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 피폭 소방관 - cheleunobil pipog sobang-gwan

보시고 후회하실 수도 있습니다.

너무도 잔인하고 끔찍한 결과네요.

늘상 일어나는 일본의 지진이니 어느정도 선에서 끝나겠지.. 란 안일한 생각

하지만 생각보다 너무도 큰 문제더군요.

이사진을 보니 두렵기까지 하네요.

출처 남겨놨습니다.

 10월10일 : 외상은 없지만, 붉은 반점, 구토, 설사, 의식장애등이 나타남.

 11월10일 : 피부가 점점 벗겨져, 70%가 벗겨져떨어짐.

 12월20일 : 양앞팔부(분)에 피부이식을 행함.

마찬가지로 체르노빌 원전 사고당시 피폭자의 자료사진.

(구강점막이 재생되지않아서 입안이 심하게 건조된상태 )

체르노빌 원전사고때 피폭자의 대장 내시경사진

인체의 조직중에서도 죽음과 재생속도가 가장빠른

대장의 점막세포가 재생이 되지 않으면서 장출혈이 발생,

또한 장내에서 영양분이 흡수가 되지않아

 사망에까지 이를수있는 심각한 설사및 탈수증세를 동반했다

체르노빌 원전사고에의한 피폭자의 사진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죽은세포가 재생이 안되어서

손바닥의 기존 피부가 허물처럼 벗겨지고있다.)

1986년 방사능 누출사고를 낸 체르노빌의 제4원자로에 이어
제2원자로도 지난 1991년 화재로 가동이 중단됐고 제1원자로는
지난 96년 국제협약에 따라 폐쇄되었다.

제3원자로는 2000년 12월15일 가동을 완전중단하였다.

우크라이나는 지난 95년 서방선진 7개국(G7)의 합의에 따라 총 31억달러의 원조를 받고

2000년 12월 체르노빌 원전을 영구 폐쇄하였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폭발 당시 현장에서 3명이 사망하였고,
사고수습 후 병원에 입원한 환자 중에서 28명이
방사선 피폭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방사선 피폭 후유증으로 사망한 환자들은

대부분 화재 진압과정에 투입되었던 소방수들이었다.

피폭 피해 소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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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지역 인간과 동식물의 기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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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선량의 피폭을 당한 경우에는 그 방사선량에 따라
일정한 확률의 백혈병, 암으로 인한 사망 등이 일어나며,
생식세포가 피폭되면 유전장애 등을 몰고 온다.

이러한 암이나 백혈병은 급성장애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피폭 후 수년 혹은 수십년이 경과한 뒤부터 발생하므로 후발성장애라고 한다.

더우기 유전장애의 경우에는 한 세대의 피폭 영향이 세대를 넘어
자손대에까지 신체적 장애로 나타나므로

다른 단순 재해나 사고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심각성을 나타낸다.

그외에도 방사능 피폭이 두려운 이유는 한가지가 더 존재한다.

강한 방사선을 맞는다고 해도, 세포는 대부분 거의 죽지 않는다.

다만 세포 분열에 필요한 DNA가 파괴되어 분열을 할 수 없게 되므로,
신체 조직의 재생이 불가능해지며 그래서 일정기간 후

(현재 존재하는 세포가 수명이 다해 죽었을 때)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피폭(방사능병 혹은 방사능증)은 전리복사에 과다하게 노출되어
생체 조직이 피해를 입는 것을 지칭하는데,
일반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양의 방사선에 노출되어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를 가리킨다.

방사선이 세포 분열과 상호작용함에 따라 수많은 피폭 증상이 나타나며

특히 이러한 문제는 일반적으로 빠르게 세포가 분열하는 위장 기관 등에서

심각한 문제로 작용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장의 점막세포가 전부 벗겨지므로 영양을 흡수할 수 없게 되어
치사에가깝거나 혹은 치사에 이를만큼 굉장히 심각한 설사증에 걸리며,
피부가 전부 때처럼 벗겨져 떨어지면서 피부 밑의 생살, 근육이 그대로 노출된다.
(심한 화상상처와 같은 증상)

또한 혈구를 만드는 골수 세포가 소멸해서, 면역력이 없어진다(에이즈와 같은 증상) 
뇌나 신경세포는 죽는 그 날까지 수명이 다하지 않기 때문에, 의식이나 감각은 그대로.
죽는 그 날까지 문자 그대로 생지옥이 계속된다.

출처: 네이버 지식IN

체르노빌 원전 방사능 피폭된 사람들

발전소 직원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의 400배에 해당하는 방사능이 유출되었다. 원자력 발전소 피폭으로 인해 4호기에서 근무하던 약 180명의 직원들이 모두 끔직한 방사능에 노출된다. 특히 심각했던 직원 2명의 모습이다. 불에 닿지도 않았는데 화상을 입은 것처럼 피부색이 붉은색 보라색 흑갈색으로 변하면서 결국에는 피부가 낱장처럼 벗겨져 나갔다.

체르노빌 피폭 소방관 - cheleunobil pipog sobang-gwan
피폭된 발전소 직원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끔직한 고통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처음에는 자신이 방사능에 피폭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무색, 무취, 무미의 상태이고 심지어 잠복기가 있어 나중에 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소방관들 
체르노빌이 폭발하고 1차로 소방대원 14명이 출동하게 되고 새벽 내내 소방관 200여명이 투입된다. 다행히 4호기 주변과 3호기 지붕에 붙은 불을 끄면서 3호기 폭발은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밤새 화재를 진압하던 소방관들이 구토를 하며 쓰러지기 시작한다. 이들은 방사능을 막을 방호복 없이 작업을 했고 이로 인해 방사능에 피폭된 것이다.

체르노빌 피폭 소방관 - cheleunobil pipog sobang-gwan
체르노빌 피폭 소방관 - cheleunobil pipog sobang-gwan

결국 다수의 소방관들은 순직한다. 1980년대에는 방사능의 위험을 잘 알지 못했다. 방사능의 위험이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는 핵 경쟁으로 인해 정부가 방사능 위험성이 알려지면 문제가 될 것으로 생각해 감춰버린 것이다.  

체르노빌 주민 키예프 주민들

사고 대책을 위한 정부위원회가 체르노빌 인근에서 열렸고 현장에 와서야 원자로가 파괴되고 방사능이 유출된 상황을 인지하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체르노빌 원자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체르노빌 사고 현장 3km 미터 앞에는. 인구 약 5 만명의 도시가 있었다. 사고 후 자연 방사능의 수천 배가 넘는 고준위 방사능이 이 도시를 덮치게 된다. 

엄청난 양의 방사능이 퍼져나가는 가운데도 소련 정부는 그 위험성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평소처럼 학교, 산책등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체르노빌 폭발하고 약 36시간이 지나서야 소개령이 내려졌다. 

헬리콥터 조종사
대책 위원회는 헬리콥터로 모래, 납, 붕소등을 수천톤 뿌리면서 화재를 진압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조종사들도 방사능에 피폭되어 버린다.

주변국 

이틀 뒤에서야 화재는 진압이 되었으나 원자로 잔해에서 핵분열을 하면서 방출되는 막대한 방사능은 계속 유출되고 있었고 체르노빌의 방사능은 바람을 타고 유럽 전역으로 퍼저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주변 나라들까지 방사능 피해를 입게 된 상황이었다. 

스웨덴 체르노빌 원전 눈치채다.
이 상황을 가장 먼저 눈치챈 나라가 바로 스웨덴 스톡홀름 원자로 직원들이었다. 포르스마르크 직원들이 출근하는데 방사능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하고 자신의 원전에 문제를 확인해 봤으나 내부에는 이상이 없었다. 그래서 스웨덴 원전에서 바람의 방향으로 방사능 유출 방향을 계산해서 방사능 유출을 지역을 확인했던 것이다. 우크라이나 체르노빌과 스웨덴은 직선 거리로 약 1100KM로  그 먼 거리까지 날라갔다는 것이다. 

소련 원전사고 은폐

이로 인해 고르바쇼프는 긴급 회의를 소집하고 고르바쇼프는 정보를 감추고 제한된 정보만을 발표한다. 어떤 뉴스와 신문에서도 이 사고의위험성을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다. 사고 6일째 5월 1일 노동절을 맞이한 사람들, 체르노빌 수도 키예프에서는 대대적인 노동절 행사를 사고를 숨기고 진행한다. 키예프 시민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아이들과 축제를 즐겼고 결국 대규모로 방사능에 피폭된다. 

체르노빌 피폭 소방관 - cheleunobil pipog sobang-gwan

하지만 소련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원전 내부에서 구원으로 불타고 있던 핵연료가 폭발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불타고 있던 핵연료가 바닥에 시멘트를 녹이며 내려가는 상황이었고 아래쪽에는 화재를 진압하면서 흘러내린 물이 가득 차 있었고, 방사선 물질이 이 물과 만나게 되면 대폭발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키예프 주민 대피
이렇게 되니 소련 정부도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의 주민들에게 알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키예프에는 소련 정부의 소개령이 내려졌고 약 50만명이 급히 대피하게 된다.  키예프는 패닉상태에 빠지게 된다. 

체르노빌 피폭 소방관 - cheleunobil pipog sobang-gwan


이때 상황의 심각성을 설명받은 3명의 직원이 물을 제거하기 위해 지원하게 되고 잠수장비와 인공호흡기를 달고 원자로 아래 지하 복도로 내려간다. 하지만 가는 길에 방사능 마그마가 있어서 극도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직원들은 수문 밸브를 열고 지하실의 물을 빼는데 성공하여 대폭발의 위험은 막을 수 있었다. 

체르노빌 피폭 소방관 - cheleunobil pipog sobang-gwan


체르노빌 사고의 대표적인 상징 사진 1996년도에 찍은 사진으로 사고 이후  핵물질이 녹아 내려서 코끼리 발 모양으로 굳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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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사고의 상징적 사진

광부들
대폭발의 위험은 넘겼으나 여전히 위험한 상황이었고 이때 원자로 아래까지 땅굴을 파고 들어가서  원자로 바로 아래 냉각장치를 설치해 열을 시키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에 모스크바와 돈바스지역에서 광부 약 400여명을 소집되고 이 광부들이 위험한 땅굴을 파는 작업에 투입이 된다. 

그러나 시간당 1~300뢴트겐까지 치솟은 방사능 수치로 인해 온도가 50도까지 올라가 광부들은 옷을 벗고 일을 했고 이들 400여 명은 이 위험한 곳에서 약 한 달간 3교대로 하루 24시간일을 했고 이 광부들 중 1/4은 40세 전에 사망했다. 그러나 이런 희생에도 불구하고 열교환기는 설치되지 못했다. 걱정과 달리 마그마가 땅속까지 내려오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로봇 고장
그러나 4호기가 폭발하면서 흩어진 방사능들은 물, 농토, 작물등에 내려앉아 체르노빌을 오염시켰다.  계속되는 방사능 유출을 막기위해 4호기 전체에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덮기로 결정했다.  4호기가 폭발하면서 떨어진 옆 3호기의 잔해물을 치우기 위해 로봇을 투입했으나 방사능 수치가 너무 높아 로봇이 불과 몇일만에 고장이 났다.  

바이오 로봇투입

결국 로봇도 철수하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이 투입된다. 이들을 바이오 로봇이라 불렀다. 이들은 납으로 급조한 방호복을 착용하고 잔해물을 치우기 시작했다. 보호복의 무게가 약 20~30kg이었고 일이 끝난 작업자들은 몸을 움직일수 없었고 입안에서는 금속맛이 났으며 입을 움직일수 조차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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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피해 규모

이때부터 체르노빌 오염제거를 위해 투입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다수는 민간이었고 이들은 방사능의 심각성을 알지 못한 채 일에 투입된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제대로된 보호 장비도 없이 헝겁으로 된 방독면만 쓰고 최소한의 장비만 쓰고 청소를 했고 이들 또한 방사능에 피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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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을 위해 투입된 인력만 약 60만명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WHO에 따르면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약 9000명이 넘을 것을 추정했고 그린피스는 사망자를 약 9만 3천 명이상으로 추정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마침내 사고 발생 약 7개월 만에 콘크리트로 4호기를 덮게 된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가해자들 판결
1987년 책임자 3인의 재판이 열렸다. 그러나 이들은 10년 형에 그쳤다. 또한 체르노빌의 발전소장은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선고 4년만에 석방이 된다.  부소장 역시 포민도 조기 석방 후 다른 원전에 근무하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지만 가해자들은 책임을 지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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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레가소피의 자살
체르노빌 사고 2주기가 되던 날 스스로 세상을 떠난 과학자 레가소피는 원전의 위험성을 알리는 유언을 했고 소련의 과학자들을 통해 이 내용이 퍼져나갔다. 결국 그 여파로 RBMK형 원자로를 재설계하기로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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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레가소피


체르노빌 사고는 자체로도 엄청난 사건이었으나 또한 소련 붕괴의 신호탄이었다. 소련 공산당의 위신이 추락하고 공산당의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소련 내부의 문제들도 터져나왔고 결국 거대한 국가 체제였던 소련은 1991년 최후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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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현재 상황은 체르노빌 인근 30km는 현재도 허가없이 출입 불가지역이다. 다시 체르노빌에 사람이 거주하려면 약 2만 4천년이 걸린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이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원인, 피해 그 후 ~

Chernobyl Nuclear Disaster 1986년 4월 26일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제4호기 원자로가 폭발해 막대한 방사능 물질이 유출이 된다. 체르노빌 원자로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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