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 촬영 당시 알 파치노에게 말을 아꼈지만, 나는 그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 배우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이런 내 생각을 똑똑히 증명했다. 허풍처럼 들리는가? 글쎄, 나는 살면서 절대로 과장을 해본 적이 없다. 난 내 본업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어디 가서 다른 배우들 찬사를 쉽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6] Show ― 말론 브란도 (대부1 개봉 직후)출처
2. 상세[편집]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명배우 중 한 명으로서 대부 시리즈, 스카페이스, 여인의 향기, 칼리토, 히트, 형사 서피코, 뜨거운 오후, 허수아비, 인섬니아, 인사이더, 아이리시맨 등을 비롯한 무수히 많은 명작들을 남겼으며 특히 할리우드 갱스터, 느와르 장르의 상징적인 인물로 유명하다.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배우라는 평을 받으며, 연기파 배우의 끝판왕 중 한 명이다. 비슷한 나이대의 배우들 중 잭 니콜슨, 더스틴 호프만, 로버트 드 니로[7][8]와 함께 연기 본좌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3. 생애[편집]3.1. 어린 시절[편집]뉴욕의 맨해튼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님이 이탈리아 시칠리아 이민자 출신이다. 아버지 살바토레 파치노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산 프라텔로에서 캘리포니아 주의 코비나로 이민을 와서 보험 판매원으로 일하고 레스토랑을 운영했다. 외할아버지 제임스 제랄디와 외할머니 케이트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콜레오네 출신이다. 3.2. 학창 시절[편집]허만 리더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영어를 제외한 모든 수업을 낙제할 정도로 공부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바로 이 시기에 뮤지컬과 연극으로 나름 공식적인 연기를 시작했다.[15] 12살 무렵에 굉장히 운명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데 연극이 끝나고 어떤 남자가 다가와 "너는 차기 말론 브란도가 될거야."라는 찬사를 보냈고 그때만 해도 브란도를 몰랐던 어린 알 파치노는 "말론 브란도가 누군데요?"라고 대답했다고.[16] 13살 때는 연극 무대에서 연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토하는 연기를 하며 실제로 무대 위에 토해버리기도 했다.[17] 3.3. 연기 활동[편집]연극 배우로 시작한 알 파치노는 승승장구하며 점차 떠오르기 시작했다. [28] 호로비츠의 극들을 성공적으로 연기해낸 그는 평생의 동업자가 될 매니저 마틴 브레그만에게 발굴되고, 1969년에 영화 배우가 되었다. 2년 뒤인 1971년 제리 샤츠버그 감독의 백색공포로 첫 주연으로 데뷔, '마약 중독자'를 잘 연기하며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3.4. 아카데미 시상식 7전 8기[편집]아카데미 최다 노미네이트 순위 : 남배우 순위 이름 노미 수상 1위 잭 니콜슨 12 3 2위 로런스 올리비에 10 1 공동 3위 스펜서 트레이시 9 2 덴젤 워싱턴 9 2 폴 뉴먼 9 1 알 파치노 9 1 공동 7위 말론 브란도 8 2 잭 레먼 8 2 피터 오툴 8 0 미국 3대 시상식인 <아카데미상>, <에미상>, <토니상>을 모두 받아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알 파치노는 아카데미 시상식과 지독한 악연이었다. 아이리시맨으로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것을 포함하여 남우주연상 5번, 남우조연상 4번, 총 9번의 후보 지명을 받았고 역대 최다 노미 순위 3위에 올라 있지만 수상은 한 번에 그쳤다.[37] 심지어 역대급 연기로 꼽히는 <대부 1> 시리즈로도 수상을 실패했는데, 대부 2로 1975년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놓친 것은 아직도 이해가지 않는 일로 평가 받는다.[38] 또 하나의 대표작인 <스카페이스>로는 골든글로브 후보에만 올랐고 아카데미에는 노미네이트조차 되지 못했다.[39]
1974년 제 46회 아카데미 시상식
4. 연기 스타일[편집]지금의 마초적 이미지와는 달리, 알 파치노는 본래 길거리 스탠드업 코미디로 연기를 시작했다. 온갖 농담과 과장된 익살로 사람들을 웃기던 그에게 이 시절은 매우 배고팠지만 그 어떤 시기보다도 행복했다고 술회한다. 이 후 메소드 액팅을 철저하게 훈련하며 자신의 에너지를 극대화하는 연기법을 터득하고, 본격적으로 전업 배우 생활을 시작한다. 초창기엔 폭발적이면서도 절망과 불안을 탁월하게 표현해내는 것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실제로 1970년대의 전설로 회자되는 알 파치노의 연기들은 모두 타고난 신체적 조건(커다란 눈망울, 예쁘장한 이목구비, 왜소한 신체, 쩌렁쩌렁한 목소리 등)을 탁월하게 이용하여 극단적인 폭발력 이면에 숨겨진 불안함과 절망감을 표현하는 작품들이었다.[47][48] 다만 현장에서 몰입도를 위해 본 촬영 때 외에는 그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을 정도로 극단적이었던, 모조리 발가벗겨지는 식의 메소드 방법론은 자연인으로서의 알 파치노를 황폐화시키는 면이 있었고, 한 작품 찍어낼 때마다 전세계의 찬사를 받았지만 다음 작품을 하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술회한다. 타고난 우울함과 히스테릭함을 갖고 있었던 알 파치노는 1970년대의 성공적인 연기 활동 이면에서 24시간 알콜중독에 시달리며 지쳐갔고, 곧 방법론을 바꾸기 시작한다. 4.1. 연기 스펙트럼[편집]연극계와 영화계에서 모두, 다양한 활약을 한 대배우임에도 불구하고 활약한 연기 폭이 좁다는 오해를 받는 배우 중 하나이다. 이는 알 파치노가 범죄 영화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고 그로 인해 갱스터 무비 속 캐릭터로 대중들에게 깊게 각인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대의 쌍두마차였던 로버트 드 니로와의 비교 때문이기도 하다. 드 니로같은 경우 알 파치노와 달리 전쟁 영화 속 군인, 케이프 피어 등에서 보여준 광기에 찬 싸이코 패스, 코미디의 왕 에서 보여준 코미디언 역으로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 바 있다. 5. 은둔형 예술가의 언론 나들이[편집]
6. 가족[편집]사생활이 상당히 비밀스러웠는데 다이앤 키튼과 오랜 연애관계를 가졌고, 다이앤은 결혼하고 싶었지만 알 파치노의 플레이보이 성향이 깊어 결국 헤어졌다. 이후 튜즈데이 웰디, 질 클레이버그, 마서 켈러, 캐슬린 퀸란, 프로듀서 린달 홉스 등등 여러 배우 및 영화인들과 낭만적인 관계가 많았다. 자식들이 다 늦둥이인데 알 파치노가 결혼이나 자식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7. 여담[편집]
7.1. 불발된 캐스팅[편집]
8. 필모그래피[편집]8.1. 영화[편집]연도 제목 배역 기타 1969 미 나탈리 토니 단역 1971 백색 공포 바비 데뷔작[86] 1972 대부 마이클 콜레오네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 1973 허수아비 프랜시스 라이오넬 델부치 형사 서피코 프랭크 서피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 1974 대부 2 마이클 콜레오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 1975 뜨거운 오후 소니 워칙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 1977 바비 디필드 바비 디필드 1979 용감한 변호사 아서 커클랜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 1980 광란자 스티브 번스 1982 브로드웨이에 막이 오를 때 아이번 1983 스카페이스 토니 몬타나 1985 혁명[87] 탐 1989 사랑의 파도[88] 프랭크 1990 로컬 스티그매틱 그라함 프로듀서 겸 배우 딕 트레이시 알폰스 '빅보이' 카프리스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 대부 3 마이클 콜레오네 1991 프랭키와 쟈니 쟈니 1992 글렌게리 글렌 로스[89][90][91] 리차드 '리키' 로마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 여인의 향기 프랭크 슬레이드 중령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1993 칼리토 칼리토 '찰리' 브리간테 1995 투 비츠 할아버지 히트 빈센트 한나 경위 1996 씨티홀 존 파파스 시장 뉴욕 광시곡 본인 & 리처드 3세 감독 데뷔작 1997 도니 브래스코 벤자민 '레프티' 루지에로 데블즈 애드버킷 존 밀튼 1999 인사이더 로웰 버그만 애니 기븐 선데이 토니 다마토 2000 차이니스 커피 해리 레빈 감독 겸 배우 2002 인썸니아 윌 도머 시몬 빅터 타란스키 목격자 앨리 워맨 2003 갱스터 러버 스타크먼 리크루트 윌터 버크 2004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 2005 투 포 더 머니 월터 2007 88분 잭 그램 박사 오션스 13 윌리 뱅크 2008 의로운 살인 데이빗 '루스터' 피스크 형사 2011 화이트 밀크 스탠포드 형사 잭 앤 질 본인 골든라즈베리 남우조연상 수상 와일드 살로메 본인&헤롯 왕 감독 겸 배우 2012 멋진 녀석들 발렌타인 2013 살로메 헤롯 왕 감독 겸 배우 2014 알파치노의 은밀한 관계 사이먼 맹글혼 맹글혼 프로듀서 겸 배우 2015 대니 콜린스 대니 콜린스 2016 미스컨덕트 찰스 2017 더 파이러츠 오브 소말리아 시모어 행맨 형사 아처 2019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마빈 슈워즈 아이리시맨 지미 호파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 2021 액시스 샐리 제임스 로린 하우스 오브 구찌 알도 구찌 미정 스니프 하비 스트라이드 미정 리어왕 리어왕 8.2. 연극[편집]연도 제목 배역 기타 1965 The Creditors 1966 Why Is a Crooked Letter 오비상 남우주연상 후보 1967 어웨이크 앤 싱! 1967 아메리카, 만세 1968 인도인은 브롱크스를 원한다 머프 오비상 남우주연상 수상 1969 호랑이는 넥타이를 매는가? 비컴 토니상 남우조연상 수상 1969 로컬 스티그매틱 그레이엄 1970 랫츠 감독 데뷔작[92] 1970 카미노 리얼 킬로이 1973 리처드 3세 리처드 3세 [93] 1975 아르투르 우이의 출세 아르투르 우이 [94] 1977 파블로 험멜의 기본 훈련 파블로 험멜 토니상 남우주연상 수상 1979 리처드 3세 리처드 3세 1981 아메리칸 버팔로 월터 '티치' 콜 1983 아메리칸 버팔로 월터 '티치' 콜 1988 줄리어스 시저 마크 앤소니 1992 차이니스 커피 해리 레빈 1992 살로메 헤로데 안티파스 왕 1996 휴이 에리 스미스 감독 겸 배우 1999 휴이 에리 스미스 감독 겸 배우 2002 아르투르 우이의 출세 아르투르 우이 2003 살로메 헤로데 안티파스 왕 2005 고아들 해롤드 2010-2011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 토니상 남우주연상 후보 2012-2013 글렌게리 글렌 로스 쉘든 '셜리' 르빈 2015-2016 차이나 돌 미키 로스 2017 갓 룩 어웨이 테네시 윌리엄스 8.3. TV[편집]연도 제목 배역 방송사/분류 기타 1968 N.Y.P.D 존 제임스 ABC 드라마 시즌 2 5화만 출연 2003 엔젤스 인 아메리카 로이 콘 HBO 6부작 에미상 남우주연상 수상 2010 유 돈 노우 잭 잭 케보키언 HBO TV 영화 에미상 남우주연상 수상 2013 필 스펙터 필 스펙터 HBO TV 영화 에미상 남우주연상 후보 2018 패터노 조 패터노 HBO TV 영화 2020 헌터스 마이어 오퍼만 아마존 드라마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 후보 9. 관련 문서[편집]
[1] 본인 말에 따르면 태어난 곳은 맨해튼이며 어린 시절 자란 곳은 이스트 할렘, 사우스 브롱스이다[2] 안톤과 올리비아는 이란성 쌍둥이다.[3] 3명의 자녀를 두고 있지만, 결혼 경험은 없다.[4] 젊은 시절 기준으로 80세인 지금은 줄었을 가능성이 크다.[5] 알 파치노를 지금의 자리에 올려준 영화이다. 촬영 당시 나이가 30대 초였는데, 어리숙한 20대 청년 대학생과 30대의 카리스마있는 마피아 패밀리의 보스라는 서로 상극된 두 이미지를 완벽하게 연기해내며 밑에서도 볼 수 있듯 성격 까칠하기로 유명하며 거의 남 칭찬을 하지 않는 선배 배우인 말론 브란도에게 격찬까지 받을 정도다.[6] 원문 : I didn't say much to Pacino when we were making The Godfather(1972) but I not only consider him one of the best actors in America but in the world. The picture just reinforced my opinion. That sounds like a put on? well, I never meant anything more in my life. I don't go around touting other actors, the profession means too much to me.[7] 현재는 원로 배우들이 된, 팔순 근처의 나이가 된 넷은 전부 나이 대비 동안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정확히는 알 파치노의 경우 1970년대~80년대, 잭 니콜슨의 경우 살찐 지금, 그리고 드니로도 거의 늙지 않는 70대 이후, 더스틴 호프만의 경우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한 뒤 커리어 내내 동안이었다.[8] 특히 드니로랑은 같은 이탈리아계+대부에 나옴+히트에 공동 출연함+스콜세지와 친분 있음이라는 공통점으로 인해 자주 엮이는 편이다. 또한 둘도 서로 친한 편이기도 하고. 2019년 들어 알 파치노, 드니로, 스콜세지는 여든 가까이 된 고령의 나이로 아이리시맨을 찍었다.[9] Triple Crown of Acting을 달성한 배우이자 그의 브로드웨이 최신작 차이나돌 공연쯤에 가디언지는 그를 브로드웨이의 대부라 칭했다. 기사 링크[10] 2015년 가디언지 인터뷰 중에서 "My grandparents came from a town in Sicily called Corleone. Fate? Yes, maybe – it’s very strange." 출처[11] 다만 이런 우연은 당시 대부 시리즈를 준비하던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다. 파라마운트 이사들은 대부 시리즈는 이탈리아 문화를 잘 아는 이탈리아계로 팀을 꾸리기를 원했고, 배우들은 그나마 자유로웠으나 감독으로 앉힌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알 파치노를 강력히 주장했다.[12] 절친한 친구 두 명이 마약 남용으로 19살, 30살에 사망한 일화를 보면 어린 시절 얼마나 험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13] 1983년 abc 인터뷰 영상 [14] 2007 AFI 공로상 시상식 08:40~ 영상[15] ABC 굿모닝 아메리카에 출연하여 춤을 좋아하는 점과 연기 생활의 시작이 뮤지컬이었다고 밝혀 대중을 놀래킨 바가 있다. 아쉽게도 찍어놓은 영상은 남아있지 않다고. 영상 [16] 2007 AFI 공로상 시상식 09:25~ 영상[17] 2016년 알 파치노에게 케네디 센터 공로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연설 중에 이 일화를 밝히며 당시 관객들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짐작도 안간다고 농담을 한 적이 있다. 백악관 리셉션 한글자막 영상[18] High School of Performing Arts, 흔히 PA로 불리는 뉴욕의 공립 예술고등학교이다. 1947년에 설립되었다.[19] 2019년 12월 open 매거진 인터뷰 " I went to a performing arts school and I remember that I loved the things that I learned, but I was too young, I was 15 but I might as well have been 10 or 11, I just was behind.", "I had to quit school and go to work because my mother was ill. So I was living in the Village by myself when I was 16, 16 and a half. I was working odd jobs to make money and support myself and my mother." 링크[20] Focus On: 100 Most Popular Tony Award Winners의 2017페이지 출처 [21] 2009년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과의 인터뷰에서 스스로 이 때의 일을 밝혔다 "At 20, I lived in Sicily by selling the only asset I had — my body," "An older woman traded food and housing in return for sex. I woke mornings not really loving myself."[22] 2015년 가디언지 인터뷰. "The lowest point of my life was losing my mother, Rose, and grandfather – they died within a year of each other. I was 22 and the two most influential people in my life had gone, so that sent me into a tailspin."라고 말한 뒤 "I lost the 70s in a way, but then I gave up drinking in 1977 and decided to focus on the work." [23] 리 스트라스버그(Lee Strasberg)는 알 파치노를 비롯해 제임스 딘, 더스틴 호프만, 마릴린 먼로, 제인 폰다, 로버트 드 니로를 가르친 미국 연기사의 전설적인 인물이다.[24] 1983년 abc 인터뷰 한글자막 영상 [25] 2006년 발간된 Al Pacino In Conversation with Lawrence Grobel에서 "The Actors Studio meant so much to me in my life. Lee Strasberg hasn't been given the credit he deserves ... Next to Charlie, it sort of launched me. It really did. That was a remarkable turning point in my life. It was directly responsible for getting me to quit all those jobs and just stay acting."라고 인터뷰했다.[26] 2000년 6월 뉴욕 타임즈 기사 홈페이지 링크 [27] 액터스 스튜디오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홈페이지 링크[28] 참고로 알 파치노는 샘 셰퍼드와 함께 오프-오프-브로드웨이가 배출한 스타 배우로 꼽힌다.[29] 인터뷰에서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각본을 쓸 때, 알 파치노라면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을지 고려해서 서술했다고 밝혔다. 마이클 콜레오네를 떠올리며 알 파치노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고.[30] 이미, 코폴라의 마음 속에는 알 파치노를 마이클 콜레오네로 내정했지만, 제작사의 반대로 어쩔 수 없이 몰래 스크린 테스트에 포함시킨 것이라 한다. 이 스크린 테스트에서 상대역 다이앤 키튼도 알 파치노가 제일 맘에 든다고 했고, 당시 조지 루카스의 아내인 마샤 루카스가 테스트 필름을 편집하던 중 “알 파치노로 하세요, 눈빛으로 옷을 벗기는 재주가 있어요”라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31] 30대 시절 목소리는 맑고 미성이었으나, 40대를 들어서자 허스키하고 걸쭉해졌다. 하지만 알 파치노하면 허스키한 목소리가 떠오를 정도로 상징적이게 되었다.[32] 본 작품에서 윌라드 역할은 마틴 쉰이 맡게 된다.[33] 무려, 3000만 달러로 제작해 그의 100분의 1 수준인 30만 달러를 벌어들인 희대의 망작이다.[34] 후술하겠지만 골든 라즈베리를 수상하거나 비평, 흥행적으로도 졸작이나 다름없는 의로운 살인, 88분, 잭 앤 질, 미스컨턱트에 연달아 출연하면서 영화 커리어 자체가 전성기에 비해 떨어진것은 팩트다. 이는 연기력과는 별개의 문제이며 이것마저 쉴드를 치는것은 극성의 팬질로 밖에 볼 수 없다. 다만 이는 자신을 발굴하고 키워준 마틴 브레그만의 부재가 가장 큰 이유로, 마틴은 알 파치노에게 가장 어울리는 시나리오와 감독을 고르는 선구안이 매우 뛰어난 제작자였다. 실제로 최전성기인 1970년대 알 파치노의 영화들은 모두 마틴 브레그만의 손길이 닿은 영화들이었다. [35] 오죽하면, 로빈 윌리암스도 알 파치노의 AFI 평생 공로상 수상 당시 찬조연설자로 나와 70년대 초반 찍어놓은 작품들만으로도 공로상 수상이 가능했겠다고 반농담식으로 얘기한다.[36] 수상자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할리우드의 브래드 피트[37] 아카데미 역대 최다 노미네이션 배우 순위 링크 [38] 다른 필모들은 차치하더라도 대부2로는 오스카를 받았어야 됐다고 모두가 입을 모은다. 하지만 그 해의 남우주연상은 잭 니콜슨, 더스틴 호프만, 알버트 피니마저 제치고 <해리와 톤토>라는 아주 묻혀진 영화의 <아트 카니>가 수상했다.[39] 스카페이스는 현재는 명작 취급을 받지만 당시는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잔인한 영화라서 논란이 되었는데, 보수적인 면이 있는 아카데미상은 이런 영화를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외국어영화가 아카데미상을 수상한게 기생충이 사상 최초일 정도로 다소 보수적인 면이 있다.[40] 1979년 플레이보이지 인터뷰에서 "Oh, sure. Definitely. That was outrageous. It’s things like that that get you a little sour. I decided to pass the ceremonies by. There were certain people around me who wanted to write a letter, who wanted to announce that I would not accept the nomination. I would always say, “Let it go. Let it go. Don’t make waves.” But then, even though I didn’t go, I watched it on TV. I felt bad. I didn’t care for that kind of contradiction."라고 인터뷰했다.링크[41] 2020년 1월 지미 키멜쇼에 첫 출연하여 이 때 일을 상세히 회고했다.[42] Al Pacino by Lawrence Grobel 45p 링크[43] 다만, 이 80년대에 드 팔마 연출 작 스카페이스에서 알 파치노의 경력 최고의 연기 중 하나로 평가되는 명연을 펼치고도 수상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한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반면, 1984년도 골든글로브에서는 남우주연상으로 노미네이트 되었고 알 파치노 팬들 사이에서는 대부 2부 남우주연상 수상 실패와 더불어 스카페이스 토니 몬타나역으로 노미네이트 실패가 가장 아쉬운 사례로 거론된다. 당시, 아카데미는 보수적 성향이 강해 처음부터 끝까지 자극적인 이 영화를 대놓고 외면했었고 알 파치노도 결국 그 피해를 봤다. 오죽 안타까웠던지, 동료 배우들이 노미네이트 실패 소식을 듣고 간이로 상을 제작해 알 파치노에게 상을 선물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한 일화.[44] 대부 2의 명대사 'You broke my heart!'를 자체 패러디했다.[45] 참고로, 제이미 폭스는 2004년 작 레이와 콜래트럴로 이듬해 2005년 아카데미 각각 주연상과 조연상의 후보로 올랐다. 그리고 레이에서의 호연으로 남우 주연상 수상에 성공했다. 1993년 둘 다 후보에 올랐지만 남우주연상만을 수상한 알 파치노와 같은 케이스.[46] 이외에도, 대부1, 형사 서피코, 용감한 변호사, 글렌게리 글렌로스, 히트, 여인의 향기, 칼리토, 도니 브래스코 등 숱한 영화들 에서도 명연을 보여주었고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47] 잘 언급되지는 않지만, 알 파치노의 70년대 영화 중 73년작 허수아비와 79년작 용감한 변호사에서도 이러한 모습들을 엿볼 수 있다. 허수아비에서는 초반부에서는 삶을 긍정하며 순수한 모습들이 드러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피폐해져가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잘 표현했다. 용감한 변호사에서는 후반으로 갈수록 사법의 부정한 이면에 이골이나 그 부정함을 호소하는 장면들에서 폭발적인 모습이 잘 나타난다.[48] 알 파치노가 연기한 대표적인 캐릭터인 마이클 콜레오네를 연기한 방식만 봐도 작중 초반부에는 큰 눈망울에 순둥한 모습을 연기했다면 버질 솔로초와 맥클러스키 서장을 죽인 이후 목소리톤과 표정 자체가 달라지며 작품 후반부에는 우리가 잘 아는 알 파치노의 연기 스타일이 나온다.[49] 이 장면은 시퀀스 전체가 명장면이니 강력추천. 마치 연극 무대에서 원맨쇼를 펼치는 듯 알 파치노 연기력의 정점을 볼 수 있다. 알 파치노가 연기한 소니의 불안하면서도 강렬한 에너지, 그와 대치하는 경관들 사이의 긴장감이 압권인데 대부분이 대본에 없다보니 실제로 경관들이 황당해하거나 당황하는 리액션을 실감나게 한다. 자주 언급되는 부분은 소니가 "Kiss me. I like to be kissed when I'm being fucked"로 fucked가 엿먹이다와 성관계하다란 의미가 둘 다 있는 걸 이용한 말장난이고, 단연 영화 최고의 명장면은 역대 최고의 영화 대사 중 하나로 꼽히는 "Attica! Attica!!"이다. 뉴욕 주에 위치한 Attica 감옥에서 죄수들이 비인간적 대우에 항의하며 폭동을 일으켰는데, 이때 죄수 33명과 교도관 10명이 사망하며 과잉진압 논란을 불렀다. 즉, 소니는 "우리도 한번 짓밟아보시지!"하며 구경꾼들을 선동한 것. 당연하지만 평상시 인격이 짓밟히던 죄수들과 은행강도를 동일시할 순 없다. 그러나 소니의 카리스마 때문에 구경꾼들이 일제히 소니의 편으로 돌아선다.[50] 실제로, AFI 선정 50대 영웅에서 40위를 차지했다.[51] 실제로, AFI 선정 50대 악당에서 11위를 차지했다.[52] 이 영화는 글렌게리 글렌로스(1992)와 더불어 알 파치노가 보여준 연극식 연기의 정점을 보여준다. 마치 라이브로 그의 연기를 감상하듯, 생생함이 살아있는 영화이며 실제로 대부분의 동선과 대사를 리허설시에 맞췄고 많은 대사들은 즉흥 연기의 산물로 다수가 배우들의 애드립이었다.[53] 이 영화에서 알 파치노의 연기는 2006년 프리미어 매거진에서 선정한 위대한 퍼포먼스 Top 100 중 4위를 차지했다. 참고로 2위는 워터프론트의 말론 브란도, 7위는 미드나잇 카우보이의 더스틴 호프만, 10위가 분노의 주먹의 로버트 드 니로이다.[54] 양성애자같으면서도 동성애자인데, 특히 동성애자 애인에게 범행의 동기를 밝히면서 절절하게 호소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알 파치노 연기 중 백미이다.[55] 용감한 변호사. 1979년 작.[56] 광란자. 1980년 작. 처음에는 이성애자였지만, 형사 알 파치노가 게이 세계에 잠복하면서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또한, 상술하였듯이 뜨거운 오후에서도 동성애자 연기를 보여주었다.[57] 애니 기븐 선데이. 1999년 작[58] 대니 콜린스. 2015년 작.[59] 여인의 향기. 1992년 작.[60] 참고로, 알 파치노는 유명한 셰익스피어 덕후다. 때문에 연극에서도 중세시대극에 많이 출연했다.[61] 해당 작품의 감독 시드니 루멧도 범죄자인데 목숨을 걸 정도로 남을 배려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독특한 인물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또, 알 파치노가 맡은 서니 워칙은 동성애자로, 시드니 루멧은 당시 대부로 슈퍼스타 반열에 올랐던 알 파치노의 선택에 놀랐다고 한다. 스타가 동성애자 연기를 하는 것은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매우 용기있는 선택이었다고 극찬하였다.[62] 마이클은 대부2에서 이러한 마초성이 돋보인다. 극 막판 부인인 케이 아담스가 이혼을 요구하자, 아무리 시대가 지났어도 남녀 관계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발언하며 절대 '허락'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어찌보면 마초이즘에 가까운 발언이다. 토니는 따로 사례를 언급할 필요 없을 정도로 영화 내내 마초성의 극치이다(...)[63] 대표적으로, 마약 거래를 수행하려다 협상이 결렬되어 함정에 빠졌지만 동료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나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동료들에게 마약은 꼭 챙겨놓으라고 일러둔다. 또한, 이 마약을 직접 챙겨 오마르를 거치지 않고 보스에게 직접 전달하여 공적을 챙기는 등 정확한 판단력을 보여줬다. [64] 오히려, 마이클은 정반대로 매우 이성적으로 그려지는데, 대부1에서 그려지는 마이클은 목숨이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와 패밀리를 지켜내기 위해 매우 이성적이고 냉철한 안목을 가지고 행동한다.[65] 굳이 변화라고 한다면, 서서히 마약에 더 심하게 중독되어 가족과 절친과의 관계가 파탄나며 다 떠나보내는 정도.[66] 토니 몬타나는 같은 범죄 장르에서 마이클이 아니라, 오히려 범죄장르가 아닌 드라마 장르의 여인의 향기에서 알 파치노가 연기한 프랭크 슬레이드와 연기 스타일이 비슷하다. 말투나 억양 및 행동같은 디테일은 다르지만 크게 봤을 때 둘 다 막말을 서슴지 않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에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갖춘 인물들이며 알 파치노도 이러한 인물들을 강하고 카리스마넘치게 표현한다. 오히려 파생됐다고 한다면 토니에서 프랭크 슬레이드가 파생됐다고 보는게 맞을 정도. 다만 차이라고 하면, 프랭크는 삶의 희망을 잃어 염세적인 사람이고 토니 몬타나는 야욕으로 불타 희망적이다 못해 위험한 꿈을 꾸는 사람이고 그걸 실현시키기위해 범죄도 마다 않는 인물이다. 그래도 프랭크는 찰리 심스라는 착한 학생을 만나 변화를 겪고 삶의 의지를 되찾으며 긍정적으로 변하기라도 하지, 토니 몬타나는 끝까지 범죄를 일으키는 인간 말종이다(...) 물론, 비슷한 연기 스타일이기는 하지만, 프랭크 슬레이드는 '시각 장애인'이었고 알 파치노 역시도 그를 잘 표현하기 위해 맹인학교에 들어가 연구를 했을 정도니 이 역시도 완전히 똑같은 연기라고는 할 수 없다.[67] 사실, 이는 대부1 촬영 당시 실제 마피아들의 압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촬영장에는 마피아들이 자주 구경을 왔었다고 한다.[68] 다만, 택시 드라이버 속 트래비스는 마약을 건들지는 않았다.[69] 다만, 이 쪽은 대인관계는 좋다. 범죄 경력이 있고 일정한 직장없이 길거리를 배회하며, 결국 가족이라는 뿌리가 흔들리면서 무너지는 인물이기에 부적응자로 보일 뿐. 하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인물이다.[70] 물론, 그럼에도 과도한 팬심은 금물이다. 드 니로는 누구보다도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으며, 그 전성기에서도 표현한 역할들이 매우 다양하다.[71] CNN에서 은퇴한 래리 킹은 2020년 현재까지 여전히 개인 쇼를 진행하고 있는데 알 파치노 성대모사가 가능한 사람이 출연하면 자신이 알 파치노의 절친임을 밝히며 알의 성대모사를 시키곤 한다.[72] 이병헌이 따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호흡 곤란같은 증세가 있느냐.'라고 물어보며 공황장애증상이 있음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그래서 시상자로 아카데미 시상식에 서기 전 이병헌이 조언을 구했는데 "촬영할 때는 긴장을 안하지 않나, 나 자신이 아닌 새로운 캐릭터를 입혀서 시상식에 올라가봐라."라고 조언을 해줬다고 한다.[73] 최근작이자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라면 베니스의 상인에서의 샤일록.[74] 재밌는 점은 알 파치노는 이 작품에서 위노나 라이더를 주연 중 하나로 앤으로 기용했는데 2002년 시몬에서 극초반에 작중 유명 여배우로 나오는 위노나 라이더에게 퇴짜 맞는 감독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당시 위노나 라이더는 2001년 절도 사건으로 영화에 제대로 나오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75] 목소리가 굉장히 많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고함을 지를 때 나오는 특유의 밀도 높은 목소리는 초창기와 말년이 거의 비슷하다. 그가 얼마나 발성과 기본기가 좋은지 보여주는 부분.[76] 대부 1은 아무리 일러도 1970년 이후에 촬영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코폴라 감독 특유의 오랜 촬영기간 때문에 그 이전이라는 이야기도 많지만. 정확히는 1971년 3월에 대부는 첫 촬영을 했고, 첫 촬영 신은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마이클과 케이가 선물을 사는 신이었다.[77] 알 파치노가 거절하자 잭 니콜슨, 빌 머레이 등도 고려되었다. 스타워즈 감독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 이전까지 별 다른 히트작도 없어 유명한 감독이 아니었는데, 절친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덕에 알 파치노와 연이 닿았다. 이외의 인연은, 1970년 대부 스크린 테스트의 필름을 편집하던 중 조지 루카스의 아내였던 마샤 루카스가 "알 파치노로 하세요, 눈빛으로 옷을 벗기는 재주가 있어요"라고 말했었고 알 파치노의 대부 출연에 힘이 되주었다.[78] 이 대신 출연한 영화가 거장 시드니 루멧의 인물 영화 <형사 서피코>이다. 그래도 이 영화로 이듬해 1974년 골든 글로브 남우 주연상을 수상했고 이 영화는 시드니 루멧 감독의 70년대 걸작선에 항상 거론될 정도로 작품성있는 영화기에 알 파치노 입장에서는 마냥 아쉽다고만 볼 수는 없는 결정이었다.[79] 재밌는 점은 이듬해 1980년, 알 파치노가 거절한 이 영화로 더스틴 호프만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알 파치노도 용감한 변호사에서의 연기로 '동시에 함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경쟁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더스틴 호프만이 수상하며 알 파치노는 또다시 수상 실패라는 패배의 쓴맛을 맛봐야했다.[80] 스필버그 역시도 조지 루카스와 더불어 대부의 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와 절친이며, 이 덕에 인연이 닿은 것으로 사료된다. 실제 알 파치노도 대부를 찍기 전인 1969년 부터 이들을 알았다고 인터뷰 한적도 있다.[81] 특히, 흥행면에서는 완전 망작인데 바비 디어필드는 640만 달러로 제작해 겨우 93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실제 영화의 손익분기점의 경우, 제작비 및 마케팅비를 합한 비용의 약 2~2.5배 정도가 실제 손익분기점이기에 따지고 보면 손익 분기도 못 넘긴 작품이다. 또한, 알 파치노가 출연한 1970년대 영화중 가장 낮은 수치다. 하지만 그 상대인, 미지와의 조우는 전세계 박스오피스에서 3억 3백만달러를 벌어들인 초대박작이었다... 다만, 이 영화로 알 파치노 본인은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되었으니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82]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알 파치노가 출연한 영화 중 최악의 흥행 망작은 아니다. 그 누구도 혁명(1985)을 이기지는 못한다. 혁명은 3천만 달러의 제작비로 그의 100분의 1수준인 30만 달러 가량을 벌어들인 그야말로 희대의 개망작으로, 할리우드 역사상 최악의 흥행 망작이었으며 그야말로 혁명에 비견될 충격적인 기록이다.[83] 본작에서는 마틴 쉰이 이 역할로 분했다.[84] 알 파치노가 거절한 후, 트래비스 역에 잭 니콜슨, 더스틴 호프만, 제프 브리지스, 존 보이트 등도 후보로 물망에 올랐다.[85] 단적인 예로, 알 파치노가 주연을 맡은 1977년 작 <바비 디필드>와 1982년 작 <브로드웨이에 막이 오를 때>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두 작품에서 알 파치노는 호연을 보여주며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되었으나, 작품은 비평과 흥행면에서 둘 다 모두 망했다. 원인은 연출력 부재. 안좋은 플롯과 시나리오도 한몫했겠지만, 기본적으로 영화의 중심을 잡아주고 목적지까지 추동하게 해주는 좋은 감독이 없다면 영화는 산으로 갈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두 영화.[86] 미 나탈리는 단역이기 때문에 백색 공포가 필모상 첫번째 영화로 알려져있다. 알 파치노 본인도 대부를 두번째 영화로 꼽으며 이 작품을 첫 작품으로 꼽는다.[87] 알 파치노랑 나스타샤 킨스키 주연으로 불의 전차로 유명한 휴 허드슨이 감독하고 당시 거액인 3천만 달러를 들여 만들어서 미국에서 겨우 35만 8천달러를 벌어들이며 전설적으로 망한 영화로서 혁명을 일으켰다는 비아냥까지 듣었으며 또한 다음 미국 독립 혁명을 다룰 영화는 이 영화가 너무나도 망해서 2776년 1000주년을 기념해서 나올 것이다라는 비아냥적인 평까지 듣었다.[88] 원제목은 '사랑의 바다'인데 한국에선 이 제목이 하두 쓰인 제목이라 사랑의 파도로 개봉했다. 파치노 연기일생 전성기의 에너지 넘치는, 불타는 듯한 연기스타일과 대비되는 비교적 정적인 (그러나 폭발할때는 폭발하는) 후반기의 연기스타일이 확립된 첫 작품으로 보통 여인의 향기를 꼽지만 사실 이 작품에서 먼저 나왔다. 과도기적인 작품이라 젊은 시절 파치노 특유의 에너지도 어느 정도 남아있긴 하다. 평은 괜찮았지만 크게 흥행하진 못했는데 파치노 본인으로선 나름 의미가 있는 작품인것이, 80년대 초중반 찍은 영화들 중 스카페이스를 빼곤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하고 연극판에서 주로 활동 중이다 돌아와 찍은 첫 작품이기 때문이다.[89] 극작가 데이빗 마멧의 연극 각본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로 조연상 후보이긴 하지만, 부동산 중개업체 내 5명의 직원을 소재로 하는 내용으로 사실상 주연으로 봐도 무방하다. 다른 출연배우는 잭 레먼, 케빈 스페이시, 에드 해리스, 알란 아킨, 조나단 프라이스, 알렉 볼드윈 등으로 어마어마한 이름값들을 가진 배우들이다. 여인의 향기로 주연상을 받긴 했지만, 글렌게리 글렌 로즈의 로마 역을 더 높게 치는 경우도 있다. 알 파치노의 깐족거리는 연기가 일품이다. 이에 덧붙여, 영화 막판부 본인의 영업에 훼방을 놓은 케빈 스페이시에게 알 파치노가 욕설을 섞어가며 꾸짖는 장면은 지금도 알 파치노 팬들 사이에서 종종 회자되는 명장면이다.[90] 다만 이는 주목도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여인의 향기에서는 원맨쇼에 가까울 정도로 알 파치노 혼자서 영화를 이끌어 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으나, 글렌게리 글렌 로스에서는 잭 레먼과 알렉 볼드윈의 연기가 매우 훌륭했던 탓도 있다. 이 때문에 아무래도 주목도 측면에서 원맨쇼를 펼친 여인의 향기에서 보다는 수상에 있어 손해 아닌 손해를 볼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알렉 볼드윈이 세일즈맨들에게 호통에 가까운 일장 연설 하는 장면과 잭 레먼이 케빈 스페이시와 설전을 벌이며 비굴한 모습과 화난 모습을 경계 없이 드나들며 세일즈맨의 애환을 표현하여 세일즈 맨 그 자체로 잘 담아낸 모습은 아직까지도 인구에 회자될 정도의 퍼포먼스였다.[91] 참고로 알 파치노는 2012년 리바이벌한 연극에서는 셜리 르빈(92년 영화에선 잭 레먼이 연기) 역을 연기했다. 참고로 연극 내 로마 역할은 바비 카나베일이 연기. [92] 뉴욕 브로드웨이가 아닌 보스턴의 Charles Playhouse에서 공연했다. 소규모 카페 공연을 연출한 경험은 많았던 알 파치노이지만 정식으로 극장에서 연출을 맡은 건 이때가 처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