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 마릴린 먼로 나무위키 - aendi wohol malillin meonlo namuwiki

대부 촬영 당시 알 파치노에게 말을 아꼈지만, 나는 그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 배우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이런 내 생각을 똑똑히 증명했다. 허풍처럼 들리는가? 글쎄, 나는 살면서 절대로 과장을 해본 적이 없다. 난 내 본업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어디 가서 다른 배우들 찬사를 쉽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6]


― 말론 브란도 (대부1 개봉 직후)출처


미국의 배우.

2. 상세[편집]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명배우 중 한 명으로서 대부 시리즈, 스카페이스, 여인의 향기, 칼리토, 히트, 형사 서피코, 뜨거운 오후, 허수아비, 인섬니아, 인사이더, 아이리시맨 등을 비롯한 무수히 많은 명작들을 남겼으며 특히 할리우드 갱스터, 느와르 장르의 상징적인 인물로 유명하다.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배우라는 평을 받으며, 연기파 배우의 끝판왕 중 한 명이다. 비슷한 나이대의 배우들 중 잭 니콜슨, 더스틴 호프만, 로버트 드 니로[7][8]와 함께 연기 본좌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또한 할리우드(영화계)와 브로드웨이(연극계) 양쪽에서 모두 최정상급의 성공을 거둔 보기 드문 커리어를 지닌 전설적인 대배우이기도 하다.[9]

3. 생애[편집]

3.1. 어린 시절[편집]

뉴욕의 맨해튼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님이 이탈리아 시칠리아 이민자 출신이다. 아버지 살바토레 파치노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산 프라텔로에서 캘리포니아 주의 코비나로 이민을 와서 보험 판매원으로 일하고 레스토랑을 운영했다. 외할아버지 제임스 제랄디와 외할머니 케이트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콜레오네 출신이다.

이런 이유로 알 파치노가 <대부>에서 시칠리아 후손인 마이클 콜레오네를 연기했던 것이 운명적이라고 보는 의견이 많다. 실제로 코폴라 감독이 제작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명의 연극배우였던 그를 끝까지 고집했던 것에는 알 파치노의 연기력 뿐만 아니라도 이런 배경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 파치노 본인도 관련 질문에 대해 "운명이냐고요? 네, 그럴지도요. 정말 신기한 일이죠."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10][11]

뉴욕의 이스트 할렘에서 몇 년을 살다가 만 2세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어머니, 외조부모와 함께 뉴욕의 브롱크스로 이사했고 이곳에서 대부분의 어린시절을 보냈다. 홀어머니 밑에서 외동아들로 자라면서 과보호를 받기도 했는데 어린 알 파치노는 외로운 소년이었다고 한다. 10대 시절에는 뉴욕의 뒷골목에서 아주 터프한 성장기를 보낸 것으로 유명한데, 9살에 음주와 담배를 처음 배웠고 13살에 마리화나를 경험했지만 남용한 적은 없다고 한다.[12] 싸움꾼 기질이 있어서 자주 전학을 다니며 문제아 취급을 받기도 했다. 항상 생사가 오가는 뉴욕 뒷골목의 거친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그 시절엔 그것도 모른 채 행복하고 자유로웠다고.

어머니 로즈는 퇴근 후에 외동아들을 데리고 영화를 보러 다니곤 했는데, 집에 돌아온 어린 알은 자신이 본 모든 연기를 그대로 재연해낼 수 있었고 연기 재능을 발견한다.[13]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이미 배우를 꿈꿨고 배우가 아니면 야구선수가 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엔 가족과 친구들에게 '써니(Sonny)'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배우(The Actor)'라는 별명도 있었다. '써니'라는 별명은 <알 졸슨(Al Jolson)>의 '써니 보이(Sonny Boy)'라는 노래때문에 붙여진 별명인데 약 3살 6개월의 어린 알 파치노는 지붕 위에 올라가서 이 노래를 부르곤 했다. 이웃들은 웃으며 그 광경을 지켜봤는데, 당시 진지했던 어린 알은 이웃들이 즐거워 보이긴했지만 대체 왜 웃는건지 궁금해 했다고 한다.[14]

3.2. 학창 시절[편집]

허만 리더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영어를 제외한 모든 수업을 낙제할 정도로 공부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바로 이 시기에 뮤지컬과 연극으로 나름 공식적인 연기를 시작했다.[15] 12살 무렵에 굉장히 운명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데 연극이 끝나고 어떤 남자가 다가와 "너는 차기 말론 브란도가 될거야."라는 찬사를 보냈고 그때만 해도 브란도를 몰랐던 어린 알 파치노는 "말론 브란도가 누군데요?"라고 대답했다고.[16] 13살 때는 연극 무대에서 연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토하는 연기를 하며 실제로 무대 위에 토해버리기도 했다.[17]

중학교를 졸업하고 오디션을 통해 페임의 주무대로 유명한 뉴욕 예술고등학교[18]에 합격하지만 역시 잘 적응하지 못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연기를 정말 배우고 싶었지만 당시 너무 어렸었고, 15살이었지만 마치 10살,11살 정도로 뒤쳐진 것만 같았다고. 알 파치노는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지자 약 17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취업을 결심하게 된다.[19][20] 그리고 아들의 결정을 반대했던 어머니와 의견 충돌을 빚게 되자 싸움 끝에 결국 가출을 한다. 뉴욕 중심부로 이동한 알은 어머니를 부양할 돈과 연기 공부를 위한 학비를 모으기 위해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자전거 심부름꾼을 할 때에는 하루에 11시간이나 자전거를 타기도 했고 이때 맨하탄의 지리를 배웠다고. 버스 보이, 문지기, 우체국 직원 등 정말로 안 해본 일이 없었는데 코멘터리 잡지사의 우편물실에서도 일한 적이 있다고 한다.

10대 끝자락에 유명 연기학교인 <액터스 스튜디오>에 지원하였지만 고배를 마신 뒤 이탈리아로 향하게 된다. 알 파치노는 이 시절에 대해 스스로 고백하길 "20살 때, 시칠리아에 살던 시절에 저는 제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걸 팔며 생계를 유지했어요. 제 유일한 자산은 바로 몸이었죠." 당시 이태리어도 할 줄 몰랐던 젊은 알은 집과 음식을 제공해줬던 나이든 여인에게 그 대가로 잠자리를 제공했었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 자신이 정말 싫었어요."[21]

미국 뉴욕으로 다시 돌아온 알 파치노는 결국 유명 연기학교였던 <HB 스튜디오>에 합격하고 첫 연기 스승인 <찰리 로튼>을 만나게 된다. 후일에 찰리 로튼은 알 파치노의 인생 멘토이자 최고의 친구가 되는 인물. 이 시기에 알은 종종 실직 상태이거나 집을 구하지 못해 노숙자 신세가 되곤 했는데, 길바닥이나 극장 또는 친구의 집 등지에서 불편하게 잠을 청하곤 했다.

그러던 1962년, 어머니 로즈가 4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연이어 외할아버지 마저 사망하면서 22세의 알 파치노는 인생의 격변기를 맞이하게 된다. 노년의 알 파치노는 이 시기를 회상하길 "어머니 로즈와 할아버지가 한 해에 같이 돌아가셨던 일은 제 인생에서 가장 밑바닥이던 시기였어요. 고작 22살이었던 저는 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사람을 떠나보내야만 했죠. 그 일은 저를 나락에 빠지게 했어요."라고 인터뷰했다.[22]

<HB 스튜디오>에서 4년을 공부하고 졸업한 알 파치노는 오디션을 성공적으로 치뤄 10대 때 한 번 고배를 마셨던 <액터스 스튜디오>에 입학하게 된다. 전설적인 연기 스승인 <리 스트라스버그>[23]를 만나 사사하고 인연을 시작하게 된 것도 바로 이곳. 스트라스버그는 후에 알 파치노를 따라 <대부 2>와 <용감한 변호사>에 출연하기도 했다.

<액터스 스튜디오>에 다니던 이 시기에는 길거리의 극단이나 카페에서 스탠드업 코미디 쇼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스스로 극본을 짜고 배우를 캐스팅하고 광대로서 쇼를 펼치며 가게 앞에서 직접 호객 행위를 하기도 했다고. 당시 알은 (어머니와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우울감에 시달리고 정말로 불행했는데 오로지 코미디 연기만을 하면서 "삶의 구원을 받은 것 같았다"고 이 시기를 회상하며 "뭐든 웃기는 건 좋은 치료법이었어요. 효과가 있었죠. 저는 항상 웃긴 사람들에게 매료되고 그들의 주변에 있길 좋아했어요."라고 말했다.[24]

알 파치노는 "제 인생에서 <액터스 스튜디오>는 정말로 큰 의미를 지닌다"며 "엄청난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고 수차례 언급한 적이 있다. <리 스트라스버그>의 가르침 아래 연기 커리어를 지탱하게 될 메소드 연기법을 습득하고 "모든 부업을 그만두고 연기만 해야겠다고 직접적으로 결심하게 된 시기"였다.[25]

2000년 [26] 모교 <액터스 스튜디오>의 공통 대표직을 맡게 된 알 파치노는 2021년 현재까지 대표직을 유지하고 있다.[27]

3.3. 연기 활동[편집]

연극 배우로 시작한 알 파치노는 승승장구하며 점차 떠오르기 시작했다. [28] 호로비츠의 극들을 성공적으로 연기해낸 그는 평생의 동업자가 될 매니저 마틴 브레그만에게 발굴되고, 1969년에 영화 배우가 되었다. 2년 뒤인 1971년 제리 샤츠버그 감독의 백색공포로 첫 주연으로 데뷔, '마약 중독자'를 잘 연기하며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1971년 제리 샤츠버그 감독의 백색공포로 처음 주연으로 등장하는데, 당시 대부를 준비하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이 영화를 보고 정확히는, 1968년 알 파치노가 출연한 '호랑이는 넥타이를 매는가?'의 연극을 보고 그의 연기력에 반해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그와 함께 영화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밝혀졌다. 이후, 인간적으로 알 파치노를 더 알아가기 위해 1969년에 둘은 함께 샌프란시스코를 여행하였고 상당히 친해진 결과 함께 영화를 찍자고 약속했다 한다. 알 파치노를 생각하며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대부 각본 제작에도 참여한다.[29] 이후, 1970년에 알 파치노를 비공개로 스크린 테스트[30]에 참여시켜 그를 공식적으로 마이클 콜레오네역에 캐스팅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제작사의 반대에 부딪히자 1971년 7월에 개봉한 백색공포에서의 알 파치노의 연기를 파라마운트 제작사에 보여주며 설득하였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강단있게 그를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오히려, 대부1의 첫 촬영일은 그보다도 앞선 1971년 3월 23일로, 해당 촬영은 알 파치노가 분한 마이클과 다이앤 키튼이 분한 케이가 함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는 장면이었다. 즉, 개봉일 보다도 더 전에 알 파치노의 대부 캐스팅이 확정됐기에, 1971년 7월에 개봉한 백색공포를 대부 감독인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보고 캐스팅했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사실관계에 맞지않다. 단지, 촬영이 들어가고도 지속해서 반대하는 제작사 설득에 쓰였을 뿐 백색공포가 알 파치노의 대부 캐스팅에 도움이 된 영화는 아니다. 여하튼 제작사와 다른 배우들의 온갖 반대 속에서도 강행한 촬영 속에서 알 파치노는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극심한 불안에 시달렸으나 그 유명한 식당 암살씬을 찍고나서야 모두의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대성공. 이후 당시의 일을 회상하길 "대포에서 막 쏘아진 대포알" 같았다고.

이후 1년뒤 1973년 개봉한 거장 시드니 루멧감독의 작품 <형사 서피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처음으로 노미네이트 되었고, 2년전 백색공포 작품으로 인연을 맺은 제리 샤츠버그와 재결합하여 만든 작품 허수아비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1974년에는 대부 2, 1975년에는 뜨거운 오후를 통해 1970년대 명실상부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최고의 위치에 오른 알 파치노는 극심한 권태감에 시달린다. 정작 본인이 그 시기를 회상하기엔 항상 우울함과 술에 취해 있어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1983년 스카페이스로 다시 명성을 되찾고 술을 끊기 전까지 알콜 중독은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 외모와 목소리[31]를 본격적으로 망가뜨리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

이후 자전적 이야기로 보여지는 1977년 작 바비 디어필드로 골든글로브 남우 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고 2년 뒤인 1979년 작 용감한 변호사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다시 노미네이트 되었다. 다만, 이 1979년에 놓친 명작들이 제법 많다. 우선,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서 더스틴 호프만보다도 먼저 주연역을 제의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또한, 1979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 윌라드 역할[32] 제의를 거절한 채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로 활동지를 옮긴 후 당시 세간을 충격에 빠트렸던 파블로 험멜의 기본훈련을 통해 토니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시대가 바뀌고 1980년 윌리엄 프리드킨과 함께한 광란자에서 게이 살인자를 쫓다가 자신이 게이가 되어버리는 형사 역할로 비평계를 충격에 빠트렸으며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에 다시 노미네이트 되었다. 람보를 거절하고 찍은 1982년 작 <브로드웨이의 막이 오를때>는 비평과 흥행 모두 실패했지만, 실패를 딛고 바로 1년만에 알 파치노의 80년대 연기를 상징하는, 역대급의 캐릭터를 창조해낸다. 1년 뒤 1983년 브라이언 드 팔마, 올리버 스톤 등과 합작하여 그의 1980년대를 규정짓는 작품이자 대표작 중 하나인 스카페이스에 출연해 명연을 펼치며 토니 몬타나라는 캐릭터를 컬트 아이콘의 지위에 올려 놓았다. 이 영화는 당대에 괜찮게 흥행한 여러 작품들 중 하나였지만 이 후에 힙합 문화를 비롯한 수많은 서브컬쳐들을 형성시키거나 성장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작품으로서 걸작의 위치에 오르게 된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특히, 토니 몬타나는 범죄 영화계의 상징같은 캐릭터로 자리잡았으며 알 파치노는 특유의 인물 묘사와 창조력을 발휘해, 인물에 독보적인 개성과 존재감을 불어넣었다. 이 덕에, 시간이 지난 현재까지도 토니 몬타나는 마치 실존 인물인양 사람들에게 묘사되는 경지에 올랐다.

허나, 1985년 작품 '혁명(Revolution)'의 대실패[33]로 헐리우드를 다시금 떠난 그는 줄리어스 시저와 같은 작품에서 지금도 회자되는 명연으로 브로드웨이의 명배우의 위치를 공고히 함과 동시에 본인이 직접 제작한 The local stigmatic으로 The Museum of Modern Art에 개봉하는 등 알게 모르게 영화계와도 간접적인 인연을 이어갔다.

이후, 1989년 작품 '사랑의 파도'로 영화계에 돌아오며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에 다시 노미네이트되고 1990년 대부 3편으로 주류 할리우드에 다시 진입했으며 출연한 작품들은 흥행에도 성공했다. 1991년에는 프랭키와 자니에서 미셸 파이퍼와 8년만에 만나 로맨스 영화를 찍으며 멜로 연기도 선보였다. 1992년에는 케빈 스페이시, 잭 레먼으로 대표되는 명배우들과의 협연으로 글렌 게리 글렌 로스를 완성시켰으며 이후 이듬해 1993년에는 여인의 향기의 프랭크 슬레이드 역으로 마침내 숙원이었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칼리토, 딕 트레이시, 도니 브래스코로 스카페이스에서 시작된 거친 갱스터로서의 독창적인 캐릭터를 영화속에서 발전시켰고 투 비츠, 애니 기븐 선데이, 히트, 인사이더 등에서 호연을 펼치며 90년대에 제 2의 전성기를 맞았다.

2000년대 이후 작품은 전성기에 비해 비교적 소규모 작품이 주를 이루는데 자신의 감독하에 만들어진 차이니즈 커피, 살로메(2013)가 대표적이다. 다만 전성기에 비해서 영화 작품 선구안이 비교적 안 좋아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34]

하지만, 2000년대 알 파치노가 출연한 작품 중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2002년 작 인섬니아만큼은 예외로 평단에게 호평받고 흥행에도 성공했다. 또한, 베니스의 상인(2004)은 그의 전성기를 연상시키며 Angels In America(2003)은 그가 연극배우로써의 내공의 결실이라 해도 좋은 시대의 명연기라 불릴만하다. 이 연기로 그는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영화, 뮤지컬, TV 드라마의 연기 삼관왕(Triple Crown of Acting)의 일원으로 올라섰다. 전성기 시절의 활약에 비교하면 기세가 약해지긴 했으나 80대를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배우 스스로의 역량과 연기력은 여전히 걸출하며, 이미 젊은 시절에 이루어 놓은 출연, 수상들만으로도 전설의 반열에 오른 연기 거장이다.[35]

2010년대에 들어서 유 돈 노우 잭으로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다시 한번 수상하고 크리스토퍼 워컨과 스탠드 업 가이즈로 협연했으며 배리 레빈슨과 더 험블링으로 재회하고 대니 콜린스로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에 다시 한번 노미네이트 되었다.2019년에는 아이리시맨에서 로버트 드 니로,조 페시와 함께 출연하여 명연기를 보여주었고 제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36]

3.4. 아카데미 시상식 7전 8기[편집]

아카데미 최다 노미네이트 순위 : 남배우

순위

이름

노미

수상

1위

잭 니콜슨

12

3

2위

로런스 올리비에

10

1

공동 3위

스펜서 트레이시

9

2

덴젤 워싱턴

9

2

폴 뉴먼

9

1

알 파치노

9

1

공동 7위

말론 브란도

8

2

잭 레먼

8

2

피터 오툴

8

0

미국 3대 시상식인 <아카데미상>, <에미상>, <토니상>을 모두 받아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알 파치노는 아카데미 시상식과 지독한 악연이었다. 아이리시맨으로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것을 포함하여 남우주연상 5번, 남우조연상 4번, 총 9번의 후보 지명을 받았고 역대 최다 노미 순위 3위에 올라 있지만 수상은 한 번에 그쳤다.[37] 심지어 역대급 연기로 꼽히는 <대부 1> 시리즈로도 수상을 실패했는데, 대부 2로 1975년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놓친 것은 아직도 이해가지 않는 일로 평가 받는다.[38] 또 하나의 대표작인 <스카페이스>로는 골든글로브 후보에만 올랐고 아카데미에는 노미네이트조차 되지 못했다.[39]

  • 1973년 제 4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알 파치노는 <대부 1>로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며 처음으로 아카데미에 노미됐다. 아카데미 이전에 개최된 제7회 전문가 비평가 협회상에서는 남우주연상으로 수상, 제30회 글든글로브 시상식에서도 남우주연상으로 노미네이트 되며 남우조연상으로 노미네이트 시킨 아카데미의 후보 선정에 논란이 있었다. 실제로 영화 상에서도,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말론 브란도보다 더 많은 출연 시간을 가진 주인공이었음에도 대부의 조연 배우들인 로버트 듀발, 제임스 칸과 함께 아카데미 시상식의 남우조연상 부문으로 배정되었다.

  • <대부1>에서 잘못된 부문의 후보에 오른 것 같냐는 질문에 1979년의 젊은 알 파치노는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오, 물론이죠. 확실히 그랬어요. 터무니없는 일이었죠. 속이 쓰린 일이었어요." 당시 연극 무대에 서고 있었던 알은 시상식 불참을 결정했다. 당해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말론 브란도는 헐리우드가 인디언 차별을 한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하며 불참했고 때문에 대부의 주연 두명이 불참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알 파치노는 주변으로부터 아카데미에 노미 거부 편지를 쓰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는데 "그냥 둬. 그냥 둬. 분란 일으킬 거 없어(Let it go. Let it go. Don’t make waves.)"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비록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TV로 지켜보았던 알은 불참했다는 사실이 불편해져서 조연 후보로 올라간 모순점은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고.[40]

앤디 워홀 마릴린 먼로 나무위키 - aendi wohol malillin meonlo namuwiki

앤디 워홀 마릴린 먼로 나무위키 - aendi wohol malillin meonlo namuwiki

1974년 제 46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들

  • 1974년 제 4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형사 서피코>로 남우주연상에 노미되며 처음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했다. <대부>를 함께 찍은 다이앤 키튼과 같이 참석했던 알은 약간 취한 상태였다고. 게다가 스타일리스트가 머리를 이상하게 만져 "마치 제 머리 위에 새둥지가 자란 것 같았어요."라며 엉망이었던 본인 헤어스타일을 스스로 혹평하기도 했다. 첫참석에 너무 긴장이 됐기 때문에 긴장되면 나오는 평소 습관처럼 일부러 차가운 표정을 짓고 앉아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고 알 파치노는 옆자리 제프 브리지스에게 "남우주연상은 시상하지 않을건가 봐요."라고 물어봤는데 그 때 제프 브리지스가 지었던 이상한 표정을 50년이 다 된 지금까지 잊지 못한다고 최근 밝힌 적이 있다.[41] "이거 3시간 짜리예요."라는 대답을 듣는 순간 젊은 알은 나머지 2시간은 뭘해야할지 억장이 무너졌고 남우주연상 차례가 다가오자 "제발 나는 아니어라, 제발."하고 빌었으며 마침내 잭 레먼이 호명되자 자신이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정말 행복했다고 한다.[42]

  • 이후 <대부 2>, <뜨거운 오후> ,<용감한 변호사>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을 때는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참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에 앞으로는 참석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며, 그동안 시상식을 즐기지 못해서 기피했지만 마침내 그 순간을 즐기고 이해하게 되었다고 1979년 인터뷰를 통해 고백했다. 80년대에는 연극 무대에 집중하면서 후보에 오르지 못하다가[43] <딕 트레이시>로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을 때 두 번째로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했다.

  • 1992년작인 <여인의 향기>에서야 주연상을 수상했다. 이 때문에 수상소감 첫 마디를 "제 연패를 끊어주셨네요!(You broke my streak!)"[44]라고 하며 재치있는 농담을 했다. 수상 당시 객석에 있던 모든 영화 관계자들이 알 파치노가 상을 받고 단상 앞에 서자 한참 동안 기립 박수를 보냈다.
    아카데미 수상 당시 영상
    수상 소감이 들어있는 7전8기 영상

  • 아카데미와 악연이 깊은 것과는 별개로, 후보 자체에는 많이 이름이 올랐었기에 다양한 기록들을 보유하고 있다. 같은 해 아카데미 조연상과 주연상 후보에 오른 역사상 12명의 배우 중 한 명이다. 알 파치노는 199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인의 향기의 프랭크 슬레이드 역으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고, <글렌게리 글렌로스>에서 리키 로마 역으로 남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남자로 한정하면, 역사상 단 세명만이 이 기록을 달성했는데, 다른 두 명은 베리 피츠제럴드와 제이미 폭스[45]이다.

  • 이외에도, 역사상 4년 연속 오스카상 후보에 오른 5명 중 한명이다. 다른 네 명은, 엘리자베스 테일러(1958-1961년 아카데미), 말론 브란도(1952-1955), 제니퍼 존스(1944-1947), 델마 리터(1951-1954)이다. 알 파치노는 대부 1로 1973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라, 뜨거운 오후로 1976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까지 4년간 연속으로 후보에 오르는 진기록을 썼다. 다만, 이 중에서 알 파치노는 델마 리터와 더불어 4년 연속 후보에 오르고도 모두 수상에 실패한 케이스다. 반면,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말론 브란도는 각각 1961년과 1955년, 4년 중 4번 째 후보에 오른 마지막해 수상에 성공하며 세 번의 잔혹사를 끝냈고 제니퍼 존스는 첫 해인 1944년에 수상에 성공하였다.

  • 특히, 이 네번의 수상 실패에서 세번 째인 1975년 아카데미 대부 2부 마이클 콜레오네 역으로 후보에 오르고도 수상에 실패한건 아카데미의 큰 실수 중 하나로 거론되는 해이다. 1975년도 수상 후보를 보면 잭 니콜슨에 더스틴 호프만에 영국의 명배우 알버트 피니에 이름 값들이 그야말로 쟁쟁한 해인데, 정작 수상은 <해리와 톤토>라는 영화의 아트 카니가 수상했다. 당해년도는 평론가들 사이에서 대부 2의 알 파치노와 차이나 타운의 잭 니콜슨의 사실상의 2파전이라고 평가받던 해였다. 물론, 레니의 더스틴 호프만과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의 알버트 피니 연기도 훌륭했지만 그들 각자의 경력에서 연기 퍼포먼스 최고작으로 평가받는, 각각 미드나잇 카우보이에서의 연기나 볼케이노 에서의 연기보다는 못 했다는 것이 시간이 지난 현재에도 중론이다. 반면 대부 2의 알 파치노와 차이나 타운의 잭 니콜슨의 연기는 그들 경력에서도 최고의 퍼포먼스로 첫손에 꼽히는 작품들이고 때문에 더 최고의 모습을 보여준 둘에게 기대가 쏠렸다. 그래서, 알 파치노의 연기 경력에서 희대의 명연으로 평가 받는 대부 2의 마이클 콜레오네 연기로 아카데미상을 수상 실패한 것은 알 파치노 개인으로서 가장 아쉬웠던 수상 실패로 손꼽힌다. 보통 평론가들 사이에서 알 파치노의 최고 명연을 꼽으면, 대부 2나 뜨거운 오후, 스카페이스의 연기가 TOP3로 손꼽힌다.[46] 이 중에서도 대부 2를 알 파치노의 인생 연기로 보는 평론가가 대다수이고 당시 분위기도 잭 니콜슨 보다 대부1, 형사 서피코로 2년 연속 수상에 실패한 알 파치노의 손을 들어줄 것이란 예상이 가득했다. 하지만, 수상은 아트 카니가 하면서 차라리 당해년도 노미네이트에 실패되었던 컨버세이션의 진 핵크만을 대신 올려서라도 수상시켜줬어야 되지 않냐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 또한, 2022년 현재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8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대부 1(1972), 대부 2(1974), 뜨거운 오후(1975), 대부 3(1990), 여인의 향기(1992), 인사이더(1999), 아이리시맨(2019),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 그 중 대부(1972)와 대부 2부(1974)가 이 부문 수상작이다.

  • 최고의 연기파 슈퍼스타였던 만큼, 명감독들이 많이 찾았고 그만큼 감독 복이 많았다.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9명의 감독과 함께 작업 했고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코세이지, 올리버 스톤, 시드니 폴락, 윌리엄 프리드킨, 워렌 비티, 스티븐 소더버그, 배리 레빈슨, 마이클 니콜스. 이외에도, 아카데미 감독상만 수상 못했을 뿐이지 할리우드 역사상 전설적인 최고의 감독 중 하나로 평가받는 시드니 루멧이나, 거장 리들리 스콧, 위대한 뉴욕파 영화 감독 브라이언 드 팔마, 미국의 명감독 마이클 만, 현역 할리우드 감독 중 최고 반열에 오른 크리스토퍼 놀란, 쿠엔틴 타란티노 등 함께한 감독들 이름만 나열해도 어마어마한 이름값을 자랑한다.

4. 연기 스타일[편집]

지금의 마초적 이미지와는 달리, 알 파치노는 본래 길거리 스탠드업 코미디로 연기를 시작했다. 온갖 농담과 과장된 익살로 사람들을 웃기던 그에게 이 시절은 매우 배고팠지만 그 어떤 시기보다도 행복했다고 술회한다. 이 후 메소드 액팅을 철저하게 훈련하며 자신의 에너지를 극대화하는 연기법을 터득하고, 본격적으로 전업 배우 생활을 시작한다. 초창기엔 폭발적이면서도 절망과 불안을 탁월하게 표현해내는 것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실제로 1970년대의 전설로 회자되는 알 파치노의 연기들은 모두 타고난 신체적 조건(커다란 눈망울, 예쁘장한 이목구비, 왜소한 신체, 쩌렁쩌렁한 목소리 등)을 탁월하게 이용하여 극단적인 폭발력 이면에 숨겨진 불안함과 절망감을 표현하는 작품들이었다.[47][48] 다만 현장에서 몰입도를 위해 본 촬영 때 외에는 그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을 정도로 극단적이었던, 모조리 발가벗겨지는 식의 메소드 방법론은 자연인으로서의 알 파치노를 황폐화시키는 면이 있었고, 한 작품 찍어낼 때마다 전세계의 찬사를 받았지만 다음 작품을 하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술회한다. 타고난 우울함과 히스테릭함을 갖고 있었던 알 파치노는 1970년대의 성공적인 연기 활동 이면에서 24시간 알콜중독에 시달리며 지쳐갔고, 곧 방법론을 바꾸기 시작한다.

1983년 스카페이스를 통해 1970년대의 자기 자신을 완전히 지워낸 알 파치노는, 자신의 남성성을 극단적으로 과장하여 나약함을 숨기는 방식으로 연기 변신을 시도한다. 불안과 절망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끝까지 운명 앞에 맹렬히 저항하다 파멸하는 갱스터 캐릭터를 본격적으로 확립해나가기 시작한 알 파치노는 1990년대에 이르러 대중들에게 익숙한, 괴팍하지만 세상 물정에 통달한 중년 신사의 이미지 역시 확립하였고 지금의 알 파치노는 1970년대에 비해 1990년대 이르러 정착시킨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흔히 남아있다.

연극 배우로 레전드이기도 한만큼 연기스타일 자체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표적으로 손을 아주 효과적으로 쓰는 배우 중 하나며(연극에서는 관객들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섬세한 표정 연기 외에 손동작이나 움직임으로도 표현을 잘 해야 한다) 공간 활용에도 능하다. 또한 애드립에 아주 강한 배우로 뜨거운 오후의 명장면인 대낮에 경찰과 대치 장면, 여기서 나온 일장연설 대부분은 애드립이고[49] 평상시에도 애드립을 종종 친다. 히트에서 "Because she's got a...GREAT ASS!!"하면서 눈을 부라리는 장면 또한 애드립.

4.1. 연기 스펙트럼[편집]

연극계와 영화계에서 모두, 다양한 활약을 한 대배우임에도 불구하고 활약한 연기 폭이 좁다는 오해를 받는 배우 중 하나이다. 이는 알 파치노가 범죄 영화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고 그로 인해 갱스터 무비 속 캐릭터로 대중들에게 깊게 각인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대의 쌍두마차였던 로버트 드 니로와의 비교 때문이기도 하다. 드 니로같은 경우 알 파치노와 달리 전쟁 영화 속 군인, 케이프 피어 등에서 보여준 광기에 찬 싸이코 패스, 코미디의 왕 에서 보여준 코미디언 역으로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알 파치노가 좁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드 니로라는 할리우드 역사상 스펙트럼 넓기로는 제일 가는 배우와의 비교에서 좁은 것이지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절대 좁은 연기 스펙트럼이라 할 수 없다.

알 파치노의 경우, 연극에서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 바 있고 게다가 연극 경력까지 갈 것도 없이, 영화 속 캐릭터만 따져도 스펙트럼이 좁은 편은 아니다.

우선 실질적인 데뷔작 백색 공포에서는 '마약 중독자'를 연기했으며, 형사 서피코에서는 '형사이자 의인'인 서피코를 잘 연기했다. 특히, 서피코는 영화 역사상 TOP 100 영웅을 뽑으면 거의 무조건 포함되는 인물이다.[50] 1972년 대부 1이 개봉하고나서 1973년에 이 영화는 개봉했다. 그리고 1974년 대부2가 개봉하게 된다. 각각 1년의 시간만에 대부 1에서 냉혈한으로 변해가는 마이클 콜레오네를 선보인 직후 영웅 서피코를 곧바로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1년 뒤에 대부 2에서 최악의 악인인 마이클 콜레오네[51]를 연기하게 된다. 이렇듯 짧은 시간안에 선악을 자연스럽게 오갔다는 점에서도 그의 연기 스펙트럼은 악역에 한정된 것이 아닌 셈이다. 또, 서피코에서 뿐 아니라 알 파치노는 마이클 만의 걸작 히트에서 또 한번 경찰로 나오며 범죄자가 아닌 경찰로도 맞는 옷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을 두 번째 증명했다.

서피코의 개봉년도와 동년인 1973년도 작품 허수아비에서도 항간에 잘 알려진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와 달리, 시종 일관 낙관적이면서도 사라져 가는 희망에 무너져 내리는 '방랑자' 역을 잘 소화했다. 이후, 1975년 뜨거운 오후에서는 '초범 강도' 역을 통해 열정적이면서도 호소력 넘치는 명연기[52]를 보여주며 평단의 극찬을 받은 바[53] 있다. 이 영화 속 알파치노가 분한 서니 워칙이라는 인물은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인물[54]이지만, 적어도 대부1과 대부2에서 보여준 카리스마적인 매너리즘에 갇힌 연기가 아님을 증명해 보인 영화기도 하다. 쉽게 이야기하면, 동시대의 같은 범죄 장르 영화지만 뜨거운 오후와 대부 시리즈는 다른 결의 범죄 영화고 그 성격에 걸맞는 연기를 보여주며 서로 다른 범죄 인물을 소화해냈다고 보면 된다.

이후에도, 정의로운 '변호사'[55], '동성애자'[56]와 같이 비교적 캐릭터가 확실한 연기들도 선보인 바 있고 1992년 영화 글렌게리 글렌 로스에서는 '샐러리맨', 프랭키와 쟈니에서는 '평범한 노동자'로 분하며 우리 삶속에서 흔히 볼 법한 인물도 잘 소화해냈다. 이외에도 인사이더에서 보여준 '언론인', '미식 축구 감독'[57], '가수'[58], '퇴역 장교'이자 '장애인'[59]으로서 좋은 연기를 보여줬고 뉴욕 광시곡과 베니스의 상인같은 시대극에서도 좋은 연기를 선보였다.[60]

이러한 다양한 역할은 알 파치노의 스펙트럼이 절대 좁다는 것이 아님을 그 자체로 명징(明徵)하는 배역들이다.

장르로 구별해도, 느와르 범죄영화 전문이라는 대중들의 인식과 달리 꽤나 여러 장르에서 호연을 보여주었다. 상술한 프랭키와 쟈니에서는 로맨스 연기를 보여주었고, 딕 트레이시에서는 코미디 연기도 선보인 바 있다. 그리고 애초에 스탠드업 코미디로 연기 경력을 시작한 알 파치노다 보니 영화에서 코미디 연기를 깊이 혹은 넓게 선보인 적 없을 뿐이지 그 능력 자체는 탁월한 편이다. 잭 앤 질이 임팩트가 너무 크긴 했다. 로드 무비로는 허수아비. 드라마 장르로는 여인의 향기. 사회 고발물로는 유 돈 노우잭. 스포츠 영화로는 애니 기븐 선데이. 시대극으로는 베니스의 상인. 스릴러로는 인썸니아. 전기물은 1977년 작인 바비 디어필드. 이 밖에도 다양한 장르에서 두루두루 활약해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알 파치노의 대표 장르인 갱스터 및 범죄 영화에서 보여주는 인간 군상도 저마다 다르다. 알 파치노의 카리스마틱한 연기가 임팩트가 크기 때문에 그의 범죄 영화는 카리스마로 점철되었다고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대부 시리즈와 뜨거운 오후, 스카페이스, 칼리토, 도니 브래스코 같은 알 파치노의 대표 범죄 영화들에서 표현하는 인물들의 특성은 각기 다르다. 실제 도니 브래스코에서 알 파치노가 맡은 역은 3류 조직원으로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그의 세밀한 감정적인 표현을 엿볼 수 있는 배역이다. 칼리토도 범죄 조직 세계에서 멀어지고자 하지만 결국 헤어나올 수 없는 주인공을 감정적인 연기로 잘 커버하였다. 이러한 두 배역은 카리스마를 내세우지는 않기에, 갱스터 장르에서 알 파치노라는 배우의 표현력이 위압적인 카리스마에만 머물지 않고 변화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뜨거운 오후는 본 문단 상단부에 적혀있듯, 상당히 독특한 캐릭터[61]에 알 파치노가 표현한 다른 갱스터 주인공과는 연기 디테일이나 표현이 사뭇 다르다. 자세한 내용은 문단 상단부의 내용으로 갈음한다.

특히 범죄 영화에서 캐릭터 그 자체만으로도 아직까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는, 대부에서 맡은 마이클 콜레오네와 스카페이스에서 맡은 토니 몬타나 캐릭터는, 마초성을 보여주기도 하고[62] 카리스마의 끝판같은 느낌이지만 자세히 보면 이 둘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우선, 전자는 때때로 분노하는 몇몇 장면이 있기는 하나 전반적으로 냉혈한에 가까우며 눈 하나 깜짝 안하고 가족과 매제를 죽이는 냉혹한 마피아 보스다. 후자의 경우, 마이클과 달리 시종일관 신경질적이고 성격이 강인하면서도 야망으로 가득찬 인물이다. 토니도 둘도 없는 절친을 죽이는 인간쓰레기지만 가족을 죽이지는 않는다. 이 둘은 범죄 영화, 갱스터라는 틀만 같으며 성격을 비롯해 그 이외에 공통점은 거의 없다. 딱 하나, 결국 파멸에 이른다는 것 빼고.

굳이 비유하자면, 마이클과 토니는 물과 불이다. 마이클은 얼음처럼 차갑게 내려앉은 카리스마, 토니는 불타오르는 카리스마의 소유자다. 마이클도 분노를 표할 때가 있지만 시종일관 차갑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예측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올 것 같은 인물이다. 반면, 토니 역시도 가끔 냉철할 때[63]가 있으나 전반적으로는 욕망과 본능에 충실한 인물이며 야망으로 불타 본인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해 파멸에 이르는 인물이다. 얼마나 자기 제어가 안되냐 하면, 불알친구를 본인의 여동생과 결혼하고 맺어진다는 이유로 충동적으로 총살하는 인간 말종에다가 본인 마누라한테 마약 중독자라 자궁이 오염되어 본인 애도 하나 못낳는다(...)고 조롱하는 인간 쓰레기다. 물론, 마이클도 배신한 본인 가족을 용서하지 못해 형인 프레도를 살해하라고 사주하지만 적어도 본인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해 내린 비이성적인 판단은 아니었다.[64] 둘 다 결국에는 가족 등 사랑하는 이가 모두 떠나 홀로 남게되지만 그 기본적인 이유에는 이러한 성격적인 차이가 깃들어져 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마이클은 평범한 대학생에서 냉혹한 마피아로 변화하는 인물이며, 토니 몬타나는 처음부터 보스에 등극한 후 파멸하는 과정까지 시종일관 야욕으로 물든 범죄자라 성격적인 변화도 없다.[65] 알 파치노는 인물에 생동감과 생생함을 불어 넣어 두 캐릭터를 독보적인 존재감과 생명력을 가지게 하였으며, 두 악당을 극과 극으로 다른 성격의 '개성'을 갖춘 범죄 영화의 상징격인 인물로 만들었고, 극한의 연기력으로 시간이 지난 현재까지도 자주 언급되고 기억에 남는 캐릭터를 만들었다. 이러한 점에서 같은 범죄 영화라도 알 파치노 본인이 하나의 캐릭터를 중심으로, 그 캐릭터의 특징에서 다른 캐릭터를 파생시켜 비슷한 성격, 비슷한 특징의 캐릭터를 양산하는 연기자가 아님을 보여준다. 즉, 알 파치노가 늘 매번 똑같은 연기스타일을 선보이며 똑같아보이는 캐릭터를 양산해 냈다고 볼 수는 없다.[66] 오히려, 같은 갱스터 장르라 하더라도, 역대급 악인 둘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연기로 인물을 설정하고 특징을 표현하는 범위가 넓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여담으로, 이 두 캐릭터는 상술하였듯 하는 행동거지들을 보면 각각 가족 살인교사에, 마약 밀매 및 마약 중독자에 온갖 추악한 범죄란 범죄는 다 저지르고 다니는 제대로 된 악당들인데 웬일인지 둘 다 관객들에게 평은 좋다. 관객의 지지를 받는 악당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하기도 하나, 그 점은 오히려 알 파치노의 연기가 설득력이 있었고 마치 범죄 영화계의 안티히어로처럼 관객들을 매료시킨 덕이라고 볼 수도 있다. 둘 모두 도덕적으로는 일말의 동정의 여지도 없으며 특히 마이클과 달리 미화 조차 없는[67] 토니 몬타나는 인간 쓰레기 중 끝판왕을 달리는 인격을 가지고 있다. 오직 연기력 하나로 전설적 악당인 두 배역들의 지지를 얻어냈다는 점에서 그의 연기가 대단했다고 밖에.

여하튼 영화계에서 보여준 인물만으로, 드 니로와 직접 비교하자면 드 니로는 광기에 찬 싸이코 패스, 분노의 주먹에서 보여준 복서같은 역대급 연기를 통해 알 파치노보다 더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줬기는 하다. 그러나 그 이외에, 드 니로의 경력에서 대표적인 인물인 택시 드라이버에서 보여준 사회 부적응자는 알 파치노도 백색 공포에서 마약 중독자[68], 허수아비에서 방랑자[69]같은 역할로 유명하지만 않을 뿐 충분히 매력을 보여주었다. [70]

추가로 연극 경력에서 보여준 다양한 캐릭터들까지 포함하면, 이러한 배우에게 좁은 스펙트럼, 역할의 한계라는 표현은 알 파치노의 연기 경력을 평가절하 하는 것과 다름없다.

정리하자면, 알 파치노는 단순히 소화한 역할만 나열해도 좁은 스펙트럼도 아니거니와, 알 파치노 본인을 상징하는 갱스터 무비에서마저 보여진 인물의 성격과 그 밀도는 저마다 다르다는 점에서 절대적으로 연기 스펙트럼이 좁다고 평할 수가 없다. 어디까지나, 로버트 드 니로라는 대배우와의 비교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인 것 뿐이다.

5. 은둔형 예술가의 언론 나들이[편집]

  • 알 파치노의 전기책으로 가장 유명한 ≪알 파치노와 로렌스 글로벨의 대화(2006)≫의 저자 '로렌스 글로벨'은 언론을 피하던 슈퍼스타 알 파치노를 처음으로 인터뷰한 저널리스트였다. 오직 연기에만 몰두하던 알이 인터뷰를 결심한 것은 그가 존경하는 배우 말론 브란도때문이었는데, 글로벨이 브란도와 진행했던 플레이보이 25주년 특집 인터뷰를 읽고 이 사람이라면 인터뷰를 해도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 1979년, 인터뷰 요청을 받은 글로벨은 대부의 마이클 콜레오네를 떠올리며 "얼음같이 차가운 이미지를 상상"했으나 다음 날 뉴욕으로 날아가 알의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완전 다른 느낌을 받았다고 서술했다. "알 파치노의 첫인상은 스타 영화배우라는 짐을 짊어진 수줍고 조심스러운 배우였다." 뿐만 아니라 그로벨은 알 파치노 정도의 슈퍼스타가 낡은 가구들과 작은 부엌이 딸린 집에서 너무나 검소하게 생활하는 점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 때문에 나는 곧바로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 이 때 두 사람은 무려 40시간에 걸쳐 2천 장 분량의 긴 인터뷰를 했고 이를 계기로 둘은 평생 동안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2006년에 발간된 두 사람의 대화록에는 2005년까지 두 사람이 진행한 9번의 인터뷰들이 수록되어 있다. 알은 또 다른 절친인 로버트 드 니로에게 글로벨을 소개해주기도 했는데, 알과 마찬가지로 언론을 꺼리던 드 니로는 알 파치노의 인터뷰를 읽고 설득되어 로렌스 글로벨과 장시간 인터뷰를 진행했다.

    알은 일생 동안 사회운동, 정치적 이슈, 시위, 반대운동을 피해왔다. 그리고 알이 브로드웨이에서 30년만에 처음 시연된 ≪리처드 3세≫를 연기했을 때, 수많은 비평가들은 맹렬하게 앙심을 품은 듯 그를 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은 연극을 끝마치고 ≪크루징≫ 촬영에 돌입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언론들은 배알이 꼴려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한 광기와 열광을 피해 숨어온 배우에게, 언론을 열심히 피해 왔던 한 남자의 앞길에 돌연히 강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져 내렸다.


    - ≪AL PACINO IN CONVERSATION WITH LAWRENCE GROBEL(2006)≫ 서문 중에서

  • 인터뷰뿐 아니라 시상식, 토크쇼 같은 공식적인 자리를 수줍어하고 불편해하는 성격 때문에 TV 출연도 드물게 하는 편이다. CNN의 래리 킹이나 NBC의 바바라 월터스 같은 언론인과의 인터뷰는 종종 해왔지만 예능격인 토크쇼 출연은 희귀한 편. 하지만 한 번 출연하면 인터뷰어들과 사적인 친분을 맺어버리는 뛰어난 친화력과 의리의 소유자이다.

  • 앤디 워홀이 스타들의 인상을 기록한 책에서 파티장에서 알 파치노가 저 구석에 앉아있는 걸 끝무렵에야 발견했다고 한다. 그만큼 조용했다고.

  • 1995년, CNN의 뉴스 코너인 ≪래리 킹 라이브≫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래리 킹과 절친한 사이가 된 알은 킹이 CNN을 떠날 때까지 여러차례 CNN 뉴스에 출연했다. 1997년 ≪데블스 애드버킷≫의 시사회에 래리 킹을 초대하고 같은 해 킹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등 친분을 이어 나갔고, 2020년 현재까지 여러 행사에서 친목하는 모습을 보이며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71]

  • 2002년 ≪레이트쇼 with 데이비드 레터맨≫에 첫 출연했을 때는 레터맨으로부터 '토크쇼에 나온 걸 본 적이 없는데 대체 얼마만에 출연한 것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아마 30년 만의 첫 토크쇼 출연이라는 대답을 했던 알은 이 날 출연을 계기로 레터맨과도 친구가 되었다. 2015년, 레터맨이 레이트 쇼를 하차할 때까지 이 쇼에 수 차례 출연했던 알은 같은 해 깜짝 출연한 이후 오랫동안 토크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2020년, ≪아이리시맨≫,≪헌터스≫ 홍보차 처음 ≪지미 키멜 라이브!≫에 출연한 알은 많은 관심을 받았다. 역시나 시작부터 키멜에게서 '이런 자리를 불편해하신다고 들었다'는 말을 들었고 인터뷰의 끝무렵에는 키멜의 마무리 멘트가 끝나기 전에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 팬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같은 해 2월, 영국 ≪one show≫에 출연했을 때는 사회자의 중간 마무리 멘트를 듣는 도중 일어나려고 시도했는데 "방금 전에 나가려고 했어요. 아직 안 끝났군요."라고 고백하여 좌중을 폭소하게 만들기도 했다.

6. 가족[편집]

사생활이 상당히 비밀스러웠는데 다이앤 키튼과 오랜 연애관계를 가졌고, 다이앤은 결혼하고 싶었지만 알 파치노의 플레이보이 성향이 깊어 결국 헤어졌다. 이후 튜즈데이 웰디, 질 클레이버그, 마서 켈러, 캐슬린 퀸란, 프로듀서 린달 홉스 등등 여러 배우 및 영화인들과 낭만적인 관계가 많았다. 자식들이 다 늦둥이인데 알 파치노가 결혼이나 자식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1989년 연기코치 얀 태런트와의 관계에서 첫딸 줄리를 얻었다. 그렇지만 얀 태런트와 결혼을 하지는 않았다. 2001년에 파트너 관계였던 여배우 베버리 디안젤로와의 사이에서 둘째 딸 올리비아와 아들 안톤을 얻었다. 하지만 이후 2003년에 또 베버리와 헤어졌는데 양육권을 두고 치열하게 싸워 원수관계(...)가 됐다. 이때 파치노의 변호사는 베버리를 두고 자식들을 인질로 쓴다고 맹비난을 했다.# 결국 합의하여 공동 양육하기로 했고, 지금은 화가 풀어졌는지 좋은 친구관계로 지낸다고 한다.

첫딸 줄리는 아버지의 영향인지 단편영화 감독과 제작자를 하고 있으며, 둘째 딸 올리비아는 아직 학생으로 인스타그램에서 가끔 아버지 사진을 올린다.# 아들 안톤은 학생이며, SNS도 안하고 외부에 노출을 별로 하지 않고 있다.#

2008년에서 2018년까지 아르헨티나 여배우 루실라 폴락과 연인 관계였다. 그러나 2018년에 헤어졌다. 이렇게 파트너들은 많았지만 한번도 공식적으로 결혼하지는 않았다.

7. 여담[편집]

  • 삶의 우여곡절이 많은 편이다. 1961년 1월, 금지된 무기를 소지한 혐의로 체포된 적 있다. 배우로 정착하기 이전까지 직업도 굉장히 많았었다. 배우가 되기 전에는 메신저, 신발 판매원, 슈퍼마켓 점원, 구두닦이, 가구 운반자, 사무실 비서, 과일 광택 작업자, 신문 배달원 등 여러 직업을 거쳤다. 오페라의 광팬이어서, 카네기 홀에서 안내원으로 일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 한국에서는 대부와 여인의 향기 등의 영화에서 보여준 모습 때문에 카리스마 있는 할아버지 이미지로 유명하지만, 의외로 젊은 시절의 알 파치노는 처연하고 순한 인상에 가까운 미남이었다.

    앤디 워홀 마릴린 먼로 나무위키 - aendi wohol malillin meonlo namuwiki

    앤디 워홀 마릴린 먼로 나무위키 - aendi wohol malillin meonlo namuwiki

  • 알 파치노는 매우 마이너한 영화들을 만들어서 평론은 좋게 받았지만 아예 출시되지 않았던 작품들이 꽤 있다. 대표적으로 The Local Stigmatic, Chinese Coffee

  • 강하고 카리스마 있는 연기와 달리, 내향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섬세하고 따뜻한 면모도 있어 동료 배우들을 잘 챙기는 편으로 미스컨덕트에서 같이 호흡을 맞췄던 이병헌 역시 그의 인품에 극찬하기도 했다.#[72]

  •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셰익스피어 덕후이다. 가장 좋아하는 연극이 "햄릿"일 정도. 다수의 셰익스피어 영화와[73] 브로드웨이, 미국 각지의 셰익스피어 연극에 출연했으며, 1996년 덕후의 정점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뉴욕 광시곡을 감독했다.[74] 연극 리처드 3세를 영화로 만드는 과정을 현실과 교차하며 보여주는데, 알 파치노 뿐만 아니라 출연진이 다들 걸출한 연기파 배우들이다. 연극과 연기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추천.

  • 2010년에 나온 안락사를 다룬 유 돈 노 잭에서 잭 케보키언 역을 맡았다. 이 역할로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 수상. 참고로 이때 자기보다 40살 연하의 여친을 데리고 나와서 뭇 남성들의 열폭과 부러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 2011년 한국 지방 지자체 행사에 내한 초청이 예정되었으나 취소되었다. #

  • 2008년 이후 들어서면서 나이가 많은 탓도 있겠지만 웬일인지 작품 선정을 지독하게 못해서 88분, 의로운 살인 등 망작을 주연하며 골든 라즈베리에까지 노미네이트되는 등 영화 커리어쪽으론 하락세의 극치를 달리기 시작했다. 2000년 후반에 들어서면서 선택한 작품들은, 항상 연기는 좋은데 영화 자체가 재미없어서 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 2012년에는 기어코 골든 라즈베리를 수상했다. 문제의 영화는 전관왕에 빛나는 잭 앤 질. 해당 항목을 가면 알 파치노의 명장면을 볼 수 있다.

  •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보고 나서 마블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밝혔고, 마블 스튜디오 사장 케빈 파이기와 접촉 했었다고 인정했다.#

  • 2016년에 이병헌 등과 같이 미스컨덕트라는 영화에 나왔는데, 평가가 매우 좋지 않다.

  • 임재원, 김태관의 한국만화 짱에서 광진고 무리들이 모이는 조직의 본거지 카페 이름이 알 파치노.

  • HBO와 드라마 작업을 많이 했는데 논쟁적이고 도전적인 역할, 실험적인 작품을 좋아하는 듯하다.

  • 엔젤스 인 아메리카(angels in america, 2003) : 로이 콘 역. 동명의 퓰리처 수상 연극이며 8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에이즈와 동성애자들의 애환을 다룬 미니시리즈다. 에이즈를 앓고 있는 권력 실세 정치인을 연기하였는데 술집에서 은근히 패트릭 윌슨은 유혹하는 연기를 볼 수 있다.

  • 유 돈 노우 잭(You Don't Know Jack , 2010) : 잭 케보키언 역. 실화를 바탕으로 한 존엄사와 안락사를 다룬 영화이다. 고통스러운 질병과 치료 불가한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 안락사를 도와주며 살인자로 지목되는 의사를 연기한다.

  • 필 스펙터(Phil Spector, 2013) : 필 스펙터 역. 실화를 바탕으로 1960년대를 풍미한 음반 제작자인 필 스펙터가 여배우 라나 클락슨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후 그의 변호사와 법정공방을 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이다.

  • 패터노(Paterno, 2018) : 조 패터노 역. 미식축구계의 명장이자 61년간 최대 우승기록을 낸 감독 조 패터노의 휘하의 코치가 15년간 52건에 달하는 아동성폭행이 수면 위로 들어나 조 패터노 감독도 알고 있었으나 묵인하고 코치를 맡겼던 정황이 드러나며 명장의 추락을 그리는 미국 스포츠계 엄청난 스캔들을 다룬 실화영화이다.

  •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얼굴이 닮은꼴로도 유명하며 비슷한 나이 때의 모습을 비교하면 바로 알 수 있다. 구글에서도 둘의 이름을 함께 검색한 것이 연관검색어로 뜬다.

  • 할리우드에서 분노 연기를 가장 잘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알 파치노 본인이 울림통이 굉장히 커서 소리를 지르면 매우 우렁찬 소리가 나오며, 분노의 감정을 표현해내는 연기력도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75]

  • 머리가 하얗게 세고, 장발로 변신하며 외모가 많이 변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덩치가 더 커지고 간지가 배가된 느낌이다. 외모가 크게 변하지는 않았지만 이미지와 목소리가 매우 급변한 케이스여서 젊은 시절 알 파치노와 나이 든 알 파치노의 연기를 보면 상당히 다르다고 느낄 수 있다. #

  • 앞에서도 볼 수 있듯 목소리가 많이 변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그가 9살때부터 흡연을 시작한 골초여서 그렇다. 지금 80이 넘은 고령이고 흡연이 워낙 장수에 영향을 주다 보니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다행히 아직까지는 건강 이상이 없는 듯하다.

  • 동안이라는 평가를 받은 배우들 중 하나다. 대부 1에서 대학생 마이클 콜레오네를 맡았을 때 20대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30이 넘은 나이[76]였고, 뜨거운 오후 촬영 당시 35세의 장년기였다. 스카페이스에서는 40대 초반이었다. 그의 영상들을 찾아보면 대부분 동안이라는 얘기(특히 스카페이스 영상)가 적혀있다. 그러나 위에 있듯 지금은 딱 80살 할아버지로 보인다.

  • 할리우드 스타 중 한 번도 결혼하지 않은 몇 안 되는 배우이다.

앤디 워홀 마릴린 먼로 나무위키 - aendi wohol malillin meonlo namuwiki

앤디 워홀 마릴린 먼로 나무위키 - aendi wohol malillin meonlo namuwiki

  • 액세서리를 즐겨 착용하는 편이다. 반지, 팔찌, 시계, 목걸이 등의 다양한 아이템을 착용한다. 특히 십자가 음각의 블랙 스톤 반지는 10년이 넘도록 애용하고 있는 애착반지로 최근까지 착용한 모습이 목격되었다.

앤디 워홀 마릴린 먼로 나무위키 - aendi wohol malillin meonlo namuwiki

앤디 워홀 마릴린 먼로 나무위키 - aendi wohol malillin meonlo namuwiki

  • 2022 S/S 생 로랑 캠페인 모델로 선정되어 화보와 영상이 공개되었다.#

7.1. 불발된 캐스팅[편집]

  • 애니메이션 슈퍼배드 2에서 처음으로 성우로 참여할 예정이었다. 여기선 악역을 연기하기로 했는데 원래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로 유명한 하비에르 바르뎀이 맡을 예정이었으나 그가 007 영화에 나오기로 하면서 취소되었고 알 파치노도 여러 사정으로 하차했다.

  • 이외에도 출연 제의가 들어왔을 때 거절하거나 출연 후보로 고려되었던 영화가 제법 많다. 대표적으로, 스타워즈에서 한 솔로역[77], 다이 하드에서 주인공 존맥클레인역, 귀여운 여인의 에드워드 루이스역이 있다. 특히 스타워즈는 대본까지 봤는데, 영화가 이해가 안 돼 단번에 거절했다고. 이뿐 아니라, 알 파치노가 제의까지 받았지만 놓친 걸작이나 훌륭한 작품이 꽤 많다. 호러 영화의 걸작 엑소시스트의 카리스 신부 역도 제의 받았지만 거절했었고[78], 람보에서 존 람보역으로도 거론되었지만 끝내 거절했다. 그리고 이 영화를 거절하고 찍은 영화가 1982년작 <브로드웨이의 막이 오를때>인데, 알 파치노 팬조차도 거의 기억 못하는 영화로 남았다... 또한, 윌리엄 골드만의 책 'Four Screenplays with Essays(포 스크린플레이)'에 의하면 1990년 스릴러 작인 미저리에서 알 파치노는 주인공 폴 쉘던역을 제의받았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1995년 영화 크림슨 타이드에서도 주인공 역을 제의 받았지만 거절하였다.

  • 그리고 70년대 중후반 연극계에서 주로 활약하던 방황기 시절 놓친 역할도 꽤나 많다. 우선, 1976년 작 마라톤 맨에서 존 슐레진저 감독이 주인공 본 베이브 역의 첫 번째로 알 파치노를 원했으나, 제작사의 반대로 출연이 무산되었고 결국 더스틴 호프만에게 이 역할이 넘어갔다. 또한, 1979년 작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서 더스틴 호프만보다도 먼저 테드 크레이머 역을 제의 받았지만, 용감한 변호사의 연기에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로 거절했다.[79] 70년대 정치 스릴러의 대표작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에도 로버트 레드포드보다도 먼저 칼 버스타인 역을 제의 받았지만 끝내 거절했다. 또한, 스티븐 스필버그[80]의 1977년 SF작품 미지와의 조우에서도 주인공 역을 제의받았지만 거절 했다. 이 영화의 제작에 참여한 줄리아 필립스의 자서전 'You'll Never Eat Lunch in This Town Again(당신은 다시 이 마을에서 점심을 먹지 못할 것이다)'의 내용에 따르면, 로이 니어리 역으로 알 파치노에게 각본을 보여주며 제의했으나, 당시에 알은 흥미가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찍은 영화가 전기물 바비 디어필드인데, 이 영화는 흥행과 비평 모두 망했다...[81][82] 그리고 대부에서 같이 작품을 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명작 전쟁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주인공 윌러드 역[83]을 제안 받았지만 역할이 자기와 맞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이 때의, 알 파치노는 1975년 뜨거운 오후가 개봉된 뒤 한참 쉬고 있었을 적이다. 메소드 방식의 접근법에 지쳐 작품이 끝나면 찾아오는 외로움을 이겨내려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던 시기라고 본인도 회고한 바 있고 영화 작품 활동을 쉬면서 주 활동 무대를 연극계로 옮긴 시점이다.

  • 이 중에서도 알 파치노의 부족한 영화 선구안을 대표하는 최고봉은 바로,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되는 1976년 작 택시 드라이버. 이 영화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맡은 트래비스 비클 역으로 먼저 제의 받았으나 거절한 바 있다. 이 영화의 제작을 맡은 줄리아 필립스의 자서전 'You'll Never Eat Lunch in This Town Again(당신은 다시 이 마을에서 점심을 먹지 못할 것이다)'의 내용에 따르면, 마틴 스코세이지가 아닌 토니 빌이 감독으로 처음 물망에 오르고, 토니 빌이 알 파치노를 주연으로 원하자 이 영화의 각본을 맡은 폴 슈레이더가 알 파치노에게 대본을 보냈지만 결국에는 알 파치노가 거절하였다. 이유는 불명. 줄리아 필립스도 파치노가 대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역할을 거부했는지 또는 감독 토니 빌과 작업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고 설명했다.[84] 결론적으로는, 토니 빌도 이 영화 감독직에서 하차했고 지금의 마틴 스코세이지 연출,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다만, 100% 알 파치노의 영화 선구안만을 탓할 수는 없는 것이 본인이 아무리 명연을 선보인다 한들, 연출력의 부재는 영화에 치명타로 작용하기 때문이다.[85] 토니 빌의 감독 데뷔는 1980년 작 마이 보디가드로 이 영화보다도 4년이나 뒤다. 택시 드라이버 제작 당시에는 초보 감독이었기에 마틴 스코세이지 연출 만큼의 명작이 탄생했을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이전에 감독으로서 뚜렷하게 무언가를 해낸 적 없던 토니 빌과 달리, 마틴 스코세이지는 1976년 당시, 이미 3년 전인 비열한 거리 연출로 비평가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이렇듯, 실적도 네임밸류도 현저하게 차이나는 둘의 감독 능력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부터 힘들다. 시간이 지난 지금 기준으로도 마틴 스코세이지는 거장 감독으로 평가받는 명감독이라는 점도 당시 알 파치노의 판단에 관한 타당성을 높여준다. 알 파치노 본인이 수락하는 것은 곧 초보 감독인 토니 빌과 함께 작업한다는 의미이므로 이를 예견하고 제의를 거절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의미에서 줄리아 필립스도 "감독 토니 빌과 작업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고 애매모호하게 말하며 해석의 여지를 남긴 것일지도 모른다. 다 떠나서 영화팬 입장에서 보면, 마틴 스코세이지가 연출을 맡아 명작을 탄생시켰기에 오히려 알 파치노의 선택이 대승적 차원에서는 더 좋은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고 볼 수있다.

  • 제의를 받은 것은 아니나 제작사들에 의해 후보로 거론된 배역들도 꽤 많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페이스 오프에서 캐스터 트로이역, 미션 임파서블에서는 짐 펠프스 역, 위험한 정사에서는 댄 갤러거 역 등 유명작들에서 후보로 거론된 적 있다. 비교적 덜 유명하지만, 2000년 작 트래픽, 1990년 작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 1992년 작 <붉은 사슴비>에서는 각각 판사 웨이크필드 역, 판사 둠 역, 프랭크 쿠텔 역으로 고려되었다.

  • 이렇게 무수히 많은, 출연하지 못한 명작들을 제쳐두고 인터뷰에서는 그가 가장 출연하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한 영화로 슬랩 샷(1977)이라고 말했다. 이 영화의 조지 로이 힐 감독은 알 파치노가 스케이트를 탈 수 없다는 이유로 그를 내쳤다.

8. 필모그래피[편집]

8.1. 영화[편집]

연도

제목

배역

기타

1969

미 나탈리

토니

단역

1971

백색 공포

바비

데뷔작[86]

1972

대부

마이클 콜레오네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

1973

허수아비

프랜시스 라이오넬 델부치

형사 서피코

프랭크 서피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

1974

대부 2

마이클 콜레오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

1975

뜨거운 오후

소니 워칙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

1977

바비 디필드

바비 디필드

1979

용감한 변호사

아서 커클랜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

1980

광란자

스티브 번스

1982

브로드웨이에 막이 오를 때

아이번

1983

스카페이스

토니 몬타나

1985

혁명[87]

1989

사랑의 파도[88]

프랭크

1990

로컬 스티그매틱

그라함

프로듀서 겸 배우

딕 트레이시

알폰스 '빅보이' 카프리스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

대부 3

마이클 콜레오네

1991

프랭키와 쟈니

쟈니

1992

글렌게리 글렌 로스[89][90][91]

리차드 '리키' 로마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

여인의 향기

프랭크 슬레이드 중령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1993

칼리토

칼리토 '찰리' 브리간테

1995

투 비츠

할아버지

히트

빈센트 한나 경위

1996

씨티홀

존 파파스 시장

뉴욕 광시곡

본인 & 리처드 3세

감독 데뷔작

1997

도니 브래스코

벤자민 '레프티' 루지에로

데블즈 애드버킷

존 밀튼

1999

인사이더

로웰 버그만

애니 기븐 선데이

토니 다마토

2000

차이니스 커피

해리 레빈

감독 겸 배우

2002

인썸니아

윌 도머

시몬

빅터 타란스키

목격자

앨리 워맨

2003

갱스터 러버

스타크먼

리크루트

윌터 버크

2004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

2005

투 포 더 머니

월터

2007

88분

잭 그램 박사

오션스 13

윌리 뱅크

2008

의로운 살인

데이빗 '루스터' 피스크 형사

2011

화이트 밀크

스탠포드 형사

잭 앤 질

본인

골든라즈베리 남우조연상 수상

와일드 살로메

본인&헤롯 왕

감독 겸 배우

2012

멋진 녀석들

발렌타인

2013

살로메

헤롯 왕

감독 겸 배우

2014

알파치노의 은밀한 관계

사이먼

맹글혼

맹글혼

프로듀서 겸 배우

2015

대니 콜린스

대니 콜린스

2016

미스컨덕트

찰스

2017

더 파이러츠 오브 소말리아

시모어

행맨

형사 아처

2019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마빈 슈워즈

아이리시맨

지미 호파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

2021

액시스 샐리

제임스 로린

하우스 오브 구찌

알도 구찌

미정

스니프

하비 스트라이드

미정

리어왕

리어왕

8.2. 연극[편집]

연도

제목

배역

기타

1965

The Creditors

1966

Why Is a Crooked Letter

오비상 남우주연상 후보

1967

어웨이크 앤 싱!

1967

아메리카, 만세

1968

인도인은 브롱크스를 원한다

머프

오비상 남우주연상 수상

1969

호랑이는 넥타이를 매는가?

비컴

토니상 남우조연상 수상

1969

로컬 스티그매틱

그레이엄

1970

랫츠

감독 데뷔작[92]

1970

카미노 리얼

킬로이

1973

리처드 3세

리처드 3세

[93]

1975

아르투르 우이의 출세

아르투르 우이

[94]

1977

파블로 험멜의 기본 훈련

파블로 험멜

토니상 남우주연상 수상

1979

리처드 3세

리처드 3세

1981

아메리칸 버팔로

월터 '티치' 콜

1983

아메리칸 버팔로

월터 '티치' 콜

1988

줄리어스 시저

마크 앤소니

1992

차이니스 커피

해리 레빈

1992

살로메

헤로데 안티파스 왕

1996

휴이

에리 스미스

감독 겸 배우

1999

휴이

에리 스미스

감독 겸 배우

2002

아르투르 우이의 출세

아르투르 우이

2003

살로메

헤로데 안티파스 왕

2005

고아들

해롤드

2010-2011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

토니상 남우주연상 후보

2012-2013

글렌게리 글렌 로스

쉘든 '셜리' 르빈

2015-2016

차이나 돌

미키 로스

2017

갓 룩 어웨이

테네시 윌리엄스

8.3. TV[편집]

연도

제목

배역

방송사/분류

기타

1968

N.Y.P.D

존 제임스

ABC 드라마

시즌 2 5화만 출연

2003

엔젤스 인 아메리카

로이 콘

HBO 6부작

에미상 남우주연상 수상

2010

유 돈 노우 잭

잭 케보키언

HBO TV 영화

에미상 남우주연상 수상

2013

필 스펙터

필 스펙터

HBO TV 영화

에미상 남우주연상 후보

2018

패터노

조 패터노

HBO TV 영화

2020

헌터스

마이어 오퍼만

아마존 드라마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 후보

9. 관련 문서[편집]

  • 배우/서구권


[1] 본인 말에 따르면 태어난 곳은 맨해튼이며 어린 시절 자란 곳은 이스트 할렘, 사우스 브롱스이다[2] 안톤과 올리비아는 이란성 쌍둥이다.[3] 3명의 자녀를 두고 있지만, 결혼 경험은 없다.[4] 젊은 시절 기준으로 80세인 지금은 줄었을 가능성이 크다.[5] 알 파치노를 지금의 자리에 올려준 영화이다. 촬영 당시 나이가 30대 초였는데, 어리숙한 20대 청년 대학생과 30대의 카리스마있는 마피아 패밀리의 보스라는 서로 상극된 두 이미지를 완벽하게 연기해내며 밑에서도 볼 수 있듯 성격 까칠하기로 유명하며 거의 남 칭찬을 하지 않는 선배 배우인 말론 브란도에게 격찬까지 받을 정도다.[6] 원문 : I didn't say much to Pacino when we were making The Godfather(1972) but I not only consider him one of the best actors in America but in the world. The picture just reinforced my opinion. That sounds like a put on? well, I never meant anything more in my life. I don't go around touting other actors, the profession means too much to me.[7] 현재는 원로 배우들이 된, 팔순 근처의 나이가 된 넷은 전부 나이 대비 동안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정확히는 알 파치노의 경우 1970년대~80년대, 잭 니콜슨의 경우 살찐 지금, 그리고 드니로도 거의 늙지 않는 70대 이후, 더스틴 호프만의 경우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한 뒤 커리어 내내 동안이었다.[8] 특히 드니로랑은 같은 이탈리아계+대부에 나옴+히트에 공동 출연함+스콜세지와 친분 있음이라는 공통점으로 인해 자주 엮이는 편이다. 또한 둘도 서로 친한 편이기도 하고. 2019년 들어 알 파치노, 드니로, 스콜세지는 여든 가까이 된 고령의 나이로 아이리시맨을 찍었다.[9] Triple Crown of Acting을 달성한 배우이자 그의 브로드웨이 최신작 차이나돌 공연쯤에 가디언지는 그를 브로드웨이의 대부라 칭했다. 기사 링크[10] 2015년 가디언지 인터뷰 중에서 "My grandparents came from a town in Sicily called Corleone. Fate? Yes, maybe – it’s very strange." 출처[11] 다만 이런 우연은 당시 대부 시리즈를 준비하던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다. 파라마운트 이사들은 대부 시리즈는 이탈리아 문화를 잘 아는 이탈리아계로 팀을 꾸리기를 원했고, 배우들은 그나마 자유로웠으나 감독으로 앉힌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알 파치노를 강력히 주장했다.[12] 절친한 친구 두 명이 마약 남용으로 19살, 30살에 사망한 일화를 보면 어린 시절 얼마나 험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13] 1983년 abc 인터뷰 영상 [14] 2007 AFI 공로상 시상식 08:40~ 영상[15] ABC 굿모닝 아메리카에 출연하여 춤을 좋아하는 점과 연기 생활의 시작이 뮤지컬이었다고 밝혀 대중을 놀래킨 바가 있다. 아쉽게도 찍어놓은 영상은 남아있지 않다고. 영상 [16] 2007 AFI 공로상 시상식 09:25~ 영상[17] 2016년 알 파치노에게 케네디 센터 공로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연설 중에 이 일화를 밝히며 당시 관객들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짐작도 안간다고 농담을 한 적이 있다. 백악관 리셉션 한글자막 영상[18] High School of Performing Arts, 흔히 PA로 불리는 뉴욕의 공립 예술고등학교이다. 1947년에 설립되었다.[19] 2019년 12월 open 매거진 인터뷰 " I went to a performing arts school and I remember that I loved the things that I learned, but I was too young, I was 15 but I might as well have been 10 or 11, I just was behind.", "I had to quit school and go to work because my mother was ill. So I was living in the Village by myself when I was 16, 16 and a half. I was working odd jobs to make money and support myself and my mother." 링크[20] Focus On: 100 Most Popular Tony Award Winners의 2017페이지 출처 [21] 2009년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과의 인터뷰에서 스스로 이 때의 일을 밝혔다 "At 20, I lived in Sicily by selling the only asset I had — my body," "An older woman traded food and housing in return for sex. I woke mornings not really loving myself."[22] 2015년 가디언지 인터뷰. "The lowest point of my life was losing my mother, Rose, and grandfather – they died within a year of each other. I was 22 and the two most influential people in my life had gone, so that sent me into a tailspin."라고 말한 뒤 "I lost the 70s in a way, but then I gave up drinking in 1977 and decided to focus on the work." [23] 리 스트라스버그(Lee Strasberg)는 알 파치노를 비롯해 제임스 딘, 더스틴 호프만, 마릴린 먼로, 제인 폰다, 로버트 드 니로를 가르친 미국 연기사의 전설적인 인물이다.[24] 1983년 abc 인터뷰 한글자막 영상 [25] 2006년 발간된 Al Pacino In Conversation with Lawrence Grobel에서 "The Actors Studio meant so much to me in my life. Lee Strasberg hasn't been given the credit he deserves ... Next to Charlie, it sort of launched me. It really did. That was a remarkable turning point in my life. It was directly responsible for getting me to quit all those jobs and just stay acting."라고 인터뷰했다.[26] 2000년 6월 뉴욕 타임즈 기사 홈페이지 링크 [27] 액터스 스튜디오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홈페이지 링크[28] 참고로 알 파치노는 샘 셰퍼드와 함께 오프-오프-브로드웨이가 배출한 스타 배우로 꼽힌다.[29] 인터뷰에서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각본을 쓸 때, 알 파치노라면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을지 고려해서 서술했다고 밝혔다. 마이클 콜레오네를 떠올리며 알 파치노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고.[30] 이미, 코폴라의 마음 속에는 알 파치노를 마이클 콜레오네로 내정했지만, 제작사의 반대로 어쩔 수 없이 몰래 스크린 테스트에 포함시킨 것이라 한다. 이 스크린 테스트에서 상대역 다이앤 키튼도 알 파치노가 제일 맘에 든다고 했고, 당시 조지 루카스의 아내인 마샤 루카스가 테스트 필름을 편집하던 중 “알 파치노로 하세요, 눈빛으로 옷을 벗기는 재주가 있어요”라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31] 30대 시절 목소리는 맑고 미성이었으나, 40대를 들어서자 허스키하고 걸쭉해졌다. 하지만 알 파치노하면 허스키한 목소리가 떠오를 정도로 상징적이게 되었다.[32] 본 작품에서 윌라드 역할은 마틴 쉰이 맡게 된다.[33] 무려, 3000만 달러로 제작해 그의 100분의 1 수준인 30만 달러를 벌어들인 희대의 망작이다.[34] 후술하겠지만 골든 라즈베리를 수상하거나 비평, 흥행적으로도 졸작이나 다름없는 의로운 살인, 88분, 잭 앤 질, 미스컨턱트에 연달아 출연하면서 영화 커리어 자체가 전성기에 비해 떨어진것은 팩트다. 이는 연기력과는 별개의 문제이며 이것마저 쉴드를 치는것은 극성의 팬질로 밖에 볼 수 없다. 다만 이는 자신을 발굴하고 키워준 마틴 브레그만의 부재가 가장 큰 이유로, 마틴은 알 파치노에게 가장 어울리는 시나리오와 감독을 고르는 선구안이 매우 뛰어난 제작자였다. 실제로 최전성기인 1970년대 알 파치노의 영화들은 모두 마틴 브레그만의 손길이 닿은 영화들이었다. [35] 오죽하면, 로빈 윌리암스도 알 파치노의 AFI 평생 공로상 수상 당시 찬조연설자로 나와 70년대 초반 찍어놓은 작품들만으로도 공로상 수상이 가능했겠다고 반농담식으로 얘기한다.[36] 수상자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할리우드의 브래드 피트[37] 아카데미 역대 최다 노미네이션 배우 순위 링크 [38] 다른 필모들은 차치하더라도 대부2로는 오스카를 받았어야 됐다고 모두가 입을 모은다. 하지만 그 해의 남우주연상은 잭 니콜슨, 더스틴 호프만, 알버트 피니마저 제치고 <해리와 톤토>라는 아주 묻혀진 영화의 <아트 카니>가 수상했다.[39] 스카페이스는 현재는 명작 취급을 받지만 당시는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잔인한 영화라서 논란이 되었는데, 보수적인 면이 있는 아카데미상은 이런 영화를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외국어영화가 아카데미상을 수상한게 기생충이 사상 최초일 정도로 다소 보수적인 면이 있다.[40] 1979년 플레이보이지 인터뷰에서 "Oh, sure. Definitely. That was outrageous. It’s things like that that get you a little sour. I decided to pass the ceremonies by. There were certain people around me who wanted to write a letter, who wanted to announce that I would not accept the nomination. I would always say, “Let it go. Let it go. Don’t make waves.” But then, even though I didn’t go, I watched it on TV. I felt bad. I didn’t care for that kind of contradiction."라고 인터뷰했다.링크[41] 2020년 1월 지미 키멜쇼에 첫 출연하여 이 때 일을 상세히 회고했다.[42] Al Pacino by Lawrence Grobel 45p 링크[43] 다만, 이 80년대에 드 팔마 연출 작 스카페이스에서 알 파치노의 경력 최고의 연기 중 하나로 평가되는 명연을 펼치고도 수상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한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반면, 1984년도 골든글로브에서는 남우주연상으로 노미네이트 되었고 알 파치노 팬들 사이에서는 대부 2부 남우주연상 수상 실패와 더불어 스카페이스 토니 몬타나역으로 노미네이트 실패가 가장 아쉬운 사례로 거론된다. 당시, 아카데미는 보수적 성향이 강해 처음부터 끝까지 자극적인 이 영화를 대놓고 외면했었고 알 파치노도 결국 그 피해를 봤다. 오죽 안타까웠던지, 동료 배우들이 노미네이트 실패 소식을 듣고 간이로 상을 제작해 알 파치노에게 상을 선물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한 일화.[44] 대부 2의 명대사 'You broke my heart!'를 자체 패러디했다.[45] 참고로, 제이미 폭스는 2004년 작 레이와 콜래트럴로 이듬해 2005년 아카데미 각각 주연상과 조연상의 후보로 올랐다. 그리고 레이에서의 호연으로 남우 주연상 수상에 성공했다. 1993년 둘 다 후보에 올랐지만 남우주연상만을 수상한 알 파치노와 같은 케이스.[46] 이외에도, 대부1, 형사 서피코, 용감한 변호사, 글렌게리 글렌로스, 히트, 여인의 향기, 칼리토, 도니 브래스코 등 숱한 영화들 에서도 명연을 보여주었고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47] 잘 언급되지는 않지만, 알 파치노의 70년대 영화 중 73년작 허수아비와 79년작 용감한 변호사에서도 이러한 모습들을 엿볼 수 있다. 허수아비에서는 초반부에서는 삶을 긍정하며 순수한 모습들이 드러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피폐해져가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잘 표현했다. 용감한 변호사에서는 후반으로 갈수록 사법의 부정한 이면에 이골이나 그 부정함을 호소하는 장면들에서 폭발적인 모습이 잘 나타난다.[48] 알 파치노가 연기한 대표적인 캐릭터인 마이클 콜레오네를 연기한 방식만 봐도 작중 초반부에는 큰 눈망울에 순둥한 모습을 연기했다면 버질 솔로초와 맥클러스키 서장을 죽인 이후 목소리톤과 표정 자체가 달라지며 작품 후반부에는 우리가 잘 아는 알 파치노의 연기 스타일이 나온다.[49] 이 장면은 시퀀스 전체가 명장면이니 강력추천. 마치 연극 무대에서 원맨쇼를 펼치는 듯 알 파치노 연기력의 정점을 볼 수 있다. 알 파치노가 연기한 소니의 불안하면서도 강렬한 에너지, 그와 대치하는 경관들 사이의 긴장감이 압권인데 대부분이 대본에 없다보니 실제로 경관들이 황당해하거나 당황하는 리액션을 실감나게 한다. 자주 언급되는 부분은 소니가 "Kiss me. I like to be kissed when I'm being fucked"로 fucked가 엿먹이다와 성관계하다란 의미가 둘 다 있는 걸 이용한 말장난이고, 단연 영화 최고의 명장면은 역대 최고의 영화 대사 중 하나로 꼽히는 "Attica! Attica!!"이다. 뉴욕 주에 위치한 Attica 감옥에서 죄수들이 비인간적 대우에 항의하며 폭동을 일으켰는데, 이때 죄수 33명과 교도관 10명이 사망하며 과잉진압 논란을 불렀다. 즉, 소니는 "우리도 한번 짓밟아보시지!"하며 구경꾼들을 선동한 것. 당연하지만 평상시 인격이 짓밟히던 죄수들과 은행강도를 동일시할 순 없다. 그러나 소니의 카리스마 때문에 구경꾼들이 일제히 소니의 편으로 돌아선다.[50] 실제로, AFI 선정 50대 영웅에서 40위를 차지했다.[51] 실제로, AFI 선정 50대 악당에서 11위를 차지했다.[52] 이 영화는 글렌게리 글렌로스(1992)와 더불어 알 파치노가 보여준 연극식 연기의 정점을 보여준다. 마치 라이브로 그의 연기를 감상하듯, 생생함이 살아있는 영화이며 실제로 대부분의 동선과 대사를 리허설시에 맞췄고 많은 대사들은 즉흥 연기의 산물로 다수가 배우들의 애드립이었다.[53] 이 영화에서 알 파치노의 연기는 2006년 프리미어 매거진에서 선정한 위대한 퍼포먼스 Top 100 중 4위를 차지했다. 참고로 2위는 워터프론트의 말론 브란도, 7위는 미드나잇 카우보이의 더스틴 호프만, 10위가 분노의 주먹의 로버트 드 니로이다.[54] 양성애자같으면서도 동성애자인데, 특히 동성애자 애인에게 범행의 동기를 밝히면서 절절하게 호소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알 파치노 연기 중 백미이다.[55] 용감한 변호사. 1979년 작.[56] 광란자. 1980년 작. 처음에는 이성애자였지만, 형사 알 파치노가 게이 세계에 잠복하면서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또한, 상술하였듯이 뜨거운 오후에서도 동성애자 연기를 보여주었다.[57] 애니 기븐 선데이. 1999년 작[58] 대니 콜린스. 2015년 작.[59] 여인의 향기. 1992년 작.[60] 참고로, 알 파치노는 유명한 셰익스피어 덕후다. 때문에 연극에서도 중세시대극에 많이 출연했다.[61] 해당 작품의 감독 시드니 루멧도 범죄자인데 목숨을 걸 정도로 남을 배려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독특한 인물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또, 알 파치노가 맡은 서니 워칙은 동성애자로, 시드니 루멧은 당시 대부로 슈퍼스타 반열에 올랐던 알 파치노의 선택에 놀랐다고 한다. 스타가 동성애자 연기를 하는 것은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매우 용기있는 선택이었다고 극찬하였다.[62] 마이클은 대부2에서 이러한 마초성이 돋보인다. 극 막판 부인인 케이 아담스가 이혼을 요구하자, 아무리 시대가 지났어도 남녀 관계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발언하며 절대 '허락'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어찌보면 마초이즘에 가까운 발언이다. 토니는 따로 사례를 언급할 필요 없을 정도로 영화 내내 마초성의 극치이다(...)[63] 대표적으로, 마약 거래를 수행하려다 협상이 결렬되어 함정에 빠졌지만 동료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나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동료들에게 마약은 꼭 챙겨놓으라고 일러둔다. 또한, 이 마약을 직접 챙겨 오마르를 거치지 않고 보스에게 직접 전달하여 공적을 챙기는 등 정확한 판단력을 보여줬다. [64] 오히려, 마이클은 정반대로 매우 이성적으로 그려지는데, 대부1에서 그려지는 마이클은 목숨이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와 패밀리를 지켜내기 위해 매우 이성적이고 냉철한 안목을 가지고 행동한다.[65] 굳이 변화라고 한다면, 서서히 마약에 더 심하게 중독되어 가족과 절친과의 관계가 파탄나며 다 떠나보내는 정도.[66] 토니 몬타나는 같은 범죄 장르에서 마이클이 아니라, 오히려 범죄장르가 아닌 드라마 장르의 여인의 향기에서 알 파치노가 연기한 프랭크 슬레이드와 연기 스타일이 비슷하다. 말투나 억양 및 행동같은 디테일은 다르지만 크게 봤을 때 둘 다 막말을 서슴지 않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에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갖춘 인물들이며 알 파치노도 이러한 인물들을 강하고 카리스마넘치게 표현한다. 오히려 파생됐다고 한다면 토니에서 프랭크 슬레이드가 파생됐다고 보는게 맞을 정도. 다만 차이라고 하면, 프랭크는 삶의 희망을 잃어 염세적인 사람이고 토니 몬타나는 야욕으로 불타 희망적이다 못해 위험한 꿈을 꾸는 사람이고 그걸 실현시키기위해 범죄도 마다 않는 인물이다. 그래도 프랭크는 찰리 심스라는 착한 학생을 만나 변화를 겪고 삶의 의지를 되찾으며 긍정적으로 변하기라도 하지, 토니 몬타나는 끝까지 범죄를 일으키는 인간 말종이다(...) 물론, 비슷한 연기 스타일이기는 하지만, 프랭크 슬레이드는 '시각 장애인'이었고 알 파치노 역시도 그를 잘 표현하기 위해 맹인학교에 들어가 연구를 했을 정도니 이 역시도 완전히 똑같은 연기라고는 할 수 없다.[67] 사실, 이는 대부1 촬영 당시 실제 마피아들의 압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촬영장에는 마피아들이 자주 구경을 왔었다고 한다.[68] 다만, 택시 드라이버 속 트래비스는 마약을 건들지는 않았다.[69] 다만, 이 쪽은 대인관계는 좋다. 범죄 경력이 있고 일정한 직장없이 길거리를 배회하며, 결국 가족이라는 뿌리가 흔들리면서 무너지는 인물이기에 부적응자로 보일 뿐. 하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인물이다.[70] 물론, 그럼에도 과도한 팬심은 금물이다. 드 니로는 누구보다도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으며, 그 전성기에서도 표현한 역할들이 매우 다양하다.[71] CNN에서 은퇴한 래리 킹은 2020년 현재까지 여전히 개인 쇼를 진행하고 있는데 알 파치노 성대모사가 가능한 사람이 출연하면 자신이 알 파치노의 절친임을 밝히며 알의 성대모사를 시키곤 한다.[72] 이병헌이 따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호흡 곤란같은 증세가 있느냐.'라고 물어보며 공황장애증상이 있음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그래서 시상자로 아카데미 시상식에 서기 전 이병헌이 조언을 구했는데 "촬영할 때는 긴장을 안하지 않나, 나 자신이 아닌 새로운 캐릭터를 입혀서 시상식에 올라가봐라."라고 조언을 해줬다고 한다.[73] 최근작이자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라면 베니스의 상인에서의 샤일록.[74] 재밌는 점은 알 파치노는 이 작품에서 위노나 라이더를 주연 중 하나로 앤으로 기용했는데 2002년 시몬에서 극초반에 작중 유명 여배우로 나오는 위노나 라이더에게 퇴짜 맞는 감독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당시 위노나 라이더는 2001년 절도 사건으로 영화에 제대로 나오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75] 목소리가 굉장히 많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고함을 지를 때 나오는 특유의 밀도 높은 목소리는 초창기와 말년이 거의 비슷하다. 그가 얼마나 발성과 기본기가 좋은지 보여주는 부분.[76] 대부 1은 아무리 일러도 1970년 이후에 촬영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코폴라 감독 특유의 오랜 촬영기간 때문에 그 이전이라는 이야기도 많지만. 정확히는 1971년 3월에 대부는 첫 촬영을 했고, 첫 촬영 신은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마이클과 케이가 선물을 사는 신이었다.[77] 알 파치노가 거절하자 잭 니콜슨, 빌 머레이 등도 고려되었다. 스타워즈 감독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 이전까지 별 다른 히트작도 없어 유명한 감독이 아니었는데, 절친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덕에 알 파치노와 연이 닿았다. 이외의 인연은, 1970년 대부 스크린 테스트의 필름을 편집하던 중 조지 루카스의 아내였던 마샤 루카스가 "알 파치노로 하세요, 눈빛으로 옷을 벗기는 재주가 있어요"라고 말했었고 알 파치노의 대부 출연에 힘이 되주었다.[78] 이 대신 출연한 영화가 거장 시드니 루멧의 인물 영화 <형사 서피코>이다. 그래도 이 영화로 이듬해 1974년 골든 글로브 남우 주연상을 수상했고 이 영화는 시드니 루멧 감독의 70년대 걸작선에 항상 거론될 정도로 작품성있는 영화기에 알 파치노 입장에서는 마냥 아쉽다고만 볼 수는 없는 결정이었다.[79] 재밌는 점은 이듬해 1980년, 알 파치노가 거절한 이 영화로 더스틴 호프만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알 파치노도 용감한 변호사에서의 연기로 '동시에 함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경쟁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더스틴 호프만이 수상하며 알 파치노는 또다시 수상 실패라는 패배의 쓴맛을 맛봐야했다.[80] 스필버그 역시도 조지 루카스와 더불어 대부의 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와 절친이며, 이 덕에 인연이 닿은 것으로 사료된다. 실제 알 파치노도 대부를 찍기 전인 1969년 부터 이들을 알았다고 인터뷰 한적도 있다.[81] 특히, 흥행면에서는 완전 망작인데 바비 디어필드는 640만 달러로 제작해 겨우 93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실제 영화의 손익분기점의 경우, 제작비 및 마케팅비를 합한 비용의 약 2~2.5배 정도가 실제 손익분기점이기에 따지고 보면 손익 분기도 못 넘긴 작품이다. 또한, 알 파치노가 출연한 1970년대 영화중 가장 낮은 수치다. 하지만 그 상대인, 미지와의 조우는 전세계 박스오피스에서 3억 3백만달러를 벌어들인 초대박작이었다... 다만, 이 영화로 알 파치노 본인은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되었으니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82]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알 파치노가 출연한 영화 중 최악의 흥행 망작은 아니다. 그 누구도 혁명(1985)을 이기지는 못한다. 혁명은 3천만 달러의 제작비로 그의 100분의 1수준인 30만 달러 가량을 벌어들인 그야말로 희대의 개망작으로, 할리우드 역사상 최악의 흥행 망작이었으며 그야말로 혁명에 비견될 충격적인 기록이다.[83] 본작에서는 마틴 쉰이 이 역할로 분했다.[84] 알 파치노가 거절한 후, 트래비스 역에 잭 니콜슨, 더스틴 호프만, 제프 브리지스, 존 보이트 등도 후보로 물망에 올랐다.[85] 단적인 예로, 알 파치노가 주연을 맡은 1977년 작 <바비 디필드>와 1982년 작 <브로드웨이에 막이 오를 때>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두 작품에서 알 파치노는 호연을 보여주며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되었으나, 작품은 비평과 흥행면에서 둘 다 모두 망했다. 원인은 연출력 부재. 안좋은 플롯과 시나리오도 한몫했겠지만, 기본적으로 영화의 중심을 잡아주고 목적지까지 추동하게 해주는 좋은 감독이 없다면 영화는 산으로 갈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두 영화.[86] 미 나탈리는 단역이기 때문에 백색 공포가 필모상 첫번째 영화로 알려져있다. 알 파치노 본인도 대부를 두번째 영화로 꼽으며 이 작품을 첫 작품으로 꼽는다.[87] 알 파치노랑 나스타샤 킨스키 주연으로 불의 전차로 유명한 휴 허드슨이 감독하고 당시 거액인 3천만 달러를 들여 만들어서 미국에서 겨우 35만 8천달러를 벌어들이며 전설적으로 망한 영화로서 혁명을 일으켰다는 비아냥까지 듣었으며 또한 다음 미국 독립 혁명을 다룰 영화는 이 영화가 너무나도 망해서 2776년 1000주년을 기념해서 나올 것이다라는 비아냥적인 평까지 듣었다.[88] 원제목은 '사랑의 바다'인데 한국에선 이 제목이 하두 쓰인 제목이라 사랑의 파도로 개봉했다. 파치노 연기일생 전성기의 에너지 넘치는, 불타는 듯한 연기스타일과 대비되는 비교적 정적인 (그러나 폭발할때는 폭발하는) 후반기의 연기스타일이 확립된 첫 작품으로 보통 여인의 향기를 꼽지만 사실 이 작품에서 먼저 나왔다. 과도기적인 작품이라 젊은 시절 파치노 특유의 에너지도 어느 정도 남아있긴 하다. 평은 괜찮았지만 크게 흥행하진 못했는데 파치노 본인으로선 나름 의미가 있는 작품인것이, 80년대 초중반 찍은 영화들 중 스카페이스를 빼곤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하고 연극판에서 주로 활동 중이다 돌아와 찍은 첫 작품이기 때문이다.[89] 극작가 데이빗 마멧의 연극 각본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로 조연상 후보이긴 하지만, 부동산 중개업체 내 5명의 직원을 소재로 하는 내용으로 사실상 주연으로 봐도 무방하다. 다른 출연배우는 잭 레먼, 케빈 스페이시, 에드 해리스, 알란 아킨, 조나단 프라이스, 알렉 볼드윈 등으로 어마어마한 이름값들을 가진 배우들이다. 여인의 향기로 주연상을 받긴 했지만, 글렌게리 글렌 로즈의 로마 역을 더 높게 치는 경우도 있다. 알 파치노의 깐족거리는 연기가 일품이다. 이에 덧붙여, 영화 막판부 본인의 영업에 훼방을 놓은 케빈 스페이시에게 알 파치노가 욕설을 섞어가며 꾸짖는 장면은 지금도 알 파치노 팬들 사이에서 종종 회자되는 명장면이다.[90] 다만 이는 주목도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여인의 향기에서는 원맨쇼에 가까울 정도로 알 파치노 혼자서 영화를 이끌어 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으나, 글렌게리 글렌 로스에서는 잭 레먼과 알렉 볼드윈의 연기가 매우 훌륭했던 탓도 있다. 이 때문에 아무래도 주목도 측면에서 원맨쇼를 펼친 여인의 향기에서 보다는 수상에 있어 손해 아닌 손해를 볼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알렉 볼드윈이 세일즈맨들에게 호통에 가까운 일장 연설 하는 장면과 잭 레먼이 케빈 스페이시와 설전을 벌이며 비굴한 모습과 화난 모습을 경계 없이 드나들며 세일즈맨의 애환을 표현하여 세일즈 맨 그 자체로 잘 담아낸 모습은 아직까지도 인구에 회자될 정도의 퍼포먼스였다.[91] 참고로 알 파치노는 2012년 리바이벌한 연극에서는 셜리 르빈(92년 영화에선 잭 레먼이 연기) 역을 연기했다. 참고로 연극 내 로마 역할은 바비 카나베일이 연기. [92] 뉴욕 브로드웨이가 아닌 보스턴의 Charles Playhouse에서 공연했다. 소규모 카페 공연을 연출한 경험은 많았던 알 파치노이지만 정식으로 극장에서 연출을 맡은 건 이때가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