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설원 위에 한 사람이 덩그러니 서 있습니다. 거기다 무심하게 죽 그어진 수평선 우측으로 정갈하게 세로쓰기 된 네 글자는 오늘 소개할 하라켄야의 디자인 철학을 잘 대변하는 장면입니다. 금주는 아시아 기획편 네 번째로 디자이너들이 존경하는 디자이너 하라켄야와 일본의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하라켄야는 그래픽디자이너이며 무사시노미술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기도 합니다. 1976년, [일상의 디자인전]이라는 전시회가 유겐트스틸의 중심지였던 독일의 다룸슈타트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2006년, 일본의 액시스 갤러리에서는 [슈퍼 노멀]이라는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슈퍼 노멀전은 일상생활에서 무심코 사용하는 디자인의 제품들, 200여개를 제시하는 전시회였습니다. 아래는 슈퍼 노멀에 해당하는 디자인들의 예시입니다. <사토 마사히코 ‘출입국 확인 스탬프’> 해외 방문 시 여권에 찍히는 스탬프들은 사각이나 원형의 프레임으로 대부분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고 특별하지도 않은 도장들이지만 우리는 이 도장을 찍음으로써 그 나라와 첫인상을 맺습니다. <시게루 반 ‘네모 휴지’> 시게루 반은 건축의 소재로 종이를 사용해 종이 건축을 선보이며 친환경적 소재의 사용과 난민을 위한 건축을 선보이는 건축가입니다. <하라켄야 ‘마쓰야 백화점 리뉴얼 지퍼 프로젝트’> 하라켄야의 마쓰야 백화점 리뉴얼 공사 가림막 디자인 입니다. 이 슈퍼노멀의 특별함을 일본의 전통적인 미의식을 드러내 주는 용어로 ‘와비사비(侘寂)’와 ‘슈타쿠(手澤)’라고도 표현합니다. 시간의 풍화작용 속에서도 남아 있는 아름다움이라면 장식적이라기보다는 기능적인 아름다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슈퍼노멀은 우리가 무언가를 사용할 때 나타나는 아름다움의 메아리입니다.”(후카사와 나오토) 이런 슈퍼노멀이 왜 새삼 주목받고 있을까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일본의 디자이너들이 주창한 슈퍼노멀은 즉각적인 지각에 맞서 우리의 지각을
새롭게 갱신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본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미학론과도 닮아있습니다. 물론 차이는 있습니다. 또한, 하라켄야가 가지는 생각은 모더니스트들의 생각과 비슷한 측면이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라켄야의 디자인은 상업디자인에 대한 폭로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무지라는 브랜드가 우리에게 전달해준 가능성은 상업 디자인 안에서 자기 폭로적 수법을 통해 상업 디자인에서도 정신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측면입니다. 이는 소비자가 소비는 물론 제품개발, 유통과정까지 직접 참여하는 생산적 소비자로 거듭난다는 의미입니다. 비움에 대한 하라켄야의 디자인 철학을 잘 나타내는 인터뷰가 있어 인용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Q : 하라켄야씨 당신의 작품에서 흰색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Q : 컬러와 재료의 관계를 어떻게 보십니까? Q : 당신이 이번에 디자인한 무인양품 패키지에서 다양한 흰색 블라인드와 투명한 셀로판지를 사용했습니다. 어떤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것입니까? 우리는 매일 디자인을 하면서 다양한 여백과 대면하게 됩니다. ‘흰색 캔버스 앞에 섰을 때 느껴지는 공포심은 사실 창작에 대한 부담이나 새로운 것의 기피심 보다 과거로부터 차곡차곡 쌓인 무수히 많은 창작의 클리셰들이 보이지 않게 흰색 캔버스를 점령한 탓이다.’ 어쩌면 흰색 캔버스의 여백에서 느껴지는 저의 공포심은 창작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보다 클리셰들을 피해 가기 위한 체력적 소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작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여백에 대한 자기 철학 내지 사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 가치디자인그룹 SY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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