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설 근거 - imnailbonbuseol geungeo

2020 국정감사 임나일본부설 학계의 객관적 해석은 식민사학 정설화 수용 의미

2020년 국정감사에서 임나일본부설에 관하여 국립중앙박물관의 답변에서 학계의 객관적인 해석으로 전시한 결과를 통하여 한국의 사학계에 뿌리를 내린 식민사학의 토착화를 간략하게 살피면서 임나일본부설의 불식 당위성을 제안한다.

○ [보도자료 출처] 이현경,《[2020국정감사] 배기동 "'가야전' 임나일본부설 관계 없어…학계와 객관적 해석"》, 뉴스핌, 2020.10.19.,

【보도자료 (1)】[배현진 의원은 ‘국민 신문고’에도 ‘가야’ 전시가 일본식민관 주입한다는 게시글이 올라왔다고 언급했다. 그는 “가야사가 일본식민 역사관에 대한 전시라는 비판글이 게재되자 국립중앙박물관 측에서는 ‘가야사 연구에 6세기 이후 편찬된 ‘일본서기’ 자료를 활용하는 것을 학계에서 보편화된 일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현재 이 답변은 국민 신문고는 비공개 처리됐다”고 꼬집었다.]

【가야사 연구 ‘일본서기’ 활용 학계 보편화는 임나일본부설 식민사학 정설화 수용 의미】
▲ 서기 720년에 간행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약자로 사용한 서기(書記)는 정설로 수용은 문제점이 수반된다. 그 당시 한반도에 고구려는 668년에 멸망하고, 백제는 660년에 멸망한 이후 편찬한 《일본서기(日本書紀) 권제30》은 제40세 지통천황(持通天皇, 690-697)까지 사서는 중국 정사(正史)인 《삼국지(三國志)》 왜전(倭傳)에서 왜여왕(倭女王) 비미호(卑彌呼)의 국호는 왜국(倭國)이며, 후한(後漢) 환제(桓帝)ㆍ영제(靈帝)의 치세(146~189) 사이에 왜국에서 대란이 발생했으며, 조위(曹魏) 경초(景初) 3년(239)에 비미호(卑彌呼)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했으며, 왜노국(倭奴國)과 왜국(倭國)의 국경 전투가 발생했으며, 한국 정사(正史)인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 20년(173) 비미호(卑彌乎) 사신을 파견한 사실에서 왜국(倭國)의 비미호(卑彌呼)가 재위한 절대 연도가 고증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왜곡을 자행한 조선총독부 수사관 스에마쓰야스카즈(末松保和)는《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의 '임나약연표(任那約年表)'에서 4세기 기사년 369년부터 562년까지 임나멸망의 인위적인 식민사학을 근거로 한국과 일본에서 주류 사학계에서 정설로 굳어지게 되었다.

▲ 그 허구성은 369년에서 120년을 상대로 소급하면 249년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신공황후(神功皇后) 섭정 49년(249)에 7국을 평정하고 4읍을 격파하여 백제에게 주었다는 기사로부터 한반도에 식민역사가 토착하기 시작하였다.

▲ 조선총독부 수사관 스에마쓰야스카즈(末松保和)는 249년을 120년 하대로 조작하여 369년에 대화정권(大和正權)[야마토정권]에서 기사년 369년부터 562년까지 한강 이남을 식민통치한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의 인위적인 식민사학은 통설로 수용한 식민사학이 명백하다.

▲ 따라서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신공황후(神功皇后)는 비미호(卑彌呼)와 동일한 인물로 조작하면서 2주갑인상(二周甲引上)을 통하여 대화정권(大和正權)에서 한반도에 임나일본부의 설치로 식민역사로 날조한 것이다.

【보도자료 (2)】[배기동 관장은 “국립박물관은 가장 객관적인 차원에서 판단하고, 학계의 도움을 얻어 전시를 구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국립박물관은 식민사관을 전시하지 않는다. 그 근처만 가더라도 박물관의 큰 오명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일본인이 날조한 임나일본부설의 식민사학을 근거로 전시한 국립중앙박물관】
▲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한 4세기 연표에서 “369년에 가야 7국(비사벌,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백제․왜연합의 공격을 받음(서기)”은《일본서기》신공황후 섭정 49년(249) 3월,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比自㶱)ㆍ남가라(南加羅)ㆍ녹국(㖨國)ㆍ안라(安羅)ㆍ다라(多羅)ㆍ탁순(卓淳)ㆍ가라(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중략> 이 때 비리(比利)ㆍ벽중(辟中)ㆍ포미지(布彌支)ㆍ반고(半古)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라는 기사를 변조한 것이다.

▲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한 6세기 연표에서 “가라국, 신라의 침략으로 멸망(사기) (서기)에는 6월 임나 10국 멸망으로 기록”은 《일본서기》흠명천황(欽明天皇) 23년(562) 봄 정월에, “신라가 임나관가(任那官家)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어떤 책에서는 21년에 임나가 멸망하였다고 한다. 통틀어 말하면 임나(任那)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고차국(古嵯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걸찬국(乞湌國), 임례국(稔禮國) 등 모두 열 나라이다.”라는 임나십국을 정설로 수용한 것이다.

▲ 그 허구성은《일본서기》에 신공황후 섭정 49년(249)에 7국 평정 기사에서 120년을 하대하여 369년으로 조작은 자기모순으로 기사년 369년은 인덕천황(仁德天皇) 재위 57년에 해당하는 절대 편년에서 거짓으로 드러난다.

【한국의 주류 사학계에서 식민사학을 정설로 수용한 자기모순】
▲ 첫째, 일본의 역사 연표에서 한국의 삼국초기는 불신하면서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를 한국의 고고학에서 전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역사는 삼국초기의 역사가 아니라 원삼국시대로 변형하면서 《삼국사기》의 초기 역사는 인정하지 불신하기 위하여 이른바 2주갑인상(二周甲引上)이라는 120년을 하대로 날조하여 일본인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에 의하여 한국의 고대사에서 단군조선은 송두리째 말살한 것이다.

▲ 둘째,《일본서기》는 가필이 현저하여 위서(僞書)라고 폄훼하면서도 가야역사의 복원에 사료의 절대 부족으로 차용하면서 식민사학의 세탁을 하게 되는데, 성열현인 우륵을 이용하여 12곡명을《일본서기》에 임나제국(任那諸國)으로 인위적으로 비정한 결과 우륵은 임나의 사이기국인으로 전도하여 정설로 수용하는 자기모순을 초래하고 있다. 이러한 임나일본부설을 감추기 위하여 임나제국을 가야제국과 대가야연맹으로 기만하여 한반도에 임나일본부설을 토착시킨 것이다.

▲ 셋째,《일본서기》신공황후 섭정 49년(249) 3월, 7국 4읍은 1차 아유카이후사노신(鮎貝房之進)가 한반도에 비정한 것을 2차 스에마쓰야스카즈(末松保和)가 정설로 수용하면서 우륵(于勒)이 탄생한 청풍 성열현(省熱縣)과 성열성(省熱城)을 임나 사이기국(斯二岐國)의 프레임을 씌워서 임나제국에 비정을 토대로 3차 다나카도시아키(田中俊明)가 우륵의 12곡을 대가야연맹으로 변조하여 한반도에 임나일본부설을 완벽하게 토착시켰다. 이후 한국인에 의하여 정구복(鄭求福)ㆍ노중국(盧重國)ㆍ신동하(申東河)ㆍ김태식(金泰植)ㆍ권덕영(權悳永)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간한《역주삼국사기4-주석편(하)》(2014)에서 임나일본부설을 정설로 수용하는 동시에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신공황후(神功皇后) 섭정 49년(249)에 7국 4읍과 562년에 임나십국을 한반도에 정설로 수용하고 있다. 이러한 식민사학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jm)에 무비판적으로 등재하는 동시에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嘉落國史蹟開發硏究院)에서 발간한《(日本六國史)韓國關係記事:譯註》(1994)에 한반도에 임나를 수용한 주석을 전재하여 홍보하고 있다. 한국 정사에 일체 임나제국에 관한 지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제공하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에 임나왜곡을 등재하여 한반도에서 사실적인 식민역사를 홍보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 식민사학 불식 국가의 정체성 수립 관건】
▲ 첫째, 동양의 한자문화권역에서 동일한 지명은 중국, 한국, 일본에 산포한 사실에서 가야권역에 고유명사로 토착시키려는 임나일본부설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함정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가야=임나”로 통용하는 식민사학의 일탈은 임나의 지리적인 위치를 왜국 열도에 소재를 재인식이 요구된다.

▲ 둘째, 중국과 한국 정사에 왜국(倭國)의 비미호(卑彌呼)는 대화정권(大和政權)의 전신으로 신공황후는 근거가 없는 허구성이 명백하며, 서기 200년에 신공황후가 신탁(神託)한 신병(神兵)이 신라정벌은 역사성이 없다.

▲ 셋째, 왜국은 670년 일본(日本)의 국호를 개정한 사실에서 720년에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거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용언은 어불성설이다.

▲ 넷째,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숭신천황(崇神天皇) 65년(기원전 33년)에 “任那者去筑紫國 二千餘里 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라는 사실에서 계림(鷄林)의 서남쪽은 지금의 대마도에 소재한 사실과 6가야의 종주국인 가락국이 서기 42년에 건국한 사실에서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임나는 한반도에 비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즉, 가야국이 건국하기 이전에 임나국이 왜국열도에 소재한 사실이다. 특히 562년 이후에《일본서기》효덕천황(孝德天皇) 2년(646) 9월에, “임나의 조(調)를 그만두었다.”라는 사실에서 임나는 통상 가야와 동일한 한반도에 국명으로 본 것은 역사적인 실체가 없는 오류가 명백하다.

▲ 다섯째, 한반도에 임나일본부설이 보편적으로 토착한 것은 비단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에서 임나를 가야로 모호한 문구의 내면에는 임나일본부설을 수용하는 식민사학은 보편적인 식민사학이 토착한 것을 의미한다. 임나일본부설이 한반도에 뿌리는 내릴 수 있는 원인은 의령군에서 임나 사이기국을 수용하고, 합천군에서 임나 다라국을 수용하고, 우륵의 12곡을 악용하여 전라도 일원까지 식민사학을 비정한 것을 한국의 주류 사학계에서 가야로 변조하여 수용을 불식해야 한다.

▲ 여섯째, 변진은 삼한의 종족이라는 정통성은 왜국의 임나와 천조대신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식민사학을 불식시켜 한민족의 정체성 수립은 국가의 명제이다.

[첨부]《大和の考古學》(昭和 57年) ‘奈良縣 遺跡年表’에 삼국초기를 대체한 원삼국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