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레게 음악 - hangug lege eum-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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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나는 내 동료 거지킹과 함께 '밥 말리'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레게 음악'의 역사를 알게 된 것은 바로 그 영화에서였다. 과거 백인들의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아프리카인들의 유일한 낙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노래로 표현하는 것이었는데, '레게'란, 바로 그 때 태어난 음악 장르였던 것이다.

레게의 가사는 저항적인 면이 있지만, 그 멜로디 라인은 굉장히 흥에 겹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밥 말리'가 있었다. 이 영화 끝자락에서 아프리카를 서로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던 백인들을 밥 말리가 서로 악수하게끔 하는 장면은 아주 인상깊었고 나에게 긴 여운을 남겼다. 왜냐하면 바로 그 장면을 봄으로써 내 삶의 방향성이 잡혔기 때문이다.

레게의 유래는 이 정도만 소개하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봐야겠다. 오늘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한국 레게 음악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윈디시티'와 '스컬'이라는 두 아티스트를 보고 느낀 것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윈디시티와 스컬이라는 두 아티스트는 레게 음악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그 색깔은 많이 다르다. 마치 뿌리는 같지만 자라난 환경이 다르다는 느낌이랄까? 스컬이 정통파라면 윈디시티는 사파에 가깝다. 스컬이 치고박는 타이슨과 같다면 윈디시티는 치고 빠지는 알리와 닮았다. 스컬이 어미잃은 사자와 같다면 윈디시티는 온 동네를 누비는 자메이칸 강아지와 같은 느낌이다.

사실, 스컬이 하하와 손잡고 미니앨범을 냈을 때는 개인적으로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그 안의 내용물은 잘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상업적으로 대중에게 다가가면 스컬 자신의 음악이 갖는 정체성이 흔들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되면 스컬의 음악성에 혼란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컬. 얼마나 멋진 이름인가. 나는 스컬이라는 브랜드가 훼손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하와의 그 미니앨범이 스컬 자신에게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

한편, 내 동료 거지킹과 함께 찾아간 한 행사에서 나는 윈디시티를 직접 만나볼 수 있었다. 윈디시티는 내 예상보다 훨씬 신나고 내공이 느껴지는 그룹이었다. 특히 그들의 가사와 즉흥적인 말솜씨가 아주 일품이었는데, 그 단어선택들이 괜히 청국장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흥에 겨울 때는 '얼싸'를 외치고, 도시라고 하기보다는 마을이라는 표현을 쓰며, 페스티벌이라고 하기보다는 잔치라는 표현을 쓰는 그들의 표현방식은 진정 코리안 레게였다.

그리고 우리는 윈디시티의 '김반장'을 따로 만나기도 했는데, 그의 이미지는 영락없는 개구쟁이였다. 호주머니에서 쌀과자를 꺼내 먹는 모습은 친숙하게 느껴졌고,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은 아마도 나와 비슷하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스컬은 역동적이다. 포효하는 그의 울부짖음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반면 윈디시티는 느긋하다. 그들의 춤사위는 나 또한 덩실덩실 춤추게 한다. 이렇게 뚜렷한 둘의 색깔은 어찌보면 빠르게 돌아가는 현재의 음악시장과는 동떨어져 있는 듯이 느껴지기도 한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오늘날의 음악시장에서 새로운 장르가 들어갈 틈이 좁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개성적으로 대비되는 두 아티스트들이 있기에 음악계가 조금이나마 다양성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뚜렷한 정체성을 가진 두 명의 아티스트들을 보며, 언젠가 나 또한 음악계에 그들 못지 않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는 가수가 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다.

지은이 : 리가 [노래를 부르며 떠나다]

레게(Reggae)는 1960년대 후반 자메이카에서 만들어진 음악 장르다. 1970년대에 밥 말리라는 불세출의 슈퍼스타가 나타나면서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국내 대표적인 레게 뮤지션 쿤타는 레게라는 장르가 대중에게 그저 느슨한 파티 음악 혹은 신나는 영상의 배경음악 정도로 쓰이던 10여 년 전부터 본격 레게 음악을 해왔다. 원래 레게는 가난한 자메이카 사람들이 갖는 사회에 대한 관심과 종교에 대한 믿음을 다루었다. 그가 만드는 레게 곡 역시 한국 사회에 대한 통찰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레게는 우리가 흔히 아는 평화롭고 나른한 스타일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의 레게는 종종 록 음악보다 강렬하다. 올해 초 EBS 음악 프로그램 〈스페이스 공감〉에서 선보인 무대에서 그는 여전히 야수처럼 으르렁댔고 폭발적인 무대매너로 노래했다. 2007년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힙합 싱글 부문을 수상한 쿤타는 2006년 ‘쿤타 앤 뉴올리언스’로 데뷔해 현재 레게 밴드 ‘루드 페이퍼’의 보컬이자 솔로 뮤지션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직 그를 모르는 독자들에게 꼭 한번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특별한 재능을 지닌 뮤지션이다.

ⓒGazjonesphoto10여 년 전부터 본격 레게 음악을 해온 쿤타는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음악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몇 년 전 레게의 본고장 자메이카에 가서 그곳의 레게 뮤지션들과 연주하는 기회를 가졌다고 들었다.

처음에는 우리를 비롯한 동양인을 무시하는 분위기가 많았다. 밥 말리 밴드의 기타리스트였던 얼 스미스를 우여곡절 끝에 만났는데 그도 처음에는 우리를 받아주지 않았다. 동양에서 왔다고 하니 그냥 인사만 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더라. 그래서 연주자들에게 “좋다, 당신의 음악을 아무거나 내게 들려달라. 그럼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보여주겠다” 해서 즉흥으로 그들의 연주에 맞춰 내가 랩과 노래를 했다. 그랬더니 “이 친구는 우리가 아는 동양인하고는 달라. 마치 우리처럼 해”라고 말하더라. 그는 결국 나를 밥 말리의 생전 녹음실인 터프 공 스튜디오로 데려가서 같이 녹음까지 하게 되었다.

자메이카의 레게는 우리가 알고 있는 레게와 어떻게 다른가?

자메이카에 가보니 우리에게 익숙한 레게는 마치 한국의 트로트 같은 음악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자메이카에서 레게의 주류는 ‘댄스홀’ 이라고 불리는 강력한 비트의 거친 음악이다. 이것은 현대의 힙합 음악의 주류 중 하나인 ‘트랩’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아는 평화의 레게도 있지만 현재의 주류 레게는 엄청 긴장도 높은 에너지로 무대를 거의 막 ‘부수는’ 상태까지 가고 있다. 내가 한국에서 원래 하던 음악이 자메이카의 현재 뮤지션들이 하는 방식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경험은 내가 하고 있는 현재의 음악에 대해 뭔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녹음되는 오디오 음원보다 특히 라이브 공연을 더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레게의 핵심은 공연이라고 생각한다. 자메이카 현지에서 본 레게는 거의 살풀이하듯 쓰러지기 직전까지 달리는 느낌이었다. 그 점이 내 스타일과 비슷하다. 나는 음악에서 가장 솔직한 게 귀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어떤 음악을 할 거냐고 물으면 나는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음악이요’라고 말한다. 아직 부족한 면이 많지만 내가 만드는 작품에서는 내가 바로 신이라는 생각으로 음악을 한다. 하느님이 인간을 만들 때 자신이 보기 좋아서 인간을 만들었다고 했듯이 나는 내가 듣기에 좋아서 음악을 만든다. 라이브를 할 때 내 마음이 바로 그렇다.

한때 록 마니아이기도 했고 힙합과 랩에서도 탁월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면에 끌려서 레게 뮤지션이 되었나?

레게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레코드점에서 일하던 이름도 모르는 형 덕분이다. 나는 처음에 밥 말리가 밥 딜런인 줄 알았다(웃음). 친구들이 ‘노 우먼 노 크라이(No Woman No Cry)’를 부르는 걸 듣고 밥 딜런 노래를 다 뒤졌는데 그런 노래가 없었다. 그러다 음반 가게에 가서 노래 제목을 대니 밥 말리라고 하더라. 그렇게 밥 말리를 알게 되었다(웃음). 물론 다른 장르도 굉장히 좋아하는데 레게는 그냥 내게 (머뭇머뭇하며) 제일 쉬운 음악이다. 너무 잘 맞는 옷이랄까.

‘루츠맨(Rootsman)’이라는 노래의 가사를 보면 ‘최고의 작품은 샤넬과 롤렉스야’라고 했다.

좀 뜬금없는 얘기지만, 나는 우리나라가 1945년 이후 거의 모든 친일파가 처벌받지 않고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하며 부를 축적해온 이래 우리는 진정한 광복을 한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 불완전한 역사 속에서 우리 사회는 진정한 가치를 찾을 기회를 자꾸 놓쳤다. 결국 오로지 돈의 가치만 추구하는 사회가 되었고 그건 예술 분야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위아래로 나뉘어서 예술가들이 죽든 말든 관심이 없다. 내가 예술가로 인정받으려면 내가 이번에 몇 억원을 벌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너 이번에 몇 억 벌었어? 너 몇 억짜리야? 이런 질문이 얼마나 좋은 예술이냐의 기준이 되었다. 돈이 예술인 나라에서 최고의 예술품은 샤넬과 롤렉스인 것이다. 이 사회는 예술가와 청춘들에게 너무나 희망이 없다. 나는 매일 아침 희망을 가지고 잠에서 깬다. 희망이라는 게 없으면 더 못 버틸 것 같아서다. 지금은 스컬(쿤타와 더불어 대표적인 국내 레게 뮤지션) 형이랑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학원을 하고 있다. 아이들이 수업 끝나고 내게 “형 만난 거 진짜 행운이에요”라고 말할 때 정말 좋다. ‘좋아요’ 숫자에는 하나도 관심 없다. 나를 레게의 왕이니 뭐니 영웅시하길 원치 않는다. 나는 그저 술 같은 존재이고 싶다. 그냥 공연 보고 “저 자식 재미있네” “잘 즐겼어” 하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인터뷰를 위해 쿤타를 만난 날 그는 손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물으니 그는 전날 한 방송국의 공개방송 녹화 현장에서 부상한 후배 뮤지션의 응급처치를 돕다 손가락을 다쳤다고 했다. 하마터면 손톱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동생이 무사해 다행이라며 겸연쩍은 듯 웃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그가 만드는 음악과 닮았다고 느껴졌다. 그의 음악은 머리로 계획을 짜서 만들지 않고 직관적으로 몸이 반응하는 대로 그저 써내려간 것이다. 인터뷰 당일 그는 내게 얼마 전에 만들었다는 미발표 곡을 들려주었다. ‘게토(Ghetto)’라는 가제가 붙은 곡인데 그는 “밥 말리도 파퀴아오도 테레사 수녀도 마틴 루서도 모두 게토(빈민가)에서 살았어. 비록 그곳이 누추한 곳이라도 좋은 꿈만 꾸길 기도해. 가난은 널 괴롭힐 수 있지만 너를 망칠 수는 없지. 가난은 너를 완성시키는 것”이라고 노래했다. 내가 그의 곡 중 좋아하는 ‘꿈이라도 좋아’만큼이나 진심을 담아 쓴, 마음을 움직이는 멋진 곡이었다. 그는 조만간 이 곡을 무료 공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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