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두라스 코스타리카 축구 - ondulaseu koseutalika chugg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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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전쟁 - 1969년

축구전쟁은 1969년 7월 14일부터 19일까지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사이에 일어난 전쟁으로, 일명 100시간 전쟁, 또는

엘살바도르ㆍ온두라스 전쟁이라고도 한다. 1970년 월드컵 예선에서 충돌한 문제로 인해 <축구전쟁>이라는 이명을

달게 되었다.

엘살바도르는 북중미에서 가장 국토면적이 적지만 인구밀도는 가장 높은 국가이다. 인구의 약 90%는 메스티소라 불린

스페인계 등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로, 나머지는 순수한 백인과 인디오로 구성되어있다. 산악지대가 이어지는 좁은 국토에

거주하지만 북중미 지역에서 가장 공업이 발달하여 근면한 국민성을 더해 한때 <북중미의 일본>이라고도 불리웠다.

그 한편으로 19세기 후반부터 국내경제를 커피생산과 수출에 의존했는데 이것은 정부가 자급자족 농업을 행하는 원주민의

토지소유를 법률로 금지하여 커피 생산자에겐 세금적으로도 우대를 해주는 등 나라 전체가 커피생산을 권장한 영향도 있었다.

국토의 대부분은 <14가족>이라 불린 일부 백인 부유층이 소유한 농장이 점유하여 토지와 재산을 독점해 대다수 국민은 빈곤했다.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엘살바도르의 일부 국민은 약 6배의 국토를 가진 인구대비도 엘살바도르의 2분의 1(250만명)에 지나지 않는

인접국인 온두라스로 이주하여 생활기반을 마련했는데 이러한 이민은 1960년대 당시, 합법과 비합법 이민을 포함해 약 50만명에

이르렀다.

온두라스에선 오래전부터 엘살바도르에서 이민자를 받아들여 1900년대엔 정부가 변경지역을 개척하는 이민자에 대해선 무상으로

토지를 제공했다. 1932년에 엘살바도르에서 공황이 발생했을때 수천명이 온두라스로 이민하여 농장과 광산에서 일했는데 그 한편으로

온두라스 국내에선 지역민과 이민자들 사이에서 토지와 일자리를 둘러싼 다툼이 표면화되었다.

온두라스 정부도 차츰 태도를 변화하기 시작하여 이민자 문제를 놓고 양국정부는 1962년과 1965년에 조약을 체결하여 조정을

꾀했지만 온두라스 국내의 인구증가, 바나나 농장의 근대화에 따른 노동력 감소, 목축과 면화농장의 확대로 인한 농지부족이

문제가 되어 야당과 부유층에서 농지개혁의 압력이 높아져갔다.

온두라스 정부는 1969년 1월에 조약갱신을 거부하여 오스왈도 로페스 아레야노 대통령은 1962년에 제정된 농지개혁법의 실시에

나서게 되었다. 이 개혁법은 토지 소유자를 온두라스 국내에서 출생한 자로 한정하였기에 이에 해당하지 않는 엘살바도르 이민은

30일 이내에 국외퇴거를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온두라스 정부에 의한 발표는 1969년 4월에 이루어져 5월 하순부터 엘살바도르 이민자의

귀환이 시작되었다.

한편 국가산업을 커피와 바나나 등의 농업생산과 수출에 특화하여 선진국으로부터 근대화에 늦은 나라들로 지적받았던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과테말라, 코스타리카의 5개국은 북중미 지역의 경제통합을 목적으로 1961년에 북중미 공동시장을 발족시켰다.

북중미 공동시장의 발족과 미국의 압력에 의한 외자기업의 참가자유화로 인해 1960년대에 5개국은 공업화가 진행되었다.

공업입지에 관해 원래는 각국간 공평히 배분하여 결정할 예정이었지만 가맹국 간의 대립과 외자기업의 압력으로 인해 완화되어

공업화가 진행되었던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코스타리카의 3개국에 공업입지가 집중되었다. 그 중에서도 1950년대부터 공업화가

진행되었던 엘살바도르는 국민의 대다수가 빈곤층이어서 국내시장이 작은 사정도 있어 일부 부유층을 위한 생산과 무역협정에

근거한 북중미 국가로의 수출생산으로 발전을 꾀했다.

엘살바도르는 북중미 공동시장의 발족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가맹국 내에선 가장많은 특혜를 받았지만 한편으로 온두라스에선

공업화가 늦어져 엘살바도르 제품에 의해 시장이 압박을 받는 등 불균형이 생겨나 온두라스측은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우기와 건기시 변화하는 북부지형의 양국의 국경선을 놓고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자주 충돌을 반복했다.

온두라스의 아레야노 대통령에 의해 시리시되어진 농지개혁법으로 엘살바도르 이민자들은 토지를 잃고 귀국했는데 그 숫자는

약 5만명이었다. 이 정책은 월드컵 예선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는데 우연하게도 일치하여 의도적인것이 아닌가 의심을 받았다.

하지만 그 결과, 두나라 국민들 사이의 감정을 자극하여 전쟁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민자의 국외퇴거는 강제적으로 이루어졌기에 온두라스의 <라 만챠 브라바>라 불린 극우조직과 준군사조직도 여기에 관여하여

잔학행위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 엘살바도르의 신문과 매스컴은 온두라스에 대한 철저한 보복을 요구하는 사설과 선언을

정부에 요구했다.

그러던 중, 1970년 FIFA 월드컵 북중미 ・카리브 예선은 사상 최다인 12팀이 참가하여 시작되었다. 여기선 멕시코 대표가 월드컵

본선에 연속출장하는 등 우세를 보였는데 1970년 대회는 개최국으로서 예선을 면제받았기 때문에 멕시코 이외의 팀에게 본선진출의

기회가 늘어났다.

엘살바도르 대표는 수리남 대표와 네덜란드령 안틸레스 대표, 온두라스 대표는 코스타리카 대표와 자메이카 대표를 각각 누르고

1 라운드를 돌파하여 준결승 라운드에서 대전하게 되었다. 첫 경기는 1969년 6월 8일에 온두라스의 수도인 테구시갈파에서 열려

온두라스 대표가 1 대 0으로 승리했다.

하지만 엘살바도르 대표가 숙박한 호텔 주변을 군중들이 몰려 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폭죽과 클랙션 등을 울리면서 상대를 비난하는

환성과 휘파람을 불며 건물에 돌을 던지는 등 엘살바도르 대표팀을 괴롭혔다. 한편 이러한 온두라스 서포터에 의한 행위는 양국간의

관계와 국민감정을 건드렸지만 남미각국에선 흔히 있었던 행위였다.

그런데 엘살바도르 대표팀의 패배로 열광적인 엘살바도르의 18세 소녀가 권총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녀의 장례는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대통령과 장관 등 정부요인, 엘살바도르 대표선수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 모습이 텔레비젼을 통해 중계되는 등

국가적인 이벤트 양상을 띠었다.

2차전은 일주일 후인 6월 15일에 엘살바도르의 수도인 산살바도르에서 치뤄졌는데, 온두라스 대표가 숙박한 호텔 주변에는 1차전과

마찬가지로 군중들이 웨어싸고 자살한 소녀의 초상을 내 걸고 상대 팀을 비난했다. 또 군중들은 호텔 유리창을 파괴하며, 썩은 계란과

죽은 쥐 등 오물을 건물 안으로 집어던졌다.

온두라스 대표선수의 이동시 엘살바도르군의 장갑차로 호송되었기에 폭도에 의한 습격은 없었지만 온두라스에서 응원하러 온

온두라스 대표서포터는 폭도들에게 맞고 차이는 폭행을 당해 2명이 사망하고 타고 온 자동차 150대가 방화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시합은 3 대 0으로 엘살바도르가 승리하여 1승 1패씩의 성적을 거두어 플레이 오프로 향하게 되었다.

엘살바도르 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이 패전으로 인해 온두라스에 주재하던 엘살바도르 이민이 습격을 받아 신변의 위협을 느낀

12,000명 가까운 이민자가 엘살바도르 영내로 피난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엘살바도르 국민들 사이에선 온두라스와 국교단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엘살바도르 정부는 6월 23일에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예비군을 소집했다.

3일 후인 6월 26일 밤에 엘살바도르 정부는 <온두라스는 현지에 주재하는 엘살바도르인을 박해하고 있다>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국교단절을 선언했다. 온두라스 정부도 이를 맞받아 6월 27일에 엘살바도르와 국교를 단절하고 국방상의 대책을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6월 27일에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에 있던 에스타디오 아스테카에서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최종전이 열렸다.

에스타디오 아스테카의 수용인원은 10만에서 2만으로 제한되고 시합 이틀전부터 관전을 위해 방문한 양국 서포터는 메인 스탠드와

백 스탠드로 분리해서 입장시키고 완충지대에는 최루가스총을 소지한 기동대원을 배치시켰다. 이러한 엄중태세 속에서 열린

시합은 연장전 끝에 엘살바도르 대표가 3 대 2로 온두라스 대표를 누르고 아이티 대표와 최종 라운드에 진출했다.

험악한 기운이 흐르던 가운데, 엘살바도르 외무성의 발표에 의하면 7월 3일 11시 45분에 온두라스 공군기 1기가 엘살바도로

북서부에 위치한 엘 포이에 있던 국경감시소를 폭격하여 감시소의 수비대와 교전, 그 후 앞선 폭격기와는 별도의 온두라스 공군

2기가 같은 감시소를 폭격했지만 엘살바도르 공군기가 반격해 격퇴했다고 선언했다.

또, 양측 육군이 국경을 사이에 두고 약 20분에 걸쳐 총격전을 벌였다. 엘살바도르 외무성은 미주기구(OAS)에 대해 온두라스의

행위를 비난하는 서신을 전달했다. 양국의 충돌을 알게 된 OAS는 7월 4일에 이사회를 소집해 향후 대응을 협의했다. 7월 9일에

온두라스 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엘살바도르 육군이 온두라스 영내의 인티브카 마을을 습격해 경찰대와 충돌하여 12채의 민가가

불탔지만 사상자는 없었다고 발표했다. 양군에 의한 전투는 7월 3일에 이어 두번째였다.

7월 12일에 엘살바도르 육군부대가 온두라스 영내 10km정도 지점에서 온두라스 육군과 충돌했다.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엘살바도르 병사 14명이 전사했다. 7월 13일 오전에 엘살바도르 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양군은 국경 근처의 엘 포이에서 3시간에

걸쳐 교전했다고 했으며 온두라스 정부의 발표는 이 전투로 일반 시민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OAS 이사회는 양국간의 본격적인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하여 7개국으로 이루어진 평화유지단의 파견을 결정했다. 

축구전쟁을 불러온 엘살바도르의 오스왈도 로페스 아레야노(좌) 대통령과 온두라스의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대통령(우)

7월 14일에 OAS의 개입으로 양국에 의한 외교협상이 진행되던 중, 엘살바도르 공군은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대통령으로부터

온두라스의 주요도시를 공격하라는 직접 명령을 받았다. 이날 18시 10분에 엘살바도르 공군의 C-47, F-51D, FG-1D로 구성된

최소 6기의 편대가 테구시갈파 교외의 톤콘틴 국제공항을 폭격했다.

엘살바도르 공군은 이와 동시에 온두라스 영내에 있던 산타로사 데 코판, 아마팔라, 초르테가 등 온두라스의 주요 비행장 및

군사시설 몇 군데를 폭격했다. 이러한 엘살바도르 공군의 폭격은 전력에서 앞선 온두라스 공군에게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서

기존의 군사적 밸런스를 무너뜨릴 목적이었지만 작전은 실패했다.

엘살바도르 공군에 의한 폭격 후, 엘살바도르 육군은 서부, 차라테낭고, 동부의 세 방면으로 국경을 넘어 온두라스 영내로 침공을

개시했다. 이렇게 하늘과 육지에서의 기습작전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제 3차 중동전쟁시 이스라엘의 사례에서 보듯이

쌍방의 연대가 이루어진 경우 효과를 발휘했지만 엘살바도르의 작전은 원활하지 못해 도로 온두라스측의 주의만 환기시켰다.

7월 15일 아침에 온두라스 공군의 T-28, F4U, F-51S 등 몇기의 항공기가 엘살바도르 영내로 침입해 산살바도르 교외에 있던

일로팡고국제공항을 폭격했다. 군민공용 비행장이던 이 공항의 활주로와 격납고, 일반이용객 주차장 등이 피해를 입었는데

이 외에도 온두라스 공군기는 엘살바도르의 주요 항구도시인 아카후트라에 있던 정유시설을 공격했다.

석유정제소는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저장탱크가 폭격으로 인한 피해를 입었다. 또 라 유니온에 있던 라 크튜코 항구도 폭격을 맞아

17개의 석유저장탱크 중 5개가 파괴되었지만 항만 자체의 피해는 없었다. 항공전력으로는 2.5 대 1로 온두라스가 개전 전부터

우위에 있어서 전쟁시 제공권을 유지했지만 지상전력은 양국 모두 5천 전후의 병력을 소유하여 미육군이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사용했던 구식장비를 몸에 걸치고 전차나 중화기 등 대형장비도 없어 표면상 명확한 차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조직력과 전투능력은 엘살바도르 육군이 우위에 있었고 전쟁말기에 온두라스 최강의 부대라 여겨지던 대통령 방어대를

격파할 정도로 지상에선 엘살바도르군이 공세를 이어나갔다. 엘살바도르의 신문은 <엘살바도르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다>,

<라틴 아메리카의 이스라엘>등이라 보도하며 그대로 진격을 계속해 온두라스의 도시와 수도인 테구시갈파를 압박할것으로 여겼다.

온두라스 영내에 침공했던 엘살바도르 육군은 북부인 엘 포이에서 침공한 부대가 이 날 누에바 오코테페퀘를 점령하고 동부에서

침공한 부대가 태평양 연안의 고아스코란, 칼리다드와 알라메시나, 차라테낭고 방면에서 침공한 부대가 북중부의 국경선 연안의

산 후안 갈리타, 바야돌리드, 라 뷜투드를 점령하는 등 구식의 H&K G3 자동소총을 장비한 보병부대가 개전 하루만에 온두라스

영내의 40평방km의 지역을 점령했다.

하지만 엘살바도르의 사령관이 병참문제에 무지했고, 온두라스 공군에 의해 석유저장탱크가 공격받으면서 국내의 석유공급에

지장이 생겨 엘살바도르 육군도 유류부족으로 인해 침공의 정체가 이루어졌다. 7월 16일에 OAS가 파견한 평화유지위원회는

온두라스측이 <엘살바도르군이 온두라스 영내에서 철수한다>는 조건으로 엘살바도르와의 정전에 임하겠다고 발표했다.

한편 엘살바도르측은 정전에 응하지 않고 온두라스군에 대해 <항복인가 죽음인가를 선택하라>며 강경한 요구자세를 보였다.

이 날, 온두라스 정부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우리 군은 엘살바도르의 전략거점에 대한 폭격을 계속하고 있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 국민에 대해서도 <남녀노소 구별없이 침략자에 대항하기 위해 싸움터로 나갈 준비를 하라>고 부르짖었다.

이러한 양국간의 정세에 대해 UN사무총장이던 우 탄트는 양국의 외무장관들에게 전투를 중지하고 상호 대화에 임하도록

촉구했다. 7월 17일에 엘살바도르 정부는 <온두라스에 존재하는 엘살바도르인에 대한 박해행위를 즉각 중지하고 전쟁 전의

상태로 복귀한다>라는 조건으로 정전에 응한다는 것을 수락했다.

온두라스 정부는 온두라스 육군이 엘살바도르와의 국경을 넘어 영내로 침공해 북부에 있는 도시를 압박해가고 있다고 발표했다.

동시에 온두라스 정부는 엘살바도르측의 정전에 대해 비협조적이라며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응해 엘살바도르군도

온두라스 영내 세 방면으로 공세를 재개했다.

이 날, 지산목표에 대한 기총소사 임무를 맡았던 온두라스 공군의 페르난도 소토 엔리케스 대위가 조종하던 F4U-5가 아군기의

요청을 받고 엘살바도르 공군기와 교전했다. 엘살바도르 공군의 F-51D 1기와 FG-1D 2기를 격추시킨 그는 프로펠러 전투기끼리의

세계 역사상 최후의 싸움이라 불린 전투에서 거둔 전공으로 소령으로 승진해 온두라스의 국민적 영웅이 되어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페르난도 소토 엔리케스가 몰았던 F4U-5(좌측기종)는 엘살바도르 공군 소속의 F-51D(우측기종)을 격추시켜

프로펠러 전투기끼리의 마지막 공중전에서 승리했다.

7월 18일 아침에 OAS의 갈로 브라더 사무총장은 두 나라 정부관계자와 OAS 평화유지위원회 사이에서 약 24시간에 걸친

3자 회담에서 전쟁종결에 관한 4개 항목으로 구성된 평화안건에 합의가 성립했다고 발표했다. 이 평화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발표되어졌다.

1. 양국의 즉시정전

2. 양국 군대의 개전이전 지점으로 복귀

3. 양국에 존재하는 상대국민의 소유재산과 보호를 보장할 것

4. 양국의 정전을 감시하기 위해 OAS가 파견한 군민합동 고문관을 받아들일것

OAS의 발표에 의하면 양국은 북중미 시간인 7월 18일 22시부터 정전에 들어가 OAS에 가입한 3개국으로 구성된 감시단의 휘하에

양국 군대를 96시간 내에 철군시킨다는 예정이었다. 양국의 정전수락에 의해 각각의 전선에선 평온함을 되찾았지만 한편으로

엘살바도르의 에르난데스 대통령은 이날 국민에 대한 방송에서 점령지역에서의 철수를 거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7월 19일에 엘살바도르군의 공보관 발표에 의하면 에르난데스 대통령이 온두라스 영내에 17km 들어간 전선지역을 시찰도중

온두라스군에게 저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알렸다. 엘살바도르 대통령의 피해는 없었지만 공보관은 OAS의 정전명령을

위반한 것이라며 온두라스를 비난했다.

또 OAS의 공식보고에 의해 엘살바도르군이 정전명령 후에도 온두라스 영내에서 철수를 시작하지 않고 진지를 구축하며

전진시키는 것이 명확해졌다. 7월 21일 아침에 엘살바도르군에 의해 정전명령 위반의 보고를 받은 OAS는 긴급회의를 소집해

OAS에서 현지에 파견된 니카라과의 세빌라 사카사 감시단장의 보고를 받았다.

그는 <엘살바도르군이 이대로 철수를 거부하고 온두라스 영내에 머물경우 OAS의 규정에 근거하여 해당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제재를 가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며 경고했다. 한편 엘살바도르 육군은 이날 밤까지 온두라스 남부에 있던 바제 지방의

도시인 나카오메를 포위하고 수도인 테구시갈파와 이곳을 잇는 간선도로를 봉쇄했다.

7월 23일에 OAS가 규정한 96시간의 철수기한이 효력을 잃자, 온두라스 공군소속의 폭격기 2기가 엘살바도르 영내에 침입해

산살바도르에 있는 일로팡고 국제공항과 공항의 북방 16km에 위치한 네하바란 마을을 폭격했다. 엘살바도르군의 발표에 의하면

폭격에 따른 피해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했다.

7월 29일에 OAS 외무장관 회의 석상에서 엘살바도르의 외무장관은 분쟁에 의해 점령한 지역에서 철수하는 것을 발표했다.

이를 수용한 OAS는 엘살바도르군의 철수기한을 8월 3일 18시까지로 규정했다. 8월 3일 13시 15분에 OAS 고문단의 감시하에

온두라스 남부의 렘피라 지방에서 최후의 철수가 확인되어 철군이 완료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양국 통틀어 약 2천명이 사망하고 4천 혹은 12,000명이 부상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온두라스측 농민들로

국경선 부근에 살던 농민의 대다수가 집과 토지를 잃었다. 

총을 든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의 병사.

전쟁터에석 귀환한 엘살바도르군 병사들은 국민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에르난데스 대통령은 국민적 영웅으로 찬사받았다.

한편, 온두라스에서 13만에 달하던 이민자들이 돌아오면서 1969년 당시 엘살바도르 노동인구의 20%가 실업상태이던 것이

더욱 악화되어 도시마다 실업자가 넘쳐났다.

전쟁 상대국이던 온두라스와의 관계악화로 인해 엘살바도르의 공업제품은 시장을 잃는 등, 이제껏 감춰왔던 문제점이 표면화되었다.

또 <14가족>이라 불리던 부유층에게 부와 권력이 집중되면서 국민의 60%가 저소득층으로 전락하여 사회적인 구조에 대한

불만으로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좌익계열 노동자에 의한 파업이 빈발했다.

1972년에 치뤄진 대통령 선거에서 현 정권측의 부정행위가 발각되면서 반정부 운동이 활발해져, 좌익 게릴라에 의한 정부군

막사습격과 외국계 기업임원을 대상으로 한 몸값을 요구하는 납치사건도 빈발했다. 이에 대해 군부와 우익세력이 결성한

<죽음의 부대>에 의해 좌익운동가에 대한 압력과 암살이 이루어지는 등, 국내의 치안상태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1980년 3월 24일에 엘살바도르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오스칼 로메로 대주교가 극우조직에 의해 암살당하는 사건으로

평화적 해결의 가능성이 더욱 줄어들어 좌익 게릴라는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을 결성하고 정부군과 본격적인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중남미에서 가장 공업이 발달하고 정세가 가장 안정적이라 여겨졌던 민주국가인 엘살바도르는 내전의 격화로 인해 쇠약해져

약 12년간 이어진 내전으로 인해 75,000명의 희생자를 냈으며 경제적 손실은 약 50억 달러로 추측되었다. 한편 전쟁 상대국이던

온두라스는 전후 민족주의와 국가에 대한 긍지라는 새로운 가치관이 생겨났다.

수만 명의 노동자와 농민이 국가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손에 들고 정부를 방문하여 손도끼 등으로 무장한 수천 명의 시민이 지방의

경비업무에 종사했다. 하지만 전쟁의 영향으로 인해 무역은 완전히 파탄나버려 엘살바도르와의 국경이 폐쇄되면서 양국간의

교통망은 단절되어 두 나라의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또, 두 나라가 가맹했던 중미공동시장은 이러한 문제가 존재했던 가맹국 간의 경제격차의 문제 등도 잇어, 1970년대에 들어선

그 역할이 크게 후퇴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북중미 각국에선 대규모의 내전이 차례로 이어졌는데 반공산주의를 표방한 미국의

군사적 지원도 있어 대립은 심각했지만 온두라스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분쟁에 휘말리지는 않았다.

1969년 7월에 월드컵 예선에서 패한 온두라스 축구연맹은 3차전에 출장했던 엘살바도르 대표의 선수 2명이 1년 전에 출장정지

처분을 받은 중에도 불구하고 시합출전을 해서 국제축구연맹(FIFA)에게 3차전의 시합결과는 무효라고 제소했다. 허나 이 제소에

대한 FIFA의 제재결과는 정해지지 않았다.

엘살바도르 대표와 아이티 대표와의 월드컵 예선 최종전은 1승 1패의 성적으로 플레이오프로 가져가게 되었다. 10월 8일에

자메이카의 수도인 킹스턴에서 열린 플레이오프는 두 팀 모두 무득점인채 연장전에 들어갔는데 엘살바도르 대표인 후안 라몬

마르티네스가 결승골을 넣어 1 대 0 으로 아이티 대표팀을 누르고 월드컵 첫 출장을 이루어냈다.

엘살바도르 대표팀은 이듬 해인 1970년 6월에 열린 월드컵 그룹예선에서 벨기에, 멕시코, 소련과 같은 조를 이루었지만 3전

전패로 예선탈락했다. 엘살바도르 대표와 온두라스 대표는 같은 해 치뤄진 1969년 CONCACAF 선수권 예선에 출전해 엘살바도르는

트리니다드 토바고, 온두라스는 네덜란드령 안틸레스와 대전하기로 되어있었지만 전쟁의 영향으로 실격되었다.

2년 후인 1971년에 열린 1971 CONCACAF 선수권 예선에선 두 나라 모두 2차 예선에서 대전할 예정이었지만 엘살바도르 대표팀이

축구전쟁을 이유로 시합을 기권했기 때문에 온두라스 대표팀이 본선에 진출했다. 양국관계가 회복되는데엔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페루의 호세 루이스 부스타멘테 이 리베로 전 대통령의 중재로 두 나라는 접촉이 이루어졌다.

1980년 10월 30일에 페루의 수도인 리마에서 부스타멘테 대통령의 입회하에 양국의 외무장관이 출석하여 평화조약의 조인식을

거행하여 11년만에 국교를 회복했다. 이 평화조약의 배경에는 엘살바도르 내전에서 좌익게릴라의 근거지가 온두라스 국경지역에

존재했기 때문에 엘살바도르 정부가 좌익게릴라 토벌을 위해 온두라스 정부의 협력을 필요로 했었고, 국경지역이 좌익게릴라의

근거지가 되는 것을 우려한 미국정부가 두 나라에 압력을 행사한 것도 이유였다.

한편 엘살바도르는 내전의 격화로 인해 온두라스로 유입한 난민 숫자가 2만명을 상회했다. 1989년에 엘살바도르의 새 대통령으로

알프레드 크리스티아니가 취임하면서 양국간의 난민귀국 협상이 시작되어 연말까지 단계적인 난민귀국계획이 결정되었다.

1992년 1월 2일에 75,000명의 사망자와 100만을 넘는 망명자를 낸 엘살바도르 내전은 UN의 중재로 평화합의에 도달하여 2월 1일에

공식으로 정전했다.

합의문서의 내용은 <2월 1일부터 10월말까지 정부군과 FMLN의 쌍방이 단계적으로 무장해제를 실시하며, 정부군의 현재 보유

병력인 53,000명을 절반으로 줄이고 과거 인권침해사범을 추방할 것, 게릴라 토벌부대와 국가경찰의 해체와 문민감시에 의한

시민경찰을 설립해 치안유지에 종사할 것>등이었다.

축구전쟁의 한 원인이었던 국경문제는 1980년에 조인된 평화조약에 의해 60%의 국경선에 관하여 합의에 도달하여 나머지 국경선에

관해서는 양국에 의한 합동위원회를 설립해 5년에 걸쳐 결론을 짓게 햇다. 1986년에 국경문제는 페루의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

대통령의 입회 하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있는 국제사법재판소에 수탁되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1992년 9월 11일에 새로운 국경선을 제시하여 양국 모두 이를 받아들이기로 표명했지만 확정엔 난항을 겪었다.

2006년 4월 18일에 양국 국경지대에 위치한 마을에서 기념식이 열려 출석한 엘살바도르 대통령인 안토니오 사카와 온두라스의 대통령인

마누엘 셀라야는 국경선 375km를 확정하는 문서에 서명하여 국경문제는 종결되었다.

1980년 11월에 열린 1982년 월드컵 예선에서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간에 12년만의 국제시합이 실현되어 시합은 2 대 1로 엘살바도르가

승리했다. 양국 모두 지역예선을 승리하여 2년 후인 1982년 월드컵 본선에 함께 북중미 대표로 출장했지만 그룹예선에서 모두 최하위를

기록하며 탈락했다.

출처 : 레셜드 카푸친스키 <축구전쟁>, 사진은 라이센스가 필요없는 무료공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