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실존 인물 - yugwansun siljon inmul

어쨌든 유관순이 실존 인물이든 허구의 인물이든 중요한 건 잔악한 본성을 가진 일본이 다시 만행을 저지르며 역사에 죄를 짓지 않도록 인접국으로서 적절히 제어하고 주도권을 잡는 것이다. 솔직히 한국인들은 지금 경제적으로 일본에 종속돼 있고 철저히 착취당하고 있다. 한시바삐 이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그냥 다시는 일본 압제의 끔찍한 형국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관순 열사는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감옥에서 순국한 독립투사다. 일본의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 의지를 불태웠으며, 감옥 안에서도 독립 운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순국 100주년을 맞는 지금까지도 유관순 열사는 대한민국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알고 있던 유관순이라는 인물의 존재 자체가 부정된다면 어떻게 될까. 당장 우리는 엄청난 배신감을 느낄 것이고, 역사책도 다시 써야 할 지도 모른다. 곳곳에 세워진 유관순 열사의 동상도 모두 철거될 수 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머릿 속에 각인된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태극기를 흔들던 유관순 열사의 모습은 서서히 사라질 지도 모른다.

이런 상상을 하게 만드는 영상이 등장했다. 지난 29일 동영상 플랫폼 유튜브의 '부끄러운 과거TV'라는 채널에 '유관순은 가짜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영상이 올라왔다. 해당 영상은 지난 2006년 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교 교수가 동료 학자 20명과 공동 집필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란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우선 해당 영상에서는 '숨겨진 3·1 운동의 진실'에 대해 얘기한다. "교육계에서는 3·1 운동이 강제동원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주장을 내세우면서 "500년간 왕권에 착취당한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동원돼 근대화를 가져다 준 일본에 항일 투쟁을 했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근거를 내놓고 있다. 특히 3·1 운동이 이권을 빼앗긴 양반가를 중심으로 벌어진 항일운동이었고, 일반 국민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영상의 핵심은 '유관순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먼저, 유관순이 1902년 12월 16일 생으로 알려져 있으나, 국내 교과서에서는 교육과정에 따라 그의 출생일이 매번 달라졌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세상 어느 위인이 이렇게 뒤죽박죽 되어 있는 기록으로 표기되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함께 "1933년 유관순의 시신이 감쪽같이 유실됐다"면서 "당시 언론 보도도 없었다. 기록이라곤 이화여자고등학교에 있는 이화박물관 유관순의 설명문에 1933년 이태원 공동묘지 개발료 묘가 유실됐다라는 기록만 있을 뿐"이라며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유관순의 지인들은 묘지에 관한 기록을 적는 묘적부를 작성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역사 기록은 왜 그녀의 시신과 출생기록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내놓지 않는 것일까"라며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필자가 내린 결론은 유관순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5·18을 연구한 지만원 박사는 자신의 책 '조선과 일본'을 통해 유관순은 시대가 만들어낸 영웅이라 지칭했다. 일본을 격하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초라한 영웅이라고 인식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영상에서는 유관순 열사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해 성고문은 없었고 모두 부풀려진 것이며, 특히 우리에게 알려진 유관순 열사의 사진도 본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로는 "동시대 수감된 여학생의 머리만 봐도 보통의 여학생이라면 댕기머리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외모 또한 여학생이라기엔 너무 겉 늙은 느낌이 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진 속 여성은 동명이인 절도범 유관순이다"라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해당 채널에는 약 4개월 전 첫 영상이 올라왔으며, 유관순 영상 외에도 '일본 731부대의 마루타 인체 실험은 100% 날조다' '항일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은 좀도둑들이다' '정말 위안부는 매춘부일까? 괴물이 된 류석춘' '일본 위안부의 진실 일당 70엔 고수익' '독립운동가 김구가 영웅으로 만들어지는 과정' 등 다소 자극적인 제목의 영상들이 올라와있다. 조회 수도 최소 9천에서 최대 11만까지 적잖은 수치를 기록 중이다. 구독자 수는 현재까지 2만명을 넘어섰다.

영상과 채널이 알려진 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분노하는 댓글들이 줄을 잇고 있다. 누리꾼들은 "진짜 피가 거꾸로 솟네요" "일본에서 돈 받는 인간들이네" "이미 동영상 신고했네요" "진짜 현대판 이완용이네요"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특히 한 누리꾼은 "이 정도 퀄리티에 영상이 올라온 날짜가 빠른 걸 보면 개인이 하기는 불가능하다. 조직이 움직인 거다"라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유관순은 해방후 이화여대에서 일제시대동안 이화여대출신중 나라에 공을세운사람을 찾기시작해서 학교에서 조작해낸 인물이 바로유관순입니다 당시 유관순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서울구치소에서만도 3-4명이 넘었습니다 각각 나이도 달랐습니다 당시 이화여대는 미혼만이 입학할수있었고 재학중 결혼하면 자동퇴학이었습니다 근데 유관순의 사진엔 머리를올린 유부녀입니다 뿐만아니라 이 유관순의 사진을 해방후 나이먹은 이화여대출신들에게 보여줬지만 아무도 그사진의 주인공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유관순은 완전히 조작된 역사입니다 이승만학당에서 바로잡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요즘은 있지도않은 유관순이란인물에다 일본에게 성추행 온갖고문 심지어 토막살인까지 당했다는 이야기까지 진실처럼 떠돌고있습니다 한국인들의 뻥과 거짓말은 가히 혀를 내두르게합니다 부디 이승만학당에서 바로잡아주십시요

유관순 실존 인물 - yugwansun siljon inmul

유관순 실존 인물 - yugwansun siljon inmul

2017년 박근창이 『유관순은 허구인물이다』라는 책을 내놓았다. 일부 역사학자들도 이 주장에 동참하며 유관순 열사(이하 열사는 생략한다.)가 실존인물인지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이에 3․1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로 유관순을 배웠던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리둥절했다. 물론 유관순이 허구 인물이라는 말은 아주 잘못된 주장이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독립운동가 전부를 모욕하는 일이다.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충남 천안 병천면 용두리에서 유중권과 이소제 여사의 3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유관순의 집안은 할아버지부터 개신교를 믿었던 집안이었고, 아버지 유중권은 흥호학교를 운영하는데 많은 힘을 기울인 사회 선각자였다. 자연스레 유관순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믿었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정신이 함양되어 있었다.

특히 유관순은 남들보다 큰 체격에 총명한 머리를 가지고 있어,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오빠 유우석은 유관순의 머리가 총명하여 한글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음에도 혼자서 익혀 성경책을 읽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유관순이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많이 받았음을 짐작케 한다. 

누구보다 눈에 띄던 유관순은 샤프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이화학당 보통과에 1916년 편입하였다. 이화학당에서의 유관순은 학업에 충실하면서도 또래들과 장난을 많이 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낮은 자세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보살펴주는 일에 앞장섰다. 

유관순 실존 인물 - yugwansun siljon inmul

이화학당 고등과에 진학하여 열심히 공부하던 유관순에게 고종황제가 독살당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화학당의 학생 모두 상복을 입고 고종황제의 죽음을 추도하는 의식에 유관순도 참여하였다. 더 나아가 3월 1일 만세시위가 시작되자 서명학, 김복순, 김희자, 국현숙과 함께 5인의 결사대를 결성하고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소복을 입고 통곡을 한 뒤,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학생들의 주도로 시작된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제는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학생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없애면, 곧 잠잠해질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일제의 기획과는 달리 학교 휴교령은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학생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자신의 고향에 내려가 만세운동 소식을 알리며 모든 이들이 동참하기를 촉구했다.

유관순도 3월 13일 휴교령으로 이화학당에 내려갈 수 없자, 기미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품에 몰래 숨겨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아버지와 조인원(1865~1932)에게 기미독립선언서를 내보이며 이곳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아버지 유중권과 조인원은 유관순을 칭찬하며 4월 1일 아우네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아우네 장터에서의 만세운동은 유중무가 교사로 있는 예배당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뜻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4월 1일 아우네 장터에는 천안사람만이 아니라 충북 진천과 청주 등에서 3천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오후 1시 조인원이 군중 앞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외치고 만세삼창을 하자, 장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따라 외쳤다. 

유관순 실존 인물 - yugwansun siljon inmul

일제 경찰은 하늘을 뚫을 듯, 하나의 목소리로 크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겁에 질렸다. 겁이 난 일제 경찰은 불안감에 현장에서 총을 난사하고 칼을 휘두르며 시위행렬을 해산시켰다. 이 와중에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그 자리에서 순국하고 30여명이 다쳤다. 유관순도 체포되어 공주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유관순은 공주 지방 법원에서 5년형을 선도 받고,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확정 받았다. 다른 이들이 형량에 불복하며 상고한 것과 달리 유관순은 일제가 한국인을 재판할 권리가 없다며 상고를 하지 않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유관순은 옥중에서 일제에게 폭행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2의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1920년 3월 1일 같이 수감되어있던 이신애, 어윤희와 함께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만세를 외쳤다. 어린 소녀들의 만세소리는 곧 서대문형무소에 갇혀있던 많은 이들의 가슴을 움직였다. 형무소에 있던 3천여 명의 수감자들이 만세를 따라 외치자, 그 소리는 형무소 담장을 넘어 3․1운동을 기억하는 이들을 불러 모았다. 이로 인해 유관순은 일제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폭행을 당하는 고초를 겪어야했다.

3․1운동 이후 겉으로 한국인에 대한 유화정책을 펼치며 민족 분열을 획책하던 일제는 영친왕의 결혼을 축하한다는 의미로 수감자들의 형량을 줄여주거나 석방시켜주었다. 이 때 유관순도 1년 6개월로 형량이 줄어들었으나,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일제에 의해 수없이 맞은 어린 소녀의 몸은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음식을 제대로 넘길 수도 없었고 제대로 서있지도 못했다. 결국 유관순은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18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수없이 꿈꾸었을 자유롭고 평등한 그래서 행복할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보지 못하고 말이다.

유관순 실존 인물 - yugwansun siljon inmul

일제는 자신들의 악행으로 숨진 유관순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이화학당이 유관순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하는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화학당의 교장이었던 월터(walter)가 미국 신문에 일제의 비인도적인 고문으로 어린 소녀가 죽었다고 알리겠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유관순의 시신을 학교 측에 인도하였다. 

유관순은 이후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없애고 군용기지로 만들면서 유관순의 묘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옮겨졌다. 관리가 안 된 유관순의 묘는 오늘날 찾을 수 없게 되었고, 이에 후손들은 생가 뒷산 매봉산에 초혼묘를 만들어 넋을 기리고 있다.

유관순의 가장 큰 업적은 대한민국의 주역이 바로 젊은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기성세대들이 사회에 타협하고 불의에 순응할 때, 잘못을 지적하고 올바른 세상을 만들려했던 3․1운동의 주역인 학생과 수많은 청년들이 유관순으로 대변된다. 유관순이 다른 독립운동가의 업적에 비해 과대 포장되었다고 하는 일부 사람들도 있지만,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기성세대의 올바른 가치관을 이어받고 잘못된 행동을 답습하지 않으려는 순수하고 열정 넘치는 우리의 젊은이들이다. 유관순을 대표로 하는 청년들의 일제에 대한 항거는 6․10만세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4․19의거, 6월 민주항쟁에 이어 오늘날 촛불집회로 이어졌고, 이들로 인해 우리는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