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어떻게 살지 - insaeng eotteohge salji

인생 어떻게 살지 - insaeng eotteohge salji

 인간은 꽤 오래 사는 동물이다. 쥐는 4년, 고양이 14년, 개 16년, 북극곰 18년, 말 28년, 코끼리 70년인데 반해 인간의 평균수명은 80년이나 된다. 인간이 여타 동물들과 다른 점은 성체가 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포유류 대부분은 태어나면서부터 걸으며, 몇 주 만에 성체에 도달하지만, 인간은 성인이 되는데 20년이 넘게 걸린다. 삼천 년 만에 핀다는 우담바라라고 하는 꽃처럼 인간도 오랜 세월을 꽃피우기 위해 이토록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인간의 수명이 이렇게 긴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비슷한 몸집의 영장류에 비해 에너지를 50% 정도만 사용한다는 점이다. 인류가 처음부터 이렇게 장수했던 것만은 아니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원시시대 인간의 수명은 10세였고, 예수가 태어나던 시기는 20세였다고 한다. 하지만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과학의 발달로 평균수명은 40세로 늘어났고, 지금은 80세인 시대가 되었다. 인류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 인간의 평균수명이 35세에서 80세로 늘어난 기간은 70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의 수명은 앞으로도 계속하여 늘어날까. 계속하여 늘어난다면 몇 세까지 살 수 있을까? 예로부터 동양과 서양에서 말하고 있는 수명의 한계는 120세이다. 주역에서는 2회갑 120년을 인간의 수명한계라고 했고, 서양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창세기 6장 3절에서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이 정하신 인간의 한계수명은 120세라고 말한다.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 인간의 평균수명은 1000년이나 된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살은 사람은 므두셀라로 969세였고, 죽음을 보지 않고 365세의 나이에 하늘로 승천한 에녹을 제외하고는 평균수명 912세까지 살았다. 그러던 인간의 수명이 120세로 줄어든 것은 인간의 타락을 보지 못하고 인류를 멸망시킨 노아의 홍수 이후였다.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대기권이 자외선을 차단하여 인간의 유해한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다. 지금처럼 덥고도 춥지도 않았던 환경이 인간이 장수하기에 최적화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성경학자들이 말하는 지구의 환경은 노아의 홍수 이후에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장의 수명이 120년이다. 하지만 지금의 인간 평균수명이 그보다 못 미치는 원인은 인류의 환경이 계속하여 악화되고 있는 것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수명한계 120세는 과학적 관찰의 결과에도 일치하는 숫자인 듯하다. 동물들의 생장을 관찰해본 결과 그들의 수명은 성장기간의 6배와 일치하는 경향을 보인다. 인간의 성장 기간이 20년 정도이므로 그의 6배인 120세가 한계수명인 것도 그런 연유인 것이다. 인간이 오랜 수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환경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는 면역세포가 왕성하게 활동해야 한다. 하지만 환경의 변화로 인해 자외선이 면역세포를 파괴했고, 나이가 들면서 면역세포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든다. 그러면서 면역세포들이 감소하다가 생명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임계점에 다다르는데 그것도 120년 정도로 인간의 한계수명에 일치한다. 


​면역세포 이외에도 인간의 수명에 이바지하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들이 있지만 그 요인들을 한가지로 정의하기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인간이 단명하는 이유는 이미 확인되었는데 그 원인들은 다음과 같다. 


​1. 과체중인 사람
2. 혈압이 높은 사람
3. 혈당이 높은 사람
4. 콜레스테롤이 높은 사람
5. 흡연자
6. 과음을 하는 사람
7. 악력이 약한 사람 (손으로 하는 일을 적게 하는 사람)
8. 고교 이하의 교육을 받은 사람
9. 혼자 사는 사람


​​오래 살고 싶다면 9가지를 피하면 된다. 하지만 인생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은 불합리하고, 비애로 가득 차 있으며, 행복이나 희열도 모두 덧없는 것이다라고 보는 세계관을 염세주의라고 한다. ​
120년이라는 시간은 아니 80년만 잡더라도 이 시간은 매우 긴 시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긴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쇼펜하우어, 키에르케고르, 니체와 같은 철학자들은 인생을 고통이라고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삶의 참을 수 없는 비참함을 이야기하며,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인 절망을 이야기한다. 쇼펜하우어는 세상은 선한 존재의 작품일 수 없으며, 인간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려고 생명체를 창조한 악마의 작품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쇼펜하우어에게 영향을 받은 니체는 인생의 고통을 초인의 의지로 극복하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과연 인생은 이들의 말처럼 고통으로만 점철된 것일까. 


​어쩌면 삶에서 고통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누구든 간에 원하는 인생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은 선택이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매우 힘이 들지만, 부모는 육아의 고통을 감내한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인 학생은 노는 재미를 뒤로하고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한다. 그렇게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하면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자신의 상품 가치를 높이려고 애를 쓴다. 뱃살을 빼고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은 사람은 식욕을 참아가며, 힘든 운동을 해야 하고, 사업에 성공하기 위한 사람은 쫄딱 망할 수도 있는 위험을 감내하고 돈을 빌려 투자한다. 


​인간이 이러한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이유는 의미 때문이다. 의미가 있다면 인간은 고통을 잊는다. 목숨을 걸고 에베레스트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높은 산에 오르는 것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육아의 고통은 매우 크지만, 자식은 인생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인내한다. 인생을 살면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공자는 나이 50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지천명(知天命)이라 했다. 


​인생은 고통이지만 인생의 고통은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고통이 아닐 수도 있다. 자발적인 고통은 모든 고난과 시련을 감내할 수 있다. 문제는 인생에서 우리는 실상 무엇을 찾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학교 다닐 때 이것을 배우지 못한다. 그저 공부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만을 바랄 뿐이지 그 이후의 삶을 생각하지 못한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있다.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그의 인생에 있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러한 경로는 그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좋을 것 같다고 착각하는 막연한 이상일 뿐이다. 


​모든 인간은 다르다. 똑같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평균적인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평균적인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평균적인 인생의 경로를 산다는 것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우리는 끊임없이 인생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지만, 인생의 답이란 없다.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 간결하고 함축적인 결론 따위를 제시해주지 않는다. 학교에서 세상의 지식을 가르쳐 줄 수는 있지만, 세상을 잘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지는 못한다. 세상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은 수없이 경험해 보고, 부딪혀가고 배워가는 것뿐이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수많은 선택과 도전의 결과물이다. 수없이 많은 선택과 도전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은 나 자신을 발견하고 찾아가는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틀렸다. 언제까지 내가 누구인지 찾고만 있을 것인가. 그렇게 어영부영하다가는 평생 나 자신이 누구인지 찾고자 했던 사람이 여기에 누워있다라는 묘비명을 남기게 될지 모른다. 인생은 내가 누구인지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고통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선택 자체가 고통이고, 선택한 것을 일관성 있게 이끌고 나가는 것이 고통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에서 고통은 필연적인 것이다. 


​두 젊은이가 소크라테스를 찾아와서 그에게 인생이란 무엇이냐고 물었다. 소크라테스는 이들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그들을 사과나무가 있는 숲으로 데리고 갔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에게 숲 끝까지 걸어가며 가장 마음에 드는 사과를 하나씩 따오라고 말한다. 이들을 유심히 사과를 관찰하며 가장 좋은 것을 고르려 노력했다. 숲 끝에 도착하자 소크라테스가 그들에게 물었다. 가장 좋은 것을 골라왔는가? 한 젊은이가 말했다. 선생님, 다시 한번만 고르게 해주세요. 저는 숲에 막 들어섰을 때 정말 크고 좋은 걸 봤습니다. 그런데 더 크고 좋은 것이 있을 거로 생각하고 그걸 따지 않았습니다. 사과나무 숲 끝까지 와서야 비로소 제가 처음 본 사과가 가장 좋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에 다른 젊은이가 급히 말했다. 전 반대입니다. 과수원에 들어가자마자 제일 크고 좋다고 생각되는 사과를 골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더 좋은 게 있었습니다. 저도 후회스럽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들에게 그것이 인생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도 후회하고, 저렇게 해도 후회만 남을 뿐이다.


​인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인생은 선택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은 언제나 한 번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숲은 이미 끝나가고 있는데 아직도 아무런 선택도 하지 못했다면 인생의 패배자가 되기에 십상이다. 인생의 선택은 단 한 번뿐이다. 매일매일 선택만 하는 것에 고민하고 있으면 숲은 이미 끝나있다. 물론 처음의 선택이 후회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의 여정을 길게 잡는다면 후회 있는 선택이란 없을 것이다. 인생은 변화무쌍하다. 처음에는 처음의 선택이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옳은 선택일 수도 있다. 반대로 처음에는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중에는 잘못된 선택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인생의 문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후회의 문제이다.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절대로 길지가 않다.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어영부영하다가는 결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로 땅속에 묻힐지도 모른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고만 있을 것인가. 인간은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

인생은 나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이 아니라,

나 자신을 만들어가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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