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는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6장으로 된 로마서가 1-11장까지는 교리(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고, 12-16장까지가 실천(어떻게 살 것인가)으로 나누어지듯이, 갈라디아서도 1-4장이 교리(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관한 것이고, 5-6장이 실천(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1-10절도 두 부분으로 나누면, 1-5절은 문안 인사이고, 6-10절은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이유입니다.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갈라디아서는 바울 서신 중에서 거의 가장 초기에 쓰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 속하지 않았음은 물론,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보내시는 동안에 예수님을 따르며 말씀을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해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240km나 떨어진 다메섹에 가서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서 가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주님을 뵈었고,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고린도후서를 나눌 때도 살폈지만, 고린도 교회가 한때 바울을 거부했던 것은, 그가 진정한 사도가 맞는가 하는 사도권의 진위 때문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도 심각하게 대두된 것 역시 바울의 사도권이었습니다. 바울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이 과거에 어떤 존재였는지를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에서, ‘괴수(魁首)’의 사전적인 의미는 ‘못된 짓을 하는 무리의 우두머리’인데, 여기서는 그런 뜻이 아니라 ‘1번’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죄가 많은 순서대로 한 줄로 세운다면 자신이 1번, 가장 앞에 서 있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믿음의 출발을 기억하는 것은 자신의 믿음을 성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자양분이 되고, 척도가 됩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믿음의 출발점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들어야 했던 책망,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라는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나라 지명으로 전주, 여수, 김천, 통영 등은 도시 이름이고, 이들이 있는 전라도, 경상도는 도 이름입니다. 성경으로도 고린도, 아덴(아테네), 빌립보, 에베소, 밀레도 등은 도시 이름이고, 아가야, 마게도냐, 아시아 등은 지역(도, 道) 이름입니다. 물론 로마제국 내에서입니다. 사도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출신인데, ‘길리기아’는 지역(도) 이름이고, ‘다소’는 도시 이름입니다.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사도바울은 여러 지역의 교회에 편지를 보낼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로 인사합니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인사말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가 우리 신앙의 출발점이라면, ‘평강’은 우리 신앙의 종착점과도 같습니다. [(4-5)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속죄의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송영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400년간 노예살이를 하다가 해방되어 가나안 땅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 자유의 전쟁을 벌였던 것도 아니었고, 몸값을 지불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서 홍해를 열어주셨고, 광야에서는 만나를 먹게 해 주셨으며, 40년 동안 옷이 해어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도 않았습니다. 전부 하나님께서 거저 해 주셨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쓰는 이유(6-10절)]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바울은 이 율법주의를 ‘다른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이 복음에서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이상하게 여긴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이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대해서, 얼마나 속상해하는지를 그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6-9)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네 절에 걸쳐서 계속해서 ‘다른 복음’을 말하며 그것을 따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고 하고, 다른 복음은 없다고 말하며,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하기까지 하며 경고합니다. ‘다른 종교’보다 ‘다른 복음’이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이 진리와 생명의 길, 하나님의 뜻을 따른 길에서 멀어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망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공동번역성서는 10절 상반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합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합니까? 내가 사람들의 호감이나 사려는 줄 압니까?” 우리가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며, 비진리의 삶을 사는 사람에 대한 깊은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면, 우리가 받은 복음이 우리와 우리의 가정, 우리가 서 있는 곳을 새롭게 합니다. 오늘 하루도 복음 안에서 사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