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형 종류 - joseonsidae sahyeong jonglyu

인문학 이야기

[조선시대의 사형방식] 사극에서 봤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형방식들!

안녕하세요! 인문학 이야기의 감초 귀염둥이 김정연 애디입니다

사극을 보다보면 심심치않게 '능지처참 하라!', '겨열형에 처하라!' 등의 대사를 들을 수 있는데요!

능지처참, 거열형, 참수형, 부관참시

이와 듣기만해도 무시무시한 형벌들, 여러분은 자세히 알고 계시나요?

오늘은 우리가 평소 듣기만 하고 잘은 몰랐던조선시대의 사형 방식들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사람이 죄를 지으면 오늘날과 같이 법에 따라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죄의 정도에 따라 형의 정도도 다양했는데요,

태(笞) ·장(杖) ·도(徒) ·유(流) ·사(死) 다섯가지의 형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설명할 형벌은 이 다섯가지 형중 가장 무거운 형벌인 사형(死刑)입니다.

생각만해도 끔찍한 대표적인 사형의 종류 몇가지를 함께 살펴볼까요?

[출처 - 사극 '공주의 남자' 중]

1.  거열형(車裂形)

거열형옛 중국 전국시대 때 생겨난 사형방식인데요,

진나라의 재상인 상앙이 개발한 이 형벌은

목과 팔, 다리를 밧줄로 묶어 각각 반대방향으로 당겨 찢어죽이는 방법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처형법을 개발한 상앙 역시 이 형벌로 죽었다고하네요.

그렇다면 반대편으로 당기는 것은 어떤 방식을 사용했을까요?

상상하기 끔찍하게도 보통 5마리의 소를 이용했다고 전해지며

이런 독특한 사형방식으로 인해 오우분시(五牛分屍)라고도 불린다네요.

2. 능지처참(陵遲處斬)

우리가 사극에서 익히 들어 익숙한 형벌이죠.

하지만 많은 분들이 능지처참을 위의 거열형과 많이 헷갈려합니다.

우리가 거열형과 헷갈렸던 이 형벌은 거열형보다 더 잔인했으면 잔인했지

결코 덜하진않은 형벌로 너무 끔찍해서 설명하기조차 힘든 처형방식을 갖고있습니다.

이 역시 전근대 중국의 사형 방식 중 하나

한마디로 말하자면 죄인의 살을 산 채로 찢어내는, 회뜨는(..)형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특히나 태종, 세조, 연산군, 광해군 때 많이 집행된 것으로 전해지는데요,

[출처 - 영화 '광해' 포스터]

중국에서 조선으로 오면서 그 형식이 변형되어 중국의 본 형식과는 달리

목을 베는 식의 참수형을 집행한 후 사지를 절단하고 마지막만 능지형과 비슷하게 진행해

실제로는 고통을 덜어주는 형태였다고 합니다.

아마 이런  까닭으로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거열형과 헷갈려 하는 것 같네요!

[출처 - 영화 '망나니' 중]

3. 참수(斬首)

 이 역시 우리가 사극에서 많이 접해왔으며국가를 불문하고 쓰이는 사형방식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봐왔던 망나니가 거대한 칼을 방울과 함께 흔들며 휘두르는 모습과는 그 방식이 조금 다른데요,

망나니에게 참수도를 들고 앉아있는 사형수의 목을 한번에 베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고증에 따르면 실제로는 위의 그림과 같이 형을 집행하게 편하도록

사형수의 목을 바닥에 고정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도 형 집행이 한번에 되지않아 좋지않은 상황이 벌어지는 경우부지기수였다고 하네요.

조선시대에의 대표적 유교사상인 '신체발부수지부모'사상으로

그리 명예로운 형벌 축에는 못들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상으로 조선시대 때의 대표적 사형방식 몇가지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포스팅 하는 내내 필자인 저까지 괜시리 등골이 서늘했습니다.

비록 500년 전 밖에 안된 시대에 이리도 끔찍한 형벌들이 실제로 있었다니

정말 상상하기조차 꺼려지네요 ㅠㅠ

비록 무섭긴 했지만 귀에만 익숙하고 잘 몰랐던 여러 사형방식에 대해

자세히 알아가게 되는 시간이었던 것 같네요!

그럼 이상으로 김정연 애디였습니다.

● 400년 전 당시의 끔찍한 형벌

때는 1613년의 일이다. 

의금부에서 한 문관이 끌려와 취조를 받고 있었다.

 김개

"국문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은 알고 있느냐?"

이 말에 박치의의 몸은 

부들부들 떨린다.

 박치의 

"후덜덜..."

 김개

"잘 들어. 친절하게 설명해줄게."

 김개

"국문이 시작되면.."

"먼저 범인에게 곤장을 쳐서,

반죽음을 만든 다음.."

"주리를 트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때 다리뼈가 튀어오르는 건 예삿일."

 김개

"그런 다음 커다란 태로 

사정없이 등을 두들기는 태배형이 이어지고,"

 김개

"다음에는 바닥에 날카로운 사기조각을 깔고

그 위에 무릎을 꿇게 한 다음.." 

"다시 그 위에 판자를 깔아 

형졸이 올라가서 사정없이 흔들어대는 압슬형,"

"그리고 죄인을 묶어 놓고 

여러 명이 장으로 마구 때리는 난장형이 이어지니.."

 김개

"이런 형을 받고도 

과연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으냐?"

 김개

"처형 방식도 그냥은 안 죽인다."

"수레 두 대에 양 다리를 묶고, 잡아 당겨 

몸을 두 토막으로 찢는 환형은 기본이고.."

 김개

"죽은 다음에는 몸을 다섯토막으로 찢어 

소금에 절인 다음 각 처로 돌리게 된다."

 박치의 

"그럼 어찌하리까?"

 김개

"죄 중에 가장 무거운게 모반이야.

그러니 어서 불어."

 김개

"능지처참 당할래?

아님 이실직고 말해서 사면을 받을래?"

이것은 영창대군을 역모로 엮기 위해 

조작한 사건의 서두 부분이다.

실록에서는 마치 드라마처럼 

이런 내용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최대의 

옥사 사건으로 기억되는 

영창대군 역모 사건은, 

사실 광해군의 계획적인 모략이었다.

 광해군

"..."

1613년 경기도 여주의 강가에서 

건달 7명을 체포하였는데,

이들은 원래 유흥비 조달 목적으로 

강도 행각을 벌이다가 붙잡힌 것이지만,

조정에서는 이들 건달에게 

역모사건의 죄를 뒤집어 씌우고

그걸 빌미로, 영창대군과 그 지지파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데 이용했던 것이다.

당시 기록을 읽으면 

소름이 끼칠 정도다.

추국 과정에서 

수백 명이 고문을 당했고

그 중 수십 명은 대궐 마당에서 고문 도중 죽었다.

지금의 덕수궁에서의 일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대명률의 조문에 따라 처형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유배를 가거나 

삭탈 관직되고 추방되었다.

참고로 조선의 형법서 원전인 

대명률의 내용은 이렇다.

"모반을 꾀하는 자는

주범과 종범을 가리지 않고 모두 능지처사 시킨다."

"범인의 직계존속(아버지)과 직계비속(아들)의 경우

나이 16세 이상은 모두 교수형에 처하고.."

"15세 이하의 아들 및 어미와 딸, 처첩, 

범인의 친척(본가, 외가, 처가)들은 모두 종으로 삼는다."

"또 재산은 모두 

관청에 몰수 한다."

한마디로 대역죄인으로 몰리면,

나 하나만 다치고 끝나는게 아니었다.

조선시대 '증보문헌비고'라는 책을 보면 

2083개의 범죄 행위 처리 기록이 나오는데,

이중에 곤장형이 832개, 유배가 841개, 

사형은 365개로 나타나고 있다.

범죄 대비 사형의 비율이 

꽤 높다는 걸 알 수 있다.

[참고] 너무도 흔했던 조선시대의 사형

19세기 말 러시아 군인들이 목격한

조선의 사형제도와 관련된 내용이다. ☞ 참고

"조선에서 '사형'은 

너무도 평범한 형벌이었다." 

"심지어 좀도둑에게도 

사형이 적용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국가에 상납되는 물건을 훔쳤다는 이유로 

사형이 언도되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돈이 있으면

대부분의 사형은 피할 수 있었다."

"수령들은 그걸 이용해서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데 악용하곤 했다."

365개의 사형 가운데

가장 잔인한 능지처사의 경우는 총 15번 나온다.

▲ 거열형

모두가 역모죄와 

패륜과 관련되 범죄다.

참고로 조선시대에서 말하는 패륜 범죄란 

성리학에서 말하는 '신분질서'를 망각한 범죄를 뜻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는 경우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는 경우

노비가 상전을 살해하는 경우

이런 경우 기본적으로  

능지처사로 사형을 내렸다는 얘기다.

그리고 조선시대 능지처사는

모두 '거열형'으로 이뤄졌다.

▲ 17세기 유럽의 거열형 : 당시 동서양 모두 거열형이 성행하고 있었다

● 중국 고대의 형법 : 조선시대에도 이어지다

고대 중국에는 오형(五刑)이라 하여 

다음과 같은 5가지 형벌이 있었다.

경형(묵형) : 도둑질 한 자 → 먹으로 신체에 죄명을 문신

의형 : 음식을 훔친 자 → (음식 냄새 못 맡게) 코를 벰

비형(월형) : 도망간 자 → 발뒤꿈치를 잘라냄것

궁형 : 성범죄 → 남성의 성기를 잘라냄

대벽 : 사형

4000년 전 은나라 시대부터 전례되어 온 

중국의 전통적인 형벌이라고 하는데,

항상 철저히 지켜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한나라 때 사마천은

흉노족에게 항복한 한 장군을 변호하다가

궁형(거세)을 당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사마천 

"아놔. 법 좀 제대로 집행하시지.."

이런 중국의 '오형'은 

자연스레 동양의 주변 나라에도 전파되었으니,

조선의 법의 기반이 된, 

대명률(명나라 법전)에도 '오형'이 나와 있다.

대표적인 게 

'묵형(경형)'이다.

도둑질한 자의 얼굴이나 팔뚝에 

'절도', '강도' 등의 글자를 

한땀 한땀 새긴 뒤

먹물로 넣어 문신을 하는 것이다.

'경을 칠 놈'이라는 욕은 

바로 여기서 유래된 말이다.

절도 초범의 경우, 

오른쪽 팔뚝에다가 '절도'를 새기고

재범은 왼쪽 팔뚝에 새기고

삼범은 교수형에 처하게 되어 있었다.

▲ 도둑질 3번으로 삼진아웃 당하면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나라에 큰 경사가 있으면 

사면령이 내려져서

삼범 이상인 자라도 

운 좋게 살아남는 경우가 있었다.

이때는 풀어주는 대신에 

목 뒤나 뺨에다 문신을 새겼다. 

▲ 묵형은 도둑놈에게 행했다. 도망노비는 아킬레스건을 끊었는데, 

드라마 추노에서는 고증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사면 죄수 

"그래도 살아난 게 어디임."

그런데 얍삽한 죄수들은 

뜸을 떠서 문신을 지우는 일이 있었다.

▲ 드라마에서는 인두로 지우던데..

그러다가 걸리면, 다시 그 위에 

글자 수를 더해 문신을 새겼다.

또 문신한 뒤에 바로 풀어주면 

먹물을 물로 씻어내거나

입으로 빨아내어 

글자를 지워버리는 자들도 있었다.

▲ 일본의 묵형

그래서 나중에는 

문신한 부위를, 

천으로 싸매고 묶은 다음에

사흘 뒤에 풀어주기도 하였다.

이런 묵형은 애초에 수치심을 불러을으켜 

범죄를 예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팔뚝이나 목 뒤에 문신을 새겨 

겉으로는 거의 표시가 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문신할 때 형장한테 뇌물만 주면

전혀 티 안 나게 새겨준다니깐.." 

그러다 보니 도둑들은 아무 부끄럼 없이 

또 다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조정에서는 

새로운 방침을 내리게 되는데,

"앞으로 도둑질한 액수가 큰 도둑이나 

도둑 우두머리에게는,"

"초범이라도 얼굴 정면에 

문신을 새기도록 하라!"

다만 이런 묵형은 군인과 여자에게는 

시행하지 않았다 한다.

고로 '드라마 추노'는 

고증이 잘못됐다.

이렇게 한 번 새겨진 글씨는

'주홍글씨'처럼 평생 따라다닌다하여

세종 때는 노인과 어린이에게는 

묵형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당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원래 공금횡령을 하다 걸리면 

관리들은 묵형을 받게 되어있는데,

황보신이라는 문신이 거액의 공금횡령으로 

묵형을 받을 처지에 몰리게 됐다.

 세종 

"황보신은 황희의 아들 아닌가.

이번에는 특별히 봐주게.."

그래서 

묵형을 피했다고 한다.

"사실 세종이 권신들의 비리를 감싸준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님." ☞ 참고

이런 묵형은 1740년때까지 계속 되다가

영조 때 완전히 폐지되게 된다.

▲ 중국의 묵형

한편 조선시대에 행해졌던 중국 전통의 '오형' 중 

궁형, 의형은 행해지지 않았다.

"신체발부는 부모님이 주신 것,

신체를 자르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이런 관념 때문에 

성기와 코를 베는 형벌은 자제했던 것이다.

다만 월형은 종종 행해져서, 

도망노비의 경우 

발 뒤꿈치 아킬레스건을 끊는

'단근형'이 시행되기도 했다.

▲ 그림은 월형과는 다르지만

불로 발가락을 쪼개 걷지 못하게 만드는 형벌이다.

● 중국 수당 때의 형법 : 조선시대에도 이어지다

중국에서는 수당 때에 이르러 

전통의 오형이 너무 끔찍하다고 하여

신체를 훼손하지 않고

매를 치거나, 노동을 시키거나, 

유배를 보내는 식의

보다 인간적인 형법이 생겨나게 된다.

이른바 '태장도유사'라는 새로운 오형제도인데,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태형 : 경범죄 → 굵은 회초리로 때리는 형벌

장형 : 중범죄 → '빠따'로 치는 형벌

도형 : 일을 시키는 형벌 

유형 : 유배

사형 : 말 그대로 사형

조선에서도 곧  

이 새로운 오형제도를 도입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 이곳에 

자세히 썼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빠진 부분을 

좀 더 덧붙여 보자면,

태형이나 장형을 맞을 때는 

남자들은 반드시 아랫도리를 홀랑 벗고 볼기를 쳤다.

양반들은 가급적 곤장을 맞지 않았다.

대신 대당 얼마씩의 '속전'을 지급했다.

사대부 체면에 곤장질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여자의 경우에는 홑옷을 입은 채로 곤장질을 했고,

종종 엉덩이에 물을 끼얹어 물볼기를 치기도 했다.

 종종 부녀자에게도 

아랫도리를 다 벗기고 때려 문제가 되기도 했다.

간통녀의 경우에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

옷을 모두 벗겨서 곤장을 치거나,

한양의 경우에는 도성 한복판에서

매를 치기도 했다.

 곤장 형벌은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았으니,

조선의 관습을 존중한다는 미명 하에 

조선인에게만 집행하게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속칭 '쇠좆매'라는

불법적인 태형도 행해졌다.

쇠좆매는 말린 소 음경에 

납덩어리를 박아넣은 것인데,

몇 대만 맞으면 납덩이가 살 속에 파고 들어가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낭자했다고 한다.

▲ 일제강점기 시절 고문도구로 많이 사용되었던 쇠좆매

일제강점기 시절 곤장형은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사라지게 된다.

태형보다 가벼운 형벌로는

'편형'이 있었다.

이는 주로 하급관료들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 

채찍으로 등짝을 치는 것이다.

양반들은 사형에 있어서도, 

참수형 대신에 사약을 받아 마셨다.

죽을 때까지도 

체면은 유지해준 것이다.

● 교수형과 참수형

사형은 대개 

살인자에게 가해졌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로 유명한 

함부라비 법전의 내용에는 이런 것도 있다.

 함무라비 

"만약 집이 무너져 

주인집 아들이 깔려 죽으면.."

 함무라비 

"집 지은 목수의 아들을 집 안에 두고 

집을 무너뜨려 죽게 하라."

그런데 이러한 '보복형'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조항이다.

우리나라는 고조선의 

8조법부터 시작하여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등등

보복형은 어느 시기에나 있어왔다.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살인한 자는 목숨으로 갚는다"는게 기본원칙이었다.

때문에 살인자에게는 

기본적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런데 사형에도 

집행 시기가 따로 있었다.

특별한 중죄인은 

때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처형했지만,

일반적인 사형의 경우, 

추분부터 춘분까지만 집행했던 것이다.

▲ 드라마 제중원에서의 사형장면은 고증이 매우 잘됐다

즉, 9월 하순부터 

이듬해 3월 하순이 사형 적기 타임이었다.

왜 그랬을까?

봄, 여름에는 만물이 소생하고 

열매를 맺는 계절이라서

이때 사람을 죽이면 하늘의 순리와 맞지 않는다는 

중국의 전통 교리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형은 크게 3가지가 있었으니,

다음과 같았다.

교형(교수형) : 목을 매어 죽이는 것

참형(참수형) : 목을 베어 죽이는 것

능지처사 : 죄인의 살점을 조금씩 잘라, 고통을 최대한 느끼게 하면서 죽이는 것

이중에 교수형과 참수형은 

대개 도성 밖에서 행하는데,

조선시대 참수형장으로는 

지하철 4호선 종점, 당고개가 유명했다.

'교형'은 신체를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었으므로

참형보다는 한 등급 가벼운 형벌이었다.

그런데 이걸 집행하는 방식이 

중국과 우리나라가 달랐다.

중국에서는 죄인의 목에 밧줄을 걸친 후

줄을 꼬아 목을 졸라 죽이는 방식으로 행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저 

목을 매달아 죽였던 것이다.

● 사형집행 과정

사형수는 대개 '함거'라는 소달구지에 실려 

도성 밖 형장으로 끌려갔다.

사극에서 보면 

자꾸 이걸 타고 유배가는데,

절대 아니다. 

유배는 보통 말을 타고 갔다.

그런데 이런 함거는 

나라의 것이 아니었다.

당시 한양의 함거는 

한양에서 세곡선이 들어오면

도성까지 수레로 실어나르기 위해

한강 나루터의 '경강상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고,

사형 집행이 있을 때마다 

이들 수레가 차출되었던 것이다.

사실 조선시대 

세곡선도 그렇다.

조선 후기로 가면 전적으로 

세곡선은 '경강상인'의 것으로 이용된다. ☞ 참고

▲ 한양의 경강상인

그런가 하면 배다리 역시 

경강상인의 배를 가지고 만든 것이었다.

이런 차출은 강제로 이뤄졌고, 

보상은 일체 없었다.

(세곡선 운반에는 품삯이 지급됐지만)

아무튼 함거를 타고 

형장에 도착하면,

죄인은 뒷짐 결박을 당한 뒤

사방으로 조리돌림을 당했다.

조리돌림이란 

이런 것이다.

 형졸 

"여기에 △△죄를 지은 

사형수 OOO가 있다." 

 형졸

"좀 있으면 사형이 집행될테니

동네 사람들 모두가 와서 구경들 하라고."

이렇게 사형집행 전, 동네방네 돌면서 알리는 게

'조리돌림'이다. 혹은 '회술레'라고도 한다.

▲ 군사정부 당시,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는 정치깡패 이정재

그리고 사람들이 몰리면 

곧 집행이 이뤄지는데,

먼저 죄인을 엎드려 놓고서는 

턱 밑에 나무토막을 괸다.

사극에서 보면 죄인을 앉힌 후 집행하는데,

이것은 일본의 방식이다. 

그리고 나면, 망나니는 길다란 자루가 달린 

월도(청룡도 비슷)로 목을 베었다.

이때 상투에 줄을 묶어놓고 

목을 베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렇게 하면 목이 고정되어 

자르기가 좋았고,

또 상투와 연결된 줄을 잡아당겨

쉽게 베어진 머리를 걸어놓을 수 있었다.

한편 군법으로 죄인을 죽일 때에는 

좀 더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사형수 얼굴에 

석회나 조개껍질 가루를 허옇게 바르고,

양쪽 귀는 접어서 짧은 화살로 꿰어둔 다음 

엎어놓고 목을 베었던 것이다.

▲ 군법으로 집행되는 모습

실제 참형 광경은 

굉장히 끔찍했다고 한다.

19세기 말 영국의 여행가 새비지 랜도는 

우연히 사형수 행렬을 따라가다가

광화문 밖에서 

참형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랜도

"..."

이때 망나니는 처형장으로 가는 도중 

주막마다 들러 술을 얻어 마셔, 잔뜩 취해 있었고

 망나니 

"아놔,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망나니 

"술 기운 아니면 하기 힘들다니깐.."

그러다 보니 단칼에 

목을 베어내지 못하고 

어깨를 찍는 등 몇번이고 되풀이해서

칼을 휘둘렀다고 한다.

 망나니 

"어? 미안해. 

취해서 타점이 잘 안보이네.."

그러했으니,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조선의 망나니는 

형편이 좋은 편이었지."

"유럽의 망나니들은 사형수를 단칼에 못 죽일 경우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을 각오를 해야했거든." ☞ 참고

● 효수 : 경각심의 극대화

잘려진 머리는 대개 

형장에 나뒹굴도록 내버려두었지만,

대역 죄인의 목은 '효수'를 했다.

효수란 머리를 장대에 꽂아 걸어두는 것이다.

▲ 드라마 '공주의 남자'의 한 장면

효수에서 '(梟)'란 '올빼미 효'자다.

즉 효수란 '올빼미 머리'를 만드는 것이다.

조선시대 사형 종류 - joseonsidae sahyeong jonglyu

"왜 올빼미임?"

"올빼미는 자기 어미를 잡아먹는 

불효막심한 새라는 이미지가 있었어."

"그래서 예전에 사람들은 

올빼미만 보면 잡아 죽여서 나무에 걸어놓았거든."

"거기서 유래된 거임."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관철동 철물교 거리가 

효수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으니,

▲ 오늘날 이곳이 100년전까지만 해도 효수 장소였던 것.

이곳에서 죄인의 머리를 장대에 꽂아 세워두거나, 

나무 삼각대에 매달아 두었던 것이다.

한데 조선시대 효수는

머리만 베어내는데 그치지 않았다.

팔다리도 잘라, 

조선팔도에 돌려 두루 보게 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잘라진 시체는 

썩지 말라고 소금을 쳤다.

▲ 중국의 능지처사

흔히 '오살(五殺)을 할 놈'이란 욕이 있는데,

이것은 몸이 '5등분 당할 놈'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잘라낸 팔다리는 

정작 엉뚱한 일에 자주 쓰였다.

가령 거렁뱅이들이 토막난 팔다리를 

줄에 매어 끌고 다니면서

"한 푼만 줍쇼."

길가는 사람을 붙들고 

돈을 뜯어내기도 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동냥을 하러 다녔던 것이다.

 거지 

"이거 보이지? 

험한 꼴 보고 싶지 않으면 한푼만 줍쇼."

그러면 끔찍한 꼴을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얼른 먹을 것이나 돈을 주어, 이들을 쫓아냈다 한다.

"에이, 재수없어."

"옛다. 얼렁 받고 꺼져!"

영국의 여행가 비숍 여사는 

어느날 동학군의 지도자들이 서울로 운송되어

한양의 저잣거리에서 효수된 것을 보게 되었다.

이때 상황이 끔찍하다.

 비숍

"삼각대가 무너져서, 길바닥에 뒹굴고 있는 

머리를 개들이 물어뜯고," 

 비숍

"어린 아이들은 그 주위에서 

아무렇지도 않은듯 자기들끼리 뛰어놀고.."

 비숍

"심지어 시체 옆에 떨여져 있던 

고장난 회중시계 부속을 뜯어내어,"

 비숍

"입에 쑤셔넣고 

노는 아이도 있었다."

당시 이웃나라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1866년 홍순학이 북경에 사신으로 가는 도중 

심양에 도착했을 때에

길거리 장대 위에 

얼기설기 매달아 놓은 무언가가 있어서 봤더니 

마적의 머리들을 

담아놓은 것이었다.

일본의 경우에는 

1764년 김인겸의 일동장유가를 보면

강가에서 주위에 울타리를 쳐놓고 

베어낸 머리를 제단 위에 사흘 동안 올려놓았다 한다.

▲ 일본은 울타리를 쳐서 수급을 전시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반란을 일으킨 역적을 처단하면 

역적의 수급을 

왕에게 바치는 의식이 있었으니,

1728년 이인좌의 난이 평정되었을 때에 

반란군 수괴의 머리가 한양으로 올려지는데,

이때 영조가 친히 남대문 문루 위에서 

머리를 받는 의식을 거행하게 된다.

 영조 

그리고 이런 의식이 끝나면

머리는 장대에 꿰어 거리나 성문에 매달아놓았다.

그런데 정말로 끔찍한 광경은 

1812년(순조 12) 4월 

평안도에서 홍경래난이 

진압되고 나서 벌어졌다.

관군에게 밀려난 반란군들은 

정주성에 들어가 농성을 하며 버텼는데

관군이 아무리 공격을 해도 

성이 함락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최후의 수단으로 땅굴을 파고 

성벽 밑에 화약 1700근을 묻어 터뜨렸다.

그러자 성벽은 무너지고 

결국 성이 함락되고 말았는데..

이때 사로 잡은 이들이 

대략 3천 명이었고

이들 중 여자와 어린아이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1917명이었으니,

거의 2천 명이나 되는 이들은

모두 집단적으로 참수를 당해야만 했다.

한번에 수십 명의 머리를 날린 적은 있어도

2천 명의 머리를 자른 것은, 

조선 건국 이래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그러니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었다.

● 끔찍함의 초고봉, 능지처사

원래 능지처사는 

원나라 때부터 시작된 형벌로서, 

교형이나 참형보다 

더 잔혹한 사형이다.

예컨대 부녀자가 정부와 공모하여 

남편을 살해한 경우에

여자는 능지처사에, 

정부는 목을 베는 참형에, 

함께 모의한 자는 

목을 매는 교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이런 능지처사는 

대역죄인과 패륜범에게만 적용이 되었다.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는 경우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는 경우

노비가 상전을 살해하는 경우

신하가 임금을 배신한 경우 ← 이때는 흔히 3대를 멸했다.

흔히 '능지처참'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이는 능지와 처참(참형)을 합친 말이므로 

엄밀한 의미에서는 '능지처사'가 옳다.

"아! 그렇구나."

'능지'란 문자 그대로, 

완만한 언덕을 오르내리 듯이 

서서히, 고통을 최대한 느끼게 하면서 

죄인을 죽이는 형벌이다. 

때문에 산채로 온몸에 회를 뜨면서

천천히 죽이는게 가장 일반적이다.

중국의 예를 보면 죄질에 따라 

칼질 횟수가 달라지기도 하는데..

수호지에서는 오랫동안 고통을 느끼게 하기 위해 

죄인의 몸을 사흘 동안 회를 뜬 일이 있으며,

심할 경우에는 

3,600번 칼질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 청나라시대의 능지형

고려시대의 기록을 보면,

한 고려인이 원나라 수도 북경에서 능지형을 목격했는데,

수형자를 나무 기둥에 묶은 뒤

살을 하나씩 발라내어 

개에게 던져주더니, 

결국 뼈만 남기더라고 했다.

"헐!"

이런 능지처사를 집행할 때에는 

대개 팔다리, 어깨, 가슴 등을 잘라 내고

마지막에 심장을 찌르고 

목을 베어 죽이는 방법으로 했는데,

이때 죄인의 눈을 

가리는 경우가 많았다.

총살을 집행할 때에 

눈을 수건으로 가리는 것도

사형수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으면 

방아쇠를 당기기 어려워 그렇다고 하는데,

능지처사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 집행에 앞서, 눈꺼풀에 칼질을 하여 죄수의 눈을 가리는 장면

죄인이 빤히 쳐다보면, 

칼질을 한다는 게 힘들어진다.

망나니의 고뇌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한편 사형수의 가족들은 

가능한 빨리 심장을 찔러 죽게 해달라고 

형리나 망나니에게 

몰래 뇌물을 주기도 했다.

반면에 조선에서 

능치처사는 전적으로,

수레에 팔다리와 목을 매달아 

찢어 죽이는 거열로 행했다.

다만 중국과 같은 방식의 능지처사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연산군이 내관 김계경을 능지처사로 죽일 때

중국식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사형 종류 - joseonsidae sahyeong jonglyu
 연산군

"..."

다만 그 때 뿐,

이후의 능지는 거열형만 있었다.

한편 대역죄인이 

취조 중에 죽은 경우에는 

그 시신이라도 거열하였다. 

이런 식으로 박팽년이 당했다.

조선시대 사형 종류 - joseonsidae sahyeong jonglyu
 박팽년

죽은 시체를 찢는 것을

육시(戮屍 :시체를 죽이다)라고 하는데,

'육시랄 놈'은 바로, 

'육시를 당할 놈'이라는 뜻의 욕이다.

죽은 사람의 무덤을 파헤쳐서 

육시를 하는 방법을 '부관참시'라고도 한다.

● 사약 : 왕께서 내리시는 약

조선시대 양반들은 

기본적으로 교형이나 참형을 당하지 않았다.

물론 대역죄인이 되면 

사정은 달랐지만,

보통 양반들은 체면을 생각하여

사형 집행 방법으로 사약을 내렸다.

물론 여기에도 예외는 있었다.

경종 때 이건명은 반역의 배후 주모자로 몰려, 

전라도의 한 외딴 섬에 유배가 있던 중 

참형을 명령받게 되었는데,

이때 조정에서 

참형을 두고 말이 많았다.

"전하, 아무리 역신이기는 하나

대신을 참형에 처하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옵니다."

"맞사옵니다. 

참형보다는 사약을 내리시는게.."

그렇게 신하들이 끈질기게 간언을 한 탓에

결국 참형이 취소되기는 하였지만,

이 사실을 전하려 내려간 금부도사가 

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형을 집행한 뒤였다.

여기서 문제!

사약은 무슨 뜻일까?

조선시대 사형 종류 - joseonsidae sahyeong jonglyu

사약(死藥 : 죽음의 약) 

이걸 연상한 사람들이 많겠지만,

사실 사약(賜藥 : 주는 약)이다. 

즉, 왕이 내리신 약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왕께서 내리신 것이므로 

사약을 받은 사람들은, 

왕이 계신 곳을 향해 사배(四拜)하고 나서

받아 마셔야 한다.

여기서 사배란 

네 번 일어섰다 엎드렸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 엎드려 

네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시대 사약은 약효가 좋지 못했다.

때문에 죄수가 죽기까지 

한나절을 기다려야 하는가 하면,

여러 차례 마셔야 하는 

경우도 많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약효가 빨리 퍼지라고 입에 상처를 내고 마시고,

뜨겁게 불을 지핀 온돌방에 들어가

온몸에 약효가 빨리 퍼지기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었다.

사극에서 보면 마시자마자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데... 당연히 허구다.

예송논쟁으로 유명한 송시열의 경우 

장희빈의 소생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일에 반대하다가

유배지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에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한 사발 마셨는데 

그냥 멀쩡했다고 한다.

금부도사가 초조해 하며

사약을 다시 한 사발 들이켰는데,

 금부도사 

"다시 한 사발 마셔보심이."

그랬는데.. 웬걸?  

죽기는 커녕 

지병이었던 요로법 부작용이 

나은 것이 아닌가?

 송시열 

"허허. 거참. 사약을 마셨더니 

몸이 더 건강해지다니.."

결국 송시열은 입안에 상처를 내고 

다시 세번째 사발을 들이켰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세상을 하직할 수 있었다.

이마저 사약을 너무 많이 마셔 

'배불러' 죽었다는 우스게 소리가 있다.

● 참수형은 동서양의 구경거리

사실 우리나라의 사형 집행 수준은

세계사적으로 볼 때 그다지 끔찍한 것도 아니었다.

일본의 경우, 우리 못지 않은 

끔찍한 사형법이 많았고 ☞ 참고

중국은 우리보다 

훨씬 잔혹했다. ☞ 참고 ① ②

하지만 서양은 

이런 중국보다 더 심했다. ☞ 참고

조선시대 사형 종류 - joseonsidae sahyeong jonglyu

"헐!"

중세 유럽의 형벌을 보면 

끔찍함에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손발을 자르고, 

코, 귀, 혀를 베고, 눈을 뽑고,  

수레에 찧어 죽이고, 삶아 죽이고, 

꿰어 죽이고, 불에 태워 죽이고, 사지를 자르고..

없는게 없을 정도이고

특수 제작된 사형도구들도 상당히 많다.

서양에서 이런 잔인한 사형집행이 사라지고 

동양의 도형(노동형)이나 유형(유배형)처럼

신체의 자유를 박탈하는, 

자유형이 도입된 것은 16세기 이후부터다. 

동양보다 

약 1천년 뒤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끔찍스런 처형 장면은 

동서양 모두에서 좋은 구경거리였다.

이런 면에서 

인간의 본성은 참으로 이상하다.

한번 보면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불쾌한 장면인데도, 애써 보려고 하니 말이다.

▲ 비 오는 날 사형집행을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 ☞ 참고

조선시대의 경우를 보면,

사형수가 형장으로 가는 길에는 

가엾다고 막걸리를 

한잔 대접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욕을 하고 돌을 던지면서 

처형장까지 따라가 구경을 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서양 중세의 단두대 처형에는 

항상 사람들로 바글바글 장사진을 쳤고,

중국의 노신이 지은 아큐정전에서도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혁명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주인공 아큐가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가는데..

사람들은 일제히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이내 개미떼처럼 몰려든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큐의 처형이 끝나자 

사람들은 죄다 괜한 헛수고를 했다고 투덜됐다.

"뭐야 시시하게..."

"요즘은 사형도 그냥 총쏘고 끝나나.."

목을 썩둑 자르는 참수형 구경을 하기 위해 

사람들은 그토록 따라다녔는데

싱겁게도 총살로 끝나고 말았으니, 

저마다 투덜되는 것이었다.

이때는 참수형이 

중국에서 사라진 때였다.

우리나라에서도 1895년 을미개혁 때 

칙령이 반포된 뒤로는 

참수형과 능지처사가 사라지고

민간인의 교수형과 군인의 총살형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1997년 이후로 

사실상 사형제도를 폐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문헌 : 일상으로본 조선시대 이야기(정연식), 노컷 조선왕조실록(김남),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한국역사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