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무라비 법전 메소포타미아 - hammulabi beobjeon mesopotamia

함무라비 법전 메소포타미아 - hammulabi beobjeon mesopotamia

메소포타미아는 '강 사이에'라는 뜻으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 지역을 가리킵니다. 수메르는 메소포타미아의 중심 문명을 이루었던 남부 지역을 가리킵니다. 기원전 3천 년에서 2천 년 사이에 지어졌다고 하는 '길가메시 서사시'는 수메르 시대의 사고와 생활상을 보여주는 희귀한 내용으로 19세기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메소포타미아의 도시국가 우룩을 다스린 왕 길가메시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생명, 죽음, 사랑, 투쟁 등 다양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길가메시의 행적을 알린다. 그는 모든 것을 알았고 세상 모든 나라를 알았던 왕이다. 슬기로웠으며, 신비로운 사실을 봤고, 신들만 알던 비밀을 알아냈고, 홍수 이전에 있던 세상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그는 긴 여행 끝에 피곤하고 힘든 일에 지쳐 돌아와 쉬는 중에 이 모든 이야기를 돌 위에 새겼다."

외치와 내치를 구분한 함무라비 왕

고대의 문자 기록은 실제 사건의 유적이든, 문학적으로 표현된 자료이든 모두 중요합니다. 당시 살던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빌론 왕 함무라비(재위 : 기원전 1792년~1750년)는 수메르의 습속과 사회 규범을 면밀히 검토해 나중에 강력하고 철저한 법률을 만듭니다. 함무라비는 통치술과 외교력을 발휘해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여러 도시국가를 차례로 정복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중 하나로 비옥한 농경지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평야 지대라 경쟁 관계에 있는 인근 도시국가는 물론 외곽의 산악 지대나 강 상류의 강대한 세력이 빈번하게 침략해 오곤 했습니다. 수십 개 도시국가가 두 강 사이의 평야 지대에 높다란 성벽을 쌓고 도시국가를 건설해 경쟁을 하곤 했습니다.

중동판 전국시대라 불리는 이 시기에 바빌론의 왕 함무라비는 먼저 북쪽의 강력한 경쟁자인 아시리아와 우호 관계를 맺은 뒤 자기 지배 아래 있는 여러 도시국가의 성벽을 구축하고 보강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운하를 새로 만들고 보수해 농업 생산을 높이고 각 도시의 인구를 늘려 나갔습니다. 당시는 농업 생산과 인구가 바로 국력이기도 했습니다. 왕은 치세의 전기와 중기 30년을 내치와 국력 신장에 집중했고, 즉위 30년이 되던 해에 함무라비는 남방의 숙적 라르사를 향해 전쟁을 펼쳤습니다. 함무라비가 라르사를 격파하자 수메르 지역의 여러 도시국가들이 다투어 그의 지배 아래 들어왔습니다. 행운도 물론 따랐지만, 동맹을 맺었던 아시리아의 왕이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결국 아시리아를 무혈 합병하고 왕은 여세를 몰아서 즉위한 지 39년 만에 전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함무라비 법전 메소포타미아 - hammulabi beobjeon mesopotamia
함무라비 왕

'엄격하고 냉정했던 법률 그 자체' 함무라비 법전

함무라비는 나라의 번영과 안정성을 위해 정교하고 영향력 있는 법률을 만들어나갔습니다. "정의를 온 나라에 빛나게 하기 위해, 나쁜 자를 멸망시키기 위해,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과부와 고아가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평민이 악덕 관리에게 해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 등 왕이 아닌 법률이 백성을 지켜줄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였습니다. 총 282조로 구성된 '함무라비 법전' 가운데 유명한 조항들만 살펴보겠습니다.

제22조 : 강도질을 한 사람이 붙잡혔다면 그 사람은 죽여야 한다.
제195조 :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때리면 그 손을 자른다.
제196조 : 남의 눈을 멀게 하면 가해자의 눈도 멀게 만든다.
제198조 : 평민의 눈을 멀게 하거나 뼈를 부러뜨리면 은 1마나를 지불해야 한다.
제199조 : 노예의 눈을 멀게 하거나 뼈를 부러뜨리면 은 2분의 1마나를 지불해야 한다.

함무라비 법전 메소포타미아 - hammulabi beobjeon mesopotamia
함무라비 법전의 비문, 출처 : 위키페디아

'함무라비 법전'은 위의 내용과 같이 신분에 따른 차별 규정이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분에 따른 차별 규정인데, 법전은 왕국 안의 계급 사회라는 현실을 받아들여 계급에 따른 차별 규정을 뒀습니다. 같은 죄를 범해도 범죄자의 신분에 따라 그 형벌을 다르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통념으로는 매우 불평등하고 불합리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시기, 그 시대의 계급 사회에서는 아주 공평한 처벌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해를 입은 만큼 복수를 한다는 것은 얄짤없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맥락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복수법이라고 해서 마냥 폭력적이고 악법처럼 볼 필요도 없습니다. 규정에 따른 복수는 잔인하게 서로를 죽이는 것을 막는 효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세계 최초 성문법으로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법전은 여러 경우에 사형이나 사지 절단과 같은 가혹한 처벌도 있었으며 그와 동시에 무죄 추정 원칙과 증거주의 등 현대 법체계에서 그대로 채택하는 원칙도 이미 반영시키고 있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 메소포타미아 - hammulabi beobjeon mesopotamia
함무라비 법전 출처 : History

조한욱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1901년 프랑스의 고고학 발굴팀이 오늘날 이란의 후제스탄주에서 돌기둥을 발견했다. 높이 2m가 넘는 그 기둥에는 알 수 없는 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이듬해에 아시리아와 이집트의 역사를 연구하던 한 수도승이 그 문자를 해독했다.

그리하여 3600여년을 건너뛰어 고대 바빌로니아왕국의 실체를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함무라비법전인데,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회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법 조항이야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분규를 정의롭게 해결하기 위한 방책이니, 282개에 달하는 조항마다 인간사의 거의 모든 측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자료로서는 그렇다 할지라도 법 자체로서는 전근대적인 법률의 한계를 보여준다는 지적을 받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복 조항이라든가 신분별로 차이를 둔 처벌 조항이 특히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차분히 읽어볼수록 그 진가는 새롭게 음미되어야 함을 확신한다.

그 법이 신으로부터 왔다는 것도 전근대성으로 지목받는 이유 중 하나지만, 그 법의 목적은 “정의로운 자들이 지배하여 사악한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박멸하기 위한 것”이다. 인류의 초창기 가부장들마다 노예는 물론 자식들에게도 왕처럼 군림할 때 이 법은 처벌의 한계를 명문화했다. 차별 조항이라지만 “무전 유죄, 유전 무죄”는 언제나 있어왔던 것이 아닌가?

법관의 책임을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놀랄 수밖에 없다. 판결을 내렸는데, 그것이 법관의 잘못으로 소송 당사자에게 피해가 갔음이 훗날 밝혀지면 그 법관은 피해액의 12배를 배상해야 하며 법관직을 영원히 잃는다. 과실에 의한 판결에도 이런 책임을 부과했는데, 권력자에게 부역하며 법의 정의를 유린한 자들에게는 어떤 처벌이 내려져야 할지 상상조차 못 할 일이기에 그에 대한 명문화된 규정이 없었을 것이다.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눈에는 눈, 이에는 이…원초적 법 권력의 근원…함무라비 법전, 공적 응징과 계약의 기초 세웠다

김동욱 기자 입력 2021.06.21 09:00
수정 2021.06.21 09:00 생글생글 712호

함무라비 법전 메소포타미아 - hammulabi beobjeon mesopotamia

함무라비 왕의 석비. 한경DB

고대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의 6대 왕이었던 함무라비(기원전 1792~기원전 1750)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재통일한 군주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an eye for an eye, a tooth for a tooth·lex talionis)’란 문구로 널리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함무라비 법전 메소포타미아 - hammulabi beobjeon mesopotamia

검은 현무암 돌기둥에 새겨진 함무라비 법전. 1901년 이란 서남부 지역에서 발굴된 것으로 윗부분의 부조와 아랫부분 법조문으로 구성돼 있다. 한경DB

기원전 1772년께까지 작성 연대가 올라가는 이 법전은 당시의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282개 법조항으로 구성돼 있다. 거짓 증언과 절도, 은닉에 대한 처벌 규정이 있고 노동, 재산, 상거래, 결혼, 이혼, 상속, 입양, 농업, 급여, 임대료에 관한 사법적인 문제도 다루고 있다. 바빌로니아와 외국에서 노예를 사고파는 것도 주요한 주제다. 그중 32개 조항에서 사형을 규정하고 있고 귀나 팔, 다리 등 신체를 자르는 것을 언급한 곳도 수두룩하다. 역사학자들은 이 법전에서 형벌 조항이 두드러지게 많고, 이전까지 단순한 배상의 대상이던 경범죄에 대해 사형으로 벌한다는 데서 “치안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길 정도로 아직 안정되지 않은 사회였다”는 사회상을 추론하고 있다.

법전에는 또 국내 상업과 국제 교역을 장려하기 위한 ‘카룸(karum)’이라는 곳을 두고 ‘상인들의 감독’인 와킬 탐카리(wakil tamkari)가 조직을 대표하도록 했다. 당시 상업 발달 수준이 만만치 않았다는 증좌다. 법전의 특징은 보복주의 형벌이 법전에 기록된 형벌의 특징은 보복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한 귀족이 다른 귀족의 눈을 상하게 하면, 그의 눈을 상하게 한다. 한 귀족이 다른 귀족의 뼈를 부러뜨리면 그의 뼈를 부러뜨린다”라는 구절이 압권이다. “동등한 신분인 사람의 이를 부러뜨릴 경우 부러뜨린 사람의 이를 부러뜨린다”라는 구절까지 합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표현이 나왔다.

물론 불평등 사회였던 당시 현실대로 보복도 불평등하게 이뤄졌다. 귀족이 평민의 눈을 상하게 하거나 뼈를 부러뜨리면 1미나의 은을 지불해야 했지만, 피해자가 노예인 경우엔 배상액이 절반으로 줄었다. 또 “아들이 아버지를 때리면 한 손을 자른다”라거나 “임신부를 때려 유산하면 5세겔의 돈을 갚고, 임신부까지 죽으면 때린 사람의 딸을 죽인다” 같은 법규도 있다. 물론 유산한 여인의 신분이 귀족·지도층 인사냐, 노예냐, 중간층이냐에 따라 갚을 돈이 2, 5, 10세겔로 차이가 나기는 했다. “수술 후에 귀족이 죽거나 눈을 잃으면 수술한 의사의 손목을 자른다”는 식으로 오늘날의 시선에서 보자면 어처구니가 없고 야만적 느낌이 드는 구절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같은 이유로 잘못 지은 집이 무너져 사람이 죽으면 그 집을 지은 석공이 목숨을 내놔야 했다. 상업 관련 합리적인 조문도 많아하지만 깜짝 놀랄 만큼 합리적인 구절도 적지 않다. 특히 ‘계약’의 중요성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어떤 사람이 한 여자를 부인으로 취하되 계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이 여인은 그 사람의 부인이 아니다”라며 ‘혼인신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여자의 잘못된 행동 탓이 아니라 단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혼을 하면 여자 측에게 결혼 당시 가져왔던 지참금을 돌려주도록 했다. “증인이나 계약서 없이 다른 사람의 아들이나 노예에게서 금, 은, 노예, 소, 양, 노새 등을 구매하거나 넘겨받은 자는 도둑으로 간주해 사형에 처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증인이나 계약서 없이’ 거래했다는 점을 증명하는 방식도 ‘과학적’이었다. 원래 재산 소유자가 특정 물건이 그의 재산이었음을 말해줄 증인이 있다고 주장하고, 물건 구입자도 정당한 거래였다는 점을 뒷받침할 증인이 있다고 맞서면 증인을 데려올 때까지 6개월의 시간이 주어졌다. 구입자가 판 사람과 증인을 데려오지 못하고 원 소유자가 믿을 만한 증인을 데려오면 구입자가 도둑으로 판정돼 사형을 당했다. 반대의 경우엔 잃어버렸다는 주장에 무고죄가 내려져 사형에 처해졌다. 양쪽에서 증인을 데려오고 증언이 모두 신빙성이 있을 경우, 물건을 판 상인이 도둑으로 판정돼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형법이라는 것이 개인 간의 ‘사적 보복’을 금지하는 대신 국가가 가해자를 처벌하는 ‘공적 응징’으로 대체되는 것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원시적 형태의 함무라비 법전도 피해자의 복수 감정을 어느 정도 보상해주는 기능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구체적인 법규범이 만들어지고 확고하게 집행되면서 ‘계약’이 힘을 얻고, 거래가 활성화될 수 있었으리라.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NIE 포인트

함무라비 법전 메소포타미아 - hammulabi beobjeon mesopotamia

① 사유재산, 계약, 증인 등이 경제 발전의 밑바탕이 되는 이유는 뭘까.

② 다양한 수준에서 개인 간 다툼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것과 사형이나 신체절단 같은 과도한 형벌로 뒷받침하는 국가에 의한 공적 해결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타당할까.

③ 고조선의 팔조법에서도 사람을 죽이면 사형에 처하고 상처를 입히면 곡물로 배상하라고 규정했는데, 흉악범은 사형으로 다스리는 것이 옳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