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커 어느 가족 - beulokeo eoneu gajog

<어느 가족>은 굉장한 영화였습니다.

"사회 안전망 밖에서 법을 어기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가족이 아닌가?"

일본 사회에서는 생각할 수 없던 질문을 던지는 영화에

당시 일본 총리가 황금종려상 수상에도 축하는 커녕 침묵했을 정도였죠.

<브로커>는 어떨까요?

<어느 가족>과 <브로커>의 스포일러가 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촬영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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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baby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80

일본 현지에서 화제가 되었던 아기 포스트의 영화화를 고민하던 코레에다 감독은

한국에서는 베이비 박스라는 이름으로 일본보다 더 많은 아이들이 맡겨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무대는 한국이 되었고 예전에 작품을 함께 했던 배두나 배우,

영화제에서 이야기를 나눴던 송강호, 강동원까지 합세해서 영화 제작에 나섭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브로커>는 기존 코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와는 다른 연출로 

여러가지 의미로 당혹감을 가져왔습니다.

1) 식상함과 신선함

<브로커>의 최대 단점은 우리가 보기에는 식상한 내용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미 <나의 아저씨>에서 이지은의 연기를 봤으며

강동원은 늘 보던 강동원 같습니다.

어떻게 아역이 저렇게 대사 숙지를 잘하는 거지? 하는 위화감이 들고

송강호의 연기는 늘 보던 안정적인 그 연기에서 벗어나지 않은 느낌이 듭니다.

물론 해외에서도 '코레에다의 실수' 같은 평이 있고 호불호가 갈리긴 합니다만,

송강호는 해외 기준으로는 <기생충> 기택에 이어 세상에는 이런 아버지도 있다는 걸 드러내주면서

코레에다 히로카즈 영화 속 아버지 중, 또 다른 모습의 아버지로 남게 되었습니다.

한국 문화에 얼마나 익숙한가에 따라,

또 코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에 얼마나 익숙한가에 따라

식상함과 신선함이 공존할 수 있는 오묘한 영화입니다.

그래도 내가 연출한 영화에서 상을 받게 되어 죄송하다는 감독님의 코멘트도 있긴 했지만

정말로 식상한 연기였다면 칸의 선택을 받았을까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코레에다 감독님이

아역 배우가 대사를 끊김없이 좔좔좔 쏟아내는 부분에서 문화충격 받지 않으셨을까도 싶은ㅋㅋ)

2) 분명 직설적인데 친절하지는 않은

<브로커>의 또 다른 특징은 기존 코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처럼

인물의 대사나 행동에서 상황과 감정을 굳이 잡아내지 않아도 된다는 점입니다.

많은 분들이 당황하시고 저도 순간적으로 입틀막을 했던

'태어나줘서 고마워'가 대표적인데요.

저도 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싶었는데

<나의 아저씨>, <사랑의 불시착>, <이태원 클라쓰>, <동백꽃 필 무렵>, <오징어 게임>

등의 한국 드라마를 봤다고 했었고

영상으로 표현되는 것이 강렬해서 단숨에 보게 된다(golgo님 번역글 인용)

는 감독님의 인터뷰를 읽은 뒤로

한국 드라마식으로 의도된 연출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일상 연기하다가 갑작스럽게 심각한 상황으로 넘어가도

감정을 전하는데 거리낌이 없고, 빙빙 돌려가면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코레에다 감독이 한국 드라마 식으로 본인의 연출을 재구성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등장인물 중 누구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죠'

라는 부분이 인상깊었습니다.

결말의 급전개에 정말로 많은 의견이 오고 가고 있습니다.

상현이 태호를 살해했다고 보는 쪽이 정설입니다만 

정말로 상현이 죽인 게 맞냐고 보는 분들도 있지요.

사실 저도 상현이 죽인 게 아니라고 생각을 해요.

정말로 손씻고 동업을 하자고 했던 건데

소영이 자수를 한 시점이라

고용주가 아기 납치를 사주했던 걸 들킬까봐 입막음을 하려고 살해했다고 보는 쪽입니다.

한국에서 살인자가 자기가 몰던 그 차를 그대로 몰고 다닐 수 없는 걸 생각하면 더욱 그래요.

(동수는 자기가 혼자 하고 바보같은 형은 나한테 속아서 같이 다녔던 거라고 했을 것이고)

뉴스를 상현이 보고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상현이 태호를 살해했다는 해석이 

결말이 급전개로 보이는 원인이 아닐지...

사실 상현이 했다! 고 확실하게 단정지을 수 있는 연출이 없는 점에서

처음부터 한국 드라마처럼 표현에 거리낌이 없다가

결말 부분에서야 코레에다 감독 스타일로 돌아가다보니

호불호가 갈리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3) 한국 드라마를 통한 <어느 가족>에 대한 코레에다의 대답

<어느 가족>의 경우 원 제목이 <좀도둑 가족>이 아니라 <소리내어 불러줘> 였습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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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츠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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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타도

가짜였지만 진짜였던 가족에게 소리내어 전하지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브로커>는

한국 현실에 맞춘 가짜 가족을 통해

<어느 가족>에서는 소리내지 못했던

가짜였지만 진짜였던 가족에 대한 마음을

태어나줘서 고마워

한국 드라마 식으로 소리내어 전하는

코레에다 감독 나름의 대답인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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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는 포스터 낚시(?)와 매끄럽지 못했던 몇몇 번역투 대사 말고는 만족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기키 기린이 없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영화라니. 관객의 헛헛한 심정은 결코 감독의 마음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부재한 존재를 별처럼 떠올리며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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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커>는 가족 이야기에 천착해온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어느 가족>의 연장선에서 대안가족 형성 가능성을 타진한 다른 버전의 영화 정도로 이야기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가족의 의미가 핏줄이나 유전자보다 ‘기른다’는 행위에 있음을 드러낸 데 이어 <어느 가족>에서 아이를 학대하고 방치하는 친부모보다 아이에게 좀도둑질을 가르치는 양부모가 낫지 않으냐고 도발적으로 질문한 감독은 <브로커>에 이르러 ‘낳기 전에 죽이는 것이 낳은 뒤에 버리는 것보다 죄가 덜해?’라는 질문을 던진다. 앞선 작품의 질문이 자연스럽게 해소된 데 비해 <브로커>의 질문은 유독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그 이유는 전작과 달리 영화에서 ‘낳기 전에 죽이는 것’에 대입되는 인물이나 상황을 찾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이 질문이 드러나지 않은 수진(배두나)의 사연을 암시하는 거라 짐작해볼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불분명한 꿰맞추기일 뿐이다. 일반적인 ‘낙태’에 대한 공격이라는 반응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이 질문이 영화 전체를 포괄한다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이다. 영화는 원치 않는 생명을 잉태한 여성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낳기 전에 지우는 것과 낳은 후에 버리는 것. 소영(이지은)은 후자를 선택한 사람이다. “버릴 거면 낳지 말라”는 수진의 말은 그의 선택을 부정하기에 소영은 낳은 뒤에 버리는 문제의 위중함을 ‘죽이는 것’이라는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면서 임신 중단의 가능성으로 희석한다. 이 말이 그냥 넘겨지지 않는 불편한 말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다만 그것이 소영이라는 인물이 누구인가를 함축하는 발언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 말은 아기의 외모를 품평하며 무례한 질문을 쏟아내는 이에게 욕지거리를 날리는 것과 질적으로 비슷하다. 감정적이고 즉흥적이며 공격적인 형태로 흘러나온 자기방어. 하나의 문장이 소영이라는 인물을 판단하는 유일한 잣대가 될 수 없듯이, 이 대사가 영화 전체를 부정하는 잣대가 될 순 없다. 이 말을 온전히 품을 수는 없다고 해도, 이 때문에 영화 전체를 부정할 수도 없다.

림보의 영화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단일하고 명쾌한 판단을 중단시키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왔다. <원더풀 라이프>의 림보는 그의 영화 세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소다. 그 안에서 선과 악, 유죄와 무죄, 진실과 거짓, 삶과 죽음 같은 이중적인 것들이 용해된다. 이중성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캐릭터들이 지닌 기본 성격이라면, <브로커>의 캐릭터에 관해 유독 부정적인 의견이 많다는 점은 의아하다. 예컨대 송강호 배우가 연기한 상현의 유머러스함과 강동원 배우가 연기한 동수가 보여주는 선함은 아기를 거래하고 중간에 수수료를 챙기는 위험한 (일을 하는) 인물들에게 면죄부를 준다는 비판이 있다. 이혼 뒤 딸에게 아빠 자리를 부정당하는 상현의 사연과 보육원에 자신을 버린 부모가 언젠가는 찾아오리란 희망을 끝끝내 놓지 못한 동수의 사연이 드러나야 하는 이유가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작위적 설정이라는 비판도 덧붙는다. 다만 이들은 애초에 범죄자로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인물들이 누구인가를 충분히 보여주지 않은 채 극을 출발하며, 캐릭터가 대부분 전형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배역보다는 배우가 두드러진다. 역할을 표현하는 방식이 제각각 전형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이들의 캐릭터가 일반적인 브로커에 관한 판단 교정으로 이어질지도 의문이다.

인물들이 몇 가지 역할을 동시에 맡는 상황은 전작과 공유하는 지점이다. <어느 가족>에서 노부요(안도 사쿠라), 오사무(릴리 프랭키), 아키(마쓰오카 마유)는 모두 직업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일터에서 각자 유니폼을 입고 일하는데, 이 때문에 유니폼을 갈아입고 연기자가 된다는 인상이 강조된다. 브로커라는 직업 외에 세탁소 사장과 보육센터 직원의 역할을 각각 수행하는 상현과 동수가 배역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 것 역시 전작과 공통되는 인물 표현 방식이자 연기자로서의 캐릭터를 드러낸다. 송경원 기자는 송강호 배우가 지닌 훌륭함과 개성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세계에서 겉돈다고 지적했다. 일면 동의하지만, 감독이 늘 이중적인 캐릭터를 드러내왔음을 인식할 때, 캐릭터의 연극성과 기존에 배우가 가진 이미지를 활용하는 차원 역시 인물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유효했으리라 본다.

눈여겨볼 지점은 수진과 이 형사(이주영)의 자리다. 두 형사는 기본적으로 <어느 가족>의 후반부 취조 장면에서 이케와키 지즈루가 연기한 형사와 대응하는 인물이다. 전작에서 형사는 인물의 좀도둑질과 유괴에 준하는 행각이 수면 위로 드러난 이후 등장해 가족이 보여준 연극성을 깨뜨리며 다큐멘터리적인 사실성을 다소 충격적으로 노출했다. 반면 <브로커>에서 형사는 집단의 일부로서 애초에 사건에 깊숙이 개입한다. 수진과 이 형사는 추적자 혹은 관찰자만이 아니라 상황에 적절히 개입하는 연출자의 역할도 한다. 이들의 위치는 <원더풀 라이프>에서 사후 세계에 막 발을 들인 인물들에게 다음 세계로 건너가는 방법을 안내하는 림보의 직원과 유사하다. 직원들은 생전 기억 중 단 하나를 선택해야 다음 세계로 건너갈 수 있는 죽은 사람들로부터 기억을 끄집어내는 산파 역할을 한다. 기억을 찾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돕고 때로는 더 좋은 기억을 선택하도록 독려한다. 이에 더해 기억을 선택하지 못하거나 선택하지 않은 자신의 사연을 고백한다. 림보의 직원의 존재를 통해 감독의 위치를 노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브로커>에서 수진의 위치 역시 감독에 가까워 보인다. 무전기를 인물 가까이에 숨겨두고 그들의 소리를 듣는 형사의 모습에서,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위치에서 헤드폰을 통해 배우의 대사를 듣는 연출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브로커> 속 캐릭터의 비현실성에 비판적으로 반응하기 이전에 영화 만들기의 세계를 노출해온 감독의 작품 세계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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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과 죽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미숙함을 노출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감수하면서도 왜 연출자에 의해 촉발된 여정이라는 작위적 사실을 노출한 것일까. 이 질문은 ‘왜 베이비박스인가’라는 질문과 연관된다. 감독이 베이비박스를 다룬 이유는 한국이 아동 수출로 악명 높기 때문이거나, 아이를 버리는 비정한 엄마의 클리셰를 타파하고 면죄부를 주려는 등의 단순한 차원은 아닌 것 같다. 감독의 영화 세계를 염두에 둘 때 ‘베이비박스’의 실제적 측면보다 그것의 상징적 측면에 끌렸으리라 짐작된다. 그 이유는 베이비박스를 둘러싼 문제를 지적하려 한다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베이비박스와 이를 둘러싼 인물들이 하나하나 공들여 묘사되기 때문이다.

시퀀스는 비 오는 밤 한 여자(소영)가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저벅저벅 걸어 올라오면서 시작된다. 커다란 비옷과 우산에 가려 상체나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는데, 가는 맨다리만은 조명 속에 선명하다. ‘베이비박스’라고 적힌 작은 문 앞에 멈춰 선 소영은 품속에 감춰놓았던 아기를 조심히 바닥에 내려놓고는 홀로 자리를 뜬다. 이 모습은 차 안에서 지켜보던 두 형사에게 노출된다. 수진은 대신 아기를 안아 베이비박스에 넣는다. 베이비박스를 열면 불이 켜지면서 가운데에 놓인 작은 바구니가 보인다. 문을 닫으면 내부에 알림 역할을 하는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베이비박스 반대편 문을 열고 동수가 아기를 받는다. 아기는 브로커 상현의 품에 안겨 어디론가 이동한다.

좁은 골목과 세찬 비와 우비, 내부와 외부의 대조, 그리고 네모난 박스는 검은 사각형의 비밀 장소를 노출한 ‘<기생충>적 모먼트’를 연상하게 한다. 아기를 베이비박스에 넣는 장면에서 이상하게도 죽음의 의식을 떠올린 까닭도 어쩌면 <기생충>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른다. 베이비박스는 그 모양과 크기에 있어 화장터와 비슷하다. 베이비박스의 문을 닫았을 때 새어나오는 밝은 빛은 시신을 태울 때 사용되는 불과 흡사하다. 아기를 빼돌리는 세탁소의 봉고차와 그 뒤를 조용히 따르는 형사의 자동차는 마치 운구차와 그 뒤를 따르는 소박한 행렬처럼 보인다. 컵라면, 방울토마토, 젤리 등 잠복 형사가 끼니를 때울 때 먹는 다양하고 창의적인 음식들은 잠복의 클리셰가 아니라 음복이라 바꿔볼 수도 있다. 베이비박스를 죽음의 상자에 빗대는 이유는 아기가 브로커의 손에 넘겨지는 과정에 도사린 위험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다. 아기에게 새 삶을 찾아주려는 지금의 여정은 어쩌면 죽음의 가능성을 딛고 선 여정이다. 탄생이라는 행위에 필연적으로 내포된 죽음을 생각할 뿐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에서 해진(임승수) 또래의 아이들은 늘 존재했던 반면 갓난아기가 출연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우성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수동적인 상태에 놓였으나, 다른 영화라면 다소 기능적으로 쓰였을 아기 배우와는 조금 다른 위치에 있다. 우성을 보며 리액션하는 사람들은 우성의 얼굴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투명하게 드러낸다. 이용철 평론가는 베이비박스가 교회 앞에 있음에 주목하며 우성을 “인물들이 각자의 빛을 찾게 하는 찾아온 존재”라는 말로 메시아적인 암시가 있음을 내다보았다. 인물들은 말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아기에게 쉽고 편하게 말을 건다. “우성아, 우리 이제 행복하자꾸나”라는 상현의 말이나 불을 끈 뒤 서로에게 전하는 “태어나줘서 고마워”라는 말은 상대가 듣지 못하는 혼잣말로 일종의 기도처럼 들린다. 그렇다고 우성이 구유에 누운 예수의 탄생을 상징한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날개 우’에 ‘별 성’자를 쓰는 우성의 이름은 어쩐지 ‘하늘의 별이 된다’는 죽음의 관용어가 연상된다.

낯선 존재의 탄생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에서 주로 기키 기린이 담당해온 할머니의 죽음과 떨어질 수 없다. 기키 기린은 <걸어도 걸어도>를 통해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에 발을 들인 이후 줄곧 어머니 혹은 할머니로 등장했다. 감독은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관계의 일부를 <걸어도 걸어도>에서 기키 기린이 연기한 캐릭터에 투영한 바 있다. 이후 기키 기린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세계에서 하나의 배역을 담당하는 것 이상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함께한 마지막 작품이 된 <어느 가족>에서 기키 기린은 극중 죽음을 맞았다. 죽음을 맞기 직전 하츠에(기키 기린)는 해변에서 멀리 떨어진 가족을 향해 소리내지 않고 입을 움직여 “다들 고마웠어”라고 말한다. <브로커>에서 소영이 우성에게 전하는 “태어나줘서 고마워”라는 말은 하츠에의 말에 대한 한국어로 번역된 응답처럼 보인다.

<브로커>는 한국 배우들과 한국에서 한국의 자본으로 찍은 한국영화이므로 그의 영화 세계에서 이례적인 하나의 이벤트에 불과하다고 다소 폄하할 수도 있다. 그러나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과 <브로커> 등 해외 합작 프로젝트의 연이은 시도는 연출적 욕망의 발현이나 확장이기보다는, 상징적인 배우의 상실을 앞둔 혹은 상실한 시기를 견디기 위한 고민의 결과로 보인다. 기키 기린을 잃은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의 부재가 이상하지 않은 한국영화를 통해 배우의 퇴장을 유예하는 가운데, 그의 죽음이 완료된 사건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새로운 탄생으로 이어지길 희망하고 기억한다.

흔들리는 집

할머니의 부재와 더불어 <브로커>에 없는 것은 가족의 준거점으로서의 집이다. 가족영화로 <브로커>를 볼 때 영화에서 한번도 ‘집’이 재현되지 않은 점은 이례적이다. 일시적으로 집단을 이룬 인물들이 머무는 곳은 세탁소에 딸린 작은 방, 폐교의 빈 교실, 허름한 모텔 등이다. 집은 주요 캐릭터들의 준거점으로서만이 아니라 그와 무관한 장면에서도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모텔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잠시 소영이 살던 집이 드러나지만, 이곳은 집이 아닌 장소보다 더 참혹하다. 입양 부모들과의 접선 장소는 수산시장 등 야외이거나 임시로 빌린 장소다. 소영을 대신해 수진 부부가 우성을 맡아 기름을 보여주는 에필로그 장면에서도 세 사람이 있는 장소는 집이 아니다. 대신 해변을 거니는 장면이 일시적이나마 이룬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에필로그 속 인물들은 모두 집이 아닌 다른 장소에 있다. 도망자가 된 상현은 터미널에서 발견되고, 소영은 주유소에서 일하며, 해진은 도로변에서 붙잡혀 보육원 차에 오른다. 명확히 드러나진 않았지만, 동수로 보이는 인물은 상현 대신 세탁소 차를 운전한다. 잠시 전작과 비교하자면, <어느 가족>에서 집은 하츠에의 소유였으며 그의 죽음은 곧 함께 살던 가족이 집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야 함을 의미했다. <브로커>에서 집이 부재한다는 사실은 이 영화가 예상보다 더 단단하게 <어느 가족>과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확장하면 <어느 가족> 이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와 영화 속 가족은 현재 집을 잃은 상태다. 감독은 기키 기린을 대신할 다른 할머니를 내세우는 대신 집을 잃은 현 상태를 솔직히 인정한다. 나아가 집을 찾는 일시적 유랑단처럼 보이는 개성 넘치는 인물들과 더불어 새로운 집을 상상한다.

세탁소 봉고차 뒷좌석에 매달린 옷은 자동차가 집을 대체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오브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세개의 박스를 언급하면서 베이비박스, 봉고차, 그리고 사회라는 박스의 연결성을 언급했다. 여기에서 박스는 집으로 바꿔볼 수 있다. 베이비박스는 몸을 누일 수 있는 최소한의 장소로서의 집을 은유하며, 봉고차는 이 집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거나 흔들리는 상태임을 보여준다. 여기에 관람차를 집의 다른 형태로 덧붙일 수 있다. 공중에 집 여러 채가 둥근 원을 그리며 대롱대롱 매달린 형태의 관람차는 집의 일시성과 유동성을 보여준다. 집을 잃은 고레에다의 영화에서 새롭게 등장한 아기가 집을 대체한 하나의 준거점이 되었으며, 그가 성장하고 있다는 점에 빗대자면 집은 하나의 생물처럼 움직이거나 성장하는 것이 된다.

마지막 숏에서 등장한 가족사진은 집단은 흩어졌음에도 봉고차만은 완연한 ‘집’이 되어 함께한 시간을 기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섯이 함께 찍은 작은 흑백 스티커 사진은 운전석 앞 유리 근처에 매달린 채 자동차의 움직임을 따라 마구 흔들린다. 움직이는 가족사진은 전통적으로 가족사진이 집 한쪽 벽에 고정된 모습으로 재현되는 것과 대조된다. 이 흔들림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와 그가 그려온 가족, 그리고 집의 흔들림을 함축한다. <브로커>는 <어느 가족>이라는 영화를 통해 가족영화의 정점을 찍었으며, 집처럼 늘 함께했던 배우를 잃은 감독은 그 이후에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낯선 길 위에 자신을 내던지듯 영화를 찍었다. 완전하진 않지만, 작품 이후의 세계를 여전히 궁금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