던 존현각까지 침투시켰다가 발각된 일(정유역변)이 있었는데 홍계능, 홍상길, 홍신해, 홍이해 등 풍산 홍씨들이 집단으로 연루된 모반이 드러나면서 일대 피바람이 불기도 했다. 홍계희 계열은 이미 홍인한이 사사되는 과정에서 타격을 입은 상태였고 이에 반발하여 사건을 일으켰다.

이 존현각 자객 침투 사건은 강용휘 등의 자객들이 존현각의 지붕을 뜯다가 잠을 자지 않고 존현각에서 밤새 책을 읽던 정조가 그 소리를 듣고 승지 등을 불렀는데 《승정원일기》에는 이매망량이나 쥐 따위로 취급하고 사건을 덮으려 할 때 홍국영이 전격적인 수색을 주장했고 그로 인해 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다. 강용휘와 전흥문은 무사히 탈출한 뒤 재차 암살 시도를 꾀하여 들어왔다가 홍국영의 강력한 주장으로 삼엄해진 경비에 암살을 포기하고 궐의 뜰에 숨었으나 곧 발각되어 사건이 마무리가 된다.

이 사건으로 풍산 홍씨의 홍계희 계열이 말끔하게 숙청되는데 정조는 자신의 이복동생인 은전군 이찬을 사사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요구에 직면했고 며칠 간 신하들과 대립한 끝에 눈물을 흘리면서 끝내 강제로 사사했다고 한다.

2.4. 홍국영 숙청[편집]

이후 왕대비가 된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를 유배보냈고 1780년(정조 4년)에는 심복이던 홍국영을 토사구팽하였다. 사실 진상을 보면 홍국영이 버림받을 짓을 했다고 보는게 옳다. 디테일은 다르지만 큰 줄기만 놓고 보면 태종대의 이숙번과 비슷한 케이스.[17]

홍국영은 정조가 세손이던 시절부터 "세손(정조)의 오른 날개"라는 표현이 사서에 등장할 정도로 정조의 신임을 누구보다 더 받은 사람이었다. 더욱이 정조는 홍국영을 자신의 즉위를 도운 1등 공신이라 대내외에 천명하며, 힘을 실어주었으니 그는 어느 누구도 감히 맞설 사람이 없을 정도의 권력을 누렸다.

그러자 홍국영은 정조가 즉위 후에도 자신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에 기고만장해졌는지, 나이 지긋한 신하가 와도 개판으로 맞이하며 오만방자하게 행동했다고 한다. 홍국영은 정조 즉위 후 그의 최측근으로서 정국을 장악하며, 자신의 여동생인 원빈 홍씨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였다. 원빈 홍씨도 빈호를 '으뜸 원(元)' 자로 쓰면서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가 있는데 어떻게 일개 후궁이 '으뜸 원' 자를 쓸 수 있냐며 논란[18]이 되었고, 생전에 마치 중전처럼 조정의 문안을 받았으며, 죽어서도 곧바로 '효휘궁(孝徽宮)' 궁호와 '인명원(仁明園)'이라는 원호를 받는 등[19], 살아생전이나 사후에도 일개 후궁으로서 무리할 정도의 예우를 받았다.

당연히 자신의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후궁을 과하게 예우하는 홍국영의 행태는 중전인 효의왕후는 물론, 법도를 중시하는 왕대비 정순왕후와 왕의 생모 혜경궁 홍씨까지 불쾌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중전인 효의왕후에게 자식이 없는 상황에서 후궁까지 되었으니, 정치 판도의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홍국영 쪽으로 쏠리게 되면서 정치 균형이 무너지게 되었다.

하지만 원빈 홍씨는 원자를 낳아 외척으로 만들어 줄 거라는 홍국영의 기대를 저버리고, 아들은 커녕 자식조차 낳지 못하고 고작 14살의 어린 나이로 요절했다. 이에 홍국영은 완전히 이성겁대가리을 상실했는지 중전 효의왕후를 원빈의 죽음에 대한 배후로 모함하거나, 정조가 다른 후궁을 들이는 것과 그의 섭생(攝生, 자식을 생산하는 일)을 대놓고 반대하는 미친 짓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급기야 정조의 조카인 상계군을 원빈의 사후 양자로 삼고 봉호도 '완풍군(完豐君)'으로 고친 뒤, 자신의 조카라고 선포하며 왕위 계승권자로 삼으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참고로 완풍군이란 봉호는 왕실의 본관인 완산(전주)과 홍국영 자신의 본관인 풍산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온 것이라, 감히 일개 신하에 불과한 홍국영이 자기 집안을 왕실과 같은 위치에 두려 한다며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에 완풍군을 가리켜 '가동궁(假東宮, 임시 세자)'이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의 정조는 28세의 젊은 나이여서, 후궁을 들인다면 충분히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홍국영은 자신의 권세를 연장하기 위해, 마치 정조가 자식을 절대로 못 보는 몸이라는 식으로 양자를 들이는 걸 강행했다. 이런 행동은 임금을 심각하게 모독하고 억누르는 행위로 여겨졌다.[20]

결국 이렇게 도를 넘은 전횡을 부린 홍국영에게 김종수를 비롯한 동료들마저 등을 돌리고, 끝내 정조가 주도적으로 판을 짠 끝에 숙청당해 유배를 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1782년(정조 6년) 이유백, 이택징, 권홍징 등의 모반 사건이 있었는데 이들은 정조 앞에서 스스로를 '신(臣)'으로 칭하지 않고 '나(吾)'라고 하며 정조를 걸주와 같은 폭군이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탕무와 같이 반란으로 정조를 쳐 없앨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는 등 매우 당당했다. 홍국영이 추천했던 산림의 영수인 송덕상을 삭탈관직하는 과정에서 호서의 유생들이 통문을 돌리며 반발한 사건이 있었으며[21] 그 이후에도 많은 유생들이 노골적으로 정조의 뜻에 거스르는 행보를 밟다가 유배되었다.

송덕상의 제자라고 자임한 문인방이라는 자는 강원도에서 병사를 모아서 동대문을 치려다가 박서집[22]의 고변으로 처형당했고 문양해라는 자가 가상의 신인을 앞세워 사람들을 선동함과 동시에 정조에게 숙청당한 김귀주, 홍국영 쪽 사람들과 연계하여 반란을 도모하다가 처형당하기도 했다.[23]

1786년(정조 10년), 권신 홍국영에게 충성하던 훈련대장 구선복[24], 구이겸, 구명겸 등의 무장 일파가 문양해와 내통하여 상계군 이담을 옹립하려던 계획이 정순왕후에 의해 들통나기도 하는 등 정조 초반부는 거의 반란과 역모의 연속이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노론 음모론과 무관하게 자기 할아버지 영조 때 역변을 일으킨건 소론 준소와 남인 탁남 세력이었는데 정조 시절에 역변을 일으킨게 대부분 벽파와 시파의 세력을 제외한 비주류 노론들[25]이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야사를 신뢰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구선복 개인은 정조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 자신의 새로운 울타리이자 정조와 최소한 교각의 역할을 해주던 홍국영의 축출은 구선복 등에게 상당한 압박이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2.5. 은언군의 유배[편집]

한편 상계군 이담은 홍국영이 축출된 이후로 계속 안절부절못하다가 1786년(정조 10년)에 구씨 일가의 반란이 들키기 전에 죽었다. 이 때문에 그의 아버지 은언군 이인을 죽여야 한다는 청이 정조 말년까지 계속되었다.

은언군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사사되기 직전까지 가는데 정조가 단식 끝에 유배로 타협한다. 이미 은전군이 죽었는데 또 동생을 죽일 수 없다는 논리에 제주도 유배로 타협을 했으나 다음날 아침 정조가 귀신같이 일찍 일어나 제주로 보내려던 것을 강화 교동도로 날치기해버린다. 이에 신하들이 항의하자 "제주나 강화나 똑같은 섬이다. 무슨 문제냐? 더이상 논하지 마라"고 강하게 찍어누른다.

이후 은언군은 강화 교동도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정조가 몰래 불러 만나고 왕대비 정순왕후와 신하들이 반대하는 등 정조가 살아있는 생전에는 목숨을 부지하나 결국 정조 사후,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정순왕후에 의해 사약을 먹고 죽는다.

2.6. 규장각과 초계문신제[편집]

초월적 군주를 자처하면서 홍문관의 기능을 분산한 학술 기관 규장각을 세우고 서얼 출신(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들을 등용하여 서학을 익히게 하고 신해통공을 실시하여 종로 앞거리에 육의전이 차지하는 물품을 제외한 나머지 물품을 취급하는 '사전'을 열 수 있게 하여 조선의 상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만천명월주인옹'(온 세상을 비추는 달과 같은 존재)라는 뜻의 정조의 호가 바로 이러한 초월적 군주를 지향한 정조의 정치 철학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규장각은 후에 너무도 비대한 권력 기구가 되어 홍문관을 비롯한 대간을 무력화시키고 기존의 성균관마저 유명무실화시켰다는 비판이 있다. '문(文)'에는 규장각이 있었다면 마찬가지로 '무(武)'에는 왕권 강화를 위하여 장용영(壯勇營)이라는 자신의 직속 친위부대를 만들었는데 이 역시 그 규모의 비대함으로 인해 규장각과 마찬가지의 문제로 정조사후 반대파에 의해 혁파된다.

다만 규장각은 정조의 문치(文治)를 상징하는 기구임에는 분명하고 정조시대는 조선의 그 어떤 다른왕보다 수많은 관찬기록이 생산되었다. 일례로 규장각만 봐도 업무기록물로서 《내각일력》이 편찬되기 시작했는데 호조에서는 《탁지지》 예조에서는 《춘관통고》 등 정조시대에는 기관별 문서작업이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이외에 외교 문서집인 《동문휘고》를 편찬한 것도 업적으로 꼽힌다.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 기록물인 각사등록에서도 정조년간부터 본격적으로 기록량이 많아진다.

정조 개인부터가 《일성록》을 쓰기 시작했고 《홍재전서》 라는 전세계 그 어떤 군주보다도 많은 저작물을 남겼다. 그야말로 기록문화의 꽃들이 만개했던 이같은 문예부흥을 두고 흔히 조선의 르네상스라 하는데 후대인 순조시대와도 대비되는 것에서 볼수 있듯이 정조 개인의 역량이 이시대의 기록유산 증가에 지대한 역할했다 할수 있겠다.

2.7. 탕평책 - 준론탕평[편집]

정조는 자신의 할아버지 영조가 펼쳤던 탕평책을 역시 들고 나왔다. 하지만 정조의 탕평책은 영조의 탕평책과 전혀 달랐다.

정조가 즉위하던 시기는 척신들에 의한 정계 장악이 심화되었던 때였다. 즉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척족인 경주 김씨 세력과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척족인 풍산 홍씨 세력이 영조 말기에 권력을 다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정조는 이러한 점에서는 왕권의 추구가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이들을 철저하게 배격한다. 그리고 기존 영조의 탕평책이었던 쌍거호대식 완론탕평에서 준엄한 의리[26]를 중시하는 탕평인 준론 탕평을 펼치게 된다.

정조 재위 초반에는 준론 탕평에서 유리한 궁료 출신들이 정국을 주도해나갔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홍국영과 서명선이다. 홍국영은 정조 즉위 이후 숙위대장과 도승지를 겸직하면서 정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하였고, 여러 정파들을 아우르면서 이른바 세도를 부렸다. 서명선은 소론 출신으로 정조의 대리청정을 적극 추천하면서 정조의 눈에 띄게 되었고 이후 정조가 즉위하면서 홍인한을 실각시키는 상소를 올리며 역시 정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홍국영 서명선 모두 정조가 꿈꾸던 탕평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홍국영은 세도를 부리고 왕위 후계에 욕심을 내다가 결국 실각당했고, 서명선의 경우 지나칠 정도로 남인을 견제하는 바람에 도리어 노론 벽파의 공격을 받을 때 보호 세력이 없어서 결국 실각당했다.

이후 정조는 정계에서 소외당했었던 남인과 소론 강경파를 적극 등용하면서 정계의 중심으로 다시 등장한 노론 벽파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정조 스스로가 여러 당파를 등용하는 정책[27]인 쌍거호대를 다시 펼치면서 그동안의 파괴적인 정국 운영에서 벗어나는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즉 영조의 초기의 방식으로 다시 돌아가면서도 기존에는 배제되던 소론 준론까지도 포함된 탕평책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사와 관련해 이외의 제도적인 해결책으로서 정조는 붕당의 시발점이 되었던 이조전랑의 추천권을 완전히 폐지하여[28] 탕평책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여러 정파를 등용하면서 동시에 사도세자 추숭 문제로 그 세력이 다시금 두 진영 즉 벽파와 시파로 나뉘게 되었고, 이러한 당파 다툼이 그동안 벽파와 시파를 온건하게 규합해오던 김종수와 채제공이 죽은 이후에는 두 세력을 막을만한 기재가 없었고, 그런 가운데 정조의 업무가 격화가 되면서 정조의 급작스러운 죽음 이후에는 그야말로 탕평 정치가 다 소용 없어지게 되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

2.8. 장용영 설치와 수원화성 건설[편집]

정조는 상당히 많은 암살 위기에 시달리기도 했는데 이러한 암살 위기는 정조에게 결국 자신을 호위할만한 군사의 필요성을 상기시키게 하였다. 당시 군영은 대부분 주요 당파에 장악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임금을 지키기보다는 자신의 당파를 위해 일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결국 1784년(정조 8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를 축하하기 위해 경과를 실시해 무과에서 무려 2,000명의 합격자를 배출시켰고 이후 홍복영의 역모 사건을 계기로 1785년(정조 9년) 장용위를 설치하게 되는데 1788년(정조 12년), 장용위를 장용영으로 개칭하면서 정조는 하나의 자신의 직속 친위 부대를 가지게 되었다.

이후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면서 동시에 이상 도시를 건설하게 되는데 바로 수원화성의 건설이다. 이 이상 도시의 건설을 통해 당시 한양에서는 펼치지 못할 다양한 정책들을 펼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수원화성 건설도 장용영과 마찬가지로 기존 체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고자 했던 마음이 강했다고 볼 수 있겠다.

실제로 정조는 장용영의 외영을 수원화성에 설치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군제 개혁을 하고 수원에 수원화성을 지은 것도 역모를 꾀한 반대파들에 대한 대책으로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근거는 희박하다. 장용영과 수원화성은 상왕이 되었을 때 자신을 호위하고 머물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그 까닭은 자신의 대에 성공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추숭을 완수하기 위해서로 보인다. 이러한 주장은 훗날 혜경궁 홍씨가 손자 순조에게 몇 번이나 강조한 바가 있는데 물론 그러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2.9. 숭렬전 설치[편집]

인조 대에 남한산성에 건립된 백제의 시조 온조왕을 모신 사당인 온조왕사(溫祚王祠)에 '숭렬전(崇烈殿)'이란 편액을 하사하면서 온조왕에 대한 제문을 본인이 직접 작성하여 내려 보냈다. 그리고 매년 음력 9월 5일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숭렬전은 팔전 중 하나로 이렇게 백제의 시조 온조왕에 대한 제사를 국가가 정식으로 받들게 되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화는 남한산성 항목 참조.

2.10. 대전통편[편집]

사실상 조선 최후의 법전 《대전통편》,[29]이 정조 9년(1785년)에 편찬되었다. 《속대전》을 보완하고 오례의와 통합시켜 법제운용에 일원화를 꾀한 것으로서 대전통편에는 영조시대 제도화된 균역(영조 27년)이나 비총(영조 36년)같은 주요 세제개혁들이 법전 조항으로서 자세히 수록되었다.

2.11. 병신정식[편집]

조선 후기 왕실 재정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궁방전의 확대는 세수의 감축과 차인(差人)[30]·도장(導掌)[31] 등의 대민 침탈을 초래해 많은 문제를 드러내고 있었다. 왕실 재정 문제에 고심하고 있었던 정조는 1776년(정조 즉위년)에 규정 외로 보유하고 있는 궁방전을 조사하여 대대적인 출세를 단행하고 여러 궁방의 전결을 호조로 이속시키는 등 다양한 조치를 취하였다. 이를 통해 6만여 결에 달하는 궁방전의 1/3∼1/2 정도[32]가 과세(課稅)됨으로써 내수사와 주요 궁방의 면세결은 크게 줄어들고 면세 정액이 확정되었다. 이때 반포된 것이 「병신 정식(丙申定式)」[33]이다.

2.12. 신해통공[편집]

조선 전기 때만 해도 상업이 억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상인들의 특권은 그대로 인정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이 이루어지면서 이들이 국역에 종사하고 있으면서도 특권이 적어지면서 불만이 생기게 되었고, 결국 이들의 독점적 상권을 인정해주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을 부여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금난전권은 결국 도시의 상업을 폐쇄적으로 바꿔놨고, 물가의 상승을 초래하여 영세 상인, 수공업자, 도시 빈민층들에게 위협이 되고 말았다. 또한 이러한 시전 상인들은 중앙의 고관들과 연계가 되면서 역시 폐단을 낳게 되었다.

중앙의 고관 특히 노론들과의 연계는 노론의 세력을 약화시켜 탕평책을 펼치려는 정조의 정책에 이반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타개가 필요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 바로 금난전권을 혁파하려는 통공 발매 정책이었다.

사실 통공 발매 정책은 영조 시기인 1764년(영조 40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오던 사안이었다. 그리고 정조는 1787년(정조 11년) 일부 통공 발매 정책을 시행하였고 1791년(정조 15년)에 이르러 남인의 영수 채제공에 의해 통공 발매 정책이 제기가 되었고 결국 시행을 하기에 이른다.

통공 발매 정책은 그동안 독점권 특권이 부여되어 있었던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들의 특권을 폐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통공 발매 정책을 통해서 그동안 경화되어있던 상업 구조의 변화를 꾀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노론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던 시전 상인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면서 준론 탕평책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상업적으로 조선이 한 단계 발전되어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즉 중앙 정부에 의한 특권이 없어지면서 상업이 더욱 자유로워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2.13. 문체반정[편집]

정조 시대를 이야기하면서, 문체반정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정조의 개혁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문체반정은 북학이나 청나라 문물, 박지원의 《열하일기》로 대표되는 새롭고 신선한 문체에 관심을 보이던 조선의 젊은 선비들을 탄압한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그중에서 문학으로 명성이 드높았던 이옥에 대한 탄압은 너무나 심했다. 이옥은 과거에 장원 급제를 하고도 문체 때문에 정조에 의해 꼴찌로 바뀌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는다. 후에도 이옥이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자 정조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이옥에 대한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옥에 대해 예외를 인정하게 되면 그 또한 문제가 된다는 맹점이 있다. 역설적으로 박지원이나 김조순 같은 정치적 상황을 고려한 타협을 하지 않은 이옥 본인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는 셈.

애초에 정치적 측면에서 정조는 문체반정을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다. 신해통공으로 왕이 노론을 타격하고, 서학 신앙을 문제삼아 노론이 정조 측근 남인 시파들을 공격한 후, 이걸 다시 문체반정으로 박지원[34]이 포함된 노론에 재반격한 형국이었다. 그리고 정조가 죽은 후에 이에 대한 벽파의 반격이 신유박해라고도 하는 신유사옥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 속에서 이해한다면, 박지원의 실학적 측면이나 문체반정이라는 명분은 의미가 약해지고, 대신 정치적 의미만 더 강해진다. 애초에 문체반정 자체가 청나라에서 유행한 문체와 유사한 박지원의 문체와 기존 노론의 대의 명분을 중시한 성리학적 사상간의 괴리를 찔렀기에 성공한 측면이기 때문에 문학사적 의미를 제외한다면 애초에 반동적이냐 아니냐도 아리송하긴 하다.

문체반정을 보는 시각 중, 철저하게 보수적인 성리학자로서의 정조의 성향이 문체반정의 중요한 요소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는 정조가 자신의 일기에 "나는 본래 책을 읽어도 성현의 말씀만 읽었으며, 패관 잡기에 대해서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아무 쓸데가 없을 뿐 아니라,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독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밝힌 대목을 보면 정조는 진심으로 유학 경전만이 진리이며 다른 것에는 매우 적대적이었던 성리학 근본주의자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삼국지연의를 잡스러운 책이라고 "나는 삼국지(연의)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35] 실제로 당시 사상계에서는 중국의 양명학과 고증학 등이 들어와서 성리학의 한계를 공격하는 상황이었으며, 이러한 흐름이 원칙주의자 성리학자였던 정조의 심기를 무척 불편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정조가 오늘날의 소설 격인 패관 문학을 무척 싫어하여, 당시 소설 중독에 빠진 관료를 징계한 사례가 있고, 김조순도 숙직 중 연애 소설을 읽다가 걸려서 청나라 사신단에 포함되어 가는 길에 반성문을 써야 했다. 심지어 정조가 파발까지 보내 '반성문 내놔!'고 독촉했을 정도. 하지만 그 반성문이 명문이라 왕을 감동시켰고 왕과 사돈지간이 된다. 유교 문화권에서 글이라는 것이 갖는 상징성을 생각해 보면 새로운 문체를 구사하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이옥의 경우, 문체 교정 안 하면 평생 과거 금지라는 선비로서는 치명적인 벌을 내리기까지 한다.[36] 그래서 그는 온건한 분서갱유라 할 수 있는 문체반정을 한 것 같다.

사실 굳이 따지자면 정조는 문체 면에서는 노론, 그 가운데서도 벽파였다. 세손에서 즉위하여 척신과 홍국영을 물리칠 때까지 김종수를 위시한 몇몇 노론 벽파와 정조는 사실상 동맹 관계였으며,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에는 "우리 벽패는"이라는 식으로 립서비스성 호감을 표하기도 했다. 송시열에게 송자라는 호칭을 내리고 《송자대전》을 편집하게 한 사람도 정조다.

물론 그렇게 징계한 관료들이 자기 뜻에 맞게 반성하면 나중에 중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김조순이 반성문 잘 써서 정조의 용서를 받고 정조의 사돈으로까지 정해진 게 그 예. 실제로 정조는 문체가 난잡해진 원흉으로 지목한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에게도, 옛 고문 문체로 '반성문' 쓰면 크게 중용하겠다는 뜻을 전한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과거를 보지 않은 음서로는 절대 오를 수 없는 종2품 벼슬인 문임직을 주겠다고 말했을 정도다.

당연히 박지원 주위 문인들은 기뻐하며 그들이 나서서 글 쓸 자료를 모아주겠다고까지 했으나, 박지원은 '나 같은 못난 놈의 못난 글에 전하가 관심 보이시다니, 더 이상 못난 글로 반성문 써서 전하(殿下)의 눈을 썩게 하는 무례를 저지를 수 없어염. 전하께서 반성문 쓰면 중용해준다는 말은 사실 나보고 반성하라는 이야기일 뿐인데, 눈치 없이 반성문 써내서 벼슬 달라는 눈치 없는 짓은 할 수 없잖아염? 그래도 혹 모르니 그나마 볼만한 글 몇 편 모아놓고 있다가, 전하께서 또 반성문 내라고 제출하시면 그때 그거 낼 거임.'이라는 반응으로 반성문 작성조차 회피하는 기염을 토한다. 사실 계속 회피하기만 한 건 아니고, <과농소초>라는 농서도 지어 올리는 등 나름 성의를 보이기도 했다.

문체반정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재밌는 일화가 있다. 바로 천주교(서학)에 관한 이야기이다. 서학에 관해 정조와 채제공 이하 신하들이 토론을 하고 있었다. 채제공이 "말이 불교를 배척한다는데 하는 소리가 별반 다를 것도 없으니 그냥 불교의 한 별파라 하겠고,[37] 죽은 사람을 살리고 봉사를 눈뜨게 하고 천상의 문을 연다니, 어떤 멍청이가 그걸 믿습니까?"[38]라고 하자 정조가 "이게 다 패관 문학을 하도 보니까 그따위 황당무계한 소리도 믿게 되는 것이니 이제부턴 순정 고금체만 쓰라!"고 했다.[39]

여담이지만 소설을 싫어했던 정조와 달리 정조의 두 여동생 청연공주와 청선공주, 그리고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는 10책에 달하는 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할 정도로 소설 애호가였다. 1773년(영조 49년) 봄, 《곽장양문록》의 필사 시기이며 문체반정보다 20년 정도 앞선다. 비단 이 두 공주와 후궁만이 아니라, 현재 전하는 소설책들을 보면 정조가 문체반정을 하거나 말거나 궁중 여인들은 소설을 즐겨 필사하고 읽었던 것 같다.

한편 이덕무와 이상황 등의 경우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을 문책받아 반성문을 쓰기도 했다. 이덕무의 경우 당시 유행하던 소설을 가리켜 '더럽고 더럽도다'라고 표현할 정도의 글을 남겼다. 다만 애초에 그가 소설 읽기에 빠졌다가 들켜서 정조에게 문책받은 것이니, 본심이었을지 정조 눈치를 본 결과인지는 명확히 알 수가 없다. 이상황의 경우 정조 생전에는 반성하고 소설을 배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조 사후 늙을 무렵에 그의 집을 찾아간 선비가 서가에 청나라 소설책들이 빽빽이 꽂혀있음을 보았다고 한다.

2.14. 서체반정[편집]

정조는 문체만 개혁하자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서체까지도 개혁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를 서체반정이라고 한다. 문체반정과 더불어 정조의 문화 통제 정책이 광범위했음을 알 수 있는 사례.

조선 개국기에는 반듯반듯한 고려풍 안진경체, 전기에는 정밀하고 우아한 조맹부의 송설체가 유행하였고, 중기 무렵에는 품위 있고 강경한 왕희지체가 유행하였다. 안평대군이나 선조가 명필로 이름난 왕족들이다. 특히 선조는 워낙 유명해 그의 글씨를 명나라 사신들도 탐을 냈으며 본인도 자신의 글씨에 상당한 자부심이 있었고 한석봉을 매우 총애해 석봉체로 문서를 작성토록 했다. 이러한 영향 때문에 영조에 이르기까지 선조의 글씨에 기반을 둔 서체를 구사하였는데, 대가 내려갈수록 화려해졌다. 영조 시기 즈음 되면 그 당시의 남성이 썼다고는 믿을 수 없는 부드럽고 미려한 글씨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상님들과는 다르게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서예 철학이 매우 뚜렷하였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이 철학은 유지되어 그는 글씨란 무릇 굵직굵직하게, 꾸밈없이 소박하게 써야 한다고 믿었으며, 양난 이후로 바뀐 서체를 점잖은 서체로 되돌릴 것을 주장했다. 그의 이런 영향을 받아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가 탄생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굵직하고 소박하며 남성적인 서체는 조선 후기에 주류로 자리잡는다.

2.15. 주자대전집 편찬 프로젝트[편집]

문체반정의 연장선상에서 정조는 아예 밀려드는 고증학 등의 "이단사설"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주자가 남긴 모든 저작을 모아 편집, 출간, 보급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런 주자대전집을 통해 이단사설들로부터 주자학의 가치를 천명하려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정조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서형수에게 명하여 사고전서 도입 문제와 더불어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원본을 구해오라고 지시했다. 당시 주자학의 근본이 되던 이 책들은 판본들이 다양했는데 정조는 원본이자 정본을 가져올 것을 직접 명한 것이었다.

서형수는 사고전서 편찬의 총책임자이자 당대 청나라의 대학자 기윤을 찾아가 사고전서 도입 문제를 논의하면서 주자의 저작물 정본에 대해 문의했고, 기윤은 이후 사신편에 들려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정본을 보내주었다. 서형수는 이 약속을 받은 후 주자대전과 주자어류 외의 주자의 저작물을 찾기도 한 후 귀국해 정조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정조가 이후 사망하면서 주자대전집 편찬 프로젝트는 무산되었다고 한다.[40] 이런 정조의 노력은 그가 사실상 성리학 유일론자였음을 증명하는 또 다른 사례일 것이다.

2.16. 사망과 무덤[편집]

정조 독살설을 다룬 KBS 〈역사스페셜〉 영상


정조는 조선왕 독살설의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정조의 죽음에 대한 몇 가지 석연찮은 점과 정치적 논란 때문에 노론 지도부인 심환지와 정순왕후의 주도로 정조가 암살되었다는 암살론이 제기되었으나 최근 심환지와 정조가 비밀리에 주고받은 서찰이 공개되어 수그러든 감이 있다. 사실 오회연교와 관련해서 전후 사정을 따져본다면 심환지를 측근이라기보다는 함께 해야 할 당파의 영수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암살론 자체가 나오게 된 계기는 정조의 사후 정약용이 직접적으로 시상(심환지가 정조를 독살했다고 언급)한 것이 큰데 조선시대에 무고죄를 극형으로 다스린 것을 고려하면 확실히 정약용이 무슨 의도에서 그런 글을 썼는지 의심이 가는 부분이 없진 않다. 그러나 이 부분 자체도 심환지와 당시 문제의 어의인 심인이 인척 관계인 점을 고려하면 나올 만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 야음을 탄 독살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거진 밤을 지새우며 책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고 집권 기간에도 여러번의 독살 위험에 노출되었기에 정조 암살론이 단순한 억측이라고 보긴 어렵다는 목소리가 있다. 문제는 다른 어의들과 달리 심인에 대해서는 꾸준히 공격적인 공세가 이어진다는 점과 심환지의 졸기 등에서 사관들이 심환지를 공격하는 부분 등이 암살설의 근거가 되는 것. 정순왕후의 경우에도 기록을 잘 보면 사적으로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고, 죽기 직전 '수정전'[41]을 언급해 정순왕후를[42] 오게 한 것을 보면 서로의 신뢰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암살론의 여러 근거 때문에 《영원한 제국》의 작가 이인화, 이덕일 등의 작가와 학자들은 계속하여 암살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암살설[43]이 영향인지 소설이나 드라마에선 독살된 걸로 진행된 편이라고 한다.[44] 암살론자들은 오회연교 등 정치적으로 격한 상황에서 정조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지고 첫날에는 연훈방 처방으로 효과를 보았다고 스스로 언급한 다음 이어서 연훈방을 처방했을 때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사실상 급사해버렸기 때문에 독살설 주장이 더욱 맹렬한 것. 그러나 유의해야 할 것은 정조가 단명한 것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애연가에 주당에 식사도 불규칙하게 했고[45] 본인 스스로도 잦은 질병을 앓고 고통스러워한 기록들이 남아 있는 데다가 왕을 과로사로 몰고 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조선의 정치 체제를 충실히 따르다 못해 훨씬 과격하게 보낸 인물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이로 인해 정조의 과격한 처방법을 두고 정조의 의술에 대한 논쟁도 발생했다. 여기서 《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종합해보자면 정조의 성격도 요절설과 독살설에 의혹을 지핀 것이 아닌가 싶다. 정조는 매우 다혈질이고 급한 성격인지라 신하들과 갈등이 많았는데 재위 기간 24년 동안 《정조실록》에 기록된 신하들과 논쟁만 해도 5차례~6차례나 될 정도다. 조선 왕의 특성상 과로는 기본인데다 정조의 경우 스트레스와 잔병치레가 잦았고 술담배를 즐겼으며 한 사람이 했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일을 밀어붙인 점 등을 고려하면 49살에 죽은 것이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당시에는 50세만 되어도 잘 살았다고 하던 때였고 60대까지 사는 사람이 전 국민의 5%도 되지 않던 때였다. 무엇보다 그는 당시 치명적인 질병이었던 종기를 심하게 앓고 있었다.

1800년 5월 30일 정조는 대전에서 신하들과 또다시 한바탕 논쟁을 벌였고 끝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오늘 부로 난 신하들과 일체 논의를 하지 않겠다!"고 폭탄 선언을 한다. 이른바 '오회연교(五晦筵敎)'다. 이 말인 즉슨 갈등의 최고 정점에 다다랐다는 점이며 정조가 정치적으로 단절을 선언한 셈이다. 약 4주 뒤인 1800년 6월 28일 정조는 끝내 승하하게 된다. 승하하기 직전에 벌어진 신하들과 논쟁에서 생겨난 극심한 스트레스가 정조가 이미 가지고 있던 질병인 종기를 악화시켜 1달도 채 되지 않은 사이에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역대 조선 왕들이 앓던 고질적인 지병인 종기를 앓고 있었으며 말년에는 종기에 고름으로 굉장히 고생했다. 그 더운 여름날 몇 되나 되는 고름을 쏟으며 고생했다고 하니 고통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열악한 의료 기술 탓에 종기를 어떻게 손 써보지도 못하고 인삼을 넣은 탕약만 마시다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였다.

"밤이 깊은 뒤에 잠깐 잠이 들어 자고 있을 때
피고름이 저절로 흘러 속적삼에 스며들고 이부자리까지 번졌는데
잠깐 동안에 흘러나온 것이 거의 몇 되가 넘었다.[46]


《정조실록》 54권, 1800년(정조 24년) 6월 25일 병자 1번째 기사.


능은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위치한 건릉(健陵)이다. 원래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어서도 모시려고 사도세자가 묻힌 융릉 동쪽에 자신의 능터를 잡았고 거기에 묻혔다. 그런데 풍수학적으로 좋지 않다는 의견이 많이 나와서 이장 논의가 나던 차에 중전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오늘날의 위치인 융릉 서쪽으로 이장해 효의왕후와 함께 합장되었다. 사도세자의 능과 묶어서 '융건릉'이라고 부른다. (참고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3. 묘호, 시호, 휘[편집]

  • 조선왕조

    • 묘호: 정종(正宗)

    • 시호: 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

  • 대한제국

    • 묘호: 정조(正祖)

    • 시호: 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


조선에서 올린 묘호는 '정종(正宗)'이므로 《정조실록》의 원제 역시 '정종대왕실록'이다. 비록 훗날 대한제국 시기에 황제로 재추존되어 '정조'로 묘호가 바뀌었지만 실록명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 제2대 임금인 정종(定宗)과는 한자가 다르다.

대한제국을 연 고종 때 3대조인 양증조부로서 묘호가 조(祖)로 격상되고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었으며 존호가 더해져 최종적으로 '정조 선황제'가 되었다. 흔히 사극에서 세도정치기의 사람이 '정조대왕'이라고 일컫는 장면이 많은데 '정조(正祖)'라는 묘호는 1897년(광무 원년)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격상된 후에 생긴 묘호이므로 원래대로라면 '정종대왕'이라고 해야 맞지만 2대 정종과 헷갈릴 수 있어 일부러 '정조대왕'이라고 하는 것으로 봐야 할 듯.

실제로 정조는 사후 '정조대왕'이라고 불린 적이 없었다. 사후 '조선'에서는 '정종대왕'으로 불리다가 대한제국이 건국되면서 황제로 추존받으며 묘호가 바뀌어 '정조 선황제'가 되었기 때문. 정조의 묘호가 조선의 '조(祖)' 남발과 도매금으로 엮이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묘호가 '정조'로 바뀐 것은 대한제국 건국 당시, 고종황제의 3대조 자격으로 추숭된 것이므로 조 남발과는 관계 없는 종법상 합당한 추숭이다.

정조의 휘인 '祘'은 '셈할 산(算)'자와 같은 음으로 읽기 때문에 흔히 '산'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대부분의 백과사전도 '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정조 당대에 정조가 직접 편찬한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의 〈전운옥편(全韻玉篇)〉을 보면 발음이 '셩'(현대 한국어 '성')이라고 되어 있으며 여기에 어휘(御諱)라는 주석도 달려있다. 제목인 '규장전운' 앞에 붙은 '어정(御定)'은 임금이 정한 것이라는 의미이니 이 발음 사전은 다름아닌 당시의 군주인 정조의 명령에 의해 편찬이 시작된 것이며 정조 본인이 직접 감수까지 한 결과물이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지석영의 《자전석요(字典釋要)》라는 한자 사전에서 이 글자의 음을 '셩'이라고 표기한 이유로 정조의 휘를 '산'이 아니라 이중모음의 단모음화를 감안하더라도 '성'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결론적으로 현대 옥편에서 저 글자를 '산'이라고 표기해 놨기 때문에 흔히 '이산'이라고 하지만 조선에서는 이 글자를 '산'이라 읽지 않았다는 것. 그런데 이 논란을 뒤집는 연구 결과가 나왔으니 정조 즉위 당시까지만 해도 '산'이라고 읽었으나 즉위 20년째인 1796년(정조 20년)에 '산'의 발음을 '셩(성)'으로 고쳤다는 결론이 나왔다. 초기에 '祘' 이 글자를 '산'으로 발음했을 것이란 것을 짐작케 해주는 내용이 《정조실록》에 있으며 이후 발음이 성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짐작케 할 수 있는 내용 역시 《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1776년(정조 원년)에는 분명 '산'으로 읽고 있는데 1800년(정조 24년)에는 '성'으로 읽고 있으므로 중간에 발음이 바뀌었을 것이란걸 짐작할 수 있다.

피휘의 전례로 보건데 전국의 '이산'이나 '~리산' 지명을 갈아치우다 너무 많아서 결국 그냥 왕 이름 쪽의 발음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1980년대까지는 정조의 이름을 '이성'으로 알았다가 '이산'으로 고쳤는데 이제 결론이 위와 같아졌다는 것. 또한 선대인 영조 대의 운서에 동자 관계인 '算'자에 '어휘(御諱)'라는 내용이 있어서 이 주장에 근거를 실어주게 되었다. 그 이유는 원래 규장전운의 해당 자리에 있던 '渻'자를 쓰던 약봉 서성(徐渻)이 자손이 매우 많아 그를 부러워하여 그의 이름과 같은 발음으로 채워 넣은 것이라고 한다.

4. 평가[편집]

군주로서 사명감이 투철했던 정조는 진정한 위민 정치를 구현하겠다는 높은 이상도 가지고 있었다. 제2의 세종이라 할 만큼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군왕. 그래서 그의 짧은 생애가 더욱 안타깝지만, 과연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조선의 운명이 달라졌을까? 그는 진정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개혁 군주였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6권 中

정조의 통치 행태는 권모와 술수였다. 연전에 발굴된 영의정 심환지와의 비밀 편지 속에서 그의 마키아벨리적 면모가 잘 드러났다. 정조가 죽자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 세도기의 경직된 반동 정치는 조선을 일제의 식민지 처지로 몰아갔다. 그래서 우리는 영조·정조 대의 짧은 황금기를 내내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짧은 막간은 정조의 통치 스타일 때문이었다. 혼자 고민하고, 혼자 결정하고, 혼자 지시하는 '헤드십', 이른바 카리스마 콤플렉스가 잉태한 추락이었다.[47]


배병삼 교수[48]


왕-의정부(대신)-삼사(대간)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전통적인 통치 구조는 태조[49], 태종이 기반을 다지고 이어 세종과 문종이 열심히 가꾸고[50] 성종이 완성한 체제였다. 이러한 왕-의정부-삼사로 대표되는 삼각 상호 견제 체제는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의 빈번한 대옥사로 인해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후 사림이 집권한 이후로는 붕당 정치가 일어났으며 붕당 정치는 국왕-집권 붕당-비집권 붕당 간의 삼각 상호 견제 체제를 통해 균열이 간 조선의 전통적인 통치 구조를 복원하는데 힘을 썼지만 이러한 사례는 붕당 정치 초기인 선조, 효종, 현종 시절 때나 작동한 시기였지, 대부분은 동인, 서인, 북인, 남인, 노론, 소론, 시파, 벽파 할 것 없이 서로를 잡으려 안달이 나서 피바람이 난무하던 시절이었고, 오히려 조선의 합리적인 통치 체계를 망가뜨리는 행위였다.

그래서 영조는 이러한 붕당 정치의 피바람을 막고자 탕평책을 실시해 준노와 준소를 배제하고 완노와 완소를 키워서 정국이 안정되었지만 그 결과 붕당 정치의 견제성이 많이 약해졌고 풍산 홍씨로 대표되는 척신 세력의 발호와 전횡이 이어졌다. 이러한 경험을 한 정조는 집권 초반에 영조 시기의 강력한 외척 세력인 풍산 홍씨와 즉위를 위해 도왔던 경주 김씨 세력을 몰아내서 외척과 관련이 없는 신하들을 등용시켜 강력한 척신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외척에 대한 지나친 경계로 측근인 홍국영에게 권력을 너무 몰아주어 세도 정치의 폐단을 만들었으며 특정인들만 요직에 앉혔다.[51] 이에 정조는 홍국영 세력을 밀어내고 준론 탕평을 펼쳤으며, 이는 국왕-집권 붕당-비집권 붕당 간의 삼각 상호 견제 체제를 통해 돌아가는 붕당 정치의 합리적 통치 체계를 복원하는 행위인 동시에 이미 금이 가기 시작한 조선의 전통적인 통치 구조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조는 이러한 준론 탕평에 불구하고 건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사망했으며 정순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이 시작되고 정조 대에 이룩한 강력한 왕권을 정조의 사돈 집안인 안동 김씨가 이어받으며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왕권을 견제할 신권을 탕평책으로 약화시켜놨더니 왕이 아닌 외척이 그 권한을 잡았으나 견제할 세력은 없었다. 이렇게 비록 자질이 무너지고 있더라도 상호견제를 바탕으로 운영되던 조선의 정치 구도는 극단적으로 말해서 정조만. 좀 유하게 말해도 정조만큼의 장악력을 갖춰야 정상적인 운영이 가능한 구도로 개편한 것은 정조의 실책이고, 이로인해 조선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어 붕괴했다 볼 수 있다.

정조의 정치의 특징은 바로 '준론 탕평'이라는 것이 있다. 준론 탕평은 척신 세력의 발호를 막고 당파의 의리를 중요하게 하고 각 당파끼리 당파색이 강한 인물을 등용시켜 다른 당파의 독주를 막고 서로를 상호 견제해서 권력을 나누는 방식이다. 그럼에도 준론 탕평은 역시 비판이 존재하는데 정조가 사도세자를 추숭하기 시작하자 시파와 벽파로 나뉘어 정쟁을 벌였으며 여기에는 정조가 노론 견제용으로 나온 남인 세력이 끼어들어가면서 심해졌다. 이때는 정조가 절정에 달한 왕권으로 당파를 눌러서 해결했으나 정조가 죽고서는 당연히 이를 막을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조선을 멸망으로 몰고 가버린 세도 정치의 바탕을 만든 인물이 바로 정조라는 점이다. 정조가 김조순을 세자의 장인으로 삼으면서 세도 정치, 더 나아가 조선 몰락의 씨앗을 뿌렸다는 평가가 있는데 이에 대해 정조 입장에서 변을 하자면 당시 정조에게는 그게 최선이었다. 정조가 김조순을 세자의 장인으로 삼을 당시의 정국을 살펴보면 사도세자 추숭과 탕평책을 반대하는 벽파는 강경파에 속했던 심환지가 새로운 수장이 되면서 더욱 강경한 노선을 걷기 시작했고 사도세자 추숭과 탕평책을 찬성하는 시파는 채제공이 세상을 떠난 뒤 시파 전체를 규합하고 이끌만한 마땅할 인물을 찾지 못해 흔들리고 있었다. 정조가 평생에 걸쳐 세심하고 철저하게 관리하며 억지로 맞춰놓은 두 당파의 균형이 붕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시 정조가 나서서 당파 간 세력을 조율하고 균형을 맞추어야 했지만 잦은 밤샘과 격무, 과도한 흡연과 음주로 인해 노화가 남들보다 빠르게 찾아와, 스스로가 "내 또래의 신하들은 전부 머리도 검고 눈도 초롱초롱한데 나는 벌써 백발의 머리에 눈도 침침하여 앞이 보이지 않는다."라고 자조할 정도로 건강이 아주 심각한 상태였다.

당시 세자 나이는 겨우 10살에 불과했고 왕실의 제일 큰 어른인 정순왕후 김씨는 벽파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벽파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으니 정조로서는 불안했을 것이다. 이대로 자신이 죽는다면 어린 세자를 대신해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될테니 벽파와 시파의 균형 붕괴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고 결국에는 벽파의 일당 독재가 펼쳐져 탕평과 사도세자 추숭도 완전히 물 건너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때문에 정조로서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벽파와 시파의 세력 균형을 최대한 맞출 필요가 있었고 그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시파에 속했던 김조순을 세자의 장인으로 삼는 것이었다. 영조 말년에 정국을 어지럽히고 자신을 위협한 외척들을 보며 척신 정치를 부정하고 혐오했던 정조였지만 시파에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은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그것 뿐이었다. 정순왕후 김씨라는 든든한 외척을 뒷배로 두고 있는 벽파처럼 시파도 그녀 못지 않은 든든한 외척을 뒷배로 둘 수 있도록 해주는 것만이 그 당시 정조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책이었기에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 정조는 훗날 세자가 장성하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척신 정치를 척결하고 탕평책을 펼쳐 붕당 간의 세력을 조율하고 관리하며 안정적으로 정국을 이끌어가리라고 기대했던 듯하다. 물론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세자(순조)는 그러지 못했지만 말이다. 세도 정치는 어디까지나 순조가 정국 관리에 상당히 신경을 썼던 영조, 정조와는 달리 조정 일에 거의 손을 놔버리면서 초래된 것이지,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나름대로 차기 정국을 대비하기 위해 애썼던 정조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순조 대에 세도 정치의 막을 연 김조순은 시파였던 데다가 곧은 성격이여서 오히려 정조의 유지를 충실히 따랐으나 권력을 크게 가진 탓에 아들인 김좌근 대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흔히 아는 막장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아도 세도 정치는 순조가 권력이 너무나도 커져 버린 안동 김씨를 제어하지 못하면서 생긴 문제다.

정조의 전체적인 정치 방식 또한 논란이 될 수 있는데 표면적으로 탕평이라는 이름 아래 정조 자신의 개인적인 능력으로 싸움이 벌어지지 않게 억눌렀을 뿐이고 흥선대원군 때까지도 노론, 소론, 극소수의 남인 등 이익 집단으로 변질된 당파의 뿌리를 뽑을 시스템까지는 완성하지 못했다.

물론 당파의 뿌리가 무지막지하게 깊었으니 정조가 어떻게 할 수 있던게 아니며 남은 당파의 뿌리도 어떠한 의리를 가지고 뭉친 것은 아니었다. 정조의 정치는 당파들을 고루 등용하면서도 영조 때처럼 표면적인 구색 맞추기 탕평을 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실제로 정조식 탕평은 당파 없애기보다는 당파 간 세력 조율하기 정도에 가까우며[52] 더 정확히 하자면 영조 말기에 척신 정치에 노론 1당으로 귀결된 정치에서 척신들을 척결하고 건전한 붕당 정치를 다시 열었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소론 서명선, 이시수, 이병모 등을 등용하고 채제공, 이가환을 비롯한 남인 세력도 대거 끌어들여 당파다운 당파를 만들었다. 동시에 정조의 정치 방식에 맞는 사람들은 조정에서 힘을 얻었지만 이에 반대파도 생겨나 찬성파와 대립하면서 시파(노론 온건파 + 남인, 소론 잔당)와 벽파(노론 강경파)로서 제2의 당파 싸움을 벌였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그렇기에 노론 벽파를 제외하고는 당파의 의리 자체를 붕괴시켜 이후의 세도 정국을 낳은 측면도 있다. 정조의 정치가 왕권과 왕의 능력에만 너무 의존한 정치였다는 평가도 있는데 이건 정조 자신이 너무 먼치킨이라 몰랐던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초계문신제'라는 인재 등용 제도를 보면 하급 관리들에게 1차 필기 시험을 치르게 하고 2차 필기 시험을 치르게 하고 그 중 유력한 사람을 골라 면접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왕 자신도 참여 지분이 상당히 컸는데 이렇게 발굴해 낸 인재 중 1명이 정약용.

정조가 현대적 시각에서 과연 개혁적인 군주였느냐는 의문도 존재한다. 정조가 실학자들을 등용하고 외국의 문물을 일부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문체반정을 일으켜 학문의 다양성을 탄압하고 성리학적 정통에 집착하는 등의 행위를 보면 상당히 반동적인 면도 분명 존재한다. 때문에 정조의 행위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주장도 있다. 서양 문물의 수입과 서학도 이게 다 패관잡문이나 읽어서 그러니 순정고금체만 쓰라는 명령을 내려 사실상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정조는 스스로를 조선 유학의 대통으로 칭하는 등 전형적인 유자의 모습을 보였다. 아마도 문체반정의 중요한 이유가 이것이 아니었을까?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정조가 추구한 궁극적 목표는 후대의 흥선대원군이 지향한 목표와 같은데 그도 그럴 것이 흥선대원군의 개혁이 정조의 정책을 모범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흥선대원군이 신문물에 대해서 거부감이 덜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은 어디까지나 국내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실행되었고 1880년대 이후 급진개화파와 어울리는 흥선대원군의 모습을 보면 무지몽매하게 서양을 거부하자는 세력으로 볼 수 없다.

그런데 세도 정치의 원인이 된 정조는 '개혁 군주'로 추앙받는데 반해 세도 정치를 척결한 흥선대원군은 '수구'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것이 어찌 보면 아이러니. 이 점을 들어 임용한 교수는 자신의 저서 시대의 개혁가들에서 흥선대원군을 '구식 개혁의 선봉장'이란 평가를 내렸는데, 정조가 과거의 방식으로 나아가는 개혁을 진행했고 흥선대원군도 이를 따라 개혁을 진행했단 점에서 적절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서양 배들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 정조 재위기였다. 《정조실록》을 보면 1797년(정조 21년) 영국 해군 군함인 프로비던스 호가 부산 용당포(지금의 부산광역시 남구 용당동)에 닿은 기록이 등장한다. 그러나 정조도 흥선대원군과 마찬가지로 이양선이 오면 통상 수교에는 관심이 없었고 물과 식량만 제공하고 쫓아냈다.

정조는 재위 15년차 이후 경연을 사실상 중단했으며 알려진 바처럼 어느 순간부터 권신들과 비밀 어찰을 통해서 막후 정치를 하였다. 경연은 흔히 알려진 왕이 공부하는 자리로서의 성격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신하들과 소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조는 신하들이 무식하니 내가 가르치겠다는 명목으로 경연을 없애고, '초계문신제'라는 미명 하에 권신들과의 막후 정치에만 몰두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말기에 와서 특히 심해진 그의 마키아벨리적 사고관으로부터 나왔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건강의 악화, 어린 세자, 자신의 불같은 성격에 비해 진전되지 않는 정치 상황, 자신보다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신하들, 채제공 사후 시파 세력의 구심점이 없어진 점 등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봐야 한다.[53]

결론적으로 말해 정조 시대의 한계는 정조 자신이었는데 박시백이 지적한 것처럼 자질과 실천력 모두 있었지만 그는 개혁 군주이기 이전에 유학자였다. 그것도 뿌리까지 유학 그자체인 대유학자이며 설사 정조보다 뛰어난 국왕이 권좌에 있었다 하더라도 조선이라는 국가임과 동시에 고립된 체제 자체를 변혁시켰을리는 만무하다.

정조가 구축한 운영 체제는 정조만이 가능했으며 말년에 급격히 나빠진 건강과 믿었던 신하들의 죽음은 정조를 극단으로 몰아넣었다. 그것은 결국 정조가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가는 선택을 강요하였기 때문에 아쉬움을 남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조의 사상 통제도 원인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조선일보 칼럼)정조의 사상 통제로 조선 학문은 몰락했다

5. 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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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어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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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기타[편집]

  • 승하하기 2년 전인 1798년(정조 22년) 다시 새로운 호를 지었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무척 길고도 독특한 호였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이 1만 개의 개울을 비추듯이, 자신의 다스림이 일부 특권 계층이 아닌 만백성에게 두루 혜택이 미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특히 다른 호와는 달리 정조는 만천명월주인옹에 담은 자신의 간절한 뜻과 의지를 조정의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알 수 있도록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글까지 지어 발표했다. 글은 창덕궁 후원 폄우사 옆 존덕정에 있다.

  • 정조와 의빈 성씨의 장남인 문효세자의 세자 책봉 때, 청나라 황실은 문효세자의 장수를 기원하는 미얀마산 옥불을 선물했다고 한다. 정조는 이 옥불을 보관하기 위해 승가사를 중건했으나, 오늘날 그 옥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관련 기사

  • 시력이 나빠 안경을 애용하기도 했다. 즉위한 지 23년째 해(1799년)부터 눈이 나빠져서 안경을 썼다는 기록이 《정조실록》에 있다. 다만 본인도 공식석상에서는 쓰기가 부담스러웠는지 다음과 같은 언급을 남겼다.[54]

    "나의 시력이 점점 이전보다 못해져서 경전의 문자는 안경이 아니면 알아보기가 어렵지만, 안경은 2백 년 이후 처음 있는 물건이므로 이것을 쓰고 조정에서 국사를 처결한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이다. 요즘 일기 등 문서를 상고해 볼 일이 있었는데, 역시 마음대로 훑어보기가 어려웠다. 이는 예사로운 눈병이 아니어서, 깊은 생각을 한다거나 복잡한 일이 있을 경우 어김없이 이상이 생겨 등골의 태양경(太陽經)과 좌우 옆구리에 횃불이 타는 듯한 열기가 있는데, 이것이 눈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 간혹 시험삼아 불을 때지 않은 온돌바닥에 누워 있으면 몸의 열기로 바닥까지 차츰 따뜻해지므로 처음에는 조금 시원한 것 같아도 나중에는 또 견디기가 어려우니, 이는 전부 태양경의 울화가 팽배해 있는 결과로서 나의 학문의 힘이 깊지 못해 의지의 힘이 혈기(血氣)를 제어하지 못한 때문이다."


    《정조실록》 52권, 1799년(정조 23년) 7월 10일 병인 1번째 기사.

  • 증조할아버지인 숙종과 할아버지 영조를 이어서 이순신을 높이는 사업을 계속했는데[55] 《정조실록》이나 개인 문집인 《홍재전서》를 보면 이순신에 대해 정말 침이 마르도록 찬양하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 나라에 진정으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은 이 충무공(忠武公) 밖에 없다."라든지, "그가 만약 고대 중국에 태어났으면 제갈량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실제로도 어명으로 《이충무공전서》를 발간케 하는 등[56] 재위 기간 내내 이순신 기념, 추모에 신경을 많이 쓰기도 했다.

  • 삼국지의 촉한의 황제 유선도 높게 평가했다!

    후주(後主)가 촉(蜀)을 생각한다고 대답한 것은 천고의 비웃음거리가 될 만하다. 그러나 그 말의 뜻을 자세히 음미하면 혹 자신을 보전하려는 계책에서 일부러 이러한 말을 하여 속마음을 감추려고 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대저 그 사람은 참으로 말할 것이 없고 평소 그의 사적(事蹟)을 살펴보더라도 진 혜제(晉惠帝)에 비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비록 극정(郤正)이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찌 촉을 그리워하는 한 생각이 없겠는가. 이는 참으로 말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고 단지 저들의 의심만 야기시킬 뿐이기 때문에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극정이 말한 것에 대해서도 가부를 살피지 못했어야 하는데, 오히려 어떻게 극정을 너무 늦게 알았다고 한스러워할 수가 있겠는가.


    《홍재전서(弘齋全書)》 제114권.

  • 강희제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상국이기는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금수같은 오랑캐라고 무시했던 청나라의 황제지만 의외로 성군(聖君)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강희(康煕)는 그 자체로 성군이니, 이적(夷狄)과 똑같이 일률화할 수는 없다.”

  • 스스로 재판을 집행하여 판결을 내린 경우도 많았는데, 한 번은 모함 사건을 혼자 눈치채고 옳게 판결한 경우도 있었다. 황해도에서 이가원과 조환이 "조재항이 아내 윤씨를 밥에 돌이 섞였다는 이유로 걷어차 죽였다"고 관에 고발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가원은 윤씨의 외삼촌이고, 조환도 윤씨의 인척이었다. 관에서 즉각 부검을 실시하려 했으나 죽은 지 오래되어 시신의 부패가 심했는데, 등뼈에 피부가 붙었음을 근거로 타살을 확정 지었다. 더불어 마을에 '나는 밥 한 사발 때문에 맞아죽었다'는 내용의 노래가 돌아 조재항의 살인 혐의는 더 명확해졌다. 형조와 황해도 관찰사는 조재항의 살인 혐의를 유죄로 보고 사형을 내릴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장계를 받은 정조는 "모름지기 그러한 노래는 원통함을 알 듯 말듯 숨기는 법인데, 너무 정확하게 범인을 확정 짓고 있으니 도리어 의심스러우므로 다시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곧 이가원이 노래를 지어 퍼뜨렸고, 조환이 이가원의 꼬드김에 넘어가 소장을 작성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가원이 조재항에게 금전을 요구했으나 조재항이 듣지 않아 무고했다. 조재항은 사형 직전에 무죄 방면되었고 이가원은 종신 유배, 조환은 도형 정배(중노동 처벌 후 특별 감시)에 처해졌다.

  • 정약용의 다산시문집에 의하면, 시(詩) 짓기 시험을 내서 제 시간 내에 시를 짓지 못하는 관료를 창덕궁 부용지 한가운데의 둥근 섬으로 귀양 보내서 망신을 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왕조실톡》 33화에 이 에피소드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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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부용지와 섬. 이런 곳에 조각배 띄우고 노 저어 들어가게 했다.

  • 전해지는 초상화를 보면 온화해 보이지만, 이는 후대에 이길범 화백이 표준 영정으로 그린 상상화이다. 실제로 순조의 회상에 의해 그려진 초상화를 보면 상당히 억세고 굳건한 인물로 보인다. 그에 대한 묘사로 정조는 반듯한 이마, 우뚝선 콧날에 펑퍼짐란 눈자위, 네모난 입에 겹으로 된 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 당시 에피소드 중 하나로, 윤광류라는 농민이 운종가의 종(현대의 종로 보신각)을 멋대로 친 사건이 있었다. 운종가 종은 한양 도성의 시간을 알리는 기능을 했으므로 이는 심각한 사건이다. 그런데 관헌에서 당장 잡아들여서 조사한 결과 종을 친 이유가 참으로 황당했는데, 이유는 정조에게 참외를 바치고 싶어서. 행위 자체는 중죄이고 이유도 황당하긴 하나, 딱히 나쁜 의도는 아니어서인지 정조는 그냥 윤광류를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신하들이 종을 멋대로 친 것은 중죄이므로 엄히 처벌할 것을 주장했지만, 정조는 "영조 임금 때도 광화문 종을 친 자가 있었는데, 뭔가 억울한 일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라며 넘어가고 대신 종을 담당하는 관리를 파직했다. 이번 일도 그냥 모르고 한 것일 테이니 대충 넘어가자"며 사건을 흐지부지 끝냈다.[57]

  • 백성들의 민원을 직접 다가가 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격쟁 항목 참조. 신료들이 안전상의 문제를 들어 반대하기도 하였으나 정조는 "백성들은 나의 자식들이고, 백성들이 격쟁을 통해 나에게 호소하는 건 부모에게 호소하는 것과 같다. 그들이 잘못된 게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만든 이가 잘못된 것이다."라고 강행했다.

  • 이덕무의 저서 《은애전》은 정조 치세에 벌어진 실제 사건과 정조의 실제 판결 내용을 나타내고 있다.

  • 의빈 성씨에 관한 기록을 보면 상당한 로맨티시스트였던 것으로 보인다.

  • 수시로 성균관에 방문해서 유생들로 하여금 쪽지시험 비슷한 시험을 치르게 한 적이 있는데, 한번은 문제가 너무 어려웠는지 유생들이 단체로 백지 답안지를 제출하자 노해서 쓴 경고문이 〈정조어필 시국제입장제생〉이란 글로 남아있다.[58] 정조 본인도 얼마나 빡친 채 썼었는지 오타를 그냥 먹으로 쓱쓱 지워버린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정조의 불같은 성미를 엿볼 수가 있다. 보물 〈정조어필 - 시국제입장제생〉.

  • 대한민국 해군은 2022년 6월 11일 KDX-III Batch-II 이지스 구축함 1번함의 함명을 정조대왕함으로 명명했다. 이후, KDX-III Batch-II급은 정조대왕급 구축함이 될 예정이다.

7.1. 엄친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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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유아 시절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 편지.[59]

각종 기록을 보면 신하들에게 "내가 이렇게 똑똑한데 니들이 뭘 안다고 이러느냐?"며[60] 신하들을 까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문제는 명백한 사실이라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정조는 "내가 더 이상 경들에게는 배울 것이 없으니 내가 직접 교육을 해야겠다."라면서 왕이 신하들과 토론하며 학문을 배우고 정책을 논의하는 경연을 폐지하고, 임금 자신이 직접 교육을 시켜서 중하급 관리들을 발굴하는 '초계문신제'를 실시한다.

또한, 《정조실록》에 따르면 신하들에게 "공부 좀 하시오."같이 잔소리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원래 같으면 경연 폐지는 "그것만은 아니 되옵니다."라고 해야 할 일이긴 한데, 그게 엄친아 정조니까 가능했던 것이다. 진짜 신하들로서는 주눅 들 만한 학문적 포스를 가진 정조 앞에서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가 무식하다고 갈굼당할 테니 말이다.

대단한 독서광이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사관이나 승지들이 적절한 인용구를 못 찾아 헤매는 경우가 있으면 정조는 "어느 책 몇 쪽 몇 번째 줄에 뭐라 되어 있는데, 이는 적절치 못한 인용이다. 어느 책의 몇 쪽에 몇 번째 줄에 이렇게 되어 있으니 내가 지금부터 말하는 걸 그대로 옮겨 적어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나중에 신하들이 교차 확인할 겸 직접 원문을 찾아봤는데, 왕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 경우가 허다했다. 중요한 것은 정조가 신하들과 다르게 군주로서 일하는 입장이라 다른 업무로도 웬종일 격무에 시달리는 바쁜 사람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 왕 중에서 유일하게 왕이 모든 경서를 완벽하게 암기하고 있었던 인물이 바로 정조다. 정조는 책을 암송할 때까지 지독하게 파고드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자의 저서나 기타 저서에 자신이 새로 주석을 다는 등 자신의 집필서를 묶어서 《홍재전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이미 동궁 시절 때부터 《주자대전》, 《주자어류》의 선집인 《선통》, 《화선》, 《회영》을 엮어내었고, 이후에는 주자가 평가한 두보와 육우의 시를 모아 《두육분운》, 《두육천선》을 엮었으며 말년에는 《아송》을 펴내는 등 시에 있어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특히 주자의 저서에 자신의 주석을 달았다가 사문난적으로 몰린 당대의 네임드 유학자 윤휴, 박세당의 경우와 비교한다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는 설령 임금이라 해도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아무런 이야기 없이 출판까지 제대로 거친 것은 당대에 정조의 학문 수준이 얼마나 대단하게 평가받았는지를 암시하는 부분이다.[61]

경연 과정에서 정조가 밝히는 유학에 대한 소견에 있어서 당대의 학자들치고 제대로 받아치거나 혹은 반론을 제기한 경우가 없다. 근본적으로 정조가 시행한 '초계문신제' 자체를 봐도 전례가 없는 제도로써, 이러한 제도 자체에 신하들이 완전히 제동을 걸 수 없었던 것은 그만큼 정조의 유학적 소양이나 학문적 능력이 뛰어났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또한 서학에 대한 견해 자체도 정약용의 저서를 읽어보면, 문체반정을 일으킨 이유를 모를 정도로 개방적으로 나온다. 특히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수용 능력 자체는 후대 사람들보다 빠르고, 이해력도 높아 아주 적극적으로 나온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문체반정에 대한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문체반정 자체는 유교 근본주의적인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으나, 당시 소장파, 남인 계열에서 서학이 유행했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극렬한 탄압 대신 정학을 강조하는 측면으로써의 문체반정도 배제할 수 없다. 당시 천주교에 대한 극렬한 탄압 대신 정학을 세워 사학을 물리친다는 정조의 기본 방법론은 주로 천주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남인 계열, 그리고 후에 시파로 분류되는 파벌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였다. 이들은 정조의 정치적 파트너다. 이러한 문체 반정과 정학을 올바르게 세우는 방법을 통해 정조 연간에는 진산 사건을 제외하면[62] 극렬한 서학 탄압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야한다. 실질적으로 문체반정 과정에서 이가환, 김조순 등이 사실상 정치적 탄압을 피할 수 있었다는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홍재전서》 중에서는 옥편도 있다. 즉, 훈고학이나 고증학에 있어서도 달인이었다. 임금이 쓴 책이라고 다 출판해주는 게 아닌 조선의 깐깐한 출판 구조와, 임금이 쓴 책이라도 엉망이면 신하들이 미친 듯이 깠던 성리학적 전통을 고려하면, 옥편까지 나온 시점에서 정조의 학문적 달성의 수준은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신하들이 묘지문(墓誌文)에다가 "우리 임금께서는 진실로 성인이셨다"라고 적은 경우가 전무후무한 일이다.[63] 심지어 20자로 휘호를 정해 오지 않았다고 신하들을 면박을 주고, 세조라는 시호가 왜 안 되냐고 신하들을 협박한 예종조차도 자신의 부친인 세조의 묘지문에 성인이라는 말을 쓸 수 없었고,[64] 그 이전에 세종도 그렇게 쓰지 못했다.[65] 정조가 유일무이한 셈.[66]

원체 책을 많이 읽다 보니 나이가 들어서도 모친인 혜경궁 홍씨를 찾아가 무슨 책을 읽었고, 어떻게 읽었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책거리를 하는 것이 사실상 월례 행사가 되었다. 바쁜 일이 없으면 한 달에 한 질을 읽었다고 하니 현대로써든, 당시로써든 희대의 독서광이었던 셈.

하지만 비판이 업이었던 대간들에 의해 황당한 비판을 당하기도 했다. 유성한이란 자가 "아무리 신하가 못났다 해도 경연을 소홀히 함은 옳지 못하며, 요새 듣자 하니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다고 하니 남부끄러워서 일 못해먹겠네요"라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67] 정조는 이 상소를 읽고선 "첫 번째 건은 무슨 뜻인지 알겠는데, 두 번째 건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올 정도다. 관둘 생각하지 말고 일이나 똑바로 해."라고 소감을 밝혔고 신하들이 "저 미친놈이 돌아도 단단히 돈 모양입니다."라고 일제히 국문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정조는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중엔 상소도 올리지 말라 명한다. 허나 이 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는데 남인들이 일제히 유성한의 배후를 캐야 한다고 주장하여 조사한 결과 유성한이 윤구종이란 자와 친해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그가 경종의 능 앞에서 예를 표하기를 거부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경종에게 신하 노릇을 할 생각이 없어서 그랬다."라는 폭탄 발언을 했다. 경종이 폐주도 아니고 엄연히 영조 자신도 황형이라 칭송한 어엿한 조선의 임금인데 자신이 악질 역적임을 자복한 셈이나 다름없었다.[68] 그러자 채제공이 "경종대왕께선 4년간 조선의 임금이셨는데 경종대왕께 충성하지 않는 놈이 영조대왕께는 충성했겠고 장헌세자께 충성하지 않은 놈이 전하께는 충성하겠습니까?"라고 곁다리로 사도세자 문제를 들고 나왔으며 나중에 다른 이는 아예 본론으로 사도세자 얘기를 꺼낸다. 이에 호응하여 사도세자를 추숭할 것을 청하는 영남만인소가 올라와 김종수, 심환지를 비롯한 벽파를 두렵게 했다. 이에 정조는 큰 호응을 보였으나 "5.22 하교"란 하교를 내려 사도세자를 추숭하는 게 맞긴 하지만 시기 상조니까 그냥 덮어두자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이후 채제공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사도세자 추숭에 승부수를 걸었다가 정조 말년을 아수라장으로 만든다.[69]

효묘(孝廟)께서 일찍이 무예를 좋아하여 한가한 날이면 북원(北苑)에 납시어 말을 달리며 무예를 시험하곤 하였는데, 그때에 쓰던 청룡도(靑龍刀)와 쇠로 주조한 큰 몽둥이가 여직껏 저승전(儲承殿)에 있었다. 그것을 힘깨나 쓰는 무사들도 움직이지 못하였건만, 세자는 15, 16세부터 벌써 모두 들어서 썼다.


- 정조실록 28권, 정조 13년 10월 7일 기미 4번째기사 어제 장헌 대왕 지문


여기까지만 보면 정조가 공부벌레로만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것보다도 훨씬 대단한 먼치킨이다. 세손 시절부터 문무를 겸비한 제왕을 지향했기에 무예도 익혔다고 한다.[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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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관련 고풍


윗 사진은 고풍에 관한 것인데, '고풍'은 원래 조선시대 때 새로 부임한 관료가 하급자에게 공식적으로 선물을 내려준 과정을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72] 해당 자료는 활쏘기 이벤트 후 기분이 좋아진 정조 임금이 신하들에게 상을 내렸던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정조는 고풍 서류가 올라오면, 직접 수결을 하여 결재했고, 간단한 감상이나 신하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적거나, '누구 누구에게 이런 선물을 내린다'는 식으로 추가로 기록하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고풍 자료에는 "원래 활쏘기는 우리 가문의 법도인데 이후 10여년 동안 쏘지 않다가 최근 팔힘을 시험해보려고 몇 차례 10순씩 쏘았는데 40여발씩 명중시켰다. 그랬더니 경(신하)들이 축하의 글을 올리기에, 장난삼아 '그래 내가 49발까지 맞히면 그 때 가서 고풍을 청하라'고 했다. 그런데 마침내 오늘(10월 30일) 명중한 화살수가 약속한 숫자(49발)와 맞아 떨어졌으니 선물을 내리려 한다"고 적혀있기도 하다. 이러한 정조의 고풍은 여러 장이 남아있는데, 하나같이 '20순 중에 98발 명중', '10순 중에 49발 명중' 이런 결과가 쓰여있다. 참고로 1순은 5발, 20순은 100발이다.

위 기록에서 보듯 활 솜씨가 대단히 훌륭해서 글자 그대로 '백발백중'. 화살 100발을 쏘면, 98발, 50발을 쏘면 49발씩 맞히고, 나머지 한두 발은 일부러 명중시키지 않았다. 그 이유는 군주는 스스로의 재주를 자랑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조 스스로도 이를 두고 '활쏘기는 군자의 경쟁이니 남보다 앞서려고도 하지 않고, 사물을 모두 차지하려 기를 쓰지도 않는다'고 설명했다. 정조 때 실학자인 박제가도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늘이 내린 임금의 활쏘기 솜씨에서 50대 중 1대를 빠뜨린 것은 겸양의 미덕'이라고 하더라'고 기록하며 '문무를 겸비한 우리 성상(聖上, 정조)은 백왕을 뛰어넘으셨다'며 칭송하기도 했다.

심지어 정조는 곤봉에 놓고 쏘아 10발을 쏘아 모두 명중시키기도 했다. 세손 때 쏘고는 즉위 후 16년간이나 놓았는데도 50발 중 41발을 맞히었고 한 번 49발을 맞힌 이후로는 어김없이 49발을 맞혔다는 기록도 있다. 그래서 '이성계의 현신'이란 말도 나왔을 정도로 문무겸비의 왕이었다.[73]

성격은 자상하기보단 불 같았다.[74] 이 불같은 성격이 엄친아적인 능력과 결합되면서 말빨 최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실제로 조선 역대 국왕 중 언쟁 능력은 극강급. 정조와 논쟁 한번 벌였다가 유체이탈을 제대로 경험한 조정 중신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에 따르면 욕도 매우 찰지게 잘해서 주위 신하가 말리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이러한 몇몇 일화로 단순히 욕쟁이, 키보드 워리어 정도의 이미지로 인식하면 곤란하다. 기본적으로 정조는 자신의 뛰어난 자질과 천재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함에 있어 말 그대로 욕먹을 짓을 한 경우에만 욕을 퍼부은 정도이다. 어떻게 보면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속이 시원한 소위 사이다 발언인 셈.

다만 정조만이 유난히 뛰어난 키배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물고 늘어지면서 반드시 이기는 것으로 태종 또한 말빨 능력이 상당히 좋았고,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으로 유명한 세종 역시 말년에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거침없이 상대방을 갈구는 것으로 유명했다.[75] 거기에 영조는 《영조실록》에 '신하들에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했다.'라는 말이 여러 번 적힌 임금이다. 특히 숙종, 경종, 영조 모두 화술에 능했다.[76]

나중에 나이가 들면서는 좀 더 쪼잔해져서 자기 정책을 공개적으로 깐 어느 선비를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에 임명하면서 대놓고 "네 주제에 그런 중임을 할 수 있겠니?"라고 조롱했다.[77] 이런 불같은 면모는 할아버지 영조와 증조부 숙종에게서 물려받은 듯. 안타깝게도 정조의 아들 순조는 세도 정치에 휘둘렸다.[78]

의학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본인이 직접 자신의 질병에 처방을 했을 정도에다가, 동의보감이 부실하다고 직접 보강을 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정조가 과연 우리와 같은 인간인가 의심스러운 대목.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한의사들 간 의견이 갈린다. 일부에선 처방이 과격하지만 효과는 볼 수 있는 극약 처방을 자주 했지, 크게 틀린 게 아니라고 하는 편과 반대로 격무에 시달리고 술을 즐기고 담배를 피우는 게 잦은 정조에게 그러한 처방은 위험하다 정도로 나뉘는데, 이는 최후의 순간에 내린 처방과 연훈방 논란으로 이어진다. 헌데 이러한 과격한 처방은 허목에 연관된 일화에서 나오기도 한다.그 때문에 '사약에 들어갈 만큼 극한 재료로 병을 치료하는 것이 당대에 유행이 아니었을까?'라는 의견도 존재한다.[79]

그 때문에 정조가 암살되었다는 입장에선 연훈방 처방이 처음에 효과를 봐 두 번째로 시도할 때 누군가가 독을 넣어 연기에 독성을 띠게 했다는 것. 아무튼 정조가 의학을 공부한 것은 즉위 직후부터 자신의 신변에 대한 위협이 지속적으로 존재했었기 때문에, 어의에 의한 독살의 위협을 스스로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볼 여지가 있으나 정작 정조 본인은 일득록에서 "대저 의학서라는 것은 옛 경서와 큰 차이가 없어 누구나 공부하고 익히면 쉽게 배울 수 있다."라고 서술했다. 한마디로 정조 본인은 단순히 잡기를 익히는 수준에서 공부하다 보니까 정통해 졌다고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정조의 책을 읽는 방법을 보면 납득이 간다. 일단 정조는 책을 초록한 다음 다시 초록본을 읽으면서 원본과 대조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의견을 수렴한 다음 다시 재록을 하고 이걸 가지고 책을 완전히 외울 때까지 위 작업을 반복한다.

또한 규장각 검서관인 실학자인 이덕무, 박제가, 장용영소속 장교이자 무인인 백동수가 정조의 명으로《무예도보통지》라는 종합 무예 서적을 발간했다. 책은 요즘도 조선 시대 군인의 복식과 무기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이 책을 바탕으로 무술을 연마하는 사람이나 치러지는 행사도 많다.

7.2. 술과 담배 사랑[편집]

어릴 적에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술과 담배를 병적으로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술의 경우, 자주 마시지는 않고 어쩌다가 한 번씩 마시는 정도였는데, 그 어쩌다가 먹는 술이 술에 취해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마셨고 한다. 진짜 문제는 술버릇이 매우 고약했다는 점인데, 정조의 술버릇은 신하들에게 억지로 술 먹이기였다고 한다. 현대에서는 꼰대소리 듣기 딱 좋은 최악의 술버릇을 가진 셈이다. 하물며 군주제 국가의 왕이 내리는 술이라 거절도 못하는데, 신하들이 곤혹스러워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허허, 이걸 안 받으면 다른 걸 받게 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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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마시는 정조 동상. 해당 동상은 팔달문시장 도보 정리로 근처로 이동했다.

수원화성 팔달문 근처의 팔달문 시장(남문 시장) 입구 쪽에 보면 정조가 술상 앞에 앉아 있는 동상이 있다. 그 동상에 불취무귀(不醉無歸),[80] 그러니까 '취하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다만, 이는 진짜로 그런 의미로 쓴 것은 아니고, 백성들이 술에 취할 흥취를 즐길 정도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싶다는 정조의 의지가 반영된 글귀이다.

사실 증류주이든 발효주이든 곡식으로 술을 만들려면 엄청난 양의 곡식이 소모된다. 막걸리 한 잔이 백성들의 밥 한 끼였고, 그 때문에 흉작이나 나라가 어려워질 땐 항상 금주령이 내려졌다. 이는 서양도 똑같다. 와인이나 꼬냑이 고급 술로 취급되는 이유가 있다. 먹고 살기 힘들 때는 만들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양의 과일을 썩혀서 만들었으니까.[81]

선비들도 강해져야 한다는 명목으로, 강제로 정약용 같은 문약한 선비들을 하루 종일 손이 부러져라 활 쏘기를 시킬 정도로 가혹했던 인물. 정약용에게는 이외에도 술을 옥으로 만든 필통에 부어 마시라고 종용했을 정도다. 이 시절 필통은 붓 몇 자루가 들어가는, 현대 기준으로는 바가지만한 크기였다.직접 그 위용을 보자. 게다가 왕이 직접 삼중소주(三重燒酒)를 하사했다고 한다. 그 당시 소주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니 도수를 알수가 없지만, 그냥 소주도 30~40도는 된다. 숙종 때 중국 북경사람들도 조선 소주가 너무 독해서 싫어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도수가 높았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맥주 정도로는 취하지도 않고 깡소주를 즐길 정도로 술에 익숙해진 사람도 가장 무난한 등급의 수성고량주를 피처만한 크기의 필통으로 원샷하는 순간 급성 위궤양으로 실신해 응급실로 직행할 수준인데, 조선식 삼중소주를 필통으로 원샷했으면 정말 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이후 정약용은 자식들에게 "되도록 술을 마시지 말고 특히 '원샷'을 피하라"고 강조했다. 이때 위의 옥필통 일화를 언급하며 '나는 오늘 죽었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한다. (편지에 나와 있는 표현 그대로다.)

성균관 제술 시험에서 합격한 유생들을 불러다가 창덕궁 희정당에서 연회를 벌이고는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옛 사람의 말에 술로 취하게 하고 그의 덕을 살펴본다고 하였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을 생각하고 각자 양껏 마셔라. 우부승지 신기(申耆)는 술좌석에 익숙하니, 잔 돌리는 일을 맡길 만하다. 내각과 정원과 호조로 하여금 술을 많이 가져오게 하고, 노인은 작은 잔을, 젊은이는 큰 잔을 사용하되, 잔은 내각(內閣)의 팔환은배(八環銀盃)를 사용토록 하라. 승지 민태혁(閔台爀)과 각신 서영보(徐榮輔)가 함께 술잔 돌리는 것을 감독하라.” [82]


《정조실록》 34권, 1792년(정조 16년) 3월 2일 신미 1번째 기사.

이 자리에는 오태증이라는, 집안 대대로 주당으로 이름난 유생이 있어서 술에 취하지 않았는데, 정조는 그의 할아버지 오도일이 숙종 대에 여기 희정당에서 술에 취해 넘어졌다면서, 술 5잔을 더 먹여 결국 취하게 했다. 그래놓고는 "오도일이 여기서 술에 취해 쓰러진 것이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며 "지금 그의 후손이 같은 장소에서 취해 쓰러진 것이 우연이 아니다"라며 흐뭇해했다. 여하튼 그토록 술을 좋아하다보니까 사회적 분위기도 같이 따라가서 수도 한양에 술집들이 많이 들어섰는데 하도 많이 들어서다보니까 당대에는 상당한 사회적 이슈로 떠올라서 사대부들이 술집을 없애자고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한 번은 부용지에서 낚시를 한적이 있었는데 채제공, 심환지, 남공철, 서유구, 이가환, 이상황, 정약용, 박제가, 유득공, 성해응 등 각 정파별로 터줏대감부터 새내기까지 줄줄이 거느리고 했다. 고기를 제대로 못 잡은 사람에게는 술을 내렸다.

훈련도감이 아뢰기를, "지난밤에 흰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궁궐의 담장 아래에서 술에 취하여 누워 있기에 호패(號牌)를 상고해 보니 진사 이정용(李正容)이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마침 성균관에 들어갔다가 술을 마시고 나서 야금시간에 걸린 줄을 몰랐다고 하였는데, 법에 따라 형조로 넘겼습니다."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성균관 근처의 민가는 집춘영(集春營) 건물과 지붕이 서로 잇닿아 있으니 야금시간을 범하였다고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근래에 조정의 관료나 유생들을 물론하고 주량이 너무 적어서 술의 풍류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이 유생은 술의 멋을 알고 있으니 매우 가상스럽다. 군향(軍餉)을 맡은 고을에서 주채미(洒債米) 한 포대를 주어, 술을 주어 취하게 하고 취한 중에서 덕을 관찰하는 뜻을 보여주라." 하였다.


《정조실록》 44권, 1796년(정조 20년) 4월 12일 정해 1번째 기사.

어느 날은 한 선비가 술에 취한 채 궁궐 담벼락 밑에서 밤에 잠을 자다가 야간 통행금지에 걸려서 잡혀온 일이 있었다. 그러자 정조는 '요즘 사람들은 술이 약해서 제대로 마실 줄을 모르는데 이 자는 술을 잘 마셔서 그 멋을 아니 참으로 가상하다. 상으로 쌀 한 포대를 주고 풀어줘라.'라고 명을 내렸다.

다만 야사에 따르면 조선은 술에 대해 매우 관대한 나라였다고 한다. 높으신 분들부터 천민들까지, 한 번 마시면 쓰러질 때까지 마시는 게 기본이라 생각할 정도다. 일단 둘러앉아 작정하고 마시기 시작하면, 안주도 거의 안 먹으면서 빠른 속도로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술상에 그대로 엎어지거나, 술 가지러 가다가 술상 근처에서 쓰러져 잠들기 일쑤인데, 이렇게 아침까지 바닥에서 자다 깨서 영의정은 나랏일 보러 가고, 농부들은 농사 지으러 갔다고 한다. 아무도 영의정 급이 술에 취해 아침까지 널브러져 자는 걸 뭐라고 하지 않았다.[83] 실제로 조선을 유람하고 간 외국인들의 기록을 보면, "조선은 술 때문에 망할 나라"라는 얘기가 많다고 한다. 이는 '조선 놈들은 하도 많이 먹어 농사를 지어봐야 소용없다'는 얘기와 함께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조선 탐방 후기이다. 정조가 유독 병적이었다고 하기에는 조선의 술 문화 자체가 장난이 아니었던 것.

하지만 이런 그도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 영조 앞에서 "술은 나라를 망하게 한다."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술이 있는 것과 술이 없는 것은 나라에 어떠한 영향이 있겠느냐?”
하여, 내가 대답하기를,
“술은 나라를 멸망하게 할 물품입니다.”
하니, 상께서 이르시기를,
“지금 세상은 모두가 술을 마신다. 이것은 백성의 습속(習俗)이 나빠졌기 때문이냐, 법이 느슨해져서 그런 것이냐? 너는 마음을 속이지 말고 대답하라.”
하여, 내가 대답하기를,
“금지하는 방도에 있어서 더러 미진한 부분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하니, 상께서 이르시기를,
“너의 말이 옳다. 부디 성심으로 금지하라.”
하였다.


《일성록》, 1763년(영조 39년) 6월 29일 을묘 2번째 기사.

금주법까지 시행했을 정도로 술에 엄격했던 영조가 "성심으로 금지하라."라고 신신당부했지만 훗날의 정조를 알고 있는 후손들이 보면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는 대목.

담배 예찬론자이기도 해서 담배로 스트레스를 날려버렸다거나, "소화에 좋고 추위와 더위를 쫓아낸다"고 극찬한 적이 있다. 심지어는 담배에 관한 시(詩)까지 썼다.[84]

하지만 담배 역시 무조건적으로 장려한 것은 아니었다. 담배로 인해 시작된 좌의정 채제공과 유생 2명의 싸움에서, 채제공의 편을 들어준 적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채제공 문서 참고. 물론 이건 담배 이전에 유생들의 사람으로서의 됨됨이가 되먹잖았던 게 컸다.

7.3. 정조의 비밀 편지들[편집]

사람은 언어로 한때의 쾌감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나는 비록 미천한 마부에게라도 일찍이 이놈 저놈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85]
人不可以口業取快於一時,子雖予僕御之賤,未嘗以這漢那漢呼之也。


정조의 어록인 《일득록》 中.

2009년 2월 발견된 심환지와 교환한 서신첩인 정조 어찰첩을 보면, 학자 군주답지 않고 왕의 표현이라 볼 수 없는 표현들을 많이 쓰고 있다. 특히 자유자재로 욕설과 막말을 구사하는 모습 때문에 화제가 되었다. 예를 들면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86] 사람 꼴도 못 갖춘 새끼와 경박하고 멍청하여 동서도 분간 못하는 병신이 감히 그 주둥아리[87]를 놀린다."라거나, "대신 ○○○는 몸에 동전 구린내가[88] 나 주변이 모두 기피하는 놈이다", "호로 자식"이라든지.[89] 어전 회의 중에 신하들이 조금이라도 실수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보이면 바로 욕설을 구사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정조가 성군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자기 기분이 틀어졌다고 해서 그것이 신하들의 처벌이나 유배 등으로 이어지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90] 실제로 당하관 대신 중 한 명이 "전하의 업무 처리 방식이 아주 글러먹으셨는데 그 이유는 전하의 급한 성질 머리 때문으로, 요즘 옥체가 자주 편찮으신 이유도 그 때문인 줄 아뢰오."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적이 있었다. 상당히 무례한 내용의 상소였고 중신들도 중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청을 올렸으나, 정조는 끝내 그 신하를 용서하고 더 높은 벼슬을 주었다.

어떤 편지에는 '아놔, 내가 새벽 3시까지 잠 못 자고 이러고 있다.'라는 말 뒤에 '가가(呵呵)'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것은 웃음소리 '껄껄'을 뜻한다. 현대로 치면 "ㅋㅋ"와 다를 바 없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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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7년(정조 21년) 4월 21일(음력)에 쓴 정조의 편지

이 편지에도 상당히 재미있는 표현이 많다. 대표적으로 '요즘처럼 벽파가 뒤죽박죽되었을 때는...'이라고 쓰는데 마땅한 한자가 생각이 나지 않았는지[91] 갑자기 한글로 써놓아서 '近日僻類爲뒤쥭박쥭之時...'이 되어있다. 본문 왼쪽에서 3번째 줄 가장 아래 쪽부터 '뒤쥭박쥭'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조선시대 글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읽는다.

수신인 심환지 본인에게도 "갈수록 입조심 안 하는 생각 없는 늙은이"라며 면박을 주는 편지도 있다. 한자로 쓴 편지에도 한국어에서 표현하는 속담을 자주 한자로 옮겨 인용하고, 이두식 표현도 많이 등장한다. 어쨌든 정조 자신이 소설 장르를 탄압하고 이를 따라하는 신하들에게 바른 문체를 강요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이중적인 면모라고 할 수 있다.[92] 물론 면박뿐만 아니라 심환지를 격려하는 편지들도 종종 있다.

사실 이 기록이 남은 것은 후대인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야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기 때문에 다행인 일이지만, 심환지와 정조 사이의 관계만 놓고 본다면 심히 잘못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 임금이 자신의 사람이라 믿는 신하에게 이런 편지를 쓰면 신하는 편지를 다 읽은 후 태워 버리는 게 예의였다. 한 마디로 심환지가 혹시 모를 상황에 보험을 들기 위해 남긴 편지 혹은 정조의 약점으로 잡으려 남긴 편지가 그대로 내려와 현대에 발견된 것.[93]

한편 이 어찰첩은 독살설이나 노론 만악 근원설을 논파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서의 가치도 가지고 있다. 첫째, 정조가 승하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심환지에게 보낸 이 편지에는 '눈이 너무 침침해져서 책도 읽을 수가 없다.'라거나 '어디가 아프고 언제 약을 얼마큼 먹고 있는데, 아파 죽겠도다.' 하고 병세의 위중함[94]을 호소하는 대목이 자주, 그리고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부분은 《정조실록》에서도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딱히 심환지에게만 알려진 사실이 아니라는 점과 정조 본인이 고의적으로 병을 키워서 적었을 가능성이 보이는 부분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심환지를 측근이라기보다는 같이 해야 할 한 당의 영수로 봤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둘째, 그 동안 심환지를 비롯한 노론 영수들은 정조의 답이 없는 정적쯤으로 치부되었지만, 이 서찰을 통해 노론 역시 정조의 국정 동반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독살설보다 일리가 있는 설명이다.

정조가 쓴 편지글의 자세한 내용은 정조 어찰첩이란 제목으로 성균관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했으니 그쪽을 참조하길 바란다.

재미있는 점은 300년 후에 발견된 이 왕의 악플이 일반인들에겐 상당히 신선하게 보였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조선시대를 유교의 정점으로 보고 예의를 중시하고 절제의 미학을 담으니만큼, 왕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체면이고 뭐고 없는 어린애같은 인신공격을 왕이 거침없이 구사하니, 그동안의 선입견이 사라짐은 물론이고 정조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되어서 한참이나 미래인의 입장에선 '왕도 결국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같은 성군이었던 청나라의 옹정제와 비슷한 면이 있다. 옹정제는 신하들이 올리는 보고서에 꼭 주석을 덧붙여 보냈는데 이 주석은 보고서에 대한 평가로 잘 쓴 보고서는 정말 낯뜨거울 정도로 칭찬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못썼다 싶으면 어김없이 대차게 깠는데 그 내용이 '無知(멍청한 놈)', '無識小人(무식한 소인배)', '覽, 笑之(쭉 훑어봤는데 웃기는구나)' 등이다. 이 정도면 정조 수준.

7.4.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편집]

이덕일 세력의 역사왜곡

왜인 한반도 남부 지배 주장

'김현구 임나일본부설 주장' 날조

정조실록 기록 왜곡 해설

삼국사기 초기기록 수정
식민사관 주장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 주장

'동북아역사재단이 독도 누락' 주장

두음법칙·한글 맞춤법 통일안
식민국어학 주장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는 즉위하는 당일 빈전殯殿 문 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고 한 말이다. 임오년(사도세자가 죽은 해) 이후 '하루도 잊지 않고 가슴 속에 간직해 온 한 마디를 선포했다'고 알려졌다. 이덕일에 따르면 그 즉시 일성에 대신들은 경악했다 한다. 특히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던 노론은 공포에 휩싸였'으며 '14년 전 뒤주 속에서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가 다시 살아난 모습을 똑똑히 보았던' 것이라 한다.


사도세자의 고백 345p, 이덕일


이 내용은 이덕일의 편집과 픽션적 창, 변작에 따른 왜곡으로, 실제로는 완전 다른 맥락의 기록이었다.

召見大臣于殯殿門外。 下綸音曰: "嗚呼! 寡人思悼世子之子也。 先大王爲宗統之重, 命予嗣孝章世子, 嗚呼! 前日上章於先大王者, 大可見不貳本之予意也。 禮雖不可不嚴, 情亦不可不伸, 饗祀之節, 宜從祭以大夫之禮, 而不可與太廟同。 惠慶宮亦當有京外貢獻之儀, 不可與大妃等, 其令所司, 議于大臣, 講定節目以聞。 旣下此敎, 怪鬼不逞之徒, 藉此而有追崇之論, 則先大王遺敎在焉, 當以當律論, 以告先王之靈。"

빈전(殯殿)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召見)하였다. 윤음(允音, 국왕의 목소리)을 내리기를, "아!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선대 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거니와, 아! 전일에 선대 왕께 올린 글에서 ‘근본을 둘로 하지 않는 것[不貳本]’에 관한 나의 뜻을 크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예(禮)는 비록 엄격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나, 인정(人情)도 또한 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향사(饗祀)하는 절차는 마땅히 대부(大夫)로서 제사하는 예법에 따라야 하고, 태묘(太廟)에서와 같이 할 수는 없다. 혜경궁(惠慶宮)께도 또한 마땅히 경외(京外)에서 공물을 바치는 의절이 있어야 하나 대비(大妃)와 동등하게 할 수는 없으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대신들과 의논해서 절목을 강정(講定)하여 아뢰도록 하라. 이미 이런 분부를 내리고 나서 괴귀(怪鬼)와 같은 불령한 무리들이 이를 빙자하여 추숭(追崇)하자는 의논을 한다면 선대 왕께서 유언하신 분부가 있으니, 마땅히 형률로써 논죄하고 선왕의 영령(英靈)께도 고(告)하겠다." 하였다.


《정조실록》 1권,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10일 신사 4번째 기사.


이 말을 쉽게 풀이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나, 선왕께서 과인에게 효장세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다. 과인 또한 사도세자의 아들이면서 효장세자의 아들일 수는 없으니 공식적으로는 효장세자의 후계자로만 남겠다는 뜻을 크게 밝힌 바가 있다. 사도세자를 제사지내는 일은 왕실의 예법이 아니라 일반 사대부의 예법을 따를 것이며,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과인의 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 또한 대비와 같은 예를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니 구체적으로 어떠한 예를 받는 것이 타당하겠는지 의논하여 아뢰라. 이와 같은 분부를 내린 뒤에도 사도세자를 기리느니 기념하느니 하는 소리를 했다가는 선왕의 유언에 따라 엄히 처벌하겠다.


요컨대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먼저 거론하기는 했지만 이는 사도세자를 추숭해 높이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효장세자의 아들로서 보위(寶位)에 오르는 것임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95] 이는 설령 내심으로는 친아버지를 높이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즉위 초부터 선왕인 영조의 결정을 뒤집었다가는 정국이 요동치고 역풍이 불 것이 뻔했기에 사도세자 문제를 꺼내는 사람들을 제어하고 그를 통해 정국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행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실제로 조선 왕조에서 부모의 죽음을 복수와 숙청의 명분으로 사용한 왕이 있었고 엄청난 피바람이 불었던 만큼 정조가 적어도 피에 눈이 먼 복수를 원하지 않는 한, 신하들을 안심 시킬만한 행동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사도세자 문서를 봐도 알겠지만 정조가 막장이 아닌 한 복수할 만한 대상은 거의 없었다. 임오화변 당시 당파를 막론하고 대부분 세자를 감싸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현 국왕의 아버지, 그것도 세자가 죽었을 때 관직에 있었다는 자체는 찬반 여부 불분하고 숙청 대상에 들 수 있었다. 찬성했으면 당연히 죽는 것이며 반대했어도 "네가 더 잘 반대하여 선왕을 제대로 보필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잖냐?"라는 소릴 듣는 순간 최소 유배형이고, 가만히 있었으면 있었던 대로 "너는 세자가 죽는데 관심 하나 없었냐?"라는 소리를 들으며 쫓겨나거나 죽을 수 있다. 갑자사화 당시 이세좌는 사약을 전달했다는 왕명을 이행했다는 이유만으로 죽고 광주 이씨에게도 불똥이 튀었으며 폐비 논쟁 때 적극적으로 폐출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처벌을 받은 신하들도 있었다. 신하들의 경계심 자체가 높았을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정조는 오히려 영조의 유지를 확실히 계승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겠다는 뜻을 천명했으며, 이러한 발언을 사도세자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로 해석하는 것은 정조의 의도를 왜곡하는 것이 된다.

다만 정조의 말이 본심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즉 표면 그대로 읽어야 하는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것이 핵심이고 뒷부분은 명분용 겉치레인지를 살펴볼 필요는 있다. 실제로 당시에도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부분을 핵심적인 내용으로 해석하고 이에 편승하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96] 하지만 이덕일과 같이 사도세자가 살아난 모습을 똑똑히 보았던 것 운운하는 것은 도가 지나친 것이며,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아뢰는 상소를 올린 이덕사, 이일화, 유한신이나 영조의 인산(장례)이 끝난 뒤 비슷한 상소를 올린 안동 유생 이응원과 그 아버지 이도현 등 적지 않은 인물들이 사도세자를 비호한 죄로 처형되었다. 정조는 이응원 부자를 "외로운 새새끼, 썩은 쥐새끼"라고 비난했으며, 안동을 부에서 현으로 강등하기까지 했다.[97] 이런 조치는 대게 강상을 범하거나 역모를 일으킨 자가 나온 곳이 아니면 잘 나오지 않는다.

노론에서도 위에 나온 것처럼 처음에는 불안감을 가졌을 수는 있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임오화변의 일을 끄집어낼까 봐 불안해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에서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선언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98] 존현각 사건(정유역변)이나 홍계희 집안의 획책 등을 보면 이런 사람들이 실제로 있었던 듯하다. 이후에도 추숭 반대를 외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오히려 앞서 언급한 발언과 처벌을 통해 노론을 안심시켰고, 사도세자에 대한 추숭도 장기간에 걸쳐 노론 세력과의 협력을 약속하면서 점진적으로 시도했다.[99]

둘 다 맞다고 볼 수도 있다. 즉 사도세자를 비호하려는 자들에게는 "내가 사도세자의 아들이 맞긴 맞는데 그렇다고 추숭 운운하여 정국을 뒤흔드려는 시도는 용서 안해"라고 한 것이면서 동시에 노론에게는 "내가 원래 사도세자의 아들인지라, 할바마마의 명령만 없었으면 너네들 담가버렸을 거거든? 알아서들 기어라!"라고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권력자들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말 한마디 던져두고 그 반응을 보는 전략적 모호함을 즐겨 구사하곤 한다. 학문과 정치력이 모두 뛰어났던 정조의 이 말 한마디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8. 대중매체에서[편집]

  자세한 내용은 정조(조선)/대중매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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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관련 문서[편집]

  • 오회연교

  • 갱장록

  • 구선복

  • 국조보감

  • 국조역상고

  • 국조인물고

  • 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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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성행행도 병풍

  • 황극편

  • 효의왕후

  • 효장세자

  • 혜경궁 홍씨

[1] 정조 생전에 어릴 때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그에 따른 미안함으로 왕으로 즉위하고나서도 거의 매년마다 성묘, 참배를 하는 등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 그로 인하여 정조 사후에 아들 순조는 효심으로 아버지 정조를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있는 현륭원(융릉) 옆에 자리하게 된다.[2] 개인적으로는 사도세자를 아버지라고 하였지만, 법적·공식적으로는 효장세자를 아버지라고 스스로 인증하였다. 정조 실록 기사 참조. 그리고 사도세자에게는 황숙부라고 칭하는 모습을 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후술되어 있지만, 정조는 개인적으로만 사도세자가 아버지라고 말했을 뿐, 공식적으로는 항상 효장세자를 아버지로 섬겼다. 대다수 역사 강사들이나 사극에서 자주 인용되는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발언의 본래 내용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그러나 선왕께서 과인을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하셨으므로 그 뜻을 따라야 한다.'이다. 노론 음모론과 정조 암살설을 주장하기 위해 뒷내용을 잘라놓고 앞부분만 가져와 인용하는 것. 실제로 정조는 사도세자를 높이려는 일말의 시도도 용납하지 않았다.[3] 2대 임금과 겹칩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2대의 묘호는 정종의 '정' 한자가 '定' 이었다. [4] 1899년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5] 영조(연잉군)가 경종의 동생으로 차남, 사도세자가 효장세자의 동생으로 차남, 정조가 의소세손의 동생으로 차남이 되며, 순조 역시 문효세자의 동생으로 차남이다.[6] 하지만 이 부흥기는 철저히 정조와 유능한 측근들에 의해 기존의 조선의 시스템을 갈아엎어 억지로 끼워 맞춘 결과였기에 이를 이끌던 정조 사후 조선은 본격적으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7] 여기서 '사도'는 유교의 도덕을 말하는 것으로,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는 최고 수준의 찬사라고 할 수 있다.[8] 영빈 이씨의 역할에 대해 박시백의 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어쩌면 영조가 시켰을지도 모른다고 했다.[9] 여차하면 영조가 혜경궁 홍씨의 친정을 통채로 날려버리고, 정조를 거두어 들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다른 세력이 혜경궁 홍씨와 친정을 (주로 사도세자와 얽어) 모함하여 몰락시키고 세손의 보호자를 자처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자기 아들을 한여름 속 뒤주에 가둬 굶겨죽이고 양위 요구같은 자신의 권위를 침범하는 일에 눈을 부라리던 의심병/편집증 환자인 영조가 신하들을 쥐락펴락하며 막강한 왕권을 자랑하고 있고, 늘 엎치락 뒤치락하며 역모 고발을 반복하는 조정의 당파 싸움 속에서 그 왕의 손에 직접 죽임당한 남편을 가진 홍씨가 바로 그 왕의 유일한 적통을 보호한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실제로도 혜경궁의 아버지 홍봉한은 정조 대까지 권력을 누리긴 하지만 중간에 탄핵 당해 실각하기도 하고, 사도세자의 서자들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했다는 이유로 정치적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혜경궁의 이런 결단이 빛을 발했는지 다행히 영조와 정조 모두 홍봉한을 중용한다. 심지어 다른 사람도 아닌 혜경궁의 인척들이 정조 암살 시도에 연루되기까지 했으니 혜경궁은 친정으로부터도 유일한 혈육인 아들을 지켜야 했었다.[10] 정조의 왕실 경호실장(지금의 청와대 경호실장) 격의 역할을 했다.[11] 세손 시절 스승.[12] 정조의 충신.[13] 50대 초반에 사망하며 재위 기간을 오랫동안 함께하지는 못했으나, 실학자로 유명한 사람이다.[14] 홍인한 탄핵소를 올려 대리청정 저지 기도를 막았다. 이 때문에 서명선이 상소한 12월 3일 정조는 자기를 도왔던 이들을 모아 '동덕회'라 이름짓고 모임을 친히 가졌다.[15] 물론 그 다음은 인정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선왕의 뜻을 거스를 수도 없다는 내용이었고, 득달같이 사도세자 추숭과 노론 토벌을 주장하던 선비들에게 강력하게 처벌을 내려 신하들을 안심시켰다.[16] 전흥문은 힘이 장사였으나 가난했기 때문에 혼인을 못해서 강용휘가 그에게 돈 1,500문(文)을 주고 예쁜 여자 노비(女奴)를 아내로 주자 강용휘에게 고마움을 느껴 그와 함께 정조를 암살하려고 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0108011_001[17] 이쪽도 이방원이 두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를 거머쥐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공신이자 측근이었지만, 이후 기고만장해져 안하무인으로 각종 전횡을 일삼다 끝내 미래권력인 세자에게까지 접근하는 바람에 태종의 분노를 사 숙청당했기 때문이다.[18] 으뜸 원(元)' 자는 왕의 정실부인인 왕비나 왕세자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다.[19] 본래 '원(園)'은 왕세자, 왕세자빈, 차기 국왕을 낳은 후궁의 묘소를 일컫는 단어인데, 이 3가지 경우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 원빈이 원호를 받는 것은 당시 왕실 전통예법에 어긋난다. 홍국영 몰락 후인 1786년(정조 10년)에 저 원호와 궁호를 강등시켰다.[20] 비슷한 사례로 정조에겐 종조부(할아버지의 형제)가 되는 경종이 있다. 경종은 두명의 왕비를 들였는데도 슬하에 자식이 하나도 없었는데 여기에다가 본인의 병약함, 이복동생 연잉군(훗날의 영조), 노론의 득세가 얽혀, 당시 33세의 나이로 아직 자식을 볼 수 있는 젊은 경종에게 노론이 감히 대놓고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자는 소리를 했고, 청나라의 사신으로 갔던 이건명은 아예 "임금이 양기가 없어 여자를 가까이 하지 못한다."라는 망발을 내뱉었다가 참수당했으며, 나중에는 왕세제의 대리청정까지 주장했다. 이에 경종은 연잉군을 세제로 삼아준 뒤 대리(代理)도 해주겠다면서 노론을 낚아서 그들을 일제히 숙청했고, 영조도 이때 정치적으로 최대의 위기에 몰려 폐세제를 자처하며 석고대죄까지 해야 했다. 즉, 홍국영의 행동은 앞서 벌어졌던 사례를 감안할 때 충분히 숙청 사유에 포함된다.[21] 왜냐하면 송덕상은 송시열의 후손인데 송시열이 서인과 노론의 영수였음을 감안하면 호서의 유생들이 반발할 이유가 된다.[22] 당시 송덕상을 칭송하는 글을 지어 송시열의 사당에 올렸다는 죄로 유배된 평산 유생 신형하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유배간 인물이다.[23] 김귀주 쪽 사람인 이율은 한양에서 내응키로 했고 홍국영의 사촌인 홍복영은 100칸짜리 집과 소금 1,000포를 내놨다.[24] 구선복의 경우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당시 뒤주를 지킨 인물로 야사 등에서는 그가 사도세자를 조롱(세자 옆에서 고기와 술을 먹기도 하고, 놀리며 오줌도 싸는 짓)하기도 했다고 언급이 되고 있다.[25] 대부분 척신당(탕평당)들이다.[26] 현대적 표현으로는 국정 지도자의 철학을 이해, 동참하는[27] 대표적으로 1788년(정조 12년)에 영의정에는 노론 벽파인 김치인, 좌의정에는 소론 강경파인 이성원, 우의정에는 남인 채제공을 임명하였다.[28] 영조 때 완전히 혁파한 것을 부활시키려고 했지만 또다시 폐단이 일어나자 완전히 폐지한 것이다.[29] 이름이 비슷한 《대전회통》은 흥선대원군 시절에 만들어졌으나 대전통편에 소폭 증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험에 낚시 문제로 나올 수도 있다. '통'편 '회'통이니 'ㅌ' 다음 'ㅎ' 가나다 순서로 외우면 된다. 시험장가서 '통'편 회'통' 둘다 통인데 뭐지하고 헷갈려서 순서생각 안나서 당황하면 답이 없으니 두문자 암기는 슬기롭게 활용하기 바란다.[30] 조선시대 각 궁방(宮房)에서는 자체적인 재원 마련 수단으로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이러한 둔전을 궁방전(宮房田)·궁장토(宮庄土)라고 불렀는데, 이곳을 관리하고 토지세를 징수하기 위해 궁방에서 파견한 차인(差人)이 바로 궁차(宮差)였다.[31] 궁방에 소속된 농장의 전세 등을 대신 징수하거나 궁방전을 관리하던 궁방의 청부인.[32] 정조실록 24권, 정조 11년(1787, 정미) 10월 26일 경신 1번째기사 1787년 청 건륭(乾隆) 52년 백성에게 세를 받을 때 궁방의 하속이 폐단을 만드는 것을 묘당이 살피게 하다[33]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병신정식(丙申定式))」, 정조실록 1권, 정조 즉위년(1776년) 4월 10일 신해 6번째기사 1776년 청 건륭(乾隆) 41년 궁방이 함부로 받은 면세 전결을 사정하다[34] 박지원 특유의 비주류 - 실학자 성향 때문에 오해할 수도 있는데, 박지원은 당시 노론 중에서도 명문가로 꼽히던 반남 박씨 가문 출신이다.[35] 참고로 선조 시대의 인물인 기대승은 삼국지연의에 대하여 "무뢰(無賴)한 자가 잡된 말을 모아 고담(古談)처럼 만들어 놓은 잡박(雜駁)하여 무익할 뿐 아니라 크게 의리를 해치는 소설"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당대의 꼬장꼬장한 선비들이 보기에는 격조있는 한시나 경전류와 비교해 잡기소설류가 천박해 보였을 것이다.[36] 여담으로 패관 문학체는, 소설을 즐겼던 할아버지 영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37] 두 종교 모두 천국(극락)이니 지옥이니 하는 내세를 언급하고, 숭배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유학자의 눈에는 충분히 그렇게 보였을 수 있겠다. 그걸 떠나서 불교나 천주교나 교리 자체는 민생을 현혹하는 다 좋은 말들이니 거기서 거기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38] "그 책에 '천주가 내려와서 예수가 된 것이 중국에 요순(堯舜)이 있는 것과 같아 소경을 눈을 뜨게 하고 절름발이를 잘 걷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허무맹랑한 말입니다. 하늘의 문을 열고 날아서 들어간다는 설에 이르러서는,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단 채제공은 "그 가운데 좋은 것도 간혹 있으니, 이를테면 하느님[上帝]이 굽어살피시어 사람들의 좌우에 오르내리신다는 설이 바로 그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이어 "다만 그 인륜(人倫)을 무시하고 상도(常道)를 배반하는 것 가운데 큰 것으로는, 저들이 높이는 대상이 하나는 하느님[玉皇], 하나는 조물주[造化翁]이고, 제 아비는 3번째로 여기니 이는 아비를 무시하는 것"이라 덧붙였다.[39] "근래 문체(文體)가 날로 더욱 난잡해지고 또 소설을 탐독하는 폐단이 있으니, 이 점이 바로 천주교에 빠져드는 원인이다. 우리나라의 문장은 나라를 세운 이후로 모두 육경(六經)과 사자(四子)에 오랫동안 노력을 쌓은 속에서 나왔으므로, 비록 길을 달리한 때가 있었지만 요컨대 모두 경학(經學) 문장의 선비들이었다."[40] 강명관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참조[41] 당시 정순왕후가 기거하던 대비전인 창덕궁 수정전(壽靜殿)을 말한다. 경복궁 수정전(修政殿)이 아니다.[42] 정조가 정순왕후를 부른 이유는 불확실하다. 정황상 정순왕후에게 뒷일(후사)을 부탁하는 유언을 남기려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43] 다만 심환지가 비밀 어찰을 어명대로 태우지 않고 숨겨두었다는 것 자체가 심환지가 정치적으로 정조를 견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암살론을 100% 반증하지는 못한다는 말이다.[44] 드라마 <이산>의 소설판에서는 '수정전'을 정순왕후에게 피살당해 죽어가는 정조의 단말마로 해석했다. 드라마 <이산>에서는 시간이 흘러 죽은 것으로 처리했다.[45] 식사는 꼬박꼬박 챙겼고 반찬을 줄이는 감선 및 고기를 끊는 철선도 계획적으로 했던 할아버지 영조와는 달리 정조는 식사를 소홀히 한 편이다. 《한중록》에 따르면 아침에 약해서 아침을 잘 안 먹었다고 하지만 《한중록》 자체가 원체 혜경궁 홍씨의 입장이 강하고 《정조실록》이나 《일득록》과 차이가 있기 때문에 유의해야 할 부분이다. 정조는 필통에다가 술을 담아 마실 정도의 주당에다가 담배 예찬론을 선보인 골초였다. 물론 이렇게 살다간 현대에서도 훅가는데 조선 시대라고 해서 훅가지 않을리 없다.[46] 그릇으로 거의 몇 잔을 쏟았다. 다행히 숙면을 취하게 되었으나 그리 앓은 얼마 뒤 신하들과의 면담 도중 쓰러지고 말았는데, 약을 넘기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끝내 숨졌다.[47] 정조를 성인으로 존경했던 정약용도 정조의 정책에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참고로 정약용은 "경세유표"서 규장각, 초계문신, 장용영의 존재 이유를 모두 부정했다.[48] 다만 사학과 교수가 아니라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2002년 이래 영산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로 있다는 점을 참조.[49] 그리고 정도전.[50] 세종이 말년에 세자인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겼기 때문에 세종 말년에 치적들은 사실 문종의 치적이다. 세조 또한 체제를 가꾸는데 치적을 쌓았지만 선대 왕들이 공들여서 만든 제도와 정책들을 함부로 훼손해서 후대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한계점이 있다.[51] 정조가 측근에게 지나치게 권력을 몰아주어 폐단을 유발한 점은 여러모로 본인의 13대조인 세조가 공신들을 지나치게 키워주어 훈구파를 양성한 것과 닮았다.[52] 사실 이익 집단의 대립이란건 절대 없앨 수 없다. 이건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족 차원의 특성이기 때문이다.[53] 정조 못지 않게 급한 성격에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할아버지 영조조차도 스스로 군사(君師, 백성들의 임금이자 스승)를 자처하며 말년까지 경연을 쉬지 않았다. 그러나 영조는 죽기 직전까지도 건강 문제가 딱히 없었으며 오히려 검은 머리가 나서 회춘한 것 같다고 즐거워했다. 후계도 자기 자식을 굶겨 죽이는 막장드라마를 찍어서나마 안정시켜 놓은지 오래였으며 정통성 문제도 해결되어 심리적 불안, 정치적 불안도 크게 없었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있었다. 반면 정조는 건강, 정치 상황, 후계 모든 것이 불안했는데 영조가 70살이 넘어 검은 머리가 난 걸 기뻐한 반면 정조는 30대의 나이에 머리가 반백이 되고 눈이 안 보인다며 불안했을 정도. 때문에 동일선상에 두기는 어렵다.[54] 이후 1년 뒤인 1800년(정조 24년)에도 비슷한 언급을 한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남아 있는데, 내심 안경을 쓰고 업무를 보고 싶었지만 주변의 시선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발언을 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정조는 승하한다.[55]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충사를 확장하고 숙종 본인이 직접 이순신의 제문을 지었다. 영조는 추승 자체보다도 정작 신하들을 까는데 이순신을 이용했다. 대표적인 피해자가 박문수. 사실 영조 뿐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의 왕들이 이순신과 신하들을 상호 비교하면서 까는 통에 피해자들이 여럿 있다. 특히 더 두드러진 것은 유명 수군 도독을 사후 유일하게 열거한 것. 숨덕을 넘어 대놓고 덕질. 즉, 대표 대덕이다.[56] 여기엔 왕의 사유 재산인 내탕금까지 직접 투입했다.[57] 《정조실록》 16권, 1783년(정조 7년) 8월 2일 신유 3번째 기사.[58] 요즘 식으로 알기 쉽게 내용을 요약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니들이 그러고도 성균관 학생들이냐? 중고딩보다 못한 게 말이 되냐고. 별로 어렵지도 않은데 어떻게 백지로 내냐? 똑바로 하자.'[59] 정조는 8세에 세손에 책봉되었으므로, 자신을 원손이라 칭하는 이 편지는 세손 책봉 이전에 쓰인 것이다. 해독은 오른쪽 이미지인데, 해석되지 않은 '상풍의'는 현대어로 옮기면 '상풍(商風)에', 즉 '가을 바람에' 정도의 의미다. 의역하자면 '날씨가 쌀쌀한데' 정도 되겠다.[60] 세종대왕도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최만리의 상소에 반박할 때 이렇게 응수한 적이 있었다.[61] 본인 스스로가 조선의 학통이 자신에게 있다고 자부할 정도면 이단이라 욕할 수도 없다.[62] 그나마 보면 이건 정조로서는 처벌을 안 하고 싶어도 안 할 수 없는 일이었다.[63] 정조의 묘지문의 맨 끝 단락은 이렇게 시작한다. '왕은 성인이셨다.' 송시열이 효종을 성인이라고 지칭한 것을 두고 일반적인 표현이라 할 수는 없다. 현종 초에 송시열은 예송논쟁 과정에서 체이부정을 언급하여 효종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받고 있었다. 이후 송시열이 기유독대를 공개하는 등의 맥락에서 본다면 일반적으로 보기 어렵다.[64] 애초에 세조는 성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왕으로 보기도 어렵다.[65] 단, 이건 묘지문에 한정한 경우고, 정인지가 쓴 《훈민정음》 서문을 보면,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성인"이라는 구절이 나온다.[66] 고려시대로 넘어가면 현종 정도가 신하들의 묘비석이나 현화사비에서 "우리 임금은 성군, 성인"라는 문구를 확인할 수 있다.[67] 《정조실록》 34권, 1792년(정조 16년) 4월 18일 병진 3번째 기사.[68] 요약하자면 '나 제발 죽여주세요'라고 빈 셈이다.[69] 하지만 채제공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왕이 추숭을 하고 싶어 했는데, 이 마음을 채제공이 눈치는 챘지만 좀 앞섰다고 하는 게 좀 더 옳을 듯하다. 실제로 승부수를 걸었을 때 김종수가 "아니 5.22 하교를 들은 신하가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선왕께서 채제공에게 금등을 내리셨는데 상소의 구절 중 하나가 그 금등 안에 있던 어서에 있던 문구였는데 지금 죽기 전이니 진실을 얘기한 거다."라며 처벌을 내리는 데에 적극 반대했다.[70] 지덕체를 모두 갖춘 조선의 유일한 왕이라고 한다. 정조의 이전 명군으로 일컬어지는 임금들은 꼭 한 가지씩은 멀리했다. 태조는 일신의 무예가 굉장히 뛰어났으나 정치적 능력은 부족했고, 세종은 지와 덕을 갖추었으나 운동을 싫어하고 편식이 심해 비만이었으며 성종 또한 온화한 성품으로 백성들이 살기 좋은 치세를 유지했으나 무예에는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71] 비록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도 무예가 뛰어났다. 사도세자는 병서와 무술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72] 정조 때는 이렇게 활쏘기 이벤트를 통해 기분 좋아졌다는 핑계로 새로 부임한 상급자 관리가 하급자에게 선물을 주는 행위가 종종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조[73] 참고로 이성계는 실전에서 편전 70발로 70명의 머리를 맞혔다고 고려사에 기록된 인물이다.[74] 물론 그래도 의빈 성씨에게 대한 태도 같은 걸 보면 은근히 로맨틱한 기질이나 자상한 면도 있기는 했던 듯. 물론 여기서도 2번째 프로포즈에 실패하자 의빈 성씨의 사속(궁녀가 부리는 하인)을 책벌하는 불같은 성격이 드러난다. 다만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총애를 받으면 받았지 눈 밖에 난 적은 거의 없었다. 영조의 사람 재는 기준이 깐깐하다 못해 병적인 수준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자기 조절과 처신이 상당했다고 볼 수 있다. 애당초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가 왕의 정통 후계자임에도 비참하게 죽은 것은 영조의 병적인 결벽을 견디지 못해 엇나간 것이 큰 이유였는데, 그런 영조 밑에서 20년 이상을 총애받은 정조가 참을성이 없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 내내 궁궐에서만 산 것이 아니라, 청소년 시기에는 홍봉한의 집에서 오래 지내었다. 2009년에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를 심씨 문중에서 모아 보관해온 어찰첩에는 정조의 불같은 성격이 여지없이 드러나 있다.[75] 아주 좋은 예로 《훈민정음》 창제 이후 최만리를 비롯한 창제 반대 세력에게 신랄하게 디스를 한 것을 들 수 있다.[76] 다만 논리적으로 독설을 날린 건 정조가 거의 유일무이하다. 앞서 본 이들의 절정은 영조다. 정승조차도 영조 48년(1772년)엔 열번이나 갈아치울 정도.[77] 하지만 대사헌은 요즘의 감사원장에 상응하는 상당한 중책인데, 그런 자리에 자기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인물을 올린 걸 보면 마냥 쪼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78] 다만 순조도 자기 가족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변했다. 생모인 가순궁의 추숭과 상복 문제로 대간이 '그래도 후궁인데 예가 지나치다'고 비판하자 '입 닥치지 못하겠니?' 하면서 단칼에 씹어버렸고, 비판이 나오면 예는 정에서 나온다고 하며 공자의 어록까지 인용해가며 미친 듯이 깠다. 결국 상복을 3년 동안 입는 것까지 기어이 자기 뜻대로 밀고 나갔다.[79] 실제로 사약의 재료 중에는 체질에 따라선 사약과 보약으로 나뉘는 경우가 있었다.[80] 시경 <잠로>편에 나오는 구절이다.[81] 그래도 와인은 어차피 금방 상하는거 저장한다는 개념으로 만들수 있었지만 막걸리는 밥을 술로 만드는거나 마찬가지였다.[82] 조금만 번안하면 "옛 사람들은 술로 취하게 하고 그 사람의 덕을 살펴본대. 오늘 취하지 않으면 돌아갈 생각하지 말고 실컷들 마셔라. 신기 넌 술자리 자주 해봤으니 알지? 잔 돌려. 내각과 정원, 호조는 술 좀 많이 갖고오고 팔환은배(약 220ml잔)을 쓰되 노인들은 작은 잔, 젊은이는 큰 잔을 쓰자. 태혁이하고 영보는 술잔 돌리는거 잘 보고 누가 뺑끼 안치나 감시해라." 요새 술자리에서 한 말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83] 서양에서도 비슷했는데 영국만 해도 럼과 진으로 거리에 술주정뱅이들이 넘쳐날 정도였다.[84] 반면, 그의 아들 순조는 지독한 혐연주의자였다.[85] 물론 마부나 다른 백성들에게 함부로 이놈 저놈 하진 않았을것이고, 대신들에게는 욕설을 쾌감으로 했다기보단 하도 보다보니 답답해서 저지른 것들이 대부분이었을 테니 본인 입장에서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을듯 하다.[86] 구상유취라는 사자성어에서 따온 욕설이다.[87] 의역이 아니다. 원문에 쓴 글자도 새부리 훼(喙)자를 썼다.[88] 역시 후한 말기 매관매직으로 벼슬을 산 최열에서 유래된 동취라는 성어에서 나온 표현이다. 최열은 제갈량의 친구 박릉 사람 최주평의 아버지이기도 하다.[89] 현대엔 호로자식이라는 욕이 그렇게 심한 욕으로 느껴지지 않을지 몰라도 조선 시대에선 상대 뿐만 아니라 그 부모님까지 싸잡아 욕하는 패드립이나 다름없는 심한 욕이었다.[90] 반면 할아버지인 영조는 상벌이 밥먹듯이 바뀌었다. 영조 48년에는 3명을 번갈아 총합 10번이나 영의정을 갈아치울 정도였다.[91] 보통 뒤죽박죽이 된 상황은 한자로 亂場(난장)이라 칭하는 경우가 많다. 난장판 할 때 그 난장이다. 어쩌면 정조가 마땅한 한자가 생각나지 않았다기 보다는 생생한 표현을 위해 고유어를 한글로 옮겨적었을 수 있다. 유사한 뜻이더라도 난장과 뒤죽박죽의 어감은 다르기 때문이다.[92] 정조는 실제로 소위 '이단사설'이라는 양명학과 고증학의 청나라 본토 학계의 트렌드와 한참 뜨는 학자들의 저서와 개념을 쭉 꿰고 있었고, 패관 문학과 소품에 대해서도 상당히 잘 알았다. 이런 것들을 독파했기에 잘 알았을 것이다. 실제로 정조는 무턱대고 탄압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정론과 문체를 세워야 한다는 스타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타고난 성정의 한계가 있었을 뿐, 유학 군주로서 모범이 되고자 노력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 정조는 곧잘 세종과도 비교되는데, 뼛속부터 유교적 성현이었던 세종과 견주어 이율배반적이라 평가하는 것은 정조로서는 억울할 수 있다.[93] 그러나 사실 군신 관계라는 게 항상 불안정한 정치적 관계이고, 특히 정조처럼 왕이 다혈질일 때에는 신하 입장에서 불안감이 생기고 혹시 모를 일에 대해 보험을 들어 놓는 일을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이후로 심환지는 정조를 죽인 역적쯤으로 취급당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이 편지가 남아 있었다는 게 후손들 입장에선 정말로 다행한 일이다.[94] 정조의 공식 사인은 종기로 되어 있으나, 어찰에 적어 놓은 정조의 말에 따르면 온갖 종류의 병에 시달리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읽는 사람이 다 안타까울 지경이다.[95] 즉, 정조 즉위년(1776년) 3월 10일, 신사 4번째 기사에 기록된 해당 발언의 내용은 '본인은 혈통으로는 사도세자의 아들이긴 하나, 왕가의 법통으로는 효장세자의 아들로서 보위를 잇는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에 가깝다.[96] 정치적 수사에서 언급돼서는 안되는 것을 언급함으로써 이중적인 효과를 노리는 것은 상당히 흔한 일이다.[97] 《정조실록》 1776년(정조 즉위년) 4월 1일, 8월 6일 및 8월 19일 조.[98]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덕일의 주장과는 달리 "(정조의 그 한마디는) 내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상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를 빙자해서 (사도세자에 대한) 추숭 의견을 꺼낸다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취지였다고 분명히 선을 그은 것이었고, 그럼에도 당시 신하들의 귓가에는 일단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즉 정조 자신이 나서서 사도세자의 일을 공론화할 수도 있다는 선언인) 그 첫 번째 한마디만이 돌아와 들렸을 거라고 해석했다.[99] 참고 문헌: 사료 - 《조선왕조실록》, 국사 편찬 위원회 디지털 베이스 / 단행본 - 이덕일, 《사도세자의 고백》, 휴머니스트, 2004년 / 논문 - 《정병설, 길 잃은 역사 대중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