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리족 식인풍습 - maolijog sig-inpungseub

뉴질랜드의 일상생활에 깊게 배어있는 마오리족의 문화는 어느 곳에서도 쉽게 경험할수 없는 독특하고 놀라운 문화로 많은 여행자들을 설레이게 하며 방문자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한다.

오늘은 우리가 방송을 통해 친숙해진 마오리족에 대해 살펴볼까한다.

마오리족의 토착문화, 그 시작

마오리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뉴질랜드의 원주민으로 마오리어로 마오리는 '보통의', '일반적인'이라는 형용사이며 자신들 스스로를 탕가타 훼누아(Tangata whenua:땅의 주인)라 부르며 폴리네시아 동부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어보리진이 학살당한 것이나 티즈매니아 원주민이 사냥놀이의 명분으로 백인들에게 멸족당한 것과는 달리, 뉴질랜드의 마오리 족은 스스로를 위해 싸우고 지키며 와이탕이 조약-1840년 2월 뉴질랜드 북섬 와이탕이지역에서 당시 무역충돌이 끊이지 않았던 원주민 마오리족과 영국과 체결된 식민지조약이다.-으로 백인들과 동당한 관계에서 한 나라를 이루게 되었다. 와이탕이 조약은 3개조로 되어있는 간단한 조약으로 뉴질랜드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뉴질랜드를 제 2의 민족국가로 규정짓는 성격을 갖게 되었다. 또한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됨을 의미하는 조약이었다. 간단한 3개의 조약이라고는 하지만 언어의 차이로 인해 21세기인 오늘날에도 마오리 권리의 문제로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해서 1843년 30여년간 마오리 반란이 일어나고, 뉴질랜드 정부에 진압되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이 결과로 공용어를 영어뿐 아니라 마오리어를 추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뉴질랜드라 불리는 이 땅에 1,000년전(이들은 문자가 없었기에 구전으로 내려오는 신화와 전설을 통해 짐작해보자면) 처음 발을 디딘 마오리족은 이 땅을 아오테아로아(Ao Tea Roa)라고 불렀는데 이는 마오리 언어로 순서대로 구름, 하얀색을, 길다라는 세부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길고 흰 구름의 땅'이라는 의미이다. 이들은 10세기경 기존의 땅에서의 오랜 전쟁과 부족한 식량문제를 해결하고자 카누를 타고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섰는데, 마오리 탐험가이자 대족장인 쿠페(Kupe)라는 사람이 바다 건너 대륙을 발견했지만, 그의 부인이 "땅이 아니라 긴 흰 구름"이라며 상륙을 말렸는데 여기에서 아오테아로아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원래의 마오리족은 폴리네시아의 타이티 섬 부근에 살던 종족으로 비슷한 타조를 잡아먹고 살아 '타조사냥꾼'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그들은 뉴질랜드로 건너올때 쿠마라(고구마의 일종), 감자, 우무, 조롱박 등을 가지고 왔다. 이들 대부분은 북섬에의 북반부에 정착해 땅을 파는 막대기와 호미 비슷한 삽으로 고구마를 재배하며 생활하였다. 처음에는 많은 부족으로 나뉘어 추장을 중심으로 생활하면서 부족 간의 전쟁을 되풀이 하였다. 와이탕이 조약을 할때 백인들이 각 부족의 추장의 서명을 받으러 다닐정도였다고 하니, 마오리족의 부족 간의 상황과 그들이 백인을 맞서 대치했던 상황을 그리며 그들의 용맹스러움을 짐작해 볼수 있는 부분이다.

현재 뉴질랜드의 인구중 14%를 차지하는 이들은 이 나라의 주요 관광지, 문화로 소개되고 있다.

또한 여행을 하며 마오리어인 테레오 마오리(Te reo Maori)를 쉽게 듣고 접할 수 있는데, 뉴질랜드인은 거의 다 알정도로 흔히 쓰이고 있다고한다. 뉴질랜드의 상당수의 지명도 마오리어로 되어있어 현지인이나 방문자들도 쉽게 접할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언어에 관해서는 다음에 더 심도있게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사진 출처: Tourism New Zealand >

마오리족의 인사 홍이(Hongi)

코와 코를 비비는 마오리의 대표적이자 상징적 인사법이다. 서로 악수를 하며 코를 맞대는 인사인데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혹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표현으로 코를 대고 숨을 같이 쉬는 이 인사를 한다고 한다. 숨을 같이 쉰다는 것은 서로 에너지를 교류하는 것으로, 이로써 '당신과 나는 하나입니다'라는 마음을 나눈다고.

구체적인 인사법을 얘기해보자면, 우선 악수를 하고 손을 잡은채로 '키오라'(kia ora:안녕하세요)라고 말하면서 코를 두번 부딪친다.

주의사항으로는 코를 세번 부딪치면 청혼의 뜻이므로 절대 실수해서는 안되겠다.

기타로 마오리족 에티켓이 있다는데 이에 대해 간단히 집고 넘어가자.

1. 마오리족의 집이나, 빌딩 등의 사진을 찍기 전에 먼저 부족장의 추장이나 주인에게 사진찍어도 되는지 체크할것!

2. 마오리족의 무덤이나 제한구역은 함부로 걸어다니지 말자.

3. 방문자들의 만남의 장소인 와레누이(Wharenui)에서는 음식반입이 안되며 신발을 꼭 벗어야 한다.

4. 마오리족의 사당이자 만남의 장소인-사람 머리에 고래몸을 가진 십이지신과 같은 사람과 동물토템의 호환환신사상을 바탕으로 한 사당-, 마래(Marae)에 들어갈때는 허락을 구한다.

5. 식사전 음식을 받으면 먹기전에 식사에 대한 감사와 축복을 기다려야 한다.

<출처: 위키피디아>

마오리족의 사회

마오리족의 사회는 매우 엄격한 신분질서사회로 상위계급에는 족장과 전사들이 있엇고, 여자와 노예는 하위계급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 하는 수단은 마나(mana)-남태평양 멜라네시아 일대의 원시적 세계관에서 초인적 힘을 통칭하는 말-였는데 마오리족은 모든 이들에게 서로 다른 마나가 조재한다고 믿었다. 이 마나는 마나가 높은 이로부터 물려받거나 공을 세워 부족 전체에 도움을 주거나, 아니면 죽은 적의 살을 먹음으로써 마나를 흡수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우린 마오리족이 식인을 행했다고 알수 있는데, 이는 의식의 일환으로 적의 살을 먹음으로써 그의 마나를 흡수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1643년에 네덜란드의 아벨타스만*Abel Tasman)이 이끄는 탐험대가 뉴질랜드에 상륙했을 때, 마오리족은 이들을 공격하고 죽은 선원들의 시체를 먹었다고 한다. 이에 질려버린 아벨 타스만은 그대로 철수, 마오리족은 한동안 평화로운 시기를 누렸다고 한다.

마나에 따라 이들의 행동은 제약이 가해졌는데, 이를 마오리어로 타푸(tapu)라고 부르는데 영어의 터부(taboo)와 같은 의미로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금기를 말한다. 이들의 타푸는 조상들의 무덤같은 신성한 장소와 마나가 높은 족장이나 전사들의 집, 티키(tiki)라고 부르는 우상-숭배하는 신-들을 모셔놓은 성소같은 곳의 출입을 제한하는 금기와 특정 음식에 대한 금기, 그리고 행동에 대한 금기를 대표라 할수 있다. 예를 들어 마나가 높은 이들만이 복잡한 문신을 할 수 있었고, 노예와 많은 부인을 소유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오리족의 마을은 파(pa)라고 불리는 요새로, 높은 망루와 목책, 구덩이 등으로 요새화되어있엇는데 마찬가지로 타푸가 존재하는 조상들의 무덤 또한 파 못지않게 요새화되어 있었다. 10세기 중엽 영국과의 갈등으로 인해 촉발된 마오리전쟁 당시 마오리족의 풍습에 익숙치 않던 영국군은 마오리족의 무덤을 마을로 오인하고 포격을 가하기도 했는데, 자신들의 마나를 훼손당한것으로 생각한 마오리족의 분노 앞에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경험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전투적인 마오리족은 승자와 패자중 어느 한쪽이 전멸을 당해 흡수당하면, 다른 제 3의 마오리 부족이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싸우고 또 한쪽이 망하면 다른 부족들이 견제를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쳇바퀴같은 전쟁 구조가 한동안 이루어지다 결국 족장끼리 합의를 하게되었다고 한다. 같은 민쪽끼리 싸우지 말고 갈등 해소와 전쟁해소를 춤으로 풀고 서로를 모욕하며 부족전체가 똑같은 동작으로 춤을 추는것이 포인트인 마오리족의 전통춤 하카(haka)가 되었다. 

마오리족의 문화예술

마오리족의 오랜 지식은 음악과 예술, 공예, 이야기, 화카파파(Whakapapa:조상의 계보) 암송을 통해 구전되었다. 조각과 세공, 타모코(Ta moko:문신)등 전통문화는 뉴질랜드 전역에서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데, 카파하카(Kapa haka)는 화음을 이루는 노래와 율동적인 춤, 격렬한 출전의 춤 하카(Haka)가 대표적인데, 뉴질랜드의 공식행사에서 이 하카를 공연한다. 이때 영어로 Dancing Haka라 하지 않고 Doing Haka라 하는데 이표현은 단순히 전통춤이 아니라 하나의 신성한 의식으로 간주하기 때문임을 알수 있다.

원래 하카는 마오리 전사들이 전쟁이 시작되기 전 서로가 자신들의 위력을 과시하고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해 정신무장을 하는 의식이었다. 

하카의 동작은 손으로 무릎을 치고, 눈을 부릅뜨고 혀를 빼 내밀며 상대방을 위협하는 동작 등으로 이루어지며 양쪽의 하카 퍼포먼스가 끝나면 양쪽의 추장들이 어느쪽이 더 맹렬하고 용맹하게 춤을 췄는지 판단하고 졌다고 생각되면 그대로 싸움없이 물러난다. 하카에서 이기면 적의 마나를 빼앗았다고 생각하고 만족하지만 진쪽은 마나를 빼앗겼지만 목숨은 건졌다고 안심하며 퇴장한다고한다. 이렇게 하카로 춤을 추며 울분이 풀리지 않는 경우는 그대로 실전전투로 돌입해서 맹렬하게 싸우기도 한다는데. 이건 아주 옛날이야기이다.

인간이 인간을 먹는 풍습을 ‘카니발리즘(cannibalism)’이라고 한다. 뉴기니 내륙 일부 지방, 중앙아프리카, 멜라네시아, 호주 각 지방, 뉴질랜드, 폴리네시아, 수마트라, 남북아메리카 등지에서 이 관습이 행해졌다.

마오리족은 전쟁에서 이길 경우 죽인 자의 살을 베어 축하 잔치에 사용했다. 또 바타쿠족은 인육을 거래했다. 대부분은 의례적으로 내장 등 인체의 특정 부분을 먹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혼과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런 식인 풍습을 일부 원시 부족의 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5일 ‘사이언스’ 지에 따르면  동물학자 롱아일랜드대 빌 슈트(Bill Schutt) 교수는 자신의 저서 ‘카니발리즘’을 통해 인간이 본능적으로 식인 풍습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단지 이 잔인한 습성을 억제하고 있을 따름이다.

언어·풍습이 다른 이민족 중에서 식인자의 오명을 쓰지 않은 민족이 없을 정도로 식인 풍속에 대한 소문이나 보고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인육을 먹는 식인행위가 정상적인 행위로 간주돼왔다는 의미다.

드 브리(Theodor de Bry, 1528-1598)의 판화. 당시 남아메리카를 탐험한 독일의 한스 스타든(Hans Staden)이 쓴 원주민들의 식인 기록을 판화로 제작했다. ⓒWikipedia

인육을 주술·식량 대용으로 사용   

과학적인 증거들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 동물 차원에서 이 식인 습성을 연구해온 과학자들은 연체동물·곤충과 같은 무척추 동물뿐만 아니라 포유류인 척추동물들까지 자연스럽게 동족을 먹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일부 무척추 동물의 경우 엄청난 수의 알과 애벌레 등을 생산해 영양보충은 말할 것도 없고, 또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일부 척추동물 역시 영양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동족 수가 너무 많을 때 새끼를 식량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새들 역시 죽은 새의 시체를 먹었다. 그리고 시체가 썩어 전염병을 유발하거나 시체 냄새가 퍼져나가 또 다른 포식자를 새 둥지로 오게 하는 일을 방지하고 있었다. 슈트 교수는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혐오스러운 식인 풍습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기근이 심했던 17, 18세기 유럽인이 가루로 만든 미라를 먹었다든지 지금도 많은 엄마들이 임신을 전후해 신생아의 태반을 먹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사람 역시 식량 대용으로, 혹은 의학적인 식인 풍습을 지속해오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한편 비행기 사고로 사람들이 외딴 지역에 착륙해 식량 부족에 허덕이고 있을 때 죽은 사람의 인육을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60년 미국에서 출생한 연쇄살인범 제프리 다머(Jeffrey Dahmer) 역시 인육을 먹은 확실한 사례다.

그는 18세이던 1978년 6월 첫 살인을 저질렀다. 1987년 이후에는 본격적인 살인행각을 시작해 체포될 때까지 17명을 살해한 다음 시신 일부를 먹거나 냉장고에 보관했다. 동성애자였던 그의 희생자는 모두 10~30대의 젊은 남성이었다.

인간의 식인 흔적 19세기까지 이어져  

슈트 박사는 적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시체를 먹은 것은 후손들에게 힘, 그리고 지혜와 용기 등을 부여하기 위한 의례적인 관습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관습이 세계 곳곳에서 진행돼 왔으며, 지금은 변칙적으로 발생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슈트와 같은 동물학자뿐만 아니라 고고학자들 역시 사람의 식인 풍습이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기원전 7~5세기 멕시코·온두라스·엘살바도르 등 중앙아메리카에 있었던 메소아메라칸(mesoamerican) 문명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 지역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식인 조리법을 알고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지난 2015년 이 식인 레시피를 복원했다. 이 조리법에 따르면 사람의 덩어리 고기를 끓여 먹거나 그릴, 혹은 석쇠를 사용해 구워먹도록 하고 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흔적들을 보면 끓여먹었던 인육이 노란 색을 띠고 있었는데 분석 결과 아나토(annatto), 삐삐안(pipián), 칠리(chilis) 등 특수 식물에게서 채취한 향신료를 다량 첨가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지난 2013년 미국 버지니아주의 동쪽에 있는 사적지 제임스타운(Jamestown)에서도 식인 풍습을 연상케 하는 흔적이 발견됐다. 20대 소녀의 유골이 발견됐는데 머리 부분이 매우 작게 조각조각 잘려 있었다. 다른 뼈들은 말과 개고기 흔적들과 함께 발견됐다.

고고학자들은 1609~1610년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다 인육을 먹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당시 이 지역에 살았던 제임스타운 지도자 조지 퍼시(George Percy)도 유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식량이 부족했던 제임스타운 거주자들이 무덤을 파헤쳐 훼손이 덜 된 시체를 먹었다는 것. 19세기 식인 풍습의 흔적도 발견되고 있다. 지난 2015년 고고학자들은 지난 1845년 미 북서부를 탐험한 프랭클린 탐험대(Franklin Expedituon) 유적을 발견했다.

시체 유적이 발견됐는데 칼질을 한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식량이 없어 죽은 동료의 인육을 먹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또한 뼈 흔적에서는 물 속에서 끓인 흔적이 발견됐는데 스푸를 만들어 먹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학자들은 인육을 먹는 풍습이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에서도 종종 나타나고 있는 인류의 오래된 관습이라고 보고 있다. 끔찍한 이야기지만 위기시 사람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