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사시대의 건축양식(先史時代 建築樣式) 한반도에서 건축에 대한 기록으로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읍루조'에 '기후가 추워서 땅 파고 그 안에서 사는데 깊을수록 귀하고, 큰집은 아홉 계단이나 내려간다'라고 하고 있으며, 같은 책 한조(韓條)에는 '움집을 짓고 사는데 그 모양은 무덤처럼 생겼고 출입구는 위쪽에 있다'라고 기록되었다. 또한 진서(晋書)에 '여름철에는 소거(巢居 : 나무 위에서 삶)에서 생활하다가 겨울철에는 혈거(穴居 : 움집)생활을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진 변한조에 인용된 위략(魏略)에는 '둥근 나무를 포개어 집을 짓는데 마치 감옥과 닮았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오늘날의 귀틀집으로 해석되며, 이런 건물의 모습은 마선구 제1호 고분벽화에서 밝혀진 바 있다. 이밖에 궁산리 제4호 주거지, 옥석리 주거지, 안약 제3호 고분벽화, 수산리 고분벽화, 쌍영총 벽화 등에서 고대건축에 관한 연유를 찾아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안약 제3호 고분벽화에는 기와지붕으로 보이는 건물과 부엌, 고깃간, 수레를 넣어 두는 칸, 마구간 등으로 보이는 그림이 있어 상류계층의 주거를 추정할 수 있다. 안약 제3호 고분벽화는 사각기둥과 다각기둥의 형태가 보이며 기둥 위에 주두를 올리고 주두 위에 공포의 일부인 첨차를 올렸다. 천장은 귀접이를 하여 상부로 올라가면서 좁아지는 형태이다. 기둥에는 용트림을 한 단청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이와 같은 건축 양상은 삼국시대의 건물이 남아 있지 않은 현재로서는 고대건축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학술자료가 되며 우리의 옛 장인들이 이룩했었던 건축술의 단면을 이해할 수가 있다. 서울 근교에는 암사동 선사주거지, 춘천 중도 선사주거지 등이 발굴 조사되었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6천년전의 수혈주거 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곳 주거지에는 당시의 주거모습을 재현하여 건축을 이해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운하리 궁산 유적] ▷ 원시 주거 형식 (ㄱ) 수혈(竪穴)식 주거(토막식 주거) (ㄴ) 누목(累木)식 주거 (ㄷ) 고상(高床) 주거 [수혈식 주거 복원도] □ 삼국시대의 건축양식(三國時代 建築樣式) 우리 나라의 건축은 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 시기의 건물은 지금 남아 있는 것이 전혀 없으나, 이어져 남아 있는 고려나 조선시대의 목조건축으로 미루어 보아 구조상으로나 양식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것은 고구려의 고분 구조나 고분의 벽화에서 볼 수 있는 건물도(建物圖)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 평양(平壤)이나 공주(公州)·부여(扶與) 및 경주(慶州) 일대에 남아 있는 사찰과 궁전의 유적, 옛 기와와 벽돌 등 유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여 한반도의 유일한 통일국가로 발전하게 되자, 역대의 왕은 불교에 깊이 귀의하여 경주를 중심으로 곳곳에 큰 가람(伽藍)을 짓고, 마침내 불교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건축은 장엄하고 화려하였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불행히도 이들 건물의 대부분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삼국시대에 고구려는 백제·신라에 비하여 가장 빨리 중앙집권적 국가로서의 기구를 갖추었고, 중국과의 문화교류도 가장 빠른 시기에 행해졌다. 불교 역시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도입되었고, 문화도 삼국 중에서는 가장 먼저 발달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당시의 건축은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 고분의 일부 구조, 또는 벽화 고분에 그려진 건물도 및 건물 부분을 그린 그림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에 의하면, 고구려시대의 목조 건물은 이미 완전한 보(樑)와 도리로 가구(架構)되었고, 기둥에는 뚜렷한 배흘림이 있었다. 기둥 위에는 공포를 짜 올렸는데, 그 중에는 이중으로 짜인 것도 적지 않다. 또 공포에는 기둥머리(柱頭)나 소로(小累)에 굽받침이 있는 것과 굽받침이 없는 것이 있어, 그 양식이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중에는 공포 부분을 약화(略化)하여 그린 것으로 보이는 역계단형(逆階段形)으로 2단이나 3단으로 된 것도 있다. [우현리 대총의 석실 구조] 대부분의 기둥은 그 공포가 그 위의 긴 가로목(橫材)을 받치고 있으며, 그 위에는 팔자형(八字形)으로 된 솟을대공(臺工)을 두고, 그 위의 도리를 받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솟을대공 사이에 간단한 동자주(童子柱)를 세운 것도 있고, 또 창방(昌枋)과 도리 사이에 공포를 배치한 것도 볼 수 있다. 지붕 형태에 있어서는 규모가 큰 건물은 우진각 지붕으로 되어 있고, 규모가 작은 건물에는 맞배지붕이 사용되었던 것 같다.
백제의 목조건축 양식에 대해서는 지금 남아 있는 유구(遺構)가 없을 뿐만 아니라, 고분이나 기타 석조유물에도 이를 뚜렷이 나타내고 있는 것이 없어 알 길이 없다. 다만, 일본 나량(奈良)에 있는 법륭사(法隆寺) 건물이 백제에서 건너간 공장(工匠)에 의하여 세워졌다고 전해 오는데, 그 중 몇몇 건물은 비록 후세에 보수를 하기는 했다고 하나, 창건 당초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또, 이 절에 소장된 작은 불감(佛龕)인 옥충주자(玉蟲廚子)가 백제로부터 전해진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목조건물을 충실히 모형(模型)한 불감이기 때문에 백제의 목초건축을 고찰하는 데 자료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백제의 것과 동일한지, 또는 그 양식만이 백제에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신라에 있어서는 고신라나 통일신라를 통하여 유구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아, 목조 건축의 양식을 짐작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당시의 정세로 보아, 고신라에서는 백제의 영향이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 양식에서는 앞에서 서술한 고구려·백제의 양식과 큰 차이가 없고, 다만 세부구조에서 약간 복잡해진 것뿐인 듯하다. 이것은, 일본의 건물 유구나 중국에서 8세기초에 세워진 대안탑(大雁塔) 미석(楣石)에 선각(線刻)된 불전(佛殿)을 미루어 보아 알 수 있고, 실상사(實相寺) 백장암(百丈庵)의 3층석탑이나 쌍봉사(雙峰寺)의 철감선사탑(澈鑒禪師塔) 등 신라시대의 석조물 세부(細部)를 보아도 알 수 있다.
□ 고려와조선의 건축양식(高麗와 朝鮮의 建築樣式) 고려 초기의 모든 문화는 신라의 것을 그대로 계승하였을 것이고, 건축양식에서도 역시 그랬을 것이다. 다만, 세부의 장식적인 의장(意匠)이 복잡해지는 따위의 부분적인 변화만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것은 중국에서나 일본에서도 이 시기에는 특이한 건축양식이 발생하지 않았던 것으로도 알 수 있고, 또 고려시대의 석조유물이나 금동제 소탑(小塔) 등을 살펴보아도 가히 짐작이 간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에는 이러한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고려 중기에 들어가면서, 중국의 중원(中原)을 차지했던 송(宋)의 세력이 약화되어, 중국 동북지방에서 일어나 차츰 화북지방으로 세력을 뻗치게 된 금(金)에게 쫓기게 되자, 1162년에 송은 그 판도(版圖)를 양자강 남쪽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것은 항상 중국대륙의 문화에서 영향을 받아 왔던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고려는 계속 송과의 교류 통상을 하면서 중국 남부지방인 복건성(福建省) 부근에서 성행하던 새로운 건축양식을 도입하게 되었다. 이 양식이 이른바 우리가 말하는 주심포(柱心包)집 양식이다. 그 후, 중국이 몽고족에 의하여 통일되어 대원제국(大元帝國)이 기반을 굳건히 하자, 고려는 다시 원의 모든 문물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에 건축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중국 동북부에서 요 금(遼·金)등에 의하여 성행되었고, 원이 이를 중국 대륙에 퍼트린 화려하고 웅장한 새 건축양식이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다포(多包)집 양식이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의 목조건축에는 이 두 가지 양식이 같이 사용되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고건물의 대부분은 이 두 양식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주심포집과 다포집 두 양식은 발상지도 다르고 도입된 경로도 달라서 원래는 이질적인 건축양식이었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와서는 이미 시공의 편의나 가구(架構)의 합리화 또는 장식적 의장의 융합 등에서 절충된 것이 많아졌고, 나아가 그 양식도 중국대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 고유의 건축양식을 나타내기에 이르렀다.
반면에, 다포집 양식이란 공포의 짜임이 기둥머리의 상부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1조(組) 또는 그 이상의 공포를 배치해 놓은 양식이다. 이것은 종래에 있어 왔던 양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며, 우리 나라에서도 완전한 하나의 스타일로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주심포와 다포 두 양식은 도입된 후 얼마 동안은 신축 건물을 짓는데 있어서, 아무런 규범이 없이 건축구조의 기호나 시공자의 기술적인 계통에 따라 어느 한 양식이 선택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초기에는 중앙에서 건립된 주요 건물은 다포집 양식을 많이 사용하였다. 이것은 태조(太祖)가 신임하였던 선종승(禪宗僧)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영향을 받았음인지, 당시 중국 선종사찰(禪宗寺刹)에서 즐겨 채택되던 양식이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가장 활발한 건축활동을 보여 주었던 태종대(太宗代)에 와서는, 주심포집과 다포집 양식을 그 건물의 사용목적과 외관상의 필요에 따라 구분하여 채택하는 경향을 나타내게 되었다. 곧, 다포집은 궁전·성문 또는 사찰의 주요 법당 등과 같이 위풍이 요구되고 화려해야 할 건물에 주로 채용되었고, 주심포집은 사사롭고 간소한 느낌을 필요로 하는 건물 또는 간소한 외관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건물인 종묘나 사찰의 2차 적인 법당 등에 채용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