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여성 인권 - joseonsidae yeoseong ingwon

1990년대 한국 사회는 1980년대의 힘찬 민주화투쟁이 나름대로 결실을 본 사회였다. 동시에 국제 사회에서는 동구권과 소련에서 정치·사회·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개혁과 개방의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고, 특히 독일의 통일은 세계사적인 대전환의 의미로 충격적이었으며, 한국 사회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그런 가운데 문민정부의 출범과 지방 자치제 실시는 생활정치라는 정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태도를 요구하게 되었고, 여기에 여성들의 보다 적극적인 사회적 역할과 활동이 기대되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문민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3공화국 이래 깊이 뿌리내린 정경유착의 고리는 결국 IMF라는 국제통화관리체제를 초래하여 엄청난 국가적 수모와 국민 생활상의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때문에 1997년 12월 김대중은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최초의 정권 교체라는 성과를 이루었으나 여성문제는 또다시 사회적 중심에서 밀려나 주변화되는 상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여성 사회는 변화·발전의 흐름을 멈출 수 없었다. 1990년을 전후해서 등장한 일제강점기 때의 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하여 성에 대한 담론이 공론화되었고, 여성 관련의 법적 제도적 장치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둠으로써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변화·상승하였다.

1994년의 국회 여성특별위원회와 1995년의 대통령 직속 세계화추진위원회의 설치는 여성문제 해결을 위한 입법부와 행정부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주요 여성정책 변화 가운데 하나는 여성공무원을 10% 이하로 못박았던 공무원 임용 시행령이 1989년 개정되면서 문호를 개방하고, 과거 특수여성 상대의 여성정책이 일반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원칙으로 바뀌었다.

1991년 여성전용 직업훈련원이 신설되었고, 여행원 분리모집제도 폐지되었으며, 1994년에는 국회 내에 여성특별위원회가, 1995년 6월에는 대통령 직속 기관인 세계화추진위원회에서 “여성의 역할과 지위의 세계화”를, 정당 차원에서는 민주당 정책위원회 안에 여성전문 위원을 두었다.

아울러 1998년에는 정무 2장관 대신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가 설치된 데 이어 정당 차원에서도 여성정책 개발을 위한 별도의 부서를 두고, 교육부·농림부·법무부 등 정부 6개 부서에 여성정책관을 신설하는 등 21세기 한국여성사회의 발전을 적극 모색하게 되었다. 1999년 말에는 남녀 고용 평등을 위해 군가산점제를 폐지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같은 여성 발전의 모색에 따라 여성들의 고위 관료 등 고급 공무원으로의 진출을 보장하는 할당제, 초등학교를 비롯한 학교 급식의 정착, 삼사관 학교를 비롯한 특수 학교의 여학생 입학 허용 등 사회적으로 여성에 대한 배려도 커져갔다.

구체적인 통계를 살펴보면 우선 교육면에서 1998년 통계는 초·중·고등학교는 거의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으나 대학교에서는 남자 92%에 여자 50.5%로 그 차이가 뚜렷하다. 1995년 교과과정에서 가정, 실업 교과의 남녀차별은 없어졌지만 아직도 남자학교와 여자학교를 따로 두고 교사들의 교과 운영과 진로 지도 상의 차별적 사회화는 계속되고 있다.

1990년 경제활동 참가율은 남자 74.0%, 여자 47.0%, 1995년 76.5%, 48.3%, 1998년 75.6%, 49.5%로 여성 참가율이 조금씩 향상되었다. 특히 1993년을 기준해서 보면 여성노동의 60%가 서비스업에 종사하며, 사무직 전문기술 행정관리직 진출도 증가하였다.

그러나 10인 이상의 기업체 종사자 중 과장급 이상 상위직은 5% 미만으로 저조하며, 평균임금에서 남성대비 56.5%, 초임은 70%로 여성이 직장생활을 오래해도 남성에게 밀리는 현상은 여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경제 참여 증가는 이제 질적으로도 남녀차별을 극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은행 등 각 기업체에서 여성중견 간부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으며, 기혼여성의 재취업 현상도 뚜렷하다. 또한 여성의 사회적 노동을 뒷받침해주기 위한 필수요건인 탁아시설이 증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성국회의원은 1995년 13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1%에 지나지 않아 세계 평균 11%와 아시아 태평양 지역 평균 9%에도 크게 미치지 못해 아태지역 13개국 중 12위의 수치를 면치 못하였다.

또 1991년 광역의회 선거에 당선된 여성은 8명(0.9%), 1992년 국회의원 총선에서는 지역구 의원 237명 중 여성은 한 명도 없었으며, 다만 전국구에서 3명이 당선되는 데 그쳤다.

1992년 3월 기초의회 의원 선거에서도 124명의 여성후보가 출마하여 서울의 22명을 포함해 전국에서 38명이 당선하는 부진함을 보였으나 1995년 6월 지자제선거에서는 비교적 좋은 성과를 보였다. 즉, 여성후보 252명 중 86명이 당선되어 전체 5,661명의 당선자 가운데 1.5%를 차지한 것이다.

이들 당선 여성 중에는 20∼40대의 젊은 여성들과 경실련, 한살림협동조합 등을 통해 활동했던 환경운동가와 지역 단위의 시민여성운동가들이 나왔다. 이러한 결과는 앞으로 여성의 정치적 역할에 밝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1995년 현재 시청, 구청, 동사무소 등의 전체공무원 2,146명 가운데 여성이 20.5%인 442명이나 되어 최근 2∼3년 사이에 90% 이상의 증가 현상을 보이고 있으나 아직도 여성은 능력에 따른 정당한 부서 배치는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어쨌든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여성에 관한 연구가 축적되고, 많은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여성 활동가들도 현장의 경험을 살려 전문화, 대중화의 길로 나섰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은 여성문제를 전체 사회구조의 모순 속에서 보기보다 오히려 핵심보다는 부차적 문제가 중심문제인 것처럼 논하게 되는 부작용이 따랐다. 그러나 문화와 심리생활 쪽으로 다양하게 확산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특히 여성 관련법과 제도의 정비는 두드러졌다. 먼저 1990년 시행된 개정 「가족법」은 호주의 권리 의무조항을 대폭 삭제하고, 호주상속을 호주승계제로 바꾸었으며, 이혼시 재산분할청구권을 신설하고, 친권제도 재산상속제도 등의 규정을 개정하였다. 또한 1997년에는 동성동본혼인을 금지하는 민법에 위헌 판결을 얻어냈다.

이외에도 1997년에는 「국적법」을 개정하여 자녀국적은 부모양계주의를, 부부국적은 선택주의를 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1999년 말 정기 국회에서도 동성동본불혼 조항을 그대로 유지되도록 하여 혼란을 보이고 있다.

이와 함께 1987년 제정되고, 1989년 개정된 남녀고용평등법은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남녀균등대우원칙을 구체화시켜, 모집·채용 상의 차별(군필 남)과 교육 승진 과정에서 여자를 배제하거나 차별하는 것을 금지하고, 동일노동, 동일 임금과 1년의 육아휴직을 근속기간에 포함시킨다고 하였다.

1989년 모자복지법, 1991년 영유아보육법의 제정과 1997년 개정, 1995년의 고용보험법 등과 함께 1994년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성폭력특별법’) 제정, 1995년의 「남녀고용평등법」을 개정하였다.

이와 함께 1995년의 「여성발전기본법」, 1997년의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과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과 1999년 「남녀 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 등은 종래의 성차별에 대한 법적 규제를 보다 확실하게 한 것이다.

동시에 1995년에 개정 시행된 윤락행위 등 방지법(1961년 원안)은 이제까지 성(性)을 파는 행위만 처벌하던 이중적 성윤리에서 벗어나 성의 매매, 그 조장 행위, 매매춘을 위한 인신매매 등을 모두 처벌하는 것으로 진일보하였다.

이같은 법적 장치의 보장은 김부남 사건, 김보은 사건 등의 근친강간을 비롯한 갖가지 성폭력 문제가 사회적으로 주목받으면서 성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심화되고 공개 토론이 가능해지자 여성단체의 쉼터에서 피해여성 보호 대책과 예방책 마련 등 여성운동의 성과와 함께 이뤄진 것이었다.

동시에 1990년대의 서울대학교 우조교 성희롱 사건의 승소 판결도 여성에 대한 성적 인식을 확실하고 새롭게 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한편 아내 폭행을 비롯한 일체의 가정폭력 방지운동은 1997년 가정폭력 방지법을 제정케 하였으며 그 밖에도 매매춘과 기지촌 여성, ‘윤금이 사건’ 등 소외된 여성들의 문제도 끊임없이 대두되었다.

근래들어 여성단체에서 북한여성연구와 독일 통일 후 독일 여성문제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면서 평화통일운동에의 여성 역할도 기대된다. 동시에 유엔인권소위의 군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나 1995년 베이징(北京) 세계여성대회를 계기로 한국여성은 국제적 연대의 장을 적극 활용하고 민족문제, 여성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주체로 우뚝 서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1990년대 들어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자녀 하나 낳기는 남아선호도를 더욱 부채질한 결과를 초래하여 성비의 불균형현상이라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아직도 한국 사회의 남녀 차별을 드러내 보이는 현상으로 이같은 가부장제 의식은 하루 빨리 청산되어야 할 과제이다.

어째서 우리나라의 여성인권은 이렇게 빻아도 한참 빻은 것일까..

대한민국 여성인권 퇴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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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만 해도 지금의 여성인권 보단 훨씬 나았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그렇다면 한국의 여성인권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언제부터 빻기 시작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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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요즘 더 살기 좋은 세상아님? ㅋ 

남자들이 더 살기 힘든 세상인데 지금 뭐라는거야? 

이거 메X년이네?

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싸게싸게 백스페이스 누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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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안 나가요. ... ^^ 

그럼 이제부터 제대로!

알아봅시다 히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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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이전의 여성들은 재산소유 / 재산상속도 할 수 있었습니다. 

시장경제 활동도 당연히 하과 세금도 냈음 ㅇㅇ 

군사훈련은 안해도 무덤이나 궁궐 도로를 만드는 일에 노동력을 제공 합니다. 

즉 이렇다 보니, 남성에 비해 심하게 차별받는 수준은 아니였죠. 

(차별이 없었단 소리는 아님 ㅇㅇ) 

자유롭게 남녀가 만나는 것도 이상한것이 아니고, 

결혼도 자유~ 재혼도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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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신라시대에 선덕여왕 진성여왕도 나왔으니, 

여성 지도자로써의 몫을 할 수도 있었던 그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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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위태로우면 무장하고 전쟁터도 나가구요? 

크으으으... 

완죤 상여자들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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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초기 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괜찮았던 여성인권은, 

조성시대 중기부터 빻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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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성리학(=주자학_이 중요시 되기 시작했기 때문인데요.

그로부토 유교정치의 기반이 확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가부장적인 제도로 점점 변하기 시작했구요. 

주희 이 ㅅㅂ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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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쓰애끼가 성리학을 한반도에 데리고 왔냐.......

(누가 데리고온건 아니고 중화제국의 명으로부터 정해진 사상이라 조선에서 적극적으로 흡수)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임지왜란과 병자호란 으로 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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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성들이 처참하게 겁탈당하고 유린당한 역사로 인하여, 

여성들에게 <정절>을 요구하게 됩니다. 

아니 ㅅㅂ 왜구새끼들이 쳐들어와서 연약한 여자를

마구잡이고 겁탈하는데 그게 여자들 잘못이란 얘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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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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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의 <정절> 때문에 열녀문이라던지, 

은장도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던지 등등의 거지같은 정절압박 문화가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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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로 끌려간 많은 여인들이 겨우겨우 목숨을 걸고 돌아왔을 때엔, 

<화냥년!> 이라는 개 같은 소리를 들으면서, 

고국에서도 설 자리를 잃게 된 아픈 역사...

끌려가서 겁탈당한 것도 서러운데 

더러운 년 취급이라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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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작 된 여성인권의 퇴보로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왜 지금까지도 퇴보가 되고 있는 거 같죠..................? ㅅ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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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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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중국은 7~80년대부터 유교 갈아엎고 여성들이 일하고 남성들이 살림하는 

문화풍습이 자리잡아 여자들도 기 펴고 살게 되죠. 

왜냐면 중국이 서양한테 밀리고 일본한테 침략당한 모든 이유가 

<유교>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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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를 받아들이고, 문화대혁명이 한 번 쓸고 가면서, 유교전통은 아예 1도 없음 ㅇㅇ.

전래 부럽내,,,,,,,,, 

정작 성리학 전파한 넘들은 성리학 버리고 잘 살고 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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빻아도 너무 빻았지만, 

더 이상 빻지 않도록 그래도 목소리를 내고 힘을 내야 하지 않을까요? 

퇴보가 아닌 진보하는 대한민국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