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양피지 나는 누구인가 - seoyang yangpiji naneun nugu-inga

1. 역사란 무엇인가?

기존 한국사와 관련된 책은 한국의 ‘영광스러운’ 과거를 재현하려는 입장에서 서술하는 경우가 많다. 자국의 역사에 대한 자존감을 느끼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고 그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태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자국의 역사를 드높이고자 타국의 역사를 깎아내리고 배타적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열린 시각에서 자국의 역사를 볼 수 있어야 하며 세계사에 비추어 한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은 그런 점에서 바람직하다.

먼저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자. 거의 모든 역사서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하면서 서술했을 것이나 입장에 따라 ‘역사’에 대한 인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사전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역사라는 개념은 원래 그리스어의 히스토리아(historia)에서 나온 것으로 이것이 영어로 히스토리(history)가 되었다. 그리스어의 히스토리아는 지식의 탐구를 의미한다.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바탕으로 대부분이 이야기의 형태로 전송되고 기록되었다. 탐구란 사건 배후에 있는 배경과 원인을 추적하여 인과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사실을 만드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역사의 탐구대상은 결국 인간으로 귀결된다.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헤로도토스의 책 《역사》에 이런 관점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 <사진>은 오스트리아 국회의사당에 있는 헤로도토스 조각상이다. 오스트리아 국민은 자국 출신도 아닌데 헤로도토스의 조각상을 국회의사당에 세워 놓았는데 이는 그 나라가 역사가 지닌 중요성을 깊이 받아들이는 것을 잘 보여준다.

동양에서는 사(史), 감(鑑), 통감(通鑑), 서(書), 기(記) 등 역사와 관련된 많은 용어가 있는데 이 중에 대표적인 것이 사(史)이다. 사(史)는 객관성을 상징하는 중(中)과 기록을 상징하는 수(手)의 합성어로 객관적으로 기록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사(史)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일, 사실을 기록하는 사관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를 통해 역사라는 것은 사관이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동양에서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사마천이다. 사마천의 대표적인 역사서로 《사기》라고 부르는 방대한 역사책이 있다. 《사기》를 전부 보기는 어렵다. 「본기(本紀)」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구성되어 분량이 방대하기 때문이다. 현재 완역이 되어 있고 본기와 세가 및 열전은 이야기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으므로 일단 읽기 시작하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원전을 읽기는 어렵지만, 각국에서 현재 사용하는 언어로 번역된 것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다. 사마천은 당시 벌어졌던 여러 가지 사건들을 재미있게 서술하면서도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쓰기 위해서 상당히 노력했다. 물론 그 인물이나 사건을 사마천이 직접 만나거나 목격한 것은 아니므로 학술적으로 살펴보면 신뢰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죽음보다 치욕적인 궁형이라는 형벌을 선택하고 적어간 사마천의 《사기》는 역사서로서 실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역사학은 시간과 공간을 벗어날 수 없다. 역사학은 기본적으로 시간 속에서 정해진 시기의 인간의 활동을 파악하는 학문으로 인간이 중요하다. 원래 인문학은 인간학이며 인문학에서 중요한 것이 역사학이라는 점에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영국의 외교관이자 역사가인 에드워드 카(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케임브리지 대학 강의 내용을 총 6장에 걸쳐 편집 보완하여 책으로 묶은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말은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여기에서 현재와 과거란 무엇일까? 과거라는 것은 기록물이며 현재라는 것은 역사가이다. 역사는 현재의 역사가 혹은 내가 과거의 기록물을 끊임없이 살펴보면서 대화를 하는 것이다. 인구 전문가들은 조만간 인류가 80억 명에 이를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80억 명은 생각이 다 다르니 똑같은 기록물을 가지고도 서로 다른 해석을 할 것이라는 점을 대전제로 한다면 결국 자국의 역사에 관한 서술도 다른 나라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는 열린 마음을 바탕으로 적어가야 할 것이다.

2. 역사를 통해 무엇을 배우는가?

그럼 우리는 왜 역사를 배우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일단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역사가 주는 효용성이 있다. 정체성이란 ‘나는 누구인가’를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다. ‘내가 나를 가장 잘 안다’라고 자신하지만 사실 우리는 자신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파악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보다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내 안에 숨겨져 있는 나를 새롭게 발견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을 것이고, 문득문득 놀라기도 할 것이다. 새로운 나를 발견할 때, 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때도 있어서 ‘내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라며 자부심을 느끼기도 할 터이고 어떤 경우에는 ‘내가 왜 이럴까, 왜 이 정도밖에 못 할까’라며 자책을 하기도 한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어렴풋하게 ‘아! 나는 이런 인간이구나’라고 파악하게 된다.

나도 젊었을 때는 나를 잘 몰랐던 것 같다. 역사를 배우면서 끊임없이 성찰하면서 ‘나’를 파악하고 내가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을 자각하는 순간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국적과 얼굴색은 다를지라도 각자 ‘나’라는 인간과 다른 인간이 맺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상대를 향한 사랑, 친절, 평화의 소중함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역사를 공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역사학은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고, 타인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정체성을 형성하고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미래에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를 전망해야 한다. 내가 소중한 만큼 타인도 소중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지나간 역사를 통해 미래에 대한 전망과 계획을 수립해야 하며 그 과정을 함께 하는 것은 역사학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과제일 것이다.

이 글의 직접적인 주제는 아니지만, 우리 삶의 큰 터전인 우주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자. 칼 세이건의 역작 《코스모스(cosmos)》는 우리에게 감동과 영감을 준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사마천의 《사기》와 마찬가지로 세계 각국에서 번역되고 많은 갈채를 받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나’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현재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은 기적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인식하게 되었다. 우주가 탄생한 것은 극히 우연적이고, 우주 속에서 태양계가 나오고 지구가 형성되고, 인류라고 하는 존재가 탄생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을 뚫고 인류가 발생했고 여기에 한국이라는 국가가 생겨나고 또 나의 조상이 있었고 그러면서 내가 태어난 것이다. 빅뱅이라는 것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조그만 점이 폭발해서 우주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거부할 수 없지만, 이것을 상식적으로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과학자들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고 이 팽창속도를 계산하면 우주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빅뱅이라는 것이 138억 년에 발생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팽창의 역으로 우주를 계속 축소하면 결국 하나의 점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폭발해야만 팽창이 되는 것이다. 그 점이 팽창하여 지금의 우주가 된 것을 계산해보면 138억 년의 기간이 지났다는 것이다. 빅뱅 이후 우주가 팽창하면서 태양계가 만들어지고 지구가 탄생했는데 그 시기를 지금으로부터 45억 년 전이라고 과학계는 설명하고 있다. 지구가 탄생했을 때는 생명체가 도저히 살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30억 년 전 지구에 생명체가 출현했고 오랜 시간을 거쳐 진화하게 된다.

이것을 처음으로 체계화한 것이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진화론을 주장할 때 대부분은 이것을 이단 사상이라고 평가하고 진화론을 터무니없는 설로 매도했다. 지금도 과학교육을 중시하는 미국에서조차 많은 사람이 진화론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진화론을 믿는 사람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어떤지 모르겠다. 진화론을 믿는다면 현재의 다양한 동식물에 대해 공통조상이 있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운석이 생명체를 남겼다는 것이 유력한 설이다. 이런 일이 가능할지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과학자들이 근거를 갖고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 믿든 믿지 않든 문제의식을 가지고 함께 고민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보는 관점에 거시적인 시각을 지닐 때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이다.

3. 한국사는 인류사의 일부

한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인류사, 더 나가 지구사와 우주사까지도 파악해야 하지만, 이것은 통섭적 연구를 통한 이후의 연구로 미루고 최소한 인류사적 시각으로 한국사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을 전제로 이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한국사는 인류사 일부인데 인류가 출현한 것도 지구사적 시각으로 보면 아주 최근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측면에서 보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과거의 일이지만.

우선 한가지 생각해볼 것이 있다. 나의 직계조상은 몇 명일까? 몇만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너무 복잡하니 한국인의 반만년 역사에 관해서만 답해보자. 사실 반만년 역사라고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한국인들이 그렇게 믿고 있고 아니라는 증거도 없으니 굳이 시비를 걸 필요는 없다. 계산하기 쉽게 한세대를 25살이라고 하면 대부분은 200명이라고 답한다. 또는 나를 빼고 199명이라고 답한다. 그런데 정답은 2의 200제곱이다. 왜냐하면, 직계조상은 나의 부계나, 모계가 다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계산하면 지금까지 지구상에 태어난 현생 인류를 더한 숫자보다 많다. 그렇다면 정답은 무엇일까? 알 수 없다는 것이 정답이다. 나의 직계조상들은 서로 피를 섞으며 공존하며 살았고 어느 직계조상들끼리 결혼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나의 많은 직계조상 중 한 분이라도 사망했다면 나의 존재는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내가 현재 생존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확률상 불가능한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현생 인류 누구를 만나도 알고 보면 다 나의 친척들인 셈이니 서로를 존중하고 공존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쉽게 동의할 수 있다.

한국사, 더 나아가 인류사는 더불어 만든 역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김치를 예를 들어 살펴보자. 한국인이 즐겨 먹는 김치가 언제 나왔을까? 한국인들은 이것을 한국 고유의 전통 음식이고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김치도 진화한 것이다. 김치를 검토해 보자. 한국을 대표하는 김치에는 고추가 들어있다. 그런데 고추의 원산지는 아메리카이다. 아메리카는 역사적으로 다른 대륙과는 오랫동안 단절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탐험’한 이후 교류를 통해 고추가 유럽으로 들어오고 이것이 다시 아시아로 전해지면서 한국에도 들어온 것이다. 학자들은 그 시기를 대체로 16세기에서 17세기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즐겨 먹는 형태의 김치는 17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한 예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인간과 상품뿐만 아니라 사상과 문화, 제도 등도 서로 교류하면서 재창조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완전히 고유한 것은 없다. 한국사를 인류사의 시각으로 바라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이유이다.

4. 한국사를 바라보는 인식 전환의 필요성

모든 것은 변화한다. ‘화려한’ 역사를 지닌 국가나 민족은 영원무궁토록 화려함을 유지하고 반대로 ‘초라한’ 역사를 지닌 곳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별 볼 일 없는 암울한 미래만이 있을 것인가? 인류사를 보면 그렇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 역으로 진행된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누구나 변화를 말하고 있지만 이제 이 ‘변화’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국사를 공부하는 한국인 대부분은 한국사에 대해 고정된 틀로 보려고 한다. 한국인은 처음부터 우수한 자질을 가진 민족임을 전제로 화려한 고대사를 강조하고, 그러한 과거가 있으므로 앞으로도 계속 세계 역사를 주도해 나가리라 전망한다. 그러한 전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화려한’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는 역사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과거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미국이 초대강국이 되었고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몽골은 현재 약소국으로 분류되어 있다. 또 국가가 강하거나 약하거나 하는 것이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처지에서는 관련이 없는 경우가 많다.

역사를 바라보는 인식도 변화한다. 과거에는 강자를 위대하고 본받아야 할 좌표로 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인류사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금은 ‘인권’이라든지 ‘평화’가 중시되고 있다. 소수자, 약자를 배려해야 한다는 인식을 상식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강대국의 역사가 현재 세계사 속에서 지배적인 측면이 여전히 강하다. 다만 과거와 비교할 때 역사학도 인권과 평화, 소수자, 약자에 관한 서술이 늘어나고 있고 앞으로 이러한 추세가 더욱 퍼질 것으로 전망한다. 나는 앞으로 인류사에 획기적인 인식 전환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플라톤의 동굴 우화는 지금도 인식 전환의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데 유용한 사례이다.

변화를 인정한다면 고정불변한 진리가 없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내 생각만 옳고 다른 사람 생각은 잘못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다.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상대방 상황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런 태도를 보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남에 대한 배려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남의 장점을 수용하고 배우며 자기 자신의 발전을 꾀하는 것도 중요하다.

고유문화만이 자랑스러운 것이고 다른 곳으로부터 문화가 도입되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반대로 자신의 문화를 다른 곳에 전파했다는 것에 대해 특별한 우월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우리는 특히 일본에 새로운 문화나 기술을 전파했기 때문에 일본이 발전한 것으로 생각하고 일본이 과거에 한국을 침략한 것을 배신행위로 간주한다. 물론 일본의 침략행위에 대해서는 비판을 해야 하지만 우리만이 시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좁은 견해이다.

배우고 학습하는 태도는 인류사회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창조하는 것 못지않게 배우는 자세가 상당히 중요하며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열린 마음이 있는 것이 더욱 자랑스러운 것이다. 이런 태도는 역사뿐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는 데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기능을 할 것이다. 사실 인류는 그동안 열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발전한 것이다. 물론 직선적인 발전만 한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며 발전해온 과정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종이를 예로 들어보자. 과거에는 기록물이 상당히 비쌌고 지배층만 누릴 수 있었다. 특히 서양에서는 양피지가 비싸서 일반인들이 책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반인들은 읽거나 심지어 접할 수조차 없었다. 구텐베르크가 인쇄 혁명을 일으킨 이후 일반인들도 책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인쇄 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여러 요인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결정적으로 종이 때문이다. 서양에서 처음으로 종이를 발명한 것이 아니다. 종이는 중국의 채륜이 발명한 것이다. 당나라와 이슬람이 충돌한 탈라스전투에서 중국이 패배하면서 종이를 제작한 기술자들이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고 제지기술이 서양에 전파된 것이다. 인류 역사가 발전하면서 이제 누구든지 지식을 만들고 책을 펴낼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사이버 공간에서 무한대의 기록물이 돌아다니고 있다. 누리는 정도가 아니고 기록물이 넘쳐나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다. 자, 그럼 다음번에는 간단하게 인류의 출현, 문명의 탄생을 살펴본 뒤 한반도에 미친 영향을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