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개념 당신은 어떻게 이해 하고 있는가의 문제 - sigan-ui gaenyeom dangsin-eun eotteohge ihae hago issneungaui munje

철학의 주요 개념

백  종  현

목차

철학(哲學. philosophia)

'철학'의 개념

'철학'은 무엇을 하는 학문인가? '철학함'이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철학의 정체는 무엇이며, 철학한다는 게 도대체 무엇엔가에라도 쓸모가 있는가? - '철학'에 접하는 많은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보통 사람이나 '철학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이나 자주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이는 '철학'에 '학'(學)자가 붙은 것을 보면 무슨 '학문'은 '학문'인 모양인데, 그 말이 지시해 주는 바가 쉽게 파악되지 않음이 그 첫째 이유일 것이다.

'학', 다시 말해 '학문'이란 무엇엔가에 관한 '체계적 이론' 내지는 어떤 '이론적 체계'라고 치고, 대체 '철학'이란 어떤, 무엇에 관한 이론 체계인가?

물리학은 사물의 물질적 원리에 관한 이론 체계요, 심리학은 사람의 마음의 원리에 관한 체계적 이론이요, 법학은 법에 관한, 생물학은 생물에 관한 학이며, 정치학이라는 것도 정치에 관한 어떤 종류의 이론 체계거니 하는 짐작이라도 간다. 그런데, '철'(哲)에 관한 학이라는 것도 있는가, 아니면 '철'하는 활동도 학문 활동이란 말인가?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의아심을 가지면서도 명칭만 가지고 철학에 대한 어떤 감(感)을 잡을 수가 없어, '철학'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벌어진 일들의 현장, 즉 '철학사'(哲學史)를 들춰보며 '철학'의 정체를 파악해 보려 한다. 그러나 '철학사' 책을 넘겨 가면서 이른바 '철학자'들 스스로 자기 업무, 즉 철학을 규정한 것을 살펴보면, 그 다양함이 자못 철학자 수만큼이나 됨을 발견하게 된다. 대체 이런 사정은 무엇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철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만 말하고 싶다. 즉, 오랜 세월에 걸쳐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에 의해 철학이 연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보고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철학을 더 잘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것에 대해서는 단 하나의 참된 의견만 있을 터인데, 실제로는 많은 갖가지 의견들이 있으며, 게다가 그것들이 학식 있는 사람들에 의해 주장되고 있음을 보고서, 나는 단지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을 모두 거짓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했다."(Descartes, Discours de la Méthode, I, 12)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두고서 철학에 대한 규정부터 어느 정도 확실히 해두는 것은 철학적 문제를 이해 탐구하고, 철학적 논의에 으레 끼어 드는 불필요한, 그뿐만 아니라 철학의 본 뜻과 정반대 되는, 개념(??)적 혼란을 방지하는 제일의 작업이 될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철학'이라는 말은 서양 문화사의 초기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등장한 '필로소피아(philosophia)'의 번역어이다. 그렇다면, 이 '필로소피아'의 본디 뜻은 무엇이던가?

'필로소피아'는 낱말의 형성 순서에서 볼 때나 사태의 전개 순서에서 볼 때나 '필로소포스'[philosophos: 지혜를 사랑하는 자, 철학자, 哲人]가 있은 후에 그의 활동[곧, 필로소페인: philosophein, 철학함]의 결실로서 나타났다. 그런데 대체 '필로소포스'란 어떤 사람을 일컫는가? 이 명칭이 뜻하는 바는, 피타고라스(Pythagoras, BC 580-500) 또는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BC c. 544-483)에 이어 이 말을 처음으로 분명하게 사용했던 소크라테스(Sokrates, BC 469-399)의 다음 말에서 그 대략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파이드로스여, 누군가를 지혜 있다라고 일컫는 것은, 내가 보기엔 너무 높이 올라간 것 같고 그런 말은 신에게나 적용하면 적절한 것 같네. 그러나 지혜를 사랑하는 자[philosophos] 혹은 그 비슷한 말로 일컫는다면, 그 자신도 차라리 동의할 것이고, 보다 더 합당할 것 같네."(Platon, Phaidros, 278d)

그러니까 플라톤(Platon, BC 427-347)이 전해 주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따르면, '필로소포스'란 완벽한 지식이라는 의미에서의 지혜를 가진 자라기보다는 그 같은 지혜를 사랑하고 추구하며, 그에 이르려고 애써 노력하는 자, 가령 구도자(求道者) 쯤을 지칭하겠다.

"철학, 즉 지혜에 대한 사랑은 그 순수함과 견실함에 있어서 놀라운 즐거움을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앎을 실제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찾는 사람들보다 더 즐겁게 삶을 영위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럴 법하다."(Aristoteles, Ethica Nicomachea, 1177a 20-1177b 25)

그러니까 '지혜' 그 자체를 가짐이 최상의 상태이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자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는 일로, 사람은 기껏해야 '지혜를 찾는' 도정에 있다고 보겠다. 그리고 이런 뜻에서 '지혜를 사랑하는 자'를 우리가 '철인(哲人)'으로 이해하는 것은 유가(儒家)의 전통에서 볼 때도 그럴 듯하다 할 것이다. 우주 삼라만상의 원리(arche)를 통찰하고 있는 자, 그래서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從心所欲不踰矩1)) 자, 그는 분명히 신인(神人)이며 성인(聖人)이다. 이런 성인 공자(孔子, BC 552-479)의 으뜸 제자 10명을 '십철'(十哲)이라 칭했고, 그 다음 수준의 사람들을 골라 '칠십이현'(七十二賢)이라 일컬었으니, '철인' 내지 '철학자'는 '현인'(賢人)보다는 좀더 '도'(道)에 가까이 다가간, 그러나 완전히 도에 이른 성인은 아직 아닌 자를 이름하는 것이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철인'의 진리 추구 활동과 그 결실, 곧 '철인의 학문'[哲人之學]을 이제 우리가 '철학(哲學)'이라고 일컫는다면, 그것은 '필로소피아(philosophia)'의 원래 뜻과 크게 어긋남이 없다 하겠다.

그러나 유가적인 파악에 따르든, 그리스 철학의 이해에 따르든, 이 '철인' 내지 '철학자'라는 고래의 명칭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철학자'와 똑같은 함축을 가질까? 오늘날 의미에서의 물리학자는 지혜 즉 참된 지식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며, 수학자와 역사학자는 그러한 지식을 추구하는 자가 아닌가? 이 반문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초기 의미에서의 '철학자'는 오늘날 우리의 개념으로는 '학자'에 해당하며, 이에 상응해서 당시의 '철학'은 '학문 일반'을 지칭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가 말하는 '철학'은 오늘날의 개념으로는 '학문'에 가깝다. 그리고 이런 개념 사용은 서양의 근대 초까지도 계속되었다.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에게 있어서도 그러하고 라이프니츠(G. W. Leibniz, 1646-1716)에서도 그러하며, 뉴턴(I. Newton, 1642-1727)에게서도 그러하다. 데카르트는 그의 라틴어 저술 『철학의 원리』(1644)의 프랑스어 번역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 철학을 하나의 나무에 비유한다면, 그것의 뿌리는 형이상학이요, 줄기는 물리학[자연학]이며, 가지들은 […] 의학, 역학, 윤리학과 같은 여타 학들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철학의 원리』는 (Ⅰ) '인간 인식의 원리들에 관하여', (Ⅱ) '물질적인 것들의 원리들에 관하여', (Ⅲ) '가시(可視) 세계에 관하여', (Ⅳ) '지구에 관하여' 등의 네 부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다 (Ⅴ) '동물과 식물의 본성에 관하여', (Ⅵ)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등을 덧붙이려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다. 뉴턴도 근대 물리학의 체계를 담고 있는 그의 저술에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1687)라는 제목을 부여하였으니, 분명히 이때까지만 해도 '철학'은 '학문' 일반을 지칭하고 있었다.

그러던 '철학' 개념이 언제, 무엇이 계기가 되어 의미 변화를 겪게 되었는가? 그것은 근대적 의미에서의 '과학'들의 성립과 함께 라고 생각되어야 한다. 서양 학문사에서 그 성립의 과정을 고려할 때나, 그냥 '학'(scientia, science)이라 일러도 무방할 터인데 굳이 '분과학'(分科學)이라 말하는 우리의 이해로 볼 때나, 과학(科學)은 총체학(總體學) 내지는 근본학(根本學), 즉 철학을 전제하고, 또 그로부터 파생되었다. 그렇다면 '철학'이라는 말이 생긴 이래 1,500년 이상 일괄 통칭되던 학적 작업들, 혹은 학적 문제들 가운데, 왜 어떤 것들은 '과학적'이라는 명칭을 새로이 얻게 되고, 어떤 것들은 오늘날도 여전히 '철학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가? 그것은 문제의 성격과 그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는 방법의 차이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학적 관심이 싹튼 초기에는 일체의 문제들이 '철학적'이었다. 그것은, 자연에 관해서든 인간에 관해서든 문제와 사태의 근본원리를 찾으려는 문제 의식은 있었으되, 문제 해결을 위한 변변한 수단과 방법을 개발하지 못한 채 암중모색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그러다가 어떤 문제와 사태 영역들은 그것들에 접근해 갈 수 있는 비교적 신뢰할 만한 방법들이 개발되었고, 따라서 어느 정도 '객관적'인 논의 영역이 확보되었다. 그래서 이른바 '학의 부분 영역', 즉 '과학'들이 생겨났다. 그러니까 과학들이 분과되어 간 이래로도 여전히 '철학'에 머물러 있는 문제 영역들은 그 성격상 이른바 '과학'의 것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오늘날의 '철학'은 연구 대상에 있어서나 연구 방법에 있어서 수학과도 다르고 과학들과도 다르다. 모든 과학들이 그리고 수학조차도 본래는 철학과 한통속이었고 이로부터 분화되었다고 해서, 오늘날의 수학과 과학이 오늘날의 철학과 동종의 학문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 물론 그 '뿌리'의 같음과 인간의 지혜의 한계로 인해 그런 제 과학에도 여전히 철학적 문제가 남아 있어, '과학철학', '법철학', '심리철학'등의 영역이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철학'의 변화에 대한 뚜렷한 상황 인식을 18세기 중엽의 '철학자'들은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양 문화사에서 이 시기는 인간의 일반 이성이 '계몽'을 폭넓게 체험하고 있던 때이다.

많은 과학들은 이제 특정한 사람들만이 아는 언어(즉 수학)와 방법(즉 실험 관찰), 그리고 그들만이 다룰 수 있는 도구(즉 과학 器機들)를 통해 큰 발전을 하기 시작했다. 그 연구 성과는 놀라웠고, 그리고 그것은 '전문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를 보고서, 여전히 철학적 문제에 관심이 더 큰 학자들은, 이제 철학도 전문적으로 연구되어야 함을 새삼스럽게 깨우쳤다. 이로부터 철학의 전문화가 시작되었고, 이것은 철학의 직업화를 낳았다. 그리고 이젠 어느 학문의 영역에서나 학문의 수준 자체가 전문적으로, 그리고 직업적으로 몰두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러 있었기도 했다.

사실 탈레스(Thales, BC 640-550) 이래 18세기 초엽까지 오늘날 우리가 '철학자'라 부르는 사람들에 있어서 '철학'은 그들의 직업 소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대부분 생업이 따로 있었거나 필요 없었으니, 말하자면 철학함은 그들에게는 '한가(閑暇, schole)한 생활이었다. 철학사에 남긴 그들의 혁혁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그들은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하면, 철학의 '아마추어'들이었고, '아마추어' 신분을 또한 유지하려 했다. 고중세의 철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데카르트, 스피노자(B. Spinoza, 1632-1677), 라이프니츠, 로크(J. Locke, 1632-1704), 버클리(G. Berkeley, 1685-1753), 흄(D. Hume, 1711-1776) 등 근대 철학의 초기 대표자들도 모두 그러했다.

이런 철학사적 전통에다가 아직까지도 '객관성'이 없어 보이는 철학적 논의의 형편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철학'은 어느 정도의 지성과 일반적인 일상 체험만 가지면 누구나 할 수 있고,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철학'은 당연히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에 대한 '전문가'로서의 철학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여타의 모든 학문에서는 (전문가가 있겠거니 하고) 조심성 있게 침묵으로 관망하는 사람들도 형이상학[철학]적 문제에 관해서는, 다른 학문에 비해 그들의 무식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음을 기화로, 대가인양 지껄이고 대담하게 단정한다."(Kant, Prolegomena: 『전집』 Ⅳ, 264)

고 칸트(I. Kant, 1724-1804)는 세상 사람들을 비판했고, 더 나아가 그의 후배 헤겔(G. W. F. Hegel, 1770-1831)은

"사람들은 하다 못해 구두 한 켤레를 만들기 위해서도, 비록 모든 사람이 자기 발에 맞는 구두 본(本)을 가지고 있고 구두를 만들 수 있는 소질이 있다고 하더라도, 구두 만드는 법을 배우고 훈련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유독 철학함에 대해서만은 그러한 연구나, 배움 내지는 노고가 필요치 않다고들 말한다."(Hegel, Enzyklopädie, §5)

고 철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오해를 지적했다. 이런 생각에서 칸트는, 그 역시 당시 지성인의 사회적 책무인 계몽주의 운동에 앞장섰으면서도, 엄밀한 학적 토대를 닦음이 없이 그런 운동에 나서는 '에세이스트' 내지는 '이데올로그'들을 "통속철학자"라고 비판, 자신을 그들과 구별하였다.

요컨대, 이제 철학도 수학이나 과학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문제의 근원성과 보편성, 그리고 난해함과 절실함으로 인해, 더욱 더 엄밀히 학적으로 그리고 전문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상황에 놓였다고 칸트는 파악한다. 그리고 이 상황에 창조적 자세로 대응한 최초의 철학자로 우리는 칸트를 꼽을 수 있다.

칸트는 우리가 철학사에서 만나는 대가들 가운데 최초의 직업 철학자, 즉 대학의 철학 교수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그는 종래의 여느 철학자들처럼 직업적으로는 다른 일에 종사하면서도 철학적 문제에 관심이 많고 재능이 뛰어난 그래서 후세에 큰 연구 성과를 남긴 '아마추어' 철학자가 아니라, 철학함이 그의 생업이었고, - 엄밀히 말해, 후반생(後半生)이 그러했지만 - 또 오로지 철학에 전념한 최초의 '프로' 철학자이다. 비록 당시의 대학에서 철학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철학부'가, 국가 경영에 직접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상부' 학부인 신학부·법학부·의학부의 '하부' 학부로서 기초 교양 교육을 염두에 두고 설치되었다 하더라도, 이제 철학은 대학에서 전문적으로 연구되고 교육되기 시작했으며, 칸트는 대학 강단에서 정규적으로 철학을 논하는 교수였다. 이때쯤 해서 사람들은 학교에서 연구되고 강론되는 '철학'의 개념[철학의 "학술 개념"]을 만나게 되었다.

물론 일반 시민적 견지에서 볼 때, 철학은 여전히 "인간 이성에게 법칙을 수립해 주는 자"(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A839=B869)이다. 그러니까 철학의 "일반 개념"에서의 철학함의 궁극 목표는 "우리 이성 사용의 최고 원칙"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러나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철학이 단계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18세기 중엽 철학의 '전문인'들은 철학이란 '개념들에 의한 이성 인식의 체계'라고 규정했다(Kant, K.d.r.V., A713=B741 참조). 개념들로 이루어진 이성 인식의 체계로서의 철학은 첫째로 '개념들의 구성[作圖]에 의한 이성 인식의 체계'인 수학과 구별되고, 둘째로 '경험적 자료에 의한 인식'(cognitio ex datis)들의 체계인 여타의 모든 과학들과도 구별된다.

이성 인식이란 원리적 인식(cognitio ex principiis), 즉 순수한 선험적 인식을 말하며,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그 첫 번째가 이성의 이성 자신에 대한 인식이요, 그 두 번째가 이성에 의해 순수하게 원리적으로 생각되는 대상들에 대한 인식이다. 그래서 철학은 두 부문을 갖는다. 그 첫 번째 부문이 이성 자신의 형식에 관한 인식들로 이루어진 '논리학'(論理學, logica)이고, 그 두 번째 부문은 순수하고 원리적이되 대상의 실질[실재] 내용에 관한 인식들로 이루어진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a)(??)이다.

이와 같은 철학의 본래 문제들의 영역 외에 19세기 이후에는 인간의 대상에 대한 인식 원리를 반성적으로 다루는 '인식론'(→)이 생겼고, 또한 이미 철학에서 분가해 나간 제 과학들이 여전히 원리로서 필요로 하는 근본에 대한 반성 작업인 사회철학·법철학·정치철학·과학철학·언어철학 등이 생겨났다. 이것은, 인간의 지혜 영역이 확장되어 가는 만큼 무지(無知)의 영역도 확장되어 과학의 '발달'로 철학적 문제가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더 넓고 깊어져 가고 있음을 뜻한다.

철학의 방법

그러면 이제, 여전히 '과학들'의 문제 영역 밖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이는 소위 '철학적'인 문제들을 탐구하는 방법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일찍이 칸트는 자주 사람들에게 '철학을 배우지 말고, 철학함을 배우라'(Kant, K.d.r.V., A837=B865 참조)고 강조했고, 이른바 철학하는 사람들이 '내용 없는 개념'을 농(弄)하고 '흉내내 얘기'하는 것을 경계했으며, '스스로 생각'하고 '제 발로 설 것'을 요구하였다(Kant, 『전집』 XXIX,1.1, S. 6f. 참조). 이것은 철학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최소한의 철학하는 자세라고 볼 수 있다.

"철학함을 배운다 함은 자기 이성을 스스로 사용함을 배운다는 뜻이다."(Kant, 『전집』 XXIV, S. 698) 철학의 의의가 '지혜의 추구'에 있다면, 우리는 오로지 자기 이성 사용의 자기 훈련을 통해서만 거기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칸트는 "사람들은 단지 문헌에 의한 작업만으로는, 한 저자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 강의할 정도로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어쩌면 저자 자신도 […] 이해하지 못했던' 사태 자체는 투시하지 못한다"(Kant, 『전집』 XXIX, S. 6f.)고 지적한다. 그러니까 '철학한다'는 것은 단지 역사적으로 남겨진 문헌을 문자에 따라 연구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가 되는 사태를 관조하고 사색함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철학적 문제의 연구에서는 역사적인 문헌들을 결코 소홀히 해서도 안 되고, 소홀히 할 수도 없다. 도대체가 '철학적' 문제라는 것은 아직 미해결의 문제, 다시 말해 이미 '문제'로 부각이 되었건만, 해답은커녕 해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나 단서조차도 아직 찾아진 것이 없어 여전히 '설왕설래' 중인 문제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앞서간 사상가들이 남긴 논설들 가운데에서, 설령 그 안에 착오가 포함되어 있다손 치더라도, 인간의 보편적 이성의 모습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드러나 있음을 포착해야 한다. 칸트의 말처럼, "우리가 위대한 발견들 곁에서 분명한 착오들과 마주치게 된다 해도, 이는 한 인간의 실수에서라기보다 오히려 인간 일반의 인간성에서 비롯하는 것이다."(Kant, 『전집』 Ⅰ, S. 151) 그러나 인간성이라는 것이 고착되어 있고 폐쇄적인 것은 아니다. 착오는, 그것이 나타나면, 이성 자신에 의해 교정되고는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태 자체'에 대한 실험 관찰 외에도, 기존하는 개개 인간의 주관성에 입각한 이론들 중에서도 보편적 이성이라는 표준 척도에 따라 사태 자체에로 전진해 가는 하나의 길을 발견할 수도 있고, 그를 통해 제기된 물음에 대한 답을 얻거나 아니면 물음 자체의 함축이나마 밝혀 낼 수도 있는데, 이것 역시 진지한 철학함의 한 자세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를 앞서간 탁월한, 그러나 서로 상충되는 이론을 주창한 사상가들을 대화시키고, 그 충돌점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우리 자신의 생각을 전개시켜 나갈 수도 있다. 이러한 철학 방법을 우리는 '변증법적'[대화법적]이라고 일컬을 수 있으며, 그것은 '철학사 연구'를 통해 '철학 연구'를 할 수 있는 하나의 좋은 방법이다. 우리가 변증법을 '사태의 자기 전개 논리'라고 이해할 때, '이성'도 하나의 사태인 만큼 그 역시 자기 부정을 통하여 전진해 나갈 터이고, '철학함'도 하나의 사태인 만큼 이 역시 철학하는 개인과 개인,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며 단계적으로 발전해 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철학을 '자연과 인간 만상(萬象)의 궁극적 원리'를 찾는 학적 작업이라 규정하고, 그러면서도 그것이 수학적인 방법으로도 과학적인 방법으로도 이를 수 없는 것이라 한다면, 철학적인 문제들은 그 성격상, 자명한 진리를 전제하고 거기에서부터 연역(deductio)하는 방법으로나 개별적인 사태들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보편성을 추리해 가는 귀납(inductio)의 방법으로는 해결을 할 수 없다는 것이고,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현상(現象)을 진상(眞相)으로 간주하고, 이 진상을 가능하게 하는 필요충분 조건들을 사변(思辨, speculatio)적으로, 환원(reductio)적으로 추궁해 들어가는 일이다. 그래서 철학의 본래적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사변' 뿐이다.

'한국 철학'의 의미

한국에서 '철학' 개념의 형성

한국 사회에서 '철학(哲學)'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또는 20세기 초쯤으로 추정된다. 이미 17세기에 천주교 교리와 함께 서양 철학이 유입된 자취가 있으나, 처음에는 '哲學'이라는 번역어가 아니라 '費祿蘇非亞', '斐錄所費亞' 또는 '飛龍小飛阿'라는 중국어 표기가 채용되었던 것으로 조사되어 있다. 믿을 만한 보고에 따르면, 그러다가 20세기 초에 이정직(李定稷, 1841-1910)이 쓴 『康氏[칸트]哲學說大略』(1903-1910년경)2)이나 『倍根[베이컨]學說』, 내지는 이인재(李寅梓, 1870-1929)가 펴낸 『希臘古代哲學攷辨』(1912∼1915년경)3)을 계기로 '哲學'이라는 말이 정착되었다고 한다.

이인재는 고대 그리스 철학을 소개 해설한 그의 책에서, 철학은 '논리학'·'형이상학'·'윤리학'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萬象 가운데서 一理만을 연구하여 實用을 찾는 과학과는 달리 百科의 學으로서 삼라만상의 원리를 탐구하는 학"이라 설명했다 하니, 이미 철학의 전모를 이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조사 보고에 따르면 보성전문학교 1907년도 교과과정에 '논리학' 과목이 등장하고4), 연희전문학교 1921년도 교과과정에는 '논리학', '윤리학'을 비롯해 '철학개론(哲學槪論)'이라는 교과목이 들어 있었다 한다.5) 이것은 이미 서양 학문의 유입과 더불어 '철학(哲學)'이라는 낱말과 그 낱말이 지시하는 내용이 함께 한국 사회에 상당히 유포돼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한국 사회 문화가 20세기에 접어들어 '철학(哲學)'이라는 새로운 어휘를 갖게 되었고,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체험을 했음을 말해 준다. 이른바 서양 철학의 유입에서 비롯한 이 새로운 체험은 그런데 한국인들에게 단지 새로운 어휘를 갖도록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낱말들로 표출된 사태를 대면케 하고, 그 사태에 대한 사색을 이끌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사상을 배태 내지 형성케 한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유래한 새로운 사상 즉 '서양적' 사상은, 사상이라는 것이 인간의 행위에 미치는 영향의 정도 그 만큼 한국인들의 제반 일상 생활 방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현대 한국인들은 적어도 백년 전의 한국 사람들과는 상당한 정도로 다르게 살며, 먹고 입고 꿈을 꾼다. 그런 차이가 나게 하는 데는 새로운 철학 사상도 한 몫을 했음이 분명하다.

이제 우리가 서양 철학이 유입된 이후에 형성된 한국의 사상을 '새롭다'고 하는 것은, 그 사상이 주제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제기되는 문제를 다루는 방법에서 재래의 것과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것에 비해 그 주제에 있어서 다르고 문제를 탐구하는 방법이 다르고 그 탐구 결과가 새로운 언어로 쓰였는데도 그것이 여전히 '한국인들의' 사상, '한국의' 철학이라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 여기서 우리는 '철학'의 의미를 유지하는 '한국의' 철학이란 무엇일까를 새겨 보아야 할 필요를 발견한다.

외래 사상과 '한국의' 철학

한국이 적어도 2,000년 이상의 문화사를 가지고 있고, 삶의 양식 형성에는 불가불 철학 사상이 관여되기 마련이라면, 한국에는 이미 전통 철학 사상이 있었을 터이고 실제로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도, 무슨 연유로 한국 사회에 낯선 사상이 유입되고 그것이 단지 호기심을 따라 소개되는 정도가 아니라 한국 사람들의 사고 방식, 더 나아가 생활 방식 자체에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는가? 한국인들은 왜 20세기 초 이래로 서양 철학을 배우며, 그것도 열심히 익히고 있는가?

'철학'이라는 것도 하나의 학문이고, 학문이란 어떤 의미에서든 보편적인 지식의 체계를 일컫는 것이라 했는데, 도대체 '서양의' 철학, '동양의' 철학, '한국의' 철학, 또는 '조선시대의' 철학, '이율곡의' 철학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남의 철학을 배워 내 철학을 삼는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이며, 그것은 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 일이고, 그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자연과학'이니 '사회과학'이니 하는 제 과학의 종가(宗家)이자 근본학으로서의 오늘날의 '철학'을 규정해보자면, '자연(→)과 인간 사회(→) 문화(→) 제 영역의 최고 원리와 제 영역의 통일 원리를 반성적으로 탐구하는 지적 활동 또는 그 결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문자적으로는, '한국의 철학'이란 '한국 사람이 한국에서 통용되는 언어로 자연과 한국 사회 문화 제 영역의 최고 원리와 제 영역의 통합 원리를 반성적으로 탐구하는 지적 활동 또는 그 결실'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규정이 무난하다면, '한국'이 들어갈 자리에, '서양'이나 '동양', '독일'이나 '중국'을 넣거나, 더 나아가서 '기호 지방', '영남 지방' 또는 '이율곡', '이퇴계'를 넣어 '∼의 철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규정도, 예컨대 '한국 사람', '한국에서 통용되는 언어', '자연과 한국 사회 문화 제 영역의 최고 원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또 이 세 조건 중 일부만 충족시키는 경우 어느 쪽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서, 때로는 좁게 때로는 넓게 적용될 수가 있을 것이며, 심한 경우 그 기준을 아주 느슨하게 사용하면 '서양 철학', '한국 철학' 따위의 구별이 무의미하게 될 수도 있다. 또 남의 철학 문헌에 대하여 연구하는 것까지를 '철학하다'의 범위에 집어넣는다면, 'OO철학'의 규정에서 누가 어떤 언어로 작업을 하는가는 부수적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철학의 국적을 말해 주는 본질적인 징표는 무엇인가? 우리가 한국 철학을 말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한국의' 철학인가?

"어떤 철학의 국적을 결정짓는 것은 그 철학을 배태시킨 철학자의 탄생지도 아니고, 그 철학자가 주로 활동한 지적 단위체나 그가 사용한 언어도 아니다. 만일 첫째의 기준이 적용된다면 스피노자 철학은 네덜란드 철학이 될 것이고, 둘째 기준이 적용된다면 김재권의 철학은 미국 철학,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영국 철학이 될 것이고, 셋째 기준이 적용되면 퇴·율[退溪·栗谷] 철학은 중국 철학,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독일 철학이 될 것이다. 이후 영향력의 기준에서 판별이 된다면 프레게의 철학이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영국 또는 미국 철학이 될 것"이라고 어떤 이는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생각은 "철학은 국가적 성격을 갖기보다는 개인적 성격을 갖는 것"이라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은 논변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 사상과 중국 사상, 독일 철학과 영미 철학을 구분해서 말하는 것은 지각없는 짓인가?

문화권의 경계라는 것이 먼 빛으로 보기와는 달리 가까이 다가갈 수록 희미한 탓에 지도에 국경을 표시하듯이 그렇게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는 게 어렵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기성의 문화를 충분히 의미 있게 공간적으로·시간적으로 구분하여 얘기할 수도 있고, 구별되는 대개의 특징을 열거할 수도 있다. 이런 일은 또한 문화의 한 양상인 철학에 대해서도 물론 할 수 있다. 인간들이 언제 어디서 살았고 살든 인간인 한에서 상호간에 보편성을 나눠 갖게 마련이지만, 또한 개인간에 집단간에, 뿐만 아니라 일정 개인이나 집단이라 하더라도 연대별로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난다. 어떤 철학도 그것이 철학인 한 '원리적 지식 체계'라는 보편성이야 가지고 있겠지만, 누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했고 그렇게 하는가에 따라 구별될 수도 있다. 우리는 플라톤의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구별하고 청년 칸트의 철학과 장년 칸트의 철학을 구분하며,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의 사상과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의 철학을 구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똑 같은 정도로 의미 있게 한국 철학과 독일 철학을, 그리고 조선 중기의 한국 철학과 현대의 한국 철학을 구별하여 말할 수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고대 그리스 철학의 축이며, 칸트와 헤겔의 철학은 근대 독일 철학의 핵이고, 퇴계 이황(李滉, 1501-1570)과 이이의 성리학은 근세 조선의 철학을 대표하며, 열암 박종홍(朴鍾鴻, 1903-1976)의 철학은 1950-60년대 한국 철학의 일면을 분명하게 대변한다. 김재권(Jaegwon Kim)이 한국인의 한 혈족이라 하더라도 그가 미국 사회 문화 속에서 생긴 철학적인 문제를 미국에서 통용되는 말로 쓰고 생각하고, 그 결과가 미국에서 논쟁거리가 된다면, 그의 철학적 작업은 '미국적'이라고 평가함이 합당할 것이다. 독일 철학계를 들판으로 비유할 때, 한국인 백 아무개가 독일에서 독일말로 칸트 철학에서 제기된 문제를 철학적으로 논했다면, 그의 작업은 독일 철학계라는 들판에 돋아난 들풀 가운데 하나이고, 그런 뜻에서 '독일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거기에서 한국적인 '임-있음'의 문제 시각에서 '존재자의 본질-존재' 해명을 시도했다면, 그의 작업은 '한국적'이다. 더구나 그가 한국에서도 이 작업을 한국의 문화 의식 속에서 한국어로 계속하여 결실을 본다면, 그것은 한국 철학의 일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정도로 '한국 철학'의 개념을 우선 정리하고, 원래의 물음으로 돌아가자. - 한국인들에게 철학이란 무엇이고, 왜 한국인들은 20세기 초 이래 서양 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그 사상 흐름에 편승하고 있는가? 그러면서도 대체 이런 판국에 사람들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서 '한국 철학'을 말할 수 있는가?

이른바 철학자들은 철학이 제반 문화를 선도해야 한다고, 그리고 선도할 수 있다고 자부하나, 사실은 여타 문화 영역을 뒤따라가는 경우가 더 많다. 20세기 초에 서양 철학이 한국 사회에 유입된 것도, 당대 한국인들의 철학적 자각과 모색으로부터 그 길에 이르게 되었다기보다는 서양의 제반 문물이 세계 정세의 흐름에 따라 한국 사회에 밀어닥침으로 인해 서양 문화의 한 가닥으로 함께 들어온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거기다가 철학의 학문적 성격과 역할이 제 과학의 맨 뒤에 오면서도 제 과학의 단초와 원리를 추궁하는 것인 만큼, 한국의 제반 학문 세계가, 다시 말하면 표층 문화를 주도하는 물리학, 천문학, 지리학, 생물학, 법학, 정치학의 세계가 이미 서양적 흐름에 합류했는[휩쓸려 들어 갔는]데, 철학이 여전히 성리학적인·실학적인 전통만을 이어간다면, 그렇지 않아도 현대에 와서 신통치 않아진 이른바 분과학(分科學)의 근본학으로서의 철학의 역할은 허공에 뜬다. 현대 한국 사회의 질서와 정의의 골간을 이루는 헌법 체계가 어느덧 유교 원리나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정신을 떠나 미국 헌법, 프랑스 인권선언, 독일 헌법 정신과 그 맥을 같이 하는데, 재래의 법철학, 정치철학으로 현대 한국 사회의 어떤 법 원리, 정치 원리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한국에서 당초에 서양 철학의 접수가 자발적이 아니었음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것이 인간의 현실 생활과는 전혀 무관하고 철학자가 사회 생활에서 완전히 떠나 있다면 몰라도, 이미 사회 근간이 서양식으로 재편되어 가는 마당에 철학한다는 사람이, 그가 순전히 과거 한국 철학의 역사 연구가이길 지향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 재편되어 가는 문화 양상의 근거를 탐구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현대 한국 사회 운영의 토대인 '자유'와 '평등'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한국의 철학자들인 퇴계나 율곡 혹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사상보다는 로크나 루소(J. J. Rousseau, 1712-1778) 또는 칸트의 사상에 대한 이해를 더 필요로 한다. 물론 문화 양상은 중층적인 만큼 표피층에는 새로운 물결이 일어도 심층에는 여전히 옛 물이 두텁게 남아 있을 수 있다. 바로 그 만큼은 한국 사람들이 한국에서 서양적 철학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한국식 서양 철학, 바꿔 말해 화제는 서양에서 발원했으나 그러나 이미 한국인들 자신의 문제를 다루는 한국의 철학, 곧 한국(적) 철학의 일환이라 할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인들이 서양 철학을 수용했고 그리고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바로 그로 인해서 한국인들의 철학적 문제가 순전히 '서양적'이 된다고 볼 수는 없다. 이런 얘기는 예컨대 한국인들이 중국으로부터 삼국시대에 불교 사상을 수용한 것에 대해서도, 여말선초(麗末鮮初)에 성리학을 수용한 것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떤 이는, 한국 역사에서 주류(主流) 사상은 언제나 외래적인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상사는 외래 사상 수용사인데, '한국 사상', '한국 철학'이란 무엇이냐고 묻는다. 과연 외래 사상을 접수했다고 해서 일체의 고유성을 얘기할 수 없는 것일까? 독일 이상주의 철학이 연원을 따지면 그리스 사상이고 기독교 사상이라 해서 우리는 독일 철학을 얘기할 수 없는가? 문제의 발원이 남에게 있다 하더라도, 문제 의식이 수반되어 그 문제가 이미 자기 문제가 된다면, 그 문제 해결 방식과 결과도 상당 부분 자기 것이 된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서양 철학은 무엇인가? 기자(記者)적 관심에서 단지 소개되어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 사실 한국에서 이른바 '서양철학하는 사람' 가운데 오히려 서양 철학의 역사나 현황을 보고하는 '기자'라고 불러야 할 사람이 많기는 하지만 -, 일정 부분 한국적 문제 의식과 문제 해결의 관심에서 수용되고 변용된다면, '서양' 철학은 그만큼 '한국의'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이 오랜 동안 중국 철학사상을 수용하다가 난데없이 서양 철학을 떠들게 된 것은 '한국의' 제 문화 양상이 어느 사이 서양화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아야 한다. 20세기 초 이래 당초에 한국인들이 그것을 평가하고 선택할 겨를도 없이 서양 철학이 유입되고, 그것이 어느 사이엔가 현대의 한국 철학 형성에 중심 역할을 하게 된 것도 단지 한국에서 철학하는 사람들의 주체성 결여에서라기보다는 한국의 문화, 적어도 표층 문화 전반이 서양화하는 탓이라 해야 할 것이다. 철학하는 사람들이 주체성도 없이 어제는 '중국적' 철학에 오늘은 '서양적' 철학에 - 그것도 독일 철학, 프랑스 철학, 영미 철학 등 이른바 강대국 문화권의 철학을 번갈아 가며 - 쓸려 들어간다고 비난하기보다는, 오히려 현대 한국에서 주체적으로 철학하는 사람은 '서양' 철학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 한국인들이 아프리카(탄자니아나 니제르)의 철학 혹은 아라비아의 철학은 거의 수용하지 않고, 중국 철학이나 서양 철학을 수용한 것은 그것이 - 수동적으로 세계 정세에 휩쓸려 들어간 일이든, 능동적인 문화 향상 전략의 일환이든 - 한국 사회의 제반 문화·학문 영역에 피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고, 그 가운데서 한국인들의 삶을 꾸려 갈 수 있는 원리를 어느 면 발견했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인들에게 수용된 '중국' 철학이 한국의 철학이 되었듯이, 그와 같은 정도에서 그리고 같은 의미 연관에서 현대의 한국인들이 수용하는 '서양' 철학은 현대 한국 철학의 일부인 것이다.

물론 이런 사실을 한국인들이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유감스러운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양 철학 사상의 유입이라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새로이 탐구 대상으로 부각된 철학적 문제들이 다분히, 종래 탐구의 연장선에서 나왔다기보다는 갑작스레 정치적 외세(外勢)에 실려 한국인들의 관심을 끌고 한국인들에게 부과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계 철학사 주류의 관점에서는 19세기말부터 한반도의 사람들에게도 서구 철학 사상이 유입됨으로써 한국 사람들도 세계사의 대류에 합류했다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한국 철학 사상을 통사(通史)적으로 볼 때, 한국 철학 사상사는 19/20세기간에 단절과 전환이 있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 단절은 한국 철학 사상의 획기적인 발전의 계기였다고 언젠가 평가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으나, 그러나 일단은 한국에서 '철학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의 힘과 자생력을 잃고 '세계 주류'라는 이름 아래 밀려들어오는 서양 강대국에서 힘을 얻은 사상을 수입하여 주석·해설하는 따위의, 사상의 주변을 맴도는 일에 한 세기 내내 종사토록 하였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비록 외형적으로 정치적 식민 상태는 벗어났음에도 철학 사상적으로는, 포괄적으로 말해 정신 문화적으로는, 더 오랜 동안 식민 상태를 겪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이 언제 어디에 살든 '인류'라고 묶여질 수 있는 그 만큼은 보편성을 가질 터이므로, 철학적 문제와 해결 방안도 그 범위만큼은 보편적일 것이니, 바로 그 영역 내에서는 굳이 외래 사상이니 자생적 사상이니를 구별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화의 제 양상과 그에 수반하는 철학적인 문제들 가운데는 국가 단위의, 또한 시대적인, 특수성이 있기 마련이므로, 한국인들의 사상이 그런 특성을 갖지 못한다면 기본적으로는 '한국의' 사상이랄 것도 없는 것이며 그럴 경우 그것이 한국의 문화나 세계의 문화 향상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이라 기대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어떤 지역의 사상이 다른 지역의 사상과 단지 '다르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것이 특별히 좋다고 내세워져야 할 것은 없으나, 그렇다고 "요즈음 세계 일류 국가에서는 이런 철학 사상이 풍미하며, 이런 철학적인 문제가 각광을 받는다. 그러므로 한국 사람들도 그런 것을 탐구할 필요가 있고, 해야만 한다"는 문맥에서 외래 사상을 추종하고 수용함으로써 보편성을 유지하는 그런 사고 활동을 '한국의' 사상이라고 내세우기는 더욱이 어렵다.

우리가 진정으로 '한국의' 철학을 얘기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철학하는 사람들의 노고의 결실이 세계 문화 수준을 이끌만한 보편성을 가지면서도 한국적인 문제 - 예컨대, 서양 존재론의 번역·해설이 아니라, '이다'-'있다'의 구조 분석이라든지, 한국에서 계사(copula) 구조의 탈락 현상 해명이라든지, 동서 문화의 접점에서 생긴 '이성' 내지 '합리성' 개념의 새로운 정립이라든지, 좌우 이데올로기의 충돌 지점에서 사회 운영 원리나 세계 평화의 원리 모색이라든지, 유교 윤리와 기독교 윤리의 혼융의 어려움 극복과 같은 - 상황의 특수성을 반영한 것이어야 한다.

철학적 문제들 가운데는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와 아울러 민족 역사적·문화 전통적 특성을 갖기도 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철학은 '중국적'일 수도 있고 '독일적'일 수도 있으며, '미국적'일 수도 있고 '한국적'일 수도 있다. 이때 '∼적' 철학은 물론 특정 시대, 특정 지역,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유효할 수도 있지만 - 이 점에 있어서는 이른바 '과학'들도 마찬가지이다 -, 철학에 '∼적'이라는 이름을 붙여 다른 철학과 구별하는 것은 그 유효성의 제한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문제 의식과 그 주제 전개 양태의 특별성 때문인 경우가 더 많다. 예컨대, 실용주의 철학을 '미국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이론이 미국 사람에게만 타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상이 특히 미국에서 정치하게 전개되었고, 미국적 생활 양상을 잘 반영한다고 보기 때문이며, 또 정언적 명령에 의한 의무에 따르는 행위만을 도덕적 행위라고 평가하는 철학 체계를 '칸트적', 또는 '프러시아적', 또는 '독일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도덕 철학이 칸트 자신에게만, 또는 18세기 후반 독일 사람에게만 유효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비교적 독일 사람들의 의무 관념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한국 철학'을 얘기하고자 할 때 염두에 두고 있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의 '한국적' 철학이다. 독일적인 문제나 미국적인 문제 가운데 단지 특정 지역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 것이 많은 것처럼, 한국적인 문제들 가운데는 그것이 타지역 사람들에게 현안 문제로 의식되지 않았을 뿐 근본적으로는 인류 공동의 문제인 것이 많이 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철학적 통찰은 한국의 철학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세계 문화에 다양성을 주어 인류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철학의 성립은 그 주석의 소재가 800년 전의 고려 불교 사상이냐, 400년 전의 조선 유교 사상이냐, 200년 전의 독일 철학이냐, 현대의 미국 철학이냐에 따라서 좌우된다기보다는 그 문제 의식과 탐구 자세 그리고 연구 방법과 연구 결실이 인류 문화의 보편성을 유지하면서도 얼마나 한국적 특수성을 담지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율곡·다산의 전적을 주해 요약 해설하는 일은 '한국철학을 하는 것'이고, 로크·칸트에 대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서양철학을 하는 일'이라는 식의 이해는 올바른 것이라 보기 어렵다. 아마도 기껏 전자는 한국철학사 고전 연구의 일환이고, 후자는 서양철학사 문헌 연구의 한 가지라고 말하는 정도가 제격일 것이다.

서양철학·동양철학·한국철학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철학'이란 무엇인가? 적지 않은 사람들이 100년 전, 아니 2,500년 전의 이른바 '동양 철학'을 '한국 철학'과 동일시하거나, 아니면 그런 '동양 철학'은 '동양의' 철학이니까 '우리의' 철학이라고 여기거나 또는 오늘 우리의 '한국 철학'은 200년 전 '서양 철학'보다는 200년 전 '동양 철학'에 자연히 더 근접해 있다고 보는 경향이다. 이런 심리적 친근성의 정체는 무엇인가?

대체 '동양' 철학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철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또는, 세계를 크게 동·서양으로 나눌 때, 한국은 동양에 속하니까, '동양 철학'에는 한국 철학도 일부 들어 있는 것인가?

서양 문물의 위력이 충분히 입증된 19세기 후반 동아시아 3국의 경세가들은 '동도서기(東道西器)'론을 주창했다. 서양의 '그릇'은 수용하되 그것에 동양의 (정신적) 원리를 담아 쓰자는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 속에는 서양의 '도'는 취할 것이 못되며, 또한 동양의 전통적인 '그릇'은 효용성에서 서양 것만 못하니 버려버리자는 논지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체성을 유지하자는 자기 문화 정체성에 대한 신념과 자기 보존 기제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고, 가시적인 '그릇'의 위력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으니 그것은 수용하기로 하되, 우열의 분별이 명료하지 않은 '도'(道)는 계속해서 내세워보자는 전략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동도서기'론에서 '서'(西) 곧 서양이 유럽과 미국을 지칭하고, '기'(器) 곧 그릇이 근대 이후의 수학적 자연과학 내지 과학기술을 지시함은 거의 분명하다. 그렇다면, '동'(東)과 '도'(道)는 무엇을 지칭한 것이었을까?

중국에서는 동시에 중국적인 것을 중심에 놓고 서양의 문물을 활용하자는 '중체서용'(中體西用)론이 나왔고, 일본 사람들은 서양의 기술과 일본의 혼을 접합시키자는 '서기화혼'(西技和魂)을 슬로건으로 내걸었으니, 그들에게서 '동'은 어디까지나 자기들 자신이었고, '도'는 자기들의 철학 내지 역사 문화적 자산을 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서 '동'은 한국을 지시하는가?

지금도 대부분의 한국 사람의 관념에는 '동양'과 동북아 3국(곧, 한국·중국·일본)은 거의 동일한 것일 뿐만 아니라, 1세기 전에는 더욱 더 그랬고, 아마도 1세기 반전에는 '동양'은 곧 '중국'이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동양의 도'를 말했을 때 그것은 거의 '유교적 원리'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유교의 도덕 및 정치 원리가 국가적 제도로까지 발전한 경우는 중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요, 오로지 조선시대의 한국 뿐이라 할 수 있으니, 그 점에서 '유교적 원리'는 더 이상 중국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한국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보아 저 '동도'가 꼭 중국적인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적인 것도 포함한 것이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것이라면 기독교 윤리도 한국화하면 한국적인 것이라 해야 할 것이고, '민주주의'도 한국에서 현실화되면 한국적인 것이라 한다 해서 이치에 벗어난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무엇이든 수용해서 발전적으로 사용하면 '한국의 것'이 될 것인데 굳이 '동도서기'를 분별해서 말할 것이 있을까?

한국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동양 곧 한국'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도, '동도'를 말했으니, 그것은 어떤 '한국 고유의 정신'을 지칭했다고 보기 어렵다. 또 그런 것을 지칭했다면, 도대체 '한국 고유의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아마도 그런 무엇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중국 사람들이 '중체서용'(中體西用)을, 일본 사람들이 '서기화혼'(西技和魂)을 얘기했을 때, 조선 사람들이 중국인과 더불어 - 마치 자신들이 중국 사람인 양 - '동도서기'를 말하는 대신에 '선도서기(鮮道西器)'나 '한도서기(韓道西器)'를 덧붙여 얘기했음직하다. 그러나 이런 얘기를 한 이가 없었다는 것은 '동도'가 동학(東學)이나 한국의 토속 신앙 내지는 민간 습속을 지칭했다기보다는 넓게 보아 유(儒)·불(佛)·도(道) 등 중국적인 고급 사상 체계를 지칭한 것이었기 때문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세계화'의 이름 아래 서양적인 것이 물품뿐만 아니라 이른바 '정신'조차도 한국 사회 곳곳에 파고들자 최근 들어 다시금 한편으로는 '우리 것을 찾자'는 의식이 확산되어 가고 있다. 이런 마당에 한국에서 사람들이 귀 기울려 듣고 '아, 우리 동양에도 이런 근사한 것이 있구나!' 하고 '자부심'을 느끼는 것의 중심에는 '노자(老子) 이야기'와 '논어(論語) 이야기'가 있으니, 우리에게 '우리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어떤 관점에서 보면 아주 분명하고, 어떤 관점에서 보면 매우 모호하다. 분명한 것은 보통 한국 사람의 관념에 노자와 공자의 사상은 '동도'를 대변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 것'에 포함된다는 사실이고, 모호한 것은 이것이 과연 '우리 것'인지, 어떤 의미에서 '우리 것'인지, 또 그것은 '우리 것'이니까 좋다는 것인지 어떤지 이다.

이렇듯 우리 한국인에게 '동양' 철학이란 연원적으로는 대개가 '중국'의 철학이다. 그런데도 '동양' 철학이니까 '우리' 철학이라 한다면, 그것은 '서양' 철학과는 달리, 거리 상으로 조금 더 가까운 데서 더욱이 훨씬 오래 전에 한국 사회 문화에 유입되어 이미 한국 것처럼 쓴 지가 한 참 되었으니 '우리 철학'이나 다름없다는 말인가? 아니면, 피부 색깔도 비슷하고 풍토도 비슷한 같은 동양 지역 사람들의 사상이기 때문에, 그것은 한국의 풍토에도 한국 사람들의 감정에도 맞고 한국 사회 문화의 문제 해결에도 적절한 사상이라는 말인가? 누가 '동양 철학'이란 비록 그 원류의 대부분을 중국이나 인도의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하더라도, 이미 오랜 동안 한국식으로 변양되어 이미 토착화된 '한국 사상'이라고 말한다 해서 잘못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서양 사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의 내용 중 상당 부분은 기독교적인데, 기독교가 동방의 유태 지방에서 유래했다 해서, 그것이 '서양 사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이치와 같으니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로마 세계에 이식된 것하고, 유교와 불교가 그리고 심지어 도교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확산된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기독교는 속방(屬邦)에서 나와 본토로 확산된 것이고, 유교나 불교는 '상국(上國)'으로부터 주변으로 전래된 것이니 말이다. 여기에 이런 분석을 굳이 붙이는 것은, 20세기 초 이래 서양 사상의 한국에서의 확산에도 '상국 문화의 유입과 수용'이라는 그 성격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상국'이 중국에서 미국·영국·독일·프랑스 등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동양 철학'은 비록 그것이 본디 한국 문화에서 발생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한국 사회 문화에 수용된 지 이미 수천 년, 수백 년이 지났으니 '한국 사상'이라고 말한다면, 20세기에 비로소 수용된 '서양 철학'도 현재의 추세대로 한 두 세기 더 흘러가면 같은 의미에서 '한국 철학'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철학'이라는 것을 '한국에서 활발하게 논의되는 철학'으로 이해하는 한에서는 말이다. 그러나 사정이 진정 이러하다면, 한국 사상계는 예나 지금이나 '사대주의적'이라는 평은 감수하지 않을 수 없을 터다.

'한국 철학'의 의의

오늘날 우리가 '한국 철학'을 모색한다, '한국철학을 한다'고 말할 때, 그렇다면 도대체 '한국 철학'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문으로 서술되어 있는 퇴계나 율곡의 이론을 요즈음의 한국말로 바꿔 해설하면, 한국철학을 하는 것일까? 조선 실학자 정약용과 최한기를 비교 연구하면 한국철학을 하는 것인가? 그 반면에 홉스(Th. Hobbes)와 로크(J. Locke)의 사회계약설의 시비를 따지면, 영국철학을 하는 것이고, 칸트와 헤겔에서 신(神)의 존재 의미를 새기면, 독일철학을 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퇴계나 율곡이 주로 주자학을 논했지만, 그 천착한 바가 중국 사람들의 그것과 차이가 나고, 문제 접근의 주안점에 당대의 한국적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철학을 오늘날 '한국 성리학'이라고 부르고 또는 '과거의 한국 철학'이라고 부르듯이, 오늘날의 우리가 로크를 논하든 칸트를 논하든 그 논점이 한국 사회 현안 문제에 비추어 절실하면, 그것을 논함을 한국철학을 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제 학문의 총칭으로서의 옛 철학 개념 대신에, 뭇 학문이 분화된 오늘의 관점에서 '철학'이라는 것을, 이미 말한 바 있듯이, '자연과 인간 사회 문화 제 영역의 최고 원리들과 제 영역의 통일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이해한다면, 그래서 우리는, 한국 철학이란 '한국 사람이 한국에서 통용되는 언어로 자연 및 한국 사회 문화 제 영역의 최고 원리와 제 영역의 통일 원리를 반성적으로 탐구하는 지적 활동 또는 그 결실'이라고 포괄적으로 규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한국 사람이 미국에서 영어로 인류 사회 문화의 원리적 문제를 추궁하여 큰 성과를 거둔다 해도, 분명 그것은 한국 철학계가 거둔 큰 성과라 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철학에 굳이 당장 국적을 부여할 것까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폴란드 사람 타르스키(A. Tarski)의 의미론적 진리론은 인식 논리학 상의 큰 업적에 속하지만, 굳이 그의 의미론적 진리론을 '폴란드 철학'이라고 해야 할까 싶다. 다른 문화 영역의 예이기는 하지만, 가령 조수미가 밀라노에서 푸치니를 노래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장영주가 뉴욕에서 베토벤을 연주하여 한국 음악인의 자질을 세계 음악계에 떨쳤다 해서, 그들이 '한국음악'을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한국 사람이 철학함'을 '한국철학을 함'으로 이해한다면 또 다른 풀이도 가능하겠으나, '한국 철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한국적인 요소 - 그것이 문제 상황에 따른 것이든, 주제에서 비롯한 것이든, 아니면 문제 접근 방식에 수반하는 것이든 -가 있는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한국 사회 문화의 특성을 떠나서 한국 철학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한국철학'도 '철학'인 이상 학문적 보편성을 갖는 것임에 틀림이 없고, 만약 그런 보편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철학 축에 끼지도 못할 터이다. 그러나 문화 일반이 보편성을 가지면서도 특수성을 갖듯이, 철학도 보편성을 가지면서도 특수성을 가지기에 우리는 '중국 철학'과 '미국 철학', '독일 철학'과 '인도 철학'을 구분하는 것이고, 같은 수준에서 '한국 철학'을 논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문제 상황에서 어떤 주제를 어떤 방식으로 다루든 한국 사람이 세계 철학계에서 큰 업적을 내고, 또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런 학문적 전통이 한국에서 생기면, 분명 그것 역시 '한국 철학'의 범위에 포함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가정해서 한국 철학을 규정한다면, 철학 분야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든 잘만 하면 (그리하여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지면) 한국철학을 한다고 말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니, 결국 하나마나 한 얘기가 되고 말 터이다. 그러므로, '한국 철학'을 논하는 마당에서는 우리는 마땅히 그 의미를 좀더 좁혀서 얘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요즈음 한국 사람들이 자주 문제삼고 있는 바 '서양 철학의 유입과 수용을 통해 한국 철학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라는 물음 또한 단지 그로 인해 '한국 철학계가 어떻게 변화했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한국 사람들이 한국 사회 문화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사고하고 해결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묻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한국 사회 안에서 세계와 교류하며 살면서 '인간다운' 삶을 꾸려 가는 데 수많은 문제에 부딪치며, 필요한 경우 이에 철학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런 문제들이 '한국 철학의 소재'를 이루는 것이고, 그 문제 해결의 노고와 결실이 '한국 철학'의 내용을 이룰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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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ton, Phaidros.

개념(槪念. conceptus. Begriff)

개념의 의의

사람들의 생각을 언표하는 기본적인 형식은 문장이고, 문장은 낱말[단어]들로 구성된다. 그런데 낱말은 근본적으로는 개념(槪念)을 언표한다. 개념들이 연이어져 한 덩어리의 생각이 이루어지는 만큼, 개념은 의미 있는 생각의 최소 단위이다. 그러므로 개념은 생각을 담고 있는 말과 글의 최소 의미 요소[意味素]라고도 할 수 있다. 개념들은 언표되는 생각[思考]의 틀[형식]을 이룸과 함께 생각의 내용도 형성한다.

사고의 형식 개념

사고의 형식을 이루는 근간 개념

언표되는 생각은 어떤 개념들을 바탕으로 전개되며, 생각의 전개에서 이 개념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잘 살펴보면, 어떤 개념들은 생각의 기본 구조를 형성함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무엇이[누구는] 무엇이다", "언제 어디에 무엇이[누가] (어째서) 있다[없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누가] 무엇을 (왜) (어떻게) 하다" 등이다. 이런 사실은 우리 생각의 기본 틀[형식]을 이루는 것은 시간·장소, 주체[주어], 존재(방식) 또는 상태·동작(방식, 이유[원인·목적]) 등의 요소임을 말해 준다. 또 여기에 '무엇'[누구]에는 양[하나·여럿·모두와 같은 量]의 표상이, '어떠하다'에는 정도[전혀·조금·많이와 같은 질(質)의 정도]의 표상이 덧붙여짐을 볼 수 있다.

생각의 바탕에 놓여 생각을 틀 지우는 이런 요소들만으로도 '대개[大槪]의 생각[念]'은 형성된다는 의미에서, 그것들은 일종의 개념(槪念)이다. 이런 개념은 생각의 뿌리이자 큰 줄기의 기능을 하는 것이므로, 다른 종류의 개념들과 구별해서, 근간 개념(根幹槪念)이라 부르기도 하고, 생각의 큰 틀이라는 의미에서 사고의 범주(範疇)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 사고에서 근간 개념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다시 한 번 정리해서 말하자면, 시간·공간, 주체 및 주체의 양(量)적 규정, 존재·상태·동작방식들 사이의 (서로 주고받는 영향)관계, 주체와 존재·상태·동작방식 사이의 관계[예컨대, 능동·수동] 등의 표상이다.

우리는 '무엇이 있다' 하면 '언제·어디에?' 하고 묻는다. 무엇이 있는데 언제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면 당장 의아해 한다. 누군가가 "용이 있기는 있는데 언제 어디에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하면, "그런 것은 기껏해야 상상으로만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러니까 실제로는 없는 것이다"고 응대한다. 여기에 생각의 틀로 기능하는 '있다'·'없다'라는 개념도 '언제'·'어디서'라는 의식도 '대개의 생각'이라는 뜻에서 일종의 개념이다.

우리는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어떠한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는 "그것은 금이다", "그것은 구리가 아니다", "그것은 은인 것 같다", 또는 "그것은 노랗다", "그것은 노랗지 않다", "그것은 하얀 것 같다"고 판단한다. 여기서 '∼은 ∼이다[하다]'·'∼은 ∼가 아니다[∼지 않다]'·'∼은 ∼인 것 같다'는 모두 생각의 틀을 이루는 개념이다. 또 "한 마리의 개구리가 튀어 올랐다", "많은 정치가는 거짓말쟁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 나름의 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서처럼 '하나'·'여럿'·'모두'라는 것 역시 사고의 틀을 이루는 개념이다. 이런 수량의 개념을 통해 우리는 생각에서 중심이 되는 것, 곧 주체를 한정시킨다. 또 "폭풍우 때문에 다리가 무너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더 크고 튼튼한 다리를 새로 놓았다"는 생각이나, "모든 사람들은 이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영준이도 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서 보이는 '∼때문에'·'그래서'·'그러므로' 따위의 개념 역시 한 생각의 중심과 다른 생각의 중심을 연관시켜 주는 사고의 형식으로 기능하는 개념이다.

요컨대, 문장에서 구조어(構造語) 내지는 논리어(論理語)로 나타나는 개념들은 모두 사고 자체의 작동의 틀인 기능 개념들이며, 인간의 이성 능력 자체란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근간 개념의 유래

그러면 이러한 근간 개념, 다시 말해 생각의 기본 틀을 우리 인간은 어떻게 가지게 됐을까? 우리는 왜 "언제 어디서 몇몇의 무엇이 어떻게 있는가?"를 묻고, "현재 우리 동네 어귀에는 아름다운 공원 하나가 실제로 있다"고 대답하며, 우리는 어떻게 해서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를 묻고, "해질 녘 공원에서 영준이와 나는 건강을 위해 즐겁게 산책을 하였다"고 대답하며, 우리는 왜 "언제 어디서 몇몇의 무엇이 어째서 어느 정도로 그러한가?" 하고 묻고, "영준이가 도랑 가까이에 다가갔을 때 모든 개구리들은 위험을 느꼈는지 죽은 듯이 있었다"고 대답하는가? 이렇게 묻고 대답하는, 그러니까 생각하는 형식은 어디서 유래한 것인가? 우리는 어째서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반드시 시간·공간 의식을 가지며, 누가[무엇이] 그랬는가 하는 주체에 대한 의식을 가지며, 상태를 생각하고 분량을 생각하며 정도(程度)를 생각하고 연관 관계를 생각하는가? 왜 우리는 하필 이러한 틀에 따라 생각하는 것일까?

어느 때부터 어떤 계기로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생각의 틀을 우리 인간이 가지게 되었는지 현재까지의 연구로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사고의 기본 형식을 이루는 이런 개념들을 우리 인간이 임의로 선택했거나 서로 약속을 해서 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들은 사고의 기본 법칙으로 기능하는 동일률·모순율과 마찬가지로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의 의식은 무엇인가를 겪으며 경험(經驗)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또한 현재와 같은 우리 인간의 경험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오히려 지금의 우리의 경험 방식에 선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사고 기능을 이성(理性)이라고 부른다면, 그런 개념들은 이성에 본래적이고 고유한 사고 기능의 틀이며, 이성은 이러한 본래적인 틀을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경험할 수 있다. 이런 개념들은 그러니까 경험으로부터 얻어졌다기보다는 경험에 선행해 이성의 경험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표상이라는 뜻에서 선험적(先驗的)인 것들이라 볼 수 있다.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이 어떤 경로를 거쳐 오늘날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는가를 추적하는 일은 우리에게 여전히 남겨져 있는 과제지만, 그러나 우리가 일단 '이성'의 기능을 납득하는 것은 그것이 일정한 성격을 가짐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때 일정한 성격이란 다름 아닌 선험적인 사고 규칙이나 개념들로 말미암는 것이다.

"우리 관념들 혹은 개념들은 명석 판명한 것인 한에서 실재적인 것들이고, 신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참인 것이 아닐 수 없다."(Descartes, Discours de la Méthode, Ⅳ, 7)

"이성은 우리의 모든 관념 혹은 개념이 진리의 어떤 토대를 가지고 있을 것임을 분명하게 일러준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고서는 전적으로 완전하고 전적으로 진실한 신이 이런 토대 없이 그 관념들을 우리 속에 집어넣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겠기 때문이다."(같은 책, Ⅳ, 8)

"우리가, 신이 자연 속에 확고하게 세우고 우리 영혼 속에 그에 대한 개념을 각인시켜 놓은 일정한 법칙들에 대해 충분히 숙고하기만 한다면, 세계에 있는, 또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서 그 법칙들이 정확하게 지켜지고 있음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같은 책, Ⅴ, 1)

고의 내용 개념

사고의 내용을 이루는 개념

사고의 형식으로서 기능하는 개념들이 없으면 사고 자체가 발동이 안 되지만, 그러나 그렇게 기능하는 선험적 개념들만으로는 아무런 사고 내용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고가 내용을 가지려면 사고의 재료들이 있어야 한다.

사고의 기본 방식은 판단이고, 이 판단은 개념을 성분으로 갖는 것이니, 여기서 사고의 재료라는 것 역시 개념들이겠다. 사고의 내용을 이루는 개념들이 있어야 이성은 이것들을 그의 사고의 형식에 맞춰 조합하여 사고를 전개해 나갈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고 내용을 이루는 개념들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예컨대, "그것은 사과이다. 아직 풋사과인 걸 보니 맛이 새콤할 것 같다"나 "이것은 잘 익은 배인데 맛이 달다"라는 생각에서, '사과'·'배'·'맛'·'새콤하다'·'달다'·'풋'·'익은' 따위의 개념은 어디에서 유래할까?

생각의 내용을 이루는 것은 한 관념이나 대상을 지시하는 명칭[이름]이거나 아니면 개념들인데, 이때 개념이란 '여러 관념 속에서 공통 요소를 추상하여 종합한 하나의 관념' 또는 '여러 대상에 공통적인 징표(徵表)를 매개로 해서 여러 대상을 함께 나타내는 표상'이라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하나의 개념이 생기기 위해서는 먼저 '여러 관념'이나 '여러 대상'이 주어져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개념을 만들기 위한 소재가 주어져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런 소재를 우리는 보통 상상이나 감각적 경험을 통해 얻는다. 가령 '인어'라든지 '용'과 같은 개념은 그 소재를 상상을 통해 얻은 것이고, '사과'·'배'라든지 '개구리'와 같은 개념은 감각 경험을 통해 그 소재를 얻은 것이다.

경험 개념

먼저 '사과'니 '배'니 하는 개념이 어떻게 생겨났을까 한번 생각해 보자.

어느 날 사람들이 들에서 처음 보는 몇 그루의 나무를 발견했는데, 살펴보니 나무 모양도 조금씩 다르고 열매 모양도 서로 조금씩 달랐다. 그러나 자세히 비교하면서 살펴보았더니 크게 두 무더기로 나눌 수 있을 만큼 일부와 또 다른 일부는 서로 비슷한 점들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의 열매들을 '사과'라고 부르고, 다른 일부의 열매들을 '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 이렇게 해서 '사과'라는 명칭과 '배'라는 명칭이 생겨났을 것이고, 이제 우리는 '배'하면 일정한 맛, 색깔, 모양을 가진 과일을 떠올리게 된다. 이렇게 해서 '배'의 개념은 형성된 것이며, '배'라는 개념, 곧 배에 대한 '대체적인 관념'은 배들끼리도 맛이나 색깔, 모양 등이 조금씩 다르지만, 그러나 '배'라면 꼭 가지고 있어야 할 공통의 성질만을 뽑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공통의 필수불가결의 성질을 본질(本質)이라고 부르니까, 어떤 것의 개념은 그와 같은 모든 것들의 본질 표상(表象)이라고 볼 수 있다. 한 개념 아래 포섭되는 사물들은 그러므로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조생종이든 만생종이든, 장십랑(長十郎)이든 신고(新古)든, 한국산이든 서양산이든 배는 '배'인 한에서 본질적으로는 한가지이다. 이런 성격은 '배'라는 개념에서뿐만 아니라 '사과'라는 개념에서도, '푸르다'나 '붉다'라는 개념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개념이 생겨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이런 개념들은 어떤 것에 대한 (수 차례의 감각적인) 경험을 토대로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용'이라든지 '인어'와 같은 개념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용'이나 '인어'는 상상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것들 역시 감각 경험을 소재로 갖는다. 우리는 '용'이나 '인어'를 직접적으로 감각한 적은 없지만, 그러나 용이나 인어를 이루는 성질들을 분석해 보면, 그 성질들은 감각 경험적인 것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 예컨대, 인어의 상체는 처녀의 모습이고 하체는 물고기의 모습인데, 그것은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순전히 상상이 한 일은 약간의 변형과 결합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 이성은 어떤 소재가 상상을 통해서 또는 감각을 통해서 주어지면, 그것들을 서로 비교(比較)하고, 주어진 것들이 어떤 점에서 공통이고 어떤 점에서 서로 다른가를 반성(反省)하여, 서로 다른 점은 도외시하고 같은 점들만을 뽑아서 곧 추상(抽象)하여 주어진 것 모두에 대한 '대체적인 표상' 즉 개념을 만든다. 그러니까, 이성이 주어지는 소재들을 비교·반성·추상하여 개념을 만들 수 있기 위해서는 소재들이 먼저 주어져야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개념을 우리는 '경험적' 개념이라고 부를 수 있다.

순수 (상상) 개념

그런데 개념들 가운데는 이런 경험적 개념이나 앞서 든 선험적 개념들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는 개념들도 있다. '삼각형'이라든지 '진리'라든지 '선(善)'과 같은 개념이다. 이런 개념들은 사고의 형식을 이루는 사고 기능 자체의 표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엇인가 주어지는 것들을 비교·반성·추상하여 이성이 만들어 가졌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들이다. 오히려 이런 개념들은 이성이 먼저 '삼각형이란 어떠어떠한 것이다', '진리란 어떠어떠한 것이다'고 규정해 놓고서, 이 규정을 어떤 대상에 적용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들은 다시 '삼각형'처럼 상상 속에서나마 그 모양[像]을 그려 볼 수 있는 것과 '진리'나 '선'처럼 단지 이상(理想) - 이상도 일종의 상상으로 볼 수 있겠는데 - 적으로만 그려볼 수 있는 것으로 구별된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런 유의 개념들은 통틀어 '순수 상상 개념'이라고 부를 수 있다. 어떤 감각 경험에 의거함 없이 이성 스스로 상상을 통해 만들어낸 개념이라는 뜻이다.

기타 파생 개념

이외에도 이성은 예상(豫想)이라든지 추상(追想)이라든지 또 다른 갖가지 상상의 방식을 통해 개념들을 만들기도 하고, 일단 경험적으로든 순수 상상적으로든 만들어진 개념들을 기초로 해서 또 다른 개념들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이성은 임의적인 명명을 통해 얻은 '이름'이나 조작적인 정의(定義)를 통해 얻은 술어(術語)들과 논리적 규칙들을 바탕으로 제3의 개념을 만들기도 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이른바 많은 '파생적(派生的)' 개념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들의 수효의 면에서 볼 때 형식적인 근간 개념이나 내용적인 경험적 또는 순수한 기초 개념들보다는 오히려 파생적인 개념들이 훨씬 더 많다. '철학'·'과학'·'예술'·'문화' 따위의 개념들 또한 그런 파생적 개념들의 예들이라 하겠다.

개념 형성 능력의 의의

그래서 사고의 기본 구조를 형성하는 개념은 변함이 없어도- 이런 개념의 변화가 있을 때 우리는 '사고의 혁명'을 얘기할 수 있다 - 사고의 내용을 이루는 개념들은 경험과 상상력 그리고 지성의 논리적 조작 등을 통해 증대한다. 개념의 증대는 사고의 풍부함을 가져오고, 사고 영역이 넓어진다는 것은 문화의 폭이 넓어짐을 뜻하며, 그 역(逆)도 마찬가지다. 이런 뜻에서 개념 형성 능력은 문화 형성 능력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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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a)

'형이상학'의 유래

우리말 '형이상학'은 서양말 metaphysica·metaphysics·Metaphysik의 번역어 '形而上學'에서 유래한다. 원래의 말 'metaphysica'는 기원전 1세기에 안드로니코스(Rhodos의 Andronicos)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322/1)의 저작들을 정리하면서 제목 없이 전해져온 존재에 관한 14권의 저술을 자연학(physica) 뒤에 묶어 놓으면서 '자연적인 것[자연학] 뒤의 것'[tà metà tà physicà]이라고 명명한 데서 비롯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오늘날 철학의 핵심 영역 중 하나인 형이상학의 내용을 미뤄 생각할 때, 당초에는 책 편집상의 순서를 지칭하던 '자연적인 것 뒤의 것'이라는 이 말이 책의 내용을 담은 '자연적인 것 너머의 것'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말로 전환된 셈인데, 그것은 우연한 일이라기보다는 사태에 부합하여 일어난 매우 자연스런 일이라 하겠다.

본디 '뒤에' 또는 '다음에'를 뜻하던 그리스어 'meta'가 중세에 라틴어 '위에'(supra) 또는 '넘어서'(trans)의 의미를 얻음에 따라, 형이상학은 학문 소재의 성격상 자연학을 상당 수준 한 뒤에 연구하는 것이 합당한 순서라는 뜻과 함께, 형이상학은 자연학을 넘어서, 그러니까 '자연적인 것', '감각적인 것'을 넘어서 그것의 토대, 근거, 원리, 이를테면 도(道)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뜻을 얻었다. 이미 그런 뜻에서 토마스 아퀴나스(Th. Aquinas, 1225-1274)는 "metaphysica는 곧 transphysica를 일컫는다"(In Boet. de Trin., q. 5, a. 1)고 말한 바 있다. 'metaphysica'에 '형이상학' 즉 '형상 위의 것[形而上者] 곧 도(道)'[『周易』, 繫辭上 十二: "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명칭을 주는 것은 이 같은 의미 연관을 고려한 것이라고 하겠다.

진정한 철학으로서의 형이상학

형이상학은 문자 그대로 '감각적인 것 너머의 것[tà metà tà physicà], 바꿔 말하면 자연 저편의 것에 관한 학문이다. 형이상학은 명칭상 자연, 곧 경험 대상의 총체를 넘어서는 것, 그러니까 '초감성적인 것에 관한 학'이다. 이런 뜻에서 아직 '철학'이 과학과 구별되기 전, 모든 학문적 주제는 형이상학적 주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학의 근대적 "학술 개념"(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A838=B866)에 따라 말한다면, 철학은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하나의 학문으로서 "개념들에 의한 이성 인식의 체계"(Kant, K.d.r.V., A713=B741; Logik: 『전집』 Ⅸ, S. 23)이다. 그러니까 철학은 경험적 자료에 의한 인식들의 체계인 제 과학[分科學]과 구별되는가 하면, 또한 같은 이성 인식의 체계라는 점에서는 동류인 수학하고는, 수학이 "개념의 구성[作圖]에 의한"(같은 곳) 이성 인식의 체계, 곧 이성 개념을 직관에서 그려내는 인식의 체계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개념들에 의한 이성 인식인 철학적 인식으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사고의 능력인 이성 자체, 곧 사고의 형식에 관한 순수 인식이고, 다른 하나는 오로지 이성에 의해서만 생각될 수 있는 대상들에 관한 순수 인식이다. 그 대상이 서로 다른 이 두 가지 철학적 인식으로 인해 철학은 바로 서로 구별되는 두 영역을 갖는다. 첫째 영역은 '대상의 차이와는 관계없이 사고 형식의 원리(logos) 일반'에 관한 인식을 그 내용으로 갖는바 이름하여 논리학(logica)이다. 논리학은 이를테면 철학의 형식적 부문이다. 둘째 영역은 반면에 대상과 인식 내용을 갖는 철학의 실질적 부문인바, 그것이 다름 아니라 형이상학이라 일컬어진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철학'으로서 형이상학은 취급하는 대상의 차이로 인하여 다시금 두 분야로 갈린다. 자연(自然) 즉, '스스로 그러한 바'의 것[存在者]에 관한 것인 '자연 내지는 존재 형이상학'과, 자유(自由) 즉 '스스로에서 비롯하는 바'의 것[當爲, 道德]에 관한 것인 '자유 내지는 윤리 형이상학'이 그것이다. '존재 형이상학'은 순수 이성의 이론적[사변적] 능력 분석에 의거하고, '윤리 형이상학'은 순수 이성의 실천적 능력 곧 자유의 분석에 의거한다.

"어떤 상태를 자신으로부터 비로소 개시하는 힘"으로서 자유를 주제로 삼는 자유 형이상학은, 자유에서 비롯하는 원리가 바로 마땅히 있어야 할 것, 즉 당위(當爲, Sollen), 그러니까 도덕(道德)의 원리가 된다는 점에서, 곧 도덕철학 내지 윤리학의 근간을 이룬다.

그리고 존재 형이상학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 존재자 일반의 존재 원리를 탐구하는 '일반 형이상학'(metaphysica generalis)과 한 존재자이긴 하지만 결코 감각 경험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는 특수한 존재자들을 탐구하는 '특수 형이상학'(metaphysica specialis)으로 나뉜다. 일반 형이상학은 존재자가 존재자인 까닭을 탐구하고 모든 존재자에게 타당한 원리를 찾는 것이므로, 다름 아닌 존재론(→)을 말한다. 특수 형이상학은, 특수한 존재자를 다루는바, 그런 존재자는 자연을 초월해 있는 것이므로 오로지 이성의 힘으로써만 개념화할 수 있는 것이다. 보통 그런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영혼·우주 자체·신인데, 그래서 영혼론·우주론·신학이 특수 형이상학의 내용을 이룬다.

좁은 의미에서 '형이상학'은 보통 자연 형이상학만을 지칭하는데, 이때 그것은 이성의 사변적 사용에서 얻은 "모든 존재자에 대한 이론적 인식들[…], 순전히 개념들에 의거한 순수한 이성 원리들 일체"(같은 책, A841=B869)를 뜻한다.

순전히 개념들에 의한 순수 인식의 체계로서의 형이상학은 "사고 능력 자체의 본질로부터 얻어진" 것인 바, "사고의 순수 활동들, 그러니까 선험적 개념과 원칙들"(Kant, 『전집』 Ⅳ, S. 472), 곧 인식 대상에 관계하는 순수한 이성 사용의 최고 원리들이 그 내용을 구성한다. 실질적인 의미에서는 다름 아닌 형이상학과 동일한 것인 철학은 그 내용을 이루는 순수한 이성 사용의 최고 원리들을 결코 경험으로부터, 그러니까 어떤 대상으로부터 얻어 갖는 것이 아니고, 이성 자신 안에서 찾아낸다. 철학은 이성 자신이 그것에 준거해서 대상을 다룰 이성 사용의 규칙을 밝혀내는 것이다. 철학은 이런 의미에서 "인간 이성의 입법자"라 하겠는데, 이것이 철학의 이른바 "일반 개념"(Kant, K.d.r.V., A838=B866)이다.

엄밀한 학으로서 형이상학의 가능성

우리가 순수한 이성 인식의 한 체계, 곧 하나의 형이상학을 세우고자 한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경험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가 전혀 없고, 경험으로부터는 결코 아무것도 취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우리 인간이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성은 어떤 경험에도 의존하지 않고서 어디에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까? 도대체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은 어떤 경험에도 의존함이 없이 무엇인가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인가?

이성은 우리 이성 자신을 점검하여 선험적 인식의 가능 근거를 캐고, 이성은 경험적 원리의 도움 없이 어디에까지, 어떤 종류의 대상에까지 이를 수 있는가를 규정하고, 또한 이성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식 원리들과 함께 넘어서서는 안 될 경계선을 획정한다. 그런데 형이상학에서 이성은 감성적인 것으로부터 전혀 이종(異種)적인 초감성적인 것으로 넘어서려 한다. 이때 더구나 이성은 지금 그가 감성 세계를 인식하는 데 쓰던 인식의 원리들을 가지고 그렇게 해보려 한다. 그러나 감성적인 것과 초감성적인 것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원리들은 초감성적인 것들에는 도무지 타당하지가 않다. 그러므로 이성이 형이상학이라는 이름 밑에서 자기 능력을 넘어서 무엇인가를 인식해보고자 한다면, 거기에는 큰 위험과 착오가 있다. 이를 피하고 참된 형이상학을 위한 확실한 주춧돌을 놓기 위해서는, 그러므로 먼저 이성이 그 이론적 사용에서 넘어서는 안 되는 이성 사용의 한계를 분명히 규정하는 일이 필요하다. 칸트(I. Kant, 1724-1804)의 '순수이성비판'은 바로 이 문제, 곧 순수한 이성이 대상과 관련해서 우리를 어디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가를 밝히려는 작업이다. 형이상학은 이런 작업을 통해 비로소 '엄밀한 학'으로서 위상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周易』

Kant I., Kritik der reinen Vernunft(1781·1787).

_______, Gesammelte Schriften[『전집』], hrsg. v. der Kgl. Preuß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 // v. der Deut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 zu Berlin, Bde. I-XXIV, XXVII-XXIX,

       Berlin 1902∼.

존재론(存在論. ontologia)

'존재론' 개념의 형성

존재의 원리와 인식의 원리에 관한 철학(→)적 이론을 각각 '존재론', '인식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어떤 철학자들의 파악에 따르면 인식의 원리가 곧 존재의 원리가 되므로, 그런 경우 존재론과 인식론은 내용적으로는 차이가 없고, 다만 관심과 관점의 면에서 구별이 있을 뿐이다.

존재론이라는 우리말 어휘는 서양말 '온토로기아'(ontologia·ontology·Ontologie)의 번역어이다. '온토로기아'라는 원 라틴어 철학 술어는 17세기 초부터 사용되어 온 것으로 조사되어 있는데, 고크레니우스(R. Goclenius, 1547-1628)의 『철학사전』(Lexicon philosophicum, Frankfurt/M. 1613)에 최초로 등장한다(16. art.: 'abstractio'). 여기에서 '온토로기아'(ontologia)는 말뜻 그대로 '존재에 관한 (철)학'(philosophia de ente)이라고 풀이되어 있다.6)

철학사적으로 볼 때 '존재론'이라는 명칭은 비교적 늦게 형성되었지만, 그러나 그 학문의 내용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철학의 일부, 아니 핵심부를 이루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Organon]과 형이상학[Metaphysica] 등에는 이미 거의 모든 존재론의 문제들이 등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322/1)는 "존재자로서의 존재자(to on he on)와 이것에 자체적으로 귀속되는 것에 관한 학문이 있다"(Aristoteles, Metaphysica, 1003a 21/22)고 하면서 이 학문을 "제일철학"(prote philosophia)이라고 부른다(같은 책, 1026a 24, 30 참조). 여기서 말해진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와 이 존재자에 본래적으로 속하는 것은 '존재자의 있음[존재, hoti esti]과 무엇임[본질, ti esti]'으로 해석되어 중세와 근대 초의 형이상학의 핵심 문제가 된다. 그러나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란 어떤 특정한 존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적으로 '존재한다[있다]'는 술어가 속할 수 있는 일체의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존재론의 대상은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인 한, 바로 그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인 까닭[이유, 원인, 근거, 목적]의 탐구가 된다.

도대체 존재자는 왜 존재자인가? 존재자를 존재자이게끔 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이 물음들에 관련하여 사람들은 모든 존재자를 존재자로 만드는 근원적인 존재자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 근원적인 존재자에게 '신'(theos)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그래서 '제일철학'의 문제는 신학(theologia)의 문제로 전이되었다.

이제 '존재론'은 미크라엘리우스(J. Micraelius, 1597-1658), 클라우베르그(J. Clauberg, 1622-1665), 뒤 하멜(J. B. Du Hamel, 1624-1704), 라이프니츠(G. W. Leibniz, 1646-1716)를 거쳐 볼프(Chr. Wolff, 1694-1754)에 이르러 '존재자 일반에 관한 학' 혹은 일반 형이상학(metaphysica generalis)의 통칭으로 사용되었다. 볼프의 강단철학의 영향을 깊게 받았으면서도, 새로운 철학을 구상한 칸트(I. Kant, 1724-1804)는 플라톤(Platon, BC 427-347) 이래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까지 '학문'과 동의어로 쓰이던 '철학'(philosophia)을 여타 과학들과 구별되는 전문 학문으로 규정하고 그 내용을 세분함으로써 존재론의 대상 영역을 확정하였다.7)

이제 존재론의 주요 문제들과 쟁점들을 살펴보자.

존재론의 문제와 쟁점들

존재론적 물음

우리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것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그것은 무엇이다'고 대답한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그리고 과학적인 탐구에서도, 그 '무엇'이란 예컨대 장미꽃이거나 비둘기, 바위 혹은 생물, 무생물, 어떤 때는 세포나 H2O등을 지시한다. 보통의 생활에서는 '그것은 무엇인가?'의 물음에서 이런 유의 답을 모으려 하고, 그런 답을 얻으면 만족한다. 그러나 이런 물음들의 바탕에는 보다 근원적인 물음이 하나 있을 수 있다. 어떤 것이 장미꽃이든, 비둘기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혹은 용과 같은 상상적인 것이든, 그것은 반드시 '무엇이다'. "도대체 이 '무엇임'이란 무엇인가?"는 그래서 어떤 물음보다도 근원적인 물음이다. 그런데 '무엇인' 것은 있거나 없거나다. 한 마리의 비둘기는 우리 집 지붕 위에 있고, 한 마리의 용은 그림으로는 있으나 실제로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이 '있음' (혹은 '없음')은 무슨 뜻인가?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대해 '무엇임' (혹은 '무엇 아님')과 '있음' (혹은 '없음')은 보편적으로 타당하다. 철학자는 어떤 것이 무엇이 됐든, 그것이 꽃이든 새든, 세포든 H2O든, 삼각형이든 용이든, 그것이 '무엇'이며,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임을 보고, 어떤 것이 됐든 그것을 무엇이게 하고, 있게 하는 근거, 원리를 묻는다. 그것은, 사람은 왜 존재하는가, 공기는 어떻게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어떤 것은 왜 '무엇'[본질, essentia, Wassein, Sosein]이며, '존재'[existentia, Daßsein, Dasein, Wiesein]하는가를 묻는다. 그것은 어떤 한 사물의 본질과 존재를 묻는 것이 아니라 - 이것은 과학적 물음의 대상이다 -, 존재자 일반의 본질과 존재를 묻는다. 이것이 존재론의 근본 물음이다.

어떤 것은 도대체 어떻게 무엇일 수 있으며, 있을[존재할] 수 있는가?

("왜 도대체 없는 것[無]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것[存在者]이 있는가?"로 정식화된 존재론의 물음을 우리는 라이프니츠에서(Leibniz, Principes de la Nature et de la Grace, fondés en Raison, 수록: Philosophische Schriften, Bd. I, hrsg. v. H. H. Holz, Darmstadt 1985, S. 426 참조) 발견하고, 이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또한 하이데거에서(Heidegger, Einführung in die Metaphysik[1935], S. 1f. 참조) 볼 수 있다: "아무 것도 아닌 것[無]이 무엇인 것[存在者]보다 더 간단하고 쉬운데, 왜 사물들은 존재해야만 하는가?"

"Warum ist überhaupt Seiendes und nicht vielmehr Nichts?" ?? 이것은 '형이상학의 기본 물음'으로서 물음들 가운데 물음이며, 최초의 물음이다. 그것은 존재자 전체를 향하여, 그것의 존재 이유를, 궁극의 존재 원인을 묻기 때문이다.)

이 존재론의 기본 물음은 다음의 물음들을 함축한다.

(1) 도대체 무엇임[본질] 일반을 가능하게 하고, 있음[존재] 일반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은 무엇인가?

(2) 존재자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무엇으로 있다[존재한다]. 그렇다면, 존재자의 무엇임[본질]과 있음[존재]의 관계는?

(3) 어떤 존재자는 개별성 혹은 특수성과 보편성을 함께 갖는다. 가령 소크라테스는 산파인 어머니를 가진 그리스의 철학자이며, 동시에 사람이고 생물이다. 여기서 개별자 '소크라테스'와 보편자 '철학자', '사람' 혹은 '생물'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4) 어떤 존재자, 예컨대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69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기원전 469년부터 399년까지는 존재하다가, 기원전 399년 이후에는 다시 존재하지 않는다. 왜 어떤 존재자는 있다가 없게도 되며, 없다가 있게도 되는가? 모든 존재자가 이러한 성격을 갖는가? 항상 있기만 하는 존재자는 없는가?

(5) 도대체 '있다', '존재한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존재론의 물음과 관련된 쟁점들

 본질과 존재 일반의 근거 혹은 원리

존재자의 무엇임과 있음의 규정은 존재자의 존재 방식이며, 그 방식은 근원적인 존재자로부터 유래한다는 견해가 있는 반면에, 존재자의 존재 규정 일반은 존재자를 파악하는 인간 의식의 사고 방식이라는 견해도 있다.

모든 존재자는 본질의 면에서나 존재의 면에서 그 존재자가 그러한 원인을 가지며, 그 원인은 그 존재자 자신 안에 혹은 밖에 있으되, 그 원인 역시 어떤 형태의 존재자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無]은 어떤 것을 무엇이게도, 있게도 할 수 없을 것이니까 말이다. - 이런 생각으로부터 나온 것이, 모든 존재자의 존재 규정이 그로부터 유래하는 시원(始源), 근원적인 존재자로서의 신(神)의 개념이다.

낱말로서는 똑같이 신(theos, deus)이라고 표현되더라도, 존재자의 유래를 자연발생적으로 파악하는 이신론(理神論, deism)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의지적인 창조의 결실로 파악하는 유신론(有神論, theism)이 있다. 이 가운데 이신론의 신 개념은, 존재의 생성의 근거율 적용에서 하나의 예외를 인정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유신론의 신 개념은 초월성과 인격성으로 인해서 많은 쟁론을 불러일으킨다.

이신론의 신 개념을 먼저 살펴보자.

무엇인가가 존재함은, 내가 존재하고 있으니 확실하다(Descartes의 "cogito ergo sum."[Meditiones, Ⅱ; Principia Philosophiae, Ⅰ, 7; Discours de la méthode, Ⅳ, 1] 참조). 그리고 나를 나 자신이 있게 하지 않은 것도 확실하다. 그렇다면 나를 있게끔 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무에서는 아무 것도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를 존재하게 한 원인이 또 있을 것이다. 이러한 존재자의 원인으로서의 존재자의 계열에서 최초의 존재자가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모든 존재자의 근거이고 시원(始源)이다.

그러니까 이 최초의 존재자는 자신의 존재 원인을 더 이상 자신의 밖에 갖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자기 원인'(causa sui)이라 일컬어지고, 신(theos)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유래하는 존재자'(ens a se)이기 때문에 무엇에도 의존되어 있지 않은 '자족체'(自足體, autarkeia)이며, '그것은 자신의 본질상 자기 안에 존재를 포함'하기 때문에, '자기의 존재를 위하여 어떤 다른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Descartes, Principia Phil., Ⅰ, §57 참조)이라는 의미에서 '실체'(substantia)라고 불리고, 모든 존재자들이 그로부터 유래하므로 모든 존재자를 포괄한다는 뜻에서 '최고 완전 존재자'(ens perfectissimum), 혹은 모든 존재자들이 가지고 있는 성질들을 다 갖추고 있다는 의미에서 '최고 실질[재] 존재자'(ens realissimum)라고도 불리운다(Descates, Principia, Ⅰ, §§48-51; Spinoza, Ethica, Pars Ⅰ; Leibniz, Monadologie, §§39-40 참조).

이신론의 신 개념으로써 세계의 발생을 설명할 때, 그런 견해는 보통 '유출(流出, aporroia, emanatio)설'이라고 불린다.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으며, 둘은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老子, 『道德經』 四十二: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하나[一者, to hen, 하나님]는 만물이되 유일자는 아니다. 왜냐하면 만물의 근원이 만물이 아니라, 만물이 그것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Plotinos, Enneades, V, 2, 1: Peri geneseos)

'하나'(一者, to hen)로부터 세계의 발생을 유출로 설명하면서, 그 '하나'를 단지 순서에 있어서 앞서는 것으로 보고 세계 내재적인 것으로 보면, '자연과학적'인 세계 생성의 설명이 된다. 그리고 이런 세계 생성의 설명에 대해서는, "그 '하나'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라는 질문이 여전히 제기될 수 있지만, 이신론은 이 질문 자체를, 그 '하나'는 궁극의 원인이므로, 더 이상 그 유래를 물을 수 없다고 배제한다. 그러니까,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그 원인들 갖는다'는 존재 근거율에 단 하나의 예외가 인정되는 셈이다. 이 점 이외에는 유출설의 구성은 '논리적'이므로, 이신론에서는 '신의 존재 증명'과 같은 작업은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모든 사물[존재자]의 본질에 존재 방식은 그 원인에 따라 규정되며(Spinoza, Ethica, Pars I, 25 참조), 그 원인은 자연 안에 있다. 이 원인의 계열, 즉 존재자의 전 계열 자체가 자연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세계의 시원(始源)으로서의 '하나'는 의지와 지혜를 가진 존재자이며, 그 '하나'의 의지와 지혜의 질서에 따라 만물의 본질과 존재의 양이 정해진다고 파악한다. 이런 '하나'를 신이라고 부를 때, 그런 견해는 유신론이라고 일컬어지며, 이때 신은 인격성을 가지므로, 보통 '인격신'이라고 불리고, 인격신으로부터의 만물의 유래를 '창조'(創造, creatio)라고 일컫는다. 그래서 그 '하나'는 '하나님'('하느님'), 혹은 '창조주'라고 불리며, 그것이 바로 모든 존재자의 존재 원리로 이해된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 […]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 하느님께서 '물 한가운데 창공이 생겨 물과 물 사이가 갈라져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 있는 물이 한 곳으로 모여, 마른 땅이 드러나거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 하느님께서 '하늘 창공에 빛나는 것들이 생겨 밤과 낮을 갈라놓고 절기와 나날과 해를 나타내는 표가 되어라! 또 하늘 창공에서 땅을 환히 비추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 하느님께서는 […]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는 보시니 참 좋았다."(공동번역 『성서』, 창세기 1 참조)

창조주로서 '하나'는 모든 존재자들의 본질과 존재를 규정한다. 그리고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며, 악의 회개를 기뻐하고, 선에 대해서는 상을 내리고, 간절한 소원에는 응답한다. - 그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성질들을 완전한 형태로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완전한 인격체'이다. 인격신으로 '하나'는 또한 자연 만물의 근원이면서도 자신의 피조물과는 위격(位格)에서 완전히 구분되어, 자연의 존재자들의 계열 중에 있지 않다. 말하자면 '초월자'이다.

초월적 인격체로서의 신의 존재 설명에는 초논리적 요소가 불가피하게 개입되므로, 계시(啓示)에 의한 확인이나 신앙(信仰)이 요구되고, 따라서 그것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이다.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하였다. 대표적인 몇 예를 살펴보자.

기독교 신학자들이 제시한 신 존재 증명 방식 가운데 철학사적으로 영향력이 컸던 방식이 셋이 있는데, 그것은 칸트에 의해서 각각 '존재론적 증명', '우주론적 증명', '목적론적 증명'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이다.

'존재론적 증명' 방식은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가 제안한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는 바,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의 형식을 빌어 정리해 볼 수 있다(Anselmus, Proslogium, cap. 2, 3 참조).

·신은 개념상 최고로 완전한 것이다.

·완전성에는 존재도 포함된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완전한데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완전성의 결여를 뜻하므로, 자가당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신은 필연적인 존재자다.)

'우주론적 증명'과 '목적론적 증명' 방식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가 제안한 다섯 가지 증명 방식 가운데 세 번째와 다섯 번째 것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Th. Aquinas, Summa Theologiae, Pars I, q. 2, art. 3 참조).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말하자면 우연적이고 가능적인 존재자들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발생하고 소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존재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그것의 존재 근거가 자기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우연적인 존재자들의 근거로서 그것들의 밖에 하나의 존재자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이 필연적인 존재자를 사람들은 신이라고 부른다.

전혀 지적인 능력이 없는 자연의 사물들도 어떤 목적을 향하여 움직인다. 그것도 일정하게 의도된 목적을 향하여. 마치 화살이 저 혼자 날아가지만, 궁수에 의해서 계획된 방향으로 날듯이, 세계 내의 모든 존재자들은 어떤 지적인 존재자에 의해 계획된 방향으로 운동하고 있다. 이 운동의 기획자를 사람들은 신이라고 부른다.

데카르트는 이외에 '이성론적 증명'이라고 부를 만한, 또 다른 증명 절차를 제시하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Descartes, Meditationes, Ⅲ 참조).

① 명석판명한 인식만이 참이다(데카르트의 '보편타당한 진리'의 기준으로서의 perceptio clara et distincta: ego-cogito-cogitatum).

② 명석판명한 의식의 내용으로서의 신의 관념이 있다.

③ 원인 없이는 아무 것도 있을 수 없으므로[이것은 '자연의 빛'으로서 이성이 주는 명명백백한 사유법칙이다], 우리 의식 내에 있는 신의 관념의 내용을 있게끔 한 원인이 있어야만 한다.

④ 이 원인의 내용은 그 결과인 신의 관념의 내용보다 크거나, 적어도 같아야 한다.

⑤ 그런데 우리 의식 내에 있는 신의 관념의 내용은 무한하고 완전 독자적이며 전지전능하다는 것이다.

⑥ 무한하고 완전 독자적이며 전지전능한 신의 관념의 원인은 그러므로 '나' 자신이거나, 내 의식 내에 있는 또 다른 어떤 관념일 수가 없다. '나'나 내 의식 내의 또 다른 어떤 관념도 무한하고 완전 독자적이며 전지전능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⑦ 그러므로, 내 의식 내에 있는 신의 관념을 일으킨 원인은 내 의식 밖에 있는 어떤 것이어야만 한다.

⑧ 따라서, 내 의식 내의 신의 관념을 일으킨 원인으로서의 신은 내 의식 밖에 실재한다.

이밖에도 라이프니츠는, 개별 사물들은 각종의 결여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의 집합체인 세계는 조화롭게 운행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세계가 적절성의 원칙에 따라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며, 그런 세계를 만든 자는 그러므로 완전한 자라 하여 신의 존재를 입증하려 한다(Leibniz, Monadologie, §§54-57 참조).

버클리(G. Berkeley, 1685-1753)는, '지각된 것만이 실재'["esse is percipi"]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그런데 자연 세계에 있는 모든 사물들이 우리 인간이 지각할 때는 있다가 우리가 지각하지 않으면 없게 된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으므로, 실재하는 것은 우리가 지각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지각 중에 있어야 하며, 그 누군가는 언제나 모든 것을 지각하는 무한자여야 한다고 보아, 그 무한자를 신이라고 논변한다(Berkeley, A 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 I, sect. 3·89·147 참조).

그러나 이상의 여러 신의 존재 증명이 논리적으로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이들 증명은 선(善)을 상주고 악(惡)을 징벌하는 인격적 신의 존재를 입증하지는 않고 있다. 게다가 칸트가 전통적인 신 존재 증명은 논리적으로 허위임을 밝혀 냄으로써(Kant, K.d.r.V., A567=B595-A704=B732 참조), 그 후로 신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신의 존재의 입증은 그러니까 이제는 철학적 문제라기보다는 오로지 종교-신학적인 문제라 볼 수 있다. 또 신의 존재 증명이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원인 없는 존재자가 적어도 하나 있다'는 주장이 됨으로써, 존재론의 근본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가령 우리는, '신은 도대체 어떻게 전지전능하고 완전하게 선한 존재자일 수 있는가?'·'신은 도대체 무가 아니라 오히려 존재자인가?'라고 다시금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재자의 '본질'과 '존재'의 근거는 어떤 존재자가 아니고, 존재자의 '본질'이니 '존재'니 하는 것은 존재자를 인식하는 의식의 규정이라고 보는 견해가 생긴다. 그러나 이러한 파악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는, '의식되는 존재자'로 국한된다. '누구에게 의식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란 따라서 무의미한 말이 된다. 여기에서 이른바 '실재론'과 '관념론'의 대립을 다시 한번 보게 된다. 관념론의 입장에서 보면, 실재론은 알지도 못하면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철학함의 기본 태도인 확실성의 토대를 벗어나는 것이며, 반면에 실재론의 입장에서 보면, 관념론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말하면 무의미한 것을 '존재한다'고 인식한다는 모호성을 가지고 있다. 이 논의는 의식의 초월성에 관한 인식론적 쟁론에로 이어진다.

 존재자의 존재와 본질의 관계

존재자의 본질과 존재의 관계 문제는 유한자의 성격 반성에서 대두됐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존재자들은 일정 기간만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이 사실은, 어떤 무엇인 것이, 그러니까 일정한 본질을 가진 것이 존재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한다는 것을 뜻하며, 이것은, '존재'가 그 '무엇인 것'과 함께 하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문제는 특히 스콜라 철학에서 유한자의 그러한 유한성이 그것이 그 존재함에서 타자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유한자와 그것의 존재의 지주(支柱)인 근원적인 존재자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결부되어 생각되었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언제나 '무엇'으로서 '존재'하며, 그러므로 현실적 존재자는 그 '무엇' 즉 본질(essentia)과 그 존재(existentia)의 결합체(compositio)이며, 이때 본질과 존재는 실질적인 차이(distinctio realis)를 갖는다는 견해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무엇인 것'이 반드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 존재란 무엇인 것의 우연적 속성에 불과하다.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어떤 것은 여전히 무엇인 것이므로, 존재와 본질은 전혀 별개의 것(res)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구별을 통하여 단지 가능적이던 것이 현실적인 것으로 되고, 현실적으로 실재하던 것이 소멸하기도 하는 사태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서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6/70-1308)는 존재와 본질은 실질적인 구별이 아니라, '존재'란 무엇인 것의 양태(modus)라 하고, 수아레즈(Suarez, 1548-1617)는 '존재'는 그 자체로 무엇과 실질적으로 구별되는 것도 아니고 무엇인 것의 양태도 아니며, 무엇이 '있다'·'없다' 라는 것은 단지 개념상의 구별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수아레즈가 말하는 '개념'이 인간의 의식작용의 일종으로 해석된다면, 있음과 없음은 실질적인 것도 아니고 실질적인 것의 양태도 아니고 한낱 의식작용이 됨으로써, 그의 생각은 '존재'가 사고의 형식이라는 칸트의 사상으로 연결되어 간다. 그리고 이 문제 역시 실재론(→)과 관념론(→)의 갈등에 포섭된다.

 개별자와 보편자의 관계

공자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원효는 사람이다. - 공자, 소크라테스, 원효를 개별적 존재자라고 한다면, 이것들 모두를 포섭하는 '사람'은 보편적 존재자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개별자와 보편자의 관계는 무엇인가?

내 노트에 연필로 그린 정삼각형이 있다. 내 기하학 책에 인쇄된 둔각삼각형이 있다. 칠판에 분필로 그려진 예각삼각형이 있다. 나는 이제 이들 삼각형들을 모두 지워버린다. - 그러면 삼각형은 더 이상 없는가?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은 선이다. 부모에 대한 공경은 선이다. 이웃에 친절함은 선이다. ?? 이때 낱낱의 선한 행실들과 선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금강산은 아름답다. 대금 소리는 아름답다. 이사도라 던컨의 손끝은 아름답다. 고야의 '마야'는 아름답다. - 이들 아름다운 것들과 아름다움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와 같은 예들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개별자들과 보편자의 관계에 관해서, 이른바 보편자는 개별적인 것들의 공통 징표에 의한 한낱 개념 내지는 이념[이상]인가, 아니면 개별적인 것들은 보편자라는 원본(原本)을 다소간에 닮았거나 본뜬 것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이 물음에 대한 대립적 견해는 플라톤의 이데아(idea)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ousia]론의 차이에서도 이미 볼 수 있다.

개별자들은 끊임없이 발생하고 소멸하지만, 그 개별자들에 공통인 보편적 성질들은 존속한다. 뿐만 아니라, 개별자들은 그 보편성 가운데 약간씩을 결여한 채로 존재하며, 따라서 개별자는 보편자를 닮았다. 보편자는 영구불변적이고 그런 뜻에서 실재라고 한다면, 개별자는 이 실재를 닮았으나 명멸하는 것으로 그런 뜻에서 실재의 모상(模像) 내지는 현상이다. 이 보편자를 개별자들의 이데아로서 절대 불변적인 참된 것으로 파악하는 플라톤에 반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체만이 실재하는 것이며, 실재하는 것으로서 개체들은 고정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 중에서 자기 자신을 발전시키고 완성시켜 나간다고 본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보편자는 개별자들의 종(種)이나 유(類)의 표상으로 이해된다.

개별자와 보편자의 관계 문제는 중세에 논리학과 희랍적 형이상학과 기독교 신앙이 뒤섞여 하나의 격렬한 철학적 논쟁을 일으켰는데, 이를 보통 '보편논쟁'이라고 부른다.

논쟁은 에리우게나(J. S. Eriugena, 810-877)가 '실재론'적 견해를 피력한 데서 발단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보편자는 특수자와 개별자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출하고 자신 안에 포섭하는 보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으로 실재하는 것(res)이다. 보편자를 이렇게 실재하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이 입장을 '실재론'(realism: realis ← res)이라고 부른다. -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실재론은, 보통 관념론-실재론의 대립 개념에서 말하는 실재론과 다르다. - 이 보편자 실재론은 개념 간의 논리적 포섭 관계가 존재자의 산출 및 포함 관계라고 파악한다. 보다 더 보편적인 개념 즉 상위 개념이 층층의 하위 개념 즉 점점 덜 보편적인 개념들의 바탕에 놓여 있듯이, 보편적인 것은 개별적인 것의 기체(基體)로서 다양한 개별자들의 바탕에 놓여 있는 것이며, 개별자들은 이 기체의 여러 가지 상태(status)라고 생각된다.

보편자 실재론과는 반대로 보편자란 한갓 명사(名辭, nomen)에 불과하다는 견해가 있는데 이를 유명론(唯名論: 名目論, nominalism)이라고 일컫는다. 이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기반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가 실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경험되는 개체이며, 개체는 판단에서 '바탕에 놓이는 것'(hypokeimenon, substratum) 즉 실체(substantia)이며, 반면에 보편자의 논리적 의미는 판단에서 술어이다. 그러므로 보편자는 실체, 실재하는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여러 실재하는 개체들에 공통으로 붙여진 명칭 혹은 공통의 부호이며 낱말이고, 낱말이란 말소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말소리란 혀와 입이 만든 공기운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찍이 보에티우스(A. N. S. Boethius, 480-524)는 정의했다. 그러니까 개별적인 것만이 실제로 있는 것이다. 여러 개별자들을 통합해서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나, 하나의 사물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서 보는 것은 인간의 언어 습관 내지 사고 습관일 따름이며, 진짜로 있는 것은 개별자뿐이다.

보편자의 실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성주의(rationalism)로 기울듯이, 개별자만이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쉽게 감각주의(sensualism)로 기우는데, 그것은 개별자에 대한 인식은 언제나 감각경험에서 성립하는 반면, 보편자는 결코 감각적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데서 기인한다.

보편자 실재론과 유명론에 대해서 절충적 견해를 취한 사람들도 있는데, 아델라르드(Adelard of Bath, 1090-1160)와 아벨라르드(P. Abelardus, 1079-1142)의 생각이 언급될 만하다.

아델라르드의 견해는 보통 무차별주의(indifferentism)라고 일컬어지는데, 그것은 보편자는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개체 안에 내재한다(uiversalia in re)고 본다. 실재하는 것인 개별자는 자기 안에 다른 개별자들에게도 공통인 일정한 성질을 갖는다. 이 유사성(consimilitudo)은 개별자들에게 무차별적인 것이고, 유(類)는 그 안에 포섭되는 모든 종(種)들에, 종은 그 안에 포섭되는 모든 예(例)들에 무차별적으로 내재한다.

개념주의(conceptualism)라고 불리는 아벨라르드의 주장에 따르면, 보편자는 실재하는 것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갓 공기 운동으로서 말소리일 수만도 없다. 말소리가 여느 공기 운동과는 달리, 언표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보편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며, 이 보편적 의미란 다름 아닌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것들이 본질 규정에서 똑같은 것(conformitas)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립한다. 그러므로 보편자란 개별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본질 규정 즉 개념이다.

그러나 보편논쟁에서 문제가 되었던 보편자와 개별자는, 주로 피조물로서의 자연 존재자를 지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문제가 수학적 존재자나, 선의 이념이나 미의 보편성의 탐구에 관련이 될 때는 인간의 이성이나 감성의 기능, 특히 상상력이 하는 역할을 고려하여 보편자는 관념으로, 이상으로, 형식적 원형으로 이해되고, 개별자는 그 보편성의 얼마간씩을 구체적으로 현시 혹은 담지하는 것으로 납득될 수 있을 것이다.

 유한 존재자와 무한 존재자의 구별

봄이면 움트고 여름이면 짙푸르던 초목도 쓰러져 사라지고, 단단하기만 하던 바윗돌도 분해되어 사라지며, 사람들을 준엄하게 꾸짖고 각성시켰던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죽었듯이, 나도 죽고 너도 마침내 죽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죽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죽음은 존재의 끝을 의미하는가, 존재 방식의 변경인가? 과연 존재는 시작되고 끝나고 하는 것인가?

이런 물음들과 관련하여, 철학자들은 존재자들을 유한 존재자와 무한 존재자로 형식적으로 구분하곤 했다.

만약 무한 존재자가 있다면, 그런 존재자에게는 존재의 시작도 끝도 없을 것이고, 그 까닭인 즉 자기 존재의 원인을 자신 안에 갖음이고, 그래서 '자기 원인적 존재자', '자기로부터의 존재자'(ens a se)로 불리고, 일정 기간만 존재하는, 그러니까 존재에 시작과 끝을 갖는 존재자가 있다면, 그 까닭은 그 존재가 타자에 의존되어 있음일 것이고, 그래서 '타자로부터의 존재자'(ens ab alio)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다시금 신의 문제와 관련되어, 궁극적으로 저 '타자'는 신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혹은 모든 자연 존재자는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되, 자연 자체는 모든 존재자를 낳고 모든 것을 포섭하는 자이니, 자연이 바로 신이라고 파악되기도 한다.

'나'의 죽음, 우리 인간의 죽음의 의미 탐구에서 비롯해서 모든 생명 있는 것의 생명의 발생과 소멸의 의미의 문제로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는 문제가 바로 생명의 원리로서의 '영혼'의 문제이다. 이 문제가 인간 존재자에 국한되면, 마음(心)과 몸(身)의 구별 유무를 따지는 심리철학의 문제가 된다. - 마음을 축약 발음해서 '맘'이라 표기하고, 맘과 몸을 합해서 '뫔'이라고 표기하면, 이원(二元)적 선입견을 배제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마음-몸 곧, 뫔의 문제가 세계 내의 모든 자연 존재자에게 확대되면 이른바 정신과 물질의 문제가 된다.

 '있음'[존재]의 의미의 문제

존재론에 얽혀 있는 많은 문제들은, 반성해 보면, '있음'[존재]의 의미를 분명히 하지 않은 데서 유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무엇이 있다'고 할 때, '있다'는 무엇을 뜻하며, '없다'와 구별되는 징표 내지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이 없다가 있게 되고, 있다가 없어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음으로써 존재론에 얽혀 있는 문제들은 그 해답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무엇이 있다가 없어진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존재자[有]가 비존재자[無]로 전환되는 것이고, 없던 것이 있게 된다는 것은, 비존재자[無]가 존재자[有]로 되는 것이라면, 논리적으로 모순 관계인 이 두 항 사이의 상호 이월(移越)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물음에 대해서는 가능한 두 답이 고려될 수 있다. 첫째로, 발생 소멸은 오직 모든 존재자를 주재(主宰)하는 자의 창조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답이 유효하려면, 그 '주재자'의 존재가 납득되어야 한다. 둘째로 가능한 답변은, 발생 소멸이란, 한 시점에서 무엇[예컨대, 甲]이던 것이 다른 시점에서 그 무엇이 아닌 것[예컨대, 乙]으로, 혹은 한 시점에서는 무엇으로 인식될 만한 것이 없다가, 다른 시점에서는 무엇으로 인식되는 것이 나타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때엔 '무엇으로 있다'는 '무엇으로 있다고 인식된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없다'의 기준은 그렇게 인식하게 되는 이유로 대치된다.

용은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상의 동물로 '있고', 하느님은 존재하지만 초월적으로 존재하고, 삼각형은 칠판 위에 그리면 있다가 지우면 없어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경우에나 우리의 생각 속에만 있다. 이처럼 '있다'는 매우 다의적으로 쓰인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자들을 보편적으로 서술하는 최고의 유(類)적 술어들을 모아 '범주'(categoria)들이라고 불렀을 때, '있다'는 그런 범주의 하나로 생각되지 않는다. 후에 칸트는 '있다'를 양태의 범주로 파악하고, '있음'에는 세 가지 양태가 있으며, 그 양태는 존재자의 성질[속성]이 아니라, 사고하는 의식의 무엇인 것에 대한 태도라고 규정한다. 칸트가 제시하는 바, 의식이 무엇이 어떻게 존재하는가 태도를 정할 때 규칙으로 쓰이는 원리는 다음과 같다(Kant, K.d.r.V., A218=B265f. 참조).

첫째, 공간·시간상에 나타나고 수량으로 재어질 수 있고, 다른 것과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즉 힘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가능적으로 있다. 그런 것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능적 존재자다.

둘째, 감각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있다. 그런 것은 말하자면 현실적 존재자다.

셋째, 어떤 현실적인 것과의 관련이 인과관계나 상호관계적으로 규정되어지는 것은 반드시 있다. 그런 것은 이를테면 필연적 존재자다.

여기에서 제시되는 '있다'의 기준에 따라 존재자 개념을 가지게 되면 전통적인 철학자들이 존재론적 물음에서 함께 묻고자 했던 많은 '존재자'들이 존재론의 물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된다. 가령 영혼이니 신이니 하는 것 등은 더 이상 '존재자'라고 일컬어질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이 예는, 존재론의 물음은 근본적으로 '존재'[있음]의 의미 문제로 환원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참고문헌

공동번역 『성서』

老子, 『道德經』.

Anselmus, Proslogium.

Aquinas, Th., Summa Theologiae.

Aristoteles, Metaphysica.

Berkeley, G., A 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

Descartes,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__________, Principia philosophiae.

__________, Discours de la méthode.

Heidegger, M., Einführung in die Metaphysik(1935).

Kant, I., Kritik der reinen Vernunft(1781·1787).

Leibniz, G. W., Philosophische Schriften, Bd. I, hrsg. v. H. H. Holz, Darmstadt 1985.

_______________, Monadologie.

Platon, Phaidros.

Plotinos, Enneades.

Spinoza, B., Ethica.

Wolff, Ch., Philosophia prima sive Ontologia.

인식론(認識論. epistemologia)

'인식론'의 개념

반성적으로 문제의 근원을 밝혀 가는 작업인 철학의 한 분야로서 인식론(認識論, epistemologia, epistemology, theory of knowledge, Erkenntnislehre)은 인식의 가능 원리를 탐구한다. 인식론 곧 '인식에 대한 이론'은 인식에 대한 반성의 결실인데, 인식에 대해서 반성한다 함은 인식을 인식이게끔 해 주는 토대, 그것도 참된 인식 즉 진리를 진리이도록 만들어 주는 의심할 여지없는 확실한 기초를 추궁하고, 어떤 인식이 참이기 위한 조건들을 성찰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서 '인식'이라는 말은 '지식'이라는 말과 의미상의 차이는 없으며, 다만 '인식'이라는 명사는 '인식하다'는 동사를 동족어를 가지고 있는 데 반하여, '지식'은 그렇지 못한 관계로 통상 '인식'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인식론' 또는 '인식이론'을 '지식론' 또는 '지식이론'이라고 일컬어도 무방하다.

인식론의 형성

'인식론'이라는 말은 유럽 철학계에서는 19세기 중반에 생긴 것으로 조사되어 있고,8) 한국철학계에서도 20세기 초 서양철학이 유입되면서 여타의 철학 용어와 함께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흔히 서양의 근대철학을 '인식론 중심의 철학'이라고 일컫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인식론의 탐구는 '인식론'이라는 용어가 생기기 훨씬 이전, 적어도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부터는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얼마나 많이 거짓된 것을 참인 것으로 인정해 왔으며, 그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세운 것이 얼마나 의심스러운 것인가를 이미 여러 해 전에 깨닫고, 따라서 내가 앎들에서 언제라도 확고부동한 지주점을 정립하고자 한다면, 일생에 한 번은 이제까지 내가 받아들였던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뒤엎고, 최초의 토대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하였다."(Descartes,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I, 1) - 데카르트가 그의 저술 『제1철학에 관한 성찰』(1641)에서 서술한 이 자각에서 우리는 인식론의 발단을 본다.

이 자각으로부터 성찰을 시작한 데카르트가 얻은, 아르키메데스의 지렛점으로 비유되는, 모든 참된 인식을 위한 흔들리지 않는 최초의 토대는 다름 아닌 인식 작업을 수행하는 '나' 자신이다. 이 확실한 인식의 출발점을 발견했다고 자부한 데카르트 자신은 그러나 인식론을 본격적으로 전개시켰다기보다는 모든 인식이 기초할 만한 근거를 이용하여 고대이래 중세를 거치면서 여전히 '철학 즉 학문'의 중심 과제였던 형이상학적인 문제들, 예컨대 신의 존재 증명, 영혼의 불멸성과 자유 그리고 세계의 실재 구조를 밝히는 데로 다시금 되돌아갔다.

이 때문에 일부 철학사가들은 로크(J. Locke, 1632-1704)의 『인간지성론』(1690)에 와서 비로소 인식론의 제반 문제들이 기초부터 검토되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아닌 게 아니라 로크는 이 저술에서 인간 지성이 도달할 수 있는 참된 인식을 연구하면서 이 인식의 기원(起源), 인식의 대상(對象) 및 내용(內容), 참된 인식 곧 진리(眞理)의 의미,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인식의 한계(限界) 등을 차례대로 검토한다. 이 검토점들이 바로 오늘날까지의 인식론의 중심 주제들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인식론에서 문제가 되는 '인식'이란 '우리 인간에게 가능한 인식'이라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도 인식에 관한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그때 참된 인식의 원본 내지 척도로 고려된 것은 신체 없는 인간에게나 가능한 순수 오성적 인식, 계시(啓示)나 신통력에 의한 직관적 인식 내지 신(神)적 인식이었다. 그러나 이제 근대 인식론에서 문제 거리가 되는 '인식'은 수학적 인식이라든지 자연과학적 인식처럼 인간에 의해서 수행된다고 간주될 수 있는 인식이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이미 이런 모든 인식의 토대는 인간인 '나'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고, 로크 역시 이 점을 깨달음으로써 비로소 인식론적 작업이 착수되었던 것이다. 이런 인식론의 문제가 부상하게 된 사정을 우리는 로크가 『인간지성론』의 서두에 쓴 '독자에게 부치는 글'에서 읽을 수 있다.

"[나는, 모든 지적 작업에 앞서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의 능력을 심사하고 우리의 지성이 어떤 대상들을 다루기에 적합하고 적합하지 않은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 점을 나는 동료들에게 제안하였고, 그들은 기꺼이 동의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 점이 바로 우리가 첫 번째로 연구해야 할 문제라는 데 합의를 보았다."(Locke,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ed. A. C. Fraser, N. Y. 1959, vol. 1, p.9)

현대의 거의 모든 인식론적 쟁점의 출발점으로 여겨지고 있는 칸트(I. Kant, 1704-1804)의 『순수이성비판』(1781)도 이 로크적인 합의에 동참한 결과이다. 칸트 역시 참된 인식을 거론하기에 앞서, 도대체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A805=B833)라는 물음이 물어지고 대답되어야 한다고 보고, 이 작업을 우선적으로 수행한다. 그의 '이성 비판'은 곧 인식하는 나 즉 이성 스스로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인식 대상, 인식 범위, 인식 한계를 규정함이다. 이런 문제 연관에서 오늘날 인식론은 '인식 비판'(Erkenntniskritik)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인식론의 쟁점들

물음을 그 뿌리까지 반성하여 묻는 학적 반성 작업인 철학의 한 영역으로서 인식론은 '인간에게서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물으면서, 인식 일반에 대해서 1) 인식의 기원, 2) 인식의 대상 및 내용, 3) 참된 인식[진리](→)의 의미, 4)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 등을 해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철학적 노력의 이상은 언제나 진리 자체의 획득이지만, 현재까지의 철학적 작업의 결실은 제기된 철학적 물음에 대한 영구불변적인 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같은 답을 얻으려는 시도들이듯이, 인식론의 문제들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학설'들이 있다. 동일한 문제에 관해서 대립하는 여러 '설'이 있고, 그 '설들'이 상대의 약점을 자신의 강점으로 가지고 있으므로 해서 서로 양보 없이 맞서고 있다는 것은, 그 문제가 아직도 미결인 채 탐구 중에 있음을 시사하는 것일 것이다.

주제별로 대표적인 학설들을 살펴보자.

인식의 기원의 문제

인간의 무엇에 대한 인식의 단초는 바로 그 인식을 수행하는 인간 자신의 인식 능력이 구비하고 있는 선험적인 인식 원리라고 보는 이성론[理性論 또는 合理論, rationalism](→)과 인간에게서 모든 인식의 출발점은 감각경험이라고 보는 경험론[經驗論 empiricism 또는 感覺主義 sensationalism](??), 그리고 논리학·수학과 같은 형식적 인식에서는 이성론에 동조하면서, 자연 대상에 대한 인식에 관해서는 감각 재료가 선험적 인식 원리에 따라 규정됨으로써 인식이 생긴다고 보는 초월론[超越論 transcendentalism 또는 超越哲學 Transzendental-Philosophie, 批判哲學 Kritische Philosophie](→) 등이 서로 다른 이론을 세운다.

인식은 자기 인식이든 대상 인식이든, 일반적으로 '아직 모르는[未知의] 것에 관하여,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있는가를, 바꿔 말해 그것의 본질[本質, essentia, Wassein, Sosein](→)과 존재방식[存在, existentia, Wiesein, Dasein](→)을 파악하는 의식의 표상작용'이다. 이 의식 내적인 표상작용의 중요 요소는 감각과 사고이고, 그리고 그것은 외적으로 언표(言表, apophansis)된다.

이성론자들은, 인식 형성의 기본 요소인 사고는 선험적(a priori)인, 그러니까 이성 자체에 내재하는(immanent) 원리에 따라 기능하고, 언표 역시 일정한 이성의 규칙을 따를 때만 인식을 올바르게 표현할 수 있는데, 바로 저 사고의 원리와 언표의 규칙은 표리 관계에 있다고 본다.

언표란 '무엇에 관하여 무엇을 말함(legein)'인 바, 말함에서 그것에 관해서 말해지는 그 무엇, 즉 말함에서 밑바탕에 놓여지는 것[基體, subjectum]이 주어(主語)이고, 그 말해진 것[내용]을 술어(述語)라 한다. 이 주어와 술어가 결합하여 말이 되게끔 해 주는 것이 논리[logos]이다. 이 논리의 최상의 규칙이 모순율(矛盾律, principium contradictionis)(→)이다. 주어와 술어는 서로 어긋나게 말해(contradicere)져서는 안 되고,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표상에도 이 표상과 어긋나는 표상은 덧붙여질 수 없다."

어떤 언표도 이 모순의 규칙을 어기고서는 참일 수 없다. 사람은 모순적인 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할 수 없는 것, 즉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실제로 있을 수도 없다. 그러니까 모순율은 사고와 언표, 그리고 인식이 참이기 위한 필요조건[conditio sine qua non]이자, 무엇이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이성론자들은 보통 이런 사고의 최고 원리로서 이 모순율과 "근거 없이는 아무 것도 없다(Nihil est sine ratione)"는 근거율 (혹은 충분이유율, principium rationis sufficientis)(→)을 든다(Leibniz, Monadologie, §31-§36 참조).

이에 반해 경험론자들은, 인간의 마음은 감각경험 이전에는 한낱 "백지"(白紙, tabula rasa, white paper)라고 주장한다(Locke, Essay, Bk Ⅱ, chp. 1, sect. 2 참조). 로크에 따르면, 사람은 "이성과 인식의 재료들"은 모두 "경험으로부터" 얻는다(같은 책, Ⅱ, 1, 2 참조). 이때 경험이란, 기본적으로 감각경험을 뜻하며, 그래서 보통 경험주의 원칙은, "감각 중에 있지 않던 어떠한 것도 지성 중에 있지 않다."(Nihil est in intellectu, quod non fuerit in sensu)고 표현된다. 그러니까, 철저한 경험론에 의하면, 인간의 사고 기능은 순전히 경험에 의존적이며, 일견 필연적인 사고의 법칙 같은 것도 습관적인 경험의 산물에 불과하다(Hume, 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sect. V, part Ⅱ 참조).

칸트에 의해 대변되는, 이른바 비판철학의 초월론은 이성론과 경험론의 화해를 시도한다. 칸트는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인식 모두가 바로 경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Kant, K.d.r.V., B1)고 통찰함으로써, 한편으로 경험론의 주장을 수용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이성론의 입장에 선다. 칸트는 라이프니츠(G. W. Leibniz, 1646-1716)와 마찬가지로, 감각경험에 있지 않던 어떠한 인식 내용도 지성[이성] 중에 있지 않음을 승인하지만, 그러나 "단, 지성 자체는 제외하고(excipe: nisi ipse intellectus)"(Leibniz, Nouveaux Essais sur L'Entendement Humain, II, 1, §2)라는 단서를 붙이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칸트에 따르면, 모든 인식은 재료[내용, Materie]와 이 재료를 정리 정돈하는 형식[틀, Form]을 요소로 해서 이루어지거니와, 인식이 사고의 산물인 한에서 인식의 형식은 사고의 형식이며, 이 사고의 형식은 이미 지성에 "예비되어 있다."(Kant, K.d.r.V., A66=B91) 그러니까, 인간의 모든 인식의 밑바탕에는 선험적인 사고의 형식이 놓여 있다. 자연적 대상에 대한 인식은 그 재료가 감각경험이기 때문에 경험적 인식이라고 불려지고, 예컨대 수학적 인식처럼, 그것의 재료가 결코 감각내용을 담고 있지 않은 순수한 것일 때, 이런 인식은 선험적 인식이라고 불려질 수 있다. 경험적인 재료이든 선험적인 재료이든 인식의 재료가 주어지면, 이 재료들을 종합 정리하는 기능인 사고작용을 통해서 한 인식이 성립한다. 이 사고작용은 그런데 일정한 형식에 따라 이루어진다. 예컨대, '∼은 ∼이다', '그러므로', '∼과 ∼은 (지금 거기에) 있다' 등등. 이러한 형식은 어떠한 감각기관을 통하여 수용된 것도 아닌데, 사고작용의 바탕에 있다. 그래서, 칸트는 그것들을 사고 기능인 지성이 스스로 산출해 낸 개념으로 보고 "순수 지성 개념"이라 부르며, 사고 작용의 틀이라는 점에서는 "범주"(範疇, catergoria)라고 칭한다.

이런 선험적 기능 개념 가운데 근간이 되는 것을 칸트는 4종 12개로 파악한다. ① 양(量)의 규정에 쓰이는 '하나'[단일성]·'여럿'[다수성]·'모두'[전체성], ② 질(質)의 규정에 쓰이는 '∼(이)다' 또는 '∼하다'[실질성]·'∼ 아니다' 또는 '∼ 않다'[부정성]·'∼은 아니다' 또는 '∼는 않다'[제한성], ③ 관계(關係)의 규정에 쓰이는 '∼은 ∼이다(하다)'[실체성과 속성]·'∼때문에 ∼이다(하다)'[인과성]·'서로 때문에 ∼이다(하다)'[상호성, 교환적 인과성], ④ 양태[存在機能]의 규정에 쓰이는 '있을 수 있다'[(존재) 가능성]·'실제로 있다'[현존성, 현실성]·'반드시 있다'[(존재) 필연성]가 바로 그것이다.

이 범주들에 의거해 주어지는 잡다한 자료를 통일하는 작용 곧 사고는 판단으로 표출되고, 그래서 판단 역시 4종 12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즉 모든 판단은 ① 양의 면에서는 단칭판단·특칭판단·전칭판단으로, ② 질의 면에서는 긍정판단·부정판단·무한판단으로, ③ 관계의 면에서는 정언판단·가언판단·선언판단으로, ④ 양태의 면에서는 미정판단·확정판단·명증판단으로 나누어진다.

판단의 방식으로 인식이 이루어지고, 판단은 범주에서의 통일작용이므로, 순수 지성 개념인 범주가 인식을 근원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 자신은 선험적인 표상이면서, 즉 경험에 앞서 있으면서도 경험을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것을 칸트는 '초월적'(transzendental)(→)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인식은 의식의 초월성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다. 초월적인 의식 기능에는, 칸트의 파악에 따르면, 순수 지성 개념 외에도, 순수 감성의 형식인 공간·시간 표상이 있다.

공간·시간은 무엇인가?

공간·시간의 성격에 관한 전통적인 견해는 크게 보아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공간·시간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견해다. 모든 존재자들을 자신 안에 담고 있는 이를테면 '그릇'으로서 공간·시간을 이해하는 이런 생각을 우리는 뉴턴(I. Newton, 1643-1727)의 소위 절대공간-절대시간론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공간·시간이 절대적으로 즉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때 '존재하다'가 어떤 뜻인가이다. 만약 그것이 논리적으로 생각 가능하다는 뜻이라면, 논리적 사고 가능성은 곧 존재 가능성이라는 등식을 함축함으로써 존재론적 쟁점에 빠져든다. 논리적 사고 불가능성은 존재 불가능성을 함축하지만, 그러나, 논리적 가능성 즉 무모순성이 존재 가능성까지를 함축하지는 않는다. 공간·시간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감각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면, 문제는, 어떤 감각기관을 통하여 공간·시간이 감각되는가이다. 공간·시간이 어떤 감각기관을 통해서도 감촉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둘째로, 공간·시간은 그 자체가 존재자는 아니고, 존재자의 성질 내지는 존재자들간의 질서 관계라는 견해가 있게 된다. 이 두 번째 견해는 다시금 존재자가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더라도 존재자에 속하는 성질 내지는 질서 관계로 보는 편과, 존재자가 감각적으로 인식되는 한에서, 그 존재자가 가지는 성질로 보는 편이 있다. 앞서의 생각은 예컨대 물질적 실체의 본성을 '연장성'으로 파악한 데카르트나 로크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만약 공간·시간이 이런 것이라면, 가령 공간 표상을 전제로 하는 기하학이 연장성을 가지는 사물들에 대한 감각경험을 토대로 한 학문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데, 이것이 문제점으로 등장한다. 뒤의 생각, 즉 공간·시간은 존재자가 감각 지각되는 한에서 존재자의 성질이라는 생각은 라이프니츠나 칸트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양자간에도 차이가 있어서, 라이프니츠에게서 공간·시간은 감각경험에 의한 표상이고, 그래서 예컨대 기하학이 경험학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다. 칸트에게서는 공간·시간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감각을 통해 존재자를 수용하는 감성적 의식이 선험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념이지만, 이 관념의 질서에 따라서만 존재자가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는, 즉 현상으로서의 존재자의 틀[형식]로 이해된다. 이때 기하학은 선험적인, 말하자면 관념적인, 그러니까 형식적인 인식 체계로 파악된다.

그래서, 칸트의 파악에 따르면, 선험적인 표상인 공간·시간의 질서 위에서 갖가지 감각재료들이 수용되고 이 수용된 감각질료들이 범주로 기능하는 순수 지성 개념에 따라 종합 통일됨으로써 우리에게 한 존재자가 무엇으로 있게 된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무엇인 한 존재자를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 인식에서 그리고 그 인식에서 인식된 존재자는 인식하는 의식의 선험적 표상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초월론에 따르면, 사고의 형식인 범주는 인식의 성립 조건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인식에서 인식되는 대상의 성립 조건이기도 하다.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바로 그 인식에서 인식된 존재자의 가능 조건인 것이다.

이로써 칸트는, 진리를 "사물과 지성의 일치"(adaequatio rei et intellectus)라 규정하고(Th. Aquinas, Quaestiones disp. - De veritate, qu. 1, art. 1 참조), 인간의 참된 사물 인식은 "인식자의 인식 대상에로의 동일화"(assimilatio cognoscentis ad rem cognitam)로 해석해 오던 전통을 벗어나, 참된 인식은 "존재자의 지성에의 합치"(convenientia entis ad intellectum)로 인하여 성립한다는 사상을 표명하여, 이른바 인식자-인식 대상 사이의 '코페르니크스적 전환'(Kant, K.d.r.V., BXVI 참조)을 수행한다. "창조될 사물의 神의 지성에의 합치"(adaequatio rei creandae ad intellectum divinum)를 전제로 "인식되는 사물의 형식은 인식하는 자 안에 있다"(Th. Aquinas, Summa Theologiae, I, qu. 16, art. 2, 2)고 생각했던 전통 형이상학을, 순수 이성 비판을 통해 인간의 사물 인식에 대해서도 적용함으로써, "사물과 지성의 일치"를 "[인간] 지성과 [인간 지성에 의해 인식되는] 사물의 동일형식성(conformitas)"으로 해석하고, 사물을 인식하는 인간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 사물의 창조자"(Kant, 『전집』 XV, 조각글 254 참조)로 격상시켰다.

인식의 대상 및 내용의 문제

인식 작용의 상관자로서 인식 내용이 있고, 이것이 바로 인식 대상이라고 보는 관념론(觀念論, idealism)(→) 내지 현상론(現象論, phenomenalism)과 인식 작용이란 인식 대상을 수용하는 매개의 기능으로서 인식 대상은 인식 작용에 독립해서 실재한다고 보는 실재론(實在論, realism)(→)의 대립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실재론의 형태에도 여럿이 있지만, 실재론의 주장은 근본적으로는 상식적 직관에서 출발한다. 외적 대상(external object)에 대한 인식은, 외적 대상이 우리 마음(mind)에 인상 내지 관념들(ideas)을 불러일으키고, 이 관념의 중개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외적으로 실재하는 사물에 대한 인식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재론에 의하면, '실재하는 사물'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기 이전부터,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든 말든, 인식하는 우리에 독립하여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 인식은 우리의 관념들과 사물들의 실재 사이에 합치가 있는 한에서만 실재적이다."(Locke, Essay, Ⅳ, 4, 3) 그리고 이 실재적 인식만이 참된 인식 곧 진리이다.

이런 실재론은, 인식은 실재하는 사물[대상] - 인식하는 주관[마음 또는 의식] 사이에서 성립하는데, 이 양자를 매개하는 것이 관념 내지는 표상임을 말함으로써, 인식 형성의 세 요소 이론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모사설(模寫說, copy theory, Abbildtheorie)과 표상설(representative theory)을 함축한다.

이에 대해서 관념론는, 실재론이 전혀 명증적이지 못한 가정 위에 서 있다고 논박한다. '인식하는 의식에 독립적인, 인식하는 자가 인식하거나 말거나 그 자체로 실재하는 사물'이라는 개념은 순전히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경우에라도, '우리가 인식하는 한'에서만 무엇엔가에 대하여 권리 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버클리(G. Berkeley, 1685-1753)는 "존재는 지각된 것이다(esse is percipi)"(Berkeley, A 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 I, 3)고 확언한다.

관념론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모든 인식은 그리고 모든 주의 주장은 명증적으로 확실한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데카르트의 통찰을 존중한다. '나는 존재하고, 나는 무엇인가를 의식하고 있으며, 그런 만큼 나에 의해 의식된 것[ego-cogito-cogitatum] 역시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념론자들은 인식의 두 요소, 곧 인식하는 자와 그에 의해서 인식된 것[내용]만을 말한다. 이른바 '실재하는 사물'이란, 우리 의식에 독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에 의해서 '실재하는 것이라고 인식된 것', 그러니까 그렇게 인식하는 우리에게 의존되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는 칸트뿐만 아니라, 후설(E. Husserl, 1859-1938)의 현상학(Phänomenologie)도 동조한다고 볼 수 있다.

참된 인식 곧 진리의 문제

인식이 무엇에 대한 인식이냐에 따라 여러 가지 이론이 있는데, 무모순성과 체계 내 일관성을 진리의 척도로 보는 정합설(整合說, coherence theory), '인식의 사실과의 일치'를 진리로 보는 일치설[一致說, 合致說 또는 對應說, correspondence theory](→), 실생활에서의 유용성을 진리의 의미로 보는 실용설(實用說, pragmatism), 인식하는 자들 사이의 합의 내지는 일반적 의사 소통을 진리의 기준으로 보는 상호주관성이론(相互主觀性理論, Intersubjektivitättheorie) 내지는 합의설(合意說, Konsensustheorie) 등이 각기 특장을 가지고서 서로 다른 의견을 내세운다.

이 가운데서도 일치설은 특별히 언급할 만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식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사실' 내지 '실재'를 문제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타의 진리론들은 사실상 이 일치설이 안고 있는 문제점으로 인해 대안적으로 고려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식이 '실재와 합치'하고 '사실과 일치'할 때, 그것이 참임은 자명하고, 사실 이것은 진리의 정의(定義, defintio)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그 '사실과의 일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사실[실재]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을 묻자마자 부상한다. 인식은 미지의 것을 지향하고 있고, 그 미지의 것은 인식을 통하여 비로소 우리에게 알려진다. 그러니까, 인식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이 다름 아닌 '사실'이고 '실재'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인식한 것[내용]이 바로 사실이고 실재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도대체 '인식과 실재의 합치' 여부를 어떻게 가려낼 수 있을까? 그것이 만약, 어제 밤 어둠 속에서의 나의 인식과 오늘 낮 밝은 데서의 나의 인식, 한 사람의 인식과 여러 사람의 인식, 상식인의 인식과 과학자의 인식을 대조해 봄으로써 드러나는 것이라 한다면, 이 대조는 단지 인식과 인식을 비교해 본 것에 불과 하니, 그것으로써 '사실'과의 부합을 얘기할 수는 없게 된다.

우리는 분명 "참된 인식[진리]이란 실재와 합치하는 인식이다"는 진리의 정의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참된 인식의 이상을 표명할 뿐, 현실적으로 진리의 척도로 기능하는 것은, 어떤 인식의 유용성, 또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 대한 설득력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고 나면, '사실' 또는 '실재'라는 말로써 상정했던 것, 곧 인식하는 자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불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는 개념이 그 내용을 잃을 위험에 처한다. 인간의 지식의 역사는 어떤 지식의 유용성과 사람들에 대한 설득력이 변화함을 보여 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이에 의거하면 영구불변의 진리라는 개념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진리론은 다른 인식론의 문제들, 특히 관념론/실재론과 얽혀 있고, 또한 진리 불변이론과 가변 이론은 인간 인식의 한계에 관한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인식(능력)의 한계 문제

인간의 인식 능력은 구조적으로 일정 불변하고 한계를 가지며 일정한 대상 영역을 넘어서면 아무런 의미 있는 인식도 갖지 못한다는 인식 형식의 한정이론(限定理論)과 인식 내용의 유한성이론[有限性理論 또는 不可知論, agnosticism]과 인간의 인식 능력이 현재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단계적으로 진보하기 때문에, 원리상 인식의 한계는 없다는 인식진화론(認識進化論, evolutionäre Erkenntnistheorie) 또는 변증법(Dialektik)적 이론(辨證法的 理論)의 대립이 있다.

대상에 대한 현재의 인간의 인식이 완벽하다고는 아무도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불가지론자는, 인간은 원리 상 그 인식 능력에 한계가 있는 만큼, 오로지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변증법론자들은, 우리의 인식은 많은 착오를 겪으면서 종국에는 진상(眞相)에 이를 것이라고 본다.

헤겔(G. W. F. Hegel, 1770-1831)에 의하면, 대상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주관이라고 하는 인식자에 의존하는 한, 그리고 이 인식자가 신과 같은 완전함을 가지고 있지 못한 한, 그 인식은 언제나 착오일 가능성을 가진다. 그러한 인식자인 인간의 대상 인식은 그래서 반복되는 착오의 길이기도 하고 "회의(懷疑)의 길"이고 "절망의 길"(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Gesammelte Werke[GW], Bd. 9, hrsg. v. W. Bonsiepen/ R. Heede, Hamburg 1980, S. 56)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착오와 회의와 절망의 길은 의식이 그에게 다가오는 존재자를 관통하는 즉 경험(經驗)하는 길이며, 그 길의 종착점은 착오를 범하면서도 자기 교정 능력이 있는 의식이 마침내 존재자와 하나가 되는 지점이다. 이런 뜻에서 의식의 경험은 진리를 향상 "의식 자신의 도야(陶冶)의 역정(歷程)"이다.

인간의 인식의 수준이 이러한 만큼,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식의 원리에 대한 이론으로서 인식론도 논의의 도정에 있으며, 논제마다 서로 엇갈리는, 서로 얽혀 있는 숱한 학설들로 구성되어 있다.

참고문헌

Aquinas, Th., Quaestiones disp. ― De veritate.

________, Summa Theologiae.

Berkeley, G., A 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

Descartes, R.,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Hegel, G. W. F., Phänomenologie des Geistes, Gesammelte Werke, Bd. 9, hrsg. v. W. Bonsiepen/R. Heede, Hamburg 1980.

Hume, D., 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Kant, I., Kritik der reinen Vernunft.

_______,Gesammelte Schriften[『전집』], hrsg. v. der Kgl. Preuß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 // v. der Deut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 zu Berlin, Bde. I-XXIV, XXVII-XXIX, Berlin 1902∼.

Leibniz, G. W., Nouveaux Essais sur L'Entendement Humain.

Locke, J.,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ed. A. C. Fraser, N. Y. 1959.

진리(眞理. veritas)

진리에 대한 철학적 물음

사람의 의식 활동 방식을 지(知)·정(情)·의(意)로 구분해보면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최고 가치는 진(眞)·선(善)·미(美), 이렇게 셋이 있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우리말 사용 예에서는 이 세 종류의 가치가 '참'의 가치로 통합되기도 한다. 우리는 "사각형은 네 변을 갖는다"는 명제는 '참이다'고 말하며, 목숨 걸고 불의와 싸우는 사람의 행실은 '참되다'고 일컫고, 예쁜 아가씨더러는 '참하다'고 말한다. 이런 한글말 용례는 우리 한국 사람은 인간은 궁극적으로 '참'의 가치를 추구한다고 이해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이 보이며, 그런 한에서 '참임'·'참됨'·'참함' 사이에는 어떤 통일 원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또한 이 세 종류의 '참'이 구별되는 한에서 이 세 가지는 각기 다른 영역, 다른 문제 지평을 갖는 것으로도 보인다. 보통 말하는 '진리'는 이렇게 구별되는 '참임'의 가치에 상응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또한 '진리'라는 말 역시 매우 다양하게 사용한다. - "진리를 따라 살자!" "인생의 진리를 터득하도록 노력하라!" "인과응보는 만고불변의 진리다." "사람이 더불어 사는 존재자라는 말은 진리이다." 등등. 게다가 어떤 이는 "진리[참임, 참인 것]는 전체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오로지 "주체만이 진리 중에 있다"고 맞선다. 수학자들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2직각임은 진리다"라고 말하고, 과학자들은 "물은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이며,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가 36만 Km임은 진리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기독교 『성서』에서도 진리에 관한 잦은 언급을 본다. 예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복음 8:33), "나는 […] 진리다"(요한복음 14:6), "나는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요한복음 18:37)고 말한다.

도대체 '진리'란 무엇인가? - 이것은 진리임을 자칭하는 예수에게 빌라도가 답답해하면서 제기했던 물음일 뿐만 아니라 진리를 탐구한다고 자임하는 논리학자들을 자주 난처하게 만드는 물음이다. 이 답답함을 풀고, 난처해하는 까닭을 알기 위해서는 이 물음의 함축부터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낱말 '진리'는 사용되는 문맥에 따라 여러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 참인 것, 참 이치, 참 도리, 참 지혜, 언제 누구에게나 보편 타당한 지식, 실재에 관한 옳은 인식 등등을 뜻한다. 그러니까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참 이치란 무엇인가?', '참 도리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 것이다. '어떠어떠한 것이 진리다'고 말해질 때, 이에 대해서 제기되는 '진리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이 반문은, '그 어떠어떠한 것'이 그 말처럼 과연 진리인가 아닌가를 따져 묻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진리'가 무엇이기에 그러한 것을 진리라고 하는지를 추궁하는 것이다. 즉 이 물음은 어떤 것이 진리냐 아니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의 진리 여부는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우선 '진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반성적으로 묻는 철학적 물음이다. 어떤 것이 진리인가 아닌가는 일상 생활의 주 관심사 중의 하나요, 그 관심에는 과학적 탐구가 부응한다. 그래서 과학은 '진리의 학문'이라고 말해진다. 이에 반해서 '도대체 진리란 무엇인가?'는 어떤 것이 진리인가 아닌가를 검토하기 위해 미리 요구되는 진리의 의미 규정 내지는 진리의 기준을 모색하는 관심으로, 이 관심에 부응하는 것이 철학적 탐구로서의 인식론(→)이다. 그러므로 인식론은 어떤 구체적인 진리를 발견해 내는 학문이라기보다는 '진리의 의미의 학(學)' 즉 '진리의 근본학'이다.

진리의 물음에 있어서 철학적 관심은 진리라고 주장된 어떤 내용이 그 주장된 바대로 과연 진리인가를 판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판정을 할 수 있기 위한 전제 조건, 즉 어떤 것의 진리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는 보편적 조건을 밝히는 데 있다. 그러니까 철학적 탐구로서 인식론의 현안 문제는, '인과응보'가 과연 인생의 참 이치인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2직각이다'는 명제가 과연 참인가, '예수'가 과연 진리인가가 아니라, 도대체 '진리', '참임', '참 이치'라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그래서 '진리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물음은 그 안에 적어도 다음의 세 물음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① 무엇이 진리일 수 있으며, 그것은 어디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② 진리의 기준 내지 근거는 무엇인가?

③ 어떤 의미에서 '진리'인가?

무엇이 진리일 수 있으며, 그것은 어디서 드러날까?

우리가 진리를 묻고 생각하고 추구하는 한에서, 그리고 이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면, 진리는 말해지고 생각되고 인식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이런 이해에서 말이나 생각[思考]이나 인식에서 진리는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맞는 말, 올바른 사고, 참 인식에서 진리는 드러난다. 그런데 반성해 보면 말은 사고나 인식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사고나 인식 그리고 이것들의 언표에서 드러난다. 다시 말하면 진리[참]인 것은 사고 인식 혹은 언표의 형식을 빌어서 드러난다.

그러나 "말로 표현할 수 이치는 진짜 이치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 老子, 『道德經』 一 참조] 따위의 말이 함축하는 바처럼 혹시 생각될 수도 없고 인식될 수도 없으며 말해질 수도 없는 진리 내지 진상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차피 그런 것에 관해서는 우리로서는 알지도 못하고,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을 터이니까 논외로 하고,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우리 인간의 앎 중에서 드러나는 진리, 말로써 표현되는 인식이 담고 있는 진리의 의미와 기준 혹은 근거만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일단 진리의 의미를 이렇게 제한하고서, 우리는 모든 인식[思考]을 논리적 인식과 대상 인식, 곧 형식적 인식과 실질적 인식으로 구분하고, 그 각각에서 참인 인식 즉 진리와 얽혀 있는 문제들을 밝혀 보기로 하자.

형식적 인식과 진리

참된 사고를 위한 두 선험적 원리

옛날 "초 나라에 방패와 창을 파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의 방패는 견고하여, 어떤 것도 이것을 뚫을 수 없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또 그의 창을 가리키면서 '나의 창은 예리하여, 무엇이건 뚫는다'고 자랑하며 말하였다. 이에 어떤 사람이 '당신의 창으로 당신의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는가?'하고 물으니, 그 사람은 대답할 수 없었다."(『韓非子』, 亂 一)

모순고사(矛盾故事)라고 불리어지는 이 이야기에서 그러면 그 초 나라의 무기 상인은 왜 대답을 할 수 없었겠는가? 그것은 '내 방패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뚫리지 않는다'는 언표와 '내 창은 무엇이건 다 뚫는다'는 언표가 서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두 언표는 문자 그대로 모순의 관계에 있고 자가당착(自家撞着)적이기 때문이다. 서로 걸맞지 않는 말, 모순 관계에 있는 언표들 가운데에는 진리가 있을 수 없다. 자기 내에 모순을 갖는 말은 결코 어떠한 진상(眞相)도 드러낼 수가 없다.

언표에서 무엇인가 참다운 것이 드러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드러냄[表現]의 매체인 말이 우선 말이 되어야 한다. 말이 말이 되도록 하는 것, 말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논리(論理)다. 그래서 말이 안 되는 말은 비논리적인 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말은 생각의 표현 매체이므로 말을 말이 되도록 하는 논리는 다름 아니라 생각을 생각이 되도록 해주는 것이다. 생각 같지 않은 생각을 그래서 사람들은 비논리적 사고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이 "사각형은 둥글다"고 말하면, 이 말이 거짓임을 우리는 직각적으로 안다. 또한 모순고사에서의 초 나라 상인처럼 누군가가 "내 방패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뚫리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 "내 창은 어떤 방패건 다 뚫을 수 있다"고 말하면, 이 두 언명이 동시에 참일 수는 없다는 것을, 즉 적어도 한쪽 말은 거짓이라는 것을 우리는 직각적으로 안다. 여기서 '직각적으로 안다' 함은, 어떤 실험 확인을 필요로 하지 않은 채로 안다는 뜻이다. 그 '방패'를 향해 주위에 있는 모든 날카로운 사물을 던져 본다거나, 그 '창'을 가지고 주위에 있는 모든 방패들을 찔러 본 후 사실의 확인을 통해 아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누가 "나는 어제 둥근 사각형을 보았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가 명백히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직각적으로 안다. 이 '직각적인 앎'은 이제까지 누구도 둥근 사각형을 본 적이 없다는 경험 사실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라, '둥근 사각형'의 실재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언표도 '모순의 규칙'[矛盾律, principium contradictionis]을 어기고서는 참일 수 없다. 왜 그런가? 우리는 모순적인 것을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생각할 수 없는 것, 즉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어떤 진리를 지시할 수도 없다. 논리적으로 가능하다고 해서 실제로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실제로도 있을 수 없다. 모순율은 생각과 말[언표]이 참이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며,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인식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다. 그래서 무모순성(無矛盾性)은 존재의 최소한의 조건이기도 하다.

"사각형은 둥글다"는 언표가 허위인 까닭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아는 한 세상에 둥근 사각형이란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해서가 아니라, '사각형'에는 그것의 본성에 모순되는 '둥글음'이라는 속성[술어]이 결코 속할 수 없다는 우리의 사고의 논리 규칙에 의거해서 그러하다. 세상에 둥근 사각형이 있을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우리는 둥근 사각형을 결코 발견할 수 없는데, 이 필연적인 사실은, 지금까지 축적되어온 우리의 경험이 그렇게 일러 주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의 사고 방식이 그것을 허용치 않는 데에서 기인한다.

이처럼 우리의 사고 방식에는 일정한 틀[형식, 규칙]이 있고, 이 틀 자신이 진리인 근거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즉 선험적으로 자명하기 때문이다. 이성의 원리상 우리의 사고 작용에는 몇몇의 선험적인 따라서 자명한 - 이성 자신의 성격상 그렇다는 것 이외의 어떤 다른 근거도 제시될 수 없는 - 규칙이 있으며, 이 규칙에 맞게 생각하고 말할 때에만 거짓을 벗어나 진리를 개진할 수 있다는 철학적 통찰을 사람들은 이성론(理性論)(→) - 혹은 보다 널리 사용되고는 있지만 그다지 적절한 명칭은 아닌 합리론(合理論) - 이라고 부른다. 이성론자들은 이런 사고의 최고 원리로서 보통 모순율과 근거율(혹은, 충분이유율, principium rationis sufficientis)을 든다. 우리의 일체의 사고는 최소한 이 두 규칙에 맞아야만 허위를 면할 수 있고, 이 두 규칙에 맞지 않는 어떤 존재도 있을 수 없다.

모순율과 모순의 소재

모순율은 이미 『한비자(韓非子)』에서도 논리적 언표의 원리로서 파악되었으며 또한 서양의 다수 철학자들도 이 규칙의 자명성을 일찍부터 납득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322/1)는 "어떤 것이 동시에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Metaphtsica, 996b 28ff.), "어떤 것이 동일한 것에 동일한 관계에서 동시에 속하며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Metaphysica, 1005b 19ff.)고 지적함으로써, 논리 규칙으로서 또한 생각 가능한 존재자의 원리로서 모순율을 제시한다. 인식의 최고 원리로서의 모순율은 라이프니츠(G. W. Leibniz, 1646-1716)를 거쳐 칸트(I. Kant, 1724-1804)에 이르러 모든 형식적[분석적] 인식의 규준(規準)으로 규정된다.

말 가운데에서도 '무엇에 관해서 무엇을 말함'이 언표(言表)다. 말함에 있어서 그것에 관해서 말해지는 그 무엇, 즉 말함에서 밑바탕에 놓여 있는 것[基體]이 주어(主語)이고, 그 말해진 것[내용]을 술어(述語)라 한다. 그러니까 언표에서의 논리란 주어와 술어가 말이 되게 결합시켜 주는 원리이다. "사각형은 둥글다"는 발언이 말이 안 되는[非論理的인] 것은 그 주어와 술어가 서로 걸맞지 않게, 바꿔 표현하면, 어긋나게 말해[contradicere, widersprechen]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모순율은 "어떤 표상에도 이 표상과 어긋나는[모순되는] 표상은 덧붙여질 수 없다"고 정식화될 수 있다. 또한 존재자에 관한 언표에서 주어가 존재자를 지시한다면, 술어는 바로 그 존재자의 성질[속성]을 지시할 것이다. 그래서 모순율은 "어떤 것에도 그것과 모순되는 술어[속성]는 속하지 않는다"는 정식으로 표현된다.

'사각형은 둥글다' 혹은 '둥근 사각형' 등은 말이 안 되는 말, 비논리적인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순율을 지키지 않은, 다시 말하면 자기 내에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사례는 말 가운데 모순이 있음을, 모순적인 언표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 경우 그 말은 말이 안 되는 말, 거짓된 말이 된다. 그러니까 어떤 말이 진리를 담기 위해서는 그 말 안에 자기 모순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둥근 사각형'은 어떤 실재를 지시할 수 없는 말이라 생각하며, 누군가가 "나는 지금 나의 책상 위에서 둥근 사각형을 본다"고 말하면, 그 판단 내지 인식은 잘못된 것이 자명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자명하다 함은, 우리가 그의 책상 위에 과연 둥근 사각형이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할 필요 없이 즉 선험적으로 그의 인식의 허위성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그것은 자기 내에 자기와 모순되는 속성을 갖는 존재자란 있을 수 없다고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이나 판단, 인식은 경우에 따라 자기 내 모순을 포함할 수 있고, 그럴 경우 우리는 그것을 잘못된 말, 잘못된 판단, 잘못된 인식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에서 '잘못된'이라는 수식어가 부가될 수 있는 존재자란 아예 있을 수 없다. 즉 '둥근 사각형'은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동근 사각형은 잘못된 사각형이 아니라, 사각형이 아닌 것이고, 아니 도대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따라서 그런 사각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이치는 앞서의 모순고사의 내용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무엇이든 다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에 의해서도 뚫리지 않는 방패'는 공존할 수 없다. 우리는 이것을 실험적 확인을 통해서 비로소 아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으로 안다. 누군가가 "내 오른손에는 무엇이든 다 뚫을 수 있는 창이 있으며, 내 왼손에는 무엇에 의해서도 뚫리지 않는 방패가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때 그의 두 말 사이에는 모순 관계가 성립하고 따라서 그 두 말은 동시에 참일 수는 없으며, 그렇기에 그의 말은 전체적으로 볼 때 거짓말이다. 이 예가 보여 주듯이, 말 속에는 모순이 있을 수도 있으나 ?? 형식상 거짓인 말 또는 말이 안 되는 말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 그러나 그 모순된 말이 지시하는 존재자는 없다. 그러니까 자신 안에 모순을 포함한 존재자는 없다. 바꿔 말하면, 모순은 존재자 안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사고나 언표가 참답기 위해서는 그것을 이루는 표상들이나 말들이 서로 알맞아야 하고, 여러 사고나 언표가 한 인식의 체계를 이룰 때는, 체계 내 일관성과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언표나 사고들 간의 일관성과 그것들의 체계 내의 통일성을 사고나 언표의 정합성(整合性)이라고 부르고, 정합적인 사고나 언표 중에만 진리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언표나 사고가 정합적이라 해서 반드시 진리가 그 안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비정합적인 언표나 사고 가운데에는 결코 진리가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정합성은 사고나 인식이 진리이기 위한 소극적인 최소한의 필요불가결한 조건이다. 진리에 관한 이런 생각을 흔히들 '진리 정합설'이라고 부른다.

'무엇이든 다 뚫을 수 있는 창'과 '무엇에 의해서도 뚫리지 않는 방패'는, 거듭 말하거니와, 결코 함께 존재할 수가 없다. '무엇이든 다 뚫을 수 있는 창'이 존재한다면, '무엇에 의해서도 뚫리지 않는 방패'란 어디에도 없으며, 만약 그런 '방패'가 있다면, 그런 '창'이란 없다. 세상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 내에 모순을 포함하는 사물은 없으며, 상호 모순 관계에 놓여 있는 두 사물은 함께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런 사물이 존재할 수 없다 함은, 우리는 그런 사물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고, 우리가 어떤 사물이 존재한다고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 함은 곧, 그 사물이 존재할 수 없음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논리적 사고 불가능성은 존재 불가능성을 함축하고 이런 소극적 의미에서 사고는 존재를 함의한다. 이성론자들이 "사고는 존재다"고 언명할 때, 적어도 소극적인 뜻에서는, 그것은 이의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 비록 논리적으로 사고 가능함이 바로 존재 가능함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순율과 '변증법적 모순'

자기 안에 혹은 현존하는 다른 것과의 모순 관계를 갖는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사물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른바 '변증법적 사상가'들은 "모든 사물들은 그 자체로 모순적이다"(Hegel, Wissenschaft der Logik I: GW 11, S. 286)고 파악한다. 더 나아가서, 사물 내의 이 모순성이야말로 "사물의 진리[진상]이자 본질"이고, "모든 운동과 생명성의 뿌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위 '변증법적 모순'이란 한 사물 내의 성질들 간의, 부분적 '모순', 즉 한 사물 내의 '특정한 내용의 부정'이지, 한 사물에 속하는 어떤 성질이 그 사물 자체와 모순 관계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전체는 부분이다'는 명제는 모순율을 어기고 있는 명백히 거짓된 것이다. 그러나, '전체는 다수인 하나다(혹은 하나인 다수다)'는 명제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 '다수인 하나'라는 술어는 주어 '전체'와 모순 관계에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수'와 '하나'라는 상반된 성질이 '전체'와 동일한 관점에서 관계 맺는다기보다는, 전체는 보기에 따라서는 '다수'이고 보기에 따라서는 '하나'라고 이해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역사의 모든 알력들은 […] 생산능력들과 유통형식 사이의 모순에 그 근원을 갖는다"(Marx/Engels, Deutsche Ideologie, MEGA 3, S. 73)는 언명에서도 '생산 능력들'과 '유통형식' 사이의 소위 '모순'이란, '생산능력들'이 있는 곳엔 '유통형식'이 있을 수 없고 후자가 있는 곳엔 전자가 있을 수 없다는 논리적 모순이 아니다. 또 "노동자와 자본가는 모순관계에 있다. 그리고 노동자도 현존하고 자본가도 현존하니, 단지 잘못된 사고에서가 아니라, 현존하는 모순이 있다"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그는 결코 논리적 모순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변증법론자들이 말하는 모순은, 어떤 사물이 가지고 있는 성질들간의 모순이므로, 만약 노동자와 자본가가 어떤 의미에서건 모순 관계에 있다면, 이 노동자와 자본가는 무엇인가의 성질 내지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다름 아닌 인간사회의 부분[구성원]들일 것이다. 그러니까 위의 말은 "인간사회 안에는 서로 모순 대립하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있다"는 생각의 표현이고, 이때 '모순 대립하는'은 '이해가 상충하는' 정도의 의미를 갖는 말이겠다. 그렇다면 이 생각은 결코 모순율을 위배하고 있지 않다. 설령 서로 아귀가 안 맞는 노동자 집단과 자본가 집단이 그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인간사회'와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는 '무엇이든 다 뚫는 창'과 '무엇에 의해서도 뚫리지 않는 방패'의 관계에서 이해되는 그런 '모순' 관계가 있다고 보아지지 않는다. 양자 사이가 만약 그런 관계라면, 일단 '노동자'가 있는 곳에는 '자본가'가 있을 리 없고, 자본가가 있는 곳에는 노동자가 있을 리 없다. 그러므로 "인간사회는 모순 대립하는 두 계급으로 구성된 사회다"는 명제는 모순율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인간사회는 사람을 구성원으로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 말은 모순 규칙을 벗어난 것이고 무의미하고 거짓이다.

요컨대, 형식 논리상의 모순과 '변증법적 모순'은 동일한 의미의 모순이 아니고, 따라서 상호 배척적이거나 상호 보완적인 것이 아니며, '모순'이라는 한 낱말에서 서로 다른 사태가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말의 논리가 아니라, '사태 자체의 진행'의 논리로서 변증법을 주장하는 변증법론자들이 '변증법적 모순'과 형식 논리학의 모순을 엄밀히 구별하지 않고 그들의 진술을 전개하는 것은, "모순된 사태는 반드시 지양된다"는 모순의 필연적 폐기를 '논리적으로' -그래서 설득력 있게 - 설명하려는 의도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보인다. 형식 논리의 법칙에 준거하면 '모순된 사태'는 있을 수 없다. 이 말은, '모순된 사태'가 있을 경우, 그 사태는 자기 내 모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양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 아니라, '모순된 사태'란 애당초부터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모순된 사태'란 본래부터 없으니 지양되어야 할 것도 없는 것이다. 만약 변증법론자들의 생각처럼 '모순된 사태'가 있다면, 그때 '모순'은 형식 논리적 모순으로 이해될 수 없고, 그렇다면 이 사태가 '반드시[필연적으로] 지양된다'는 그 '필연성'의 논리적 근거는 없다. '필연성'이 형식 논리적으로 이해되는 한은 그렇다. 그래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모순대립'이나 '생산능력과 유통형식 사이의 모순', 즉 이해 상충 내지 갈등이 반드시 지양[해소]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이상이나 당위(當爲)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이 논리적 필연성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사태에는 인간의 의식적 작업으로서의 실천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변증법론자들이 말하는 여러 "모순 대립"은 시간(역사)의 경과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특히 인간의 의지적 노력으로 해소되고, 절충되고, 때로는 그렇게 되고 있지 않다. 즉 하나의 '모순'된 사태가 여전히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그 '모순'이 논리적인 것이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위적 '필연성'과 논리적 필연성이 그렇듯이 '변증법적 모순'과 논리적 모순은 말만 같지 서로 다른 사태이다.

근거율과 사고 규칙

어떠한 말이나 인식은 그것이 참이기 위해서 최소한 모순의 규칙은 준수해야 한다. 이 모순율은 이성의 사고 법칙이고, 따라서 모든 이성적[형식적] 인식은 경험에 문의함이 없이 모순율에 의거해서 진리일 수 있는가 없는가를 판정 받는다. 그러나 무모순성은 어떤 인식이 진리이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으로, 어느 인식이 모순을 범하지 않았으니까 따라서 진리라고 곧바로 말해질 수는 없다. 즉 어떤 인식이 진리이기 위해서는 무모순적일 뿐 아니라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이런 생각의 규칙을 근거율 혹은 충분 이유율이라고 한다.

"근거 없이는 아무 것도 없다"는 근거율도 그러나 근원적으로 생각하면 모순율적 사고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사람들은 어떤 것이 발생하면 필시 까닭이 있다고 생각한다. 까닭 없이 무엇인가가 발생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의 편린을 우리는 이미 불교 경전에서도 읽을 수 있고, 플라톤(Platon, BC 427-347)의 『대화편』 곳곳에서도 발견한다. -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곧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행(行)이 있고, 나아가서는 순전한 괴로움 덩어리가 생기며, 무명이 사라짐으로써 행이 멸하고 나아가서는 순전한 괴로움 덩어리가 멸한다."(「雜阿含經」, 卷十二, 緣起法經) "발생하는 모든 것이 원인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것은 필연적이다."(Platon, Philebos, 26e) "발생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원인에 의거해서 발생한다."(Platon, Timaios, 28a) 왜 그런가?

원인 없이 발생하는 것을 우리는 본 적이 없기 때문인가? 우리가 보는 한에서, 즉 경험하는 한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의 원인을 우리는 알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가 발생의 원인을 찾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 원인을 미처 알고 있지 못한 발생한 것들을 많이 알고 있음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에 의거해서만 얘기한다면, "모든 발생하는 것은 원인을 갖는다"거나, "원인 없이 발생하는 것을 우리는 본 적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발생하는 것의 원인이 있음을 확실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의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발생하는 것은 원인이 있었다는 통계적 귀납적 인식에 의한 것인가? 그러니까, 원인을 찾는 과학적 사고는, 지금까지의 우리의 탐구 결과가 보여 주듯이, 으레 발생에는 원인이 있었으니까 이번의 발생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인가? 그러나, 이제까지의 우리의 탐구 결과로 얻은, 발생들이 원인을 가지고 있었다는 경험적 사실이 이제부터 탐구하려 하는 혹은 수천 년 동안 탐구해 왔지만 아직도 그 원인을 찾지 못한 발생에 대해서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의 바탕이 될 수 있는가? 인류에게 과학적 탐구가 시작된 이래 여전히 탐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 가운데, 예컨대 생명의 원인이 있다. 우리는 왜 생명의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른바 경험론자들은, 이런 탐구의 경향은 경험의 축적 즉 관습에 의한 연상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흄(D. Hume, 1711-1776)은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은 무엇이나 그 존재의 원인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은 "직관적으로도 논증적으로도 확실치 않다"(A Treatise of Human Nature, ed. Selby-Bigge, pp.78-9)고 주장한다. 이 말은, 생명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 직관적으로도 논증적으로도 확실치 않지만 우리는 오랜 경험의 습관이라는 "위대한 안내자"를 따라 이것을 탐구한다고 응용될 수 있다. 이에 반해서 어떤 사람들은, 생명의 원인이 반드시 있으며, 우리는 어떤 것의 원인을 '모른다' 해서 그것이 '없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의 원인이 없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으니 말이다. 데카르트(R. Desartes, 1596-1650)는 "무에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Ex nihilo nihil fit.)는 것은 "자연의 빛"(Descartes, Meditationes, III, 14)이요, 자명하다고 생각한다. 무는 유의 충분한 이유[근거]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근거율의 타당성의 근거도, 모순율이 그러하듯이, 이성 자체에 있다. 근거율은 모순율과 마찬가지로 사고의 규칙인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이 충분한 근거의 규칙을 "그것에 대한 충분한 이유 없이는, 어떤 사실도 참이라고, 존재한다고, 그리고 어떤 진술도 옳다고 증명될 수 없다"(Leibniz, Monadologie, §32)고 일반화함으로써, 존재뿐만 아니라 인식과 진술이 참이기 위한 원리로 납득한다.

선험적 인식 원리의 문제

이성이 어떤 감각적 경험에도 의존함이 없이, 즉 선험적으로 갖는 자명한 원리들, 예컨대 모순율이나 근거율과 같은 것이 있으며, 여타의 많은 이성 인식들이 이로부터 연역될 뿐만 아니라, 어떤 경험적인 인식이나 존재의 발생도 이 규칙을 벗어나서는 성립할 수 없다. - 이것이 이른바 이성론의 기본주장이다. 이에 반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성이니 지성이니 하는 기능들도 모두 인간의 유전적 소질이며, 이것은 인간의 축적된 감각경험에 그 바탕을 둔 것이라고 본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감각에 있지 않은 것은, 그 무엇도 이성[지성] 중에 있지 않다."(Nihil est in intellectu, quod non fuerit in sensu.) - 이것이 이른바 경험론의 기본 주장이다.

이런 상반된 주장에 대해서 제 삼의 입장을 취하는 철학자들도 있다. 이미 경험론자들이 지적했듯이 모순율이나 근거율이나 경험에 비추어 보는 한 그것의 필연적 타당성을 설명할 수가 없다. 경험은 우리에게 기껏해야 "사실이 그러하다"는 것을 알려 줄 뿐, "그 사실은 필연적으로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일러 줄 수는 없다. 제 아무리 동일한 사실에 대한 경험이 반복된다 해도 이 사실의 반복이 그 사실의 필연성을 말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순율을 어긴 말은 필연적으로 진리를 담지하지 못한다는 것은 납득한다. 이때 '필연적'이라는 말은 이제까지의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사실상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원리상 그럴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하는 능력 즉 이성은 무엇이 원리적으로 필연적임을 사실 경험에 문의해 보지 않고서도 안다. 예컨대, 같은 것에서 같은 것을 제하면 반드시 남는 것이 없다[1-1=0]는 것을 우리는 어떤 사실적 경험에 앞서서 안다. 그런 한에서 이성은 선험적인 능력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이 선험적 이성능력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단지 형식적인 것뿐이다. 수학적 인식의 체계는 어떤 사실의 관찰이나 실험에 의거함이 없이 이성능력만으로 구성되어 지지만, 그 인식들은 단지 형식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에서 보는 바와 같은 실질적인 인식들은 인간의 선험적 인식능력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지만, 논리학이나 수학과 같은 형식적인 인식들은 인간의 선험적 이성능력만으로도 얻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형식적 인식들의 진리는, 그 인식이 순수한 사고의 형식으로서의 '지성(이성)의 보편적 법칙과 합치'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인식이 그 형식에 맞음을 넘어서서 어떤 실질적인 내용을 포함할 경우에는, 이 조건만의 충족으로는 여전히 그 인식이 진리인지 어떤지를 알 수 없다. 예컨대, 누군가가 "2에서 2를 빼면 1이다"고 말하면, 이 언표는 형식상 맞지 않고 따라서 거짓임이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누군가가 "지금 백 아무개의 집 정원에는 장미 두 그루가 있다"고 말하면, 이 언표 안에 형식상으로 잘못된 점이 없지만, 즉 이 언표 자체는 무모순적이지만, 그러나 이 언표가 참인지 거짓인지는 이 언표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실재적인 인식이 진리이기 위해서는 형식적인 정당성이나 형식 논리적인 근거를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실재적인 근거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사실과 합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질적인 인식과 진리

인식의 이상으로서의 '실재와의 합치'

언표가 무엇인가에 관한 언표인 한, 그 언표의 참 거짓은 그 언표가 그 언표되어지는 것을 제대로 언표하고 있는가, 즉 그 언표되어지는 것에 상응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된다. 인식이 무엇엔가에 관한 인식인 한, 그 인식이 잘된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는, 그 인식이 그 인식된 대상과 합치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진리란 '언표의 사실과의 부합'이나 '인식의 실재와의 합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때 '부합'이니 '합치'니 하는 것은 언표나 인식을 참이도록 해주는 근거가 된다. 사실에 부합하는 언표는 참이고, 실재와 합치하는 인식은 참이다. 진리에 관한 이와 같은 견해를 보통 '대응설'(對應說) 혹은 '합치설'(合致說, 一致說)이라고 하거니와, 많은 철학자들의 오래된 생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참" (Metaphysica, 1011b 26f.)이며, 분리되어 있는 것에 관해 분리되어 있다고 판단하고, 복합적인 것에 관하여 복합적이라고 언표하면 그 판단과 언표는 참이다. 이런 견해는 최근까지도 필요한 만큼 변형되어 반복되고 있다. 예컨대 타르스키(A. Tarski, 1902-1983)는 "눈이 흴 때 바로 그때 '눈이 희다'는 명제는 참이다"고 말한다.

눈의 흴 때 그때 누군가가 "눈이 희다"고 판단하고 인식하고 언표하면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참이다.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면 그 말 역시 참이다. 그래서 참임의 근거가 '부합' 혹은 '합치'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그 '부합' 내지 '합치'를 우리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에 있다. 누군가가 '눈이 희다'고 인식할 때 이 인식이 실재와 합치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가 묻게 되는 것은 '눈은 과연 실제로 흰가?'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신은 존재한다"고 언표할 때 이 언표가 사실과 부합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신은 실제로 존재한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언표의 사실과의 부합 여부는 사실 인식을 전제로 해서만 결정될 수 있으며, 하나의 사실 인식이 주장되면 다시금 그것이 사실 인식인가가 확인되어야만 한다. 이런 (무한하게 소급될) 확인이 어떻게 가능할까?

인식이란, 일반적으로 아직 모르는[未知의] 것에 관해서,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있는지를, 즉 본질과 존재방식을 파악하는 의식의 표상작용이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인식하면 그 인식은 참이다. 그러나 이제 누군가가 미지의 것, 그래서 지금 인식해야 할 대상인 것에 관해서 "그것은 존재한다"고 언표하고, 이렇게 언표한 까닭은 자기는 그것을 존재한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의 인식이 실재와 합치하는지 않는지를 우리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미지의 것이니, 우리 역시 그것은 무엇인가, 어떠한가 인식해 봄으로써만 확인이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식의 결과가 "그것은 존재한다"가 되면, 그의 인식이 참되다는 것이 인정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의 인식의 결과가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되거나 "그것이 존재하는지 어떤지 모르겠다"가 되면 그의 인식의 참임, 즉 실재와의 합치는 어떻게 가려지겠는가? 우리 모두의 인식내용과 그의 인식내용이 다르니, 그의 인식이 잘못된 것 즉 실재와 불일치하는 것이 되는가? 아니 반대로, 그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의 인식내용이 일치하면, 이때 우리 모두의 이 '인식'은 '실재'와 합치하는 것이 되는가? 이렇다면, 참된 인식 즉 진리란 인식하는 자들의 동의 내지 합의를 뜻하게 된다. 즉 인식과 실재의 합치는 인식자들 상호간의 인식내용의 합치, 의견의 일치를 뜻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인식내용과 그의 인식내용이 다를 경우에 그는 수적 열세로 인하여 "그래도 그것은 존재한다"고 또는 갈리레오처럼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혼잣말을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른 인식자들의 동의나 합의가 없음에도 만약 한 인식자의 인식 내용인 "그래도 그것은 존재한다"라는 언표가 의미가 있다면, 그리고 이러한 언표도 '사실과 부합'한다는 기준에 근거하여 참일 수 있다면, 이것은 인식자들의 합의에 인식의 진리임이 의존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어떤 인식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더라도 진리일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사실'이나 '실재'는 인식자들에게 각기 다르게 인식되더라도 혹은 도대체 누구에 의해서 인식되지 않더라도 '사실'이나 '실재'일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누구에 의해서도 인식된 바 없는 '사실'이나 '실재'라는 의미에서 그 사실이나 실재와의 부합이니 합치니 하는 진리의 규정이 실제로 무슨 의의를 가지겠는가? 그것은 단지, 진리의 개념 내지는 참된 인식의 이상(理想)을 말해 줄 따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참된 인식이란 실재와 합치하는 인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재'가 무엇인지는 모른다"고 말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단지 사고의 법칙과의 합치 여부로 그 진위가 판별되는 형식적인 인식과는 달리, 사실과 관련한 실질적인[내용 있는] 인식에서, 참된 인식의 규정으로서 '인식과 실재와의 합치'가 이런 내용 없는 형식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참된 인식[진리]은 실재와의 합치에 있다"는 진리의 이념을 예로부터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합치' 여부의 판별은 실제에서는 인식자들의 공통된 인식 내지는 합의에 의하거나 이것마저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생활에서의 유용성의 정도에 의거하는 방도 외에는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진리는 상호주관성이라거나 통교성(通交性) 혹은 유용성이라고 생각하며, 진리에 관한 이런 생각은 통칭 '합의설'(合意說), '의사소통설', 혹은 '실용주의 진리관'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진리의 본질을 '합의'나 '유용성'에서 보는 한, 진리는 '영원불변하며 보편 타당한' 무엇이라는 이념이 유지되기가 어렵다. 사람들이 한 때 합의 보았고, 또 한 때 사람들에게 대단히 큰 유용성이 있어서 '진리'로 통용되던 인식들이, 학문의 역사 특히 자연과학의 역사가 말해 주듯이, 잘못된 것으로 판정되는 경우를 우리는 드물지 않게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그 '잘못됨'의 판정 기준이 기왕의 합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합의'이거나 기왕의 유용성보다 '더 높은 유용성'에 있을 경우도 있지만, 기존의 인식이 '사실과 맞지 않다'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다시금 '사실과의 부합'이라는 이념이 되살아나곤 한다. 그렇게 되면, '사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어려운 문제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실이나 실재에 관한 우리의 인식은 발달하며 따라서 진리도 변화한다고 생각한다. 형식[논리]적 인식의 진리임의 근거가 형식상은 '사고의 법칙과의 합치'이되 인간 지성의 진전에 따라 내용상 새로운 형식적 인식들이 발견되고 전개되듯이, 실질적인[내용 있는] 인식들은 '실재와의 합치'라는 진리의 이념 밑에서 학문의 진보와 더불어 발달하며, 우리 인간의 지성 발달은 그 지성에 의한 인식이 실재에 합치할 때에 완성된다고 본다. 그러니까 '합의'나 '유용성'이라는 기준은 지성 발달의 도중에서 불가피하게 채택되는 잠정적인 것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진리는 인식의 실재와의 합치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인식이 내용상 사실과 합치할 때 그 인식은 진리라는 이 규정은, 그 '사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전개되는 한 즉 사실과학이 지속적으로 발달하는 한 이상적인 규정으로 남을 뿐, 최종적인 합치 여부는 인간 역사의 종점까지 유보될 것이다.

'인식과 실재의 합치'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

우리는 이제까지 형식적 인식의 진리임은 그 인식이 사고의 보편적 법칙에 합치하는가 어떤가에 따라 판정될 수 있으며, 실질적인[내용 있는] 인식은 이 조건의 충족과 더불어 '실재'와도 합치해야만 참일 수 있다고 말해 왔다. 이런 구분의 의미가 분명해지려면, '실질적' 인식, '실재', '합치' 등의 개념부터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어떤 것에서 같은 것을 제하면 그 어떤 것의 두 배가 남는다"[1-1=2], 혹은 "수녀는 수도하는 여자다"는 언표의 진위는 어떤 감각경험[관찰이나 실험]도 필요 없이 우리는 판정할 수 있다. 또 "이 쪽의 둥근 사각형이 저 쪽의 둥근 사각형에 비하여 넓이가 두 배다"라는 언표의 무의미함도 순수한 사고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언표 내지 진술이 앎의 표현이라는 뜻에서 이런 언표들도 인식을 담고 있고, 이와 같이 순전히 (논리적) 사고만을 통해서 그 언표의 유무의미함 혹은 진위가 원리상 판정될 수 있는 인식을 우리는 '형식적' 인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반면에 "지금 백 아무개의 집 뜰에 장미 두 그루가 있다", "수녀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다", 혹은 "이 쪽의 인어가 저 쪽의 인어보다 두 배나 크다" 등등의 언표의 진위나 유무의미함은 감각경험을 빌리지 않고서는 판정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성격을 가진 인식을 우리는 '실질적' 인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때 '실질적'이라는 말은 '실재하는 내용[質]을 갖는'이라는 뜻이다.

실재하는 내용을 갖는 인식의 유무의미함 혹은 진위의 판정에는, 그런데 반드시 감각경험이 필요하다. 이것은 실재하는 내용은 감각경험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또한 감각경험만이 실재하는 내용을 포착할 수 있음을 뜻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실재'의 의미를 밝힐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한다.

'실재'(實在)라는 말로 우리는 '실제로 존재함[있음]' 혹은 '실제로 존재하는[있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존재하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모순율과 같은 사고의 법칙이 있다", "공간과 시간이 있다", "수 3과 삼각형이 있다", "홍길동이 있다", "교정에 느티나무들이 있다", "3.1운동이 있었다",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나 그 존재의 원인을 가지며, 이 원인 역시 존재하는 것이어야 하며, 게다가 그 내용은 그 원인에 의해 생겨난 존재자의 내용만큼은 커야 하고 그 원인이 존재하는 것인 한에서 그 원인의 원인이 있어야 하고, … 마침내 궁극의 원인이 있음에 틀림이 없고, 이 궁극의 원인은 그것이 궁극적인 것이니까 더 이상 자기 존재의 원인을 자기 밖에서 갖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원인(自己原因)적 존재자 혹은 자기로부터의 존재자,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무한하고 절대적인 존재자가 있다", "신이 존재한다." ?? 이처럼 많은 것에 관해서 우리는 '있다[존재한다]'고 언표한다. 또한 "모순율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 것은 아니고, 그것은 단지 사고의 법칙 중의 하나이다", "홍길동은 실제로 있지는 않고, 소설 속에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삼각형은 사고 속에만 있다" 등등도 의미 있게 말해진다. 이런 여러 '있음' 가운데 '실제로 있음'은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칸트에 의하면, 우리의 사고는, 경험적으로 포착될 수 있는 대상에 관한 것인 한, 그 대상이 어떻게 있는가[존재양태]를 생각하며, 일정한 규정 규칙에 따라 그것의 존재방식에 대한 태도를 취한다. 그에 따르면 어떤 것이 경험적으로 포착 가능하기 위해서는 첫째, 공간·시간상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둘째, 감각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이 두 조건의 충족 여부에 따라, 우리는 어떤 것이 '가능하게 있다 (혹은 있을 수 없다)', '실제로 있다 (혹은 없다)', '필연적으로[반드시] (혹은 우연적으로) 있다'고 규정한다. 어떤 것이 공간, 시간상에 나타나고 양(量)적으로 질(質)적으로 규정될 수 있으면 그것은 '있을 수 있다'. 어떤 것이 원리상 감각될 수 있으면 그것은 '실제로 있다'. 어떤 것이 실제로 있는 것과 실체와 속성, 원인과 결과, 상호 공존의 법칙에 따라 관계 맺어 있으면 그것은 '반드시 있다.'(Kant, K.d.r.V., A218=B265f. 참조)

이 규준(規準)은 경험적인 사고작용이 그 사고의 대상의 존재방식을 규정함에서 사고작용을 규제하는 원리이다. 그렇다면 이 원리의 출처는 어디인가? 이 원리는 우리 지성[이성]이 존재하는 것의 방식에 대한 태도를 정할 때 사용키 위해 스스로 마련해 가진 것, 즉 선험적으로 산출해 낸 것이다.

이제 '실재' 즉 실제로 있음의 여부가 감각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 판정된다 함은 무엇을 함축하는가? 그것은 실재하는 내용을 갖는 실질적 인식은 그 인식의 대상이 주어지는 것임을 말해 준다. 실질적 인식이란 주어지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다. 실질적 인식에서 인식되어지는 것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한낱 관념들이나 그 관념들의 관계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낸 관념들의 인식에는 감각경험이 필요하지 않다. 감각경험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낸 관념이 아닌 어떤 것에 우리가 이를 수 있고 혹은 그런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인 것이다. '실재적' 곧 '감각경험(가능)적'이라는 이 생각은 우리 인간은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것에 관해서는 '실재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런 것에 관해서는 '실질적인 인식'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주어지는 것에 관해서만 실질적인 인식을 할 수 있고 그러므로 실질적인 인식은 수용(受容)적인 혹은 수동(受動)적인 인식이다.

무엇인가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즉 감각하는 우리의 의식기능을 통괄해서 감성(感性)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감성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감각기관이다. 그런데 우리의 감각기관은 공간·시간상에 주어지는 것만을 수용할 수 있다. 가령, 우리는 영혼을 생각할 수는 있는데 보거나 만지거나 맛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을 수는 없다. 그것은 영혼이 공간, 시간상에 감각질을 가지고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간, 시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실재하는 것인가? 앞서 우리는 '실재'하는 것은 '감각되는' 것이라는 규정을 보았다. 그런데 공간, 시간은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들리지도 냄새나지도 않고 맛볼 수도 없는 것, 즉 어떤 방식으로도 감각되어지지 않는 것이다.

즉 공간, 시간은 실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감각기관은 어떤 것을 수용할 때, 그것은 무엇의 '곁에' 있고, 무엇에 '잇따라' 있다는 질서 표상 위에서 수용하는데, 공간·시간은 바로 이런 감성적 의식의 질서 표상이다. 그러니까, 공간·시간은 그 자신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어떤 실재하는 것을 수용하는 우리 감성에 감각적으로 수용된 바 없는, 그러므로 감각경험에 앞서 즉, 선험적으로 준비되어 있는, 수용하는 것을 정리 정돈하는 질서의 틀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간·시간은 감각적 수용 즉 감성의 형식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우리는 이 공간·시간이라는 형식에 준거해서 나타나는 것만을 감각[수용]할 수 있고 따라서 공간·시간은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나타나는 것의 틀, 즉 감성적 "현상(現象)의 형식"이라고 부르고, 이 감각에서 수용된 내용을 우리에게 나타난 것의 실질이라는 의미에서 "현상의 질료(質料)"라고 부른다(Kant, K.d.r.V., A20=B34 참조).

지금까지 우리는 '인식의 실재와의 합치'의 함축을 드러내기 위해서 '실질적' 인식과 '실재'의 의미를 어느 정도 밝혀 보았다. 이제 '합치'란 무엇을 말할까?

앞서 인식이란 어떤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있는가를 파악함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실질적 인식이란 우리에게 감각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것 즉 실제로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함이겠다. 그런데 '인식'이란 '인식함[작용]'을 뜻하기도 하고 '인식된 것[내용]'을 뜻하기도 하며, 이미 지적했듯이 '실재' 역시 '실재함[실제로 그러그러하게 있음]'을 뜻하기도 하고, '실재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의상으로만 보면, '인식과 실재의 합치'에서 네 가지 경우의 '합치'가 생각될 수 있겠으나, 사람들에 의해서 많이 고려되는 경우는 두 가지다. 즉 '인식된 것[인식내용]과 실재하는 것의 합치'와 '인식함[인식작용]과 실재함[실재하는 것이 그러그러하게 있음]의 합치'의 경우이다. 첫 번째 '합치'는 이미 앞서 인식의 이상을 설명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경우이다. 가령, 우리가 어떤 것을 보고서 "그것은 장미이고, 그 장미는 빨갛다"고 인식했다면 이 인식내용의 진리임의 여부는 '실제로 그것이 빨간 장미'인가 여부에 따라 밝혀진다. 그리고 인식내용은 인식작용의 결과인 의식상의 표상이고 실재는 의식에 나타나는 것이니, 이때 '합치'란 '상응' 내지 '대응'(對應, correspondentia) 혹은 내용상 '같음'(convenientia)을 뜻하며, 이 합치의 의의는 앞서 살펴본 그대로이다.

그러면 두 번째의 경우 즉 '인식함(작용)과 실재함의 합치'는 어떤 의미로 이해될 수 있겠는가? 도대체 어떻게 그리고 어떤 점에서 우리의 '인식작용이 실재와 합치'할 수 있는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진리는 사물과 지성의 일치다"(Veritas est adaequatio rei et intellectus: De veritate, qu. 1, art. 1; Summa Theologiae, I, qu. 16, art. 2, 2)고 정의하였다. 참 인식은 그 '인식의 실재와의 합치'에 있다는 생각도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 진리 규정에 소급한다고 볼 수 있다. 토마스는 이 진리 규정의 해설에서 '지성'을 신의 창조적 지성과 인간의 파생적 지성으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지만 어떤 경우에서나 그것은 인식작용(자) 내지는 인식능력으로 생각되어지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바로 이 점을 원용하여 '인식과 실재의 합치'의 형식상의 함축을 드러내 보기로 한다.

근대 이래의 자연과학을 수학적 자연과학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자연 즉 물질적 실재에 관한 학적 탐구가 수학적 원리에 따라 수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학은 인간 지성[이성]의 사고 법칙에 준거한 지식의 체계이다. 이런 수학의 분야에서 해석기하학이라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데카르트는 "내 견해로는 자연 안에서 모든 일은 수학적으로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 견해는 우리가 자연 안의 사태들을 수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수학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담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지성이 인식함에서 자기 사고의 법칙인 수학적 원리에 따라서 작용하면 이 작용은 자연의 실재 방식과 합치한다. 이때 합치란 '일치' 혹은 '동일함'을 의미한다. 사고의 법칙이 바로 실재의 방식, 실재의 형식이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사고의 법칙을 "자연의 빛"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인식작용이 그에 따라 수행되는 그 원리가 만약 실재의 존재 원리이기도 하다면, 바로 이 원리에서 '인식함과 실재함은 동일'하다, 즉 합치한다.

데카르트의 "일치" 이론은, 신의 창조물인 자연세계는 우리의 인식작용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되, 같은 원리에 따라서 인간 역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자연세계 인식의 원리와 자연세계의 존재 원리가 동일하다는 일종의 신이성론(神理性論)으로 해석된다. 즉 신은 세계를 수학적 원리에 따라 창조 운행하면서 그의 창조물 가운데 하나인 우리 인간을 그의 다른 창조물들을 그의 세계 운행 원리인 바로 그 수학적 원리에 따라 인식하도록 창조했기 때문에 우리 인식작용의 원리와 자연 실재의 방식이 일치한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신의 위격(位格, personalitas)을 납득한다면 이런 생각도 가능하겠다.

그러나 데카르트와 달리 칸트는 신의 역할을 전제함이 없이 어떤 것의 '실제로 있음' 즉 존재의 방식이 인식작용하는 의식에 의해서 규정되듯이, 어떤 것의 '그러그러함'[본질]도 인식작용에 의한 규정이므로 인식을 가능하게 한 바로 그 사고의 원리가 그 인식에서 '실재'라고 인식되어진 것 즉 실재하는 것의 실재함의 틀이고, 이런 한에서 인식함과 실재함은 동일하다고 파악한다.

실재하는 것의 실재함[실제로 그러그러하게 있음]이 인식하는 사고작용의 원리에 의해 규정된다 함은 무슨 뜻인가? 인식작용 중에서 예컨대 "그것은 한 송이의 장미꽃이다. 그런데 그것은 어제까지도 봉오리였는데, 오늘 아침 활짝 피었다"는 인식이 성립한다. '그것'이라고 지칭된 하나의 장미꽃이라는 '실재'는 감각을 통하여 수용된 일정한 모양, 색깔, 냄새 등등의 잡다한 재료[질료]가 '하나'라는 양(量)의 개념과 그것이 봉오리일 때나 활짝 피어있을 때에나 마찬가지로 어떤 고정불변적인 '그것'이라는 실체(實體)개념과 '∼이다'는 내용규정[實質性] 개념을 바탕으로 해서 통일되기 때문이다. 이런 통일작용이 다름 아닌 사고(思考)이다. 저 잡다한 감각재료들은 사고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사고에 주어져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지성의 사고작용이 저 잡다하게 수용된 감각자료들을 "하나의 어떤 것이다"라는 틀[형식]에서 통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 송이의 장미꽃이다"는 인식이 성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인식이 없으면 '그 한 송이의 장미꽃'이라는 실재도 우리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뜻에서 사고의 형식은 우리 인식을 가능케 하는 토대[원리]이자, 이 인식에서 인식되는 실재 즉 우리에게 현상하는 존재자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토대[원리]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사고의 형식으로 기능하는 개념들을 사람들은 "범주"(範疇, kategoria)라고 불러 여느 개념들과 구별한다.

인식된 실재는 그것이 인식되어지는 것인 한에서 인식하는 자에 의해서 규정(determinatio)된다는 뜻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식되는 사물의 형식은 인식하는 자 안에 있다."(ST, I, qu. 16, art. 2, 2)고 말한다. 인식과 실재의 합치란 인식작용 즉 "지성과 (인식되는 실재인) 사물의 동일형식성(conformitas)"(ST, I, qu. 15, art. 1, 3)으로 인하여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 그 '합치'는 인식작용이 실재하는 것에로 다가가 동화(assimilatio)됨으로써 가능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의 편린을 우리는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BC 540/515-480)의 「조각글」(Frag. 3) "사고와 존재는 곧 같은 것이다"에서도 이미 발견한다. 후자의 입장에서 '합치'를 설명하려는 사상을 실재론(實在論)(→)이라고 부르고, 전자의 입장에서 '일치'를 설명하려는 사상을 관념론(觀念論)(→)이라고 통칭한다. 그러나 '관념론'을 우리가 표상하는 사물은 모두 우리 인간의 의식에 어떤 의미에서든 의존되어 있다는 이론으로 이해한다면, 토마스 아퀴나스와 데카르트처럼 '인식하는 자' 혹은 '지성' 아래서 신을 염두에 둔 사상은 오히려 '실재론'이라고 보아야 하고, 인식하는 자를 오로지 인간 의식으로 보는 칸트의 초월철학(超越哲學)(→) 같은 것만을 관념론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성서』

「雜阿含經」

『韓非子』

Aquinas, Th., De veritate.

________, Summa Theologiae.

Aristoteles, Metaphtsica.

Descartes, R., Meditationes.

Hegel, G. W. F., Wissenschaft der Logik, Bd. 1: GW11, hrsg. v. F. Hogemann/W. Jaeschke, Hamburg 1978.

Hume, D., A Treatise of Human Nature.

Kant, I., Kritik der reinen Vernunft.

Leibniz, G. W., Monadologie.

Marx, K./F. Engels, Deutsche Ideologie, MEGA 3.

Parmenides, Fragmente.

Platon, Philebos.

______, Timaios.

허위(虛僞. Falschheit)·착오(錯誤. Irrtum)· 가상(假象. Schein)

'비진리'의 문제

인간은 누구나 착오를 범하기 마련이다. 인간이니까 실수한다. Errare est humanum.

착오, 실수, 환상, 가상, 거짓, 허위 등은 어느 면에서 인간에게는 불가피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의 부족함을 보완해 주는 성격의 것으로 인정되지만, 그러나 대개는 이상적인 인간이라면 마땅히 빠지지 말아야 할, 지니지 말아야 할, 멀리해야 할 부정적인 인간적 요소로 치부된다. 그리고 그 대신에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추구해야 할 것으로 권장되는 것이 참(임)·진리·진상·진실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인식'을 말할 때, 그것은 보통 사태 자체를 파악하는 의식작용 내지는 의식작용의 결과를 뜻한다. 이 '사태 자체'를 우리는 진상(眞相)이라고 부르고, 진상을 제대로 파악한 인식을 진리라고 부른다. 이럴 경우 진상이 아닌 가짜, 즉 가상(假象, Schein)을 진상으로 혼동하는 것을 착오(錯誤, Irrtum)라 부르고, 이 착오로 인해 이른 잘못된 인식을 허위(虛僞, Falschheit)라 일컫는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 어떤 인식이 참[진리]인지 거짓[허위]인지는 그 인식이 사태 자체 곧 진상을 드러내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니까 문제는 진상이 무엇이냐, 그것은 어떻게 우리에게 드러나느냐에로 귀착된다.

진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드러나는가? 이 문제는 인식이 어떤 종류의 것이냐에 따라 달리 답해질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인식에서는 형식적, 논리적 요소만으로, 어떤 인식에서는 경험적, 실질적 요소를 더해 고려함으로써만 '진상'을 논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2+3=5"라는 인식에서 이 인식이 참된 것은 산수의 규칙에 맞는 까닭일 터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 진상은 수리논리적 요소만으로써 해명할 수 있다. 그러나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는 36만 Km이다"는 인식이 참인지 거짓인지, 다시 말하면 진상을 드러내고 있는지 어떤지는 경험관찰적 요소를 고려함 없이는 답해질 수 없다. 더 나아가 "신이 존재한다"와 같은 언표도 인식이라 주장된다면, 그 경우에 진상의 문제는 단지 논리적이거나 경험관찰적인 요소만으로써는 처리할 수가 없다.

이런 점으로 인해 인식은 형식적 인식과 경험[실질]적 인식으로 구분될 수 있고, 인간 이성이 경험의 한계 너머에서까지 무엇인가를 인식하고자 지향할 때는 '초험적 인식'도 거론될 수 있을 것이므로, 우리는 이 각각에 대해서 비진리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형식적 인식과 허위

지성의 성격과 형식적 인식

인식은 의식작용이고, 의식은 어떤 사태에 대해서 그것이 어떠하다는 의견(Fürwahrhalten)을 가짐으로써, 곧 판단함으로써 인식을 얻는다. 이때 그 인식이 객관적으로 타당하면 참이고, 그렇지 못하면 거짓이다. 이런 인식 작용에서 판단하는 기능을 우리는 '지성'(知性, intellectus, understanding, Verstand)이라 부른다. 그러니 지성이 판단하지 않는 곳에서는 어떤 경우에든 진리나 허위를 얘기할 수 없다.

그러면 지성은 어떻게 활동하는가? 지성의 기본적인 활동은 문자 그대로 '앎의 기능'이다. 앎, 지식, 인식은 지성이 개념들을 결합, 종합하거나 분해, 분석함으로써 생긴다. 그러므로 인식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개념(??)이다. 그래서 지성은 인식의 요소들인 개념들을 만드는 작업을 한다. 개념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자료들은 감성, 감각적 경험을 통해 주어지기도 하고 상상력에 의해 제공되기도 한다. 다양한 자료들이 주어지면 지성은 이것들을 비교하고 추상하여 개념을 얻는다. 이런 점에서 지성은 '개념의 능력'이라고 불릴 수도 있다. 그러나 지성은 또한 '판단의 능력'이기도 하다. 판단은 어떤 개념으로부터 다른 어떤 개념을 분해해 내거나 어떤 개념에다가 다른 어떤 개념을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수행된다. 그런데 이때 이 분석적 판단이나 종합적 판단은 각기 지성의 일정한 규칙에 따라 수행된다. 예컨대, 동일율, 모순율, 배중율과 같은 규칙은 분석적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지성의 원리이고, '∼은 ∼하다'는 '실체-속성의 관계' 규칙이라든지, '∼이면, ∼이다'라는 '원인-결과(전제-결론)의 관계' 규칙은 종합적 판단을 위한 지성의 원리이다. 이런 지성의 기본적 규칙들은 지성에 내재적이다. 이때 '내재적'이란, 지성이 구체적인 사고활동, 판단작용에 앞서 이미 이 규칙들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이 규칙들은 지성의 구체적인 사고 수행, 판단작용에 선행한다는 뜻이다. 언제 어디로부터 어떻게 인간의 지성이 이런 사고의 내재적 규칙을 갖추어 갖게 되었는가라는 문제가 거론될 수 있겠으나, 적어도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의식 활동에서 '지성'의 기능을 얘기할 수 있는 한, 동시에 지성의 법칙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법칙이 없는 곳에서는 올바른 일도 그른 일도 없으므로, 지성작용의 결과인 인식에 대해서 참·거짓을 얘기할 수 있다면, 지성작용의 규준으로서의 법칙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법칙은 지성에 내재적이어야 한다. 지성이 고유한 성격을 가진 기능인 한, 그 기능의 고유성은 그 기능의 작동방식에 있는 것이고, 지성의 법칙이란 지성의 작동방식의 일정성(一定性)이겠다. 어떤 기능의 작동방식에 일정성이 없다면, 사실상 '그 기능'이라고 칭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성의 법칙이 내재적이라는 말은, 지성이 지성으로서의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한 내재적인 법칙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지성의 일정한 기능방식인 지성의 법칙과 지성은 그 성립에 있어서 동시적이다. 지성은 당초에는 '백지'였는데, 언젠가부터 어떤 경로를 통해 고유한 기능방식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으로, 이른바 '백지'(白紙)인 지성은 '지성이 아닌 것'이라고 말함이 옳다. 지성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일정한 법칙이나 기능과 함께 그리고 일정한 법칙이나 기능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이미 그것은 '무엇인가가 새겨진 판(板)'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지성을 '백지'로부터 진화된 것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간 지성의 진화나 퇴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표준적 지성'이 가정되어야 할 것인데, 대체 '표준적' 지성 그리고 이 표준적 지성의 '보편성'은 무엇에 근거할까? 그것은 현재의 지성 상태나 혹은 현재의 지성 상태를 염두에 둔 '이상적 지성' 상(像)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가령 우리가 인간이란 종(種)의 생물학적 변화를 납득하고, 지성을 두뇌 활동의 한 가지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 일정 시점과 일정 시점 사이에 인간의 '지성' 양상이 상당히 다르고, 또는 일정 집단의 '인간'과 또 다른 일정 집단의 '인간'의 지성 양상이 다름을 판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써 우리가 인간 지성의 진화나 퇴화를 말할 수는 없고, 기껏 '차이'를 얘기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더 발달된 지성' 또는 '덜 발달된 지성' 따위는 도무지 말할 수가 없고, 단지 '서로 다른 여러 양상의 지성'을 얘기할 수 있을 따름이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 어려울 것이다. 무엇을 근거로 해서, '서로 다른 양상의 것들'에 대해 하나의 공동의 이름 '지성'을 줄 수 있겠는가? 서로 다른 복수(複數)의 지성이 있다면 그리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지성인 한에서 어떤 점에서는 동일함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지성의 동일한 성격이란 신체적으로[시·공간적으로, 물리·심리학적으로] 또는 인격적으로[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구별되는 여러 사람의 각각의 두뇌 활동과 더불어 지성의 기능이 작동한다 하더라도, 그 방식이 보편성을 가짐을 말한다. 그러니까 이 점에서 지성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있어서나 동일한 기능방식을 가지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지성의 형식[形相] 또는 지성의 작용 법칙이라 부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지성은 지성인 한 적어도 형식적으로 동일하다. 지성은 형식상 하나이다.

형식적 인식의 보편성은 바로 이 지성의 동일함에 근거한다. "A=A"나 "1-1=0"이라는 인식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타당하다. 이 말은, 이런 인식은 지성의 형식, 지성의 작용[표상, 사고, 인식, 판단, 추론] 법칙에 부합한다는 뜻이다. 반면에 "A=-A"라거나 "1-1=2"라는 판단은 틀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성의 법칙에 어긋난다. 그런데 지성의 법칙에 어긋나는 판단도 지성이 하는 일이다. 문제는 바로 이 점에서 생긴다. 지성은 어찌하여 자신의 작동 법칙에 어긋나게도 기능하는가? 무엇인가가 대체 자신의 기능 규칙에 맞지 않게 작동할 수 있는가?

형식적 인식에서의 착오 가능성

그러하지 않은 것을 그러하다고 잘못 판단하는 것은 착오이며, 이 착오에 의한 잘못된 인식은 허위이다. 그런데 판단은 지성이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지성은 진리를 인식하기도 하지만, 착오를 범하거나 착오에 빠지기도 한다. 어떤 형식적 인식에서 그러니까 지성은 자신의 규칙에서 벗어남으로써 착오에 빠지는 것이다. 이때 지성 스스로 자신의 규칙을 어길 수 있는가, 아니면 무엇인가가 지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규칙을 벗어나도록 강요, 유혹하는가? 만약 '지성이 스스로 자신의 규칙을 어긴다'면, 그런 '지성'은 사실 지성일 수 없다. 앞서 생각해 보았듯이, 지성이란 일정한 규칙에 따르는 사고기능을 일컫는 것이고, 그런 한에서 지성의 규칙은 지성에 내재적일 것이니 말이다. 이런 사태 파악이 옳다면, 지성이 착오에 빠지는 것은 지성 이외의 힘이 지성의 작용에 영향을 미친 탓이라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런 일이 어떤 경우에 일어날까?

인식은 어떤 경우에나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고, 판단의 주체는 지성이다. 지성이 판단하지 않으면, 그러므로 인식이란 없고, 또한 착오도 없으며 따라서 허위 인식도 없다. 허위 인식은 사태를 잘못 안 것이니 근본적으로는 앎이라 할 수 없겠으나, 그것은 일단 인식작용의 결과이니 앎은 앎이되 잘못된 앎으로서 단적인 '모름'과는 구별할 수 있다. '모름'은 지성이 판단을 내리지 않은 경우이나, '잘못 앎'은 지성이 일단 판단을 내린 결과이다. 그런데 형식적 인식에서 허위는 지성의 자기 작동 규칙의 위반, 곧 자가당착의 산물이니, 지성이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 것은 지성활동에 장애를 일으킬 정도의 어떤 큰 힘이 지성활동을 방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외부의 힘으로서 우리가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이 상상력, 의지, 경향성, 습성, 관심 따위이다. 우리 의식에는 지성 이외에도 다른 활동하는 힘들이 많이 있는 셈이다.

"착오는 지성의 한계나 박약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로부터는 단지 무지(無知)가 생길 뿐이다."(Kant, 『전집』 XXIV, 1, S. 402) 물체를 움직이는 어떤 힘이 감소하면, 그 때문에 그 물체가 가던 방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속도가 줄거나 멈출 따름이듯이, 지성의 힘이 약할 경우 우리는 단지 조금 알거나 판단을 중지한다. 판단하지 않는 곳에는 허위가 없으며, 조금 알아도 그것을 우리는 충분히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착오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지성의 결여로부터가 아니라 어떤 적극적인 힘이 지성의 활동에 끼어듦으로써 생긴 것이다. 그런 뜻에서 착오는 일종의 사생아(effectus hybridus)이다(Kant, 『전집』 XXIV, 1, S. 402 참조). 상상력은 한계를 모를 만큼 할동 영역을 넓혀 지성을 무디게 만든다. 예컨대, 상상은 6과 9는 반회전하면 같다하여 '6-9=0'이라 볼 수도 있고, 신의 관념에 하얀 수염의 노인을 연상하기도 하며, 지성은 상상과 더불어 유희에 빠진다. 지성은 판단하는 힘이 제한되어 있건만, 의식의 경향성은 우리가 한계에 부딪치는 곳에서조차 무엇인가를 결정하고자 하여 착오를 유발한다. "우리의 제한된 능력으로 말미암아 판단하고 결정할 수 없는 데에서도 판단하고 결정하려 하는 우리의 성향이 우리를 착오에로 이끈다."(Kant, 『전집』 IX, S. 54)

의식은 "인식의 능력(facultas cognoscendi)과 자의의 자유(arbitrii libertas)인 선택의 능력(facultas eligendi), 다시 말하면 지성(intellectus)과 동시에 의지(voluntas)"를 가진다(Descartes, Meditationes, IV, 8). 우리는 "지성만으로는 다만 관념들을 파악할 따름이고, 이 관념들에 관해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지성 그 자체만을 엄밀히 고찰하면, 지성 안에는 본래 착오란 없다." "우리가 그것에 관한 관념을 갖지 못하는 많은 사물들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지성의 결함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같은 곳) 내가 범하는 착오는 "오로지 의지의 활동영역은 지성보다 훨씬 멀리까지 열려있는데, 내가 의지를 지성의 한계 내에 가두어 두지 않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물들에까지 활동이 미치도록 하는 데에서 생긴다. 이런 것에 관해 의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므로 쉽사리 진리에서 [···] 떨어져 나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Descartes, Med., IV, 9) 우리는 "그 진리가 분명치 않은 모든 것에 대해서는 판단 내리는 것을 유보해야 함을 상기함으로써"(Descartes, Med., IV, 16) 착오를 방지할 수가 있다. "내가 내 의지를 제한시켜" 지성으로 하여금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들에 관해서만 판단하도록 한다면, "내가 착오를 범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Descartes, Med., IV, 17) 예컨대 '2÷0=2'라고 판단하는 자는 착오에 빠진 것인데, 그에게 만약 '2÷0'의 개념이 명석판명하지 않았다면 판단을 내리지 말았어야 했고, 그 경우 그는 단지 '모름'을 드러냈을 터이다. 이런 유의 오류를 범하는 사람에게 데카르트는 "내가 완전하게 아는 것에 관해 충분히 주목하고, 이것을 내가 애매모호하게밖에는 파악하지 못하는 다른 것들과 분리하기만 하면, 나는 틀림없이 진리에 도달할 것이다"고까지 말한다(Descartes, Med., IV, 17 참조).

사람은 욕구나 상상이나 성향에 이끌려 때로 착오에 빠질 수 있지만, 그러나 지성이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는 한 형식적인 인식에서 착오는 생기지 않는다. 형식적 인식에서의 착오는 보편적인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것도 아니다. 형식적 인식에서 착오란 문자 그대로 지성이 명확한 것과 불명확한 것을 '뒤섞어 그릇됨'에 빠진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피해질 수 있다. 형식적 인식이란 당초부터 관념을 지성의 사고 규칙에 따라 결합하고 분리함으로써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험적 인식과 착오

경험적 진리는 일반적으로 '인식[사고]과 실재[사실]의 합치'라고 말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경험적으로 잘못된 인식은 앎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은 것이다. 경험적 사태에 부합하지 않는 판단내용을 갖는 인식은 허위이다. 그때 그 판단작용은 착오에 빠진 것이다. 이런 경험적 인식에서 착오는, 지성이 판단함에서 자신의 기능 규칙을 제대로 준수했다 하더라도, 진상이 아닌 무엇인가를 진상으로 잘못 판단하는 데서 일어나므로, 문제는 어떻게 이런 착오가 발생하는가, 그리고 과연 인간의 인식작용은 근본적으로 이런 착오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경험적 인식의 착오 가능성

경험적 인식은 형식적 인식에서의 지성 활동을 그대로 밑바탕에 두고 이에 감성적 인식 소재가 더해짐으로써 생긴다. 그러므로 경험적으로 대상을 인식함에 있어서 착오 가능성은 형식적 인식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제한적인 상상력이나 의욕 또는 성향이 지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궤도를 벗어나게 함에도 물론 있지만, 지성과 더불어 경험적 대상 인식의 또 다른 근간을 이루는 감성의 활동이 지성의 활동과 뒤섞이는 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이성은 감각 없이는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터이다."(Aristoteles, De anima, 432a 6/7) 감성은 경험적 대상 인식에서 인식 소재를 직접 접하는 통로라는 점에서 인식의 실질적 원천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경험적인 진리내용의 근원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만큼, 만약 그것이 인식 소재를 잘못 제공하여 지성으로 하여금 오판하도록 한다면, 또한 "착오의 근거"이기도 하다(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A295=B351 주 참조). 물론 감성 그 자체는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으므로, 감성 그 자체의 활동작용이 착오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쩌면 감성의 잘못된 소재 제공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섣부르게 판단을 내린 지성에 착오의 근원을 돌릴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경험적 대상 인식에서 허위란 한낱 주관적인 표상 즉 가상을 객관적인 것, 즉 진상으로 혼동하는 데서, 곧 착오를 일으키는 데서 생긴다. 이런 일은 보기에 따라서는 대상을 접하여 인식 소재를 수용하는 감성이 대상을 판단하는 지성에 영향을 잘못 미친 탓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Kant, 『전집』 IX, S. 54 참조) 달리 생각하면 "지성이 감성의 저 영향에 대해 기울여야 할 만큼의 주의를 결여함으로써 그로부터 생겨난 가상, 즉 한낱 주관적인 판단의 규정 근거를 객관적인 것으로 여기고, 혹은 감성의 규칙에서 볼 때 참인 것을 지성의 법칙에 따라서도 참인 것으로 타당하도록 허용하는 가상에 지성이 자신을 내맡겨 오도하게 하는 데서 착오가 일어난다고도 볼 수 있다."(Kant, 『전집』 IX, S. 54) 그러나 어느 관점에서 보든 분명한 것은, 감성은 자신의 기능 규칙에 따라 대상에 대한 표상을 얻을 뿐 판단하지 않으며, 지성은 만약 감성으로부터 아무런 자료 제공이 없으면, 역시 대상에 대해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을 터이고, 판단이 없는 곳에서는 진리도 없지만 마찬가지로 허위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니까, 진리이든 허위이든 경험적 인식은 "지성과 감성이 뒤섞인 결과"(Kant, 『전집』 XXIV, 1, S. 395)라는 점이다. "지성과 감성이 결합함으로써만 인식이 생길 수 있는"(Kant, K.d.r.V., A51=B75) 만큼, 만약 착오가 있다면 그것도 지성과 감성이 결합하는 데서 생긴다(Kant, 『전집』 XVI, S. 288: 조각글 2259 참조).

그렇다면 경험적 인식에서 생기는 착오는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런 착오를 인간은 과연 피할 수 있는가?

대상 의식의 착오와 자기 교정 능력

허위를 진리로 여김, 주관적 가상을 객관적 진상으로 혼동함을 언필칭 착오라 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이 착오를 언제 얘기할 수 있는가? 누군가가 인식활동에서 '허위'를 '진리'로 혼동했고, 단지 '주관적인 가상'을 '객관적인 진상'으로 잘못 알았음이 드러난 연후일 것이다. 어떤 인식은 언제 어떤 조건 아래서 '허위'로 판명되고, '진리'로 분명해지는가? '주관적인 가상'이란 무엇을 뜻하고, '객관적인 진상'이란 무엇을 함의하는가?

우리가 허위를 말하고, 착오를 말하고, 가상을 말하고 진상을 말하며, 진리를 말하는 관점은 '인식'이고, 그것도 우리 인간의 인식이다. 이 말은 우리가 착오를 말할 수 있는 관점은, 전지전능한 신의 관점도 아니요, 이른바 '존재자 자체'의 관점일 수도 없다는 뜻이다. 신의 인식은 곧 진리요, 진상이요, 존재라 하니, 어디 허위, 착오, 가상이 끼어들 여지가 있겠는가! '존재자 자체'란 단지 이상적, 이념적 존재자일 뿐, 바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알고자 하는 의식의 지향활동이 인식이 아닌가! 그러니 우리가 제 아무리 '존재자 자체'의 관점에서 얘기하려 함을 강조하고 싶어도, 그것은 결국 "'존재자 자체'라고 생각하는" 관점 이상이 아니다. '진리 자체', '진상 자체'야 우리 인간의 인식에 독립적인 것이겠고, 착오란 인식 활동의 도중에서 발생하는 것이겠지만, 우리가 진리, 허위를 말하고 착오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인식의 결과를 본 연후이다.

사람은 설령 그가 착오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착오에 빠져 있는 동안은 자신이 착오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누구나 자신이 인식에서 착오에 빠질 수 있고 현재 착오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어떤 것을 참이라고 주장하는 한, 그 동안은 적어도 그 참에 대한 자신의 주장의 착오 가능성은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착오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도리어 착오일 수도 있다. 허위란 틀린 인식을 일컫는 것이고, 틀린 인식은 맞는 인식의 기준을 전제로 해서만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니, 양자를 혼동한다는 착오도 틀린 인식, 맞는 인식이 구별된다는 전제 아래서만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1-1=0'은 맞는 인식이고 '1-1=1'은 틀린 인식이다. 이런 인식의 맞고, 틀림은 이성의 규칙에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형식적 인식에서 진·위의 규준은 이성의 사고 규칙이다. 물론 '이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겠으나, 그러나 일단 우리가 공동으로 '이성'을 얘기할 수 있는 한, 앞서도 이미 논의했듯이, 우리는 이성의 기본적인 기능과 규칙을 납득하는 것이고, 그런 한에서 형식적 인식에서의 허위와 진리의 판별 준거를 우리는 이성 내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 뜻에서 누군가가 '1-1=1'이라고 인식한다면, 그는 착오에 빠진 것이다. 우리는 이성의 이름으로 이렇게 단정할 수가 있다. 그러나 경험적 인식의 진·위의 판정에는 이성의 사고 규칙이라는 규준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경험적 인식의 내용은 이성의 앎의 기능, 즉 지성 밖에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는 36만 Km이다'는 판단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이성의 사고 규칙만으로는 판정할 수 없다. 따라서 누군가가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는 50만 Km이다'고 판단할 때, 그가 착오에 빠졌는지 어땠는지를 우리는 사고 규칙만을 가지고서는 판정할 수 없고 그러니까 그의 인식이 틀리는지 어떤지에 대한 충분한 판정기준을 이성 내에서는 발견할 수가 없다. 그의 인식이 허위라는 것은 가령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는 36만 Km이다'가 진리라는 전제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눈이 검다'는 인식이 허위임은 예컨대 '눈이 희다'가 진리라는 전제 아래에서만 그러하다. 그렇다면,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는 36만 Km이다'나 '눈이 희다'가 진리임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이런 판단의 내용이 참인 것은, 그것이 사실[실재]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면, 우리는 어떤 근거에서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

"사실은 자신이 사실임을 말한다",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존재는 자신을 개시(開示)한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런 견해가 옳다면 궁극적으로 인간이 착오에 빠지는 일은 없을 터이다. 실제로는 존재는 자신을 감추고, 그렇기에 인간은 그것을 들춰내려 하는 것이고, 그것을 이름하여 인식이라 하지 않는가? 아니, 여기서 우리가 '존재는 자신을 드러낸다', 혹은 '존재는 자신을 감춘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 '존재'라는 것 자체가 무엇인지를 모르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지 숨기는지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물음들은 우리를 다시금 경험적 인식의 근본 성격에 대한 반성에로 이끈다.

대상에 대한 경험적 인식의 구조는 보통 의식이라고 하는 '인식자'?? 그것이 '나' 혹은 '이성'이라고 통칭되든 때때로처럼 이성·지성·감성이라는 세분된 이름으로 불리든 ??와 이 인식자의 지향 대상인 '존재자 자체' 그리고 이 양자의 연결 끈인 '인식(작용·내용)'의 상관 관계 곧 '인식자[의식]-인식(작용·내용)-인식 대상[존재자 자체]'로 이해된다. 이런 이해에서 존재자를 그 자체대로 파악하려는 대상 의식에서는 한편에서는 인식자인 '나[우리]'와 이 인식자의 활동(작용)으로서의 '인식'이 구별되며 다른 한편에서는 이 인식 활동의 작용 결과인 '인식'과 이 인식 활동의 지향 표적인 '존재자 자체'가 구별된다. 그러면서도 의식은 그의 인식이 존재자에 혹은 존재자가 그의 인식에 합치할 때까지는 자기의 대상 인식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의 개념이 대상에, 대상이 그의 개념에 합치함"(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PdG]: GW9, S. 57)을 목표로 운동하는 대상 의식은 이 목표에 도달하기까지는 자신의 인식에 만족하지 못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인식을 부정한다. 의식은 "안주(安住)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대적으로 불안정한 것이며, 순수한 활동성이고 부정작용이다."(Hegel, Enzyklopädie, §378, Zusatz) 대상의식은 대상을 겪어 나가며 자신의 인식을 고쳐 나가는 운동인 바, 이것이 다름 아닌 경험(經驗) 즉 '지나면서 실지를 알아 봄'이다. 경험이라는 의식의 운동은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의식과 이 의식에 대한 반성적 의식 사이의 조정 운동, 즉 자기 대화, 바꿔 말해 자기를 자기에 '비춰본다'(speculari)는 뜻에서 변증법적 사변(思辨, speculatio)이다. 이 대상의식의 사변적 자기 대화는 결국 직접적 의식과 반성적 의식의 일치, 인식 작용과 인식 내용의 합치, 이를 통한 인식자와 인식대상, 인식과 존재자 자체의 하나됨, 말하자면 진상, 사실, 실재를 찾기 위한 의식의 자기 지양 노력이다.

대상의식의 경험으로서 자기 대화는 자신의 인식에 대한 검사이다. 참된 인식이란 앞서 말했듯이 인식과 대상의 합치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자기의 인식과 대상이 합치하는가를 끊임없이 검사한다. 이 검사의 척도(mensura)는 대상이다. "인식될 수 있는 것이 인식보다 선행하며 인식의 척도인 것이다."(Aristoteles, Metaphysica, 1053a 3) 그래서 만약에 이 합치 검사에서 양자가 합치하지 않고 서로 어긋나면, 모순되면, 의식은 자기의 인식을 변경한다. 대상의식은 예컨대 물체의 공간 운동에 대한 뉴턴적 인식을 아인슈타인적 인식으로 변경한다. 그러나 의식이 대상에 대한 자기 인식을 변경시키면, 그것은 바로 의식에 있어서 또한 대상 자체도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인식은 다름 아닌 그 대상에 대한 인식이었고, 그런 한에서 그 대상은 그 인식에 속하는 것이었으니, 인식의 변화에 따라서 그 인식의 대상도 달라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의식에게는 존재자란 단적으로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 대해서만 그 자체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이 대상에 자기의 인식이 합치하지 않음을 발견할 때에, 대상 자신도 유지되지 못한다."(Hegel, PdG: GW9, S. 60) 다시 말하면 인식의 대상과의 합치 여부를 가리는 검사에서 인식이 합격하지 못하면, 그 검사의 척도여야 할 대상도 변경된다. 의식의 자기 검사는 인식의 검사일 뿐만 아니라 그 검사의 척도의 검사이기도 한 것이다.

인식이 변경되면 그에 상응해서 처음의 대상을 부정하는 새로운 대상이 나타난다. 새로운 대상이 나타나면 이에 대한 대상의식은 새로운 인식 활동을 하며, 의식의 자기 검사를 통하여 또 다시 인식이 변경된다. 이렇게, 의식의 자기 자신의 인식에 대한 검사를 통하여, 다시 말하면 의식의 자기에 대한 회의적인 반성을 통하여 일련의 새로운 대상은 모습을 드러내며, 새로운 대상이 나타나면 이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수행되고, 새로운 인식이 수행되면 또 다시 새로운 대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의식의 '변증법'적인 운동은 "존재와 인식이 완전히 하나"가 될 때(Hegel, PdG: GW9, S. 39)까지 계속된다. 그러니까 대상의식의 변증법적인, 자기 대화적인 운동이 그치는 그곳에서 인식과 존재자 자체는 완전히 합치하고 인식은 자신의 이상에 도달한다. 그때 비로소 진짜 사실이, 진상이 무엇인지 드러난다. 그러나 대상의식의 변증법적 운동은 언제 어디서 끝나는 것인가? 형식적인 답은 이미 주어졌다. - 인식과 대상이 완전히 합치하는 때, 바로 그곳이라고. 그런데 인식과 대상이 완전히 합치하는 곳은 다름 아닌 대상의식의 변증법적 운동이 종료되는 바로 그곳이다. 우리는 무슨 답을 얻었는가?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참"이며, "눈이 흴 때 바로 그때 '눈이 희다'는 판단은 참이다." - 누가 이것을 부인하겠는가! 그러나 이런 언명들이 경험적 진리의 형식적 규정인 '인식의 대상과의 합치'보다 무엇을 더 말해주는가? 아무것도 없을 때, 오로지 그때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고, 무엇인가가 있을 때, 오로지 그때 "무엇인가가 있다"고 말하며, 눈의 흴 때, 오로지 그때 "눈이 희다"는 판단은 사태에 부합하기 때문에 참이다. 그러나 저 말은 누가하고, 저 판단은 누가 내리는가? 또 이 '말'과 '판단'이 "참이다"라는 판정은 누가 하는가? 저 말과 판단도 '나'[우리, 인식자, 인간 의식]가 하고, 저런 판정도 '나'가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저런 언명들은 직접적 의식과 반성적 의식 사이의 대화 혹은 한 직접적인 의식과 또 다른 직접적인 의식과의 대화와 이를 조정하는 반성적인 의식 사이의 대화를 통한 합의 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우리의 대상 인식 곧 경험적 인식이, 표준적인 말로 바꿔 표현해서, 과학적 지식이 전개 발전되는 한, 진리란 언제나 의식들 사이의 잠정적 합의에 근거하는 것이고, 그 '진리'라는 것이 언제든지 '착오'로 반전될 수 있음을 뜻한다. '과학'이라는 것이 발전하는 한, 그 발전하는 과학에 부응해서 일련의 새로운 사태가 나타나고, 그러면 다시 새로운 과학적 지식이 생긴다.

과학의 발전은 새로운 과학적 지식의 전개와 때로는 또한 과학적 사고 방식의 전환을 포함하며, 이것은 단지 지식의 양의 증가뿐만 아니라 종래 지식의 수정도 뜻한다. 그렇기에 그것은 이미 '사태에 맞게' 수정된 지식이 앞으로 다시 수정될 수도 있음을 함축한다. 경험적 인식 체계로서의 과학은 인간 지성 활동의 산물이고, 인간의 지성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대상 인식 능력이자 또한 자신을 부정하는 힘 곧 자기 교정 능력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최초의 문제가 고스란히 남는다. - '사태'란, '사실'이란, '존재'란, '실재'란, '진상'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경험적으로 참된 인식이란, 따라서 경험적 인식에서 착오란 무엇인가?

경험적 인식의 한계와 착오의 의미

경험적 인식에서도 형식적 인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식을 수행하는 기능인 지성은 상상이나 의욕이나 어떤 성향에 이끌려 자신의 작동 규칙, '정도(正道)를 일탈'(errare, irren)할 때 착오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형식적 인식에서 지성의 착오는 방지될 수도 있는 것이고, 또 '보편적 지성'의 권위로써 허위 인식에 대해서 그 인식이 허위임을 최종적으로 단정할 수도 있다. 물론 지성 능력의 한계로 말미암아 이 영역에서도 아직 모르는 것이 많이 있겠지만, 그런 것에 관한 지성의 판단에 대해서는 그 진·위가 미정(未定)으로 남을 터이니, 착오 여부의 판정도 미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형식적 인식에 관해서는 단정이든, 판정이든, 미정이든 이 모든 결정이 이성의 이름으로 이성 능력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다. 반면에 경험적 인식에 관련해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것은 경험적 인식의 진리 규정: '인식의 대상과의 합치'에서 진리의 척도는 이성의 밖, 곧 '대상'에 있기 때문이고, 게다가 그 인식을 수행하는 지성이라는 것도 고유한 방식의 작용 형식을 가지고, 그 틀에 따라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어서, 설령 하나의 '보편적' 인식이 있다 하더라도, 그 인식이 과연 '대상을 그 자체대로' 파악한 것인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태를 그것인 바 그대로, 있는 바 그대로 인식한 것이라는 경험적 진리가 어디까지나 인식자에 의존적이라는, 바꿔 말해 주관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객관적'이라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착오를 '주관적인 것을 객관적인 것으로 혼동함'이라고 규정할 때, 그 규정의 의미를 모호하게 만든다.

"인식이란 일종의 작용이며, 작용이란 작용자로부터 나온 활동을 말한다."(Th. Aquinas, Summa Theologiae, I, qu. 14, art. 4) 이 인식하는 활동을 통해 무엇인가가 인식되는 것이며, "인식된 것의 상(像, species)은 인식하는 자 안에 있다." "왜냐하면, 인식되는 것은 인식하는 자의 존재 방식대로 인식하는 자 안에 있기 때문이다."(Th. Aquinas, ST, I, qu. 14, art. 1) 인식이라는 것이 본디 어떤 것이 인식자에게 수용되는 것인 만큼, 그것은 인식자의 인식 방식, 수용 방식에 의존하기 마련이다. 인식자가 체용(體用) 개념을 가지고 있으므로써 사물은 실체와 활용의 틀로 파악이 되고, 인식자가 수량(數量) 개념을 가지고 있으므로써 사물은 측량된다. 그러므로 인식자가 제 아무리 자신의 인식이 존재자 자체와 합치하는가를 검사한다 해도, 그것을 자기의 능력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수단을 가지고서 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의 경험적 인식은 그것이 '진리'라고, 곧 대상과 합치한다고 보편적 이성에 의해 확인되는 순간에도 착오일 가능성을 포함한다.

인간의 경험적 인식은 예술가의 창작 활동도 아니며, 신의 존재 창조도 아니다. 경험적 인식에서 인식되는 것이 인식자의 인식 방식에 따라 수용되고 규정된다 해도, 그렇다고 인식 대상이 인식자의 창작물은 아니다. 예술품의 창작이나 신의 세계 창조에서는 허위가 있을 수 없다. 경험적 인식에서 허위가 얘기되는 것은 합치 여부의 검사의 척도가 인식자 밖에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경험적 인식은 어디까지나 인식자 밖에 있는 것에 접근 동화(assimilatio cognoscentis ad rem cognitam)함이다. 이것이 경험적 인식이 창작이 아니고 '인식'인 의미이다.

인간의 경험적 인식은 존재하는 것의 본질과 존재 방식을 파악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적 인식에서 진리는 그 인식이 존재하는 것 자체에 합치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런 인식을 우리는 객관적 인식이라 한다. 이때 '객관적'이란 그러니까 '존재자 자체(객관)에 타당한'이라는 뜻이겠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이른바 '경험적 진리'라는 것도 인식이 인식자 곧 '주관에 의존적'이라는 의미에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이 말은 '존재자 자체[객관]에 타당한' 것도 '주관에 의존적'임을 뜻한다. 즉 객관도 궁극적으로는 주관적 표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주관적 표상을 객관적으로 혼동함을 착오라 규정할 때, 이 '주관적'과 '객관적'의 의미를 잘 새겨야 한다. 만약 여기서 '주관적'은 '인식 활동하는 경험적인 그 개인에게만 타당한'의 뜻으로, '객관적'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타당한', 그러니까 결국 '상호 주관적으로 합의된'이라는 의미에서 '보편타당한'의 뜻으로 쓰인다면, 이때 착오란 사적(私的) 인식의 수준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겠고, 참된 인식이란 학적(學的) 인식을 지시하는 것이겠다. 이런 제한된 의미에서 사적인 경험적인 착오는 이성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인다면 방지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우리 인간은 학적 인식에서도 많은 착오를 범한다. 그것은 과학사가 입증해 주는 바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착오는 인간의 경험적 인식에게는 불가피하다. 경험적 진리, 존재자 자체에 타당한 인식, 객관적으로 타당한 인식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주관이라고 하는 인식자에 의존하는 한, 그리고 이 인식자가 신과 같은 완전함을 가지고 있지 못한 인간의 경험 의식을 지칭하는 한, 경험적 진리는 언제나 착오일 가능성을 가진다. 인간의 대상의식의 경험적 진리 추구의 길은 반복되는 착오의 길이기도 하고, 헤겔 말처럼 "회의(懷疑)의 길"이고 "절망의 길"(Hegel, PdG: GW9, S. 56)이다. 그러나 착오와 회의와 절망의 길은 의식이 그에게 등장하는 존재자를 관통하는 즉 경험(經驗)하는 길이며, 그 길의 종착점은 의식이 마침내 존재자와 하나가 되는 지점이다. 희망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뜻에서 의식의 경험은 진리를 향한 "의식 자신의 도야(陶冶)의 역정(歷程)"(같은 곳)이다.

'초험적 인식'과 가상

선험적 인식과 초월적 진리

경험적 인식에서 진리를 "인식의 존재와의 합치"라고 규정할 때, '인식'이란 인식의 내용 곧 인식된 것을, '존재'란 존재하는 것 곧 존재자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경험적 진리란 경험의식에 의해 인식된 내용이 존재하는 것 그대로와 똑같음이다. 과연 인간의 경험적 인식에서 그런 경우가 있겠는가, 있다면 무슨 의미에서 그러하겠는가에 관해서는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앞에서 해명된 것을 받아서 말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잠정적으로나마 저런 의미에서의 경험적 진리를 얘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단 경험적 진리가 있음을 납득하기로 하고, 이제 진리인 경험적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생각해 보자.

경험적 인식도 언제나 판단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판단은 내용뿐만 아니라 일정한 형식을 갖는다. 예컨대, "지금 저기에 두 사람이 서 있다", "한 사람은 황인이고, 또 한 사람은 백인이다", "저 장미꽃은 붉다", "햇빛이 저 장미를 붉게 물들게 했다" 등등에서 보는 것처럼, 인식을 표현하고 있는 판단들은 '(언제) (어디서) 무엇이 (어떻게) (얼마만큼) (어째서) 있다'든가 혹은 '무엇이 (왜) 어떠하다' 등의 틀로 짜여져 있다. 그러니까 판단들은 따라서 인식들은 이런 형식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형식들이 어디로부터 유래하는가를 반성해 보면, 그것이 인식하는 이성 자체에 원천을 둠을 알 수 있다. 경험적 인식은 바로 저런 형식에 근거하는데, 이 형식이 거꾸로 경험으로부터 유래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는 이런 형식을 '선험적'이라고 불렀다. 우리 이성은 이와 같은 선험적인 표상을 가지고 있고, 이 선험적 표상들의 사용 규칙 또한 가지고 있다. 예를 들자면, "모든 직관들은 연장적 크기들이다",(Kant, K.d.r.V., B202) "발생(존재하기 시작)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규칙상 바로 그에 뒤따르는 어떤 것을 전제한다"(같은 책, A189) 등과 같은 순수 지성 개념의 객관적 사용의 원칙들이 그런 것이다. 이처럼 순전히 이성으로부터 유래한 표상들로 이루어진 인식을 우리는 선험적 인식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선험적 인식은 인식하는 의식의 작용 규칙들로서, 이 규칙 아래에서 의식이 작동되는 것이므로 그것들은 인식하는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자 의식의 틀[형식]이다. 이런 틀을 바탕으로 해서 무엇인가 대상을 경험적으로 인식하는 의식이 활동할 수 있다. 그리고 의식이 활동해야 비로소 무엇인가가 인식된다. 그러니까 이런 경험 의식을 가능케 하는 근거·조건이 바로 경험 의식에서 인식되는 것 일반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Kant, 같은 책, A158=B197; 『전집』 X, S. 130; XVIII, S. 347: 조각글 5761; XXVIII, S. 239·S. 550 참조).

저런 선험적 인식이 경험적으로 인식되는 것 일반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자 조건이라 함은, 선험적 인식을 기초로 해서 경험적 인식이 성립하고, 그래야 비로소 인식되는 것도 있을 수 있다는 의미도 있지만, 더 나아가서 선험적 인식이 인식되는 것의 존재 형식을 이룬다는 것도 의미한다.

우리에게 경험적으로 인식되는 것은 반드시 '무엇'[실체]이고, '어떠하며'[속성], '언제'[시간], '어디에'[공간], '어떻게'[양태] 있다. 경험적 인식의 틀을 이루는 이와 같은 '실체', '속성', '시간', '공간', '양태' 등의 선험적 표상과 이 선험적 표상들의 사용 규칙인 선험적 인식들이 인식되는 것, 따라서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의 존재 틀을 이룬다. 이것은 인식 기능의 선험적인 기본 틀이 인식 대상의 기본틀임을 말한다. "인식하는 수단은 그것의 소질상 그의 대상과 같아야 한다."(Aristoteles, De anima, 430b 23f.) 다시 말하면 인식하는 의식작용과 인식되는 존재자는 기본적으로 동형성(同形性, conformitas)을 가지며, 이 점에서 양자는 일치한다(Th. Aquinas, ST, I, qu. 16, art. 2. 2 참조). 다름 아닌 이 형식의 일치에 근거해서 인식의 내용과 존재하는 것의 합치, 곧 경험적 진리가 가능하다. 그래서 칸트는 저 틀[형식]의 일치를 "모든 경험적 진리에 선행하면서 바로 이 경험적 진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초월적 진리"(Kant, K.d.r.V., A146=B185)라고 부른다.

우리가 여기서 칸트의 용어법을 그대로 따른다면, '초월적 진리'란 의식의 경험적 인식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의 본래적인, 그러므로 경험 활동에 선행하는 기능구조와 의식의 경험적 인식에서 인식되는 존재자의 존재구조가 일치함을 말한다. 그것이 '진리'인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인식자[의식]와 인식 대상[존재자]이, 그러니까 의식의 의식임[본질]과 존재자의 존재임[본질]이 일치함을 뜻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초월적'임은 그 인식하는 의식의 작용 형식이자 존재하는 것의 존재 형식인 표상들이 그 자신은 선험적이면서도 그러나 경험적인 의식 활동과 경험적으로 인식되는 대상들을 가능하게 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초월적 진리'를 이런 의미로 사용할 때 주의해야 할 바는, 앞서 형식적 진리란 형식적 인식의 참임을, 경험적 진리란 경험적 인식의 참임을 뜻한 반면에 초월적 진리는 같은 의미에서의 초월적 인식의 참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형식적 인식은 그것이 이성의 규칙에 어긋나면 허위가 되고, 경험적 인식 역시 사실과 맞지 않으면 허위가 된다. 그러나 초월적 인식에는 허위가 없다. 초월적 인식이란 경험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인식을 일컫는 것이니, 만약 하나의 선험적 인식이 경험적 인식을 가능토록 기능하며, 그것은 초월적 인식인 것이며, 어떠한 경험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기능도 수행하지 않는 경우에는 한낱 주관적인 표상에 머무는 것뿐이다. 또한 초월적 인식으로 기능하는 선험적 인식은 그것에 기초하여 경험적 진리가 가능하다는 점에서는 초월적 진리성을 갖는다. 그렇지만, 선험적 인식에 허위란 있을 수 없다. 선험적 인식은 초월적 기능을 하거나 말거나 하기는 하지만, 허위인 경우는 없고, 또한 마찬가지로 초월적 인식도 허위인 경우는 없다. 그것은 신이 하는 인식에 허위가 없는 것에 비견될 수 있다. 신의 인식은 다름 아닌 신의 존재 창조로서, 신은 인식하거나 말거나, 즉 존재를 창조하거나 말거나지, 잘못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 이성의 선험적 인식이 신의 인식처럼 완전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선험적 인식의 성격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초월적 가상과 '초험적 인식'

선험적 인식은 대상을 형상(形相)화한다는 의미에서 초월적으로 진리일 수는 있으나 결코 허위일 수는 없다. 선험적 인식은 경험적 의식 작용을 가능하게 하고 따라서 경험적으로 인식되는 대상을 대상으로 규정함으로써 그 대상과 합치한다는 점에서 참된 인식이다. 이제 우리가 이것을 초월적 진리라고 부른다고 해서, 이에 반대되는 것 곧 초월적 허위라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초월적 허위란 이를테면 선험적 인식이 자기의 작동에 의해 형상화된 대상의 대상성과 합치하지 않음이겠는데, 이런 경우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선험적 인식이 초월적으로 기능하지 않으면 아무런 대상도 형상화되지 않겠지만, 그러나 일단 기능하면 그것은 그것에 의해 형상화된 대상의 순수 형상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사태가 이렇다 해서, 선험적 인식이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선험적 인식도 종종 월권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로써 종종 '초월적 가상'이라 불려야 할 것이 나타난다.

형식적 인식은 표상들을 오로지 지성의 순수한 사고 규칙에 따라 결합하고 분리하는 데서 성립한다. 그러므로 형식적 인식은 그것만으로는 결코 적극적으로 어떤 실재성도 함의하지 않는다. '2+3=5'라는 판단이 맞다 하여, '2'나 '3'이나 '5'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푸른 하늘은 푸르고, 검은 하늘은 검다'는 판단이 참이라 하여, 이로부터 '푸른 하늘'이 존재하고 '검은 하늘'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존재하다'라는 개념을 '이 책상이 존재한다', '물이 존재한다'는 언표에서의 '존재하다'는 개념의 뜻과 똑같이 사용한다면 말이다. 또한 "완전한 것은 완전함이라는 성질을 갖는다. 그런데 완전함에는 당연히 존재함도 포함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존재함을 결여할 터이고 따라서 완전함일 수 없으니까, 따라서 완전한 것은 존재한다"는 추론도, 우리가 '존재함'을 감각 지각에 기초한 사물에 대한 의식의 태도로 납득하는 한,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 형식적 인식은 어느 경우나 의식 내 표상들의 연관 관계를 표현할 뿐, 의식 밖의 세계와 관련이 없다. 의식 밖의 세계, 통칭 존재하는 세계에 관계하는 것은 경험 의식이다. 경험이란 다름 아닌 존재하는 세계를 관통하여 증험하는 의식작용을 일컬으니 말이다.

경험이 의식 밖의 세계를 인식하는 의식 활동이고, 의식 활동 중에서도 의식 밖의 세계와 접하는 유일한 통로가 감각인 한, 존재하는 사물은 감각 재료를 바탕으로 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그런 만큼 경험적 인식에서 대상을 대상으로 형상화하는 선험적 인식의 초월적 기능도 그 활동 범위가 감각적 대상으로 제한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선험적 인식도 감각 경험의 세계 너머에서는 아무런 대상도 규정할 수가 없다. 규정될 소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냐, 둘이냐, 모두냐 하는 양(量)의 개념도, 순도(純度)가 몇 %다고 하는 질(質)의 개념도, 무엇 때문에 그것이 발생했다는 인과의 관계(關係) 개념도, 실제로 있다·없다는 존재양태(存在樣態) 개념도, 언제·어디에 라는 시간·공간 표상도 모두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재료를 틀지우는 선험적 표상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경험적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지 않고, 이념을 세우고 그를 실천하는 데에도 관심이 많고, 현실에서는 도저히 달성될 수 없는 곳에는 희망의 나래를 펴 닿으려 한다. 그래서 이성은 마땅히 경험적 인식 영역에 그 사용을 국한시켜야 할 선험적 도구들을, 경험 영역을 넘어가는, 즉 초험적인 영역을 설계하는 도구로도 곧잘 사용한다.

인식이 한계에 부딪쳐도 이성은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사변(思辨)이다. 이때 사변을 의미 있게 주도하는 것은 진리의 이념이 아니라 이성의 관심이다. 무엇이 지식의 체계를 위해서, 자연의 전 질서 체계를 위해서, 인간의 도덕성의 완성을 위해서 필요한가에 이성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 때문에 그의 생각에 필요한 자료가 감각으로부터 주어지지 않을 때 이성은 상상력을 통해서라도 사변의 자료를 얻는다.

경험적으로 인식되는 '자연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은 원인을 가진다'는 것은 경험적 사고의 일반 규칙이다. 이에 이성은 이 원인 계열의 최초의 것을 상정하고, 그것을 우주의 시초라 생각한다. 또한 결과 계열의 최종의 것을 생각하고 우주의 종말을 생각한다. 그러나 우주의 '시초'란 더 이상 무엇에로 소급시킬 수 없는 것을 뜻할 터이니 '발생하는 모든 것은 원인을 갖는다'는 사고 원칙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만약 그것이 '무(無)'를 지시한다면 없음으로부터 있음이 유래한다는 모순을 표현하는 것이다. '종말' 역시 그것이 존재로부터 완전한 무에로의 이행을 뜻한다면 모순된 생각이긴 마찬가지다. 인간 이성은 스스로 능력의 한계, 지혜의 한계를 자각한다. 그리고 이런 불완전함에 대한 자각은 자기 내에 완전함의 표상이 있기에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고, 이런 완전함의 표상을 일으키는 자, 곧 완전한 자가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 대응하는 존재자는 언제·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우리의 지성 능력이 아직 덜 발달되어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당초부터 지성의 한계 밖의 것이어서 지성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은 원리상 시간·공간적으로, 감각적으로 표상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경험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들에는 따라서 아무런 실질적 존재자도 대응하지 않으므로 그런 것들은 이를테면 초월적 가상이다.

이런 초월적 가상에 이끌려 이성은 마치 무엇인가를 인식한 것처럼 말한다: '우주의 종말이 오면, 전지전능하고 전선(全善)한 자가 착한 사람은 구제해 준다.' 이런 언표도 인식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보아 일종의 인식, 이를테면 '초험적 인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정확히 표현하면 이런 것은 인식이라기보다는 인간 이성의 상상이거나 희망이다.

인간적 인식의 한계와 의미

인간에게서 인식은 형식적인 인식에서처럼 관념들의 논리적 연결이거나, 경험적 인식에서처럼 대상에 대한 감각적 파악이다. 형식적 인식은 그것이 참이라 하더라도 실질성을 갖지 못하며, 감각을 통해 실질성을 얻는 경험적 인식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인간에게는 고유한 인식의 틀이 있고, 인식능력에 한계가 있음으로써, 인간의 인식은 언제든 착오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경험 의식은 착오의 도정에서 성장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착오에 빠진다지만, 그렇다고 착오가 두려워 노력하지 않는다면 어찌될까?

착오를 피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착오란 판단하는 데 있으므로, 결코 판단하지 말지어다, 그러면 결코 착오에 빠지는 일이 없으리라. 그러나 지식도 판단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니, 판단하지 않는 자는 아는 것도 없을 터이다.

"인간이 판단할 때 전적으로 착오에 빠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착오적인 판단에서조차 지성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한 것이므로, 그 안의 모든 것이 허위일 수는 없고, 언제나 무엇인가 진리적인 것이 들어있다."(Kant, 『전집』 XXIV, 1, S. 84) 어떤 판단이든 지성으로부터 생겨나며, 따라서 그것은 항상 어느 정도 지성의 성질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일견 일관되게 허위인 것으로 여겨진 인식도 언제나 부분적으로 허위인 것이며, 언제나 일정 부분 진리를 담고 있다. 심지어 미치광이의 판단에서도 이를 잘 조사해 보면 적어도 부분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Kant, 『전집』 XXIV,1, S. 94 참조). 인간 의식은 착오를 통해서 진리에 이르고, 착오 속에서도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

인간의 의식이 오로지 지성적이라면 그는 판단함에서 언제나 충분히 주의할 것이고,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요소가 있을 때는 판단을 중지할 것이다. 그로써 그는 결코 착오에 빠지지 않는 대신에, 아주 조금 아는 좁은 세계 속에 머무를 것이다. 그러나 인간 의식에는 지성과 더불어 상상력, 정념도 심어져 있어서, 인간은 잘 모르지만 그리고 때로는 틀리게 알지만 그러나 훨씬 더 넓은 세계 속에서 산다. 어느 편이 인간적인가?

참고문헌

Aquinas, Th., Summa Theologiae.

Aristoteles, De an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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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artes, R.,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Hegel, G. W. F., Enzyklopädie.

_______________, Phänomenologie des Geistes[PdG]: GW9. hrsg. v. W. Bonsiepen/R. Heede, Hamburg 1980.

Kant, I., Kritik der reinen Vernunft.

_______, Gesammelte Schriften[『전집』], hrsg. v. der Kgl. Preuß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 // v. der Deut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 zu Berlin, Bde. I-XXIV, XXVII-XXIX, Berlin 1902∼.

이성(理性. logos. ratio. reason. Vernunft)

이성의 의미

사람들은 흔히 일의 이치를 들어 사리(事理)라 일컫고, 물질에도 이치[物理]가 있으며, 마음에도 이치[心理]가 있고, 사람다운 행실의 이치[倫理]가 있으며, 생각과 말에도 이치[論理]가 있다 한다. 수에도 이치[數理]가 있는가 하면, 글 깨우치는 이치[文理]도 있다 한다. 그 뿐만 아니라 하늘의 이치[天理]와 땅의 이치[地理]도 말하며, 그것을 탐구한다. 무엇인가 이치가 있다면, 이치에도 상하위가 있을 터이고, 상하가 체계를 이룰 때는 최상위의 이치[原理]를 생각할 수 있을 터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근원적 이치, 이런 원리를 사람 안에서 찾고, 어떤 사람들은 사람 밖에서 찾는다. 사람 안의 원리적 성격을 통칭하여 '이성'(理性)이라 하기도 하고, 사람 밖의 세상 이치를 '천도'(天道)라 부르기도 하며, '천도'는 곧 '이성'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든 '이성'은 보편적 질서 원리를 뜻한다.

개념이 사태와 부합할 때 그 개념은 참답다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개념이 그것의 사태와 부합하는지 어떤지를 판정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며, 원리적인 개념의 경우에는 그 사태와의 부합 여부를 알아낸다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할 수도 있다. 어떤 개념들은 사태에 따라 형성되지만, 다른 어떤 개념들은 오히려 사태를 형성시킨다. 가령 '이성'과 그 가족 개념들 - 도(道), 이(理), 로고스(logos), 라티오(ratio), 페어눈프트(Vernunft) 등등 - 이 과연 존재하는 어떤 사태를 표상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성'의 개념과 더불어 어떤 사태가 형성되는지를 판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거나 거의 무의미한 일이다.

'이성' 개념은 긴 세월을 두고 형성되어 왔으며, 그 형성의 역사는 사상의 변천사로 세계관, 인간관, 종교관의 변천 역사와 한 가닥이다. '이성' 개념이 형성 변천되어 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성'의 의미가 불변했음을 말한다. 언제 어디 누구에게나 '이성'은 '세계와 인간의 보편적 질서' 원리를 뜻한다. 그러니까 "이성은 없다", 곧 "세상과 인간 세계에 보편적 질서 원리란 도무지 없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이성은 상대적이다"거나 "이성은 다수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만약 다수의 이성이 주장된다면, 하나의 주장에 대해서 나머지 주장들은 반(反)이성이나 무(無)이성을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성 개념의 변천은 보편적 질서라는 그것의 의미 변화에서가 아니라, 보편적 질서의 주체 내지는 연원에 대한 견해의 변화에서 온 것이다. 이성의 주체 파악을 위한 인간의 노고는 인류 문화를 일구는 온갖 노고 가운데에서도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성의 근원에 대한 기본적인 또는 근본적인 생각이 바뀔 때 시대가 변했다고 평가한다. 고대와 중세, 중세와 근대는 획기적인 정치·종교적 사건에 의해서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도 구별할 수 있다는 말이다. - '이성' 개념의 변화는 곧 '주체'[주관, subjectum]·'객체'[객관, objectum] 개념의 변천을 가져왔으며, 그것의 획기적 변천이 시대를 구별하게끔 만든다고 볼 수도 있다. - 그러하기에 오히려 획기적인 정치·종교적인 사건은 '이성'에 대한 생각의 변화와 함께 일어났다고 보는 편이 더 합당할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세계사가 '이성' 개념의 형성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사태에 적확할 것이다. 하나의 이성 아래 하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며, 두 개의 '이성'이 있다면 두 '세상'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우주(universum)'을 말하는 것은 '하나의 이성'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성 개념의 형성

우리말 '이성(理性)'의 문자적 유래는 유송(劉宋)의 범엽(范曄, 398-455)이 쓴 『후한서(後漢書)』의 한 귀절["夫刻意則行不肆 牽物則其志流 是以聖人導人理性 裁抑宕佚 愼其所與 節其所偏 雖情品萬區 質文異數 至於陶物振俗 其道一也"(卷六七, 堂錮列전 第五十七 序)]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의 광범위한 사용은 서양 사상의 유입과 더불어 일단은 그것의 번역어로서라 해야 할 것이고, 그 대표적인 서양 원어는 희랍어 λ?γοs, 라틴어 ratio, 독일어 Vernunft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 개념의 의미 천착은 저들 개념의 대의 파악에서 출발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그런데 λ?γοs, ratio, Vernunft 혹은 reason의 용처(用處)는 매우 다양하므로, 우리가 이것들 모두를 어우르는 말로 '이성'을 택한다면, 이성의 의미 영역은 전통적으로 도(道), 이(理) 혹은 성(性)이라 표현되던 것까지에 미친다.

λ?γοs나 ratio나 본디 '셈하다'를 뜻하는 λ?γω와 reor의 전성어로서, 셈·계산이라는 기본 의미로부터 비율·관계·추리·개념적 사고·고려·계획·방법·설명·증명·서술·이론·체계·원칙·원리·근거·학설·말·언표까지의 의미를 공유한다.

알크마이온(Alkmaion, BC c. 500)이 "인간은 개념적 사고를 한다는 점에서 여타의 것들과 구별된다"(H. Diels/W. Kranz, Die Fragmente der Vorsokratiker, Verlag Weidmann, 1951, Bd. I, S. 215, Fr. 1a)는 것을 설파한 이래 일찍부터 인간은 '이성을 가진 동물'(ζωον λ?γον ?χον)로 규정되었다.

"우리는 이제 인간의 기능은 이성과 일치하는 혹은 적어도 이성과 분리되지 않은 영혼의 활동이라는 것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Aristoteles, Ethica Nicomachea, 1097b 22-1098a 18)

이로부터 '이성'이라는 개념도 그 의미가 차츰 충전되어 갔다. 키케로(Cicero, BC 106-43)는 "인간은 이성을 나눠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이성을 통해 귀결을 예상하고, 사물들의 원인들을 통찰하며, 그것들의 전개 단계들과 이를테면 선행하는 근거들에 무지하지 않다"고 보았으며, 또한 인간은 이성을 통해 "유사한 현상들을 비교하고 결합하며, 현재하는 것과 다가올 것을 연결하며, 전 생(生)의 과정을 쉽게 통찰한다"(Cicero, De officiis, I, 4)고 파악함으로써, 이성의 기능을 규정함과 동시에 이성이 인간만의 것이 아님을 지시하였다. 이런 사정의 파악은 "이성적 동물임이 인간의 특성"(proprium hominis est esse animal rationale: Th. Aquinas, Summae contra gentiles, III/1, cap. 39)이라 논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에게서도, 자연상태에서 "이성적일 수 있는 동물"(animal rationabile)인 인간은 자기 형성의 노고를 거쳐 자신을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로 만든다(Kant, 『전집』 VII, S. 321)고 본 칸트에게서도 마찬가지다.

논리학 교과서에서 개념의 논리적·본질적 정의의 한 예로 흔히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가 제시될 정도로, 이성은 인간만의 고유한 성질로 얘기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성이란 우주 세계의 질서 자체이며, 이 우주 질서에 인간이 참여하는 한에서 인간은 이성적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우리는 그 좋은 사례를 고대 중국의 유가나 도가 사상에서도,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상에서도, 오늘날 가히 세계적인 보편적 종교라 할 수 있는 기독교 사상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주역(周易)』의 '乾爲天 卦爻辭'에서 "하늘의 법도가 변화하니, 만물은 각기 자신의 본성을 바르게 하면서, 서로 합하여 큰 조화를 보전한다"(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大和)는 언명과 함께, 「계사전(繫辭傳)」(上, 十二)에서는 "형태를 가진 세상 만물을 그릇이라 한다면, 이것을 주재하는 형태 위에 있는 것을 도라고 한다"(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라는 규정을 우리는 본다. 경우에 따라서 사람들은 우주 전체의 운행 원리로서의 '도'(道)에 대하여, 이 도의 분수(分殊) 내지는 세목(細目)으로서 개개 사물에 내재하여 각기 그 사물을 주재하는 원리가 '이'(理)라고 구분하기도 하였으나, 그 근본에 있어서 도리(道理)는 하나로 이해되었다.9)

도리는 또한 우주 자연의 운행 원리일 뿐만 아니라, 이 운행 원리를 가늠하여 인간이 그 행실에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법도이고, 이 법도로 말미암아 인간은 참다울 수 있는 그런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하늘이 정해준 바가 본성이며, 본성을 따르는 것이 법도요, 이 법도를 마름질하여 격(格)을 세우는 일이 가르침이다. 법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나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떨어질 수 있으면 법도가 아니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道也者 不可 須臾難也 可離 非道也)는 『中庸』의 첫 구절은 그런 생각을 담고 있는 한 예이다. 그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적 세계관도 이런 생각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BC 544-483) 이래로 고대 그리스 사상가들에게 있어서 로고스(λ?γοs)는 무엇보다도 우주의 원리를 의미했고, 세계는 이성에 의해서 주재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세계는 온갖 것들의 무질서한 무더기가 아니라 질서 정연한 전체 곧 코스모스(κοσμοs)이다. 인간 안에 깃든 로고스는 인간에게 진리에 이르는 바른 길을 지시하는 사고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윤리적 자세의 척도로 납득되었다.

플라톤(Platon, BC 427-347)에게서 사고(διανοεισθαι)란 영혼이 탐구하고자 하는 대상에 관해 자기 자신과 나누는 대화[말, λ?γοs]이다(Platon, Theaitetos, 189e-190a 참조). 또한 타자와의 대화는 대화 상대자의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이미 그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진리를 자각하도록 촉발하는 매체이다(같은 책, 157c 참조). 인간은 누구나 자신 안에 진리의 척도를 지니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대화 참여자는 한결 같이 중요한 위치를 가지며, 참된 대화를 이끄는 것은 언제나 로고스이다. 이 로고스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322/1)에게서는 곧바로 도덕적 정도(正道, ?ρθοs λ?γοs, recta ratio)이다. 정도를 따라 사는 것이 윤리적 태도이며, 그 정도란 다름 아닌 중용(中庸, μ?σοs)의 길이다(Aristoteles, Ethica Nichomachea, 1138b 18f. 참조). 도덕적 인간의 징표는 그의 정념(情念)이 로고스의 지도에 따른다는 점이며, 이런 경우에 인간은 최고 완전성에 도달한다. 그런데 아는 자만이 행할 수 있고, 행하는 자만이 진정으로 아는 자인만큼 인간의 최고 완전성은 그의 이성(λ?γοs)이 완전하게 발달하는 데에 있다(같은 책, 1144b 30f. 참조). 로고스의 이런 의미는 스토아 사상을 거치면서 더욱 풍부함을 얻는다.

스토아 사상에서 로고스는 일차적으로 세상사를 결정하는 내적 원리로서 우주의 정기(精氣, Geist)로 이해되었다. 그것은 헤라클레이토스에서처럼 불에 비유될 수 있는 질료 원리로서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며, 확고 부동한 법칙성에 따라 우주의 전개를 이끄는 것이다. 역사는 로고스가 관통하는 이성적 과정이며, 이 우주의 정연한 질서와 단계 내에서 각양 각색의 만물은 각기 자기의 위치를 가지며, 인간 또한 마찬가지이다.

보편적인 이성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것이 그러나 스토아 철학에 있어서는 만물이 이성을 구유하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연 사물 가운데 인간만이 이성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이성을 담지하고 있는 개개 인간의 영혼은 보편적 이성의 한 부분들이다(Seneca, Epistulae morales ad Lucilium, Ep. XLI 참조). 인간들 사이에 의견의 일치가 일어난다는 사실은 그들의 이성 능력이 보편적인 이성 능력으로부터 유래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인간은 자연 안에서 최선의 것이다(Seneca, Naturales quaestiones, I, 13 참조). 이성은 세상에서 가장 신적인 것이며,(Cicero, De legibus, I, 22 참조) 그것은 인간과 신들을 연결시킨다(Cicero, De natura deorum, II, 62 참조).

행위에 있어서 이성은 도덕적 행위의 규준으로서 곧 자연과 짝을 이루는 것이다. "자연에 맞게 살라"(naturae convenienter vive)는 것이 스토아 철학의 도덕 명령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사람은 누구나 세상사를 순리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사란 두루 이성의 지배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되어가는 일을 거부하거나 생(生)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수용하지 않는 것은 비도덕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주 세계의 이성[合理性]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더 좋은 세계, 더 완전한 세상을 건설한다는 것은 인간의 과제가 아니며, 부질없는 짓이다. 세계의 완전함은 결코 의심할 수 없으며, 그것은 이성을 의심하는 일로, 이성 자체를 의심할 척도는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이 도덕적 완전성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자기의 이성을 우주의 보편적 이성에 합치시키는 것이다. 모든 비도덕적 행실은 종국에는 우주질서에 대한 비이성적 반발이다. 이런 반발은 정념의 규제 받지 않는 출몰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각자 스스로 자신을 완전히 이성화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니까 인간은 전적으로 로고스가 되도록, 바꿔 말하면, 심정(pathos)의 동요를 완전히 절멸시키도록 전념해야만 한다. 거기에 바로 무감정(apatheia)의 이상이 있다(Diogenes Laertius, VII[Zenon], 117 참조). '무감정'이란 단지 정념이 이성에 굴복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념이 완전히 제거되어 인간이 전적으로 로고스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 자체의 이법(理法)이요, 자연물 가운데 특별한 생물인 인간의 생명 원리이자 사고와 행위의 규준으로 이해되던 이성은 기독교 사상에 와서 당초에는 초월적인 신 안에 그러니까 인간 위에, 그러나 예수의 육화(肉化) 사건을 통하여 인간 안에도 있는 것으로 납득된다.

"태초에 말씀[道·理性]이 있었다(?ν ?ρκη ? λ?γοs). 말씀은 하느님[神]께 있었으며, 말씀이 하느님이었다. […] 만물은 말씀을 통해 이루어지며, 말씀 없이는 한 가지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에 있어서 말씀 가운데 생명이 있었으며, 그 생명은 인간의 빛이었다. […] 그것은 이 세상에 온 모든 인간을 비추는 참다운 빛이었다."(공동번역 『성서』, 요한복음 1:1-9)

알렉산드리아의 필론(Philon ho Alexandria, BC 24-AD 50)이 파악했고, 교부들과 스콜라 철학자들이 이해했듯이, 로고스는 신적인 것이지만 신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제2의 신이며, 신과 세계 사이의 일종의 매개자이다. 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것도 로고스이다. 로고스는 신의 계시이며, 신을 공표하는 말씀이며, 그 말씀은 인간을 지혜로 인도하고 때로는 강제하고, 약한 자에게 치유를 준다. 인간을 위한 신의 계명으로서 로고스는 올바른 길(?ρθοs λ?γοs)이며, 사람들의 관습에서 생긴 법과는 대조되는 자연법이다. 신의 형상으로서 로고스는 또한 인간 안에, 곧 지성 안에 자신의 모상(模像)을 가진다. 이런 뜻에서 인간은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

달리 말하면, 로고스는 세계를 창조한 주(主) 하느님의 세계 창조의 근본틀(forma principalis)이자 운행 원리이며, 그것은 이성 자체 곧 순수 이성(ratio pura)이다. 이 신의 이성(ratio divina)에 인간이 참여(μ?θεξιs)한 그 만큼 인간도 이성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의 이성은 신의 이성과 유사하고 그것의 모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의 이성과는 달리 인간의 이성은 불완전하고, 그런 점에서 신의 이성과 인간의 이성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기가 조금 할당받아 가지고 있는 이성의 힘으로 신의 이성의 길을 따라 걸음으로써 신의 은혜를 입어 최선에 이를 수 있다.

이성 개념의 변이

자연에 내재하는 이성, 자연을 주재하는 신의 이성은, 인간도 자연물 가운데 하나인 까닭에 인간을 또한 관통하는 이성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참다운 이성의 주체는 아니고, 그런 의미에서 인간 위에 있는 이성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성은 인간의 이성이며, 이성의 주체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생각은 '계몽(啓蒙)'이라는 이름과 함께 퍼졌다.

"이성 혹은 양식(良識)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고 우리를 짐승과 구별되게 해 주는 유일한 것이므로,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온전히 갖추어져 있다."(Descartes, Discours de la Méthode, I, 2)

'근대' 혹은 '현대'라는 시대 구분을 하면서, 인간이야말로 진정한 이성의 주체라는 생각은 개명된 것이고, 자연 이성 또는 초자연적 이성을 생각하는 것은 덜 깨인 짓이라는 게 광범위하게 납득되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의 철학적 결정판은 아마도 칸트(I. Kant, 1724-1804)의 『순수이성비판』(1781), 『실천이성비판』(1788), 『순전한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1793)에서 표현된 이성 개념일 것이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BXVI)의 중심에는 바로 이성의 주체에 대한 생각의 대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초월적 이성의 세계 주재 사상은 인간 한계에 대한 절실한 자각과 그 한계의 극복을 타력(他力)에나마 의존하려는 희망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 신앙 체계에서 이 '희망'은, 신은 자연 만물의 근원이자 근거이고 주(主)이며, 반면에 그 안에 인간도 포함하는 만물은 신의 피조물로서 세상에 잠시 머무는 객(客)이고, 신이 그의 사업을 하는 데 쓰는 도구적 존재임을 수용해야 하는 대가를 치른다.

신은 만물의 중심이고 그의 이성은 세계의 질서 자체이고, 그런 의미에서 '순수 이성'이다. 신은 또한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의 뜻에 따라 만물을 운행한다는 의미에서는 '순수 의지'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自由) 자체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자연 만물이 그 존재 생성에서 무엇엔가로부터 비롯한 것(ens ab alio)이라면, 신은 그리고 오직 신만이 자신으로부터 비롯한 것(ens a se)이니, 신은 만물의 궁극의 원천 곧 제일 원인[causa sui]이고, 이 궁극의 원인은 자연 인과 계열 너머에 있을 수밖에 없으니, 신은 우리 인식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연의 존재 생성 계열에 대해서도 초월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무런 재료 없이도 있지 않던 것을 있도록 하게 하기도 하고, 이미 있는 것을 달리 있도록 하게 하기도 하고, 있는 것을 없도록 하게 할 수도 있는 순수한 활동(actus purus)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순수 이성'이나 '자유 의지'는 매인 데 없는 존재자 곧 신에게나 타당한 술어라 해야 할 터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계몽'의 기치 아래 순수 이성과 자유 의지를 인간의 술어로 돌리고 인간을 만물의 주인의 자리에 앉히고자 하였다. 그래서 인간은 '주체'(subjectum)이고 기체(基體, substantia)로 주장되었다. 이 주장의 정점에 칸트가 서 있다.

인간은 철두철미 신체적 존재이고 그런 한에서 자연의 일부이다. 그러나 자연이란 무엇인가? 질료[내용]적으로 볼 때 자연(natura materialiter spectata)은 물질의 집합이지만, 형식적으로 볼 때 자연(natura formaliter spectata)은 수학적-역학적 법칙 체계임을 '계몽된' 자연과학자들은 들춰내 보여 주었다. 그런데 수학과 역학의 원리, 그것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그것은 자명하게도 수학을 하고 역학을 하는 인간, 곧 '나'의 이성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러니까 자연의 질서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이성에 기반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理性)은 문자 그대로 그에 의해 인식되는 자연의 이치, 원리로 간주된다.

인간 이성이 그것의 형식적 원리인 자연은 인간에게 그러하게 파악된 자연이라는 뜻에서 칸트는 그것을 '현상'(Erscheinung)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현상은 인간에게 그밖에 달리 있을 수는 없는 현존하는 것 자체 곧 실재이다. 자기 비판을 거친 인간 이성은 이른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물', '사물 자체'란 우리 인간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바로 그것임을 안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그것 그대로 파악하는 인간의 인식 방식이 자연과학이다. 그러니까 이른바 진리의 학문인 자연과학을 통해 존재자는 자기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런데 자연과학은 인간 이성의 산물이다. 무엇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인가를 가장 권위 있게 밝혀 내는 것은 자연과학인데, 이 자연과학은 있는 것에 대한 인간의 인식 방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인가는 인간의 인식 방식에 의존되어 있으며, 적극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인식 방식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규정하는 것이다. 인간이 모든 실재하는 것을 인식하며, 이 인식을 통해 실재하는 것은 그 실재하는 것으로 정(定)해지고 위치 지어진다. 인간이야말로 모든 실재하는 것의 중심이며, 그런 의미에서 주체이다. 이것은 인간의 학적 인식이란 인간에 독립적인 사물에로의 동화(assimilatio ad rem: Th. Aquinas, De veritate, qu. I, art. 1 참조)가 아니라, "그가 그의 개념들에 맞게 사물 안에 집어넣었던 것"(Kant, K.d.r.V., BXII) 도출하는 일이다.

자연과학의 성과에 자신을 얻은 인간의 이성은 무엇이 존재하는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를 가려내는 판관(判官)임을 자부하고, 실재하는 것이란 다름 아닌 인간의 이성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뜻에서 '실재'는 곧 '현상'이다. 그리고 이 현상은 우리 인간에 대하여 나타난 것이란 의미에서 '대상'(對象, Gegenstand)이다. 그래서 이제 '사물'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인식하는 이성에 대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이런 관계는 '인식하는 이성=주관·인식된 대상=객관'으로 설정(positio)된다. 그리고 여기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관조(theoria)하고 인식하는 이성은 이론 이성 또는 사변 이성으로 이해되고, 이 이론 이성은 자신이 '이미 갖추고 있는'[선험적인, a priori] 기능에 따라 대상을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그 대상을 대상으로 가능케 하는 주체라는 의미에서 "초월적 주관"(transzendentales Subjekt)이라 불린다(같은 책, A346=404 참조).

칸트가 말하는 초월적 주관으로서의 이성이 경험에 앞서 이미 갖추고 있는 인식 기능은 그것의 선험적 구조에 기반하는 것으로 다름 아닌 근대의 수학적 자연과학을 가능하게 한 인식 형식을 말한다. 인간 이성은 사물을 시간·공간 질서 위에서 양(量)·질(質)·관계(關係)·양태(樣態)의 개념에 맞춰 인식한다. 우리가 자연 세계를 수학적-역학적 질서 체계로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 방식이 시간·공간상의 것만을 감각하고, 그 내용을 수량과 힘의 관계로 정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 이성은, 무엇인가가 (혹시 신이 보기에는)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초시간적·초공간적이어서 감각될 수 없고, 수량적으로 파악될 수 없으며, 힘의 영향 관계로 포착될 수 없는 것이라면, 바꿔 말해 그것을 우리가 인식할 수 없고, 그것이 우리에게 결코 인식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며 없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식한다 함은 그것의 무엇임(essentia)과 있음(existentia)의 방식을 규정하는 것이고, 우리에 의해서 이렇게 규정된 것만이 '우리에 대해서 있는 것' 곧 대상(對象)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관이 존재자의 존재를 규정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의 면에서 그러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존재자가 주관에 의존되어 있다 해도 그것은 존재자의 존재 형식, 나아가서 존재자들의 총체인 자연의 법칙 체계의 원리의 면에서만 그러한 것이다. 인간이 자연물의 하나로서 그 안에서 터잡고 살고 있는 자연은 단지 법칙체계일 뿐만 아니라 질료적인 자연인만큼, 인간은 여전히 - 적어도 질료적인 면에서는 - 자연에 의존되어 있고 예속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요컨대 인식 주관으로서의 인간은 질료를 수용한다는 점에서는 감수적(sensibel)이고 수동적이다. 그러면서도 수용된 질료를 규정한다 즉 그 질료에 형식을 부여한다는 점에서는 자발적이고 능동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 이성은 굳이 표현하자면 "부분적으로 (자연) 현상의 창조자"(Kant, 『전집』 XV: 조각글 254)다.

자연 대상을 인식하는 인간의 이론 이성은 주어지는 것을 자신의 인식 방식대로 수용, 하나의 대상으로 규정할 뿐, 자연에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실천 행동을 통해 자연에 변화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인간은 특히 도덕 행위를 통해 삶의 조건으로서 자연에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자연 속에서 자연 존재자로 살고 있는 인간이 다른 한편으로는 사태의 '자연스런' 흐름과는 달리 '마땅히 해야 한다'는 이상(理想)에 따라 행위한다. 이때 '마땅히 해야 함'은 감성적 자연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표상이므로, 그것은 순수한 이성의 이념이라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순수한 이념에 따라 도덕 행위를 주도하는 인간의 힘을 칸트는 순수한 실천 이성이라고 부른다. 순수한 실천 이성은 인간이 인격적 존재자로서 모든 도덕 행위에서 준수해야 할,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Kant,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전집』 V, S. 30)는 원칙을 제시하고,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사용치 않도록 행위하라."(Kant,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전집』 IV, S. 429) 실천 강령을 자율적으로 세운다.

인간의 도덕적 실천의지는 오로지 이성이 세운 도덕 법칙에 따라 행위할 뿐 그 행위의 동기에서 어떤 자연적 영향도 받지 않는다. 그 점에서 그것은 자유로운 의지로 이해된다. 그런데 인간의 실천적 행위로서 도덕 행위는 자연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까 자연에서 일어나는 사건 가운데 어떤 것은 자연 중의 연쇄적 기계적 인과 원인에서가 아니라 도덕적 실천의지의 자유 원인에서 일어나는 것이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때 실천 의지가 준수해야 할 도덕 법칙을 세운 이성, 이를테면 순수한 실천 이성의 주체인 인간은 자연의 인과 계열 밖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이해에서 칸트는 신체적 존재로서 인간은 자연 세계에 속하지만, 도덕적 존재로서 인간은 예지 세계(mundus intelligibilis)에 속한다고 본다.

자연적인 존재자로서 인간은 그의 자연적인 소질로 인하여 자주 감성적 동기에 따르며, 그것은 순수 이성이 세운 도덕법칙과 흔히 충돌한다. 드문 일이긴 하지만 그러나 때로 인간은 자연적 성향(propensio)을 뒤로하고 도덕법칙을 준수하기도 함으로써 그가 자유로운 행위 주체, 곧 인격(persona)임을 보여 준다. 이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엇이 수많은 욕구들을 통해 끊임없이 자연에 의존하는 존재인 우리로 하여금 […] 그런 욕구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길 만큼 그토록 높이 고양되도록 하는 것일까?"(Kant, Religion: 『전집』 VI, S. 49)하고 물어 볼 수 있다. 이 물음에 대해서 칸트는 "개념적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신적인 유래를 알려 주는 어떤 (우리 안의) 소질이 심성에 작용해 감동을 일으켜서"(같은 책, S. 50) 도덕 법칙을 준수케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의 궁극목적'에 부합하기 때문(Kant, Kritik der Urteilskraft: 『전집』 V, S. 455 참조)이 아닐까 반성하면서, 인간 행위뿐만 아니라 자연 전체를 주재하는 인간 위에 있는 어떤 힘, 질서 원리를 다시금 환기시킨다. 산의 정상에 오르면 이내 내리막길이라던가. 이로써 계몽주의는 그 정점에서 다시 인간 이성 너머의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헤겔(G. W. F. Hegel, 1770-1831)의 '세계 이성' 내지는 '정신'과 마주친다.

자유 없이는 실천의지도 미적 상상력도 불가능한 것이고, 자유는 현실적으로는 의지를 통해, 이상적으로는 상상력을 통해 현실화한다. 의지와 상상력은 선(善)과 미(美)의 이상이나 전형(典型)을 그리고 지향하며, 인식하는 지성은 진리의 이상을 세우고 그에 이르려고 애쓴다. 그것이 정신의 제 현상, 정신의 자기 전개 과정이다.

정신은 자기 정립적이며 자기 활동적인 것이고, 그래서 자유이자 주체이므로 본래 무엇에 관하여 상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지 않은 절대자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삼라만상과 인간을 통하여 그 자신을 드러낼 때, 다시 말하면 개념으로서의 정신, 절대자가 매체를 통하여 전개 실현될 때, 그것은 여러 모습[相]을 보이고 그런 한에서 전변(轉變)하고 상대적이다. 그러니까 정신은 실재에서는 이를테면 '상대적인 절대자'라 할 수 있고,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되어 가는 중에서 자기 자신을 세우고 자기 자신에 머무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신은 원래 절대자이건만 현실적으로는 상대적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정신의 모습은 언제나 가상(假象, Schein)이고 그런 만큼 정신은 본래의 자신을 세우기 위하여, 곧 진상을 드러내기 위하여 자신의 그때 그때의 모습을 스스로 부정한다. 그래서 헤겔은 자주 정신이란 "순전히 스스로 하는 운동의 절대적 불안정"(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PdG]: GW9, S. 100) 또는 "절대적 부정성"이라 말한다.

정신은 현실에서 결코 안정 중에 있는 일이 없으며, "항상 전진하는 운동"(같은 책, S. 14) 속에 있다. 그런데 이 전진 운동은 자기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한 계기에서 '진상'으로 현상하는 정신은 다음의 계기에 현상하는 정신에 의해 부정되고 가상으로 전락한다. 그것이 진정한 '진상'이 아니었기에 새로운 현상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이 부정은 필연적이고, 이 부정은 그러나 바로 정신 자신의 힘이라는 점에서는 자유 자체이다. 자유로서 "정신의 힘은 그것이 표출되는 꼭 그 만큼 큰 것이며, 정신의 깊이는 그의 펼쳐 냄 중에서 자신을 확장하고 그리고 자신을 상실해 갈 수 있는 그 만큼의 깊이를 갖는다."(같은 곳) 정신에 의한 정신 자신의 이 부정을 통한 확장 운동 과정이 "정신의 생(生)"이며, 정신은 이 끊임없는 자기와 자기의 "분열" 중에서 완성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함으로써만, 자신의 진정한 "진상"을 마침내 획득한다(같은 책, S. 27 참조).

정신은 전변 운동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나, 그러나 이 자신을 바꾸어 가는 운동 중에서도 정신은 항상 '자기동일성' - 이른바 비동일성의 동일성 - 을 유지하며,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불변의 절대자이자 실체이다. 또한 이 절대자는 "살아있는 실체"(같은 책, S. 18) 곧 "주체"이며, 언표 상에서는 "주어"이다(같은 곳 참조). 전개되는 모든 계기들, 전상(展相)들은 이 주체에 속하는 것이며, 이 주어에 속하는 술어들이다. 속성들은 언제나 주체 내지 기체(基體)인 실체에 속하며, 술어들은 언제나 주어에 속해 있다. 그러나 실체 내지 주체는 속성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며, 술어 없이 주어는 결코 표현될 수 없다. 이 속성들이 바로 그 실체는 아니지만, 속성들 곧 전개되는 계기들을 통해서 실체는 그러나 자신의 참모습[眞相]을 드러낸다. 정신의 한 계기 한 계기, 한 전상 한 전상은 정신을 현실에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각각 진상이지만, 그러나 진정한 "진상은 전체"(같은 책, S. 19) 뿐이다. 물론 이 "전체는 그것의 전개를 통해서 완성되어지는 것이다."(같은 곳. 또 Hegel, Wissenschaft der Logik[WdL] I: GW11, S. 355 참조) 정신은 이렇게 다수이면서 하나[一者]이며, 보편적인 것[普遍者]이고, 이런 의미에서 절대자이다. 이 절대자로서의 정신은 스스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운동의 주체이며, 이 점에서 자유인 정신은 "달리 되어감"에서 자신임을 유지하고, "달리 있음"에서 "자기와 같음[同一性]을 재생산" 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은 오직 매개적으로만 현상하며, 따라서 실체 내지 주체로서, 그리고 절대자로서 정신이 진정으로 무엇인가는 이 부정 운동의 "종점"에서 비로소 나타날 것이다. 이 "종점"은 정신이 자기 부정 운동을 막 "시작"할 때부터 그러니까 살아 있음을 보일 때부터 "목표"로 가진 "이념"[개념]이자 긴 도정을 매개로 한 "결실"이다(Hegel, WdL I: GW11, S. 376 참조).

정신의 자기완성의 긴 도정이 세상의 역사, 세계사이며, 그런 점에서 세계사의 주체인 이 정신은 "세계정신" 또는 "세계이성"이라 부를 수 있다(Hegel, PdG: GW9, S. 25 참조). 그러니까 이 세상, 세계란 세계정신의 자기인식 내용이며, 자기 기투(企投)와 노역(勞役)의 결과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한, 이 세계정신의 대표적인 매체는 인간이며, 세계정신은 인간을 통하여, 인간의 대상 인식과 자기 인식 그리고 실천을 통하여 가장 잘 발현된다.

헤겔이 세계정신의 탁월한 매체는 인간이고, 인간의 활동을 통해 세계이성이 구현된다고 말할 때, 그 인간의 활동은 대상 의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상 의식, 자연 인식 활동보다는 인간의 자신에 대한 의식 즉 자기의식, 따라서 타자 의식, 말하자면 타자에 대한 인식과 타자와 관계 맺는 활동에 의해 세계 역사는 전개되는 것이다.

자기의식적 존재자로서 개인은 개체이고, 그런 한에서 그 자기의식은 독립성을 지향하고, 그것은 욕구를 가진 생명체로 현상한다. 이 자기의식은 최초에는 '나는 나다'라는 순전히 자신을 향해 있음·스스로 있음(Fürsichsein)으로서 개별자이지만, 그러나 이 개별자로서 자기의식은 그에 맞서 있는 또 다른 자기의식을 발견한다. 이 복수(複數)의 자기의식은 서로 독립성을 내세우며 인정(認定) 싸움을 벌인다. 승자는 그 독립성을 인정받고 패자는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식 사이의 싸움은 생명을 건 투쟁이며, 이긴 자만이 자유를 확보한다.

노예는 자기의식의 독립성을 상실한 자로, 노예는 단지 사물적 존재자들 중의 하나일 뿐이며, 독립성 없이 그러니까 사물처럼 주인에게 종속해 있다. 노예는 주인의 의사대로 움직여야 하며, 노예는 주인이라는 타자의 자아를 자기의 것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노예가 하는 행동은 실은 그 주인이 하는 행동이다.

살아 있는 존재로서 자기의식 간의 인정 싸움이 생명을 건 투쟁으로 발전하여 승자와 패자 사이에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형성된다면, 그것은 승자가 힘이 강한 탓이라기보다 패자가 목숨 잃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 볼 수도 있다. 예속될 처지에 놓여 있는 자가 생명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독립성을 지키려 들면, 승자는 있어도 주인은 없을 터이다. 패자가 복종 대신에 죽음을 택하고 나면, 노예는 세상에 존재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노예는 독립성을 잃고서라도 생명을 지속시키려는 욕구로 인해 생긴 것으로, 노예는 '주인의 노예'라기보다 이를테면 '생(生)의 노예'라 할 수 있다.

헤겔이 말하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비단 우리는 두 자기의식 사이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념의 노예도 적지 않으며, 저편에 있는 하느님을 주(主)로 받들고 기꺼이 그의 종(從)으로서 영생(永生)을 얻고자 하는 자도 많다. 또한 목숨 부지를 위해 금전[物神]의 노예이기를 마다하지 않는 자도 쉽게 볼 수 있다. 인간 사회에는 이렇게 여러 종류, 여러 형태의 주-종 관계가 있으며, 어느 경우에든 한 인간이 종(從)의 위치에 놓이는 한, 그는 자기의식으로서 독립성을 상실하고 사물로 전락한다.

인간에게서 구현되는 이성은 그러나 "이성이 바로 실재성이라는 의식의 확신"(같은 책, S. 133)으로서 모든 실재성과 완전성을 저편의 것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찾으려 한다. 의식은 저편의 것 자체를 지양하고 저편의 것 안에서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 이렇게 이성이 자기 자신으로 복귀할 때, 한 자기의식의 "타자임과의 부정적 관계"(같은 책, S. 132)는 긍정적인 것으로 전환한다. 이제까지 자기의식은 타자나 세계를 대가로 해서 자기 자신을 구하고 유지했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을 확인한 이성으로서 자기의식은 세계와 자기 자신의 고유한 현실에 대해서 안정을 되찾으며, 이것들을 짊어질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그의 생각[意識]이 그 자체로 직접적으로 현실임으로써 자기의식은 현실에 대한 이상주의[觀念論]의 태도를 취한다."(같은 곳) 자기의식이 이런 태도를 취할 때, 이성은 이제 세계에 대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새로운 입장을 보인다. 이 서로 다른 존재 형태들은 상호 공존적으로 간섭하며, 서로 배제하고 제한한다기보다는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상호 보완한다.

"이성적 자기의식의 자기 자신을 통한 실현"(같은 책, S. 193)의 최고 형태는 도덕의 왕국이다. 도덕의 세계에서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와 같은 개인들 상호 간의 일방적 인정이 피해질 뿐만 아니라, 개개인은 전체로 지양된다. 헤겔이 보기에 비로소 여기에서 개개인은 "그들이 각자의 특성을 희생시키고 [전체라고 하는] 보편적인 실체가 그들의 영혼이며 본질이 됨을 통하여 - 이 보편적인 것이 그들 개개인들의 행위이며 그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작품이 됨을 통하여 각자가 독자적인 존재자임을 의식한다."

도덕의 왕국에서 전체와 개인,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는 한낱 당위적인 것도 아니고, 한 반성하는 이성이 만들어낸 이론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체 안에서 살고 있는 개개인이 항상 자신들에서 체험하는 바다. 개개인은 자신을 성찰하자마자 그것을 알 수 있다. 그의 행동의 방식과 내용이 전체라는 보편적 실체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행위의 "내용이 비록 완전히 개별화되어 있다 할지라도 분명히 이러한 내용도 그 구체적인 사실에 비추어 보면 만인(萬人)의 행동과 불가분의 관계에 뒤얽혀 있는 것이다. 자신의 욕구를 위해 하는 개인의 노동은 자기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또한 이에 못지 않게 타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며, 더 나가서 개인은 사실 타자의 노동을 통해서만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개인은 자기의 개별적인 노동을 함에 있어서 이미 부지불식간에 일반적인 노동을 하고, 또한 그는 모름지기 이러한 일반적인 노동을 자기의 의식적인 대상으로 삼고 이를 수행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전체란 어디까지나 개별자에 의한 전체라는 점에서 결국 이 개별자의 작업이고 그 작품일 뿐만 아니라, 또한 개별자는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거꾸로 그 자신을 전체로부터 되돌려 갖는 것이다."(같은 책, S. 194f.)

이로써 '타자를 위한 존재'(Sein für Anders)와 '자기 자신을 위한 존재'(Fürsichsein)의 통일이 이루어진다. 이 통일이 한 민족, 한 국가에서 "보편적 실체"의 기능이며, 이 보편적 실체는 윤리 도덕과 법률에서 그것의 보편적 언어를 발견한다. 이 보편적 언어는 '보편적'이면서도 다름 아닌 개별성을 표현하고 있다. 윤리 도덕과 법률은 모두 "개개인이 행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개인은 도덕법칙과 법률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 개인은 이 '보편적 정신'에서 "자기 자신의 현실 속에서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발견할" 확신을 갖는다. 좀더 풀어 표현하면, "나는 타자들 중에서 그들과의 통일을, 그들이 나를 통해서 존재하고 내가 그들을 통해서 존재하는 방식으로 직관하며, 즉 나 자신으로서 타자들을, 타자들로서 나 자신을 직관한다."(같은 책, S. 195) 그래서, 한 자유로운 민족·국가의 윤리 도덕적 사회 생활에서 '자기의식의 이성의 실현이라는 개념'이 그것의 완성된 실재성을 갖음이 확인된다. 바꿔 말하면, 자기의식이 자기 자신 속에서 '우리'를 의식할 때, 의식은 '보편적 실체'와 하나가 되고, 그로써 "참된 정신"이 된다. 여기에서 이성의 "자기 자신이 모든 실재성이라는 확신이 진리로 고양되며, 이성이 자기 세계로서의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서의 세계를 의식함으로써, 이성은 정신이다."(같은 책, S. 238)고 말할 수 있다.

이로써 절대자로서 이성은 비로소 구체적이 된다. 이성은 절대자로서 현실(성)의 숨겨진 배후가 아니라, 인간 세계 자체 안의 구체적인 현실이다. 아니 이성은 인간 세계에서 자신을 실현시키고, 실현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이성이 절대자이고 세계정신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그것이 바로 "모든 사람의 행위의 불요 부동의 확고한 근거이자 출발점이며, 목적이자 목표"(같은 책, S. 239)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사람의 행위를 통하여 비로소 자기를 보이고, 그런 의미에서 각자의 활동이 결과하는 "보편의 작품"(같은 곳)이기도 하다.

세계정신은 개개인들의 이해 관심과 욕구와 정열을 매체 삼아 자신을 전개해 간다. 그렇기에 개인들의 욕구가 다양하고 열정이 뜨거울수록 그리고 상상력의 폭이 넓고 깊을수록 세계정신은 그 풍성함을 내비친다. 상충하는 이해 관심에 매인 개별자로서 개인들은 서로 제한하고 대립하고 투쟁하지만, 그것을 통해 보편자인 이성은 자신을 구체화하고 현실화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이성의 책략"(Hegel, Vorlesung ü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PG], TW 12, S. 49)이다. 그럼에도 개인들을 전적으로 수단만으로 볼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은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어떤 그 자체로 영원하고 신(神)적인 것" 곧 "도덕성, 윤리성, 종교성"(같은 책, S. 50)이다. 이런 성격들의 주체는 한낱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으로 보아져야 한다. 그러므로 개개인이 윤리적 전체의 성원으로 될 때 보편적 이성과 하나가 되고, 그가 원해서 하는 일이 동시에 세계의 목적에 부합될 때 신성(神性)이 그와 함께 하는 것이며, 그런 만큼 그의 개성 하나 하나도 존엄하고 신성하다. 아니 인간이 신성(神性)에 참여함은 필연적이고 또 그로써 인간은 고양된다. 그래서 헤겔에서 신은 초월적이라기보다는 자연 내재적이고 인간에게 임재(臨在)적이다. 칸트의 비판적 사변이성에서 그 존재가 유보되었다가 실천이성에서 요청되었고, 반성적 판단력에서 '자연적 합목적성'의 실체로서 암시되었던 신은 이로써 헤겔에 이르러 정신으로서의 보편이성에서 현현한다.

반(反)이성주의 동향

칸트로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의 인간 이성 비판을 통한 인간 이성의 본질 구명은 다름 아닌 인간 자신의 정체에 대한 철학적 해명 노력이다. 그 노력 끝에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인간은 자연적 존재자로서 신체적으로는 매우 제한되어 있으면서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바꿔 말해 이성적으로는 자유로운 존재자이며, 그 점에서 정신이라는 것이다. 또한 자연도 그 전체에서 볼 때는 자기 운동하는 것으로서, 그 만큼 정신의 표현이자 전상(展相)이며, 이 자연 형성에 인간은 이상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관여함으로써 자연 정신의 대표성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에서 인간 이성의 실현 과정이 세상의 역사 곧 세계사이며, 그러니까 인간은 정신의 외현(外現)의 주요 매체이며, 세계사의 주역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상주의적 사상에는 반추해야 할 몇 가지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 비록 물질적 질료를 빌어 현실화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자연도 따라서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자유로운 정신이고, 다시 말하면 자기 정립적이고 자기 운동적인 실체이고, 게다가 목적 지향적 활동을 하는 주체라는 생각이다.

둘째, 자연과 인간은 그 뿌리에 있어서 ?? 곧 정신에 있어서 ?? 하나인데, 정신의 외현은 그것의 절대적 부정성에서 기인하므로, 자연도 인간도 고정불변적인 것이 아니고 형성되어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셋째, 인간은 그러므로 목적 지향적인 따라서 자기 입법적이고 실천적이며 이성적이되 역사적인 존재자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이 함축하는 바는 많다. 특히, 인간이 역사적인 존재자라는 파악은 인간 사회를 개인 주체들의 집합체(compositum)로 이해하는 근래의 경향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반성할 점을 야기한다. 역사는 시간과 공간 위에서 형성되어 가는 것이고, 또한 여러 사람이 함께 이루어 가는 것이다. 곧 역사는 집단적 사회적이며, 제한된 공간과 시간을 넘어 이상을 현실로 바꿔 가는 도정이다. 인간이 역사적인 한에서, 인간은 이상을 동경하고 희망을 잃지 않으며, 유(類)적 생활을 한다. 인간이 인류라 함은, 아버지와 앞 세대의 종점을 나와 뒷 세대는 그 활동의 출발점으로 삼는 존재자임을 뜻함과 아울러, 개별자인 그 '나'는 결코 단독자가 아니고 이미 전체(totum) 안의 부분임을 뜻한다.

개별자인 '나'가 전체의 부분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은 그의 이성도 그의 자유도 전체 이성 또는 전체 자유 내에서만 의미를 얻음을 뜻한다. 이로부터 우리가 '세계이성' 또는 '세계정신', 같은 어법을 사용하여 '역사이성'이나 '시대정신', '국가이성'이나 '민족정신'이라는 개념을 이끌어 낼 때, 개인의 주체성과 이성은 그 독립성 곧 개별성을 상실한다. 이런 생각의 방향이 반 전체주의, 반 보편 이성주의를 불러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성주의는 인간의 착오에 대한 자기 교정 능력을 믿으며, 따라서 유(類)로서의 인간은 착오에 빠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씩 전진하여 자신을 완성하여 마침내 세계를 완성한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세계가, 세상이 그리고 인간이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우리가 알고 싶어할 때, 우리에게 '인류의 역사'보다도 더 좋은 자료가 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역사는 시대에 따라 또는 시시각각 갖가지 양상을 보인다. 발전이라는 말이 일정한 목표에로의 접근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면, 인류의 역사는 발전하는 것일까, 퇴락하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변전(變轉)하는 것일까? 보편 이성주의는 이 물음에 인류사는 발전한다고 응답한다.

한 개인을 전체로 놓고 볼 때 그는 단계를 거쳐 그리고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을 통해 성장하듯이, 인류 또한 다양한 개개인들 또는 민족들을 통하여 발전한다. 어떤 개인들 어떤 민족들은 패망하지만, 개별자의 수많은 패망조차도 오히려 인류사 발전의 토대를 이룬다. 전체 인류는 개개인을 요소로 갖기에 개개인들의 성격 곧 개성이 다양할수록 인류는 더욱 더 풍부해진다. 그러나 인류는 개개인들의 단순한 수적인 집합도 아니고, 인류를 대변하는 것이 평균적 인간도 아니다.

인류사는 현실의 역사이지만, 현실은 단지 던져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활동에 의해 형성되어 가는 것이고, 인류의 활동은 궁극적으로 선한 인간, 좋은 세계를 지향해 왔다. 우리가 이제껏 진정으로 선한 인간, 좋은 세상을 만난 적이 없다 하더라도, 그렇다 해서 우리에게 그에 이르려는 목표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가 '선한' 인간, '좋은 세상', 활동의 '목표'를 얘기하는 데는 불가피하게 보편적인 개념이 등장한다. '선함'이나 '좋음'이 사람마다 시시때때로 또 상황마다 다르게 이해된다면, 도대체 '얘기' 자체가 부질없는 일일 터이다. '우리'는 "1-1=0"이 자명하듯이, 누구나 사람은 물건처럼 취급되지 않고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존재 곧 인격으로 응대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인 것도,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동시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 전체가 바라마지 않는 일이 되는 그런 일만을 할 수 있을 때 사람은 더할 수 없이 행복하다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사실로 납득하는 능력을 보편적 이성이라 부르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이 같은 보편 이성주의는, 조심스럽게 이해되어야 할 것이지만, 인간의 '보편적 이성'은 세계이성의 표현이며, 그것은 장구한 시간을 두고 인류의 무진장한 노고를 거쳐 마침내 현실화한다는 인간 중심적 점진적 발전론이고, 그 과정에서 자연 대 인간, 인간 대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과 충돌은 오히려 '전체'의 내적 생명력이고, 이런 자기 보완적 생명 활동을 매개로 시초에 한낱 개념이던 절대자·무한자는 내용을 얻고 구체화한다는 현실 긍정의 역사철학이자 낙관적 세계관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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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eca, Epistulae morales ad Lucilium.

______, Naturales quaestiones.

정신(精神. spiritus. Geist)

낱말 '정신'의 유래와 상관 개념

우리말 '정신'은 본디 한자말이다. 한글말 '정신'은 한자어 '精神'을 한국 사람들의 발음으로 읽어 적은 것이다. 곧,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정신(精神)'이라는 낱말은 1870/80년대 일본인들이 서양 사상을 수용하면서 'spirit'·'Geist' 등을 '精神'으로 번역한 것10)을 받아쓰기 시작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한자어 '精神'은 중국 태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일본 태생인 셈이다. '정신(精神)'이라는 이 낱말을 한국인이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한 조사 연구11)에 따르면,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펴낸 『韓英字典 - 한영자뎐 - A Concise Dictionary of the Korean Language』(Kelly & Walsh: Yokohama/ Shanghai 1890)에 'reason'을 '지각'·'의리'와 더불어 '졍신'으로 옮긴 예가 이미 보인다 한다. 철학 분야에서는 조선 사람 전병훈(全秉薰, 1860∼ ?)이 1920년경 베이징(北京)에서 출간한 것으로 추정되는 책 『精神哲學通編』에서 볼 수 있고, 또한 우리나라 사람이 쓴 최초의 철학개론서인 한치진(韓稚振)의 『最新 哲學槪論』(復活出版部, 1936)에서도 쓰이고 있다. 그러니까 '철학'이라는 낱말을 포함해서 다수 철학 용어들이 그러하듯이 '정신'이라는 말도 서양 사상이 우리 사회 문화에 유입되면서부터 널리 쓰이게 된 것이다.12)

그 이후 '정신'이라는 말은 우리 문화 생활의 여러 영역에서 여러 사태와 연관되어 사용되고 있다. 유사어만 하더라도 정기(精氣), 정령(精靈), 영혼(靈魂)[靈, 魂, 넋, 얼], 마음[心], 이성, 생명, 이념, 의식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이것과 대립적인 의미를 지닌 말들 또한 물체, 신체, 육체, 몸, 물질 등 다수가 있다. 이것은 '정신'이라는 말이 여러 가닥의 역사를 담고 있으며, 지시하는 사태가 그만큼 복잡다단하고 애매모호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일상적으로 '정신'이라는 말은 이미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철학적 개념으로서 '정신'의 의미는 서양철학 사상이 우리 문화에 수용되면서 더욱 더 풍부해졌고, 오늘날 여러 가지 철학적 논쟁에서 '정신'이 주제어가 될 때 그것은 이 말의 한자어 연원의 의미에서보다는 오히려 서양 사상의 원천에서 유래한 근대철학적 논의의 맥락으로부터 얻은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오늘날의 철학적 논의에서 '정신'은 특히 '영혼'·'마음'과 때로는 교환가능한 말로 때로는 서로 구별되는 말로 사용되고, 또한 많은 경우 그것들의 상관 개념과 함께 사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상관 개념은 정신-물체[물질]·영혼-육체·마음-몸[신체](心身) 등으로, 이것은 바로 그 안에 많은 철학적 논의거리를 함유하고 있다. 세계의 본원적 존재에서부터 세계 구성의 요소, 생명체의 고유성에서부터 인간의 인격성 또는 '나'라는 자아의 근원에 관한 문제에까지 거의 모든 형이상학적·인식론적·윤리학적 문제들은 이 켤레 개념들과 연관되어 있다.

'정신' 개념의 고전적 의미

우리가 '정신'이라는 낱말 자체를 사용한 것은 기껏해야 19세기 말부터지만, 그러나 이 말의 의미 연원은 거의 인류 문화사 초기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사람의 동물적 삶에 관련돼 있는 말들은 대개 역사가 깊은 반면, 고급 문화 영역을 지시하는 말들은 오히려 역사가 짧은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정신'은 분명 문화어 중의 문화어임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 연관의 역사가 참으로 깊을 뿐만이 아니라, 많은 문화 현상들과도 깊게 얽혀 있다. 게다가 '정신'이 지시하는 바는 인간 자신 내지는 인간 사회 문화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정신'의 개념은 인간관이나 세계관 또는 가치관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정신' 개념의 의미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여러 사상 형태들을 살펴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중국 고전에서 '정신'

'정신(精神)'이라는 말이 번역어로 채용됨으로써 비로소 20세기에 와서 널리 쓰이게 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말의 연원은 옛 중국의 고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한자말에서 '정(精)'과 '신(神)' 그리고 이 두 낱 말이 합해진 '정신(精神)'은 때로는 서로 무관하게 때로는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정(精)'은 일찍부터 '곡식의 알맹이'·'순수함'·'정액(精液)'·'정세(精細)함' 등을 뜻함과 함께 '만물 생성의 영기(靈氣)'를 뜻했다(『莊子』, 在宥: "吾欲取天地之精 以佐五穀 以養民人" 참조). '신(神)'은 오늘날은 거의 '하느님'과 동일한 말로 사용되고 있지만, 옛적에는 '천신(天神)'·'신령(神靈)'·'혼령(魂靈)'이라는 뜻과 함께 '의식(意識)'·'정신(精神)'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 쓰였다(『荀子』, 天論: "天職旣立 天功旣成 形具而神生" 참조). '정신(精神)'이라는 말 또한 이미 일찍부터 때로는 형해(形骸) 또는 신체와 구별되는 '정기(精氣)'의 뜻으로(『呂氏春秋』, 盡數: "聖人察陰陽之宜 辨萬物之利 以便生 故精神安乎形 而年壽得長焉"; 王符, 『潛夫論』, 卜列: "夫人之所以爲人者 非以此八尺之身也 乃以其有精神也" 참조), 때로는 '의식(意識)'의 뜻으로(『史記』, 太史公自序: "道家使人精神專一 動合無形 贍足萬物" 참조)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중국 고전에서의 낱말 '정신'의 문맥상의 어의는 오늘날의 용례에서와 상당 부분 같아 보인다. 그럼에도 예컨대, 오늘날 우리가 '심신(心身)의 문제'라 일컫는 것은 옛 사람들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신형(神形)의 문제'라 할 수 있는 등 낱말 사용상의 차이가 없지 않고, 또한 '정신(精神)'이라는 말은 아주 드물게만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대와 초기 기독교 고전에서 '정신'

우리말 '정신'에 상응하는 말로 구약성서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말은 헤브라이어 '루아(ruah)'이다. 이 말은 본디 숨결·바람 등을 뜻한다. 예컨대, 입김(시편 33:6), 숨[입김](욥기 19:17), 생명숨결[바람](예레미아 10: 14) 또 선들바람(창세기 3:8)과 폭풍[세찬 해풍](출애굽기 10:19) 등이 언급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생명을 만들어내는 힘들에 대한 고대 유대적 표상들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은 이 사념들을 창조 신앙과 결합하고, 그래서 신의 숨 내지 신의 입김으로서 "야훼의 숨결"(ruah jahve)이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생리적 효력이 된다. 인간과 동물의 세계는 동일한 생명력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이다(시편 104:30, "숨을 거두어 들이시면 죽어서 먼지로 돌아가지만, 당신께서 입김을 불어 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와집니다."). 숨결은 생명의 숨(창세기 6:17)이며, 모든 피조물의 생명 정신이 야훼에 의해 소환되면, 모든 피조물은 죽음에 든다(창세기 6:7 참조). 생명의 비밀은 숨 속에 들어 있다. 숨은 다름 아닌 '목숨'인 것이다. 야훼의 숨은 창조신의 절대적인·마음대로 할 수 없는·생명을 만드는 권력이다. 예언자시대에 야훼의 생명 숨결은 야훼의 말씀과 결합되고, 그래서 시편은 "야훼의 말씀으로 하늘이 펼쳐지고, 그의 입김으로 별들[모든 무리, 군대]이 돋아났다"(시편, 33:6)고 읊고 있다.

때때로 생명의 숨결은 '네페쉬(nefes)'라는 말로 대치되기도 한다(출애굽기 23:12). 그럼에도 '네페쉬(nefes)'는 '루아(ruah)'와 구별되는데, 그것은 '네페쉬'가 '루아'처럼 보편적으로 생명을 일으키는 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과 동물의 개별적인 구체적인 생명을 표현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페쉬'의 죽음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루아'의 죽음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다.

신약성서에서도 정신을 지칭하는 말로 '루아'에 대응해서 그리스어 '프네우마(pneuma)'가 사용되고 있다. 이 '프네우마' 역시 근원적으로는 "공기·바람·숨의 힘이 충전된 운동"을 뜻하며, 그러니까 생리적-물질적 의미를 지닌다. 이 말은 의미의 변경 없이 "성령"을 일컬을 때에도 쓰이고, 때로는 악령을 지시할 때도 쓰인다.

'프네우마'가 마르꼬와 마태오에서는 구약의 연장선상에서 인간 정신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면서, 한편으로는 '생명의 힘'이라는 뜻의 '숨'(마태오 27:50)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지각·인식·감각이라는 뜻의 '생각'(마르코 2:8)으로 쓰인다.

고대 그리스-로마 고전에서 '정신'

'정신'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그리스어 낱말 '프네우마'(pneuma)는 동사 '호흡하다'(pneo[πγ?ω])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니까 '프네우마'는 원래 '움직이는 공기', '호흡된 공기', '호흡'[숨] 정도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이 말이 '호흡작용'[숨을 쉼]을 뜻한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질료적 의미를 가졌다.

고대 그리스 초기부터 이 말은 의학과 철학에서 사용되었다. 우주와 인간의 생리 작용에서 공기와 '정신'은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살아 있는 숨은 피와 함께 혈관을 돌면서 생물학적 작용들의 근원을 이룬다. 정신의 중심부는 뇌에 위치하고 있으며, 거기서 인간의 전 신체 조직을 주재한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정신은 심장에 위치하며 거기서 피와 함께 전 신체를 관통한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렇게 생각한 사람 중의 하나다.

스토아철학에서 '정신'은 포괄적인 의미를 가졌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개별 영혼의 실체나 내적 신성(神性)의 실체를 지시하는 말로 쓰였다. 예컨대, "따뜻한 정신은 영혼이다."(Diogenes Laertios, VII, 157) "이성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에 깃들은 신적 정신의 한 부분이다."(Seneca, Epistulae, 66, 12) 정신은 만물을 관통하고 우주의 통일성과 우주 안에 함유되어 있는 개별 존재자들의 통일성을 보증한다. 우주는 커다란 유기체이고 살아 있는 것으로서, 그것의 부분들은 모두 서로 화합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개개 영혼이 육체에게 그렇게 하듯이, 우주 유기체에게 내부로부터 혼을 넣어주는 것은 생명의 호흡인 신성(神性)이다. "그러니까, 세계가 신적인 정신과 연관을 이루고 있는 정신에 의해 통합돼 있지 않다면, 세계의 모든 부분들이 서로 화합하는 일이란 정말로 일어날 수 없을 터이다."(Cicero, De natura deorum, II, 7, 19) 만물은 신의 정신으로부터 생긴다. 그것은 우주의 질서 잡힌 실재를 자신으로부터 산출하는 창조적인 불이다(Diog. Laert., VII, 156). 그렇기에 우주의 생성은 개개 생물의 생성과 똑 같은 것으로 관찰된다. 우주는 나중에 펼쳐질 모든 성분들을 이미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최초의 정자(精子)로부터 발생한다. 또 주기적인 세계 화재(火災)가 있어, 그로부터 우주가 발생했던 근원 종자(種子)로의 규칙적인 귀환이 있다. 똑 같은 방식으로 인간의 생의 표출들도 육체의 모든 부분들에 들어있는 영적 정신을 근거로 해서 설명된다. 그래서 감각적 인식이란 영적 정신에 지각된 대상의 모상(模像)의 인상(印象)으로 파악된다. 이 인상은 영혼의 중심부에서 육체의 주변으로, 또 주변으로부터 중심부로 흐르는 정신의 유동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 정신의 유동들은 유기체의 응집을 돌본다. 이 정신의 유동들이 영혼의 중심부에 의한 일정한 육체 운동들의 성립을 설명해 주고,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인상들이 외부로부터 중심부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설명해 준다(Diog. Laert., VII, 158 참조). 스토아학파에서 정신은 일관되게 질료적인 원리로 간주되었고, 그러면서도 그것의 섬세성과 운동성이 매우 강조되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영적 정신은 사후에도 한 동안 개별성을 유지하고 있다가 이내 보편적 세계 영혼 안에 받아들여진다. 이런 식으로 우주의 전개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개별 영혼에서도 모든 것이 순환적 과정에 따라 진행된다. 그러니까 스토아 자연학자들은 인간을 포함하는 '물질주의적' 우주생물학을 내놓았다고 볼 수 있다.

1세기 초의 종교·철학의 절충주의(syncretism) 학파는 정신에게 중요한 위치를 부여했다. '정신'이라는 말은 신의 세계에 대한 관여를 상징적으로 서술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정신은 신의 세계 생기(生起)에 대한 직접적인 관여이다. 이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정신이 더 이상 질료적인 것으로 파악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신의 비물질적인 성격이 좀더 자세하게 규정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영지(靈知)주의(gnosticism)자들에게서 '정신'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자주, 혼돈적이면서도 조형적인 물질에 혼을 집어넣는 우주의 형식적 원리를 뜻한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이 말은 빛과 어둠 사이의, 그리고 우주의 상위 영역들 사이의 중간에 놓여 있는 우주 원리를 뜻한다. 또 어떤 때는 인간의 상위 부분을 의미한다.

신플라톤학파 철학에서 정신은 무엇보다도 비물질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의 중간자로서 간주된다. 정신이란 영혼을 둘러싸고 있으면서, 영혼의 육체와의 오염된 접촉을 방지하는 어떤 것을 뜻한다(Plotinos, Enneades, II, 2, 2 참조). 이것은 인식작용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혼은 물질적인 대상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지 않고, 사물들의 모상들을 영혼의 정신적 보자기에 싼다. 인간과 신성(神性) 사이의 직접적인 접촉은 배제되어 있다. 예언과 황홀은 신적 정신을 매개로 일어나는 바, 신적 정신에 의해 영혼은 빛나고 정화되며, 그렇게 해서 인간은 보다 높은 인식에 이를 수 있고, 그의 자연적인 가능성들을 뛰어넘는 활동을 펼칠 수 있다.

한편 '정신'에 대응하는 라틴어는 '스피리투스'(spiritus)라 할 수 있는데, 이 말은 이미 1-2세기의 기독교 문헌에 자주 등장하며, 그 의미는 스토아학파의 유물론적 정신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도 점차 정신주의 색채를 드러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는 정신(spiritus)을 무엇보다도 비물질적 실재, 곧 신이나 인간의 영혼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한다. 그때 정신적인 것은 적극적인 의미를 얻어, 그것은 신플라톤학파의 영향을 받아 단순하고 불가분리적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Augustinus, De natura et origine animae, IV, 22-23; De trinitate, XV, 5, 7 참조).

이로써 우리는, 보통의 말들이 그러하듯이, 처음엔 일상 언어 생활에서 구체적인 대상적 내용을 갖던 말 '정신'이 철학적인 숙고가 덧붙여지면서 원래의 의미와는 차츰 멀어지는 말로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근대 '정신' 개념의 형성과 해체

실체인 정신으로부터 이념인 정신으로

 '정신' 실체의 함축

'정신' 개념이 철학적 논의의 핵심에 등장한 것은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가 마음-몸, 정신(mens)-물체(corpus)라는 두 실체론을 폄으로써였다. 데카르트의 이 두 실체론은 기독교적 전통 사고와 새로운 수학적 자연과학의 지식을 화해시키려는 시도의 산물로서, 그것은 계몽주의 시대가 철학자에게 한 요구에 부응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실체'란 "그것이 존재하는 데 다른 어떠한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Descartes, Principia philosophiae, I, 51)을 말한다. 그러니까 실체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규정대로라면 절대자인 '신'만을 실체라 할 터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의식[생각]이라는 본성을 가진 정신과 연장성[공간적 크기]이라는 본성을 가진 물체는 상호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그러므로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res)이라는 뜻에서 각각 실체라고 말한다. 이 제한적 의미에서의 실체 이원론을 인간의 존재 구조 설명을 위한 이론으로 원용하면서 '심신이원론'과 함께 '심신상호작용설'이 나왔고, 이로부터 현대 심리철학의 제 문제는 발단한다.

데카르트는 "나란 정확히 말해 다름 아니라 생각하는 것(res cogitans)"이며, '생각하는 것'이란 곧 '정신'·'영혼'·'지성'·'이성'이라고 풀이하고, '나[자아]=생각[의식]하는 것=정신[마음]'이라고 규정하는 한편, 이것과는 다른 '물질적인 것'(res materialis) 또한 "존재"한다고 말한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생각함을 본성으로 갖는 '나'라는 실체는 "존재하기 위해 아무런 장소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어떠한 물질적인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Discours de la Méthode, IV, 2). "이 나는, 곧 나를 나이게끔 하는 정신은 신체[물체]와는 완전히 구별되며, […] 설령 신체가 없다 하더라도 그것인 바 그대로 온전히 존재하기를 그치지 않는다."(같은 곳) 더 나아가, "완전한 존재자로서 신이 […] 존재한다는 것은 기하학의 어떤 논증보다도 더 확실"(같은 책, IV, 5)하고, 세계 내의 모든 "물체들", "지성적인 것들", 기타 "자연물들" 모두가 "그것의 존재를" 이 완전한 자의 "힘에 의지하고 있고, 이것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같은 책, IV, 4)

데카르트의 이 문맥에서, '나'라는 정신이나, 모든 것들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는 완전한 '존재자'로서 신이나 공간상의 어느 지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심지어 데카르트는 그것은 공간적인 존재자가 없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어떤 존재자가 논의되는 자리에서라면 언제나 묻기 마련인, "그것은 언제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이 '신'을 포함해 이른바 '정신'이라는 존재자에게는 물어질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도대체 무슨 뜻에서 존재하는 것인가? 그것이 '나'라는 지성에 의해 명석판명하게 지각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존재자라 한다면, 그래서 불명료한 감각이나 "상상"에 의해서 파악되는 물리적인 존재자보다도 훨씬 더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같은 책, IV, 6)이라면, 참으로 존재하는 것인 '신' 및 '나'에 비해 차라리 '물체'는 가상(假象)적으로 존재하는 것,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만약에 물체를 진정한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이라 한다면, 물체와는 전혀 다른 것인 '정신'은 진정한 의미에서는 존재자가 아니라 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명석하지 못했던 데카르트의 반성은 '정신'의 본질적 성질인 '생각[의식]'의 내용을 설명하는 데서 더욱 더 모호함을 드러낸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것으로서 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그것은 곧, 의심하고, 통찰하고, 긍정하고, 부정하고, 의욕하고, 의욕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상상하고, 감각하는 것이다."(Meditationes, II, 8)고 대답한다. 정신 실체로서 '나'의 적어도 한 가지 활동은 '감각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란 신체에 대해 독립적인 것이고, 공간상의 장소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 것이라 했다. 대체 이때 신체 없는 내가 '감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데카르트는 실체로서의 '정신'을 내세우면서도 부지불식간에 그것이 적어도 지각활동에서는 신체 의존적임을, 그러니까 더 이상 실체가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로크(J. Locke, 1632-1704)는 정신 실체를 이 방향으로 계속 끌고 가 마침내 그 존재가 해소될 처지에 놓이게 한다.

로크에서 '실체'는 일종의 복합관념이다. 그는 실체란 마음에 주어진 단순 관념들이 "그 안에 존속하고, 그로부터 유래하는 어떤 기체(基體)"(Locke,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Essay], ed. A. C. Fraser, Bk II, ch. 23, sect. 1)라고 규정하기도 하고, "우리 안에 단순 관념을 일으킬 수 있는 그런 성질들, 즉 보통 우연적인 것들이라 일컬어지는 그런 성질들을 담지하는, 어느 누구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단지 가정된 것"(같은 책, II, 23, 2)이라고 부연하기도 한다.

그런데 로크는 이렇게 '실체'를 규정한 후에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실체를 "세 종류" 곧 신·유한한 정신들(finite spirits)·물체들(bodies)로 나눈다. 여기서 로크는 데카르트처럼 단지 '정신'이라는 것 그리고 '물체'라는 것을 말하는 대신, '정신들'과 '물체들'을 말함으로써 다수의 셀 수 있는, 그러니까 서로 구별되는 정신들과 물체들을 거론하고 있고, 이것은 아직 데카르트에게는 의식되지 않은 더 많은 '심신의 문제들', 예컨대 마음과 몸의 '개체성', '자기동일성' 따위의 문제들까지도 문제의 전면에 등장시킨다.

로크에서 "유한한 정신들"에 속하는 '우리 인간들의 마음들'이란 이렇게 한 묶음으로 지칭될 수 있는 한에서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것임과 동시에, 복수인 점에서 서로 구별되는 개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들 중의 하나인 '나'는 개별성을 가지며, 하나의 '나'는 다른 '나들'과 구별되는 한에서는 자기동일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무한 실체로서 "신은 시작도 없고, 영원하고, 불변적이고, 무소부재하고, 그러므로 그것의 동일성에 관해서 어떠한 의문도 있을 수 없다."(같은 책, II, 27, 2) 그러나 유한한 정신들을 포함해서 유한한 실체들은 어느 것이나 "존재하기 시작하는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가지며, 그 시간과 장소와의 관계는, 그것들 각각이 존재하는 동안, 언제나 그것의 동일성을 결정할 것이다."(같은 곳)

우리는, 일정한 시간과 장소에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어떤 것이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도 그 자체로 존재하는가 어떤가의 비교를 통해 어떤 것의 동일성과 차이성을 얘기할 수 있다(같은 책, II, 27, 1 참조). 이때 우리가 구하는 것은 개별성의 원리다. 즉 이때 우리는, "어떤 것은 무엇에 의해서 바로 그 '어떤 것'이 되는가?"를 묻는다.

물체는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분자들이 동일한 한에서 바로 '그것'이다. 만약 그것을 구성하는 분자들의 일부 또는 대부분이 바뀌면, 더 이상 '그것'이 아니다.

그런데 "생물들의 상태에서는, 그것들의 동일성은 같은 분자들의 덩어리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생물들에서는 물질의 큰 뭉치의 변이가 동일성을 변경시키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묘목에서부터 큰 나무로 자라 베어지는 참나무는 줄곧 같은 참나무이다. 말로 성장하는 망아지는 때로는 살찌고 때로는 마르지만, 언제나 같은 말이다."(같은 책, II, 27, 4) 다시 말해, 한낱 물체는 "어떻게 결합되든, 물질의 분자들의 응집일 따름"이나, 한 식물과 한 동물의 동일성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자양분을 흡수하고 분배하는 데 적합한 그것의 부분들의 조직"에 의거한다(같은 책, II, 27, 5).

그렇다면, 한 "사람의 동일성은 어디서 성립하는가"? 그것은, 인간도 동물인 한에서, "오로지, 같은 유기체를 위해, 지속적으로 생명적으로 통일된, 끊임없이 움직이는 물질의 분자들에 의한, 계속되는 같은 생명의 참여에서" 성립한다고 로크는 말한다(같은 책, II, 27, 7). 그러나 인간은 단지 동물이 아니라, 또한 '인격'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로크는 무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더 나아가 묻는다. "인격의 동일성은 어디서 성립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인격이 무엇을 지칭하는가"를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로크의 생각에, "인격이란 이성과 반성을 가진, 그 자신을 그 자신으로 고찰할 수 있는, 생각하는 지성적 존재자이다. 그것은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상에서도 동일한 생각하는 것[thinking thing]이다. 인격은, 생각 활동과 분리될 수 없는, 의식에 의해서만 그 자신을 그 자신으로 고찰한다. 어느 누구도 그가 지각한다는 것을 지각함이 없이는 지각할 수 없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듣고·냄새맡고·맛보고·느끼고·성찰하고·의욕할 때,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하고 있음을 인식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현재의 감각과 지각에 대하여 그러하다. 이로 인해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가 자아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같은 책, II, 27, 11[9]) 그러니까, 로크에 따르면 '인격' 내지 '자아[자기]'의 동일성은 자아의 자기지각 곧 자기인식 또는 자기의식에서 성립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로크는 인격 내지 자아를 물체로서의 신체와도 그리고 유한한 정신과도 분리시켜 생각한다. 사람들이 자기의식에 근거해 '자아'를 얘기할 때, "같은 자아가 같은 실체[물체(신체)]에서 계속되는가 다른 실체[물체(신체)]들에서 계속되는가는 고려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식은 언제나 생각함에 수반하고, 그것이 각자를 그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이 되게끔 함으로써, 그 자신을 여타의 생각하는 것과 구별짓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만 인격의 동일성이, 다시 말해 한 이성적 존재자의 동일성이 존립한다. 그리고 이 의식이 어떤 과거의 행동이나 생각에 거슬러 올라가 미칠 수 있는 데까지는 그 인격의 동일성이 미친다."(같은 책, II, 27, 11[9]) 그러므로 로크에게서는 자아의 동일성이나 인격의 동일성은 궁극적으로는 오로지 자기의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인격의 동일성은 실체[물체(신체)]의 동일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 의식의 동일성에 있다."(같은 책, II, 27, 19) 자기의식이 자기의 동일성을 구성한다. 인격의 동일성은, 내가 나중에 내가 이전에 어떤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앎으로써 구성된다. 이제 로크에서 문제로 남는 것은, 그렇다면 '(유한한) 정신'이라는 실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고, 이 이론적 개념이 존재 세계에서 하는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물체'라는 실체는 종국에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모르는 것이라는 점 때문에 그 정체야 장막에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관념들의 귀속처, 갖가지 현상적 성질들의 담지자로서 물리적 사물들의 동일성의 기반이고, 실재적 인식[진리]의 척도이자 '실재하는 사물'의 근거가 된다. 반면에 '(유한한) 정신'이라는 실체는,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한 식물·한 동물·동물로서의 한 사람의 동일성의 근거인 "같은 생명"의 담지자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자아나 인격, 그러므로 나아가서는, '마음'의 동일성의 토대는 아니라 하니, 이것의 토대가 되는 이른바 '자기의식'은 누구의 의식이라는 말인가? 그게 아니고, '물체'라는 실체가 물리적 사물의 동일성을 담보하듯이, '정신'이라는 실체가 자아의 동일성을 담보하는 것이라면, 물체와는 달리 정신이라는 실체는 '자기의식'을 통해 자기에게 알려진다는 말인가? 그러니까, '정신'이라는 실체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알려지는 것이라는 말인가? 여기서 '정신' 실체는 그 정체가 의혹에 싸인다.

 '정신' 실체의 부정과 그 귀결

로크에서 실체가 어느 경우에나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라고밖에는 규정되지 않는 것이라면, 암암리에 마음의 고정불변성 곧 동일성의 근거로 제시되는 '정신' 실체 역시 정체 불명이다. 그래서 오로지 경험적 확실성의 보증 아래에서만 논의를 진행시키고자 하는 흄(D. Hume, 1711-1776)은 '마음'의 실체성, 그러니까 자아 내지 인격의 동일성 자체를 인정할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흄에 따르면, 우리가 갖는 일체 개념의 원천은 경험적 지각, 곧 경험적 인상과 관념들이다. 그런데 흄의 생각에는, "한 순간이라도 변함 없이 같은 것으로 머물러 있는, 단 하나의 영혼 능력도 없다. 마음은 일종의 극장이다. 여기에서 여러 지각들은 잇따라서 나타나고, 즉 지나가고, 다시 지나가고, 어느덧 사라지고, 무한히 잡다한 사태와 상황 속에서 뒤섞인다. 마음에는 당연히 한 시점에서라도 단일성은 없으며, 서로 다른 시점에서 동일성도 없다. 우리가 그 단일성과 동일성을 상상하는 어떤 자연적 성향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Hume, A Treatise of Human Nature, Bk. I, Part 4, sect. 6[ed. L.A. Selby-Bigge/P.H. Nidditch, p. 253]) 여기서 '마음=극장'의 비유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극장은 아무런 공연이 없을 때라도 텅 비어 있는 장소로 있고, 막이 오르면 그 안에서 여러 장면들이 연출되는 것이지만, 흄에게서 마음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마음을 구성하는 것은 단지 잇따르는 지각들일 뿐이다. 또한 우리는 이 장면들이 표상되는 장소 또는 이 장소를 이루고 있는 재료들에 관한 아주 어렴풋한 개념조차도 갖고 있지 않다."(같은 곳) 그러니까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음은 극장과 같은 공연 장면들이 펼쳐지는 장소라기보다는, 차라리 잇따르는 장면들의 모임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관계들에 의해 함께 통일된, 그리고는, 잘못되게도, 완전한 단순성과 동일성을 부여받은 것으로 가정된, 서로 다른 지각들의 더미 내지는 집합일 따름이다"(같은 책, I, 4, 2[p. 207]). 흄은 '나'의 실체성 곧 고정불변성은 결코 경험적으로 확인될 수 없음을 거듭 강조한다. "자아 또는 인격은 어떤 하나의 인상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우리의 여러 인상들과 관념들이 관계하고 있다고 상정되는 그러한 것"(같은 책, I, 4, 6[pp. 251-2])이며, 그것은 "다름 아닌 서로 다른 지각들의 다발 내지 집합인 바, 지각들은 포착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서로 잇따르며, 영원한 유동과 운동 중에 있다"(같은 책, I, 4, 6[p. 252])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들로 하여금 이렇게 잇따르는 지각들에 동일성을 부여하고, 우리 자신을 우리의 전 삶의 과정을 통해 불변적이고 부단한 존재를 갖는 것으로 생각하게끔 하는가? 흄에 따르면, 그것은 순전히 상상력과 기억작용이 하는 일이다. 서로 잇따르는 지각들의 더미 사이에는 기껏 유사성이 있을 뿐인데, 우리는 "상상에 따라, 이들 서로 다른 연관돼 있는 대상들이, 단절적이고 변형적임에도, 결과적으로는 같은 것이라고 대담하게 주장한다. 그리고는 […] 단절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감관의 지각들의 지속적인 존재를 꾸며내고, 변형성을 감추기 위해서 영혼, 자아, 실체 따위의 개념 속으로 뛰어든다."(같은 책, I, 4, 6[p. 254])

더 나아가 "기억은 동일성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지각들 사이의 유사 관계를 낳음으로써 동일성 산출에 기여한다."(같은 책, I, 4, 6[p. 261]) "기억만이 우리로 하여금 지각의 이런 잇따름의 연속과 범위를 알게 하기에, 주로 이것에 근거해서 기억은 인격 동일성의 원천으로 간주된다. 우리가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아무런 인과의 개념도 갖지 못할 터이고, 또한 따라서 우리의 자아 내지 인격을 구성하는 원인과 결과의 연쇄에 대해서도 아무런 개념을 갖지 못할 터다. 그러나 일단 기억으로부터 인과의 개념을 얻고 나면, 우리는 원인들의 같은 연쇄를 확장하여, 그에 따라서 우리의 기억을 넘어 우리 인격의 동일성에 이를 수 있다."(같은 책, I, 4, 6[pp. 261-2])

그러나 이 같은 흄의 경험적으로 건전하고 정밀한 논구의 도정은 도대체 '기억작용'을 누가 하는가 라는 물음 앞에서 길이 끊긴다. 누군가가 기억을 통해 1994년 여름에 본 로마 시가와 1996년 겨울에 본 로마 시가를 비교하여 그 유사성을 인지하고, 그 유사성을 넘어 - 상상력에 의해서든 습관에 의해서든 또는 다른 무엇에 의해서든 - '동일성'을 주장할 때, 1994년 여름에 로마 시가를 본 자와 1996년 겨울에 로마 시가를 본 자는 동일한 자여야 한다. 그 자를 우리가 '나'라 부르든, '나의 마음'이라 부르든 '나의 의식'이라 부르든 상관없이, 만약 그 자가 '동일한 자'가 아니라면, 기억작용도 '연상작용'도 귀속시킬 데가 없다. '자아'를 또는 마음을 한낱 '지각들의 다발'이라 하고, 지각들이란 시시각각 달라지는 것으로 간주할 때, 일정한 한 시점(t1)과 다른 한 시점(t2)에서의 '지각들의 다발'은 내용상 다를 것이고, 그래서 시점 t1에서의 '지각들의 다발'(m1)인 마음을 甲이라 한다면, - 제 아무리 유사하다고 하더라도 - 결국은 이미 내용상 똑같지 않은, 시점 t2에서의 '지각들의 다발'(m2)인 마음은 乙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甲과 乙은 서로 다른 자이고, 따라서 甲이 어느 시점에서 지각한 것을 乙이 기억하고 '습관'에 따라 연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이나 습관을 얘기하려면, 어느 시점에서든 그 활동을 하는 자는 동일한 자로 전제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미 기억과 습관을 얘기하는 마당에서는 어떤 의미에서든 '자아의 동일성'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 내지 인격의 동일성은 지각 자료를 근거로 한 상상력의 조작이나 성향만으로써는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다. 그래서 이 '동일성'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고 설명되어야 한다. 아니면, 우리는, 경험적인 세계에는 도대체가 동일한 것은 없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 대신에 우리는 세상의 변화에 대해서 얘기해서는 안 된다. '변화'는 어느 경우에나 '동일한 것'의 달리됨이니 말이다.

 개념 또는 이념으로서 '정신'

  인식하는 자아의 동일성과 관념성

데카르트의 '정신'-'물체' 두 실체론은 인간과 자연세계의 관계 설명 방식의 단초가 되어, 로크에서는 '마음'과 '실재하는 사물'이라는 두 실체론으로 전이되고, 버클리(G. Berkely, 1685-1753)에서는 이른바 '실재하는 사물'이 "존재는 지각된 것"(Berkeley,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 I, 3)이라는 그의 대상 현상론에 의해 마음 안의 관념들의 집합으로 해체되고, 흄에 이르러서는 '마음'마저 '지각들의 다발'로 규정되어 그 실체성이 부정되었다. 이 같은 '실체' 사상의 변천은 더욱 더 경험주의 원칙에 충실해 간 근대인들의 사고의 반영이고, 현대 물리주의의 출발점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사고 노선은 대답되어야 할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예컨대, '나'는 그리고 '우리'는 자연세계 전체가 또는 그 안의 갖가지 사물들이 변화하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는데, 이 대상의 변화를 '고정불변성'이나 '동일성' 개념 없이, 바꿔 말해 '실체-우유성(偶有性)' 개념 없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이 같은 문제들을 의식한 칸트(I. Kant, 1724-1804)는, 우리 인간으로서는 결코 실증할 수 없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실체적 물체'와 '영원불멸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적 영혼[정신]' 대신에 대상 인식을 수행하는 주관으로서의 '의식'과 그 의식의 기능 형식인 순수 지성 개념으로서 '실체' 개념을 도입하여, 문제들을 풀어간다.

흄이 그렇게 생각했듯이, "감관들에서 생기는 인상들과 관련해 그것들의 궁극 원인이 인간 이성에 의해서 완벽하게 해명될 수는 없다. 그것들이 직접적으로 대상들로부터 생기는지 또는 마음의 창조적인 힘에 의해 생산된 것인지, 아니면 우리 존재의 창조자로부터 파생된 것인지 확실하게 결정한다는 것은 언제나 불가능하다"(Hume, Treatise, I, 2, 6[p. 67]). 그래서 흄은 사람들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는 '실체'를 한낱 "우리"의 "지속되는 존재자라는 허구에 의해 쪼개져 있는 현상들을 하나로 묶는 성향"(같은 책, I, 4, 2[p. 205])에 의한 관념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흄은, 다양한 지각 묶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묶음들을 어떤 '동일한 사물'에 귀속시키는 우리의 인식 행태를 설명함에 있어서, 사물의 그 동일성의 근거를 이제까지의 상식처럼 이른바 '우리 마음 밖에 실재하는' 사물의 실체성에서 찾지 않고, 그 사물을 인식하는 우리 자신에게서 찾고 있다. 이로써 흄은 주관주의의 문을 연 셈이고, 이미 열려진 문안으로 들어선 칸트는 주관주의의 대저택을 세운다.

칸트는 어떤 지각 군이 사물 A로 통일되고, 또 어떤 지각 군이 사물 B로 통일되는 근거를 더 이상 '사물 자체'에서 구하지 않고, 인식하는 의식의 통각의 초월적 통일 기능에서 찾는다. '통각'(apperceptio)이란 내가 무엇인가를 의식하고 있음에 대한 의식이다. '나는 내가 무엇인가를 의식한다는 것을 의식한다'(ego-cogito-me-cogitare-cogitatum)는 의식의 구조에서 '나는 의식[생각]한다'라는 자기의식은 "나의 모든 표상들에 수반할 수밖에 없다."(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B131) 왜냐하면, 내가 생각[의식]하지 않는 것이 나의 표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니 말이다. 모든 표상들에 수반하는 이 '나'의 자기의식에서 그 모든 표상들은 "나의 표상들"이 되고, 시시각각 표상되는 그 잡다한 표상들에 수반하는 이 '나'가 "동일자"인 한에서, 그 표상들은 하나로 통일된다. 그래서 칸트는 바꿔 말해, "내가 주어지는 잡다한 표상들을 한 의식에서 결합할 수 있음으로써만", 나는 "이 표상들에서 의식의 동일성을 스스로 표상할 수 있다"(같은 책, B133)고 말한다.

'내가 무엇인가를 의식한다'는 대상의식에는 '나'와 '의식함'과 '의식되는 것'의 세 요소가 있다. '나'는 의식의 주체이고 대상을 의식하는 주관이다. '의식함'이란 이 주체의 대상 지향 활동이고, '의식되는 것'은 바로 그 지향된 대상이다. 만약 우리가 감각 경험의 의존 여부에 따라 '경험적임'/'순수함'이라는 말을 구별해 쓴다면, '나'는 예컨대 수학적 대상을 의식할 때처럼 순수하게 기능하기도 하고, 자연적 대상을 의식할 때처럼 경험적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내가 무엇인가를 의식한다'에 수반하는 자기의식의 '나'는 언제나 순수하게 기능한다. 자기의식은 어떤 감각기관의 기능도 아니니 말이다.

대상의식에 수반하여 대상 통일 기능을 수행토록 하는 이 순수한 자기의식은 대상의식이 기능하는 데에 일정한 틀[형식]을 제공한다. 이른바 "순수한 지성 개념들", 바꿔 말해 사고의 "범주들"이 바로 그것이다.

인식 주체 곧 의식이 갖추고 있는 이 같은 일정한 인식의 틀은 인식작용을 가능하게 하고, 인식작용이 있는 곳에 비로소 인식되는 것, 다시 말해 우리에게 존재하는 사물, 대상이 나타난다. 이런 사태연관을 고려하여 칸트는 우리 인간에게 경험되는 사물은 모두 "현상"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니까 이런 의미에서 인식하는 의식의 특정한 성격은 경험에 선행하고, 그래서 경험되는 것 곧 현상에 선행하고, 바꿔 말해 "선험적"(a priori)이고, 그래서 "모든 경험에 선행하면서도 (선험적이면서도), 오직 경험 인식을 가능토록 하는 데에만 쓰이도록 정해져 있는 어떤 것"을 "초월적"(transzendental)(Kant, Prolegomena: 『전집』 IV, S. 373)이라고 술어화한다면, 선험적인 의식 기능은 경험적 인식에서 초월적이다.

경험적 인식과 초월적 인식이 구별되는 이 대목에서 우리는 '경험적 나[자아]'와 '초월적 나[자아]'를 구별해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 언어 생활에서 모든 '나들'이 서로 구별됨에도 똑같이 '나'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그 '나들'에 동일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 나들이 서로 구별되는 것은 또한 차이성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대상 인식에서 '동일한 나'는 의식의 동일한 인식 기능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을 칸트는 "초월적 나[자아, 주관, 주체]"라고 칭한다. 그러니까 '초월적 나'의 차원에서는 '너'와 '나'의 구별이 없다. 그래서 만약에 '나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 하나의 사과를 나누어 먹으면서 한 사람은 "시다"고 느끼고 다른 한 사름은 "달다"고 느끼는 ?? '경험적 나'의 차원에서의 일이라 해야 할 것이고, 그것은 신체성을 도외시하고서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초월적 나'는 신체성과 무관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렇기에 그것은 시간·공간상의 존재자가 아니라, 단지 "초월논리적" 개념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서로 다른 '나들'을 각각 적어도 하나의 '나'로서 가능토록 하는 논리적 전제(Kant, 『전집』 XX, S. 270 참조)이나, 그러나 우리는 그 동일성을 '나들'이 인식작용에서 보이는 동일한 기능 - 예컨대, 모든 '나들'은 대상 인식에서 한결같이 "무엇이 어떠어떠하다"는 인식 틀을 따른다 -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하나의 나'가 적어도 두 관점에서 얘기될 수 있다.

한 관점에서 '나'는 자연적 존재자이다. 자연적 존재자로서 '나'는 당연히 자연, 곧 신체를 떠나서는 생각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방식으로든 신체들에 구별이 있는 한에서, '나들'도 구별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나들' 가운데 하나인 '나'가 영원히 존재하느냐[불멸적이냐] 그리고 자기동일적이냐는 오로지 경험과학적으로 확정될 수밖에는 없다. 이 같은 맥락에서의 '나'의 나임에 대한 탐구는 생리-심리학적 또는 사회학적으로만 가능할 것이며, 로크나 흄이 자기의식이나 기억을 통해서나 '나의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도 암암리에 이 '나'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나임'의 근거를 영혼[정신]으로 보고, 영혼은 실체[비물질성]이고, 그 자체로 단순[불멸성]하고, 자기동일적[인격성]이고, 영원한 생명성[불사성]이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이성적 영혼론은 학문으로서는 전혀 성립할 수 없다"(Kant, K.d.r.V., A382)고 비판하면서, '나'에 대한 지식체계로서는 오로지 "일종의 생리학인 경험적 심리학"(Kant, K.d.r.V., A347=B405 참조)이 있을 뿐이라고 칸트가 결론지었을 때, 그 역시 이런 '나'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나'는 그 '나'가 누구이든 '나'라는 점에서는 동일하고, 또 '나'인 한에서 항상 자기동일적이다. 그러니까 이런 의미에서의 '나'는 자연적인 존재자가 아니다. 아니, 우리가 만약 존재자를 시간·공간상의 어떤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런 것은 도대체가 '존재자'가 아니다. 그것은 '나'를 '나'이게끔 하는 형식적 규정일 따름이다. 그것은 도대체가 '나'라는 개념이 가능하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일체의 '경험적인 나들'을 동일하게 '나'이게끔 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초월적인 나'다. 그리고 이 '형식적' 나는 문자 그대로 하나의 개념 내지는 이념이다.

  실천하는 인격의 이념성

사람의 의식 활동은 인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도 한다. '실천'(praxis)이란 존재자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인식과는 달리, 의지적으로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다.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 함은 존재에 변화를 일으키고 생성 소멸케 함을 뜻한다.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일반적으로 자연 내의 사물들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그러나 그런 것을 우리는 실천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의지적으로 기투(企投)하는 행위만이 실천이라 일컬어 질 수 있다. 이런 실천 행위에는 노동과 도덕적 행위가 있다. 노동은 자연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노동은 자연의 법칙의 범위 내에서 수행된다. 반면에 도덕적 행위는 자연의 제약을 넘어선다. 그래서 칸트는 이런 도덕 행위의 주체를 '순수한 실천 이성'이라고 부른다.

실천 이성이 "어떤 법칙의 표상에 따라서 행위를 규정하는 능력"(Kant,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전집』 V, S. 427)이라면, 순수한 실천 이성은 이성 자신이 제시한 법칙의 표상에 준거해서 행위를 규정하는 능력이라 볼 수 있다. 이성은 원리의 능력이고, 순수한 이성은 원리 자체이니, 순수한 실천 이성은, 자신이 제시한 원리에 따라 행위를 하는 능력, 즉 자율적 능력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유로운 의지이기도 하다.

순수한 실천 이성은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 할 법도를 제시하는 바, 그 법도가 도덕법칙이다. 도덕 법칙은 언제나 당위의 법칙이다. 당위의 법칙은 무엇이 어떠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적 필연성이나, 무엇이 어떻게 존재하며 생겨나는가를 반영하는 사실적 필연성이 아니라, 무엇이 존재해야만 하며 생겨나야만 하는가를 규정하는 당위적 필연성의 표현이다. 도덕적 규범은 사실 내지 존재의 규칙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은 보통 이러이러하게 행동하게 마련이라든지, 그러저러하게 행위한다면 개인이나 사회를 위해서 유익할 것이라는 따위의 사실 보고나 이해타산에 의거한 권유 훈계가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무조건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할 것을 명령한다. 그것이 명령하는 '인간다운' 행위 내용은 사실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이상(理想)에 근거해서 정해지는 것이다. 이 이상은 선(善)이라는 선험적 가치의 표현이고, 도덕 규범은 그러니까 선험적 행위 원칙이다.

이 같은 선험적 도덕 규범에 따른 행위만을 선행이라 할 수 있고, 이런 행위의 주체가 인격(人格, Person)이다. 도덕적 행위 주체로서 인격은 무엇과의 비교에 따라 가치를 얻는, 즉 수단으로서 가치를 갖는 물건과는 달리 "그것의 현존이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격은 다름 아닌 목적 그 자체인 것이다. 그래서 실천 이성의 원칙은 "이성적인 자연 존재자는 목적 자체로서 존재한다"는 '인간 행위의 주체적 원리'를 전제로 한다. 여기에서 이성이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에게 보편타당한 행위 규범으로 부과하는 실천적인 명령이 나온다. 예컨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사용치 않도록 행위하라"(같은 책, V, S. 429)는 칸트 도덕 철학의 정언 명령 같은 것 말이다.

인식 가운데 진리와 허위가 있다면, 선과 악은 도덕 행위 가운데 있다. 도덕 행위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실천 행위다. 사람을 인격으로, 그 자체 가치 있는 것으로 대하는 행위는 선하고, 사람을 한낱 수단 가치로 취급하는 행위는 악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선한 행위 가운데서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존재자, 목적인 존재자가 된다. 목적 자체인 인간을 우리는 존엄하다고 한다. 이성이 제시하는 선의 이념은 이로써 다름 아닌 인간 존엄성의 이념이다.

그런데 자연적 존재자인 인간이 언제나 자기 자신이나 남을 인격으로 대하는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신체 욕구적 경향성을 제어하고 도덕 명령을 존경하여 준수할 수 있는 힘을 인간이 한편으로 가지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 힘이 바로 의지의 자유이며, 인격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은 자유 의지이다.

도덕적 행위의 주체는 자유로운 의지이다.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수행되는 도덕적 실천 행위는 아직 없지만 그러나 마땅히 있어야 할 것 즉 이상을 실현하는 당위적 활동이다. 그리고 그 실현은 자연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자유로운 의지의 활동이 자연에서 무엇인가를 실현시킨다 함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다르게 변화시킨다는 뜻이고, 의지가 자유롭다 함은 자연으로부터 결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자연으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순수 의지가 자연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 된다. 그것은 자연 안에서 살고 있는 자연 존재자인 인간이 자연의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운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서 자연을 변경시킬 수 있음을 말한다. 이것은 자연 세계는 수학적-역학적 법칙들의 통일 체계이고, 도덕 세계는 당위적 실천 법칙의 통일 체계이되, 자연 세계는 도덕 세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도덕 세계는 자연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자연 세계에 물리적 원인에 의해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도덕적 원인에 의한 사태가 일어나기도 함을 뜻한다. 나는 머리를 들고 있기가 힘들어 머리를 숙이기도 하지만, 어른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 머리를 숙이기도 한다. 머리를 숙이는 움직임은 이 두 경우에서 다같이 물리적-생리적 법칙에 따라 진행되지만, 그 움직임을 작동시킨 원인은 서로 다르다. 이것은 자연 내에는 자유(의지의) 원인성과 자연(인과의) 원인성이 양립함을 말한다. 인간은 행위에서 자연 존재로서 물리적 법칙에 종속하기도 하면서 자유 존재로서 도덕적 법칙에 종속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리적-생리적 법칙에 종속하는 한 인간은 여타의 자연 사물과 한가지지만 도덕법칙에 종속하는 한에서는 인격이다.

그러나 이때 인격적으로 자연 세계에서 행위하는 자는 자연적 존재자, 즉 신체를 가진 존재자이고, 그런 한에서 '너'와 '내'가 구별되는 인간이다. '너 자신이 다른 사람을 인격으로 대하라'는 명령은 이미 '너'와 다른 사람을 구별하고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도덕법칙의 보편적 당위성을 표상하는 실천 이성은 보편적 이성이지만, 그것을 자연 안에서 실행에 옮기는 행위 주체는 개별자로서 인간, 즉 개인이다. 즉 행위 주체로서의 개개인은 보편성과 더불어 개성을 가진 자유의지적 존재자이다.

절대자로서 정신

칸트는 '초월적 의식' 개념을 세워 대상 인식 현상을 해명하고, '인격' 개념을 세워 인간의 도덕적 행위 현상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거기에 실체로서 '정신'은 없었다. 이에 반해 헤겔(G. W. F. Hegel, 1770-1831)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유일한 것으로서 '정신(Geist)'을 세계 생성과 운동의 중심에 놓는다.

헤겔은 정신이란 자기 정립적이며 자기 활동적인 것이고, 그래서 자유이자 주체이므로 본래 무엇에 관하여 상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지 않은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은 절대자다. 그러나 정신이 삼라만상과 인간을 통하여 그 자신을 드러낼 때, 다시 말하면 개념으로서의 정신, 절대자가 매체를 통하여 전개 실현될 때, 그것은 여러 모습[相]을 보이고 그런 한에서 전변(轉變)하고 상대적이다. 그러니까 정신은 실재에서는 이를테면 '상대적인 절대자'라 할 수 있고,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되어 가는 중에서 자기 자신을 세우고 자기 자신에 머무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신은 원래 절대자이건만 현실적으로는 상대적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정신의 모습은 언제나 가상(假象)이고 그런 만큼 정신은 본래의 자신을 세우기 위하여, 곧 진상을 드러내기 위하여 자신의 그때 그때의 모습을 스스로 부정한다. 그래서 헤겔은 정신을 "순전히 스스로 하는 운동의 절대적 불안정"(Phänomenologie des Geistes[PdG]: GW 9, S. 100) 또는 "절대적 부정성"이라고도 말한다.

정신은 현실에서 결코 안정 중에 있는 일이 없으며, "항상 전진하는 운동" 속에 있다. 그런데 이 전진 운동은 자기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한 계기에서 '진상'으로 현상하는 정신은 다음 계기에 현상하는 정신에 의해 부정되고 가상으로 전락한다. 그것이 진정한 '진상'이 아니었기에 새로운 현상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이 부정은 필연적이고, 이 부정은 그러나 바로 정신 자신의 힘이라는 점에서는 자유 자체이다. 자유로서 "정신의 힘은 그것이 표출되는 꼭 그 만큼 큰 것이며, 정신의 깊이는 그의 펼쳐 냄 중에서 자신을 확장하고 그리고 자신을 상실해 갈 수 있는 그 만큼의 깊이를 갖는다."(같은 책, S. 14) 정신에 의한 정신 자신의 이 부정을 통한 확장 운동 과정이 "정신의 생(生)"이며, 정신은 이 끊임없는 자기와 자기의 "분열" 중에서 완성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함으로써만, 자신의 진정한 "진상"을 마침내 획득한다(같은 책, S. 27).

정신은 전변 운동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나, 그러나 이 자신을 바꾸어 가는 운동 중에서도 정신은 항상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며,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불변의 절대자이자 실체이다. 또한 이 절대자는 "살아있는 실체"(같은 책, S. 18) 곧 "주체"이며, 언표 상에서는 "주어"이다. 전개되는 모든 계기들, 전상(展相)들은 이 주체에 속하는 것이며, 이 주어에 속하는 술어들이다. 속성들은 언제나 주체 내지 기체(基體)인 실체에 속하며, 술어들은 언제나 주어에 속해 있다. 그러나 실체 내지 주체는 속성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며, 술어 없이 주어는 결코 표현될 수 없다. 이 속성들이 바로 그 실체는 아니지만, 속성들 곧 전개되는 계기들을 통해서 실체는 그러나 자신의 참모습[眞相]을 드러낸다. 정신의 한 계기 한 계기, 한 전상 한 전상은 정신을 현실에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각각 진상이지만, 그러나 진정한 "진상은 전체"(같은 책, S. 19)뿐이다. 물론 이 "전체는 그것의 전개를 통해서 완성되어지는 것이다."(같은 곳) 정신은 이렇게 다수이면서 하나[一者]이며, 보편적인 것[普遍者]이고, 이런 의미에서 절대자이다. 이 절대자로서의 정신은 스스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운동의 주체이며, 이 점에서 자유인 정신은 "달리 되어감"에서 자신임을 유지하고, "달리 있음"에서 "자기와 같음[同一性]을 재생산" 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은 오직 매개적으로만 현상하며, 따라서 실체 내지 주체로서, 그리고 절대자로서 정신이 진정으로 무엇인가는 이 부정 운동의 "종점"에서 비로소 나타날 것이다. 이 "종점"은 정신이 자기 부정 운동을 막 "시작"할 때부터 그러니까 살아 있음을 보일 때부터 "목표"로 가진 "이념"[개념]이자 긴 도정을 매개로 한 "결실"이다(Hegel, Wissenschaft der Logik[WdL] I: GW 11, S. 376).

정신의 자기완성의 긴 도정이 세상의 역사, 세계사이며, 그런 점에서 세계사의 주체인 이 정신은 "세계정신" 또는 "세계이성"(Hegel, PdG: GW 9, S. 25)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세계란 세계정신의 자기 인식 내용이며, 자기 기투와 노역(勞役)의 결과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한, 이 세계정신의 대표적인 매체는 인간이며, 세계정신은 인간을 통하여, 인간의 대상 인식과 자기 인식 그리고 실천을 통하여 가장 잘 발현된다.

'정신' 없는 물리주의 세계

헤겔이 세계의 운동 원리, 주체인 실체로서 정신을 그다지도 강력하게 설득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중반이후 많은 사람들은 정신·영혼·마음의 지위를 더 이상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일찍이 라 메트리(J. O. de La Mettrie, 1709-1751)는 데카르트에 대한 비판으로 『인간기계론(L'homme machine, 1748)』과 『인간식물론(L'homme plante, 1748)』을 폈었다. 그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두 기계적 운동만을 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의식 활동 일체도 물리적 자극과 육체적 과정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의식이란 물질적 기계 운동의 특수한 부산물일 뿐으로, 실체로서의 정신은 ?? 인간적인 것이든 신적인 것이든 ??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제 헤겔 비판으로부터 자리를 잡은 신칸트학파의 랑게(F. A. Lange, 1828-1875)는 "영혼 없는 영혼론", 곧 "마음 없는 심리학"(Psychologie [Seelenlehre] ohne Seele)을 발설했고(F. A. Lange, Geschichte des Materialismus und Kritik seiner Bedeutung in der Gegenwart, Iselohn/Leipzig 1866, Bd. 2, S. 381), 20세기 중반을 넘자 마침내 플레이스(U. T. Place)는 '의식은 두뇌 과정'이라는 물리주의적 원칙을 주창하였다("Is Conciousness a Brain Process?", in: Britisch Journal of Psychology, 47(1956), Pt. 1, pp.44-45 참조). 그 후 주로 영미 심리철학들은 물질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심리 현상에 대한 용어들은 물리적 현상 외에 아무런 것도 지시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마땅히 제거되어야 하고, 실제로 과학의 발달에 의해 마침내 사라질 것이라고 본다(제거적 유물론, Eliminative Materialism). 정신 내지 심리 현상의 정체는 오로지 신경 과학(neuro science)을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어떤 사람들은 모든 유형의 심리 상태는 그것에 상응하는 일정한 물질적 상태, 곧 두뇌 신경 상태가 있으며, 양자는 존재적으로는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유형 동일론, Type-Type Identity Theory 또는 환원적 유물론, Reductive Materialism). 가령, '사랑'이란 오른쪽 1·2·3·4·5번 뇌세포가 활발하게 운동한 상태이고, '미움'이란 왼쪽 1·3·5·7·9번 뇌세포가 격렬하게 운동한 상태라는 것이다.

이 같은 사조에 따라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정신'·'영혼'·'마음[心]'·'자아'·'인격' '의식' 따위는 물리적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한 지시하는 바가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이런 유물론적, 물질주의적 주의 주장들은 학자들 사이의 갑론을박을 거치면서 점점 세밀화 내지 교묘화 해가고 있는 중이므로, 아직도 이론적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상황만으로도 '정신' 없는 물리주의가 인간 세계에 미친 파장은 결코 작지 않으며, 인간 세계의 질서 원리를 새로이 모색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물리주의, 다시 말해 세상 만물의 이치를 물리적 내지는 물리학적이라고 보는 견해는 의당 '정신'의 존재를 승인하지 않고, 인간에게서도 자기 원인(causa sui)적인 자유(自由)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래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당위를 허용치 않음으로써 무엇보다도 결국 인간 사회의 질서 원리인 도덕이 설자리를 없애버린다. 물리적 법칙에 따라 만물은 운동하는 것이고, 바위와 소나무 사이에, 사과나무와 까치 사이에, 개와 개 사이에 당위가 없고 윤리가 없는데, 아무런 자유로운 의지나 의사(意思) 없이 똑 같은 자연 법칙의 지배 밑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어떤 종류의 당위, 윤리가 있겠는가?

근대 계몽주의 시대에 데카르트가 새삼스럽게 정신과 물체 이원론을 내놓았던 것은, 사실 세계의 진리는 승인하되, 당위적 도덕과 희망적인 성스러움을 여전히 인간 세계에 남겨두려는 간절하고도 진지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가치의 세계에서는 진리보다는 선함과 성스러움이 으레 우위를 차지하는 법이니, 정신과 물체의 공존이란 사실상은 여전히 물체가 정신에 종속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정신이 있다고 받아들여지는 한 모든 사회 질서의 권위는 '고귀한 영혼'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영혼의 본거지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감성의 '독자성'이나 감각의 '자유로움'은 비천함을 면하기 어렵다. 인간을 철두철미 감성적, 신체적 존재자로 파악한 마르크스(K. Marx, 1818-1883가 종교[기독교]는 "민중의 아편"(Aus den Deutsch-Französischen Jahrbüchern, in: Frühe Schriften, Bd. 1, hrsg. H.-J. Lieber/ P. Furth, Darmstadt 1989, S. 488)이라고 규정한 것이나, 니체(F. Nietzsche, 1844-1900)가 "신들은 죽었다"(Also sprach Zarathustra, in: Nietzsche Werke, Bd. III, hrsg. K. Schlechta, München/Wien 1980, S. 340)고 외친 것은, 신을 정점으로 하는 정신 체계의 본거지에 대한 감성적 공격이다. 이에 비해 20세기 후반 미국 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물리주의는 동일한 주의 주장의 이성적 변형이다. 물리주의는 이성의 옷을 입은 니체주의인 것이다.

이성적인 논증과 과학적인 사실 입증을 '토대로' 정신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고 천명함으로써 사실상 신의 존재와 인간이 정신적 존재임을 부정하고 나면, 선의 관념 자체가 원천을 잃게 되는 것이고, 결국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자연 물리적 사물들의 관계이거나 아니면 감성적 욕구의 교환, 곧 이해(利害) 관계로 환원될 따름이다. 신도 이성도 없는 곳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 곧 '정도(正道)'를 거론할 때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상호 역학 관계를 맺고 있는 운동체들인 사람들 사이의 힘의 균형밖에는 없다. 이 판국에서 '정도'를 제시하는 것은 하느님도 아니고, 이성을 대변하는 탁월한 현자(賢者)도 아니고, 오직 힘있는 '다수'일 따름이다.

그런데 잦은 이합집산 중에 형성되는 '다수'는 변덕장이다. 그래서 아침나절의 '정도'는 저녁나절에는 이미 '정도'가 아니기도 하고, 오늘의 정도는 내일이면 벌써 '사도'(邪道)일 수 있으며, 동쪽에서의 '정도'는 서쪽에서는 '헛소리'일 수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래서 모든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 되고, 말할 것도 없이 윤리적 가치 또한 상대화되고, 이름하여 도덕 '상대주의'가 득세한다. 도덕의 상대성이란 결국 무도덕성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에게는 선한 것이지만, 너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고, 그들에게는 선한 것이지만 우리에겐 악한 것임을 승인하게 되면, 한 행위가 보는 이에 따라서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기도 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데, 이 상황에서 어떤 윤리적 척도가 제 구실을 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세상에서 자신을 신체적 존재자라고 공공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신체적 삶의 질은 십중팔구 사람들의 영리한 계산 능력 곧 지력(知力)에 따라 결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차라리 '지력이 좀 모자란다'는 평은 감내할망정 '도덕적으로 악질이다'는 평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못 견뎌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도덕적 가치어'들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이론은 그야말로 '복음'이다. 형이상학적 명제들과 함께 윤리적 판단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확인된 마당에 윤리적 강령들은 어떤 본부에서 발령이 되든 어떠한 권위도 얻지 못한다. 물리주의는 사람들을 도덕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복음'인 것이다. 그렇게 '해방된' 인간은 그래서 하나의 물체가 된다. 물체에게 분명 도덕적 가치어들은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가 보통 '인간의 존엄성'을 얘기하는 것은 인간이 여타의 생명체보다 지력이 뛰어나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온갖 사물을 부릴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사람 중에서도 가장 존엄한 사람은 가장 지략이 출중하고 뭇 사람을 굴복시키는 사람이라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사람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엔가 쓸모가 있어서 가치가 있는 그러니까 수단적 가치를 갖는 물건과 달리 사람은 누구나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그러니까 목적적 가치를 가진 존재자로 간주하기 때문이며, 우리가 인간을 스스로 이렇게 높여 보는 것은, 만물 가운데서 사람만이 유독 윤리적 당위 질서에 자신을 복종시킬 줄 알고, 바로 그런 한에서 신성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제 정말이지 물리주의의 주장이 사실이고, 그래서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실에 근거해서 '도덕의 세계'를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해야 한다면, '인간의 존엄성' 역시 물리적인 의미밖에는 얻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는 사회도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만사는 기껏해야 물리적-생리적-심리적으로 설명될 것이니 말이다.

그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윤리 도덕에 그 정당성의 뿌리를 두고 있던 국가 사회의 법령들의 권위도 물리주의적 사회에서는 한낱 물리적 힘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된다. 물리주의적 사회에서는, 우리가 남의 담장 너머까지 가지를 뻗친 감나무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고, 남의 집 처마 밑에 둥지를 튼 제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듯이, 배고픈 나머지 남의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먹은 사람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책임은 스스로 행위한 자에게나 물을 수 있는 것이지, 물리-생리-심리적 인과 연관에서 기계적으로 운동한 사물에게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물리주의적 사회에서는 이른바 '범죄자'란 단지 대개의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운동한 자를 지칭할 터이니, 범죄자는 더 이상 처벌의 대상일 수가 없고, 오직 치료의 대상이거나 수리(修理)의 대상일 따름이다. 톱니가 손상돼 빨리 내닫는 시계는 톱니를 좋은 것으로 바꿔 주거나 쓰레기로 버리듯이, 아비가 없어 죄지은 자에게는 아비를 만들어 주고, 정서가 불안정하여 남에게 행패를 부린 자에게는 적절한 치료를 해주거나 그래도 쓸모가 없으면, 또는 수리비가 효용보다 더 들 것 같으면, 내다버리는 것이 물리주의적 처리 방식이다.

물리주의적 세계에는 기껏해야 '물격'(物格)과 그것의 등급인 '물품'(物品)이 있을 뿐 '인격'(人格), '인품'(人品)의 자리는 없다. 그런 곳에서 이른바 '선비정신'이란 선비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생리-심리적 운동 규칙 이상을 의미할 수는 없는 것이며, "현대인들은 정신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가치를 더 추구한다"는 따위의 말은 애당초부터 무의미한 말일 수밖에 없다.

인간 세계의 가치 원리로서 정신

그래서 진정한 문제는, 단순히 '정신이란 무엇인가?'보다는 '어떤 의미에서 정신인가?'이고, 정신이 과연 있느냐 없느냐보다는, '정신이 있다'·'정신이 없다'가 무엇을 함축하느냐이다. 정신을 세계 주재(主宰)의 원리나, 세계에 대한 인간 인식의 주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사실적 증거들이 필요할 터다. 그럼에도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정신은 있으며, 적어도 인간 세계를 규제하는 가치 원리로서 있다. 그 가치 원리가 어떤 초월적 신에게서 유래한 것이냐, 인간의 자연 심성에서 발원한 것이냐, 인간의 이상에서 정립된 것이냐, 아니면 유한한 인간의 한낱 환상이냐는 물론 여전히 '사실적'으로 답해질 문제다. 그러나 인간은 줄곧 가치 체계 속에서 살아 왔으며, 살고 있고, 살 수밖에 없을 것인 바, 그 가치 체계의 원리를 우리는 충분히 '정신'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정신'이 결코 물리적 원리와는 다른 것임을 말하기 위해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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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論語』 爲政四: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2) 박종홍, 『朴鍾鴻 全集』(민음사, 1998) V권, 283-285면. '李定稷의 『칸트』 硏究' 참조.

 3) 한국철학회 편, 『韓國哲學史』 下卷(東明社, 1987), 351면 이하 참조; 박종홍, 『朴鍾鴻 全集』 V권, "李寅梓 論"(424-434면) 참조; 조요한, "우리의 삶, 우리의 現實, 韓國 哲學言語로의 模索", 『월간 조선』, 1982년 2월호, 328면 참조; 허남진, "서구사상의 전래와 실학", 『철학사상』 4호(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1994), 178면 참조; 이현구, "개화기 유학자와 계몽운동가들의 서양철학 수용", 위의 책, 247면 이하에는 李寅梓의 『希臘古代哲學攷辨』의 주요 맥락이 서술되어 있음.

 4) 이기상, "철학개론서와 교과과정을 통해 본 서양철학의 수용(1900-1960)", 『철학사상』 5호(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1995), 70면 참조.

 5) 박영식, "人文科學으로서 哲學의 受容과 그 展開過程", 『인문과학』(연세대 인문과학연구소, 1972) 26집, 110면 참조.

 6)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Schwabe 판), Bd 6, Sp. 1190 참조, 또 The Encyclopedia of Philosophy(Macmillan 1967판), vol. 5, p.542 참조.

 7) Platon, Phaidros, 278d; Descartes, Principia philosophiae의 프랑스어 역자 Picot에게 보낸 편지; Wolff, Philosophia prima sive Ontologia, §1 참조.

 8)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Schwabe 판), Bd 2, Sp. 683 참조.

 9) "太極只是天地萬物之理…萬物之中各有太極…太極只是一道字"(『朱子語類』, 卷一, 一); "道是統名 理是細目"(같은 책, 卷六, 一); "太極在天曰道 此道字以天命流行之道言"(『栗谷全書』, 卷二十, 聖學輯要 二); "理以在物而言 道以流行而言 其實一而已"(같은 책, 同 窮理 章) 등 참조.

10) 참조: 井上哲次郞, 『哲學字彙』(1881), 東洋館, 1884.

11) 강영안, 『우리에게 철학은 무엇인가』, 궁리, 2002, 175면 이하 참조.

12) 백종현, 『독일철학과 20세기 한국의 철학』, 철학과현실사, 1998·2000, 43면 이하 참조.

▶ 원문<The original>  : http://philinst.snu.ac.kr/project/ephil/phil.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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