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마대 요셉은 어떻게 되었나 - alimadae yoseb-eun eotteohge doeeoss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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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년이 지난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가톨릭과 개신교에서 지키는 부활절의 절차와 방식이 다르다. 동일한 성경의 기록을 두고 서로 다르게 절기를 지키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궁금증은 ‘부활절 – 가톨릭에서 지키는 부활절과 성삼일 전례에 대해’, ‘2017년 부활절 – 개신교는 어떻게 부활절을 지키는가’라는 글을 통해 해소할 수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 후 당돌하게 변했다. 왜 그동안 숨겼던 신앙태도를 바꾸었을까? 예수는 죄 없는 의인이라는 거다. 예수는 하나님 아들이라는 거다. 의인이고 하나님 아들인데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나? 세상 죄를 지고 희생제물로 죽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 대속의 죽임을 당했다는 거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대신 저주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거다. 여기 하나님의 구원이 있다는 거다. 여기 하나님 사랑이 있다는 거다. 여기 죄사함의 은혜가 있다는 거다. 여기 모든 예언성취가 있다는 거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요셉은 바로 십자가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메시아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믿은 거다. 십자가는 요셉의 삶을 완전히 주님께 헌신하게 만든 사건이다. 십자가 은혜를 깨닫는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산다. 어떤 손해와 어려움이 있다할지라도 주님을 사랑하며 예수를 구주와 주인과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1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42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요 19:38-42 / [무덤에 묻히시다;마27:57-61,막15:42-47,눅23:50-56] 그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대담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모셔 가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였으면서도 유대의 지도자들이 무서워서 그것을 감추어 오던 사람이었다. 빌라도가 허락을 하자 그는 가서 예수의 시체를 모셔 내렸다. 39) 예수를 밤중에 찾아온 일이 있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어 만든 방부제를 100근 가량 가져 왔다. 40) 그 두 사람은 함께 예수의 시체를 모셔다가 유대인들의 장례 풍속대로 방부제를 바르고 길고 고운 베로 감았다. 41)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 가까이에는 동산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는 전에 한 번도 사용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 42) 그래서 안식일 전에 빨리 서둘러야 할 필요도 있고, 또 무덤도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의 시체를 거기에 모셨다.

 

예수의 제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뿔뿔이 흩어져 도망했을 뿐 아니라, 예수의 시신조차도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와 함께 한 자라는 명백한 증거가 되어져 위협을 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의 시신을 수습하여 새 무덤에 장사지냅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38-39) 38절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어떤 사람인지 소개합니다. 그는 열 두 제자는 아니었지만 예수를 따르며 그 길을 걷고자 하는 예수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마 27:57)과 마가복음(막 15:43)을 통해 그는 부자였으며, 당시 최고의 의결기관이었던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존경받는 사람이었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였지만 예수를 드러내고 따르지 못했던 것은 그가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당시 이단으로 규정된 예수를 따른 다는 것은 굉장한 타격으로 다가 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요한복음에서만 기록하고 있는 인물로 3장과 7장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한 밤 중에 예수께 찾아와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물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밤에 찾아 왔다는 것은 아리마대 요셉과 같이 예수와의 만남을 숨기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예수의 제자들도 요청하지 못했던 예수의 시신을 빌라도에게 당돌하게 요청하며, 새 무덤을 준비하고 몰약과 침향을 섞은 값비싼 향료로 예수의 시신을 수습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를 따르는 자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행동이었습니다.

 

숨길 수 없는 신앙(40-42) 이들의 이러한 변화는 무엇으로부터 기인된 것일까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바로 자신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임이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죽음 앞에서 그동안 숨겨왔던 믿음이 폭발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누룩의 비유를 통하여 한 줌의 누룩이 가루 서 말을 부풀게 한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그런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3:33). 이들 안에 눌려있던 믿음이 자라나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믿음이 된 것입니다. 믿음은 생명력이 있기에 가만있지 않고 자라납니다.

 

적용: 내 안에 있는 믿음은 생명력이 있습니까? 아니면 죽은 믿음이 되어 성장을 멈추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내가 믿음을 드러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과의 친밀함은 특별한 성도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허락된 축복입니다. 주님께서 마음에 거하신다면 그 이상 어떻게 더 친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과 친밀히 동행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와 동행하는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 설 교 >

새로운 시작

김태환 목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이 워낙 강렬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 뒤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아리마대 (Arimathea)에 사는 요셉이라는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죽은 시신을 자기가 처리하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이 요셉이라는 사람은 사실은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 금방 12 제자가 떠오릅니다. 하지만 이 요셉과 같은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그 사실을 감춰왔습니다. 공관복음서에 보면 이 요셉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7:57에는 요셉은 부자였다고 합니다. 또 마가복음 15:43에 보면 요셉은 당시에 존경 받는 유대 의회원이었다고 합니다. 요셉은 산헤드린 (Sanhedrin)의 70명의 의회원 중 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는 요셉에 대하여 또 하나의 정보를 제공합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He was waiting for the Kingdom of God to come).” 또 누가복음에 보면 “요셉은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He was a good and righteous man., 누가복음 23:50)”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요셉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 그 이야기는 철저하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요셉 자신도 자기에게 돌아올 비난을 두려워해서 그 사실을 숨겨 왔습니다.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던 요셉은 산헤드린이 내린 예수님께 대한 부당한 판결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23:51). 요셉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당시의 많은 종교인들이 빠져 있었던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언자들의 예언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면서 살았습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올 것이고, 그 때가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주목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니고데모 (Nicodemus)라는 사람입니다. 이 니고데모 역시 산헤드린의 70명의 의회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 역시 당시 유대사회에서 존경 받는 인물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니고데모를 보셨을 때도 “You are a respected Jewish teacher (요한복음 3:10)”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니고데모 역시 산헤드린이 예수님께 대해서 음모를 꾸미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산헤드린에서 예수님께 대하여 공개적으로 호의적인 발언을 한 사람이 니고데모였습니다. 그 발언으로 니고데모는 의회원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습니다.

무엇보다도 니고데모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왔던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이야기가 요한복음 3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과 니고데모가 나누었던 대화의 주제는 “사람이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는가?” 하는,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다룬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새 사람이 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니고데모와 나누었던 대화 속에서 대답을 주셨습니다. 이 니고데모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을 장사 지내기 위하여 나타납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예수님의 시신에 발라 드리기 위해 몰약과 알로에를 섞어서 만든 향료 (perfumed ointment) 33킬로그램을 가지고 옵니다. 유진 피터슨 (Eugene Peterson)이 번역한 “The Massage”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Nicodemus, who had first come to Jesus at night, came now in broad daylight carrying a mixture of myrrh and aloes, about seventy-five pounds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왔던 니고데모는 이제 대낮에 항료 75파운드를 가지고 왔다).”

이 두 사람이 골고다 언덕에 나타난 시점을 잘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직 후였습니다. 요셉이 빌라도를 찾아가서 예수님을 시신을 자기에게 내 달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그 때 상황이 보다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빌라도는 요셉의 요청을 받고 “그 사람이 벌써 죽었을 리가 있나?” 하면서 백부장을 불러서 예수가 죽었는지 물어 봅니다. 이 백부장은 예수님의 형을 집행했던 그 백부장과 같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빌라도는 백부장을 통해서 예수가 확실히 죽었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백부장의 보고를 받은 빌라도는 선뜻 예수님의 시신을 니고데모에게 내 줍니다.

지금 다른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한 집에 모여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0:19).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요셉과 니고데모가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요셉은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숨겨왔던 사람입니다. 니고데모 역시 예수님께 대한 favor는 늘 마음 속에 가지고 있었지만, 자기 혼자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두 사람은 산헤드린의 의회원들로서 사람들의 여론과 이목(耳目)을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을 때, 도망을 가도 제일 먼저 도망을 가야 했고, 숨어도 제일 먼저 숨었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골고다 언덕에 나타납니다. 요셉은 빌라도를 찾아 갑니다. 개역성경 마가복음 15:43에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당돌히”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국어 사전에 보니까 “꺼리거나 어려워함이 없이 올차고 다부지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보면 “Joseph of Arimathea took a risk and went to Pilate and asked for Jesus' body”라고 나와 있습니다. 요셉이 빌라도를 찾아 왔을 때 이미 그 마음 속에 예수님을 위해서 어떤 위험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젠 밤중이 아니라 “대낮에도 (in broad daylight)” 그는 유대인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 무엇이 이 사람들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아니고는 이 사람들의 변화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서기 33년 어느 날, 골고다 언덕에서 3 사람이 죽었습니다. 두 사람은 혁명가들 (revolutionaries) 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세상이 바뀌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이 택한 방법은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이었고, 필요하다면 폭력과 파괴를 동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때로는 사람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죽었지만 그들이 원했던 세상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또 한 사람 같은 날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예수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십자가 위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는 명패가 아람어로, 라틴어로, 그리스어로 붙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도 죽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의미가 달랐습니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 들어 있는 죽음이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그의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그의 책에 기록했습니다. “나는 나의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 (몸 값)로 주려고 왔다 (I came to give my life as a ransom for many).” (마가복음 10:45) (여기서 "ransom"이라는 말은 "몸 값"이란 뜻입니다. 주님은 사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우리의 몸 값을 치루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박해를 피해 디아스포라 (diaspora)로 흩어져 살고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이렇게 격려의 편지를 썼습니다. “The ransom he paid was not mere gold or silver. It was the precious blood of Christ, the sinless, spotless Lamb of God (그가 지불한 몸 값은 금이나 은이 아니라 죄가 없으시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였습니다).” (베드로전서 1:18-19)

찬송가 254장 “내 주의 보혈은” 찬송가 가사 아시지요?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 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I hear Thy welcome voice/ That calls me, Lord to Thee/ For cleansing in Thy precious blood/ That flowed on Calvary/I am coming Lord/ Coming now to Thee/ Wash me, cleans me, in the blood/ That flowed on Calvary (나는 주님의 오라시는 환영의 음성을 듣습니다. 나를 주께로 부르시는 음성입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흐르는 주님의 보혈로 내 죄가 씻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 내가 주께로 갑니다. 지금 주께로 갑니다. 나를 씻어 주세요. 깨끗하게 씻어 주세요. 갈보리 십자가에서 흐르는 주님의 보혈로!) (제가 이 찬송가를 가장 인상 깊게 들은 것은 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목사에 대한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서였습니다. 그 후에 아무리 그 동영상을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대신 그 동영상을 간단하게 줄여서 만든 것을 찾았습니다. 영국 웨일즈의 하노버(Hanover United Reformed Church)에 있는 토마스 목사의 고향 교회가 배경으로 나오고요. 그 교회에서 Huw Priday라는 가수가 한국말로 이 찬송을 부릅니다. Treorchy Male Voice Choir의 합창이 뒤를 받쳐줍니다. 이어서 화면에 토마스 목사가 대동강 강변에서 순교 당하는 순교도의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때 토마스 목사의 나이가 27세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토마스 목사의 사진과 함께 "How could one man make a difference (어떻게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었을까)?" 이런 글귀가 뜹니다. 이 찬송의 제목 자체가 저에게는 인상 깊었습니다. "I hear Thy welcome voice (나는 주님의 오라시는 음성을 듣습니다)"라고 되어 있거든요. "토마스 목사는 틀림없이 주님의 welcome voice를 듣고 조선을 위해서 순교했을 거야!" 그런 생각이 드니까 그 찬송이 그렇게 은혜가 되는 겁니다. 그 유튜브는 http://www.youtube.com/watch?v=8Kd-BjBRZI4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다른 이유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 때문에! 니고데모와 요셉은 변화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사람들의 이목이 두렵고, 비난이 두려웠던 사람들이 변화되었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어떤 위험도 기꺼이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담대한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들의 변화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의 뒤를 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도시는 숨겨질 수 없다. 등불을 됫박 안에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놓는다. 그래야 등불이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마태복음 5:14-16)

빌라도에게서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요셉은 긴 베를 사 가지고 와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서 쌌습니다. 그리고 바위를 깎아서 만든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모셨습니다. 그런 다음, 무덤 입구를 커다란 돌을 굴려서 막았습니다. 이 무덤은 요셉 자신의 무덤이었다고 하지요 (마태복음 27:60)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처음부터 이 광경을 모두 지켜 보았습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서 니고데모는 가져간 향품을 예수님께 발라 드렸고, 요셉은 자기의 무덤에 예수님을 안장했습니다, 이젠 정말 모든 것이 끝이 난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왜 빌라도는 예수님의 시신을 요셉에게 내 주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만약 그 때 그가 요셉의 요청을 거절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랬더라면 아마도 기독교의 복음은 전혀 다른 스토리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분명히 죽으셨다는 백부장의 보고를 받고 관대하게 요셉의 요청을 받아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서 돌무덤에 안장되었습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그 때의 광경을 더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요셉은 긴 베를 사 가지고 와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서 쌌습니다. 그리고 바위를 깎아서 만든 무덤에 시신을 모셨습니다. 그런 다음, 무덤 입구를 커다란 돌을 굴려서 막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모신 곳을 보았습니다.” (마가복음 15:45-46)

그리고, 마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또 다른 이야기가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를 찾아 왔었다는 것입니다. “각하, 그 거짓말쟁이가 살아 있을 때 ‘내가 3일 뒤에 살아날 것이다’라고 한 말이 기억납니다. 3일째 되는 날까지 무덤을 잘 지켜야 합니다. 어쩌면 그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갈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살아났다'는 소문을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군인들을 시켜 무덤 입구를 잘 지켜야 합니다” 이런 요청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군인들을 보내서 무덤을 잘 지켰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7:62-66).

아무도 몰랐습니다. 바로 이것이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는 일들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리고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안장했고, 그 무덤 입구는 커다란 돌로 막았고, 군인들이 지켰습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을 때,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이 두 여자는 처음부터 일어난 일들을 모두 목격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이 두 여자가 예수님의 부활의 첫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훗날 바울은 이렇게 그의 편지에 썼습니다. “내가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I passed on to you what was most important and what had also been passed on to me).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과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과 그리고는 베드로에게 나타나시고, 그 후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그 후에 한번에 오백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고린도전서 15:3-6)

예수님의 죽음은 특별한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 예정된 죽음입니다. 세상을 바꾸고, 인류의 운명을 바꾼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갈보리 십자가에서 흘린 피는 단순한 피가 아닙니다.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씻어 주는 “보혈 (the precious blood)”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변화된 새로운 인간성 (humanity)의 시작이었고,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고,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 하는 복음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자리에 앉은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의 증인들입니다. “그분이 갈보리 십자가에서 흘린 피는 나를 위해서 흘린 피였습니다. 그 피의 공로로 나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삶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이 메시지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일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팬에서 제자로

김정호 목사

가난한 나라가 오히려 행복하다는 주장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매년 여러 기관에서 각 국가의 행복도를 재는 발표를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를 보면 항상 가난한 나라의 행복 지수가 부자나라보다 더 높게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그러한 조사 결과를 근거로 해서 돈은 행복과는 관계가 없다 또는 돈이 오히려 사람을 더 불행하게 만든다는 주장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저는 그런 부분에 대하여 더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난한 나라의 행복지수가 더 높게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를 나름대로 몇 가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종교적인 영향이 클 가능성이 있습니다. 종교는 인간에게 여러 가지 기능을 하지만 그 기능 중의 하나가 사람을 순화시키는 현세의 삶에 대해서 만족하도록 하는 기능을 상당히 하고 있습니다. 물론 종교에 따라서 그러한 내용은 차이가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가난한 나라가 종교적인 성향이 강한 나라인데 그 가난한 나라에서 믿는 주된 종교가 현세의 삶에 대해서 만족하고 체념을 하는 것을 계속 강조를 하고 그리고 내세, 다음 세상에서 보상을 받기 위해선 지금 만족하고 살아라 하는 내용을 자꾸 강조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지금 삶에 대해서 큰 불만을 갖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인간적인 삶이냐 그렇지 않은 삶이냐 하는 부분은 상당히 어떻게 보면 철학의 영역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 사회 사람들로 하여금 불만을 줄이는 그런 역할을 크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욕구, 기대욕구가 상당히 낮은 수준이라고 한다면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아도 사람들은 행복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 사회가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또는 사회 구성원들이 기대하는 삶의 수준이 세끼 식사를 해결하는 생존유지 정도의 생활수준이라면 크게 돈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1960~70년대에 세끼 밥만 해결할 수 있어도 너무 행복했던 시대였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겨울이 다가온다 싶으면 연탄 한 300장, 쌀과 보리쌀 한 가마씩 정도만 겨울을 준비할 수 있다면 너무 행복했던 것입니다. 저 뿐만 아니라 제 주변이 모두 마차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우리가 사회적으로 기대하는 어떤 그 경제적 욕구수준이 상당히 낮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행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혹시 이런 부분이 행복지수를 재는 부분에 있어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세 번째는 행복지수 자체가 조사 과정에서 상당히 왜곡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경제적 수준과 문맹수준은 상당히 비례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일수록 문맹률이 높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행복이라는 것은 상대적입니다. 절대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래서 옆에 친구보다 내가 좀 더 공부를 잘 한다, 아니면 좀 더 경제적인 능력을 더 갖추고 있다 할 때 우리는 더 행복을 느낀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나라에서 상당히 문맹률이 높은데 거기에서 만약 설문조사를 통해서 행복도를 조사한다 하면 어느 정도 글을 읽을 수 있는 식자층들을 주로 대상으로 해서 조사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식자층,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가지고 있는 행복도는 상당히 높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조사는 상당히 왜곡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에서 행복지수가 높게 나온다 하는 것은 혹시 어떤 종교적인 영향으로 인한 결과는 아닐까, 또는 사회적인 욕구수준이 낮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행복지수가 상당히 왜곡되어 조사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부분도 한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부분까지 생각할 때 돈이라는 것에 대해 좀 더 균형적인 감각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 행복이라는 것은 인간이란 존재가 무엇이냐부터 출발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하면 동물적인 속성과 신적 속성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동물적인 속성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육체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즉 감성을,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적이라는 속성은 이성을 지니고 있고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동물적인 속성과 신적인 속성을 동시에 충족시킬 때 인간은 행복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동물적인 속성, 육체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그런 물질적 또는 감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그런 부분들이 어느 정도 충족된 상태에서 바로 신적인 속성인 어떤 이성, 자기 생각, 자기 철학, 자기실현 이런 부분들이 더해질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 살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 니고데모의 변화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진정한 행복은 예수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임을 깨달아 이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의 팬이 아닌 제자로서의 행복한 삶을 누리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

 

요한복음 3장 2절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는 산헤드린 공회의 종교 지도자 72인 중 한 명이었습니다. 세상적인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니고데모가 왜 굳이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갔을까요? 예수님이 공공장소에서 가르침을 펴실 때 뵙기를 청하면 편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니고데모 정도의 인물이 나타나면 사람들이 알아서 예수님께로 안내 하였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 갔다고 하였습니다. 밤에 찾아가면 남들 눈에 띄지 않습니다. 야밤을 틈타면 다른 종교 지도자들의 거북한 질문을 피할 수 있습니다. 밤에는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보는 눈이 없을 때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면 삶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불이익의 위험 없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친구와 가족에게 굳이 알릴 까닭이 없습니다. 밤에 조용히 예수님을 만나 믿기만 하면 됩니다. 팬은 예수님을 믿을 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이런 저런 말을 듣기도 싫고 삶의 손해나 불이익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어느 초등학교의 3학년 이야기 시간에 한 장난꾸러기 어린이가 친구들 앞에서 ‘악어에게 쫓기는 거북이’ 이야기를 신나게 들려주었습니다. “악어가 거북이를 쫓아 왔어요. 느린 거북이는 힘을 다해 빨리 도망갔어요. 악어는 점점 가까이 쫓아 왔어요. 다급해진 거북이는 있는 힘을 다해 커다란 바위를 훌쩍 뛰어넘어 달아났어요.” 그러자 선생님이 끼어들었습니다. “애야, 거북이는 뛰어넘지 못한단다.” 선생님의 말에 아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합니다. “보통은 그렇죠. 하지만 지금 이 거북이는 살아남기 위해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어린 아이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내 힘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문제를 만납니다. 질병의 문제, 재정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등등. 이때 우리가 살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아무 자격도 없는 우리지만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은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허물 많고 문제를 많은 우리를 사랑으로 만나 주시고 손 내밀어 주십니다. 성탄은 주님께서 거북이 같은 우리를 만나려 오신 사건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만나러 찾아오셨습니다. 여러분의 ‘밤’을 뛰어 넘어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언제까지 숨어서 무엇도 손해 보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실 겁니까? 밤이 아니라 대낮과 같이 드러내 놓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 시대의 진정한 제자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예수님 편에 선 니고데모

 

요한복음 7장 51-52절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예수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자 종교 지도자들은 질투에 사로잡혔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입을 다물게 만들 구실을 찾기 위해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되었다고 말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역할 중 하나는 거짓 선지자들 색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짓 선지자로 고소할 빌미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음해하기 위해 공모하는 그 자리에 니고데모도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공회의 종교 지도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왔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변호해 줄까요? 그의 믿음이 행동으로 이어질까요? 예수님을 위해 공회원직을 걸 수 있을까요? 그는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변해 주길 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은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있지 않은가? 꼭 내가 어려운 때에 나서야 하고 내가 희생을 해야 하는가? 여러 생각과 갈등이 있었을 것이고 어디론가 숨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공개했을 때 치러야 할 대가를 생각하면 행동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결국 용기를 내어 예수님 편에 굳게 서서 옹호를 하였습니다. 니고데모는 비록 믿는 바를 과감하게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밥줄과 평판을 걸고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변호하였습니다. 더 이상 믿음을 속으로만 간직하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직장과 관계, 재정적인 미래가 위험에 빠질 줄 뻔히 알면서도 믿음의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니고데모는 단순한 팬의 길을 떠나 제자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산헤드린 총회의 다른 일원들은 니고데모를 향하여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니고데모를 무시하며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제자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매나헴 베긴 총리가 미국의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테이블에 있는 세 개의 전화를 발견했습니다. “이 전화기들은 각각 무엇에 쓰는 거요?” “흰색은 행정부로 통하는 것으로 주로 공무에 쓰고, 빨간색은 구소련과 직결되어 있는 비상전화이고, 황금색은 하나님과 통화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과의 통화료가 얼마요?” 레이건은 웃으면서 “만 달러요. 하나님과의 통화는 만 달러 가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얼마 후 레이건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베긴 총리의 집무실을 방문했습니다. 거기 역시 세 대의 전화가 있었는데, 레이건이 물었습니다. “이 전화기들은 어디에 쓰는 거요?” 그러자 베긴 총리는 대답했습니다. “흰색 전화는 국회 의사당하고 연결된 공무용이고, 빨간 것은 이집트하고 연결된 비상전화고, 노란 것은 하나님과 통화하는 것입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물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과의 통화료가 얼마요?” “15센트입니다.” “왜 그렇게 싼거요?” 베긴 총리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통화할 때 국내 통화료를 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반드시 대가를 지불합니다. 거저는 없습니다. 그래도 제자는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제자임을 드러내야 하고 어떤 값이라도 지불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섬기고 어떤 희생이 있어도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 편에 서는 니고데모와 같은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최상의 것을 드리는 니고데모

 

요한복음 19장 40-41절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식 준비가 한창입니다. 모두가 손을 놓고 있는 상황에서 니고데모는 발을 벗고 나섰습니다. 무엇도 두렵거나 아깝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공회일로, 체면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한 것이 후회될 뿐입니다. 대단하거나 엄청난 일을 하거나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닌데..... 허황된 것 때문에 마땅히 믿고 충성해야 할 일을 못 했다는 죄책감으로는 가득하였습니다.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옵니다. 몰약과 침향은 보통 비싼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단순히 돈 이상의 것을 드렸습니다. 자신으로서는 최상의 것을 드렸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버리거나 두려워 숨었을 때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향한 놀라운 사랑과 헌신을 드렸습니다. 어두운 밤에 말로만 표현 되었던 믿음이 전적으로 새로운 차원으로 성장했습니다. 니고데모는 더 이상 숨은 팬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제 제자로 거듭난 것입니다. 이것으로 니고데모에 관한 성경의 기록은 끝이 납니다. 하지만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1세기의 어느 날 순교했다고 합니다. 어둠 속에서만 예수님을 믿어 왔습니까? 이제 예수님은 여러분을 빛 가운데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당당히 드러내고서 예수님을 제자로서 따라야 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30대에 노르트담 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쳤고 39세의 나이에 예일 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49세의 나이에 학자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하버드 신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한 순간에 하버드를 떠나 캐나다 토론토의 정신지체 장애자 공동체인 데이브레이크로 가게 됩니다. 이는 어느 날 그가 만났던 한 정신박약의 남자를 만난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1996년 9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였는데 한 청년을 만남으로 인해 소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눈을 뜨게 되고 더 나아가 그 소명을 감당할 새 힘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갑작스런 변화에 놀란 사람들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올라가는 길만 추구하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잘해 칭찬을 받으며 자랐고 하버드의 교수가 되기까지 줄곧 올라가기만 했습니다. 오직 성공만을 위하여..... 하지만 사람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내리막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받는 삶에서 누군가를 위해, 예수님을 위해 가장 귀한 그것을 드려야 합니다. 팬은 취하지만 제자는 드리고 헌신합니다. 아낌없이 예수님을 위해 드립시다. 목숨까지 드립시다. 예수님께 드리는 것은 최고의 가치이며 영원한 가치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채우십니다. 이 시대의 니고데모와 같은 진정한 제자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밤에 찾아 온 니고데모가 예수님 편이 되고 자기의 최상의 것을 드리는 제자가 되었던 것처럼 더 이상 팬이 아니라 제자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두려워하며

신성종 목사

오늘은 38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두려움은 범죄한 인간의 본능입니다.

창 3:9-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을 향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9절)고 했을 때 아담은 숨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10절)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범죄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물론 그 두려움의 종류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38절에 보면 아리마대 요셉이 [두려워하여]라고 했는데 왜 두려워했을까요? 왜 그는 예수님의 비밀제자로 활동했을까요?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은 두려움 없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1. 두려움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움직이는 4가지 동기]가 있습니다. 이 4가지 동기 때문에 인간은 활동하고, 선행을 하고, 또 큰 업적을 남깁니다. 첫째는 두려움 때문에 활동하고, 둘째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활동합니다. 셋째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사랑이 있기 때문에 활동하고 선행을 행하고, 일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려움이 네 가지 중에서 순서상 첫 번째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문제는 두려움으로 인해서 얽히게 되고, 두려움으로 인해서 쾌락에 빠지고, 두려움으로 인해서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많은 일들을 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가 노후의 두려움이 없다면 저축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래의 불명예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선행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믿지도 않을 것이고, 기독교는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나쁜 의미의 두려움을 더 많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한번은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마차에 어떤 할머니가 태워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예, 저는 호열자라는 병인데 알렉산드리아로 빨리 가야 합니다. 물론 마부는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호열자라는 할머니는 세 사람만 죽일 테니 태워달라고 했습니다. 만약 더 죽인다면 자기를 죽이라고 칼까지 주었습니다. 마부는 세 사람이야 뭐 괜찮겠지 하고 태워주었습니다. 며칠 후에 알렉산드리아에는 수만 명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마부는 화가 났습니다. 마침 그 호열자라는 할머니가 마차를 타려고 나왔습니다. 마부는 화가 나서 칼로 그 할머니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왜 약속을 어긴 것이요? 그러자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약속대로 세 사람만 죽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호열자가 돈다는 말을 듣고 다 두려워 죽었습니다. 이 우화는 두려움 자체가 무섭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전쟁으로 죽은 미군은 30만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들과 남편을 일선에 보내고 염려와 불안과 근심으로 인해 심장병으로 죽은 미국인은 100만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2. 왜 인간은 두려워하는가?

 

(1)위험이 다가오고 있는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눅21:26절에 “사람들이 세상이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라고 했습니다. 이 두려움이 우리들에게 생기면 식은땀이 생기고, 얼굴이 창백해지고, 가슴이 뛰고, 침이 마르고, 머리털이 많이 빠지고, 숨이 가끔 멎게 되고, 몸이 떨리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2)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들이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큰 두려움이 있으면 세상에서의 작은 두려움은 살아집니다. 왜냐하면 큰 두려움은 작은 두려움을 잊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3)[아직 어리기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삿8:20절에 “이는 어려서 두려워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뱀에 놀란 사람은 새끼만 보아도 놀랍니다. 이것을 조건반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은 공포영화를 좋아합니다.

최근 광고 난을 보면 앞으로 상연될 [괴물]이란 영화가 벌써부터 난리입니다. 이 영화는 민노당 원인 봉 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입니다. 내용은 괴생물체가 한강에 나타나 여중생을 잡아가고 가족들이 딸을 구하기 위해서 사투를 벌이는 내용입니다.

미군이 버린 화학물질 포롬알데히드가 한강에 흘러들어가 돌연변이 괴생물체가 출연한다는 것인데 문제는 이 영화가 반미감정을 일으키려고 만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미군이 화학물질을 한강에 버렸다는 것이나 여중생을 잡아간다는 내용은 전에 일어난 여중생의 죽음을 다시 떠올리게 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반미감정을 갖게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서 미국 정부의 개입이 있다는 식의 내용은 영화를 정치문제화하고 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물론 제작자들이 관객을 많이 끌기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참 이상한 것은 공포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특히 여름철에 보려고 돈을 쓴다는 점입니다.

(4)하나님의 능력을 손을 보는 [영적인 눈이 어둡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왕하6:16).

도단에 있는 엘리사가 그의 하인, 게하시의 눈을 열어줄 때에 아람군대보다 하나님의 군대의 수가 더 많은 것을 보고 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천군천사가 우리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5)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적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갈 때에 파도가 일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그 때 주님은 말씀했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8:26)고 책망을 했습니다. 우리들도 믿음이 적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3. 두려움의 종류는 무엇이 있는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1)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출1:17)

첫째로 믿으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2)세상에 대한 두려움

둘째로 안 믿으면, 즉 의심과 불신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두렵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비밀제자로 있었던 것은 유대인들이 두렵고, 세상이 두렵기 때문이었습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도 세상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다 믿음이 작기 때문이었습니다.

(3)그러나 인간은 [죽음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그것이 죽음 후에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잊혀 지니 두렵고, 혼자서 서야 하기 때문에 두렵고, 지옥에 갈까보아 두렵고, 두고 가는 가족들이 어떻게 살까 걱정이 되어 두려운 것입니다.

 

4. 두려움을 극복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1)[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죄책감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속에 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은 양심이 지은 죄에 대해 지불하는 세금과도 같습니다.

(2)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을 [확신할 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출14:13).

다시 말하면 공포의 해독제는 믿음뿐입니다. 민14:9절에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말라”고 했습니다. 사41:10절에서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3)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을 때 두려움은 살아집니다.

시23: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믿습니까? 눅21:18절에서는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고 했으니 믿기만 하면 두려움은 살아집니다.

 

맺는 말

 

성경에 “두려워 말라”는 말이 365번 나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날마다 우리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확신을 가지고 기뻐하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두려움을 주께 맡기고, 확신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숨은 제자들

이종윤 목사

이름은 크리스챤인데 숨어서 믿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부귀영화를 쥐고 있는 이들로 산헤드린공회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놓고 예수를 믿지 못하고 숨어서 믿는 신자들이었습니다(요12:42-43). 오늘 숨어서 믿는 사람들, 또는 이름은 크리스챤인데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이들(Nominalists)이 과연 거듭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Ⅰ. 숨은 제자의 경고(Our Warming).

①신행일치(新行一致)가 안 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늘로부터 온 선생”(요3:2)이라고 했으나 밤에 남의 눈을 피해 찾아왔고, 십자가에 못 박힐 때는 침묵해야만 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막15:43), 선하고 의로운 사람, 예수님을 정죄한 이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않은 자(눅23:50-51)였으나 유대인이 두려워 예수님의 제자 됨을 숨겼습니다(요19:38).

②때를 놓친 사람입니다.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은 주님이 사역하실 때 아무 일도 하지 않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버림을 받았을 때 시체를 처리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많은 숨은 제자들이 주님을 위해 일할 때를 놓치곤 합니다.

③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합니다. 유대인을 두려워했던(요19:38).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주님을 믿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④많은 기독교국가의 백성들, 모태신앙인들,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이 지금도 순어서 주님을 믿고 있습니다.

⑤타종교의 도덕성과 야합한 혼합주의자들이 숨은 제자들입니다.

⑥세속화, 불순종하여 크리스챤으로 살기를 거부한 자들이 숨은 제자들입니다. ⑦교회문화와 신앙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들이 숨은 제자들입니다.

 

Ⅱ. 아리마대 요셉을 끌어낸 것은 무엇인가?

①십자가의 권능이 그를 끌어냈습니다. 그리스도의 기적, 설교, 가난과 희생, 거룩함으로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그를 공적 고백자로 끌어냈던 것입니다.

②그리스도의 놀라운 인내가 그를 끌어냈습니다.

③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기이함이 그를 끌어냈습니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23:47)고 고백한 백부장처럼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주님께 자신을 드렸습니다.

 

Ⅲ. 숨은 제자들이 일어날 때(Our arousing).

왜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요구했습니까?

①그리스도의 원수들이 멀리 갔기 때문입니다.

②그리스도의 제자들도 모두 도망갔기 때문입니다.

③부자요, 권세가인 그들이 그리스도의 시체를 장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은 우리가 일어날 차례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일어나야 합니다.

 

맺는말.

오늘 아리마대 요셉도 없고 빌라도도 없는데 나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①주님을 위해 개인적인 위험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②영광 받으실 주님께 공개적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성도라면 누구든지 숨어있지 말고 주님을 믿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고 하신 말씀에 불순종하지 말고 믿고 주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오늘 왕의 왕, 주의 주가 되신 그 분께만 살든지 죽든지 영원히 영광을 돌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큰 축복을 다 받고 누리시는 우리 서울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예수님의 장례

요한복음 19:38-42

십자가의 말씀이 누구에게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아들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바울은 이들을 두고 전자를 구원을 받는 사람으로 후자를 멸망하는 자들로 구분합니다(고전 1:18).

사람이 구원을 받느냐 멸망하느냐는 인간의 어떤 조간이나 자격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전하는 예수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놀라운 기적이나 표적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고 하신 말씀이나 메시아라고 하신 말씀이 무색할 정도로 약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무력하게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은 세상의 악의 정체를 폭로시킨 것입니다.

세상의 악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조차 자신의 힘의 수단으로 삼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힘을 얻기를 힘쓸 뿐입니다. 이들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가 있다면 다만 자신들의 죄를 속하여 천국으로 가게 해주는 속죄 기능의 의미만 있을 뿐입니다. 즉 속죄는 속죄대로 챙기고 세상 것은 세상 것대로 챙기려는 속셈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무리 그리스도를 입술로 고백한다고 해도 복음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자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 1:24).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이며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해 전적으로 무능력한 인간의 힘이나 자질을 보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 진다’는 이것이야 말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신자의 고백인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이며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무엇 하나도 우리의 열심과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본문은 죽으신 예수님을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장례를 치르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은 단순히 예수님의 장례에 대해 말씀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장례한 충성에 대해 말하고자 한 것도 아님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38절을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고 말합니다. 먼저 38절의 말씀에서 요셉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는데, 그는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던 사람입니다. 은휘라는 것은 드러내기를 꺼려하여 숨겼다는 뜻입니다. 요셉이 과연 무엇을 숨겼다는 것입니까?

마태복음에서도 요셉에 대해 말하는데 마태는 요셉을 예수의 제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요셉은 예수님을 믿으며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요셉이 드러내기를 꺼려하여 숨긴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요셉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드러내지를 못하고 숨겼을까요? 그것은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믿는 사실이 발각되면 자신의 신변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요한은 요셉에 대해 예수님의 제자라든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던 자라는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긴 사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에 예수님의 장례에는 요셉과 더불어 한 사람이 더 등장합니다. 그는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니고데모에 대해 “일찍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39절)고 말합니다. 예전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올 때 밤중에 몰래 찾은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그때도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으로서 자신이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밤중에 찾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점을 언급하면서 니고데모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체를 장례한 것을 말하면서 요한은 동일하게 요셉과 니고데모의 신앙의 연약한 모습을 언급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중심이 될 것입니다.

요한이 요셉이나 니고데모를 예수님에 대한 마음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한 자로 말하는 이유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과 연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이 이루어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셨기에 인간의 능력은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믿음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되어짐을 말씀하는 것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임을 생각해 보면, 요한이 요셉과 니고데모를 신앙에 연약한 자로 말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예수님을 장례합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흔히 요셉과 니고데모의 예수님에 대한 봉사를 말하기도 하지만, 요한은 이들의 봉사를 소개하려고 본문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당시 상황은 아주 험악한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벼르던 예수를 죽였습니다. 빌라도는 싫지만 억지로 예수님을 사형시켰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어떤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당당하게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니고데모는 백 근의 침향과 몰약을 가지고 옵니다. 백 근이면 약 33키로 쯤 되는 무게인데 이 정도의 양이면 몰래 숨겨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 역시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모든 유대인들 앞에서 드러내 보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전의 요셉이나 니고데모였다면 이러한 행동이 가능했겠습니까? 결국 지금의 요셉과 니고데모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예수님에 대한 마음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요한은 요셉과 니고데모의 연약한 신앙을 언급함으로써 그들의 뒤바뀐 모습을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의 실제 활동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십자가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요셉과 니고데모를 통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두려움으로 예수님에 대한 마음을 감추던 이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위해서는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으로 사람으로 바뀐 것이 이들의 노력이나 능력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십자가의 능력의 결과임을 요한은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알고 믿는 신자라면 무엇 하나도 ‘내 힘으로 했다’는 교만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행동과 신앙을 과시하는 외식과 거짓말을 행하지도 않습니다. 진심으로 ‘나는 무능력할 뿐이고, 만약 되어진 것이 있다면 전적으로 십자가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요한은 지금 우리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 세우고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무슨 능력이 있으며 무슨 힘이 있으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행한다면 못할 일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로 복음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장한 사탄의 말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시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과 지혜로 주신 것이지 우리의 일을 이루는 힘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믿음을 자신의 일을 이루기 위한 힘으로 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고 그러한 교회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보다는 기적과 표적으로 도우시는 다른 예수를 꿈꾸고 있을 뿐입니다.

신자란 그리스도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부터 쏟아지는 크나큰 은혜를 값없이 받아 누리며 다만 감사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받기 위해서 뭘 하겠다거나 받았으니 보답을 해야 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은 항상 신자는 주님 가신 길로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그 길에 순종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이 신자를 붙들어서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연약함에서 두려움이 없는 강한 신자로 서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스스로 강해지려고 애쓰려고 하기 보다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십자가의 능력은 여러분은 강하고 담대한 주의 백성으로 세상에 세울 것입니다.

 

 

 

 

보배로운 믿음의 사람

요한복음 19:38~42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시는 등 기적을 행하실 때에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붙잡히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되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훈련 받았던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중 대표라고 할 만큼 가장 적극적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강한 믿음을 가진 것처럼 언제나 큰 소리쳤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는 도망가 버렸습니다.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 나약하게 도망갔을까요? 그들의 믿음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아무리 잘 믿으려고 하고, 충성하려고 하고, 끝까지 주님을 위해 살려고 해도, 어려운 일을 당하면 무너져버립니다. 버티지 못합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붙잡히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스스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다른 제자들처럼 도망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핍박이 없는 곳으로 갈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박해가 있을 때에 참고 자리를 지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왜 피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박해하는 곳에서 허송세월하는 것보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곳, 복음을 기다리는 곳에 가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 받게 하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공산화되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기 시작했을 때, 끝까지 성전을 지킨 목회자들은 다 순교했습니다. 당시 남한에는 교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교회가 있다 해도 교회가 작았습니다. 그러나 북한에 있는 교회는 굉장했습니다. 수천 명의 성도가 모이는 교회가 북한에 있었습니다. 당시 성령 충만하고 믿음 좋은 성도들이 다 순교했다면, 복음이 쉽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당시 북한에서 예수님을 믿었던 분들 중에 남한으로 피난오신 분이 많습니다. 그분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핍박을 피해 남한으로 오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다녔던 교회에도 많은 분들이 피난 오셨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점점 커졌습니다. 예배당이 꽉 차서 교회 밖에 긴 나무의자를 놓고 예배드렸습니다. 북한에서 핍박을 피해 남한으로 피난 오신 성도들로 인해 남한에 있는 교회가 폭발적으로 부흥했습니다. 북한에서 오신 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남한으로 오며 죽음의 위기를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살려주시면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들 중에 남한에서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여 목회자가 된 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많아졌습니다. 교회가 부흥했습니다. 당시 부산에도 교회가 몇 개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부산에 교회가 많아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핍박을 피해 도망가는 것이 비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핍박하여 사도 바울을 죽이려 했을 때, 사도 바울의 제자들은 사도 바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내려 사도 바울을 피하게 했습니다.

붙잡히면 죽는 것이지만, 순교하는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을 많이 피해 다녔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제자가 생겼습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사도 바울이 죽었다면, 그것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교회가 생겼습니다.

사도행전 11장 19~21절에 보면,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한 것으로 인해 예루살렘교회가 큰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은 예루살렘에 있지 않고 다 흩어졌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는데,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 중 몇몇 사람은 안디옥에 가서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헬라인들은 복음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헬라인들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고, 안디옥교회는 점점 커졌습니다. 그리고 안디옥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은 환난으로 인해 도망갔지만, 단지 자신이 살기 위해 도망간 것이 아니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핍박을 피해 도망간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는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디를 가든 복음을 전했습니다.

안디옥에서는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헬라인들은 복음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고, 안디옥교회는 점점 커졌습니다.

이들이 ‘우리는 죽어도 예루살렘은 떠나지 않겠다’는 각오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면, 세계에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도 없는 동네가 아직도 많습니다.

평생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가서 전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 죽었다면, 누가 복음을 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복음을 전할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믿음이 약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 다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성령을 받고 난 후에는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 제자들이 도망간 것은 비겁해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잘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19장 38절에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는 속하지 않았지만,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예수의 제자’는 어떤 사람을 가리킬까요?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하고 믿는 사람,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마가복음 15장,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아리마대 요셉에 대해 기록되어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43절에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50~51절에 보면,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를 통해 아리마대 요셉이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로 결의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그들의 결의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다스리시는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 15절에 보면,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 옆에 있는 십자가에 못 박혔던 강도는 예수님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라고 말했습니다.

강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있는 동안 예수님께서 메시아시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장차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을 알았습니다.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고백한 것은 대단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아리마대 요셉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밤낮 세상에서 먹고사는 것만 신경 쓰고 세상을 걱정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의 나라가 이 땅이 임하기를 원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속히 임하기를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항상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리마대 요셉은 참으로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경건하게 살려면, 항상 ‘오늘이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저는 집회를 인도할 때에도, 설교할 때에도 ‘오늘이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적당히 하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합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은혜 받게 하려고 애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최선을 다해 최고로 잘 하려면, ‘오늘이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하고 해야 합니다.

만약 오늘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우리가 먹을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세상 일을 걱정하겠습니까. 가장 급한 것이 무엇입니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예수님 앞에 서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경건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숨겼습니다. 왜 숨겼을까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출교시키기로 결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드러내면, 아리마대 요셉은 출교당합니다. 완전히 쫓겨납니다. 그래서 아리마대 요셉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것을 나타내지 않고 숨겼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는 나라에서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숨기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중국에서 모택동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할 때에 그로 인해 교회가 다 문을 닫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교회와 크리스천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손에 들고 교회에 가는 사람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드러내어 예배드리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숨겼을 뿐,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지하 교회에서 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더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이로 인해 중국의 교회는 없어지지 않고, 박해받기 전보다 오히려 더 많아졌습니다.

숨어있는 성도라 해도, 거듭난 사람,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조용히 예배드리고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했습니다. 이로 인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 믿는 자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박해를 받자, 평소에는 전도하지 않던 사람이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등소평 시대에 기독교를 개방하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몇 배로 늘어났습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입니다.

지금 중국의 목회자들은 교회에서 생활비를 많이 받지 못하기 때문에 생활하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교에 가기 원하는 젊은이가 많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다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은 고생할 것을 각오하고 목회자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가려고 합니다. 중국 교회는 겉을 보면 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절대 약하지 않습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목회자가 넉넉하게 삽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신학교에 가는 사람이 적습니다.

한국에서도 신학생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되려는 사람도, 선교사가 되려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자유로우니 배가 불렀습니다.

북한에도 지하 교회가 있습니다. 지하에서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목숨 걸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보통 신앙이 아닙니다.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숨겨져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숨긴 채 신앙생활을 합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과 대결했습니다. 그리하여 바알의 선지자, 아세라의 선지자가 엉터리인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사신을 보내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왕상 19:2)”고 말했습니다.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엘리야는 겁이 났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불을 내리시는 것을 본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의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4)”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믿음 없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14)”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 사람이 7천 명이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1장 2~7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은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핍박을 받아도 우상 앞에 절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핍박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기게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깁니다.

요한계시록 17장 14절에 보면,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는 결론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붙어있으면 됩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 진실한 성도는 이깁니다. 예수님께서 이기시므로 예수님과 함께 덩달아 이깁니다. 그러므로 재앙이 있다 해도, 문제 되지 않습니다. 결론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 재앙이 내렸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었던 고센 땅에는 재앙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온 땅에 재앙을 내리셨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있었던 고센 땅은 구분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환난의 때입니다. 고난의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구분하시고 지키시고 책임지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라면, 진실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구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사람과 함께하시고 그를 보호하십니다. 기적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그곳에는 교회가 생기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주님의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여러분의 가정이 교회가 되고, 여러분이 사는 곳에 교회가 생기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해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으면, 믿음이 작습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순교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믿음이 충만해집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해집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것 같아도,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 사람은 믿음이 작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많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걱정합니다. 불안해합니다. 마음에 평강이 없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염려거리가 있어서 염려했는데, 언제부턴가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믿음이 건강해지고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뢸 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거리가 생기면 기도해야 합니다. 염려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염려거리만 생각하면, 염려가 더 커집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둘째, 목숨 걸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 급한 일, 큰 일이어서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에는 목숨 걸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각오로 금식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을 반드시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성령의 불을 받습니다. 문제가 반드시 해결됩니다. 이것을 경험하면, 믿음이 강해집니다.

 

셋째, 부르짖어야 합니다.

시편 50편 15절에 보면,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환난 날에 부르짖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환난에서 건져주셨다면,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저절로 영광 돌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환난이 오면, 기도로 환난을 해결하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을 건져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될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믿음이 약하여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사람들에게 숨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는 담대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런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본 후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과 두 강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는 일을 맡은 군사들을 지휘했던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에 일어난 일을 보고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의 옆에 있는 십자가에 못 박혔던 강도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십자가 위에서 알았습니다. 그래서 강도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라고 말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확신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을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메시아로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모두 대속해주셨음을 확신했습니다.

이것을 확신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대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며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한 소원과 꿈을 가지고 예수님을 위해 살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살다가 고난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과 후손을 위해 마련한 무덤을 예수님을 위해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출교 당할 것을 각오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이제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본문 요한복음 19장 39~41절에 보면,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받아 장례를 치를 때에 니고데모가 함께했습니다. 여기서 세마포와 향품은 귀족이나 왕이 죽었을 때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에 집도 땅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에는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에게 왕처럼 대접 받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되고 싶지 않습니까.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세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생각하기만 해도, 그런 마음을 가지기만 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역대하 6장 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진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 바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졌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좋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축복하셔서 금, 은, 보화를 쌓아놓을 수 없을 만큼 많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크게 생각하시고 많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감동 시킬 만한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졌습니다.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은 환난이 있어도 빛이 납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믿음으로 살아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이 평생의 축복이 될 줄 믿습니다. 지나가는 말로 듣지 않게 하시고, 마음에 새겨서 실천하게 도와주옵소서. 그리하여 날마다 기적을 보며 살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예수님의 장례식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

 

본문의 주제는 예수님의 장례식입니다. 이 말씀 안에 두 가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장례식을 거행한 두 인물입니다. 둘째는 예수님 장례식이 어떤 식으로 거행되었는지 하는 점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장례식을 거행한 두 인물입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입니다. 예수님의 장례식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오후 세시가 지나서 시신을 인도받아 해지기 전에 매장을 끝냈습니다.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집행할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더구나 사형당한 죄수를 장사지내 줄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사형수들의 시신을 까마귀 밥이 되게 내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형을 저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의 시신은 대개 저주받은 땅, 힌놈의 골짜기에 갖다 버렸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홀연히 등장하여 예수님을 모신 사람이 바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이란 뜻입니다. 아리마대는 구약 시대 사무엘의 고향인 에브라임 땅 라마다임입니다. 요셉은 부자였습니다. 또한 공회원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는 선한 사람으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입니다. 예수를 정죄하는 공회 결의에 가담치 않았고, 자신을 주님의 제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믿음을 숨기고 있었습니다.(마27:57-60, 막15:42-46, 눅23:50-53, 요19:38-42) 또 다른 인물은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에 대한 기록은 요한복음에만 나타납니다.

첫 번째 기록은 3:1-15에 나타납니다. 그는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두 번째 기록은 7:50-52절입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를 정죄하고자 할 때에, 함부로 정죄하지 말라고 경고함으로써 동료들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세 번째 장면은 바로 오늘 읽어드린 말씀입니다. 그는 아리마대 요셉을 도와서 장례식을 거행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들의 공개적 등장입니다. 요즘 사람들 말로 하면 coming out입니다. 뭔가 감췄던 것을 드러낼 때 커밍아웃을 했다고 합니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주님의 제자로서 은밀히 교제를 하고 있었지만, 예수 믿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고 숨기고 있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38)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이 신앙을 숨긴 이유는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박해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바로 그날 아침까지도 예루살렘에는 예수를 죽이라고 외쳐대는 사람들로 가득했었습니다. 그 증오심은 언제나 폭발할 수 있었습니다. 죽임을 당하지는 않을지라도 출교를 당하거나 심한 모욕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출교를 당한다면 유대 사회에서는 매장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기득권 상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요셉이나 니고데모는 예루살렘에서 몇 명 안 되는 고위층 人士들입니다. 많은 이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자였습니다. 신앙 문제로 말미암아 재산상의 손해를 당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신분도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공회원들입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사회적 신분을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한 순간에 잃게 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나타날 변화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엄청난 변화를 겪습니다. 내면적으로는 가치관의 변화를 겪습니다. 현세 중심에서 내세를 바라보게 됩니다. 돈 중심에서 생명 중심으로 바뀝니다. 육신에서 영혼으로,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변화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외형적인 삶에도 많은 변화가 옵니다. 취미가 달라집니다. 사람을 대하는 모습이 달라집니다. 언행이 달라집니다. 가정생활, 직장 생활, 사회생활, 모든 생활 태도가 달라져요. 이러한 변화를 남에게 드러낸다면 우리는 놀림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친한 친구들에게 이런 놀림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너도 신자가 됐느냐?” “너도 누군가 의지해야만 되는 약한 인간이 됐느냐?” 이런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나, 혹은 나의 변화를 남들이 아는 것이 싫어서 사람들은 자기 믿음을 숨기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숨어서 믿던 요셉과 니고데모가 갑자기 신앙을 노출시켰습니다. 그들은 빌라도에게 찾아가서 시신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38) 베드로도 요한도 감히 나서서 요구하지 못했던 것을 이들이 요구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박해도 두려워 않고, 모든 기득권을 잃어버리는 것도 두려워 않고, 자기에게 일어날 급격한 변화도 두려워 않았습니다. 갑자기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오!” 하고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변화가 나타났을까요?

갑자기 신앙을 공개한 이유가 뭘까요? 아마 그동안 예수님을 관찰하고 죽으시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결과일 겁니다. 그러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신앙의 눈을 떴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대낮에 온 세상이 캄캄해졌습니다.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찢어져서 지성소가 드러났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무덤들 가운데 상당수가 열려서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니고데모와 요셉도 이러한 현상들에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일찍이 니고데모는 한 밤중에 주님을 찾아 온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 니고데모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비록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유대 사회에서 성공적인 인물이었지만 천국에 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내세에 대한 확신 없는 삶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찾아 와서 정중히 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알아듣지 못할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3,5,13-15)

거듭난다는 말이 무엇인가? 하늘에서 내려온 자란 누구인가? 인자가 장대에 들린다는 말은 또 무슨 뜻인가? 모두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들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비로소 깨닫게 됐습니다. 예수가 구주이심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공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떤 박해나, 손해나, 변화가 일어날지라도, 예수를 믿어야 하겠다! 그 어느 손실도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을 잃는 것보다는 더 큰 손실이 될 수 없다! 확신이 섰습니다. 그들은 이제 주님을 위해서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시신이나마 정중히 장사지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장례식을 거행했습니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십자가 앞에서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 coming out 했습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십자가 앞에서 신앙 본색을 드러내야 합니다. 숨어서 믿는 신앙으로는 아무 변화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풍성한 축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숨어서 믿는 신앙으로는 남에게 유익을 줄 수도 없습니다. 남을 구원하지 못하고, 감화시키지 못합니다. 숨은 믿음으로는 하나님을 위해서 작은 일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신앙 본색을 드러내야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이 그 날입니다. 이제 숨은 신앙에서 공개된 신앙으로, 마음의 신앙에서 행동하는 신앙으로 나오세요.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누구든지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어떤 나약한 신자라도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강력한 믿음이 생깁니다. 고난 받으십니까? 십자가를 보세요. 실패하셨습니까? 십자가를 보세요. 무거운 짐이 있습니까? 십자가를 보세요! 거기에는 우리를 위해서 담대히 매달리신 주님이 계십니다.

죄가 무겁습니까? 십자가를 보세요! 주님이 우리의 죄를 지고 계십니다. 죽음이 두렵습니까? 십자가를 보세요. 거기에는 주님이 우리를 살리려고 매달려 계십니다. 십자가를 보세요!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만사를 해결하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영생도, 지혜도, 능력도, 사랑도, 소망도, 용기도, 결단도, 인내도, 관용도. 십자가를 바라보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신앙을 표출시켰던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공개된 신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장례의 중요성

 

이제, 예수님 장례 얘기를 해 봅시다. 우선, 주님의 장례식이 어떤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는지부터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장례 절차는 비록 간소했을지라도 장례식만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성을 가집니다.

첫째로, 죽음에 대한 최종 확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장사되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을 의심했을 겁니다. 시신의 모습은 처참했습니다. 가시관에 찔린 자국, 창에 찔려 파열된 심장, 흘러내린 핏자국, 못 박혀 찢어진 손과 발. 누가 보아도 살았다고 주장할 수 없는 주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신을 무덤에 장사하지 않는다면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게 아니라 기절했다가 깨어났다는 사람들이 상당 수 있습니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주님의 시신을 무덤에 넣고 무거운 돌을 굴려서 입구를 막았습니다. 유대인 당국자들은 시신을 도난당할까봐 무덤을 봉인하고 군병으로 지키게 했습니다. 평소 주님 말씀에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난다고 주장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장례로써 부활에 대한 의심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완전한 죽음,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둘째로, 무덤은 낮아지심의 종점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보좌에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주님의 지상 생애는 낮아짐의 연속입니다. 주님은 마구간에서 이생을 시작하셨습니다. 거기서부터 끝없이 낮아지기만 하셨습니다. 주님의 생애를 섬김의 생애라고 합니다. 주님은 끝없이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은 남에게 섬김을 제대로 받으신 적이 없습니다. 탄생 시에 천사들의 인도를 받고 찾아 와서 경배했던 동방 박사들이나 목자들, 그리고 일부의 선지자들 외에는 누구도 예수님께 합당한 경배들 한 사람이 없습니다.

주님은 종처럼 사셨습니다. 그것도 주로 비천한 사람들의 종입니다. 주로 병들고, 귀신들리고, 가난하고, 천대 받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셨습니다. 생애의 마지막에는 체포 구금당하고, 매 맞고 조롱당하는 수모까지 당하셨습니다. 잔인한 십자가형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가 종점이 아닙니다. 아직도 더 낮아져야만 되셨습니다. 그 종점이 바로 무덤입니다.

무덤은 예수님 비하의 종점입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인생의 맨 밑바닥입니다. 주님은 거기까지 내려가도록 준비되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예언한바 있습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사53:9)

주님의 죽음은 예수님 죽음에 대한 최종 확인입니다. 동시에 낮아지심의 종점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예언된 예수님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장례식 역시 예수님이 성경에 예언된 진정한 메시아였음을 입증합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셨습니다.(고전15:3)

 

예수님 장례식이 주는 교훈

 

첫째로, 육체의 소중한 가치입니다. 예수님의 장례식은 짧지만 정중하게 거행되었습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39-40)

주님의 장례는 존귀한 사람들에 의해서 거행됐습니다. 공회원 니고데모와 요셉의 손으로 장사되었습니다. 그들은 유대 사회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들이었고, 예수를 구주로 믿는 신자들이었습니다. 12제자들이 도망갔지만 예수님은 훌륭한 지도자의 손으로 장사가 되셨습니다. 주님은 가장 훌륭한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부자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입니다. 이 무덤은 자연석을 파서 만든 동굴식 무덤입니다.

당시에 이런 무덤은 매우 귀했습니다. 예루살렘 근방을 통틀어서 500개 미만이었다고 합니다. 인구 40만의 도시에 1000년의 역사를 지녔던 예루살렘입니다. 자연식의 무덤 자리는 대부분 채워졌습니다. 그래서 대개의 무덤은 벽돌을 쌓아서 만들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우리 주님은 동굴식의 좋은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더구나 무덤은 새 무덤이었습니다. 아무도 장사된 적이 없는 무덤입니다.

주님의 시신에는 깨끗한 수의와 향수가 사용되었습니다. 세마포로 쌌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시신에는 몰약과 침향을 섞은 향품이 100근이나 사용되었습니다. 향품은 존귀한 자의 장례식에 사용되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가말리엘의 장례식 때에 80파운드의 향품이 사용되었고, 헤롯 왕의 장례 때에는 향료를 운반하는 인부만도 50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향료를 주님의 시신에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장례식의 진정한 존귀성은 이러한 외적 조건보다는 장례를 거행한 사람들의 존경심에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며 존경하는 마음으로 장사를 지냈습니다.

만일 육체가 소중하지 않다면 그렇게 정중히 장례식을 거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티베트 사람들은 사람의 시신을 쪼개어 새 밥이 되게 합니다. 영혼이나 물질을 동일시하고, 윤회 사상을 믿기 때문입니다. 헬라인들은 영혼은 소중하고 물질은 저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도 시대 당시 어떤 이단자들은 예수님이 진짜 몸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 가짜 몸을 가지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잠시 육체를 빌렸지만 물질적인 몸은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경고했습니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 4:2-3)

육체는 소중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 육체와 영혼으로 지으셨습니다. 몸은 영혼을 담은 그릇입니다. 아주 소중합니다. 켤코 동물의 몸과 같은 등급으로 취급될 수 없습니다. 영생은 영혼만 영생하는 게 아니라, 육체도 영생 합니다. 우리 몸은 부활할 몸입니다. 소멸되어 사라지는 몸이 아닙니다. 새로운 몸으로 다시 되돌려 받을 몸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몸은 신령한 몸, 부패하지 않는 몸, 강한 몸, 영광스러운 몸입니다.(고전15:42-44) 이 몸을 소망 삼고 몸을 정중히 반납하는 것이 바로 장례식입니다.

 

둘째로, 주님은 임시로 매장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41-42)

남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돈으로 산 매장지가 아닙니다. 남의 무덤입니다. 주님은 생전에도 자기 거처를 가지지 않으시고 남의 거처에 거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히 살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돌아가신 후에도 자기 무덤을 차지하지 않으시고 남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영구한 무덤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사흘 후에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묘지 문제가 심각합니다. 죽는 사람은 많고 묻힐 땅은 없습니다. 이제 서울 사람들이 죽으면 묻힐 땅이 없어서 지방으로 내려갑니다. 세상에서 모든 땅은 수시로 용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덤의 용도만은 좀처럼 바뀌지 않습니다. 천 년이 지나도 무덤은 무덤입니다. 그러니 이 좁은 국토에서 4천만 명을 장구히 모셔둘 땅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무덤 문화는 너무 거창합니다. 상당 부분은 허례와 허식입니다. 산 사람도 거처가 없는데 죽은 사람 거처가 너무 큽니다.

우리가 죽어서 땅에 묻히는 것은 임시적인 일입니다. 영원히 묻힐 게 아닙니다. 우리는 다시 살아납니다. 소망을 가지고 묻어야 합니다. 주님은 죽으신지 사흘 만에 무덤 문을 열고 나오셨습니다. 주님은 부활의 첫 열매십니다. 이 세상에 죽었다가 영생의 몸으로 다시 사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은 우리처럼 죽어 땅에 묻히는 인생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예수 안에서 다 부활할 날이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11:25-26)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사도 바울은 온갖 박해 속에서도 부활을 인생 최대의 소망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 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 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1-58)

여러분, 무덤에 신경 쓰지 마세요! 연세 많으신 분들 특히 무덤에 신경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까짓 무덤이나 크게 차고 누워 있으면 뭣합니까? 잠시 누웠다가 주님이 오시면 다 털고 일어날 텐데, 무덤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우리 몸은 땅에 묻히면 곧 썩습니다. 불에 태워지든, 흙 속에서 썩어지든, 전쟁터에서 산화되든. 우리 몸은 수년 내로 없어집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무덤이 아닙니다. 다시 사는 신령한 몸입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가 부활할 때에 하나님께서 신령한 몸을 다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임시 거처인 무덤에 신경 쓰지 마세요. 오직 부활의 몸을 바라보며, 내가 가지고 있는 영생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죽는 것 두려워 마세요. 주님은 무덤에 사흘밖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무덤에 그리 오래 있지 않을 겁니다. 부활 소망으로 잠드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 예수님의 죽음의 증인

김준범목사

예수님의 숨은 제자, 아리마대 사람 요셉

 

아리마대 요셉은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40km 정도 떨어진 성읍인 아리마대 출신으로, 성경학자들은 그곳을 사무엘의 고향인 라마다임과 동일한 곳으로 생각합니다. 요셉은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이었고, 부자였고(마 27:57), 백성들로부터 존경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착하고 의로운 사람으로(눅 23:50),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던(막 15:43) 예수의 제자였습니다(38절). 요셉은 예수의 제자였지만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감추고 숨겼습니다(38절).

요셉은 자신을 예수님의 제자로 나타내는 것을 계속해서 뒤로 미루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내가 마음으로 믿으면 되는 것이고, 그것을 굳이 여러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요셉이 자신을 예수의 제자인 것을 공개적으로 밝히게 되면, 공회원으로서의 모든 특권도 빼앗기고, 백성들의 존경도 하루아침에 다 잃어버리게 될 것이 너무나도 분명했기 때문에, 자신이 예수의 제자인 것을 알리는 것이 너무나도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신이 예수의 제자인 것을 숨겼습니다. 예수님이 싫은 것도 절대로 아니었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예수님의 숨은 제자로 사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오늘도 아리마대 요셉의 이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빌라도를 찾아간 요셉

 

그런데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공회에 체포되신 것입니다. 이제까지 아리마대 요셉은 유대인으로서 구약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오실 메시아에 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니고데모와 같은 동료들의 증거를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해 알게 되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결박하고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안한 것입니다. 공회원이었던 요셉은 그들의 결정과 행동에 반대했지만(눅 23:51), 그것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그 몸이 다 찢어지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바로 이런 때에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였습니다. 보통 로마인들은 십자가 처형을 받은 죄수들을 십자가 위에 한동안 그대로 매달아 놓아 독수리의 밥이 되게 하거나 아니면 제대로 된 장례도 치르지 않고 공동묘지 안으로 던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되는 것을 지켜 볼 수 없었기에 빌라도에게 나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청구하였습니다. 요셉은 이러한 행위가 자신을 큰 위험과 곤경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무엇이 요셉으로 하여금 이런 큰 변화를 겪도록 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요셉은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요셉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셨던 말씀들을 들었고, 태양이 그 빛을 잃은 것을 보았으며, 예루살렘에서 죽은 자들이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갈라졌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요셉은 이런 일련의 일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비로소 더욱 밝히 깨닫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요셉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보다 예수님이 죽으신 뒤에,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지를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이 예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살아계실 때에, 주님을 섬기며 주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복스러운 기회가 다 지나갔다는 사실을 인하여 후회가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죽임 당하신 주님의 그 몸을 장사지내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주님을 위해 나서지 않던 그때, 바로 아리마대 요셉이 나선 것입니다. 우리들도 모두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아리마대 요셉과 같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예수님의 죽음이 얼마나 고귀한 죽음이었으며 얼마나 향기로운 십자가의 제사였는지를 증거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을 장사 지낸 아리마대 요셉

 

그래서 요셉은 니고데모와 함께 예수님의 죽음을 가장 장엄하고 아름답게 기념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아리마대 요셉은 모두 두려워서 아무도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어가려고 하지 않았을 때, 예수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리고 그를 정한 세마포로 감쌌습니다. 요셉과 함께 유대인의 관원이었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이나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장례를 함께 준비하였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세마포에 싸고는, 자신의 무덤으로 쓰려고 바위를 깎아서 만든 새 무덤에 예수님의 몸을 누이고 장사지냈습니다. 그 무덤은 본래 죄인인 요셉 자신이 들어가기 위해서 예비해 두었던 무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요셉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제자들을 대신하여 그 무덤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는 또한 그가 부자의 묘실에 장사될 것이라고 하신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성취하는 일이었습니다.

람들은 감히 아무도 예수님을 장사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모두가 꺼려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아리마대 요셉은 공회원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로부터 멸시와 비난과 위협과 온갖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사람들의 비난이나 박해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칭찬을 바라고 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이 일에 있어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그냥 주님을 위해서 한 것입니다. 요셉은 예수님께서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으시고(요 19:36; 출 12:46; 민 9:12; 시 34:20), 선지자들의 예언처럼 창에 허리를 찔리신 것(요 19:37; 슥 12:10)을 보면서, 바로 예수님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신 유월절 어린양, 곧 그리스도이셨음을 밝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이상, 그는 주님을 어떤 식으로든 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바로 이런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위한 예수님의 죽음을 인해서, 그냥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가장 첫 번째, 그리고 가장 확실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요셉은 죽임 당하신 예수님을 장사 지내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산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큰 명예요 주님을 위하여 살지 못한 삶은 우리에게 가장 큰 불명예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다가 당하는 모욕은 복된 모욕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다가 받는 불명예는 영광스러운 불명예라고 하였습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요셉과 니고데모의 모범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를 배워야 한다. 이 두 사람은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렸을 뿐만 아니라 담대하게 무덤으로 옮김으로써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해 보였다.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영광 가운데서 다스리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저버린다면, 우리의 그러한 나태함은 참으로 비열하고 수치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요한복음 주석, 734쪽).

우리는 감추어진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사는 삶을 보류해 두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도 그렇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기까지 하셨는데,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우리의 남은 때, 우리를 위하여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명예로운 주님의 제자들로 삽시다.

 

 

 

 

십자가의 목격자

김병선 목사

성경에는 요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러 명 나옵니다. 오늘 본문의 요셉을 비롯해 야곱의 아들 요셉(창 37:5),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남편 요셉(마 1:18∼25), 가룟 유다 대신 사도로 뽑힐 뻔했던 요셉(행 1:23), 사도들에게 바나바로 불린 요셉(행 4:36) 등입니다. 이들과 구분하기 위해 본문에 나타난 요셉은 그의 출신 지명을 따라 아리마대 요셉이라고 부릅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변화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아리마대 사람 요셉, 그는 누구입니까. 그는 존귀한 공회원이었습니다. 오늘날에 비유한다면 집권 여당의 중요 당직자 중 한 사람인 격입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경제적으로 재산을 많이 가진 부자이기도 했습니다. 성품은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적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정죄한 공회에 참석했지만 당시 공회의 결의와 행사에는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공회원들의 살벌한 태도를 목격해야 했습니다. 그는 사실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을 두려워해 자신이 제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습니다(요 19:38).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그 사실을 공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살기등등한 태도로 볼 때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가신 직후 빌라도 총독에게 당돌히 들어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정체성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이는 아리마대 요셉의 태도가 확실히 변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유력 인물이었기에 총독 관저를 직접 방문할 수 있었고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친히 예수님의 시신을 내려 가져갔습니다.

시신을 수습하는 일은 수하의 사람들을 시켜 처리할 수 있었음에도 직접 골고다로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렸습니다. 이는 작심하고 예수님 편에 서서 행동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세마포로 예수님의 시신을 쌌습니다. 그리고 새로 단장한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 지냈습니다(마 27:60).

무덤은 누구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 자신의 무덤으로 준비해 놓았던 것이었습니다. 무덤은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바위를 파서 조성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재정과 노력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덤은 규모가 커서 여러 사람이 들어가 시신이 놓인 자리를 볼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막 16:5, 눅 24:1∼3). 입구를 막았던 돌은 ‘심히 큰 것’이었습니다(막 16:4). 아리마대 요셉의 이런 행동은 당시 대제사장을 비롯해 다른 공회원들에게 자신이 예수님의 추종자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는 언제 이렇게 변한 것입니까.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상태로 있을 때 그의 태도가 변한 것입니다. 누가 죽은 자를 위해 자신의 지위와 재산, 안정된 삶의 기반을 포기할 결단을 하겠습니까. 생명의 위협까지 받을 수 있는 결단을 하겠습니까. 바로 십자가 사건 자체가 그의 태도를 바꾸게 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요셉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헌신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 은혜를 깨닫는 자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 사는 자로 변합니다(고후 5:15).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우리도 주님께 온전한 헌신을 드리는 성도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