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우리가 함께 장마를 - eojjeomyeon uliga hamkke jangmaleul

요즘 나에게 가장 맛있는 커피는 봄방학이라 하루 종일 붙어 있는 아이들을 잠시 맡겨두고 혼자 까페에서 마시는 커피다. 커피를 마시며 자꾸만 흩어지는 정신줄을 가다듬는다. 커피 값 4600원으로 이만한 안정감과 충만감을 얻을 수 있는 사실에 감사하지만 생각해 보면 보이지 않는 비용이 포함되어 있다. 까페에 있는 동안 대신 아이들을 돌봐주는 사람의 노동과 시간.

굳이 나와야만 했나. 나오지 않으면 내가 계속 험악한 모습을 할 것 같으니까. 얘들아, 너희들이 잘 못 한 건 없어. 기껏해야, 앉아서 밥을 먹다가 느닷없이 공을 찬다거나 숙제를 하지 않고 계속 팽이를 돌린다거나 화장실 변기위에 앉아서 30분 이상 만화책을 읽는 정도니까. 생각해보면 너희들이 하는 ‘딴 짓’이 엄마에게는 무언가를 읽거나 쓰는 일인지도 모르지. ‘딴 짓’은 어쩌면 주어진 일을 하기 위한 윤활유 같은 게 아닐까. 그러니, 엄마의 ‘딴 짓’ 할 시간이 없다고 ‘딴 짓’을 하염없이 하고 있는 너희에게 계속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아.

그래서 도망치듯 나간 곳은 동네 까페. 한 잔의 커피를 모래시계 삼아 커피가 줄어 들 때까지 머무른다. 되도록 천천히 마시고 싶은 커피를 옆에 두고 박준 시인의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를 꺼냈다.

‘- 하겠습니다. -있었습니다. -일것입니다.’ 경어체로 끝나는 단정한 말투는 이제 그의 시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 것 같다. 그리고 눈에 띄는 시어는 '그해'. 신형철 평론가가 <발문>에 쓴 말처럼 박준 시인은 ‘그해’로 시작해야 시가 나오나보다. ‘그해 여름’ 그해...‘그해’는 밑바닥에 있는 그의 기억을 끌어올리는 두레박이거나 찰랑거리는 감정을 넘쳐흐르게 하는 무엇이 아닐까.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 「선잠」 p9)

잠에서 깨어났지만 한동안 눈을 감고 있는 일로 당신으로부터 조금 이르게 멀어져보기도 했던, 더해야 할 말도 덜어낼 기억도 없는 그해 여름의 일입니다 ( 「여름의 일」 31p)

오늘쯤에는 그해 여름의 말들이 막 도착했을 것이고요 셋이 함께 장마를 보며 저는 비가 내리는 것이라 했고 그는 비가 날고 있는 것이라 했고 당신은 다만 슬프다고 했습니다 ( 「숲」, p79)

‘그해’의 그림을 완성하는 건 당신이라는 존재다. 당신과 나, ‘우리가 함께’였던 ‘그해’

어쩌면 우리가 함께 장마를 - eojjeomyeon uliga hamkke jangmaleul

그들은 주로

질식사나 아사가 아니라

터져 나온 수맥에 익사를 합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종이를 구겨버리고는

이 글이 당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새로 적었습니다 ( 「장마」,p49)

우리가 함께 신어도 좋았을

촘촘한 수의 양말을

무늬대로 골라 돌아오곤 했습니다 ( 「가을의 제사」, 75p)

사실 저는 당신이 저 희고 평평한 속옷을 입을 때까지 함께 살아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같이 오래 살아서 당신이 끝끝내 숨겨오던 것들에게 우리가 함께 하지 못한 그해 여름이나, 폐가 아픈 가족의 내력이나, 연한 나의 마음들을 번화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 「살」, 90p )

‘우리 함께’라는 말은 언뜻 다정하게 들리지만 과거가 된 ‘우리가 함께’는 쓸쓸하다. ‘다정한 쓸쓸함’이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을까. ‘그해’라는 페이지에 접어 놓은 ‘우리함께’를 추억하는 시인의 뒷모습은 담담하다. ‘달갑거나 반가울 것 하나 없이 새달을 맞는’ 모습처럼 감정의 동요없이 ‘우리함께’ 보낸 시간을 가만히 더듬어 보는 것만 같다.

시 전반에 풍기는 어떤 예스런 분위기 때문에 그의 시는 흑백사진을 닮았다. 모서리가 해진 흑백사진이 아니라 금방 찍은 듯한 흑백사진. 늘 가까이 두고 꺼내보는 그런 흑백사진을. 과거지만 현재보다 더 생생한 과거로 그는 시를 짓는다.

어쩌면 우리가 함께 장마를 - eojjeomyeon uliga hamkke jangmaleul

혼자의 시간을 다 견디고 나서야
현재로 도착하는 과거의 말들

우리가 오래전 나눈 말들은 버려지지 않고 지금도 그 숲의 깊은 곳으로 허정허정 걸어 들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쯤에는 그해 여름의 말들이 막 도착했을 것이고요
―「숲」 부분

이 시집의 화자는 기다리는 사람이다. “낮에 궁금해한 일들”에 대한 답은 “깊은 밤이 되어서야” 알 수 있다(「낮과 밤」). 그런데 박준의 화자 “나”가 기다리는 것은 미래의 무언가가 아니라 과거에 이미 지나가버린 것들이다. 과거에 서로를 다정하게 호출했던 안부의 말, 금세 잊어버릴 수도 있었을 일상의 말들. 오늘의 내게 당도하는 말들은 과거에 있었던 기억의 한 풍경들이다. 신형철에 따르면 박준에게 과거는 “더 먼 과거로 흘러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지금 이곳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것이다.

이 글이 당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새로 적었습니다
―「장마-태백에서 보내는 편지」 부분

과거가 현재로 도착하는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지금 이 순간은 미래로 이어질 것이다. 태백에서 “나”는 두 번의 편지를 쓴다. 첫번째 편지에서 나는 “갱도에서 죽은 광부들”의 이야기를 쓰지만 곧 “그 종이를 구겨버”린다. 그리고 두번째 편지에서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새로 적는다. 처음 쓴 편지에서 이미 벌어진 일들을 풀어놓았다면, 그다음 편지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지시하는 말이 적힌다. 나는 아직 미래에 닿지 않았지만, 현재의 시간을 충실히 보내다 보면 미래의 나는 당신과 함께 장마를 볼 수 있는, 바로 그곳으로 향할 수 있다.

당신보다 한 걸음 먼저 사는
‘돌보는’ 사람

그때까지 제가 이곳에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요즘은 먼 시간을 헤아리고 생각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럴 때 저는 입을 조금 벌리고 턱을 길게 밀고 사람을 기다리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더 오래여도 좋다는 듯 눈빛도 제법 멀리 두고 말입니다
―「메밀국수-철원에서 보내는 편지」 부분

그렇다면 이 시집에서 화자가 기다리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 앞서 우리는 과거에 나와 당신이 나누었던 말들이 현재의 나에게 도착하는 지점에 대해 논했다. 아마도 화자가 기다리는 것은 그 말들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 다른 말로는 ‘당신’, 그리고 시인의 표현으로 ‘미인’일 것이다. “먼 시간을 헤아리”며, “사람을 기다리는 표정”을 짓는 ‘나’는 과거에 헤어졌던 사람이다. 그리고 “당신이 창을” 여는 작은 기척에도 “하고 있던 일을” 바로 접을 만큼 보살피고 싶은 사람일 것이다(「84p」). 격렬하지는 않지만 생활 속의 매 순간 ‘나’의 촉각을 세우게 하는 마음을 두고 신형철은 “돌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에 따르면 박준의 돌봄이란 “상대방의 미래를 내가 먼저 한 번 살고 그것을 당신과 함께 한 번 더 사는 일”이며, 그렇기에 이 시집의 화자는 “조금 먼저 사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첫 시집에서 박준의 화자는 “오늘 너를 화구에 밀어넣고” 내려오며, 예전에 너에게 받았던 조촐한 생일상을 떠올린다. 지난 시집에서 상대에게 보살핌을 받았던 기억으로 폐허가 된 자신의 자리를 돌보던 “나”는 이번 시집에서 당신을 돌보는 데까지 나아간다. “내”가 당신을 돌보는 방법으로 시인이 택한 것은 음식이다. 지난날 나의 마음을 어루만졌던 생일상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먹으면 좋을 소박한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다. “겨울 무를 꺼내” “어슷하게 썰어” 담거나(「삼월의 나무」), “쑥과 된장을 풀어” 국을 끓일 생각을 한다(「쑥국」). 밥을 먹지 못하는 상대를 위해 무쳐놓은 도라지를 싸주거나(「사월의 잠」), 흰 배추로 만들 만두소를 떠올린다(「메밀국수」). 당신이 먹으면 좋을 것들을 준비하려는 마음가짐, “이런 마음먹기를 흔히 ‘작정作定’이라고 하지만” 여기선 “작정作情”이라 말해보기로 한다. “돌봄을 위한 작정, 그것이 박준의 사랑이다”(신형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