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후궁 참수 - yeonsangun hugung chamsu

연산군 후궁 참수 - yeonsangun hugung chamsu

영화 '왕의 남자'정진영 주연

장녹수는 입궁한 직후인 연산군 8년1502년에 종4품의 숙원淑媛이 되었다 1년 후에는 종3품의 숙용淑容으로 올랐다둘 사이에 영수靈壽라는 딸까지 낳았다.조선 제10대 임금 연산군의 후궁인 장녹수. 그녀는 집안이 가난해 몸을 팔기도 했고, 아들까지 있었으나 기녀에 뽑혔다. 하지만 1506년 9월2일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몰락하자 참형을 당하는 최후를 맞이했다.연산군의 총애를 등에 업고 많은 권세를 부렸으며 뇌물을 받고,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취득한 것으로 전해진다.

기생 옥지화(玉池花)참수

그러나 장녹수(張綠水)의 악행은 뇌물 받고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축적은 관행처럼 용인되던 시기였다 연산군 말년 형부 김효손이 당상관에 올랐고 제대로 출사한 사람은 이 한 명 뿐이었다. 1504년에는 궁녀 전향, 수근비가 장형 80대씩을 맞고 유배된 이후 거열형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거열형으로 분해된 머리와 사지를 순회공연하듯 전시했다 확실한 사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들의 미모를 질투한 장녹수의 모함으로 발생했다는 추측이 있다 그리고 1505년에는 기생 옥지화(玉池花)가 장녹수의 치마를 밟았다는 이유로 가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사형시켰다.

《운평(雲平) 옥지화(玉池花)가 숙용(淑容)의 치마를 밟았다 하니, 이는만상불경(慢上不敬)에 해당하므로 무거운 벌을 주고자 하니, 승지 강혼(姜渾) 밀위청(密威廳)에 데려가 형신(刑訊)하라. 또 이 뜻으로서 의정부, 육조,한성부, 대간(大諫)에게 수의하라" 하니 영의정 유순(柳洵), 좌의정 박숭질(朴崇質),좌찬성 김감(金勘), 우찬성 김수동(金壽童), 좌참찬 신준(申浚), 호조판서이계남(李季男), 공조판서 한사문(韓斯文), 한성부 판윤 민효증(閔孝曾),대사헌 반우형(潘佑亨), 호조참판 박열(朴說), 예조참판 안윤량(安允良),공조참판 정광세(鄭光世), 한성부 부윤 김무(金珷)가 의계(議啓)하기를옥지화의 죄는 지극히 만홀(慢忽)하오니, 위의 분부가 지당합니다.명하여 참(斬)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옛말에 그릇때문에 쥐에게 돌을 못 던진다..고 하였으니 아주 천한 것이질그릇이나 이것으로 요강을 만든다면 진실로 천하지만, 만약 어전에서쓸 물건을 만든다면 천하게 여길 수 없다. 옥지화와 같은 운평(運平 ..하급 궁중기생)이 숙용(淑容 ..종3품 후궁)이나 숙원(淑媛 ..종4품 후궁)에대하여 감히 저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해 조금이라도 능멸함이 있다 불경하기가 그지 없으니, 이런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벌로 다스려야 한다.》_연산군일기

장녹수(張綠水)

연산군 후궁 참수 - yeonsangun hugung chamsu

영화'왕의남자"(2012)이준익감독 장녹수 분 강성연

장녹수(張綠水)는 연산군몰락의 한 원인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출생은 충청도 문의현령을 지낸 아버지 장한필과 천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첩의 자녀였기에 천민이라는 신분으로 살아야 했다. 연산군의 숙부인 제안대군의 노비가 돼 가노(家奴)와 혼인했으며 1502년 11월25일 연산군일기에는 ‘장녹수는 영리해 사람의 뜻을 잘 맞췄다. 아들을 하나 낳고 나서 노래와 춤을 배워 창기가 됐다. 연산군에 발탁되어 총애를 받았고,왕이 궁중으로 맞아들여 숙원(淑媛·후궁에게 내린 종4품)으로 봉했다. 연산군이 원하는 것을 잘 알아 비위를 잘 맞추어 주었다고 하는데... 기록을 보면 연산군의 아명을 부르며 때리고 꼬집고 조롱했다고 한다 그녀는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같이 했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했다’고 실려 있다.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젖먹이 다루듯 하고,

왕을 희롱하기를 마치 노예 다루듯 하였다.

왕이 비록 몹시 화가 났더라도 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하여 웃었으므로,

상주고 벌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렸다.”

-‘연산군일기’ 47권, 연산 8년(1502년) 기록

"처음에는 집이 몹시도 가난해 몸을 팔아 생활했으므로 시집을 여러 번 갔다. 그러다가 제안대군 가노(家奴·남자노비)의 아내가 되었다. 아들 하나를 낳은 뒤에 노래와 춤을 배워 창기(娼妓)가 되었는데 노래를 잘 불렀다.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 들을 만했고, 나이는 서른이 되어도 얼굴은 16세 아이와 같았다."

그녀는 연산군보다 연상이었다. 장녹수(張綠水)는 연산군을 ‘전하’라고 부르지 않고 연산군의 아명인 백돌을 ‘백돌아’라고 부르며 치마폭에 싸고 놀았다. 연산군은 성종의 적장자로 7세에 세자로 책봉됐고, 19세에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즉위 후 무오사화(1498년)와 갑자사화(1504년)를 일으켰고, 중종반정(1506년)으로 폐위됐다. 왕으로 재위한 기간은 불과 12년이었고 격하돼 왕의 존칭인 종(宗)이나 조(祖) 대신 왕자 군(君)으로 기록됐다. 재위기록은 ‘실록(實錄)’이라 하지 않고‘ 연산군일기’라고 전한다

연산군 후궁 참수 - yeonsangun hugung chamsu

제5대 장녹수"강수연 이대근 주연 영화"연산군"

궁 안의 여성들이 비, 빈, 숙원 등 후궁의 명칭에 성씨를 붙여 호칭하지만 이례적으로 ‘장녹수’만은 본명으로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희대의 요부였던, 빼어난 예술가였던 그의 인생은 후대에서 예술적 인 소재로 이어지고 있다 장녹수는 연산군 8년 3월 실록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연산군이 승지에게 그녀의 부친 장한필(張漢弼)의 내력을 조사시켰다는 기록으로 이 해부터 장녹수에게 빠졌다는 기록이 있다 1503년(연산군 9) 종3품인 숙용(淑容)에 봉하여지고 이듬해에는 그녀의 집 주변 민가를 모두 철거, 선공감(繕工監)으로 하여금 새로이 단장시켰다. 1506년 오빠 장복수(張福壽)와 자녀들을 모두 양인 신분으로 올리고, 관선(官船)을 이용하여 평안도 미곡 7,000석을 무역하였다. 왕이 격노하여도 그녀를 보면 즉시 희색을 띨 정도로, 교태스럽고 요사스러워 연산군 실정의 한 요인을 만들었다. 1506년 중종반정 때 참형(斬刑)에 처하여지고 적몰가산했다

실제 장녹수(張綠水)는 연산군보다 10살 정도 나이가 많았고 외모는 보통보다 조금 웃도는 수준의 외모라고 전해진다 장녹수는 예능 방면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으며 이런 소문은 연산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연산군은 조선 시대의 왕들 중에서 예술적인 기질이 가장 뛰어난 왕이었다. 그런 이유로 장녹수와 연산군은 예술적 교감이 충분히 가능했다. 춤과 노래에 뛰어난 장녹수와 예술을 사랑하는 연산군은 비록 나이와 신분은 처음부터 달랐지만 예술적 교감은 이 두사람을 이어줬다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비극적인 죽음을 알고 난 후 생모를 그리워하는 연산군을 장녹수는 어린 아이 다루듯 했고, 왕을 욕할 때 노예한테 하둣했지만 연산군은 제 아무리 화가나도 장녹수를 보면 기뻐했다. 장녹수는 아버지 없이자랐고 연산군은 어머니 없이 자란것도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장녹수는 연산군을 자식을 대하둣 연산군은 어머니를 대하둣했다 재위 10년(1504년) 6월 19일에 연산군은 후궁 둘을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했다. 최전향과 수근비라는 궁녀로 이 두 여인이 장녹수를 질투한 사실이 발각되어 연산군은 이들을 죽인 뒤에도 그들을 잘라낸 사지를 전시하고, 시신을 각각 다른 곳에 묻어 그 자리에 죄명을 적은 돌을 세웠다 그리고 어느 날 한밤중 어느 담벼락에 연산군을 비하하고 장녹수를 저주하는 익명서가 나붙었다고 한다 연산군은 이를 전향과 수근비 일족의 행각으로 생각하고 두 여인의 일족 60여명을 잡아 추궁했다 장녹수의 영향력이 가장 높았던 시점은 연산군이 폐비 윤씨를 대신하여 복수하겠다고 갑자사화를 일으켰던 시기였다

갑자사화(甲子士禍)

갑자사화(甲子士禍)는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화를 입는 일을 가리키며, 한국사에서는 특히 조선 중기에 사림 세력이 화를 당한 연산군 때부터 명종 즉위년까지 발생한 4차례의 옥사를 말한다. 이들 사화는 1498년(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 1504년(연산군 10년)의 갑자사화, 1519년(중종 14년)의 기묘사화, 1545년(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4대 사화’라고 부른다.

성종 때부터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 세력은 훈구 세력의 비리를 규탄하면서 점차 정치적 영향력이 커져갔다. 그러던 중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훈구 세력의 불만이 폭발하였고, 양 세력간의 갈등으로 사화가 발생하게 된다. 사화는 사림 세력의 역사적 성장이라는 추세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이를 통해서 사림들은 많은 피해를 입기는 하였으나 지방의 서원이 향약을 기반으로 지지기반을 확산하는 등 성장을 계속하여 선조 이르면서 중앙 정계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며, 이후 사림 정치를 주도하였다.

배경

성종 때에는 훈구 대신과 사림이 정치적 입장은 달랐어도 서로간의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다. 오히려 두 세력은 서로 협력하여 《경국대전》을 비롯하여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 기념비적인 편찬사업을 마무리하였다. 여기에는 훈신 중에도 서거정·노사신·최항·양성지 같은 이들은 원성을 듣던 인물이 아니었고, 또 양파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한 성종의 뛰어난 정치적 역량과도 관계가 깊었다.

세조 때 현직자와 퇴직자에게 아울러 주던 과전법을 폐지하고 현직자에게만 주는 직전법으로 개편한 것은 조선시대의 토지제도가 가지는 한계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실시할 수 없어서 직전법도 폐지되고, 이제는 새로이 관리가 되더라도 국가로부터 아무런 땅도 받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뿐이었다. 신진관료는 여기에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불건전한 토지 제도를 개혁하자는 주장이 그들 사이에 점차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 토지 문제를 에워싼 신·구의 대립이 귀족간의 분열과 파쟁을 일으킨 또 하나의 원인이었다. 토지 문제를 에워싼 신·구파의 대립은 다른 면에서 볼 때에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었다.

비록 음성적인 대립이었다고 하더라도 명군(名君) 성종이 있는 동안은 그것이 노골화하지는 않았으나 폭군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드디어 폭발하게 되었다.

‘최초’ 장녹수(張綠水) 윤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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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녹수윤정희 TBC '사모곡"리허설 장면

연산군(1961) 폭군연산(1962) 속 배우 도금봉을 제외하고 본격적인 주목을 받게된 최초의 장녹수는 배우 윤정희였다.

영화계 톱스타 반열에 올랐던 윤정희는 TBC <사모곡>(1972)을 통해 안방극장에 첫 발을 디뎠다. 그가 <사모곡>에서 장녹수 역으로 캐스팅 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극중 성종 후궁 역을 위해 대부분의 TV 탤런트들이 총동원됐고, 장녹수 역을 맡을 출연자가 없었다. 당시 경향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윤정희는 첫 드라마 출연에도 불구하고 톱 탤런트 개런티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