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뜻 - yutopia diseutopia tteus

[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 즉 이상향(理想鄕)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utopia는 원래 영국의 사상가 토머스 모어(Thomas more)가 그의 저서 "유토피아(Utopia)"를 통해 제시한 상상의 섬의 이름이었습니다.

1. utopia의 의미

utopia는 토머스 모어가 그리스 어휘들을 조합해서 만들어 낸 말입니다.

즉, "장소"를 뜻하는 그리스어 명사 tópos(m., τόπος), "없다, 아니다"라는 부정(negative)의 의미를 가지는 관사 ou(οὐ), 그리고 "나라, 지역" 등을 나타낼 때 쓰는 접미사 -ia(-ια)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단어로 "세상에는 없는 장소(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2.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유토피아의 반대 개념인 디스토피아(dystopia)는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에 의해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이후 "독재자 등에 의해 지배되는 비인간적인 암울한 사회"를 의미하는 용어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dystopia는 "나쁜, 어려운" 등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그리스어 접두사 dys-(δυσ-)와 "장소"를 뜻하는 그리스어 명사 tópos(m., τόπος)가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한편, 그리스어 접두사 dys-(δυσ-)는 새로운 영어 단어를 만들어내는 자주 활용되는데, 한 가지 예로 dys-(δυσ-)에 "말하기, 단어"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 명사 lexis(f., λέξῐς)가 합쳐진 dislexia(난독증)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3. topic과 toponym

tópos(m., τόπος)에서 파생된 가장 대표적인 영어 단어로는 "주제"를 뜻하는 topic을 들 수 있습니다. topic은 tópos(m., τόπος)의 형용사형인 topikos(τοπῐκός)에서 비롯된 단어로 "(어떤) 장소와 관련된 것"이라는 관념에서부터 "주제"라는 의미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어떤 장소의 이름", 즉 "지명"이나 그 "지명의 어원"을 뜻하는 영어 단어 toponym(또는 toponymy)은 tópos(m., τόπος)와 "이름(name)"을 뜻하는 그리스어 명사 ὄνῠμᾰ(n., onuma)가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승효상 건축가/이로재 대표

이상향으로 번역되는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은 토마스 모어가 1516년에 지은 소설책의 제목이었다. 그는 그리스어에서 두 단어를 차용해서 만들었는데, 그 뜻이 이중적이다. TOPIA는 장소, 땅이라는 분명한 뜻을 가지는데 비해, U의 의미가 이중성을 띤다. ‘유’라고 발음되는 그리스어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eu, ou가 다 같이 ‘유’로 발음되지만, eu는 좋다라고 하는 뜻이며 ou는 아니라고 하는 뜻이니, e와 o를 빼고 그냥 ‘u-topia’라고 하면, 좋기는 좋은데 이 세상에 없는 곳이라는 것이 된다.

즉 상상할 수는 있지만 현실세계에서 존재할 수 없는 도시가 유토피아인 셈이다. 그 책 속에는 유토피아를 설명하는 그림이 있다. 그림 속의 유토피아는 위쪽에 그려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며, 이곳에 오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정해진 입구에 도달해야 한다. 한 통치자의 지배하에서 철저한 감시체계를 거쳐 안전을 담보 받는 세계가 유토피아의 모습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회에 대단한 영향을 준 이 책은 급기야 신도시의 중요한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이윽고 유토피아를 구현하기 위한 신도시들이 아프리카 북부에서 스칸디나비아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에 유행처럼 세워졌다. 그 신도시들의 평면은 하나같이 단일중심의 중앙집권적 구조로서, 내부의 안전을 보장하고자 둘레에는 높은 성벽을 쌓고 그 밖으로 해자를 깊게 파서 철저히 외부와 차단되는 통제적 도시였으며, 육지의 섬이었다.

르네상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유토피아의 꿈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현된 유토피아의 사회가 그야말로 이상향이었을까? 불행히도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범죄는 잘 계획된 도시에서 오히려 더욱 많아졌고 갈등과 대립은 전형적인 도시의 문제가 되었다.

우리의 땅에도 근대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안은 많은 신도시들이 유토피아를 꿈꾸며 세워졌으나 많은 도시문제를 양산한 바 있다. 신도시는 그렇다 쳐도, 더 큰 문제는 오랫동안 고유한 삶터를 일구어온 우리의 옛 도시에 불기 시작한 재개발이라는 사업이었다. 지난 수십 년간 서양의 도시이론을 흉내 낸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삶터가 유린당하고 만 것이다.

우리 옛 도시에 불현듯 등장한 아파트단지가 그 유토피아를 치졸하게 실현한 대표적 결과였다. 몇 채가 들어서든지 아파트 단지는 울타리를 치고 주변을 단절시켰으며 으레 몇 개의 출입구를 통해서 출입을 통제하고, 도시의 도로는 이 단지만 만나면 통과되지 못하고 둘러서 지나야 했다. 결국 도시의 섬이 되고만 아파트단지는 다른 섬들과 부동산가치를 놓고 늘 대립하며 사회의 갈등을 유발하는 적대적 공동체였다. 더구나 이 땅에 지어온 아파트는 사실상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이 야합한 결과였다. 그 분별없는 유토피아는 오로지 스스로 폐쇄함으로 고립된 부동산공동체일 뿐이었다.

유토피아에 반대되는 말이 있다. 지옥향 혹은 암흑향으로 번역되는 디스토피아(Dystopia)라는 단어다. 1932년 알더스 헉슬리가 쓴 ‘멋진 신세계’라는 소설이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나타난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는 철저히 통제된 사회가 바로 이 디스토피아다. 외부와 소통되지 않는 이 디스토피아의 세계 역시 애초에는 유토피아를 꿈꾼 사회였으니, 결국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와 같은 뜻이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똑같이 폐쇄적 공동체인 까닭이다.

얼마 전 서울에서 무상급식에 관한 투표가 있던 날, 서울의 최상류층이 산다는 어느 고층아파트 단지에서 투표참관인조차 출입을 거부당한 일이 발생했다. 외부인이라는 이유에서다. 사회의 통념과 법규마저 무시하는 폐쇄적 공동체가 벌인 희극이었다. 이 공동체의 미래는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무엇이든, 폐쇄공동체를 지향하는 한 그 결과는 비극일 게다.

    • 가나다라마바사
    • 가나다라마바사
    • 가나다라마바사
    • 가나다라마바사
    • 가나다라마바사
    • 가나다라마바사

저작권자 © 제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유토피아 & 디스토피아

Utopia & Dystopia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가 있어.”

1980년대에 크게 유행했던 <! 대한민국>이라는 노래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경쾌한 멜로디와 아기자기한 노랫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 불렀고, 국가대항 운동 경기 같은 데서는 응원가로도 자주 쓰였다. 그러나 당시는 서슬 퍼런 군사독재의 시절, 그 노래가 그렇게 큰 인기를 끈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 노랫말에 나오는 대한민국이 현실의 대한민국과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시대의 대한민국에서 실제로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은 사람은 아주 드물었으니까. 현실이 어려울수록 꿈은 더욱 아름다워지게 마련이다. 모어(Sir Thomas More, 1478~1535)가 유토피아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16세기의 영국도 바로 그랬다.

유토피아(Utopia)는 원래 ou(‘없다는 뜻의 그리스어) + topos(‘장소’) + -ia(‘나라’)를 합쳐서 만든 말로서,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같은 발음으로 멋진(eu) (topos)’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이나 재너두(Xanadu)가 그렇듯이 정말 멋진 곳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걸까?

모어의 시대에 영국은 수많은 농민들이 절대주의 정치와 중상주의 경제에 시달리는 상황이었다. 영주들은 모직 산업의 원료인 양털을 얻기 위해 농토를 목장으로 형질 변경하고 농민들을 쫓아냈다. 모어는 유토피아에 등장하는 히틀로다에우스의 입을 빌려 이렇게 풍자한다.

보통 양들은 온순하고 또 값싸게 기를 수 있는 가축인데, 요즘은 양들이 아주 사나워져서 사람들까지 먹어치운다는군요.”

현실이 암울할수록 모어가 꿈꾸는 유토피아는 더욱 달콤하다. 우선 유토피아에는 지주가 없다. 모든 땅에는 경작자만 있을 뿐 임자가 없으므로 농민들은 마음 놓고 땅을 경작한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이다. 모든 국민들은 신분, 성별, 빈부의 차이가 없고 누구나 농업에 종사한다. 일하지 않으면서 놀고 먹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누구나 부지런히 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짐승처럼 일밖에 모르지는 않는다. 남보다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돈이나 땅을 모을 수는 없고, 또 모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토피아의 국민들은 오전과 오후에 세 시간씩 하루 여섯 시간만 열심히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지적 추구에 열중하거나 자신의 취미를 즐긴다. 물론 적당한 오락 시간도 거의 의무처럼 주어진다.

모어는 500년 전에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어딘가 낯익은 느낌이다. 바로 공산주의 사회의 이념이 그렇지 않은가? 적어도 이념으로 보는 공산주의사회는 인류 사회의 가장 높은 단계로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전인적인 생활을 즐긴다. 자본주의사회는 능력만큼 일하고 일한 만큼 소득을 얻는, 좋게 말하면 자유 경쟁이고, 나쁘게 말하면 비인간적인 사회이지만,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소득을 얻는다.

구호와 이념은 훌륭했지만 20세기의 공산주의 실험은 경제적 생산력을 높이지 못하고 정치가 관료제화함으로써 결국 실패로 끝났다. 히틀로다에우스는 유토피아를 이루기 위해서는 모두가 일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섯 시간의 노동이면 필수품과 안락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생산하는 데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가를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중략)

다른 나라들에서는 성직자들이 너무 많고 또 대개 게으름뱅이들이죠. 게다가 부자들, 귀족이라 부르는 지주들, 여기에 빈둥거리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시종들, 마지막으로 온갖 핑계를 대며 놀고먹는 거지들이 있죠. 이런 걸 생각하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생산해내는 사람들의 수가 상상 외로 적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모어의 해법은 바로 평등에 있었다. 사회 내에 아무도 놀고 먹는 사람이 없이 누구나 똑같이 일한다면 이상적인 사회를 이루는 데 필요한 경제적 생산력을 충분히 이뤄낼 수 있으리라는 게 모어의 생각이었다. 만약 20세기의 공산주의 국가들이 모어가 말하는 것과 같은 완전한 평등 사회를 실현했다면 그들의 실험은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유토피아를 실현하지 못했고, 오히려 현실과 유토피아의 거리감만 더욱 벌려놓았다. 유토피아는 이제 상상 속에서조차 버려야 하는 걸까? 그래서 20세기의 과학소설가들은 유토피아와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는 디스토피아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20세기 초는 세계적으로 러시아혁명, 경제공황, 파시즘, 두 차례의 세계대전 등 극심한 혼란이 잇달았다. 이런 배경에서 디스토피아는 이 참담한 현실이 암울한 미래로 이어지는 과정을 묘사하는 개념으로 탄생했다. 하지만 그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은 현대 사회의 자랑거리인 과학 문명이었다. 19세기까지 인간은 과학 문명이 인간의 궁극적인 해방을 가져다주리라는 낙관 무드에 젖어 있었으나 이제는 첨단의 기술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노예화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싹텄다.

현대 사회의 토양에서 생겨나 과학소설의 기름으로 자랐기 때문에 디스토피아의 개념20세기에 들어 영향력 있는 매체로 떠오른 영화의 단골 소재로 이용된다. 미래를 다룬 SF 영화들은 대부분 디스토피아적 분위기로 미래 사회를 암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인용

목차

Toplist

최신 우편물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