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한국 디자인 - 1980nyeondae hangug dij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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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자인학 연구 (vol 17, no4. 04년 11월)에 게재된 글입니다.

     한국현대디자인의 문화정체성 연구

(A Study on the cultural identity of korean modern design.)

                                                                        김종균 (서울대학교 디자인학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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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서론

2. 전통조형문화의 변이

    2.1. 산업화과 근대화

    2.2. 근대 디자인교육

3. 한국 현대 디자인의 형성

    3.1. 한국 현대 디자인의 시발점

    3.2. 한국 산업디자인사의 특수성

    3.3. 한국디자인의 형성

    3.4. 한국현대디자인 발달

        1) 60년대-산업디자인의 도입과 계몽(啓蒙)

        2) 70년대 - 산업화

        3) 80년대-대중문화 형성과 산업디자인 정착

        ∙이원화 경향-계몽적 디자인과 상업적 디자인

        4) 90년대 이후 - 산업디자인 발전기

4. 문화정체성 논의의 계보

    4.1. 일제시대(1920-45년): 문화주의와 향토색, 조선취미

    4.2. 50년대 (48-61: 1,2공화국): 기념품(Souvenir), 관제홍보

    4.3. 6~70년대 (61-81: 3,4공화국): 권위적 민족주의

    4.4. 80년대 (81-88: 5공화국): 도안, 양식화

    4.5. 90년대 이후(88-98): 기호・정신성의 재해석

    4.6. 2000년 이후

    4.7. 소결

5. 한국 현대문화의 변화와 디자인의 새로운 가능성

    5.1. 인류보편성과 지역특수성

    5.2. 다(多)문화주의 시대와 문화정체성 논의방향

6. 결론 - 新조형문화 전통창조와 문화정체성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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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要約)

  본 논문에서는 왜곡된 시대사와 더불어 현대의 한국디자인이 전통과 단절되고 변이되어가는 과정을 실증적 사료를 통하여 그 원인을 살펴보고(2, 3장), 이후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문화정체성 찾기의 노력의 디자인계의 노력을 살펴 그 경과와 문제점을 지적하고(4장), 문화주체적 한국디자인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논의의 새로운 출발점을 세우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5장).  이미 구시대적 패러다임이 되어버린 산업사회의 디자인관에서 비롯된 많은 부조리와, 근현대 정치권의 정책적 유도로 왜곡된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전반적인 논의를 다시 생각해보고, 디자인계에 필요한 새로운 이정표를 세움으로서, 차후 지속될 ‘한국적 디자인’ 논의의 방향전환을 꾀하고 정보지식사회에 ‘한국디자인’에 필요한 문화담론의 생산과, 요구되어지는 노력, 이를 위해 강구되어야 할 현실적인 방안을 검토해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Abstract)

  In this thesis, I will look into how contemporary Korean Design has changed and been alienated from tradition as well as distorted history (chapter 2, 3); point out what the problem is in finding out the cultural identity of the field of design (chapter 4); and finally, I will present a new starting point for independent discussion regarding the direction of Korean design (chapter 5).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present an opportunity to reconsider the numerous irrationalities caused by an industrial view of design as an outdated paradigm and a cultural identity distorted by the leading policies of the contemporary political authority. In addition, by proposing a new direction to the following discussion on Korean design, it is my desire to examine a realistic plan for cultural discourse which is essential for Korean design in an information-oriented age.

(Keyword)

cultural identity, korean style design, mod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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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현대기술 발전상은 근대적 인간관과 세계관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화와 시장통합, 신자유주의 세계화, 네트워크화, 대량 소비성향의 문화산업 등장 등 일련의 변화를 통하여 국가와 문화에 대한 정체성도 변모시켜 나가고 있고, 국내적으로도 사회구성원의 변화, 세대교체 등을 통하여 폐쇄된 통제 국가가 아닌 이상 기계적인 전통 보존마저도 어려운 상황에서, 민족문화는 해체위기에 놓여졌다. 또 디지털 기술의 확산으로 디자인에서의 물성은 점차 사라져가는 반면 문화적 속성의 점점 강해져 가는 추세여서, 종래 피상적인 전통소재의 차용을 통한 정체성찾기 노력은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한국디자인계의 냉전시대의 문화인식과 함께, 편미경향, 서구사대적 조형문법의 답습, 서구디자인담론에의 종속 등과 같은 구태적인 습성에서 벗어나 한국문화정체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져야 할 때인 것이다. 

2. 전통조형문화의 변이

  유럽, 특히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공예의 전통과 현대의 디자인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유기적 연관성을 가지며 그 문화적 정체성을 고스란히 간직한체 발전해 오고 있는 것에 반해, 우리 조형문화는 영속성이 단절되고, 서구 이식으로부터 조형문화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 현대에 디자인은 제도권내의 산업속으로 편입되었고, 공예는 개인의 차원으로 귀속되었다. 전통적 공예기법을 전수하는 일은 제도권 교육의 틀 속에서도 배척되어, 장인에 의한 도제적 전수방법을 통해 유지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전수과정에 제도권, 국가, 교육기관, 제반관련 산업의 지원없이 전수의 어려움이 고스란히 개인의 몫으로 남겨지게 되었고, 제도권 교육기관에서 이루어지는 공예교육은 현대공예(서구공예)를 교육받게 되며, 서구적 언어를 답습하게 되면서 전통과 점점 더 괴리되어 가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전통조형문법과 분리되어 서구 조형문법을 따라 발전하게 된 원인을 몇가지로 요약하면 타율적인 근대화와 교육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2.1. 산업화과 근대화

  한국내에서 이루어진 30년대의 산업화(일제시기)와 6-70년대의 근대화 정책(3공화국)에서 성취된 근대성의 개념은 서구의 그것과 다소 다른 양상을 띈다. 근대적 제도는 성립하였음에도 문화적으로는 ‘근대적 주체(민주주의)’가 형성되지 못하였다. 국민이나 사회구성원간의 민주적 문화형성는 형성하지 못한체, 근대국가의 제도와 기술적 관리체제, 산업등의 지속적 도입으로 군림하는 ‘국가’에 의한 인위적인 문화조성, 타율적인 근대화가 진행되었다. 개인의 자유, 권리, 사생활은 곧잘 침해당했으며, 문화적 담론은 검열당하고, 삭제, 폐기되었다. 한국사회에서 근대적 개념의 ‘개인’이 출현한 것은 문화시장이 개방되고, 대중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한 80년대 중반이다.

  일제말기 총독부의 공산정책(工産政策)은 기존 조선시대의 장인들의 위상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고, 급속한 근대화, 산업화를 통해 기존 장인의 역할은 박탈되었으며, 예술과 기술을 분리해서 차별하는 문화주의의 영향으로 생활공예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한국전통공예는 장식공예로 전락하였다. 또 일제의 문화정책기에 개설된 선전(鮮展) 공예부는 전통문화에 대한 잘못된 인식(전통의 타자화)을 갖게 만들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해방이후에 까지 지속되었다. 광복이후의 이승만정부는 반민특위 등과 같은 민족정기사업보다는 반공정책에 더욱 몰두하여, 전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다. 1960년에 국전(대한민국 미술전람회)이 생겨났으나, 선전의 관례를 고스란히 이어받음으로서 조선 공예의 전통이 산업디자인의 조형문법으로 연결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였다. 한국의 산업디자인은 그 문화적 근원을 전통 공예에 두지 못하고, 해방이후 서구로부터 새롭게 이식되게 된다.

  이후 6.25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문화유산이 수탈, 파괴되었고, 60년대 이후 관(官), 군(軍)주도의 획일적인 경제개발계획의 실행과 새마을운동의 과정에서 ‘가정의례준칙(家庭儀禮準則)1)등과 같은 정책의 반작용으로 전통문화가 빠른 속도로 소멸되어 갔으며, 그 가치가 변질, 퇴색되어 갔다. 급격한 산업화는 급격한 사회변화를 불러왔고, 삶의 방식이나 규범체계를 포함, 사회 전반문화의 변화를 일으켰다. 전통 농경사회의 세시풍습이나 관습 등은 많은 부분 소멸되었으며, 새로운 산업사회에 적응한 외래문물에 의해 전통적인 가치체계와 규범은 변화되었다. 외래문화의 무비판적인 수용과 모방, 추종으로 문화의 종속화가 이루어졌고, 민족의 문화적 전통성은 극히 일부만 남게 되었다.

2.2. 근대 디자인교육

  교육기관을 통하여 근대적 개념의 디자인에 대한 본격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46년 이후의 일이다. 일제하에 조선에 설립된 교육기관들은 미술교육을 실시하지 않았으며, 당시 일본에 설치되어 있는 대학의 미술대학도 조선인이 들어가기 힘든 상황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교육들은 피식민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과정만을 교육하였고, 도안이나 응용미술 등과 같은 분야는 산업육성, 발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실시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몇몇 조선인이 일본 동경예대를 졸업하였으나,2) 그 한국사회의 변화로 이어지지는 못했고, 일부 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운영되고 있었던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에서 미술관련 교육을 실시하였으나, 주된 교육내용은 수공예 제작이었다.3) 처음으로 디자인 교육이 이루어진 것은 1946년 8월 미 군정청 학무국이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령 제102호에 따라 국립종합대학안(國立綜合大學案)을 확정 공포, 국립서울대학교(초대 총장: 미국인 해리 안스펫(Hary Anspead))를 정식 발족하면서 예술대학이 설치한 것이 시초이며, 미술학부 도안과4)를 두어 근대적 개념의 디자인교육이 실시되었다.   

  교육기관과 아울러, 한국의 디자인 교육에 많은 영향을 미친 기관으로 한국공예시범소(KHDC)를 들수 있다. 1957년 미국의 원조로 설치된 한국 최초의 디자인 진흥기관 ‘한국공예시범소’(KHDC)는, 미국인 노만디 한(Norman R. De Haan)5)을 디렉터로, 미국 ‘Smith, Scherr and McDomott’ 산업디자인사(AKRON, Ohio)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미 국무부 산하의 국제협력처(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 ICA)의 기술원조기금을 바탕으로 미국 대외원조기관(USOM), 주한유엔군사령부, 주한 미 8군사령부의 협조하에 운영되었다.  당시 ICA의 역할은 후진국들이 쉽게 채택할수 있는 수공예 산업에 집중함으로써 가난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어 궁극적으로는 좌경화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의도를 가졌다. ICA 한국 담당자 스미스 셔 맥더모트(SSM: Smith Scherr & McDermott)사는 한국의 수공산업을 면밀히 조사하여, 수공예산업과 소규모 가내공업을 육성하려는 원조계획을 세우고, 58년 한국으로 세명의 디자이너, 스탠리 피스틱(Stanley Fistic), 폴 탈렌티노(Paul Talentino), 오스틴 콕스(Austin Cox)를 파견, KHDC를 설립하고, 각 대학에 디자인과 마케팅 과목을 가르쳤다.6) 그러나 ICA 는 미국문화를 강요할 때 발생하는 대상국의 거부감을 의식하여, 미국의 디자이너들에게 후진국들의 오랜 문화적 전통에 어긋난 새로운 디자인을 소개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주로 도자, 민속공예품, 가구, 실크제품 등을 육성하였고, 실질적인 현대적 개념의 디자인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양산공예의 진흥에 머물렀다. KHDC는 우리정부의 일정부분 자금지원과, 대학교육, 교수요원 해외연수 프로그램7), 공장 방문지도 등 국가적 사업을 대부분 대행하였다. 미군정에 의한 대학교육의 실시와 함께 KHDC의 디자인 교육, 디자인교수진 양성은 한국내 미국식 디자인교육이 이식되는 계기가 되었고, KHDC의 전통공예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말미암아 양산공예는 그 정신성이 배재된 관광상품으로 변모되었다.

3. 한국 현대 디자인의 형성

3.1. 한국 현대 디자인의 시발점

  한국디자인의 연원을 언제부터 볼 것인가 하는 점에 있어서 이견8)이 있지만, 많은 학자들이 45년 광복이후로 보고 있다.  공예와 연관하여 일제시대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본 고에서는 해방이후를 그 시작점으로 보고 내용을 전개하기로 한다. 46년 이후의 미군정시기를 기점으로 한국사회의 조형문화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는 산업화의 역사와도 맥을 같이 한다. 당시 미군의 구호물자-츄잉껌 포장지로부터 식료품, 무기 등 완전히 다른 새로운 체계의 문물은 한국사회내의 민중생활 속속들이 전파되고,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일제의 36년과 비교할 때, 비록 미군정 3년이 절대적으로 짧은 시간이나, 문화의 변화․수용이 민중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주체성 위에서 이루어졌다. 해방군, 혹은 전후 혈맹으로서의 미국의 위치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과 상대적으로 진보한 물질문명, 근대적 시스템은 한국에 전파됨에 있어서 전혀 거부감이 없이 수용되었고, 사회구조와 산업체계, 교육, 문화 등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군정의 당사자였던 미국문물의 범람을 지속시켰고, ‘45년부터 태동된 한국현대디자인은 6.25전쟁을 계기로 미국을 위시한 서방선진국들의 무분별적인 물자 유입속에서 원형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3.2. 한국 산업디자인사의 특수성

  한국사회에서의 디자인은 산업화의 역사가 짧고, 그 중 많은 부분 디자인의 변천에 있어서는 정부주도의 정책적인 진흥과, 기업의 발달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 디자인 발달사를 서양의 경우처럼 인물이나 계파, 사조, 혹은 스타일로 분류를 할 수가 없다. 개인이 아니라 기업이, 계파나 사조에 의한 변화가 아니라, 정책에 의한 변화를 거듭하며 발전해온 탓이며, 일제문화정책, 6.25전쟁 등을 통한 전통공예와의 단절로 계보상으로 따져들어갈 수도 없는 탓이다. 산업환경내에서 유럽과 같은 수공예적 공방은 일제시대를 걸쳐 해방이후 사라졌으며, 정부의 주도하에 선도된 대기업 중심의 'Inhouse design' 개념이 일찍이 정립되어 사조나 작품적 접근방식보다는 시장원리에 충실한 경제적 접근이 우선 이루어졌다. 또 60년대 이후, 반공이데올로기, 경제성장정책 등 쇼비니즘적 애국주의의 강조로 문화적 다원성은 저해되었고, 경제성장에 가장 우선되는 분야와 방향으로만 일관되게 디자인을 도입하였다. 당시 수출산업의 클레임이 포장지에서 자주 발생하고, 하우징의 부실로 인하여 제품의 가격이 다운되는 사건이 잦음을 통하여 제품에 대한 ‘제값받기 운동’의 일환으로 디자인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킨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포장’과 ‘디자인’을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국사회에서의 산업디자인은 실용적 관점의 경제적 요구에서 시작되었고, 그 주체가 정부와 산업체였으며, 철저히 정책과 산업체의 변화와 발달에 그 궤를 같이 하며 발전해왔다. 따라서 한국의 디자인사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정부의 문화정책, 사회환경과 기업의 산업발달사를 같이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서구적 관점에서의 사조나, 인물, 스타일에 대한 연구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에는 잘 맞지 않는 부분이 많고, 이로 인해 한국디자인사가 왜곡되는 경향이 많다.

  전후 50년의 한국사회는 단기간동안 고도압축성장을 이루기 위해 ‘경제개발5개년 계획’과 같은 인위적인 산업 진흥노력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시켰기 때문에 문화정책은 다소 경시되었고, 디자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디자인의 인위적인 진흥은 국가차원의 정책적 집중과 지원으로 인해 제품에 있어서는 짧은 기간동안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어 반면, 경제적 가치이외의 부분, 여타 문화적 속성으로서의 디자인의 역할에 대해서는 논의가 전무하였다. 수출증진을 위한 산업자원으로서의 역할론을 강조하는 ‘디자인 국부론’이 강조되었고, 유독 디자인 부문만을 일반 예술・문화로부터 분리해내는 정책은 국가전체의 문화적 불균형을 초래하고, 자생적 문화담론의 원활한 소통을 가로막았다. 이로 인해 80년대 이후, 많은 부문에서 전통문화에 대한 각성과 대중적 문화논의가 활성화되는 동안에도 유독 디자인분야만은 시대적 조류에 편승하지 못하고, 서구적 스타일의 지속적인 추구와 산업논리로 봉쇄되어 있었다.9) 이는 다른 예술분야와 달리 직접적으로 수출에 영향을 미치는 산업경쟁력의 주요요인으로 인식한 탓이며, 이로 인해 정부정책과 시장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기술-산업적 경쟁력은 갖추게 되었으나, 문화적 측면으로서의 디자인의 역할, 다원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배경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성장위주 정책은 디자인에 산업적 측면이 지나치게 부각되어, 그 수단이나 방법, 주체성, 철학 등과 같은 문화로서 가져야 될 많은 영역들을 포기한 채로 일방향적인 성장을 거듭하였고, 전통문화 혹은 한국적 특수성과 연계된 문화적 디자인으로의 논의를 이끌어내기에는 과거 한국사회에 대중문화가 발생한 시기가 너무 늦었으며, 인위적인 진흥을 이끌어내기에도 정치적 혼란과 함께, 국가적 역량이 부족하였다. 최근에 들어서야 세계화조류와 중국시장의 성장, 지역블럭화 등과 같은 지역적 경제단위의 확대와 세계환경변화 등의 영향으로 조금씩 변화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3.3. 근대 한국디자인의 형성

  50년대말, 국제적 원조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적 자립이 최우선 과제가 되고 60년대에 접어들면서 경제자립이 최우선 과제로 대두된다. 전후(戰後)복구와 사회혼란을 극복하고, 경제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62)이 실시되었고, 경제개발 계획, 생산증대, 수출진흥 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디자인에 대한 산업자원으로서의 인식이 정립되었다. 60년대 중반까지도 디자인과 포장의 연구, 개발에 대한 인식과 여력이 부족하여, 몇몇 대기업만이 디자인실을 운영하였으며, 또 당시의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란 포장이나 패션에 국한된 것이었고, 그나마 포장산업도 전통적인 토기, 목상자, 목통(木桶), 죽(竹)제품, 면포대(綿布袋), 마대, 가마니와 새끼, 노끈 등과 같은 재료를 주로 이용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10) 정부는 기존의 ‘한국 포장기술협회’와 ‘한국수출디자인 센터’, ‘한국수출품 포장센터’를 통합하고, ‘한국디자인 포장센터(KDPC, ’70)’를 설립하였고, 강력한 수출확대 정책에 ‘수출상품의 고급화’와 ‘국제경쟁력 강화’를 그 설립목적으로 하였다. 초기 열악한 산업시설들을 통해 생산되는 상품들은 클레임이 자주 발생하였고 디자인 센터는 상품의 포장개선에 집중하게 된다.11) 70년대, KDPC의 설립과 함께 본격적인 국가주도의 디자인 진흥이 이루어지는데, 통상진흥국하에 디자인-포장과를 설치하고(‘70), 디자인 포장 진흥법 제정(‘77, 법률 제3070호)를 제정하는가 하면, ’디자인・포장‘지를 창간(’70, 현 산업디자인지)하고, ‘포장기술사 1, 2급 기사제도’(‘74)를 제정하였으며, ‘KOREA DESIGN PACK 전’, 해외우수포장 비교전, 세미나 등의 각종 활발한 국내외 활동을 수행하였다. ‘상공미전’을 이은 ‘대한민국 산업디자인 전람회’를 열고, 해외유학생을 파견하는 등의 본격적인 진흥사업 개시하고, 디자인 협회활동을 활성화 시켜나갔고, 또 이 시기에 금성사, 삼성전자, 대한전선, 현대자동차와 같은 디자인 선도기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초기 기업들에 의해서 수행되는 디자인은 인하우스(Inhouse) 디자인을 바탕으로 일본의 산요 등의 OEM 생산이나 외국계 디자인의 표절, 모방 등을 통한 제품생산이 이루어지다가, 80년대 접어들면서 가격위주의 생산에의 한계와 수입자율화 조치, 후발 신흥공업국의 추월 등의 영향으로 자체적인 고유모델 생산에 뛰어들기 시작하였다.  

3.4. 한국현대디자인 발달12)

1) 60년대-산업디자인의 도입과 계몽(啓蒙)

  60년대 중반부터 한국산업디자인 형성을 주도적으로 이끈 힘은 ‘상공미전(현 산업디자인전람회)’이며, 70년대 이후 들어서는 각 협회들에 의해 수행된 ‘협회전’이 가세하여 한국내 산업디자인의 조류를 형성하고 이끌어나가기 시작한다. 60년대 국내의 척박한 산업환경에서 디자인에 대한 인식은 턱없이 부족하여, ‘도안’ 내지는 ‘제품 개선안’ 수준으로 색채에 치중한 디자인관을 보였고, 대한상공회의소가 그 주관부처로 하여 미술관 중심의 소규모적인 행사로 머물렀다. 70년대 이후 들어서 국내 산업기반시설의 구축과 함께 정책적 지원을 힘입어, 산업정책을 지원하는 ‘수출’을 목적으로 하는 제품에 대한 관심을 기울였고, 국민적 디자인 인식전환을 위한 생활용품에 대한 관심도 함께 기울였다. 당시 수상작을 살펴보면 이러한 점을 금방 확인할 수 있는데, 60년대와는 그 양상이 다르게, 대통령상을 수상한 작품의 대부분이 패키지와 경제품으로 구성, 수출과 직-간접적인 연관을 가지는 디자인안이거나, 일상생활용품으로 구성되어 있어 산업계와 국민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70년대 산업디자인 전람회 대통령상 수상현황

년도

횟수

수상작

비고

70

5

기와디자인 / 김철수

제품

71

6

마른전복 수출을 위한 재료별 포장계획 / 신용태

패키지

72

7

개폐식 간이탁자 / 이건

제품

73

8

장식을 겸한 병따개와 조미료통 / 박인숙

패키지

74

9

가정용 panel heater 디자인 연구 /

제품

75

10

전자제품 시리즈의 포장 디자인 표준화 제안 / 김순성

패키지

76

11

스테레오 카세트 겸용 컴퓨터 캘린더 / 홍성수

제품

77

12

포터블 전자미싱 / 민병혜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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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용 책상용구 세트 / 박성우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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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성기기 / 정국현

제품

  70년대의 국내 디자인계 조류를 이끈 또 다른 동인은 협회전이다. 70년 ‘한국디자인포장센터’ 설립을 기점으로 이후 수많은 디자인협회, 회, 협의회가 창설되고, 이후 지속적으로 협회전을 개최함으로써 그 세를 넓히고, 영향력을 강화시켜나갔는데, 협회전은 이후 한국사회 내부의 디자인 조류를 형성하고 여론을 선도해 나가는 엘리트 그룹을 형성하였으며, 서구 신 디자인 사조를 수용, 전파하고 한국적 디자인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는 등, 한국디자인 조류를 형성해 나가는 중요한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2) 70년대 - 산업화

  산업계에서 산업디자인이 윤곽을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중반 이후이다. 63년, 금성사가 공업의장과를 신설한 것이 처음으로 이후 각 기업별로 디자인을 전담하는 부서가 속속 생겨나기 시작했다.13) 그러나 당시 국내 산업계의 상황은 노동집약적인 경제품을 생산하는 단계였고, 초창기 제품생산을 맡았던 가전 3사는 그 기술수준이 낙후하고 영세적 규모와 원자재의 과다 수입의존 등의 문제가 있었고, 기업내부의 디자인 담당인원의 부족과 고유모델의 인식 부재로 서구나 일본의 디자인을 모방하거나, OEM 생산등과 같은 수출중심의 제품생산으로 일관되었기 때문에, 그 조형양식은 서구 유행인 모더니즘 양식을 따르며 제품의 마감이나 질이 조악한 경우가 많아 수입가전업체의 제품과 비교가 되지 못하였다.

  7-80년대는 전 세계적인 모더니즘 양식의 유행으로 제품뿐만 아니라 건축, 시각디자인 등의 분야에서도 기하학적 도형을 조합한 스타일이 풍미하였다. 대부분의 조형언어들은 기하학 도형으로 분해되고, 요소 환원적 형태에서 재조합되는 과정을 거쳤고, 디자인분야의 교육계와 산업계는 거의 모두 모더니즘 양식을 따랐으며, 한국 고유의 전통문화들도 이러한 사조에 의해 재단되고 새롭게 변모되는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경향은 80년대 후반 포스트 모더니즘 열풍이 일기 전까지 지속되었는데, 모더니즘이나 포스트 모더니즘 운동 두가지 다 자생적인 문화운동이 아닌 미국의 경향을 쫓는 양식이었고, 국내에서는 포스트 모더니즘 논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그 미술사조가 유입되고 양식을 쫓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는 등, 스타일상의 추종이 이어졌다. 

3) 80년대-대중문화 형성과 산업디자인 정착

  1980년대 한국 디자인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국내적으로 70년대 경제개발정책의 성공을 통한 경제력 증대와 산업국가로의 성장, 국제적 규모의 대형행사(86아시안 게임, 88올림픽 게임)준비, 신군부의 대중문화시장을 개방정책, 컬러TV의 방영 등과 같은 대중적인 상업문화의 발달과 함께, 국제적으로 시장개방압력과 덤핑판정과 보호무역정책, 저작권 가입압력, EC 통합에 다른 무역구조 변화, 1차 유통시장 개방에 따른 산업경쟁력 강화논의 등을 통한 디자인계의 대형 국책 프로젝트의 발생과 산업구조 개편에 따른 디자인역할 논의 등으로 디자인계는 활성화되었다. 정부는 GD 마크를 제정(‘85)하고 굿디자인전을 열어 산업디자인 전람회와는 차별되는 실질적인 산업경쟁력 재고를 위한 디자인진흥책을 펼쳤으며, 각 기업별 굿디자인전이 주최(금성사 산업디자인공모전 / 삼성 굿디자인전, ’83)되고, 정부주관의 각종 국제 교류전과 해외비교전, 국제행사 주최등과 같은 행사를 진행하였고, 각 기업들은 CI(Corporation Identity)를 도입하였고, 기업별 브랜드 제작과 고유모델 생산이 앞다투어 이루어 졌다.

  대중문화의 활성화와 더불어 국내 디자인관련 산업계는 기존의 안이한 전통논의나 정부주도의 계몽담론을 탈피하고 시장움직임에 대응할 수 있는 시장논리의 한국디자인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였으며, 또한 외국과 차별되는 한국디자인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기존의 관념적 한국미 논의가 아닌, 시장지향적인 제품생산을 위한 한국디자인의 연구가 시작되었고, 또한 대형 국제행사주최에 따른 세계와 차별되는 한국의 이미지를 찾기 위한 노력도 동시에 경주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각기 ‘한국형 제품등장’과 ‘전통의 키치화’라는 현상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원화 경향-계몽적 디자인과 상업적 디자인

  80년대 이후, 디자인의 경향은 이원화되기 시작하였는데, 상공부를 주축으로 하는 관료적 성향의 엘리트 디자이너가 이끄는 ‘계몽적 디자인’과 기업들의 필요성에 의해서 시장을 따르는 ‘상업적 디자인’이 그것이다.  전자는 ‘대한민국 산업디자인 전람회’, ‘협회전’ 등과 같은 상공부와 엘리트 디자이너 그룹에 의해 수행된 디자인 경향이며, 후자는 80년대 이후 활성화되기 시작한 기업주체의 민간 디자인그룹으로 ‘굿디자인전’, ‘삼성 굿디자인전’, ‘금성사 산업디자인 공모전’등으로 대표할 수 있다. 산업디자인전람회에서 선발되는 디자인과 굿디자인전에서의 그것과 성향이 분명히 다른데, 이는 그 선정주체의 성격을 반영한 것으로 국가 정책적 관심사가 반영된 것이었다. 가령 예를 들면 민속전통제품, 전통적 소재 등과 같은 전통주의적 성향과 서구의 최신 디자인 사조나 이슈를 소개하는 품목 등 계몽적 성격이 짙었으며, 국내 디자인 산업계의 관심환기와 후학 디자이너의 등용, 추천작가, 초대작가 등의 제도를 통한 인적 구성원의 커넥션과 활동지원 등의 성격도 띄고 있었다. 또한 수상자 개인에게 특전과 명예를 부여함으로써, 디자이너 사회진출의 교두보적인 성격도 띄고 있는 등 인적, 정책적 디자인전의 성격이 강하였다. 이는 주최와 선정 주체가 관(官,정책입안자)과 교수진, 여론선도그룹으로 대표되는 엘리트디자이너들인 탓으로, 정책적 관심사와 그 흐름을 같이하여 국가적 관심사(수출제품, 포장, 전통제품 등)를 반영한 제품, 포장재, 전통제품 등이 주로 선발되었는데, 거의 대부분 전자제품과 그 응용작이 대통령상을 수여하였고, 시각, 환경, 공예 등에서는 입선작이 적었다. 디자인 전람회는 디자인후학들에게 의욕을 고취시키고, 기업에게 공인된 디자이너를 쉽게 선별할 수 있게 하며, 디자인 신경향을 전파하고, 국내 디자인 조류를 선도한다는 점에서 순기능으로 작용하기도 하였으나, 반면 수출산업에의 기여라는 본래 취지와 달리 입상작품의 실용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디자이너의 등용문으로, 혹은 추천작가, 초대작가 부문과 같은 연공서열과 학맥이 중심이 되는 엘리트 디자이너 양성등 사(私)적 이익에 치중되는 등의 문제점이 있었다. 

  이에 반해 굿디자인전은 철저히 산업경쟁력 제고를 위한 산업화와 상업성을 중심으로 한 기업, 소비자의 관점을 대변하고 있어, 그 스타일이나 항목면에서 대중적, 산업적 측면의 반영비율이 높았고 작품과 기업에 특전과 명예를 부여, 개인적인 특전이 부여되지 않음에 따라, 경력을 위한 참여나 엘리트 디자이너의 참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철저히 상업적인 논리를 따르고 있다.  여기에서 선정된 제품들은 실용 양산품이며, 실질적인 한국사회의 대중적 성향을 나타내 보이는 디자인전이라고 볼 수 있다. 아래 그림은 85년, 산업디자인 전람회와 굿디자인전에서 수상한 작품들을 나열한 것이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산업디자인전람회는 전통적 색채가 강한 제품, 패키지, 시스템적 통합을 위한 공공시설물 등과 같은 공적, 문화상품적 성격이 강한 제품이나 이슈, 사회기간망의 시스템적 통합을 위한 제품들이 수상작에 많이 등장하고 있고, 굿디자인전에서는 일상적이고 대중적이며 상업성이 뛰어난 제품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또한 그 스타일면에서는 양쪽 모두 모더니즘과 미니멀리즘 양식이 혼용된 당시의 유행경향을 반영하고 있으나, 산업디자인전람회는 모더니즘 스타일에 한국적 색채를 덧씌운 절충주의적 양식이 눈에 많이 띄며 대중적 일상생활의 수요에 부응하는 상업적 제품은 별로 없고, 작가적 성향의 공예품들이 일부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정기준에서 각기 공모전의 성향과 선정주체의 생각이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4) 90년대 이후 - 산업디자인 발전

  문민정부 이후 제기된 ‘세계화, 국제화’ 흐름으로 디자인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유통시장 전면개방에 따른 거대자본의 다국적 업체의 진출과 지적 재산권, 저작권법 강화, 생활용품 수입자율화 조치(93)로 기존의 산업계에서의 모방, 표절, OEM 생산등과 같은 노동집약적 산업체제의 변화를 불러왔고, 디자인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부터 국가경쟁력과 산업생존차원에서의 디자인 논의가 시작되었으며, 디자인의 인식과 위상이 실질적으로 제고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기업내부의 디자인 센터의 설립, 디자이너 중진의 출현등과 다각화된 디자인 특화산업을 시작하였으며, 산업디자인전문회사 협회가 설립(91)되고, 공인 산업디자인 전문회사 등록제도가 시행(92)되었으며, 다양한 고유모델의 생산이 가속화되고 디자인을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만연해졌다.  정부적 차원에서 한국디자인포장센터(KDPC)의 산업디자인 포장개발원(KIDP)으로의 개편(91), 산업디자인의 해 원년 선포(93)와 디자인주간 선정(93. 9.1-15), 디자인의 날 제정(93-97, 5.2.)등과 함께 산업디자인 발전 5개년 계획(93-97), 한국청소년 디자인전람회(93), 디자인관련 특집프로그램 편성(94, MBC, KBS), 세계화 방안 논의(96, 세계화 추진위원회, ‘디자인산업 세계화방안’), 디자인 정보화 사업(MIDAS, 97), 세계산업디자인대회(ICSID), 세계그래픽디자인대회(ICOGRADA)유치(97) 등 다각적인 정부차원의 논의가 진행되고, IMF를 맞아서는 더욱 강도 높은 디자인 드라이브를 펼치게 됨으로써 디자인계의 국제화와 산업경쟁력 강화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4. 문화정체성 논의의 계보

  한국미술, 문화, 전통미 등과 같은 정체성 회복에 대한 노력의 연원은 1920년부터 시작된다. 19세기 말까지의 한일합방으로부터 1920년대 문화정치(文化政治)로 전환되기 전까지는 일제의 폭압과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말미암아 급속히 민족문화 양식이 소멸된 시기이다.  그러다가 향토색, 전통미 등의 논의가 시작되기 시작한 것은 20년대 이후의 일로,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는 일제가 통치방식을 ‘문화통치’로 전환한 시점으로 ‘선전(조선미술전람회, 1922년)’을 통하여 문화정책을 확장시켜 나가는 시기였으나, 반면 이를 통해 한국사회내에 미술계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사회적으로는 당대에 사회내부에 만연하던 유물론의 대두로 프롤레타리아 미술론이 대두되던 시기이며, 서구로 유학을 떠났던 유학파14)들이 국내로 돌아와서 화단을 개척, 확장하고, 화단의 그룹의 활동이 왕성한 시기이기도 하다.  ‘서화협회’15)를 중심으로 한 전통계승론의 전개 등과 같은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될수 있는 문화풍토가 조성된 시기가 1920년대 였다.

  ‘정체성’이라는 용어가 활발하게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70년 이후의 일이다. 디자인 내부에서 정체성의 논의가 시작된 것은 60년대부터이나, 자생적 실천담론으로써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이루어진다. 그 이전까지는 국가주도의 거대담론으로써 한국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을 뿐 실천적 방안의 제시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 구호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으며, 전통요소의 피상적 차용, 모사를 통한 정체성회복이라는 자기위로의 수준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과거 삼십년(70년대 이후)동안 이루어진 많은 한국적 정체성에 관한 논의와 연구들은 한국, 중국, 일본 등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전반의 문화보편성을 위에서 논의되지 않고, 중국과 차별화된 한국만의 고유성, 특수성만을 고집하였고, 격변한 사회시스템에 무관심한 원형주의적 접근을 통한 형상의 차용이라는 키치의 재생산에 기여해왔고, 정치적 논리에 기인한 국수주의적 형태로까지 발전하여 무조건 우리 것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는 식의 문화복권 운동을 전개하기 일쑤였다.

  최근 다시금 문화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된 계기는 다분히 현실적인 필요성에 의해서이다. 90년대 초, 사회주의 체제 몰락으로 양극체제가 붕괴되고, 전지구적 자본주의 경제체제로의 이행으로 말미암아, 전 지국적 자본주의 통합화가 이루어졌고, ‘국경 없는 전쟁’이라 불릴 만큼 각 국가의 생존을 위협하는 초국가적 통합은 GATT, UR, WTO등을 통하여 가시화되었다. 보호관세 철폐 등의 이유로 경쟁력이 없는 산업은 국제사회에서 도태될 위기에 처하면서, 당시 노동집약적인 산업이 주를 이루는 한국 산업은 후발주자인 동남아시장과 중국 등지와 가격경쟁이 되지 않고, 고부가가치 상품에 있어서는 선진국과의 품질경쟁이 되지 않는 등의 문제점이 있었다. 농산물, 서비스 및 지적 소유권 등 상대적으로 산업화의 진전이 늦었던 부분들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옴에 따라, 문화산업화론이 대두되게 되었으며, 이와 같은 맥락에서 디자인계의 ‘한국적 디자인’, ‘문화적 디자인’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자발적인 민족문화에 대한 자각에서가 아니라, 시장경쟁력 제고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실용적 이유에서 대두된 시대적 요구였다.

  한국적 디자인 논의는 ‘한국적’인 것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에 대한 여러 고민을 불러왔고, 보통은 일반적으로 전통문화에 대한 이미지를 차용하는 것으로써 한국적인 것을 규정하려는 노력을 마무리지었다. 또 과거 ‘전통형식’, ‘민족형식’등과 같이 ‘한국적’ 디자인 논의도 문화정체성에 대한 자각의 결과물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선전의 도구로 더 많이 활용되어왔다. 

4.1. 일제시대(1920-45): 문화주의와 향토색, 조선취미

  전통미에 대한 논의의 시초는 1930년대 후반이다. 이때는 향토색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고 있던 때였으며 일본 군국주의가 끝나가던 시점이다. 당시 미술계에는 향토미, 또는 향토색을 강조한 작품이 빈번하게 등장하였는데, 이는 다름 아닌 ‘선전’의 입상을 위한 것들이었다. 이때의 향토미란 선전 입상을 노린 진부한 소재였는데, 당시 선전의 심사위원이 대부분 일본인이었기 때문이었는데, 풍물, 전통양식 등과 같은 이국취미로 표피적 효과만을 증폭시킨 출품작이 30년대 말부터 많았다. 권위주의적 관전을 통하여 이른 바 ‘향토미’라는 포장술, 아이템으로 이용된 것이다. 이에 향토미가 오히려 조선미술의 본질을 왜곡하는 경향을 낳았는데, 공예에 있어서도 예술분야의 향토색 논의와 유사한 경향의 ‘조선색’, 혹은 ‘조선취미’ 경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1932년 제11회 선전부터 ‘공예부’를 신설하고 나서부터, 공예부분에서는 단지 ‘향토생산물적’, ‘수출품적’인 가치를 가지는 일본의 이국적 취향-조선취미-의 작품들이 대다수를 차지하였는데, 이것이 전통공예에 대한 일제의 시선을 반영한 타자화된 공예, 관광용 조형일 따름이었다.16) 하지만, 이와 같은 선전에서의 폐해는 이후 국전으로 고스란히 이어지게 되면서, 현대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이후의 국전은 전후 혼란수습을 빌미로 반공정책을 충실히 따랐는데, 일제하의 문화정책을 답습함으로써 더 큰 문제를 야기했다. 새로 태어난 민족문화의 정통성을 이어갈 방안에 대해 숙고하기보다는 일본 총독부가 제정한 선전의 규정 자체를 모방함으로써 애초부터 불안한 출발을 보였던 것이다.17)

  일각에서는 1940년대에 들어서는 전통미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활발하게 된 이유가, 일본군국주의 막바지에 이르러 더욱 강화되는 탄압에 대한 대응의 방법으로, 또 새로이 잠식해 들어오는 서구의 물질문명에 대한 대안 수단으로 조선 고유의 정신세계를 다시금 주목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당시 서구사회의 분위기를 볼 때, 급속한 산업화의 후유증과 세계대전 이후 물질 문명에 대한 회의가 일었으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동양의 ‘정신주의’, 혹은 ‘동양주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경향도 있었다.18)

4.2. 50년대 (48-61: 1,2공화국): 기념품(Souvenir), 관제홍보용.

  1949년 국전에 공예가 조직되었을 때, 선전을 통해서 데뷔한 전통공예 장인들과 동경유학 미술가들이 관련하여 일본 총독부가 제정한 선전의 규정 자체를 모방19)하였을 뿐 아니라, 일제 문화정책에 대한 반성부족으로, 민족문화의 정통성을 이어 나갈만한 자질을 갖추지 못한 출발을 보였다. 국전공예는 ‘우리의 훌륭한 공예유산을 계승, 발전시키고 현대화시킨다.’라는 명분과는 달리 어떠한 국가적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일본인 공예가가 입선되기도 하였다.20) 이와 같이 전통문화에 대한 정책당국의 철학부재와 혼란으로 기존의 일본식 절충주의 전통은 국전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그 맥을 잊게 된다.

  이후 1958년 한국공예시범소(KHDC)가 설립되고 도자, 지역특산품 등과 같은 수공예 진흥을 통하여 당시 한국의 산업구조에 맞는 양산공예와 경공업 제품 부문의 디자인의 산업화를 시도하였는데, 양산공예의 진흥은 반대급부로 전통공예를 순수공예로 분류, 구분짓고, 생산, 판매구조에 악영향을 미침으로써 전통공예가 생활공예로부터 순수공예로 변질되게 만드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21)  당시 SSM사는 뉴욕지사를 통한 가구 등 한국상품의 머천다이징 및 마케팅 업무를 수행하였고 팔릴만한 신제품을 디자인하고 제조업체에 제공하여 생산케 하였는데,22) 당시 전통에 대한 인식의 수준은 겨우 관제 행사용 정보들을 도안하기 위한 ‘소재주의적 발상’이거나 식민지 시대의 일본 문화의 지역적 전통성을 관성적으로 답습하는 수공예 취미를 벗어나지 못하는 정도였다. 이 당시 한국 정부는 수출증대를 목표로 다양한 해외전시회, 박람회 등에 참가하며, 국가이미지를 홍보하는 과정에 있어서, 정부는 ‘한국성’의 표방하는 전략으로 전통공예품과 같은 1차 산업물을 이용하였을 뿐, 전통에 대한 인식은 부족한 상황이었고 이는 KHDC의 운영방침과 대부분 일치하는 부분이었다.  상공부는 「Military Revolution in Korea」, 「Korean Souvenir」,「Korea at a Glance」, 「Corea de un Vistazo」등의 간행물을 통하여, 서방세계에 대한 한국의 이해를 촉진하고자 하였다.23)

4.3. 60~70년대 (61-81: 3,4공화국): 권위적 민족주의

  1960년대의 전통형식은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등장하게 된다.  정치적, 문화적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는 대외적으로는 민족중심주의로, 대내적으로는 강력한 전체주의로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에 호응한 조형문법 또한 이러한 ‘권위적 민족주의’ 형식에 동조하였다.  ‘조국근대화’라는 슬로건 하에 진행된 ‘새마을운동’은 대대적인 전통문화파괴를 수반하였으며, 전 국민적인 계몽운동과 서구화 이식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과정 중에 전통문화의 단절과 파괴는 필연적으로 수반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유난히 ‘민족전통의 계승과 발전’을 외치며 전통문화가 유별나게 강조되는 시대였기도 하였다.  이 시기동안에 각 국민학교 교정에는 충무공과 세종대왕의 상像이 세워졌으며, 관이 발주하는 각 공공건축물에는 예외없이 피상적인 전통조형요소가 차용된 건물이 설계되었다.24)

  1965년 청와대 수출확대회의에서 ‘한국공예 기술연구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1966년 6월 상공부 주최, 대한상공회의소 주관으로 ‘대한민국 상공미술전람회(상공미전, 현 대한민국 산업디자인 전람회)’가 개최되면서 디자인 부문의 활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디자인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필요성 인식과, 제도적인 지원이 시작되었음을 말해준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문화재 발굴작업과 재평가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전통문화재는 민족주의적 자긍심을 세우기 위한 매개체로 활용되었다.  또 외국과 한국의 근대문화의 수준을 정신적 차이개념이 아닌 물질적 우위개념으로 인식함으로써 민족주의적 논리에 입각한 정통성 확립을 과거 문화유산에서 찾고자 하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논리에 의해 수출증대가 국가사업으로 설정되었던 당시 한국의 상황에서 ‘전통성’은 문화적 독자성이라는 인식 하에 도덕적으로 정당성을 획득한다. 이러한 인식은 현재에까지 관성이 남아서 그 영향력이 유지되고 있다. 관료적 발상의 정당성은 이후 국책사업을 수립함에 있어서 계속적인 전례로 남게되고, 비슷한 유형의 국책과제를 반복해서 만들어내고, 자금을 투입하는 행태를 보인다. 당시, 군사정권의 ‘경제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전통’문제에 대한 최초 접근이 상당히 타율적이고 권위적이었음을 드러내며, 또한 반문화적 발상이었다. 이 시기, 관료들의 ‘한국문화성 찾기’의 방식은 전통의 기능・의미적 측면은 배제된 체 ‘형식의 모사적 차용’, ‘전통적 요소의 모방’을 통해 ‘한국 문화성’을 표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 주도형 정책 확립과정에서 비롯되는 예술, 문화에 대한 정부측의 무지는 결국 문화산업의 영역에서 ‘한국성’에 대한 생산적 논의와 관점을 제시하는 과정을 저해하는 계기가 되었고, 반문화적이고 타율적으로 한국의 문화성이 디자인되는 기반을 제공했다.  ‘한국성’에 대한 인식과 담론형성은 당시 해외 시장에 한국을 홍보, 수출증대에 가장 중점을 두던 정부의 정책들에 의해 유형화되어갔다.

  예로 당시 1966년 중앙박물관 현상 공모 당시, 주관 관청의 설계 제시조건 중 ‘한국의 고전 건축 중 우수작을 모사할 것’이라는 항목이 포함되어 제시되었는데, 당시 공공건물의 설계경기의 지침에는 "한국성의 표현, 재창조, 승화" 하는 식으로 표현되어 나왔다.  정부 주도의 ‘민족전통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명제는 조형문화에 다양한 가능성을 획일화시키는 ‘유형화’, ‘획일화’의 과정으로 작용하였다. 정부주도의 민족주의 논리와 전통계승 운동은 이후 디자인 등의 조형문화에 있어서 ‘한국성’, ‘문화정체성’등의 주제가 생산적인 담론의 형태로 발전하지 못하고 피상적 형상의 차용, 관념화된 담론의 재생산등 주변부만을 배회하게 되는 기반으로 작용하게 된 셈이다.25)

   60년대는 이제 막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시기로 디자인에 대한 개념분화도 완전히 이루어져 있지 않았고, 그 활동도 도안이나 의장의 개념에 불과한 미미한 것이었으며, 미술 혹은 공예의 연속선상에 있는 작업이었다. 조형문화에 대한 전통성 논의가 먼저 발생한 분야는 건축분야이다. 건축양식에의 전통성 논의는 전통에 대한 낭만적 해석과 추상적 조형방법론이 가시화되기 시작하였는데, 김중업의 ‘프랑스대사관’(61)은 전통에 대한 긍정적 해석으로, 김수근의 ‘부여박물관’(67)은 추상화로써 전통에 일련의 재현을 시도하였다. 이후 70년대에 들어서는 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 등과 같은 독재체재 전체주의 시대 전통해석방법인 전통조형요소의 부분적 차용을 통한 전통해석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현재에까지 남아서 반복적으로 재현되고 확대됨으로써 전통해석에 대한 정형화된 해석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80년 이후로 전통요소의 문양, 형태 차용이라는 피상적 해석방법을 넘어선 구조적 해석방법이 등장하였고 보다 진일보한 수준의 논의가 시작되게 되었다. 그러나 디자인계에서는 이 당시까지도 ‘전통의 계승 발전’과 같은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후 70년 후반에 들어서야 전통적 디자인, 또는 한국 디자인의 전통성에 대한 연구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70년대에는 산업화와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디자이너들의 사회적 활동이 활발해지고, 디자인 영역의 활성화가 이뤄지기 시작하였다.  70년대에는 디자인 단체들이 ‘한국의 미’. ‘한국의 이미지’. ‘한국의 멋’과 같은 주제로 전시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앞서 제시된 정부주도의 민족주의 논리와 그 맥을 같이 한다.  당시 디자인 1세대들의 한국성에 대한 탐구는 전통 문양이나 색채와 같은 조형요소의 재현작업이 주종을 이루었고, 이러한 방법은 디자인 교육의 주요한 프로그램으로 정착되면서 확산되어 나갔다.

4.4. 80년대 (81-88: 5공화국): 도안, 양식화

  1980년대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라는 국가적 규모의 행사를 개최하면서 세계 속에서의 한국문화에 대한 고유성에 대한 자각이 일어난 한해였으며, 문화지형이 변화하는 전환점이었다.  민족문화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고 세계 속에서의 한국의 위치와 차별성에 대해 탐구가 시작되었으며, 대중문화 활성화에 따른 민중의 자발적인 문화형성의 계기가 된 원년이기도 하다.  고도성장에 힘입어 대중문화의 양적, 질적 확대가 이루어졌으며, 이는 국민의 탈정치화를 부추기고, 과소비를 조장하는 상업화의 도구, 정치적 선전도구로 전락한 부정적인 면도 많았으나, 일방향적인 관제홍보 수단에서 민중의 자발적인 의사표현수단으로 문화가 변해나간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컬러TV 보급에 힘입어 대중문화와 사회환경 전반의 색채가 화려해지고 다양해졌으며, 민중의 문화적 욕구가 문화운동의 차원으로 활발히 전개되기도 하였는데, 국민의 정치적, 사회적 참여 욕구에 대한 탄압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교묘하게 강화되었다.

  신군부는 쿠데타 집권이라는 정통성결여, 부도덕성을 무마하고, 여론을 호도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국민유화정책과 우민화 정책을 펼쳤는데, 장발단속 완화, 통행금지의 해제, 교복 자율화,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등 일련의 ‘개방화 정책’이 전자이며, 컬러TV의 방영, 프로야구, 프로씨름의 개막, 스포츠신문의 창간, 아시안게임・올림픽 등의 스포츠행사 개최로 대중들의 관심을 Sex・Screen・Sport로 호도하는 이른바 ‘3S정책’을 편 것이 후자에 속한다.  80년의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여론호도를 위해 ‘미스유니버스대회’나 1981년의 대대적인 관제행사인 ‘국풍81’이 치러진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한국성의 논의에 있어서는 이념적 대립이라는 문화지형에서 문화적 대안으로서의 민족주의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한국적 디자인은 대중문화의 확대와 맥을 같이 하여, 디자인의 전통성 추구의 방법도 다원화되었다.  기존의 피상적 전통요소・형상의 차용, 전통양식・문양의 도안, 양식화 등과 더불어, 형상으로부터 탈피하여 전통성의 정신성・상징성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는 경향이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원형주의적 접근방법과 키치(kitsch)적 속성도 나타난 시기였다. 삼태극, 십장생, 오방색등 상징성이 강한 소재가 한국을 세계와 차별되는 고유명사로 인식시키기 위한 기호로 등장하였고, 전통적 소재나 속성을 추상화시켜 현대디자인의 특성에 맞게 변형시키는 작업이 활발하였다. 디자인에 나타나는 경향성도 건축과 유사하다.  물론 기존의 정형화된 전통의 해석방법도 재연되고 있기는 하였지만, 전통적 소재의 직설적 차용보다는 내재된 질서를 찾고, 현대 모더니즘 디자인 Style에 적용시키려는 노력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우리문화의 모더니즘적 해석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인데, 변한 사회상에 발맞추어 전통도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여러 가지 국제적 행사의 개최(86아시아게임, 88올림픽)속에서 세계속에 한국이라는 차별화된 고유이미지를 심기 위한 방안으로 전통적 요소를 무분별하게 차용, 모사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전통과 문화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이루지지도 않은 체, 관료적 관성에 따라 기존의 정형화된 고전미를 재현하는 방식을 재연한 것이다. 이는 단기간 내에 전시성 성과를 내기 원한 조급함이 복고적인 소재의 저속한 재현이라는 전통의 키치화를 불러왔고, 문화․디자인의 정치적 논리개입으로 ‘전통의 회복 및 계승’이라는 관료의 특성의 사변적이고 당위론적인 구호가 본질적인 디자인의 발전을 저해하고, 나아가 디자인계 내부의 관료화26)를 조장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부 주도적인 분야 이외에 있어서는 문화통제의 완화로 인해 다양한 문화양상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를 통한 문화정체성의 다원적 접근방법, 표현의 가능성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4.5. 90년대 이후(88-98): 기호・정신성의 재해석

  90년 문화부의 출범이후, 그동안 경제발전에 치우쳐 돌보지 못했던 고유 문화의 회복을 위해 다양한 정책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우리 소리 찾기 작업으로 전통음의 표준화, 고유한 색채문화를 찾기 위한 전통색상 표준화, 의식주 부문에서의 고유한 양식과 축제의 개발 보급 등의 사업을 추진해 왔다.  또한 고유한 전통문화의 보존 발전 정책과 함께 문화부는 문화의 국제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대중문화 산업정책을 입안, 우루과이라운드와 국제화시대라는 변화에 맞추어 대중문화산업 역시 고부가가치산업으로 육성되어야 한다는 정책이 제기되었다.

  정부의 제2 근대화론과 발맞추어 제기되기 시작한 논의가 ‘문화산업화’ 담론이다.  ‘문화산업화’란 하드웨어 중심의 상품생산(굴뚝경제체제)에서 소프트웨어 중심의 상품과 써비스 생산(지식정보사회)으로의 변화로 말미암아, 문화가 주된 부가가치를 생산하며, 산업의 중심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며, 영상산업, 멀티미디어산업 등과 같은 소프트웨어 산업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논의의 주된 테마는 ‘민족문화’인데, 민족문화의 특정 내용과 형식을 생산공정, 경영전략 등에 적용, 고부가가치의 상품으로 사용하며 전유한다는 것으로, 한국 기업이 생산하는 상품이 민족적 정서와 가치를 담고 있을 때 국제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논리이다.27) 문화산업화 논의가 실질적인 디자인계의 변화를 이끌어 내게된 계기는 시장개방과 관련된다. 기존의 관념적인 문화논의에서 벗어나 한국인의 생활습관이나 환경에 대한 시장적 접근이 가능했던 계기는 1993년 취해진 ‘유통시장개방’과 ‘수입완전자유화’로 인하여, OEM(주문자생산방식)의 한계 노출과 국제경쟁력 약화가 첫 번째 원인이며, 전자제품 업계의 불황을 타계하기 위한 마케팅 전략변화가 두 번째 원인이다.  결과적으로 정부주도의 관제행사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한국적’ 컨셉이 대중적 선호를 쫓는 시장질서와 속으로 편입되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문화산업론이 주창되고 난 이후로부터, 한국미 논의는 피상적이고 사변적 차원의 논의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용적인 용도로의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과거 관주도의 정책적 구호로만 이용되던 한국미 담론이 대기업 제품디자인에 적용되고, 국외 홍보용 자료, 영상물, 소프트웨어 등의 현재적 상품들과의 융화를 꾀하기 시작했고, 소정의 성과를 거두어 들이기 시작한 것이 90년대의 변화이다. 정책적 차원의 문화정체성 논의에도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는데 기존의 관념적인 이미지 위주의 논의에서 실체적 영향력을 가진 대상과 기존의 대외이미지를 최대한 활용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제품디자인에 있어서는 모방을 지양하고 한국적 디자인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었는데, 외국제품고의 차별화를 통한 경쟁력 강화로 내수시장을 지키기 위한 일련의 노력이었다.  가전제품의 경우 서구와 맞지 않는 우리의 생활습관을 고려한 기능의 재배치와 매뉴얼의 한글화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김치냉장고, 찌개, 찜등이 가능한 전자렌지, 물걸레 진공청소기, 한글 매뉴얼의 컬러TV, 참기름 제조기, 전자식 약탕기 등이 있다. 그러나 스타일 면에 있어서는 대개의 경우 일반적인 모더니즘 양식을 따르고 있었으며, 90년대 초반에 유입된 포스트 모던 스타일의 해체주의 양식, 하이테크 양식, 신 미니멀리즘 양식 등이 간혈적으로 등장하는 등 모더니즘을 주축으로 한 다원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경향은 건축, 그래픽, 제품, 의상, 환경 디자인 등의 많은 대부분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4.6. 2000년 이후

  2000년 6.15 남북공동성명을 통한 민족동질성에 대한 자각, 2002 한일 월드컵 유치를 통한 민족자긍심의 고취, 참여 문화 조성 및 4강 진출을 통한 패배감의 극복, 미군 장갑차 사건, 이라크 전쟁 등을 통한 반미의식고조와 탈 미국화 경향의 대두가 2000년 이후 3년동안의 변모된 한국사회의 단면이다.  지도급 인사들의 이중국적문제, 병역회피 논란등과 같은 자질문제의 대두와 함께, 좌파적 성향의 개혁세력이 급진적으로 등장하고, 외세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군사문화에 대한 청산 등을 가장 큰 변화로 꼽을수 있다.  문화정체성에 대한 관심도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데, 기존의 전형적인 관념에 대한 새로운 의문이 제기된다.

  타자의 시선으로 정의되던 한국문화에 대하여 스스로 평가를 내리는 경향이 대두된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예의바른 민족이라거나, 일제가 말하는 슬픈민족, 서양인이 바라보는 은자의 나라, 동방예의지국,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모습을 벗어나서, 월드컵의 거리응원문화를 통한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모습의 정열의 나라로 새로이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미군범죄에 대한 SOFA 개정을 요구하는 촛불시위를 통하여 반미가 아닌, 탈미경향과 민족자주에 대한 열망을 내비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양상은 월드컵 행사의 매스게임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드러나는데, 역대 국제대회때마다 동원되던 고등학생들의 한복차림과 탈춤이 사라지고, IT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는 캐릭터의 등장과, 전통복장의 새로운 변용 등과 같이 기존의 역대 국가행사들과는 다른 한국의 이미지를 선보이고 있다.  또 오방색의 색동띠는 붉은 색의 반팔티셔츠에 묻히고, 비애의 상징과 같은 아리랑 대신에, ‘대한민국’과 ‘필승, 코리아’가 연호되었다.  더이상 동방의 ‘조용한 아침의 나라’이기를 거부하고, ‘역동적이고 힘찬 정열의 나라’, ‘Dynamic Korea'로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또 전통적인 동맹, 우방국 관계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됨과 동시에 탈미국화, 민족공조등과 같은 논의가 진행되고, ‘007 어나더데이’ 안보기 운동, 맥도널드 불매운동 등과 같은 사회운동으로 전개되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들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한국 스스로에 대한 새로운 정체성을 새롭게 형성해 나간다는 사실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국의 모습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규정하고 자발적으로 변모해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세계 최고의 네트� 인프라를 통해 새로이 형성된 민주적 의사결정과정과 참여적 문화형성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4.7. 소결

시기별 디자인 문화정체성 표출방식

구분

기간

표출방식

특징

비고

일제

시대

19-

44

문화주의적 향토색, 조선색, 조선취미

문화주의영향의 이국적 취향.

선전,

소재주의

미군정

1-2공

45-

60

수공예산업 부흥

Souvenir, 관광상품

관제홍보용. 수출증진을 위한 산업공예의 진흥

ICA.

수출품

3-4

61-

80

권위주의적 민족주의

수출증대를 위한 도안과 의장,

정통성 강조를 위한 전통요소모사

정부주도 정책위주의 획일화, 유형화

정부주도정책중심

유형화

획일화

5공

81-

87

대중문화 발달

유화정책, 우민화정책

세계속에서 한국 고유성에 대한 관심. 소비성향, 저속화와 키치 (kitsch)

민족주의 부각과 전통적 소재 유행.

대중문화와 대중문화산업발달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6공

88-

92

탈냉전 상업화

근대화의 자성과 전통문화에의 주목

정신적 가치에의 주목

문민

정부

93-

98

세계화, 문화산업논리

세계화논의 속의 문화산업논리 대두

산업경쟁력으로서의 민족문화,

디자인경쟁력.

UR 세계화,

문화산업화론

국민의 정부

98-

지식정보기반 고부가가치 사업

컨텐츠로서의 문화산업,

오리지낼리티의 확보로서 디자인

정보지식기반사업

5. 한국 현대문화의 변화와 디자인의 새로운 가능성

독재정치하의 지역적 특수성강조

박정희

한국적 민주주의

김일성

우리식 사회주의

마하티르

아시아적 가치

이광요

아세아적 가치

수카르노

교도민주주의

모택동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장개석

손문의 삼민주의

5.1. 인류보편성과 지역특수성

  6-70년대 개발독재시대에 사회, 문화, 정치 전역에 걸쳐서 유행한 󰡐�한국적 가치󰡑�, 󰡐�한국적 특수성󰡑� 논의는 당시의 독재정치 상황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한 정치적 구호이고, 이를 위해 민족주의를 교묘하게 활용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독재정권을 가진 주변 아시아지역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인데,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동아시아 지역의 특수성, 동양-한국문화의 지역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방법을 취함으로써, 인류문화 보편성을 희석하고, 독재정권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당위성을 부여해 나갔다. 전통․민속․고유문화의 특수성과 고유성을 강조, 예찬하는 󰡐�한국적 디자인󰡑� 논의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가 있는데, 80년대 이후에는 이러한 논의가 󰡐�시장개방󰡑�에 따른 󰡐�세계화󰡑�, 󰡐�문화산업화󰡑� 논의와 뒤섞여 󰡐�우리 고유전통문화를 문화산업화시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고 문화선진국으로 진입하자󰡑�라는 요지의 확장된 󰡐�한국적 디자인󰡑� 논의, 󰡐�디자인 국부론󰡑�으로까지 발전되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이라는 큰 틀을 놓고 보았을때, 정말로 우리만의 󰡐�고유󰡑�한(독자적인) 전통문화가 따로이 존재하느냐 하는 질문을 해볼 수 있고, 또 고유한 전통문화가 현대에 있어서 세계화되고 고부가가치를 창출할만한 우수성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질문을 해볼 수 있다. 고유한 문화라는 말은 세계사의 조류 속에서 보편성을 갖지 못하고 한국 지역이라는 특수한 상황에만 적합한 지역적 문화일수도 있다. 인류보편적 효용성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자면, 󰡒�우리 것이 좋은 것.󰡓�, 󰡒�고유한 것이 우수한 것.󰡓�이라는 논리는 자문화중심주의, 변형된 문화주의이며, 과거 일제말기 󰡐�물산장려운동󰡑�이나, 80년대 시장개방에 맞선 󰡐�국산품 사용운동󰡑�, IMF 금융위기당시의 󰡐�BUY KOREA'운동 등과 같이 국가위기상황에서 구성원의 단합을 위하여 강조되어지는 민족주의 논리의 연장이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그 쇼비니즘적 성향으로 말미암아 국가 구성원들을 국수적 성향을 증대시키고 사회를 점차적으로 폐쇄화시키는 부작용이 있어, 위기상황이 아닌 평상시에도 확대 적용되는 것은 문화적 다원성과 발전을 저해하게 된다.

5.2. 다(多)문화주의 시대와 문화정체성 논의방향

  우루과이라운드를 계기로 한국사회는 이미 국제화 흐름에 동참, 시장 지배적 메커니즘을 받아들인 다문화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문화 영역도 예외가 아니어서, 다문화주의 시대에 있어서 문화적 정체성회복을 위한 노력이란, 우리 것을 어떻게 세계화시키느냐는 문화 제국주의적 논리가 아니라, 우리 사회내에 만연한 외래문화 영향들을 어떻게 󰡐�우리것 화󰡑� 해나가느냐의 문제로 전환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우선 우리문화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넘어서는 󰡐�탄력적인 문화정의󰡑�가 필요하다. 미국사회가 이민정책을 통하여 다민족의 문화전통을 취합하고 융합해냄으로써 현대문화의 꽃을 피우고 미국의 문화정체성을 형성하였던 점을 상기해 볼 때, 이미 우리사회 내부의 문화제국주의적 요소, 외래문화의 영향을 감정적으로 배척하고 전통만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사회의 흐름에 순행하여 시장 메커니즘 속에서의 문화창조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맹목적인 서구 추구를 배척하여야 함과 동시에, 󰡐�민족문화󰡑�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도 마찬가지로 배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제화의 조류 속에서 현대적 가치관과 대중적 흡수력을 바탕으로 좋은 것을 취하고, 나쁜 것을 버릴 줄 아는 분별력을 가져야 하며, 거대 문화산업화의 흐름 속에 민주적 문화형성을 위한 공간을 확보할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누가, 무슨 기준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별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발생한다. 일부 엘리트 그룹이나, 정책관료가 그 기준을 제시한다면 과거 70년대로의 회귀를 뜻하는 것이며, 상업자본이 제시한다면 문화제국주의를 심화시킬 것이다. 이 판단 근거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내용을 철학자 󰡐�탁석산󰡑�씨가 제시하고 있다. 그의 저서 『한국의 정체성』(책세상, 2001)에서는 󰡐�한국적󰡑�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과 판단여부의 기준으로 󰡐�현재성󰡑�과 󰡐�대중성󰡑�, 󰡐�주체성󰡑�을 근거로 하여야 하며, 현재의 대부분 한국적인 정체성 판단의 근거를 삼는 시원(始原)의 문제를 탈피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거의 것이라도 재현되어 현재에 존재한다면 현재의 것이며,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시원만 존재하는 󰡐�우리것󰡑�을 찾는 일은 무의미하다는 논지로, 비록 시원이 외국의 것이라 개성적인 주체적 수용의 󰡐�현재성󰡑�, 󰡐�대중성󰡑�을 확보하면, 한국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결코 정체성과 고유성은 시원의 문제가 아니며 수용주체의 개성의 문제이며, 󰡒�형식, 내용 양면에서의 토착화와 창조적 수용󰡓�을 통하여 현재의 한국문화의 스펙트럼을 다양화, 다원화하는 것이 생산적인 문화정체성 논의의 방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디자인에서도 맹목적인 우리문화예찬을 지양하고, 서방의 조형언어라 하더라도 인류 보편적 가치라는 기준에서 한국의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동화된 문화까지도 역시 한국적인 가치를 지닌 우리 것임을 인식하여야 하며, 서구권의 디자인담론, 트렌드, 사조 등을 주체적 시각을 통해서 수용하고, 우리에게 맞는 문화담론을 형성해 나가야 한다. 또 경제, 산업적 뒷받침이 되지 않는 문화상품 생산의 논리는 과대망상에 불과하다는 점과, 현대 세계 문화산업조류에 편승하지 못하는 발상인 점도 깨달아야 한다. 아직은 문화나 산업, 경제력 등의 세계적 영향력이 다소 미약한 한국의 현 상황을 직시할 때 󰡒�한국적인 것을 세계화하려 하는 것보다, 세계적인 것을 한국적인 것에 담아내는 것이 더 바람직한 전략󰡓�이 될 수 있다.

6. 결론 - 新조형문화 전통창조와 문화정체성 형성

  한국 근현대 디자인․조형문화 변천사는 근대주의와 민족주의의 갈등의 역사이며, 더 깊게는 식민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립의 역사이다.  단지 시대와 상황이 변화함에 따라 갈등의 양상이 변화된 것일 뿐이지, 결코 그 본질적인 갈등의 구조가 변화된 것은 아니다. 자발적인 서구화와 민족문화 창달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시대사적 갈등을 겪어온 한국의 문화사에 있어서 문화정체성에 대한 논의는 그만큼 예민하고 첨예한 대립을 보이는 부분이다. 역사해석방법은 민족주의적 시각을 넘어서서 새롭게 변화된 시대상을 반영한 새로운 역사관을 형성하여야 하며, 역으로 새로운 문화정체성 형성을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해석은 변화되어야만 한다.   한국의 현대 문화 변천사, 좁게는 조형문화 변천사는 근대주의와 민족주의 갈등의 축소판이다. 근대주의가 시대사적 과제였다면, 민족주의는 역사적 과제였다. 디자인계의 문화정체성 논의는 일제강점기 이후로 지속적으로 논의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적 감정과 당위성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고 정체되어 있고, 근현대 디자인의 발전사와 무관하게 ‘한국적 디자인’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으며, 각기 다른 궤적을 그리며,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형상이다.

근대주의(식민주의)

민족주의

일제강점기

산업화와 문화주의

조선취미, 조선색

45-60년

-

-

6-70년

조국 근대화, 새마을 운동,

(자발적 서구화)

민족문화 창달

전통계승, 전통문화계발

8-90년

굿디자인전

산업디자인 전람회

2000-

디자인의 세계화, 선진화

한국적 디자인,

문화적 디자인

ΰäç

  신문화는 많은 부분 세기의 패러다임변화에 따른 기술, 산업, 환경적 변화와 그 맥을 같이 하여 창조되어 왔으며, 기존의 전통과의 단절을 꾀하며 새로운 영역이 개척된 경우가 많았다. 과거 서구 디자인사에서 살펴보면 대부분 사조가 정반합의 발전구조를 보이며, 기존의 낡은 관념을 타파하면서 새로운 조형언어가 창조되고, 새로운 문화양상으로 자리매김 하였는데, 모더니즘은 전통의 거부와 기계생산의 대세를 따라 발생하였고, 미니멀리즘은 상징과 의미, 문양 등과 같은 기존의 전통적 조형언어들을 제거함으로써, 또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조들은 기존의 언어와 관념을 부정하고, 변화된 사회, 기술상에 발맞춘 새로운 실험으로부터 발생하여, 그 자체가 다시 새로운 문화전통으로 자리매김 하였고, 한 시대, 국가의 문화적 정체성으로 발현되었으며, 조형문화논의의 의제를 선점하고, 나아가 세계 문화의 거대흐름을 이끌고 사회, 경제적 파급효과를 구가하였다. 대부분의 문화산업이나 신조형문화들이 경제력과 기술력 발달과 맥을 같이 하여 발전하고, 대중문화시장을 바탕으로 확산되었던 점을 감안할 때 국내 산업구조는 대부분의 조건을 이미 충족해 가고 있는 상태이다. 이미 전자, 선박, IT, 무선통신, 자동차, 반도체, 석유화학, 기계, 철강산업 등과, 동아시아권 전반을 휩쓸고 있는 한류열풍이 한국의 산업적, 경제적, 문화적 역량을 드러내고 있는데, 특히 이러한 경향들이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과 같이 군사적, 정치적 세력을 대동하지 않은 비(非)제국주의 국가로서 대상국들의 자발적인 수용을 통하여 전파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더 그 터전이 공고한 셈이다.

  현재 디자인계에서 활발히 진행중인 문화정체성 논의가 세계적 문화영향력 확대와 오리지낼리티 확보를 통한 산업자원가치 증대 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고유전통문화에서 보다는, 현대 세계문화를 한국화 시키고, 다시 이를 세계화시켜 나가는 방향에서 더욱 많은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디자인에서의 문화정체성 논의는 전통에의 추구보다는, 서구 조형문화의 종속, 복제로부터 탈피, 주체적인 시각을 통한 부단한 문화실험과 논의, 시대에 발맞춘 계속적인 자기혁신과 해당 산업 의제 선점과 표준 제시를 통한 신조형 문화전통의 창조로 나아가야 한다. 산업기술은 시간적인 간격만 극복한다면 누구에게나 추월 당할 수 있는 분야인바, 문화적 척도, 가치관, 조형양식에 있어서의 변화선도와 의제선점은 시간적 간격으로도 극복될 수 없는 고유한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참고문헌

․김종균. 「한국현대디자인의 문화정체성 연구」, 서울대 석사학위 논문, 2002

․김종균. 월간디자인 2004.6. 「한국현대디자인의 문화정체성, 어디서 찾을것인가」

․김종균. 「시대별 ‘한국적 디자인’ 논의의 형성과 변천과정 연구」. KSDS 03년 가을학회 발표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