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전서 15 1 11 - golindo jeonseo 15 1 11

(고린도전서 15장 1-11절)

5-1. 믿음이 좋다는 것

김병삼 목사 2007년 부활주일

만나교회  http://www.manna.or.kr/

(고린도전서 15장 1-11절)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아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들어가는 말

이번 시간은 우리가 다섯 번째의 의문을 풀어가는 시간으로 질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일까요?”

“믿음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우리를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것 중에 하나는 분명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봉사도 하고, 헌금 생활도 잘 하는데, 믿음이 좋다고 말하기에는 어쩐지 껄끄러운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뭔가 부족한 듯 보이지만 영적인 능력과 삶의 파워를 가진 크리스천들을 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믿음이 좋다는 것에 대한 기준이 무엇일까요?

“그 사람 참 믿음이 좋네.”라는 말이 과연 칭찬의 말일까요? 아니면 조롱의 말일까요?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말인, “교회 다니는 사람이 왜 그래? 믿음 좋은 네가 참아야지?” 등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까요?

얼마 전 아들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빠, 다른 건 다 참겠는데, 목사 아들이 왜 그래? 그러면 참을 수가 없어요. 제가 무얼 잘못하는지 모르겠어요!”

이 말은 저 역시도 경험했던 것이기에, 어쩌면 신앙인들이 경험하는 일이기에, 과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아야 잘하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 사람들과 잘 지내야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인지, 과연 그 기준이 무엇인지 이런 것들이 우리를 당혹케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신앙의 문제를 부활절에 다루게 된 것이 무척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신앙’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인 믿음의 의미를 묻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고린도전서 15장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요, 기독교 신앙의 진수가 들어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아니지만 14절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9절을 보면,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오늘 본문 말씀에 나와 있는 믿음의 본질이 거짓이라면, 그의 가르침도 헛것이며, 이것을 듣고 믿은 우리는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믿는 부활의 신앙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믿음이 무엇인지, 기독교인 됨이 무엇인지를 알려 준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요약하면 3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3절)는 ‘십자가의 도’

둘째, “성경대로 다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 .만삭되지 못한 내게도 보이셨다”(4-8)는 ‘부활의 사실’

셋째, “나의 나 된 것은. .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0)는 ‘성령님과 동행하는 은혜의 삶’입니다.

오늘 이 세 가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부활의 메시지는 무엇인지, 그리고 ‘믿음이 좋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오늘은 영화 [Chocolate]을 가지고 성경말씀과 함께 부활과 믿음의 의미를 찾아가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들어오실 때 초콜릿을 다 받으셨을 것입니다. 아직 먹지 마시고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 함께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실제 유럽에서는 부활절이 되면 초콜릿을 가족과 친지들에게 나누는 풍습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낯선 것이지만 그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예배를 마치고 난 후, 카페 파구스에서 이 영화를 함께 관람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많은 신앙과 삶에 도움이 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초콜릿’이라는 영화는 종교 영화가 아닙니다.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이 영화를 수년전 보고는 꼭 부활절에 이 영화를 가지고 설교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주인공 줄리엣 비노쉬의 연기도 좋구요, 아주 따뜻한 가족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시작은 묘하게도 수난 주간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 예배가 첫 장면입니다. 그리고 40일의 수난의 시간을 지나 부활절 축제로 끝나는 영화입니다.

가장 신앙적인 삶을 사는 것 같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가장 비 신앙적인 것 같지만 많은 사람에게 빛과 소망을 주는 한 사람의 갈등구조를 통해 신앙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입니다.

‘십자가의 도’- 경건의 모양과 경건의 능력 사이에서

첫 장면을 잠깐 보실까요?

북풍이 몰아치는 어느 날, 그 날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재의 수요일’ 붉은 옷을 입은 모녀가 이 마을을 찾아옵니다. 예배를 드리던 중 바람에 의해 열려진 문을 이 마을의 촌장쯤 되는 레너드 백작이 닫습니다. 그러나 그 붉은 옷은 변화와 십자가 혹은 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백작은 매우 헌신적인 사람이라 사람들이 예배당에 찾아오는 문 앞에서 안내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누가 오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도장을 찍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마을 사람들에게 예배는 하나님께 나오는 일이 아니라, 레너드 백작에게 눈도장을 찍어야 되는 행사가 되었습니다. 그런 예배의 모습은 가관입니다.

예배당에서 어떤 사람은 돈을 훔치기도 합니다. 졸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두 무관심합니다.

단지 그 시간을 지나고 나면 의무가 끝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 문제가 없는 평온하고 아름다운 시골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많은 문제들이 곪아터지고 있습니다. 남편에게 맞는 아내가 있고, 사랑을 고백하거나 전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고, 가족 간의 화해하지 못한 갈등이 있고 말입니다.

백작 자신도 사순절이 되면 금식을 하며 지날 정도의 경건함이 있지만, 그 경건함이라는 숨 막힘이 아내로 하여금 자신을 버리고 떠나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시인한다는 것이 자신을 미치게 만듭니다. 어떻게 이런 신안적인 삶을 사는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여기까지 영화를 보면 꼭 사도바울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디모데후서 3장 5절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믿음이 좋다’는 것의 표징이 되는 것이 혹시 ‘경건’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 경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을 합니다. 하나는 ‘모양’이요, 또 하나는 ‘능력’입니다.

초콜릿이라는 영화가 제기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의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참으로 경건한 모양을 가진 지도자 레너드 백작, 그리고 그를 따라 경건한 삶을 사는 마을 사람들. 그러나 그들에게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경건이란, 국어사전적인 의미로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삼가고 조심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신앙적인 의미로 쓰일 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혹은 하나님께 헌신적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경건이란 아주 중요합니다. 사도바울이 영의 아들 디모데에게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것 중에 하나도 바로 ‘경건 생활’이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 전서 4장 7절에서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보건대, 경건 생활이란 연습을 통해 점점 자라나는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경건의 연습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행해지고 연습되는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며,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냐의 구별이 필요합니다.

참다운 경건을 위해서는 바로 십자가의 피와 십자가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참다운 경건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을 보세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영화속에 등장하는 레너드 백작은 새로온 젊은 신부의 설교를 늘 검열하고 교정해 줍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 마을에서 이루어 가려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절제하는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도하는 사람들, 금식하는 사람들에게서 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으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경건하며 절제하며 기도하지만, 아직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당신의 삶에 크리스천의 영향력이 나타나지 않으며 마음의 평안이 없을까요? 예수를 믿으면 기쁨이 찾아오고 평안하다고 했는데 왜 나는 그런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나요? 왜 그렇게 신앙이 좋고, 열심히 봉사하는 장로님, 권사님들이 그렇게 쉽게 분노하고, 남을 정죄하면 용서하지 못하나요?

대답은 오히려 간단합니다. 아직 자신이 십자가에 죽지 않으므로 내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나에게서 일어나지 않는 한 아직 우리는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죽지 아니한 자에게는 부활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지금 큰 교회에서 목회를 하지만 고등학교시절 교회 종탑에 올라가서 담배를 피우고, 때로는 목사인 아버지의 집, 교회의 사택에 들어갈 때도 술 취한 채 들어간 사람, 그리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때리기도 한 그런 사람이었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의 모습을 가장 잘 아는 친구 장로님이 한 교회에서 잘 도와 동역을 한다는 것입니다. 몇 주 전 장로 취임 예배를 드리느라 부산한 가운데 그 장로님이 여기저기 뛰어 다니면서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며 눈물이 솟아났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와 함께 담배를 피려고 종탑꼭대기에 올라갔답니다. 사방이 뚫려 있는 곳에서 피우면 냄새가 안 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아무도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그곳에 지금 장로님이 된 모범생 친구가 올라온 것입니다. 깜짝 놀랐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나도 한 대 줘” 그러더니 함 모금 피우고는 “내려가자!‘라고 하더랍니다. 그 친구는 담배를 피우는 친구가 아니었는데요. 친구가 무안할까봐 함께 담배를 피우고 내려간 것입니다. 그 일을 이 목사님은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경건의 모양과 능력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담배를 피우는 친구를 정죄하고 꾸짖는 것이 분명히 경건의 모양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의 능력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활’ - 전혀 새로운 관계

이제 ‘초콜릿’이라는 영화의 상징인 ‘초콜릿’의 의미를 생각해 볼 차례가 되었네요. 한번 화면을 통해 초콜릿 가게의 느낌을 느껴 보실까요? 간판을 다는 모습을 보세요. 무슨 뜻일까요?

이 가게의 이름은 [세상의 모든 초콜릿]입니다. 영화감독이 이런 의미를 가지고 만들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마음대로 해석을 해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는 사순절 기간에 초콜릿 가게를 열었다는 것이 경건한 율법주의자인 레너드 백작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가게가 잘 되지 않도록 방해를 합니다. 하지만 주인공 ‘비엔’은 모든 사람을 위해 온 세상의 초콜릿을 가지고 따뜻하게 다가갑니다. 그 초콜릿을 매개체로 사람들의 관계를 회복시켜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런 영적인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부활은 어둡고 각박한 세상에 빛으로, 우리의 인생을 맛있게 변화시키시고,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실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지 않고, 자신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이 맛볼 수 있는 놀라운 은혜와 세상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지 않으셨을까요?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실의에 빠져 옛 생활로 돌아가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며 친구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무척 당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을 했는데, 자신들에게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주님이 다시 찾아오셔서 손을 내밀어 주신 것입니다. 무척이나 제자들을 당황스럽게 한 사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인공 비엔이 바로 초콜릿을 들고 사람들을 찾아 갑니다. 아니, 가게에 찾아온 사람에게, 초콜릿을 훔친 사람에게조차도 오히려 초콜릿을 공짜로 줍니다.

남편에게 맞으며, 자신의 인격이 없어져버린 여인 그래서 도둑질을 하는 병적인 여인 조세핀에게 초콜릿을 내밀자 묻습니다.

“왜 네게 이러세요?”

이 말속에는 “나는 그런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어요!”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비엔은 이야기합니다.

“친구가 되고 싶어요!”

사순절의 고통처럼 쓰디쓴 인생을 살아가던 조세핀에게 자신을 사랑하며 다가온 사람, 그리고 자신에게 달콤한 초콜릿을 선물한 사건은 은혜의 사건이요,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조세핀에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생겼고, 자아를 찾게 되지요, 삶의 기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에게 맞으며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던 여인, 그래서 남의 것을 도둑질 하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던 사람이 ‘새로운 관계’속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사실 부활의 능력이란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나의 삶에서 일어나는 관계의 변화 말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부활의 주님을 믿으면서도 관계가 경험되지 않는다면 당신의 삶에 결단코 ‘은혜’가 없는 것입니다.

‘관계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믿음이 좋은 척을 해도 믿음이 없는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이것이 부활절에 여러분에게 주는 도전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초콜릿은,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니키 검블은 [인생의 의문점들]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인생을 그리스도께 드렸을 때 깨닫게 된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깨닫지 못했던 것은 기독교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바라시는, 이른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때의 경험을 C.S. 루이스의 책 제목을 빌어 표현하자면, 나는 "너무 기뻐서 놀랐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가장 흥미진진한 관계의 시작이었다. 사실 그것은 삶의 시작이었다. 마치 바울이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 되면 속으로부터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는 더 이상 옛날의 그 사람이 아닙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고후 5:17)라고 말했듯이 말입니다.” 

새로운 관계는 우리의 삶에서 새로운 성품을 만들어 갑니다. 믿음의 유무를 알아보는 중요한 척도가 됩니다.

혹시 여러분은 과일 나무를 심어놓고 과일이 열리기를 기다려 본 적이 있습니까? 만일 누군가가 밤에 몰래 과일의 모양을 매달에 놓았다 해도 여러분은 그것이 가짜인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일은 하룻밤 새 열리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조금씩 자라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믿음도 그런 것입니다. 믿음은 자라나는 것입니다. 하루 사이에 믿음이 생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성장은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가장 안타까워했던 것이 바로 자라지 않는 믿음이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입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더 많이 인내하고, 더 많이 기뻐하고, 더 많이 절제하고, 더 많이 친절해야 자라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우리의 성품을 통해 나타납니다.

믿음은 감정이 아닙니다. 생활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그의 책 [아주 특별한 사랑]에서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라고 또 한 가지의 정의를 내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늘 “나의 권리가 무엇인가?” 찾기 보다는 하나님의 사람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권리가 아닌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무례하지 않습니다.

제가 수년 전 로마에서 집회를 할 때였습니다. 끝나고 식사를 하는데 이태리에서 사는 분이 은혜를 받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더니 “목사님 비행기 표를 좀 보여 주세요”

저는 왜 그러나 했지만 못 보여줄 것도 없기에 보여 주고는 공항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좌석을 배정받기 위해 기다리는데 저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표를 좀 바꿔 드리겠습니다.” 라는 말을 듣고 비행기에 탔는데, 처음으로 타보는 1등석이었습니다.

그분이 그 곳 비행사 책임자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손을 썼는지 모르지만 일행 중에 저만 1등석을 타고 오게 되었습니다. 시설만 좋은 것이 아니라 서비스가 무척 좋습니다. 그 안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더 있었는데, 승무원에게 참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좀 무례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이 만큼 비싼 돈을 주고 탔으니 당연히 서비스를 받아야 해, 그리고 요구할 권리가 있어.” 제가 보기에는 조금만 기다리면 다 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무례하게 받는 것이 그렇게 좋게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은혜인데 무엇을 요구합니까? 제가 생각해도 참 겸손했던 것 같습니다, 저에게 서비스하는 사람에게 무척 친절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부활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관계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이 새로운 관계야 말로 믿음의 척도가 된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믿음’-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

‘초콜릿’ 영화의 끝이 아주 아름답게 끝납니다. 레너드 백작의 검열로 인해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던 신부가 처음으로 부활의 메시지를 힘차게 전합니다.

믿음이란 성령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랑하고 포용하여 주는 것입니다. 이 마을의 화해는 자신을 그렇게 괴롭혔던 레너드 백작을 용서한 주인공 비엔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부활절 전날, 초콜릿 가게를 부수기 위해 들어갔던 백작이 자기 입술에 튄 초콜릿 맛을 보고는 금욕을 깨고 그 맛에 취해 잠이 들어 버린 장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게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논 그 사람을 용서하는 주인공의 배려가 힘찬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게 합니다. 

물론 이 영화를 가지고 이렇게 해석하는 데는 무리가 따릅니다. 비엔은 교회 다니기를 거부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율법적인 삶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좋아했던 것은 교회의 참 모습,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 어쩌면 교회의 본질임을 암묵적으로 보여 주지만 말입니다.

결국 참다운 믿음이란, 부활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참다운 기쁨이란, 삶을 통하여 증명되는 것이 아닐까요? 모든 관계가 회복되고, 함께 손을 잡고, 회복된 사람들이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부활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적인 문제는 어떻게 매일 매일을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믿음이 있는 사람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 약속하신 것처럼,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은 [사랑, 그것은 빵을 만들 때 들어가는 밀가루와 같습니다] 라는 책에서 아주 재미있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서커스를 구경할 때 가장 스릴 있는 묘기는 아마도 공중 그네를 타는 것이지요. 아슬아슬하게 사람들이 공중에서 몸을 날리고 사람을 바꾸어 잡기도 합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 펼쳐질 때마다 관중들은 탄성을 지릅니다. 그런데 만일 이들이 공중에서 떨어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이 대담하게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것은 탄력성이 아주 좋은 그물이 아래를 받쳐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나는 공중 곡예사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한 번도 그네에서 떨어진 일이 없습니까? 저는 한 번도 공중 곡예를 하다 떨어진 사람을 보지 못했거든요.”

곡예사의 대답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도 때로는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아하고 멋있게 떨어지는 방법을 익혔습니다. 떨어질 때는 몸을 뒤로 솟구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런 행동도 서커스 공연의 한 부분인 줄로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물은 반드시 떨어질 경우만을 위해서 대비해 놓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물은 공중 곡예를 할 때에 심적 도움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곡예사가 설명합니다.

“만약에 그물이 없다고 한번 가정해 보십시오. 높이 솟구칠 때마다 우리는 겁을 집어먹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신경이 곤두서게 되고 우리는 수차례씩 실수를 거듭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물이 아래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행동도 자연스러워져서, 온갖 어려운 공중 곡예들을 거뜬히 해 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네를 타면서 공중 곡예를 하는 사람을 동료들이 지켜 볼 때도 그 사람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이 말속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성령 가운데 거한다는 것의 의미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우리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일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담대하게 살아갈 용기를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삶을 산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 부활의 신앙이란, 단지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다.”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도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에 은혜 가운데 삶을 사는 것이며,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우리의 동료들과 세상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담대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기도 부탁을 하는 사람을 봅니다.

“형제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잘못 살까 두렵습니다. 나의 믿음이 신실하지 못할까 염려가 됩니다.”

얼핏 보기에는 무척 믿음이 좋은 사람 같지만 실상을 그렇지 않을 때가 대부분입니다. 늘 노심초사 하며, 불안해하는 우리의 모습이 있다면, 우리의 발아래 안전한 그물이 쳐져 있음을 믿지 못하거나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산다는 것은, 우리가 완벽하다거나, 실수 하지 않는 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늘 떨어질 수 있는 사람임을 알기에 관용할 줄 아는 사람이며, 다른 사람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떨어지면 나를 받쳐주실 분이 있음을 알기에 은혜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관용하지 않는 사람은 단지 믿음이 있는 척 보일 뿐이지 실상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는 확신을 가지는 자만이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나를 떠받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동행하심을 믿는 자만이 타인을 향해 동일하나 은혜를 베풀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맞이하는 부활절이 정말로 초콜릿처럼 달콤합니까? 관계가 회복되었습니까?

우리함 함께 하시겠다는 성령님의 역사를 의지하며, 내가 넘어질지라도 나를 지켜줄 그분 때문에 담대하게 세상을 나갈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믿은 있는 것처럼 행세하느라 힘들었던 우리가, 진정 믿음의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부활의 기쁨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나아가 관계의 회복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믿음이 무엇일가요?” 라는 물음 대신 믿음 있는 삶을 사시시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