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에 관한 시 - si e gwanhan si

(언어)’에 관한 시(모음) 

* 꽃과 언어          -문덕수-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현대문학; 1961. 3>

* 언어의 꽃씨                     -김예성(1953- )

어제는 남의 말에 쉽게 요동했습니다.

이젠 말랑말랑한 거짓말이 유혹해도

입 다물고, 그 눈짓 속임수도 다 털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흥분한 언어의 씨앗을 받아

조심스레 흙을 파 뒤집어서

고운 음성으로 피어날 진실의 꽃씨를

가슴 꾹꾹 눌러 심습니다.

* 꽃의 말                -황금찬(1918-)

사람아.

입이 꽃처럼 고와라.

그래야 말도

꽃처럼 하리라.

사람아.

* ()에 대하여                       -김이원(1962-)

입에 장미꽃을 물었다

꽃에 달린 가시가 찔려 몹시 아프다

눈을 감고 그래도 여전히 장미꽃은

아름다운 꽃이라고 생각한다

말은 못한다

장미꽃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김용택(1948-)

세상에서 그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는

그보다 더 따뜻할 수 있는

그보다 더 빛나는 말이 있을 리 없겠지요

당신....

-시집 <그대 거침없는 사람>

* 말의 무게                   -주강식-

거짓말의 무게는 1g

선생의 말은 5g

노인 말은 0g

자식 말은 1

모든 말

부도난 시대에

자식 말만 무겁다

* 말의 빛              -이해인-

쓰면 쓸수록 정드는 오래된 말

닦을수록 빛을 내며 자라는

고운 우리말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억지 부리지 않아도

하늘에 절로 피는 노을 빛

나를 내어주려고

내가 타오르는 빛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언제나 부담 없는

푸르른 소나무 빛

나를 키우려고

내가 싱그러워지는 빛

"용서하세요"라는 말은

부끄러워 스러지는

겸허한 반딧불 빛

나를 비우려고

내가 작아지는 빛

-시집 <작은 위로; 2002, 열림원> 

* 나를 키우는 말           -이해인(1945-)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해서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이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시집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 저곳              -박형준(1966-)

공중이란 말

참 좋지요

중심이 비어서

새들이

꽉 찬

저곳

그대와

그 안에서

방을 들이고

아이를 낳고

냄새를 피웠으면

공중(空中)이라는

뼛속이 비어서

하늘 끝까지

날아가는

새떼

-시집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 햇빛이 말을 걸다              -권대웅(1962-)

길을 걷는데

햇빛이 이마를 툭 건드린다

봄이야

그 말을 하나 하려고

수백 광년을 달려온 빛 하나가

내 이마를 건드리며 떨어진 것이다

나무 한 잎 피우려고

잠든 꽃잎의 눈꺼풀 깨우려고

지상에 내려오는 햇빛들

나에게 사명을 다하며 떨어진 햇빛을 보다가

문득 나는 이 세상의 모든 햇빛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강물에게 나뭇잎에게 세상의 모든 플랑크톤들에게

말을 걸며 내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반짝이며 날아가는 물방울들

초록으로 빨강으로 답하는 풀잎들 꽃들

눈부심으로 가득 차 서로 통하고 있었다

봄이야

라고 말하며 떨어지는 햇빛에 귀를 기울여본다

그의 소리를 듣고 푸른 귀 하나가

땅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시집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 문학동네> 

* 좋은 말을 하고 살면            -오광수(1953-)

말 한 마디가 당신입니다

좋은 말을 하면 좋은 사람이 되고

아름다운 말을 하면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말 한 마디가 당신의 생활입니다

험한 말을 하는 생활은 험할 수밖에 없고

고운 말을 하는 생활은 고와집니다

말 한 마디가 당신의 이웃입니다

친절한 말을 하면 모두 친절한 이웃이 되고

거친 말을 하면 거북한 관계가 됩니다

말 한 마디가 당신의 미래입니다

긍정적인 말을 하면 아름다운 소망을 이루지만

부정적인 말을 하면 실패만 되풀이됩니다

말 한 마디에 이제 당신이 달라집니다

예의바르며 겸손한 말은 존경을 받습니다

진실하며 자신 있는 말은 신뢰를 받습니다

좋은 말을 하고 살면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 통한다는 말                 -손세실리아(1963-)

통한다는 말, 이 말처럼

사람을 단박에 기분 좋게 만드는 말도 드물지

두고두고 가슴 설레게 하는 말 또한 드물지

그 속엔

어디로든 막힘 없이 들고나는 자유로운 영혼과

흐르는 눈물 닦아주는 위로의 손길이 담겨 있지

혈관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도 통한다 하고

물과 바람과 공기의 순환도 통한다 하지 않던가

거기 깃든 순정한 마음으로

살아가야지 사랑해야지

통한다는 말, 이 말처럼

늑골이 통째로 묵지근해지는 연민의 말도 드물지

갑갑한 숨통 툭 터 모두를 살려내는 말 또한 드물지

-<현대시학; 2009. 2>

* 백지의 말                   -이기철(1943-)

나의 몸은 언제나 하얗게 비워두겠습니다

네 모는 날카로워도 속은 늘 부드럽겠습니다

설령 글씨를 썼다 해도 여백은 늘 갖고 있겠습니다

진한 물감이 있어도 내 몸을 칠하지 않겠습니다

가까이 가고 싶어도 늘 멀리 떨어져 있겠습니다

바람이 불면 납작하게 엎드리겠습니다

칼날이 다가오면 물처럼 연해지겠습니다

그러나 불빛에는 되도록 반짝이겠습니다

노래가 다가오면 치렁치렁 몸으로 받겠습니다

언제나 당신이 들어올 문을 열어두겠습니다

당신이 들어오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향기가 되겠습니다

그땐 당신이 내 몸에 단 한 폭 그림을 그리십시오

그러기 위해 한 필 붓을 마련해 두겠습니다

* ´아빠´란 말               -김시종(1942-)

시인은 선민(選民)이 아니라,

신의 저주를 받은 사람.

왜 이리 心身

안착(安着)을 못하고

밤낮 방황하고 있는가.

중년이 되도록 제 길을 못 찾고

낯선 곳을 헤매는가?

젊은 그니와 몰래 만나고 온 날 밤,

˝아빠! 이제 오세요.˝

막내가 찡하도록 반겨주었다.

아이의 ´아빠´란 말이

평소 옆 잘 돌아보는 나에게

앞만 보고 살라는 뜻의,

´앞 봐로 들렸다.

*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조병화(1921-2003)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이 말 한마디

˝세상 어지럽게 많은 말들을 뿌렸습니다˝

다 잊어 주십시오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이 말 한마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다 잊어 주십시오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이 말 한마디

˝당신의 사랑의 은혜 무량했습니다˝

보답 못한 거 다 잊어 주십시오

,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이 말 한마디

다 잊어 주십시오.

* 말의 힘                 -황인숙(1958-)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

머릿속에 가득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뜨려보자!

* 문답법을 버리다                -이성선(1941-2001)

산에 와서 문답법을

버리다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구름을 조용히 쳐다보는 것

그렇게 길을 가는 것

이제는 이것뿐

여기 들면

말은 똥이다

* 풀잎                    -박성룡(1932-2002)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하고 그를 부를 때는,

우리들의 입 속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

바람이 부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몸을 흔들까요.

소나기가 오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또 몸을 통통거릴까요.

그러나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 '풀잎'하고 자꾸 부르면,

우리의 몸과 맘도 어느 덧

푸른 풀잎이 돼 버리거든요.

* 나무는 말을 삼간다               -강수성(아동문학가)

나무는

말을 못 하는 것이 아니다

말을 삼가는 것이다.

할 말 있으면 새를 불러

가지 끝에 앉힌다.

새가 너무 말을 많이 하면

이웃 나무의 어깨 위로

옮겨 앉힌다.

동네가 시끄러우면

건너편 산으로

휘잉 새를 날려 보내기도 한다.

* 귀                       -정현정(아동문학가)

입의 문

닫을 수 있고

눈의 문

닫을 수 있지만

귀는

문 없이

산다

귀와 귀 사이

생각이란

체 하나

걸어 놓고

들어오는 말들 걸러 내면서 산다.

* 말하라                     -이동윤-

땅 속의 뿌리를

보지 못하면서

꽃을 말하지 말라

뭇 짐승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서

산을 말하지 말라

별이 어둠과 있음을

알지 못하면서

우주를 말하지 말라

그러나 세상 한 티끌도

모른다 함은

언제든 순순히 말하라

* 흰 종이의 숨결               -정현종(1939-)

흔히 한 장의 백지가

그 위에 쓰여지는 말보다

더 깊고,

그 가장자리는

허공에 닿아 있으므로 가없는

무슨 소리를 울려 보내고 있는 때가 많다.

거기 쓰는 말이

그 흰 종이의 숨결을 손상하지 않는다면, 상품이고

허공의 숨결로 숨을 쉰다면, 명품이다.

* 신이 내게 묻는다면                 -천양희-

무너진 흙더미 속에서

풀이 돋는다

신이 내게 묻는다면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리

저 미물보다

더 무엇이라고 말을 하리

다만 부끄러워

때때로 울었노라

대답할 수 있을 뿐

풀은 자라

푸른 숲을 이루고

조용히 그늘을 만들 때

말만 많은 우리

뼈대도 없이 볼품도 없이

키만 커간다

신이 내게 묻는다면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리

다만 부끄러워

때때로 울었노라

대답할 수 있을 뿐

* 침묵 수행                -김종제-

눈과 얼음으로

담벼락을 높이 둘러친

겨울숲이 안거에 들었다

봉쇄 수도원처럼

침묵으로 정진하고 있다

눈 내리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새 날아가는 소리도

멋모르고 숲속에 들어왔다가

얼어붙은 채 허공에 걸려있다

길도 끊기고

한 번 발 들이밀면

결코 밖으로 나갈 수가 없는

무덤 같은 곳이라

저절로 숨이 턱턱 막히는 곳이다

겨울숲에서는

살과 살이 붙어서내는

화로 같은 말을 잃어버릴 것이다

뼈와 뼈가 부딪혀내는

칼날 같은 소리를 잊어버릴 것이다

겨울 숲에

한참 앉아있으면

안거 끝내고 나가는

나무가 하는 말이라든가

바위의 소리라든가

눈 깜빡거리며 들을 수 있겠다

* 묵언(默言)                 -정연복-

내 나이

어느새 쉰 셋

불혹의 고개 넘은 지

오래

이제 침묵으로

말할 때가 되었다

입으로 내뱉은 말

많은 날에는

마음 한구석이 왠지

허허롭고 편치 않다

앞으로 남은

세월에는

입은 바위처럼 무겁게

귀는 대문처럼 활짝 열고

마음은 깃털같이 가볍게

하루하루 살아야지

가슴속 깊이

푹 익은 얘기

말없이 눈빛으로 말해야지

<엮은이: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