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왕은 성인(聖人)이었다. 사도(斯道)의 정체를 밝혀내고 사도(斯道)가 지향할 바를 주장하였다[7]. 왕이 한 일은 복희·신농·문왕·무왕이 했던 일이며, 왕이 한 말은 공자·맹자·정자·주자가 한 말이었다. 앞으로 천세 후에 옛것을 논하는 자가 있다면 아마 이를 《시경》의 청묘(淸廟) 악장에다 실어 연주하여 역시 한 사람이 창(唱)을 하면 세 사람이 감탄을 하리라. 여기에는 특히 남들의 귀와 눈에 배어 있는 천덕(天德)·왕도(王道)만을 추려 뽑아 굉장한 유자(儒子)이고 현철(賢哲)한 임금이었던 그의 법도를 이 정도로 소개했을 뿐이다. Show
정조 묘지문 2.1. 임오화변과 초기[편집]아버지인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의 손에 죽는 임오화변의 무서운 광경을 보고 11세의 어린 정조는 큰 충격을 받는다. 이때 영조의 서슬퍼런 어명이 내려지자 세손 정조만이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살려달라며,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두손을 빌며 애원하는 눈물겨운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영조는 매정하게도 "누가 얘를 데리고 들어오라고 했느냐. 세손까지 뒤주 안으로 들어가길 바라느냐. 어서 데리고 나가라"며 정조를 쫓아냈다. 2.2. 백부의 양자로 입적하다[편집]정신병이라는 핑계를 대기는 했어도 죄인인 사도세자의 아들로서는 왕위를 이을 수 없을 거라고 판단한 영조에 의해 죽은 백부인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는 방식으로 왕위 계승권을 유지하게 된다. 그래서 정조는 즉위 이후 정통성 확보를 위해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했다. 친부는 끝내 추종하지 못했는데 양부는 거의 즉위하자마자 자기 정통성을 위해서 추존할 수 밖에 없었다. 사도세자는 고종 대에 '장조(莊祖)'로 추존되었다. 2.3. 즉위[편집]즉위하면서 한 말이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다고 알려져 있다.[15] 그 후 자신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던 척신(홍인한, 정후겸)들에 대한 척결을 완료했다. 홍술해의 아들인 홍상범과 그의 어머니 효임등이 강용휘와 전흥문[16]을 포섭하여 정조가 밤새 글을 읽던 존현각까지 침투시켰다가 발각된 일(정유역변)이 있었는데 홍계능, 홍상길, 홍신해, 홍이해 등 풍산 홍씨들이 집단으로 연루된 모반이 드러나면서 일대 피바람이 불기도 했다. 홍계희 계열은 이미 홍인한이 사사되는 과정에서 타격을 입은 상태였고 이에 반발하여 사건을 일으켰다. 2.4. 홍국영 숙청[편집]이후 왕대비가 된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를 유배보냈고 1780년(정조 4년)에는 심복이던 홍국영을 토사구팽하였다. 사실 진상을 보면 홍국영이 버림받을 짓을 했다고 보는게 옳다. 디테일은 다르지만 큰 줄기만 놓고 보면 태종대의 이숙번과 비슷한 케이스.[17] 2.5. 은언군의 유배[편집]한편 상계군 이담은 홍국영이 축출된 이후로 계속 안절부절못하다가 1786년(정조 10년)에 구씨 일가의 반란이 들키기 전에 죽었다. 이 때문에 그의 아버지 은언군 이인을 죽여야 한다는 청이 정조 말년까지 계속되었다. 2.6. 규장각과 초계문신제[편집]초월적 군주를 자처하면서 홍문관의 기능을 분산한 학술 기관 규장각을 세우고 서얼 출신(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들을 등용하여 서학을 익히게 하고 신해통공을 실시하여 종로 앞거리에 육의전이 차지하는 물품을 제외한 나머지 물품을 취급하는 '사전'을 열 수 있게 하여 조선의 상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만천명월주인옹'(온 세상을 비추는 달과 같은 존재)라는 뜻의 정조의 호가 바로 이러한 초월적 군주를 지향한 정조의 정치 철학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2.7. 탕평책 - 준론탕평[편집]정조는 자신의 할아버지 영조가 펼쳤던 탕평책을 역시 들고 나왔다. 하지만 정조의 탕평책은 영조의 탕평책과 전혀 달랐다. 2.8. 장용영 설치와 수원화성 건설[편집]정조는 상당히 많은 암살 위기에 시달리기도 했는데 이러한 암살 위기는 정조에게 결국 자신을 호위할만한 군사의 필요성을 상기시키게 하였다. 당시 군영은 대부분 주요 당파에 장악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임금을 지키기보다는 자신의 당파를 위해 일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2.9. 숭렬전 설치[편집]인조 대에 남한산성에 건립된 백제의 시조 온조왕을 모신 사당인 온조왕사(溫祚王祠)에 '숭렬전(崇烈殿)'이란 편액을 하사하면서 온조왕에 대한 제문을 본인이 직접 작성하여 내려 보냈다. 그리고 매년 음력 9월 5일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숭렬전은 팔전 중 하나로 이렇게 백제의 시조 온조왕에 대한 제사를 국가가 정식으로 받들게 되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화는 남한산성 항목 참조. 2.10. 대전통편[편집]사실상 조선 최후의 법전 《대전통편》,[29]이 정조 9년(1785년)에 편찬되었다. 《속대전》을 보완하고 오례의와 통합시켜 법제운용에 일원화를 꾀한 것으로서 대전통편에는 영조시대 제도화된 균역(영조 27년)이나 비총(영조 36년)같은 주요 세제개혁들이 법전 조항으로서 자세히 수록되었다. 2.11. 병신정식[편집]조선 후기 왕실 재정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궁방전의 확대는 세수의 감축과 차인(差人)[30]·도장(導掌)[31] 등의 대민 침탈을 초래해 많은 문제를 드러내고 있었다. 왕실 재정 문제에 고심하고 있었던 정조는 1776년(정조 즉위년)에 규정 외로 보유하고 있는 궁방전을 조사하여 대대적인 출세를 단행하고 여러 궁방의 전결을 호조로 이속시키는 등 다양한 조치를 취하였다. 이를 통해 6만여 결에 달하는 궁방전의 1/3∼1/2 정도[32]가 과세(課稅)됨으로써 내수사와 주요 궁방의 면세결은 크게 줄어들고 면세 정액이 확정되었다. 이때 반포된 것이 「병신 정식(丙申定式)」[33]이다. 2.12. 신해통공[편집]조선 전기 때만 해도 상업이 억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상인들의 특권은 그대로 인정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이 이루어지면서 이들이 국역에 종사하고 있으면서도 특권이 적어지면서 불만이 생기게 되었고, 결국 이들의 독점적 상권을 인정해주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을 부여하기에 이른다. 2.13. 문체반정[편집]정조 시대를 이야기하면서, 문체반정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정조의 개혁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문체반정은 북학이나 청나라 문물, 박지원의 《열하일기》로 대표되는 새롭고 신선한 문체에 관심을 보이던 조선의 젊은 선비들을 탄압한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2.14. 서체반정[편집]정조는 문체만 개혁하자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서체까지도 개혁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를 서체반정이라고 한다. 문체반정과 더불어 정조의 문화 통제 정책이 광범위했음을 알 수 있는 사례. 2.15. 주자대전집 편찬 프로젝트[편집]문체반정의 연장선상에서 정조는 아예 밀려드는 고증학 등의 "이단사설"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주자가 남긴 모든 저작을 모아 편집, 출간, 보급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런 주자대전집을 통해 이단사설들로부터 주자학의 가치를 천명하려 한 것이다. 2.16. 사망과 무덤[편집]정조 독살설을 다룬 KBS 〈역사스페셜〉 영상
3. 묘호, 시호, 휘[편집]
4. 평가[편집]
5. 가계[편집]
를 의 번 문단을 의 부분을 참고하십시오.6. 어진[편집]자세한 내용은 정조 어진 문서 를 의 번 문단을 의 부분을 참고하십시오.7. 기타[편집]
7.1. 엄친아[편집]정조가 유아 시절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 편지.[59] 각종 기록을 보면 신하들에게 "내가 이렇게 똑똑한데 니들이 뭘 안다고 이러느냐?"며[60] 신하들을 까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문제는 명백한 사실이라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정조 관련 고풍
7.2. 술과 담배 사랑[편집]어릴 적에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술과 담배를 병적으로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술마시는 정조 동상. 해당 동상은 팔달문시장 도보 정리로 근처로 이동했다. 수원화성 팔달문 근처의 팔달문 시장(남문 시장) 입구 쪽에 보면 정조가 술상 앞에 앉아 있는 동상이 있다. 그 동상에 불취무귀(不醉無歸),[80] 그러니까 '취하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다만, 이는 진짜로 그런 의미로 쓴 것은 아니고, 백성들이 술에 취할 흥취를 즐길 정도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싶다는 정조의 의지가 반영된 글귀이다.
이 자리에는 오태증이라는, 집안 대대로 주당으로 이름난 유생이 있어서 술에 취하지 않았는데, 정조는 그의 할아버지 오도일이 숙종 대에 여기 희정당에서 술에 취해 넘어졌다면서, 술 5잔을 더 먹여 결국 취하게 했다. 그래놓고는 "오도일이 여기서 술에 취해 쓰러진 것이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며 "지금 그의 후손이 같은 장소에서 취해 쓰러진 것이 우연이 아니다"라며 흐뭇해했다. 여하튼 그토록 술을 좋아하다보니까 사회적 분위기도 같이 따라가서 수도 한양에 술집들이 많이 들어섰는데 하도 많이 들어서다보니까 당대에는 상당한 사회적 이슈로 떠올라서 사대부들이 술집을 없애자고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어느 날은 한 선비가 술에 취한 채 궁궐 담벼락 밑에서 밤에 잠을 자다가 야간 통행금지에 걸려서 잡혀온 일이 있었다. 그러자 정조는 '요즘 사람들은 술이 약해서 제대로 마실 줄을 모르는데 이 자는 술을 잘 마셔서 그 멋을 아니 참으로 가상하다. 상으로 쌀 한 포대를 주고 풀어줘라.'라고 명을 내렸다.
금주법까지 시행했을 정도로 술에 엄격했던 영조가 "성심으로 금지하라."라고 신신당부했지만 훗날의 정조를 알고 있는 후손들이 보면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는 대목. 7.3. 정조의 비밀 편지들[편집]
2009년 2월 발견된 심환지와 교환한 서신첩인 정조 어찰첩을 보면, 학자 군주답지 않고 왕의 표현이라 볼 수 없는 표현들을 많이 쓰고 있다. 특히 자유자재로 욕설과 막말을 구사하는 모습 때문에 화제가 되었다. 예를 들면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86] 사람 꼴도 못 갖춘 새끼와 경박하고 멍청하여 동서도 분간 못하는 병신이 감히 그 주둥아리[87]를 놀린다."라거나, "대신 ○○○는 몸에 동전 구린내가[88] 나 주변이 모두 기피하는 놈이다", "호로 자식"이라든지.[89] 어전 회의 중에 신하들이 조금이라도 실수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보이면 바로 욕설을 구사했다고 한다. 1797년(정조 21년) 4월 21일(음력)에 쓴 정조의 편지 이 편지에도 상당히 재미있는 표현이 많다. 대표적으로 '요즘처럼 벽파가 뒤죽박죽되었을 때는...'이라고 쓰는데 마땅한 한자가 생각이 나지 않았는지[91] 갑자기 한글로 써놓아서 '近日僻類爲뒤쥭박쥭之時...'이 되어있다. 본문 왼쪽에서 3번째 줄 가장 아래 쪽부터 '뒤쥭박쥭'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조선시대 글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읽는다. 7.4.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편집]이덕일 세력의 역사왜곡 왜인 한반도 남부 지배 주장 '김현구 임나일본부설 주장' 날조 정조실록 기록 왜곡 해설 삼국사기 초기기록 수정 한사군 한반도설 '동북아역사재단이 독도 누락' 주장 두음법칙·한글 맞춤법 통일안
8. 대중매체에서[편집]자세한 내용은 정조(조선)/대중매체 문서 를 의 번 문단을 의 부분을 참고하십시오.9. 관련 문서[편집]
[1] 정조 생전에 어릴 때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그에 따른 미안함으로 왕으로 즉위하고나서도 거의 매년마다 성묘, 참배를 하는 등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 그로 인하여 정조 사후에 아들 순조는 효심으로 아버지 정조를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있는 현륭원(융릉) 옆에 자리하게 된다.[2] 개인적으로는 사도세자를 아버지라고 하였지만, 법적·공식적으로는 효장세자를 아버지라고 스스로 인증하였다. 정조 실록 기사 참조. 그리고 사도세자에게는 황숙부라고 칭하는 모습을 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후술되어 있지만, 정조는 개인적으로만 사도세자가 아버지라고 말했을 뿐, 공식적으로는 항상 효장세자를 아버지로 섬겼다. 대다수 역사 강사들이나 사극에서 자주 인용되는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발언의 본래 내용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그러나 선왕께서 과인을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하셨으므로 그 뜻을 따라야 한다.'이다. 노론 음모론과 정조 암살설을 주장하기 위해 뒷내용을 잘라놓고 앞부분만 가져와 인용하는 것. 실제로 정조는 사도세자를 높이려는 일말의 시도도 용납하지 않았다.[3] 2대 임금과 겹칩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2대의 묘호는 정종의 '정' 한자가 '定' 이었다. [4] 1899년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5] 영조(연잉군)가 경종의 동생으로 차남, 사도세자가 효장세자의 동생으로 차남, 정조가 의소세손의 동생으로 차남이 되며, 순조 역시 문효세자의 동생으로 차남이다.[6] 하지만 이 부흥기는 철저히 정조와 유능한 측근들에 의해 기존의 조선의 시스템을 갈아엎어 억지로 끼워 맞춘 결과였기에 이를 이끌던 정조 사후 조선은 본격적으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7] 여기서 '사도'는 유교의 도덕을 말하는 것으로,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는 최고 수준의 찬사라고 할 수 있다.[8] 영빈 이씨의 역할에 대해 박시백의 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어쩌면 영조가 시켰을지도 모른다고 했다.[9] 여차하면 영조가 혜경궁 홍씨의 친정을 통채로 날려버리고, 정조를 거두어 들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다른 세력이 혜경궁 홍씨와 친정을 (주로 사도세자와 얽어) 모함하여 몰락시키고 세손의 보호자를 자처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자기 아들을 한여름 속 뒤주에 가둬 굶겨죽이고 양위 요구같은 자신의 권위를 침범하는 일에 눈을 부라리던 의심병/편집증 환자인 영조가 신하들을 쥐락펴락하며 막강한 왕권을 자랑하고 있고, 늘 엎치락 뒤치락하며 역모 고발을 반복하는 조정의 당파 싸움 속에서 그 왕의 손에 직접 죽임당한 남편을 가진 홍씨가 바로 그 왕의 유일한 적통을 보호한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실제로도 혜경궁의 아버지 홍봉한은 정조 대까지 권력을 누리긴 하지만 중간에 탄핵 당해 실각하기도 하고, 사도세자의 서자들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했다는 이유로 정치적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혜경궁의 이런 결단이 빛을 발했는지 다행히 영조와 정조 모두 홍봉한을 중용한다. 심지어 다른 사람도 아닌 혜경궁의 인척들이 정조 암살 시도에 연루되기까지 했으니 혜경궁은 친정으로부터도 유일한 혈육인 아들을 지켜야 했었다.[10] 정조의 왕실 경호실장(지금의 청와대 경호실장) 격의 역할을 했다.[11] 세손 시절 스승.[12] 정조의 충신.[13] 50대 초반에 사망하며 재위 기간을 오랫동안 함께하지는 못했으나, 실학자로 유명한 사람이다.[14] 홍인한 탄핵소를 올려 대리청정 저지 기도를 막았다. 이 때문에 서명선이 상소한 12월 3일 정조는 자기를 도왔던 이들을 모아 '동덕회'라 이름짓고 모임을 친히 가졌다.[15] 물론 그 다음은 인정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선왕의 뜻을 거스를 수도 없다는 내용이었고, 득달같이 사도세자 추숭과 노론 토벌을 주장하던 선비들에게 강력하게 처벌을 내려 신하들을 안심시켰다.[16] 전흥문은 힘이 장사였으나 가난했기 때문에 혼인을 못해서 강용휘가 그에게 돈 1,500문(文)을 주고 예쁜 여자 노비(女奴)를 아내로 주자 강용휘에게 고마움을 느껴 그와 함께 정조를 암살하려고 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0108011_001[17] 이쪽도 이방원이 두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를 거머쥐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공신이자 측근이었지만, 이후 기고만장해져 안하무인으로 각종 전횡을 일삼다 끝내 미래권력인 세자에게까지 접근하는 바람에 태종의 분노를 사 숙청당했기 때문이다.[18] 으뜸 원(元)' 자는 왕의 정실부인인 왕비나 왕세자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다.[19] 본래 '원(園)'은 왕세자, 왕세자빈, 차기 국왕을 낳은 후궁의 묘소를 일컫는 단어인데, 이 3가지 경우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 원빈이 원호를 받는 것은 당시 왕실 전통예법에 어긋난다. 홍국영 몰락 후인 1786년(정조 10년)에 저 원호와 궁호를 강등시켰다.[20] 비슷한 사례로 정조에겐 종조부(할아버지의 형제)가 되는 경종이 있다. 경종은 두명의 왕비를 들였는데도 슬하에 자식이 하나도 없었는데 여기에다가 본인의 병약함, 이복동생 연잉군(훗날의 영조), 노론의 득세가 얽혀, 당시 33세의 나이로 아직 자식을 볼 수 있는 젊은 경종에게 노론이 감히 대놓고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자는 소리를 했고, 청나라의 사신으로 갔던 이건명은 아예 "임금이 양기가 없어 여자를 가까이 하지 못한다."라는 망발을 내뱉었다가 참수당했으며, 나중에는 왕세제의 대리청정까지 주장했다. 이에 경종은 연잉군을 세제로 삼아준 뒤 대리(代理)도 해주겠다면서 노론을 낚아서 그들을 일제히 숙청했고, 영조도 이때 정치적으로 최대의 위기에 몰려 폐세제를 자처하며 석고대죄까지 해야 했다. 즉, 홍국영의 행동은 앞서 벌어졌던 사례를 감안할 때 충분히 숙청 사유에 포함된다.[21] 왜냐하면 송덕상은 송시열의 후손인데 송시열이 서인과 노론의 영수였음을 감안하면 호서의 유생들이 반발할 이유가 된다.[22] 당시 송덕상을 칭송하는 글을 지어 송시열의 사당에 올렸다는 죄로 유배된 평산 유생 신형하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유배간 인물이다.[23] 김귀주 쪽 사람인 이율은 한양에서 내응키로 했고 홍국영의 사촌인 홍복영은 100칸짜리 집과 소금 1,000포를 내놨다.[24] 구선복의 경우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당시 뒤주를 지킨 인물로 야사 등에서는 그가 사도세자를 조롱(세자 옆에서 고기와 술을 먹기도 하고, 놀리며 오줌도 싸는 짓)하기도 했다고 언급이 되고 있다.[25] 대부분 척신당(탕평당)들이다.[26] 현대적 표현으로는 국정 지도자의 철학을 이해, 동참하는[27] 대표적으로 1788년(정조 12년)에 영의정에는 노론 벽파인 김치인, 좌의정에는 소론 강경파인 이성원, 우의정에는 남인 채제공을 임명하였다.[28] 영조 때 완전히 혁파한 것을 부활시키려고 했지만 또다시 폐단이 일어나자 완전히 폐지한 것이다.[29] 이름이 비슷한 《대전회통》은 흥선대원군 시절에 만들어졌으나 대전통편에 소폭 증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험에 낚시 문제로 나올 수도 있다. '통'편 '회'통이니 'ㅌ' 다음 'ㅎ' 가나다 순서로 외우면 된다. 시험장가서 '통'편 회'통' 둘다 통인데 뭐지하고 헷갈려서 순서생각 안나서 당황하면 답이 없으니 두문자 암기는 슬기롭게 활용하기 바란다.[30] 조선시대 각 궁방(宮房)에서는 자체적인 재원 마련 수단으로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이러한 둔전을 궁방전(宮房田)·궁장토(宮庄土)라고 불렀는데, 이곳을 관리하고 토지세를 징수하기 위해 궁방에서 파견한 차인(差人)이 바로 궁차(宮差)였다.[31] 궁방에 소속된 농장의 전세 등을 대신 징수하거나 궁방전을 관리하던 궁방의 청부인.[32] 정조실록 24권, 정조 11년(1787, 정미) 10월 26일 경신 1번째기사 1787년 청 건륭(乾隆) 52년 백성에게 세를 받을 때 궁방의 하속이 폐단을 만드는 것을 묘당이 살피게 하다[33]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병신정식(丙申定式))」, 정조실록 1권, 정조 즉위년(1776년) 4월 10일 신해 6번째기사 1776년 청 건륭(乾隆) 41년 궁방이 함부로 받은 면세 전결을 사정하다[34] 박지원 특유의 비주류 - 실학자 성향 때문에 오해할 수도 있는데, 박지원은 당시 노론 중에서도 명문가로 꼽히던 반남 박씨 가문 출신이다.[35] 참고로 선조 시대의 인물인 기대승은 삼국지연의에 대하여 "무뢰(無賴)한 자가 잡된 말을 모아 고담(古談)처럼 만들어 놓은 잡박(雜駁)하여 무익할 뿐 아니라 크게 의리를 해치는 소설"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당대의 꼬장꼬장한 선비들이 보기에는 격조있는 한시나 경전류와 비교해 잡기소설류가 천박해 보였을 것이다.[36] 여담으로 패관 문학체는, 소설을 즐겼던 할아버지 영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37] 두 종교 모두 천국(극락)이니 지옥이니 하는 내세를 언급하고, 숭배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유학자의 눈에는 충분히 그렇게 보였을 수 있겠다. 그걸 떠나서 불교나 천주교나 교리 자체는 민생을 현혹하는 다 좋은 말들이니 거기서 거기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38] "그 책에 '천주가 내려와서 예수가 된 것이 중국에 요순(堯舜)이 있는 것과 같아 소경을 눈을 뜨게 하고 절름발이를 잘 걷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허무맹랑한 말입니다. 하늘의 문을 열고 날아서 들어간다는 설에 이르러서는,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단 채제공은 "그 가운데 좋은 것도 간혹 있으니, 이를테면 하느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