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꽃 인식론 - gimchunsu kkoch insiglon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시 중에 하나로 꼽히는 김춘수의 “꽃”이다. 이 시는 인식론과 존재론의 교차점에서 명명(命名)과 존재의 관계에 대한 의미를 어렵지 않게 표현하고 있다.

무겁고 어려운 주제를 매우 가볍고 쉽게 다루고 있다. 가볍게 다루었다고 해서 이 시가 가벼워진 건 아니다.

오히려 어려운 주제가 간명하면서도 감성적으로 다가오게 하는 언어의 마력과 창의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이 시인의 의도와 달리 일반 독자들에게 이 시를 사랑을 주제로 한 시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 같다.

이 시의 문학적, 언어학적, 존재론적 의미와 가치를 논하는 것을 잠시 접어두고,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이 시가 말해주는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시인이 브랜드를 설명하기 위해 이 시를 쓴 것은 아니지만, 이 시는 절묘하게도 브랜드의 중요한 핵심적 요소를 모두 담고 있다.

브랜드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이 시를 찬찬히 음미하면서 브랜드와 연관성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에서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까지 처음 4행에서는 어떤 사물에 이름이 없다면 그 정체성을 가질 수 없으며, 이름을 부여할 때 비로소 그 정체성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존재론의 관점에서 이름은 존재를 확인해주는 역할을 한다. 무엇이든 이름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인식론의 관점에서도 이름이 없다는 것은 내가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며, 내가 어떤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면 당연히 이름을 부여하게 된다.

따라서 내가 무엇인가의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그것은 내가 인식하는, 그리고 나에게 실존하는 존재가 된다. 즉 주체와 대상은 이름을 통하여 관계가 맺어진다.

(중략)

이러한 명명(命名)과 존재의 관계는 브랜드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으로서 브랜드 네임이 없는 상품은 단지 물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브랜드 네임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기억 혹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 역시 물체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칠성사이다’가 이름 없는 투명한 병에 담겨있다면 누구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생수인지, 소주인지, 탄산음료인지 모른다.

다만 하나의 투명한 액체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 그것이 ‘칠성사이다’라고 말해 주어도, 브랜드 상표가 없다면 신뢰하기 어렵다. ‘칠성사이다’라는 특정한 브랜드 표시가 있어야 비로소 그 브랜드의 상품 즉, ‘칠성사이다’로 인식된다.

(중략)

이는 유형적 상품(tangible goods)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 마케팅과 같은 무형적 상품(intangible goods)에도 적용된다.

오히려 무형적 상품에는 이러한 개념이 더 중요하게 작용된다. 보험, 금융, 법률, 행정 등 개념적인 서비스 상품과 정책은 그 실체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름이 없으면 그 개념이 더욱 모호해진다.

따라서 이러한 무형적 서비스는 이름이 부여되어 그 개념이 명확하게 전달될 때 비로소 경쟁력을 갖는 브랜드의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애니카’ ‘햇살론’ ‘햇볕정책’ ‘나라장터’등은 그 이름만으로도 그 금융상품과 정책의 의미를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이 이름들은 이미 브랜드가 되었다.

다음 6~7행에서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다오.”는 제품의 콘셉트에 적합한 브랜드 네임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구절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왜 ‘형태’에 알맞은 이름이 아니라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이름인가이다.

많은 평론가들은 이 시에서 ‘빛깔과 향기’는 사물의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문학적으로는 그러한 해석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지라도 ‘빛깔과 향기’를 사물의 본질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사물의 본질은 ‘형태와 기능’으로 정의되는 것이지 ‘빛깔과 향기’로 정의되지 않는다. 굳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인(形相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 모든 사물이 그러하듯 - ‘꽃’은 그 형태에 의해 종류가 구분된다.

물론 꽃의 종류에 따라 빛깔과 향기가 다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꽃의 종류는 형태로 구별하게 된다.

보편적으로 ‘형태와 기능’이 사물의 본질이라면 ‘빛깔과 향기’는 사물의 특성과 차별성으로서 일종의 표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브랜드네임은 상품의 본질보다는 특성과 차별성을 표현해야 한다.

물론 브랜드네임이 상품의 본질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본질은 이미 누구나 아는 것이며, 대체로 상품의 카테고리에 해당된다. 예를 들어 자동차의 경우 그 형태와 기능이 자동차라는 제품의 본질이다.

(중략)

시장에서의 경쟁은 상품의 본질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의 특성과 차별성으로 경쟁하는 것이다. 소비자 역시 기본적으로 상품의 본질을 구입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브랜드를 선택한다.

브랜드의 선택은 본질이 아니라 특성과 차별성으로 선택하는 것이며, 상품의 특성과 차별성은 브랜드의 이미지와 정체성에 해당된다.

따라서 브랜드네임은 빛깔과 향기 즉 제품의 특성과 차별성을 표현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직접적 표현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상징과 은유를 통해 소비자 마음에 심어 줄 기대와 희망을 함축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다오.”는 브랜드 네이밍 과정에서 그 함축된 의미를 깊이 음미해볼 필요가 있는 구절이다.

그다음 행의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라는 구절은 다른 구절에 비해 간과되기 쉬운 구절이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가진 구절이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게로”, “그의 꽃”, “되고 싶다” 이 세 가지 소절의 은유와 상징을 파악해야 한다.

“그에게로”의 ‘그’는 바로 앞 구절에서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라고 한 “누가”이다. 나의 이름을 불러 줄 어떤 누구, 즉 나의 존재를 인정해줄 상대를 말한다.

그리고 “그의 꽃”에서 ‘꽃’이란 이름을 불러 줌으로써 존재로 인식되는 무엇이다.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그래서 나를 인정해주는 그 상대, 바로 그 상대의 마음속에 인식되는 나의 존재 가치를 말한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를 브랜드에 적용하면 특정 브랜드를 소유함으로써 만족해하는 소비자와, 그 소비자에게 인정받게 되는 특정 브랜드로 비유할 수 있다.

나는 자동차 000브랜드를 타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그 차의 브랜드가치와 나를 동일시하려는 소비자, 그리고 그 소비자에게 인정받는 자동차 000브랜드와 같다.

마지막으로 “되고 싶다”는 말 그대로 희망 혹은 욕망이다. 즉 그에게 내가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 혹은 내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다.

이 세 소절을 모두 정리하면, 나를 소유함으로써 자랑스러워하는 상대에게 나의 존재 가치를 확인받고 싶은 욕망을 말하는 것이다.

(중략)

시장의 모든 상품은 모두 특별한 브랜드가 되고 싶어 한다. 하나의 제품이 상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로 존재할 때 시장에서 그 존재 가치가 높아진다.

그리고 상품이 브랜드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빛깔과 향기’즉 특성과 차별성이 어떤 모습으로든 드러나야 하며 그것이 소비자의 기억 속에 남아야 한다.

이 시는 마지막 구절인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 구절 역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 “되고 싶다.” 등 이 세 가지 소절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되고 싶다”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희망 혹은 욕망을 말한다. 이 시는 결국 어떤 욕망으로 마무리된다. 그 욕망의 핵심은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다.

“잊혀지지 않는”은 사람의 영원한 욕망이다.

(중략)

브랜드정체성과 마케팅 커뮤니케이션_ 몸짓과 눈짓

마지막으로 “하나의 눈짓”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하나”라는 문구를 사용하였을까?

그에 앞서 "눈짓"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을까? 앞에서 “하나의 몸짓”이 마지막에서는 “하나의 눈짓”으로 바뀌었다.

시인은 처음에는 “하나의 의미”로 썼다가 나중에 “의미”를 “눈짓”으로 바꾸었다고 했다. 몸짓과 눈짓, 의미와 눈짓의 차이를 이해 함으로서 이 시가 말하려는 전체를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몸짓’‘눈짓’에 비해 수동적이다. 사물에 있어서 아직 존재자로 인식되지 못한 사물의 상태이다. 몸짓이 꽃이 되기 위해서는 이름과 그것을 불러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몸짓이 꽃이 되고 난 후에는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눈짓이 필요하다.

그리고 ‘의미’ 만으로는 부족하다. 의미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다. 포괄적이며 정태적이다.

이에 비해 눈짓은 자기 존재를 표현하는 행위로써 능동적이며 구체적이다. 눈짓이란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나의 존재와 나의 메시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빛깔과 향기”, 즉 특성과 차별성에 알맞은 연상과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중략)

잊혀지지 않는 오직 나만의 브랜드를 위해 마케팅은 커뮤니케이션 전쟁을 한다. 소비자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뺏기 위한 전쟁이다.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본적인 요소는 주의/관심(attention), 흥미(interest), 기억(memory)이다.

(중략)

특히 커뮤니케이션 홍수 시대에 수많은 미디어에서 엄청나게 많은 메시지(눈짓)들이 범람하고 있다.

웬만한 눈짓으로는 보이지도 기억되지도 않는다. 아무리 이름을 불러 주어도 몸짓 그대로 남아있을 뿐이다.

이제는 무엇이나 이름을 불러 준다고 모두 꽃이 되는 건 아니다.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이름이 되고 싶다면 치열하게 남다른 '눈짓'을 해야 한다.

(이후 생략)

브랜드, 개념과 실제 p4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