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 전방후원분 - yeongsangang jeonbanghuwonbun

영산강 전방후원분 - yeongsangang jeonbanghuwonbun

빛고을 광주에는 특이한 고분 3기가 있다. 명화동과 월계동에 위치한 이 무덤은 삼국시대의 보통 무덤과는 외모가 전혀 다르다. 앞쪽은 네모나고 뒤쪽은 둥근데, 서기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일본에서 크게 유행한 전방후원분이라는 무덤이다. 왜 백제 땅에 일본식 무덤이 만들어진 것일까?

우리나라에 전방후원분이 존재함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80년대 초반이었다. 고성 송학동1호분 등 몇몇 무덤이 전방후원분으로 지목되면서 일본 전방후원분의 기원이 한국에 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후 전방후원분의 존재를 정밀하게 추적하던 중 마침내 전형적인 예가 해남, 광주, 함평 등지에서 속속 발견되기에 이르렀다.

이 새로운 발견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먼저 국내에서는 이 무덤의 존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한반도의 남부지역에 일본식 무덤이 있고 그 속에서 일본유물이 출토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식민사관의 잔재인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하지 않을까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무덤이 일본의 최고식最古式 전방후원분보다 더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증거를 찾으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연구가 진척되면서 이 무덤은 일본 전방후원분 가운데서도 늦은 시기의 무덤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일본과 국내의 일부 학자들의 경우 이 무덤은 백제에 편입되지 않고 있던 ‘모한慕韓’(마한의 후신이라고 파악) 지배층이 남긴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왜인이 그 주인공일 것으로 단정하기도 하였다.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서기 5~6세기대 백제는 매우 미약한 국가로 폄하된다.

영산강 전방후원분 - yeongsangang jeonbanghuwonbun

이 지역의 전방후원분 외형은 일본의 무덤과 동일하지만 내부 구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차이점 또한 많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일본의 석실 안에는 집모양석관이 안치되고 있음에 비하여 국내의 경우 목관이 사용하고 있다. 또한 왜인의 무덤이라면 그 속에 부장된 유물 가운데 일본에서 제작된 것이 다수 포함되어야 하나 일부분으로 제한된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외에 영산강유역의 방형봉토분은 외형이나 축조방식이 전방후원분과 유사하므로 이 지역에서 왜의 전방후원분을 수용하는데 기술적인 혹은 정서적인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이곳에 전방후원분이 축조되던 시기는 1세기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고 무덤의 수량도 10여기에 불과하며 중심지인 나주에서 꽤 떨어진 외곽에 흩어져 분포한다. 이 시기에만 왜인들이 본국으로 귀장歸葬 하지 않고 현지에 무덤을 썼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오히려 주인공은 토착세력 가운데 새로이 성장하던 층으로 보면 어떨까 한다. 그들은 아마도 왜와 가까이 지내면서 나름대로의 세력을 확보하고 나주 복암리고분군의 주인공으로 대표되는 기존 중심세력에 예속되지 않는 독자성을 새로운 묘제로 표현하려 한 것은 아닐까?

영산강 전방후원분 - yeongsangang jeonbanghuwonbun

글 사진 = 이한상 /현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났다. 부산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한국고대사 연구로 문학석사와 문학박사학위를, 일본 후쿠오카대학 인문과학연구과에서 고고학으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92년부터 2003년까지 국립공주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학예연구사 및 학예연구관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동양대학교 문화재발굴보존학과 교수를 거쳐 2007년부터는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주요저서로는『황금의 나라 신라』(2004, 김영사),『공예1-고분미술』(2006, 예경),『국가형성의 고고학』(2008,사회평론, 공저),『고고자료에서 찾은 고구려인의 삶과 문화』(2006, 고구려연구재단, 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