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최우성의 동화경제사
(12) <성냥팔이 소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가 출간된 1845년은 감자마름병이라는 대재앙이 유럽을 휩쓸어 곳곳에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늘어나던 때다. 도시의 가난한 집안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성냥팔이 소녀>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작품으로 꾸준히 재탄생했다. 위키피디아
“성냥 사세요! 성냥 사세요!”한 해의 마지막날.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한 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소녀가 추위에 떨며 성냥을 팔았다. 집집마다 창틈으로 환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해어진 옷을 걸쳐 입은 소녀는 애원하듯 지나가는 마차를 향해 다가섰다. 하지만 마차는 쏜살같이 지나쳤고 소녀는 길바닥에 넘어져 신발이 벗겨지고 말았다. 건너편에 있던 작은 사내아이가 냉큼 뛰어와 소녀의 신발을 낚아챘다. “아이, 추워.” 소녀는 맨발을 동동 구르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계속 성냥을 내밀었다. 아무도 가엾은 소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너무 추워 안되겠어.” 모퉁이에 웅크린 소녀는 성냥 한 개비에 불을 붙였다. 크고 멋진 방이 눈앞에 꿈처럼 펼쳐졌다. 방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식탁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거위 요리가 올려져 있었다. 다시 한번 불을 붙였을 때, 아름다운 색깔의 촛불로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가 소녀 앞에 등장했다. “와, 정말 아름다워라.” 그 순간만큼은 추위도 배고픔도 소녀의 삶에 달라붙은 운명이 아닌 듯했다.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냥의 형태는 1844년 스웨덴의 화학자 구스타프 에리크 파슈가 ‘안전성냥’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것을 계기로 등장했다. 사진은 경북 의성의 한 성냥공장에서 성냥개비에 자동으로 유황을 묻히고 건조시키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무엇보다도, 가난을 바라보는 시각과 ‘빈민구제’ 패러다임부터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과거 전통사회에서 가난은 게으름 탓이라기보다는 자연재해 등 외적 요인에 의한 피치 못할 결과라는 의식이 외려 강했고, 빈민구제 역시 교구를 중심으로 한 지역공동체의 당연한 책무로 받아들여졌다. 산업화는 모든 걸 뿌리째 흔들어놓았다. 1834년 영국에서 제정된 ‘신구빈법’은 이런 변화를 더욱 부추겼다. 영국 최초의 빈민구제 행정체계를 확립했다고 할 이 법은 그간 교구가 누렸던 자치권을 없애고 전국적으로 빈민을 동일하게 대우하도록 하는, ‘복지의 중앙집권화’를 의미했다. 빈민이라고 하더라도 노동능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엄격하게 나눈 뒤, 노동능력이 있는 빈민에겐 작업장 강제입소 등 노동 의무를 부과하는 조처가 뼈대였다. 이제 가난은 오롯이 자신의 잘못이자 책임일 뿐이라고, 세상은 가르쳤다.평생 150편 이상 동화 남긴 안데르센어린시절 가난·외로움 작품에 새겨
<성냥팔이 소녀> 출간된 1845년
감자마름병 대재앙 유럽대륙 휩쓸어인체에 치명적인 당시 성냥 제조공정
여공 파업으로 대중적 관심 끌기도
세계시장 75% 장악한 ‘성냥왕’ 크뤼게르
대공황 때 ‘피라미드 사기’ 드러나 몰락<성냥팔이 소녀>에서 헐벗고 굶주린 소녀의 손에 들린 ‘상품’. 이쯤에서 화제를 성냥으로 돌려보자. 당시만 해도 성냥은 모든 가정이 반드시 챙겨야 할 생활필수품이었다. 현대적 성냥이 처음 등장한 건 19세기 초. 백린(白燐)이란 물질이 쉽게 불이 붙는 속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이 발견한 이후 이를 제품화하려는 노력이 결실을 본 것이다. 1826년엔 마찰열을 이용해 불을 붙이는 ‘마찰성냥’이 발명됐다. 하지만 초기 성냥은 늘 골칫거리였다. 작은 마찰력에도 불이 너무 쉽게 붙는 탓에 안전사고가 도처에서 끊이지 않았다. 이 와중에 스웨덴의 화학자 구스타프 에리크 파슈는 1844년 ‘안전성냥’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는데, 바로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형태의 성냥이다. 특히 안전성냥은 인체에 해로운 백린 대신 적린을 사용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원래 백린 성냥은 제조과정에서 독가스를 내뿜는데다 피부에도 심각한 손상을 입히는 등 인체에 치명적인 위험을 지닌 것이었다. 이 때문에 대부분 10대 여공들이었던 성냥공장 노동자들이 건강을 해치는 산업재해가 비일비재했다. 1840~50년대 영국 내 성냥공장의 안전 실태를 다룬 근로감독 보고서가 숱하게 나온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19세기 후반까지도 백린 성냥은 유럽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를 증명하는 대표적 사례가 1888년 런던의 성냥공장 ‘브라이언트 메이’ 여공들의 파업이다. 10대 여공들은 하루 14시간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턱없이 낮은 급여를 받았다. 이들을 특히 분노하게 만든 건 백린 사용으로 인해 ‘인산 괴사’의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된 작업 환경. 언론 보도로 공장 실태가 세상에 알려지자 경영진은 정보를 외부에 흘린 노동자들을 해고했고, 노동자들은 곧장 파업으로 맞섰다. 이 사건은 조지 버나드 쇼, 시드니 웹 등 저명한 페이비언협회 회원들이 파업 지지 활동에 나서면서 대중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고, 결국 런던 노동위원회가 개입해 근무환경 개선의 성과를 거둠으로써 마무리됐다.
현대적인 성냥이 처음 등장한 건 19세기 초로, 백린이란 물질이 쉽게 불이 붙는 속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이 발견한 이후 이를 제품화하려는 노력이 결실을 봤다. 위키피디아
1929년 기준 세계 3위의 부호누군가는 거리에서 성냥을 팔았고, 또 누군가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 성냥을 만들었지만, 성냥으로 엄청난 부를 거머쥔 사람도 있다. ‘성냥왕’이라 불리는 스웨덴의 이바르 크뤼게르가 그 주인공이다. 스웨덴의 성냥산업은 1844년 안전성냥의 발명과 함께 시작됐다. 이듬해인 1845년 요한과 칼 형제는 남부도시 옌셰핑에 스웨덴 최초의 성냥공장을 세웠다. 목재와 광물자원이 풍부한 이 일대는 유럽 전체를 놓고 봐도 성냥 생산의 최적지로 꼽혔다. 스웨덴이 자랑하는 안전성냥은 곧 대표 수출품목이 됐고, 스웨덴 전역엔 150여 개 공장이 속속 들어섰다. 그중엔 크뤼게르의 아버지가 세운 공장도 있었다.‘성냥공장집 아들’ 크뤼게르는 스무살이 되던 1900년 단돈 100달러를 손에 쥐고 뉴욕으로 건너갔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뒤엔 미국과 멕시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오가며 부와 명성을 차곡차곡 쌓았다. 건축업으로 어느 정도 재산을 모은 크뤼게르는 고향으로 돌아와 중소 성냥업체들을 공격적으로 인수·합병하며 스웨덴 성냥산업 평정에 나섰다. 그 결실이 1917년 탄생한 스웨덴성냥주식회사(STAB)다. 원재료(자원)와 목재, 기계, 인쇄 등 관련 분야를 모두 아우르는 수직 계열화도 완성됐다.크뤼게르의 장사 수완은 그 무렵부터 날개를 달았다. 때는 1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 각국은 복구를 위한 자금난에 시달렸다. 크뤼게르는 각국 정부에 선심 쓰듯 돈을 꿔주며 그 대가로 그 나라의 성냥 생산·판매 독점권을 꿰찼다. 프랑스·폴란드·그리스·독일·유고슬라비아·헝가리·루마니아·터키·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 멀리 라틴아메리카 대륙에도 손길이 닿았다. 크뤼게르의 ‘영토’는 단숨에 세계 성냥시장의 75%까지 확대됐다. 크뤼게르의 걸음은 좀체 멈추지 않았다. 제지, 금광 채굴뿐 아니라 철도·은행·언론·영화 등 문어발식 무한확장은 계속됐고, 그는 1929년 기준 세계 3위 부호로 꼽혔다.19세기 영국 런던의 성냥공장 여공들의 모습. 대부분 10대인 여공들은 인체에 치명적인 작업환경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위키피디아
몰락의 시간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사실 그의 쾌속행진엔 한가지 비밀이 숨어 있었다. 미국 금융시장에서 넘쳐나는 투자금을 끌어다가 여러 나라 정부에 빌려주는 자금 중개 노릇을 하면서 투자자들에겐 수익률 25%라는 미끼를 던진 것. 그가 세운 투자회사 ‘인터내셔널 매치 코퍼레이션’(IMCO)은 고수익 약속을 철석같이 믿은 투자자들이 몰려든 탓에 7년 새 시가총액이 1100% 폭등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세계 성냥시장을 한손에 쥐었다 치더라도 수익률이 고작 8% 남짓한 마당에, 25%(계약)와 8%(현실)의 간극을 메우는 방법은 사실상 ‘피라미드 사기’뿐이었다. 대공황 여파로 곤경에 처한 크뤼게르가 자회사 에릭손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피라미드 사기극은 만천하에 드러났다. 급기야 크뤼게르는 1932년 3월 프랑스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됐고, 경찰은 자살로 결론지었다.현실의 구원 대신 종교적 구원?한겨레와 친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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