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만화가이자 애니메이션 감독. 일본 만화 역사의 초창기부터 활동했고, 일본 만화를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아 전쟁 전후 일본 대중문화의 부흥에 크게 기여해 일본 만화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Show 2. 생애[편집]자세한 내용은 데즈카 오사무/일생 문서 를 의 번 문단을 의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 작품과 스타일[편집]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거의 맥이 끊어진 일본 만화를 전후에 다시 부흥시킨 인물이다. 당시 개그 위주인 4컷 만화, 신문 만평이 주류였던 만화 장르를 잡지에 매회 연결된 연작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스토리 만화'라는 장르를 확립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린이가 읽는 만화에 비극을 최초로 집어놓은 인물로도 평가받기도 하다. 3.1. 일본 TV 애니메이션의 시초[편집]오늘날의 일본 애니메이션의 비즈니스 모델은 대부분 데즈카 오사무가 만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화 잡지에서 연재되는 만화가 인기를 얻어 애니메이션화되고 관련 캐릭터 상품의 판매로 수익을 얻는 구조는 데즈카 오사무가 시작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데즈카 오사무 콘티의 철완 아톰 (1980) 1화. 잘 만들었는데 편집이 이상함을 느낄 수 있다.
4. 데즈카 오사무가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저임금의 원인이라는 루머[편집]데즈카 오사무가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만성적인 저임금을 유발했다는 루머가 기정 사실처럼 돌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4.1. 발단[편집]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는 연예계와 같아서 인기 애니메이터는 고임금을 받지만 말단에서 일하는 신인들은 말도 안 되는 저임금을 받고 있으며 [12] 애니메이터중 월수입 18만 엔 이하가 37%에 달한다. 비록 성공하면 돈을 벌 수 있다지만 성공하는 사람은 소수고 말단이 이렇게 돈을 못 받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4.2. 진실[편집]이러한 루머 때문에 데즈카 오사무의 인품에 대해서까지 비난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음해에 가깝다. 애니메이션 쪽에서 데즈카와 같이 일했던 사람들(대표적으로 니시자키 요시노부)도 '사업을 하기엔 너무 착했다.'라고 평하고 있으며 만화계에서 같이 일했던 후지코 후지오 등도 그의 인품을 찬양할 정도로 인성에 대해서는 오히려 좋은 얘기만 나돌고 있을 정도. 만화 편집자들은 그가 마감 때 자주 도망간 걸 두고 욕을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이라고 회고하는 편이다. 생전 지인들의 인터뷰를 보면 사리사욕보다도 작품 욕심이 훨씬 강하던 인물로 돈에 미친 사업가가 아닌 작품에 미친 의욕적인 창작가로서 보는것이 맞다. 실제로 데즈카는 꾸준히 'JUMP', '인어' 등의 실험적이고 비상업적인 단편 애니메이션들 역시 꾸준히 제작하였다.
4.3. 다른 이야기[편집]데즈카 오사무는 자신이 수입이나 재산의 대부분을 차기작에 만드는 투자비용으로 사용했으며 심지어 데즈카 오사무 자신이 사장임에도 노동조합을 결성하거나 파업 때는 경영진 측이 아닌 노조측의 선두에 서서 교섭을 하는 사건도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 이 일화는 알고 보면 무시 프로덕션 설립 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노조의 선두에 서서 함께 회사를 규탄하겠다!'라고 농담으로 한 말이었고[27] 실제로는 1973년에 무시 프로덕션의 노조가 노동쟁의를 일으켜 교섭이 결렬, 도산할 때에 회사 측의 사장은 데즈카 오사무였으며 자신의 수입이나 재산을 투입해서 도산을 막으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어 위키의 'アニメの歴史' 문서에도 그런 식으로 기재되어 있다. 5.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편집]그가 만화에 기여한 위대한 공로를 기념하여 매년 뛰어난 만화를 선정, 시상하는 상이다. 1997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아사히 신문이 주관한다. 상당히 명예롭고 권위있는 상이라 할 수 있다. 6. 어록[편집]
7. 작품 목록[편집]만화만 따져도 6~700작은 된다. 데즈카 오사무 전집이 일본에서 출시되었는데, 총권수가 400권이다. 이중 384-400까지는 에세이, 강연, 만화 그리는 법 등을 모은 것이지만, 나머지는 전부 만화. 일본 위키 데즈카 오사무 만화전집 문서
8. 여담과 비화[편집]
9. 관련 인물[편집]
10. 관련 문서[편집]
[1] 아이스너상 최우수 북미판 국제작품 부문 최다 수상자다.[2] '데즈카 오사무'는 외래어 표기법을 따른 것이다.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지 않는 통용 표기로는 '테즈카 오사무'가 된다. 아울러 본명은 벌레 충(虫) 자만 빼고 음이 같은 手塚 治(데즈카 오사무).[3] 다만 사이토 타카오도 중요한 건 자신이 직접 그렸다.[4] 디즈니 작품 중에서도 밤비를 제일 좋아했다.[5] 다른 작가들의 커리어와 비교를 해보면 알 수 있지만, 어떤 작가는 평생 한 작품에만 매달린가더나, 본인에게 익숙한 장르만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데즈카 오사무 처럼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는 매우 드물다.[6] 아이러니하게도 카지와라 잇키의 최대 히트작 내일의 죠의 애니메이션은 (전형적인 카지와라 식은 아니지만) 데즈카의 무시프로에서 제작했다. 그리고 팬들은 데즈카 오사무가 질투심이 심해서 욕한 작품일수록 성공하는 징크스가 있었기에 오히려 거인의 별의 대단함을 역입증하는 사례로 보기도 한다.[7] 2009 시즌부터 사용하지 않고 있다. 엠블럼, 유니폼도 모두 변경하였다. 그리고 레오의 아버지 판쟈라고 잘못 아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세이부 라이온즈의 마스코트는 레오 성인 버젼이 맞다. 이런 오해가 생기는 것은 레오를 아기 사자로만 기억하는 것이 가장 크고, 생긴 것이 도장이라서 그런 것도 있다. 양자의 차이는 레오만 귀 끝이 검은색이라는 것으로, 세이부 라이온즈 마스코트를 보면 귀 끝이 검은색이다.[8] 그래도 개그씬이 은근히 많은데 뜬끔없는 게스트 출연과 시대에 맞지 않는 물건이 튀어나오는가 하면 메타발언까지 한다.[9] 비록 등장인물의 환상이긴 했지만...[10] 이 단편은 본래 단편모음집인 '공기의 바닥' 초판본에만 실렸고 이후 데즈카 오사무 전집 시리즈에서 제외 됐을 정도로 본토에서 그 존재가 희미했다. 그러다가 최근 해당 블로그의 주인이 일본옥션에서 경매로 '공기의 바닥' 초판본을 구매하여 한국으로 가져와 스캔 및 보정, 식질을 하여 공개하였다.[11]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의 신이라고 부르는 건 모리 야스지이다.[12] 베테랑 애니메이터는 일반 직장인 수준으로 연봉을 받지만 말단은 말도 안 되는 저임금이라 평균을 내면 연수 100만엔 남짓이 뜨며 따라서 한국에서는 일본 애니메이터는 모두 가난하다고 잘못 알려져 있다.[13] 고정급을 받는 직원의 태업, 비밀로 부업하기 용이한 환경, 기획 중에는 작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환경.[14] 1962년 무시 프로덕션이 개업할 때 대비해서 2016년 일본 샐러리맨의 급료는 13.3배, 물가는 4.8배 올랐으므로 전자의 기준으로 환산하면 670만엔, 후자의 기준으로는 240만엔 정도 된다. 2010년대 TV 애니메이션의 제작비 단가는 통상 1000만엔을 조금 넘는 수준.[15] 단 데즈카나 일본만의 방식이라 하기는 어렵고, 미국 역시 해나-바베라 등 비교적 자금력이 약하고 TV에 의존한 스튜디오에서 원가저감 방법이 사용되었다.[16] この時、手塚は「(一本につき)五十万で売って。それ以上高くしないでください。それ(くらい低価格)なら他でつくれないでしょ」と指示、「手塚さんはテレビアニメを独占するつもりだったのかどうか。萬年社は『安すぎる』と、手塚さんに内緒で百五十万円を虫プロに払っていました。実際は制作費がいくらなんて、どうでもよかった。ロイヤリティーが日銭で何百万円と入ってきたんですから。」(虫プロ & 元営業部次長 & 須藤将三)[17] もちろん、経理上は最初から百五十五万円で処理していました。その後も値上げ交渉をしていって、『アトム』は放映された四年間で、最終的には一本三百万円を超えるまでになったと思います。(p.129)[18] その前例のおかげで、以来アニメの製作費が常に低いという弊害が生まれました [19] 그리고 그 뒤에 바로 나오는 원문은 それ自体は不幸なはじまりではあったけれど、日本が経済成長を遂げていく過程でテレビアニメーションはいつか始まる運命にあったと思います。引き金を引いたのが、たまたま手塚さんだっただけで。 ただ、あのとき彼がやらなければあと二,三年は遅れたかもしれない。そしたら、ぼくはもう少し腰を据えて昔のやり方の長編アニメーションの現場でやることができたと思うんです。 それも、今ではどうでもいいことですけど。 로 일단락된다. '그것도, 지금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이라는 과거회상격 발언으로 마무리함을 확인할 수 있다.[20] 해당 추도문은 데즈카 오사무가 저가에 수주한 것만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작심비판한 게 아니라 스토리 작품관 등 이것저것 까내리는 도중에 저 부분도 포함되어 있다는 정도 비중이고, 이후엔 (만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에 대한 데즈카 오사무의 모든 발언이 잘못되었다(これまで手塚さんが喋ってきたことというのは、みんな間違いです。)고 전부 부정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21] 나중에 종이에 그린 그림을 셀로 옮겨떠주는 트레이스 머신이란 기계가 1970년대부터 보급되어 원화가들은 종이와 연필로만 작업할 수 있게 됐지만 그 이전에만 해도 셀 위에 잉크로 바로 그려야 했기 때문에 화학물질을 들이마시고 폐병을 앓거나 급사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22] 돈은 벌 수 있어도 촉박한 납기에 과도한 작업량은 그 당시부터 문제였다. 3D였던 건 마찬가지. 지금은 여기에 물가 대비 실질 임금까지 줄었으니 아무도 안 하려고 하는 것이다.[23] 셀화 시대에는 연필선 이외의 형광색 등을 인식하지 않았기에 색연필 초안을 그린 종이 그대로 클린업할 수 있었고, 선화가 철저하게 연결되지 않아도 채색 문제가 안 생기기 때문에 번거로움이 덜한 만큼 프로 애니메이터는 다들 한 달에 1000장 정도는 그렸다고 한다. 반면 디지털 시대의 동화맨 작업량은 월평균 500장이라고 2009년 발표되었다. 그렇다면 그만큼 느려질 수밖에 없는 동화의 단가를 올렸어야 했다고 주장하는 것.[24] '방송사에서 수주받은 제작비'가 유일한 수입원일 때 그 금액이 적었다는 게 아톰 50만엔 비판의 핵심인데, 디스크를 많이 팔아서 제작비 이상을 벌어들이는 구조가 만들어졌다면 그건 곧 '수주받은 제작비'라는 관성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이 시기에 오타쿠 모임을 표방한 회사, 야애니 회사 등 신생 기업도 상당히 늘어났기에, 그 신생 기업 입장에서는 돈만 벌 수 있다면, 혹은 품질을 끌어올릴 실력자를 데려올 수 있다면 굳이 과거 관례를 유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업계는 감독 이름은 물론 원화가 이름까지도 기억될 정도로 실력 있는 사람의 가치가 높다.[25] 「話の特集」1979年7月号 瀕死のアニメーション이라는 부분에, 데즈카 오사무에 대한 비판 혹은 그에 대한 데즈카 오사무의 항변이 언급된다.[26] 교토 애니메이션의 창업자 핫타 요코(八田陽子)는 데즈카 오사무의 무시 프로덕션의 채색부 출신이었다. 그런 점에서 무시 프로덕션의 경영과 급여 지급 방식을 벤치 마킹했을 수도 있다.[27] 社長の手塚治虫は虫プロ設立当時「僕は何かあったら労組の先頭に立って一番に会社を糾弾する」と冗談を言っていたことがある。[28] 이 발언은 2013년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가 개봉되면서 재조명되었다. 다만 이 작품은 전쟁 씬이 간략하게 묘사됐어도 반전(反戰) 메시지가 없는 건 아니다.[29] 훗날 2020년 한국 한정으로 도둑맞은 아싸 드립이 논란거리가 될 만한 찬반양론을 일으키면서 특정 직업을 깔보는 식으로 통렬하고 강렬한 문제를 호소하지 말라는 격언이 재평가를 일으키고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또한 여전히 그의 3원칙과는 달리 작가주의적 작품이 우후죽순 늘어나게 됨에 따라 특정 사회집단을 우회적으로 묘사한뒤 바보로 만드는 경우는 많아지고 있다.[30] 제로맨이라고 읽는다.[31] 재일 조선인을 다룬 단편.[3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발생한 미국과 소련간의 패권 경쟁을 우회적으로 묘사한 작품. 핵이나 원자력만능주의에 대한 비판도 들어가있다.[33] 애꾸눈 검객 단게 사젠을 다룬 찬바라 이야기를 만화화.[34] 소설가 미쿠라 요스케가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노숙자 여성 바르보라를 만난 후 벌어지는 일을 그린 성인만화. 아들 데즈카 마코토에 의해 '데즈카 오사무의 바르보라'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미쿠라 역은 이나가키 고로, 바르보라 역은 니카이도 후미가 맡았다.[35] 한권당 천만권 넘게 팔렸다.[36] 원제 サボテン君. 사보텐은 일본어로 선인장이라는 이야긴데, 문제는 주인공 호칭이 사보텐이다.[37] 리본의 기사 속편[38] 원제는 아톰 금석물어(アトム今昔物語). 아톰이 1969년으로 타임슬립한 스토리이다.[39]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졌다.[40] 켄1은 켄이치라고 읽는다. 데즈카 오사무가 초기에 돌려썼던 소년 탐장 캐릭터 켄이치가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작품.[41] 일본 서브컬처계에서 최초로 비키니 아머가 등장한 작품이다.[42] 제목이 'ハトよ天まで'인데, 하토가 일본어로 '하트'도 되고, 비둘기란 단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주인공 이름이 하토마루(ハト丸)이기도 하다. 여러가지 중의적 제목으로 봐야 할 듯.[43] 다만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사과도 빼먹지 않는 양심적인 선배 캐릭터로 나오긴 한다. 하지만 실화와 100% 비슷하게 하면 너무 망가질게 뻔하니 배려 차원이었을지도 모를 연출이다. 후배 뒷담화 깠다가 울며 후회하고 사과하는 전개가 나오기는 좀...[44]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안노 히데아키일듯. 실제로도 오프닝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업계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했다.[45] 실제로 그 애니메이션에선 온갖 패러디가 튀어나오는데 데즈카 오사무가 만든 작품의 SF 캐릭터는 하나도 안 나왔다.[46] 마이클 조던의 별명이 농구 황제, 데즈카 오사무의 별명은 만화의 신[47] 일본이 각성제를 마약류로 분류해 금지한 게 의외로 20세기 중순이라 데즈카가 활동하던 초기에는 일부 각성제가 합법이었고 동료 만화가들도 종종 사용했다고 한다.[48] 후배인 이시노모리 쇼타로는 생전에 커피를 많이 마시고 담배도 많이 폈는데, '지나친 커피와 담배는 건강에 해롭습니다'는 문구를 보고 "그럼 팔지 말든가!" 라고 투덜댄 적이 있었다.[49] 1985년 10월 18일. 참고[50] 어차피 연재횟수나 꽉찬 스케줄 때문에 매일매일이 마감일이다...[51] 1950년대에는 자신이 그렸던 만화인 '복안마인'이 옷을 갈아입는 여성의 맨다리(특정 신체부위는 물론이고 속옷차림이 아니라 진짜 맨다리다)가 보였다는 이유로 판매중지 크리를 맞은 적도 있었다.[52] 마약의 해로움에 대해 경고하는 만화를 그려달라고 보건청에서 부탁했고, 이를 받아들여 스파이더맨 코믹스에서 해리 오스본이 마약 때문에 고통받는 내용을 준비했는데, 이를 CAA에서 규정 위반이라고 출판을 금지시키려고 했었다. 그러나 스탠 리는 보건청이 더 높은 기관이니까 그냥 밀고나간다고 결정했고, 오랜 세월 이후 최초로 CAA의 보증 마크가 붙지 않은 코믹스가 나왔다.[53] 하지만 이런 에피소드도 있는데 편집장들이 사무실까지 찾아가 몇 시간 후에 마감이다 빨리해달라고 서로 재촉할 때 그는 3장을 동시에 그렸고 인쇄 중의 엉킴을 막기 위해 페이지를 뒤섞어서 그리기도 했다.[54] 사무실 앞 목욕탕에 다녀오겠다고 하며 게다를 신고 목욕통을 든 상태에서 600km 떨어진 본가로 도주하거나 해외로 도주한 적도 있다고 한다.[55] 대표적으로 '메트로폴리스'에 나왔던 미키 마우스[56] 사실 서양인들의 입장에선 회사의 사원을 '한 가족'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이해하기가 힘들다.[57] 일본이 로봇 산업의 선구자로 설 때, 아톰이 결정적인 열쇠로 작용했다. 아톰 덕분에 많은 로봇 창작물이 나왔고, 이러한 작품을 봤던 세대가 일본의 공업화와 첨단기술 개발에 앞장섰다. 데즈카 오사무는 자국을 선진공업국으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58] 보통 일본에서는 마코토를 영상예술가, 즉 비쥬얼 아티스트라고 부른다.[59] 철완 아톰 스토리에 뿌리를 둔 우라사와 나오키의 플루토 제작요청을 허가한 것도 바로 데즈카 마코토다. 플루토 1권에 우라사와 나오키와 데즈카 마코토의 대담록이 실려 있다.[60] 영화화도 되었다.[61] 아톰이 그려져 있다. 서울문화사에서는 유명한 선생님이라고 번역.[62] 후배 만화가의 한심한 몰골을 보고는 영장 사진 속의 데즈카가 눈물을 흘리는 연출도 있었다.[63] 정확히는 우당탕탕 괴짜가족 26권의 2화 '벰의 인생'. 이후 베스트! 원조 괴짜가족에서 벰 주제 에피소드의 마지막 에피소드에 수록.[64] 이름은 셜록 홈즈에서 따왔다. 첫 출연작이자 주인공인 작품이 '소년탐정 로크 홈'. 간혹 타 작품에선 '마쿠베 로쿠로'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쪽은 맥베스에서 따왔다.[65] 이 수필에서 데즈카 오사무는 오토모 카츠히로의 가능성을 매우 크게 보았고, 오토모는 후에 걸작 AKIRA를 그려내게 된다. 확실히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던 듯 하다. 그런데 정작 오토모 카츠히로와 데즈카가 만났을 땐 "당신이 그리는 그림은 나도 그릴 수 있어!"라고 화를 냈다고 한다. 위의 질투심에 대한 사례와 연결지어서 보면 그것도 질투였던 모양.[66] 실제로 이 연하장을 보내기 전해인 1949년 오사카 타이거스는 65승 69패 3무 승률 .485로 B클래스(하위권)인 리그 6위를 찍는 부진한 시즌을 보냈다. 다만 지금처럼 리그 꼴찌는 아닌데, 1949년 당시 일본프로야구는 8팀 참가의 단일리그제였기 때문. 이듬해인 1950년 마이니치 신문이 프로야구단 마이니치 오리온즈를 창단해 리그 참가를 선언하자 이전부터 프로야구단을 가지고 있던 경쟁 신문사 요미우리 신문과 주니치 신문이 반발하면서 결국 일본프로야구는 둘로 분열되어 마이니치의 리그 참가 반대측이 센트럴 리그, 리그 참가 찬성측(마이니치도 물론 포함)이 퍼시픽 리그를 결성해 지금까지 양대리그제가 이어져 오고 있다.[67] 데즈카 이외에도 여러 만화가의 그림체를 그대로 모작해내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공식에서 의뢰를 받고 만화를 그리기도 한다. 다만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그림은 도무지 그릴 수가 없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