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언제나라고 할 수 없다. 그가 학교에서 돌아와 욕실로 뛰어가서 물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때이면 비누 냄새가 난다. 나는 책상 앞으로 돌아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 그의 표정이나 기분까지라도 넉넉히 미리 알아차릴 수 있다. 티셔츠로 갈아입는 그는 성큼성큼 내 방으로 걸어 들어와 아무렇게나 안락의자에 주저앉든가, 창가에 팔꿈치를 짚고 서면서 나에게 빙긋 웃어보인다. "무얼 해?" 그는 왜 늘 내 방에 와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할까? 쟁반을 들고 돌아와 보면 그는 창밖의 덩굴장미께로 시선을
던지고 옆얼굴을 보이며 앉아 있다. 까무레한 피부와 꽤 센 윤곽을 가진 그의 얼굴을 이런 각도에서 볼 때 나는 참 좋아진다. 아주 조금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몇 올 앞이마에 드리워 있다. "곱슬머리는 사납다던데." "아니 그렇지 않어. 숙희, 정말 그렇지 않어." 하고 그는 진심으로 변명을 하려 드는 것이었다. '그'를 무어라고 부르면 마땅할까. "숙희의 오빠예요. 인사를 해. 이름은 현규라고 하고."
서울 와서 일 년 남짓 지나는 새에 나는 여러모로 조금씩 달라진 것 같다. 그 ―현규―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농담조차 하지 않았다. "숙희야 나 이런 것 주웠는데……" 지수는 O장관의 아들이다. 언덕 아래 만리장성 같은 우스꽝한 담을 둘러친 저택에 살고 있다. 그가 걸맞지 않게 적이 섬세한 표현으로 러브 레터를 써 보냈다고 해서 나는 우습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글쎄 이게 어디서 났을까." 나는 일어나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때 와삭거리고 풀 헤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나며 우리는 잠자코 한동안 함께 걸었다. 아카시아의 숲 샛길에서 그는 앞을 향한 채 불쑥 "네." "화답은 안 주세요?" 나는 그는 성급하게 고개를 끄떡거렸다. 귀가 좀 빨개진 것 같았다. "그러나 여하간 제 의사를 알아주시긴 했겠죠." "네, 가죠." 잡석을 접은 좁다란 층계를 뛰어오르자 나는 곧장 내 방으로 올라갔다. "어딜 갔다 왔어." 낮은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한다. "……" "편지를 거기 둔 것은 나 읽으라는 친절인가?" 그는 한발 한발 다가와서, 내 얼굴이 그 가슴에 닿일 만큼 가까이 섰다. "……" 젊은 느티나무 -1960년作 어떤 로설을 읽어도 이것만큼 설레지않아ㅠㅠ
수많은 소설 작품이 현실을 반영하는 것처럼 우리 주변의 꽃과 식물이 소설에 등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학이 사랑한 꽃들』은 독자들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꽃’을 주목한다. 소설의 어떤 대목에서 야생화가 나오는지, 그 야생화가 어떤 맥락으로 쓰였는지 소개한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냄새가 난다.’
열여덟 살 여고생 숙희와 스물두 살 대학생 현규는 두 사람의 부모가 재혼하는 바람에 맺어진 오누이다. 법적으로는 남매지만 한집에 살면서 사랑이 싹튼다. 아무리 의남매라 하더라도 남매간 사랑은 지금도 흔치 않은 소설 소재인데, 오십여 년 전에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사회 통념상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숙희의 번민은 깊어간다. 그런 와중에 어머니가 미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가서 일 년쯤 살고 올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이삼 미터의 거리까지 와서 멈추었을 때 나는 내 몸이 저절로 그 편으로 내달은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사실은 그와 반대로 젊은 느티나무 둥치를 붙든 것이었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현규가 “우리에겐 길이 없지 않어. 외국엘 가든지……”라고 말하자 숙희가 너무 기뻐하면서 끝나는 내용이다. 느티나무를 붙들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숙희의 모습은 좀 코믹하면서도 애절하다. ‘젊은 느티나무’는 소설 속 주인공들의 젊음과 건강함을 상징하면서, 두 사람의 사랑이 앞으로 느티나무처럼 커갈 것임을 암시하는 것 같다. 강신재(1924~2001)는 서울 출신으로, 1949년 김동리 추천으로 등단한 이후 1950~60년대엔 『젊은 느티나무』 같은 파격적인 소재로 수많은 애정 소설을 발표했다. 한국문학가협회상, 여류문학상, 예술원상, 중앙문화대상 등을 받았고 여류문학인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느티나무 ⓒ알리움 서울 가로수 66퍼센트는 은행나무 ? 버즘나무 느티나무는 숲 속에서 자라는 자생 나무보다는 정자나무나 가로수로 더 친근하다. 느티나무 가로수길은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인상을 준다.
남이섬 메타세쿼이아 길 ⓒ알리움 젊은 느티나무
문학이 사랑한 꽃들 : 33편의 한국문학 속 야생화이야기김민철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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